먹고살 만한 일을, 그리고 한 잔의 커피와 낭만적인 음악을 즐길 여유만 있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할 땐 그런 가상한 생각이 찾아든다. 그러나 ‘평온’은 흔전만전하기는커녕 희귀종에 가깝다. 위태로운 곡예를 연상시키는 게 생활이지 않던가. 광장시장의 빈대떡처럼 수시로 뒤집어지는 게 일상이다. 이 난리법석을 피해 흔히 주점을 찾아 소주병을 쓰러뜨린다. 그게 용한 대책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미술관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이라 썼지만 정확하게는 충전을 위한 행차, 또는 옹골찬 감성여행이다.
미술관은 창고에서 태동했다. 과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창고에 쟁이길 즐겼다. 이 저장공간은 개인전시실로 진화했으며 뮤지엄(museum)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 자체가 뮤지엄이었다. 이후 절대왕정의 붕괴와 산업혁명으로 상층부가 몰락하면서 뮤지엄은 시민사회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엄한 권위를 칭칭 두른 왕궁 루브르가 대중적인 뮤지엄으로 전환된 게 또렷한 사례다. 뮤지엄은 원래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미술관의 유전자도 뮤지엄에서 유래했다.
정신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미술관이 없는 공공사회를 생각해봤는가. 그런 게 없더라도 지구는 돌고 인간의 삶은 무사히 흘러가겠지만, 미감을 누릴 성좌 하나가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이란 우리의 둔한 정신을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이지 않던가.
삶은 일쑤 속되고 진부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사람의 감성을 슬쩍 흔들어 잠시나마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카오스로 미만한 세상에서도 미술관을 찾는 발길은 더욱 늘고 있다.
미술작품이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고 믿는 애호가들의 향유 욕구. 이에 부응한 미술관의 진화와 변신은 이미 하나의 추세가 됐다.
이제 미술관은 미술품을 소장하고서 그저 작품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듯 바지런히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외공간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은 물론, 자못 우아한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도맡고자 하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예전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부대공간의 비율은 9대 1이었지만 요즘은 1대 2로 역전됐다는 게 아닌가. 도서관, 체험관, 교육장, 카페, 식당, 아트숍 등을 설치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건축 자체를 예술적으로 기발하게 디자인하고 있으며, 정원 조성에도 공을 들인다. 도시의 안통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미술관도 많다. 이른바 전원형 미술관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만큼 매력적인 호객 매체가 다시 있겠는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
나는 지금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시 엑스포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와 있다. 경주시에 열린 첫 공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76)이 평생토록 그린 작품 83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에 착수, 2015년에 개관했다.
기부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산의 화통한 쾌척은 의표를 찌른다. 어차피 작품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생으로 떠날 방법은 없는 법. 그간에 신세진 세상에게 돌려주는 게 순리라 여겼으리라.
솔거미술관은 전형적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야트막한 야산이 푸근하게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거머쥔 미술관이다. 토함산 슬하의 막내둥이에 속할 야산의 이름은 대덕산. 1921년, 당시 남한 땅에 생존했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산 갈피에서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하니 애석하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의 모든 ‘마지막’은 애잔한 기분을 일으킨다.
미술관 뒤편 산 아래엔 자그마한 자연호수 아평지(阿平池)가 있다. 옷을 훌훌 벗고 늘어선 호숫가의 겨울나무들이 물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그림이라 눈길이 한참 거기에 머문다.
초록빛 수면을 노니는 물오리들은 오늘도 기쁜가. 생동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또는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미술관을 산자락 호숫가에 들어앉힌 게 아니겠는가.
‘빈자의 미학’ 스민 건축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나를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로 살겠다”고도 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삶과 건축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인간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봐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집다운 집은 어떤 것인가. 그가 말하는 요점은 ‘가짐보다 쓰임을, 더함보다 나눔을,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해 지은 집’을 짓고 사는 게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데 있다.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솔거미술관을 보면 그의 건축적 지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초목들을 곁에 둔 미술관의 외관은 들썩이는 구석 없이 수굿하다. 건축과 자연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없는 말을 두런거리나? 숲은 묵연하고 미술관은 겸손해 불화 없이 조응한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운 벽과 벽 사이엔 나무쪽을 켜켜이 채워 콘크리트의 투박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나무도 콘크리트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티끌과 이끼가 틈서리마다 배어 세월이 흐를수록 음영이 짙어지겠지. 마침내 잘 늙은 집으로 변모할 게다. 깊은 운치를 풍기며 미술관의 역사를 웅변할 게다.
미술관 내부 역시 승효상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회랑엔 계단과 함께 슬그머니 휘어지는 경사로를 조성해 물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했다.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흥미마저 자아낸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년층 관람객을 위한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전시공간마다 적절히 배분된 자연광과 인공광. 싱그럽게 자란 대나무와 열린 허공으로 흐르는 구름이 보이는 중정(中庭). 차경(借景, 외부 자연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기)을 위해 제3전시관의 벽을 뚫어낸 통유리 프레임의 이채. 전시작품이라는 주체를 효과적으로 북돋우는 객체들의 조합과 질서가 정교하다. 전시관의 천장이 매우 높은 건 미술관의 방장에 해당할 소산 선생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고려한 방책이다.
관람 인원 해마다 급증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이미 두둥실 떠올랐다. 인기 작렬! 솔거미술관 말이다. 개관 5년 차 신생 미술관이지만 관람 인원이 해마다 급증했다. 어느 하루는 자그마치 2000여 명이 관람했단다.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관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라니 통쾌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거미술관의 매력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동거하는 미덕, 그리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는 강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매혹은 소산 선생의 작품이 뿜는 아우라. 전시관 벽에 걸린 선생의 수묵화 앞에 선 심취한 표정들을 보라. 거무튀튀한 건 먹빛이요, 허연 건 화선지 맨살이구나, 그저 그리 여겨 심드렁히 스쳐 지날 것만 같은 젊은 관람자들이 눈을 끔벅이며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본다. 와우! 그런 찬탄을 터뜨리며.
전시장에 가득한 소산의 수묵화들은 실로 압권이다. 자유자재한 작풍으로 먹의 향연을 펼쳤다. 바위를 후벼낼 듯 거침없는 운필로 산수를 그리고 화조(花鳥)를 찍어냈다. 10m 너비의 대작을 예사롭게 그려내는 괴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거장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서양화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 게 한국화다. 수묵화단의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다. 서양화의 진격에 맥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소산이라는 거목이 떠억 버티어 현실을 일갈하고도 남을 수작들을 그려냈다.
미술관을 나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장쾌한 수묵 세례를 받아서겠지, 마음 기슭에 밝은 달덩이 하나 떠오르는 이 기분은.
솔거미술관 탄생시킨 소산 박대성 화백
“나에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소산 선생 말하길, 예닐곱 살 때부터 붓을 노리개 삼았더란다. 집안 제사 때면 펼쳐지는 사군자 병풍, 그걸 보고 그림이라는 걸 끼적이기 시작한 게 외골수 화업(畫業) 인생의 싹눈이었다. 마냥 붓질을 놀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들일을 해야 했으니까. 뒷산에 뛰어올라 땔감을 져 나르거나, 똥장군 짊어지는 일도 소싯적의 다반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일찌감치 양친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머니는 병으로, 아버지는 끔찍한 변고로 타계했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아버지를 반동 지주로 몰아 낫으로 살해했다니 참혹하다. 당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던 그의 몸에도 낫날이 들어와 팔 하나를 앗아갔다. 현재 소산의 왼팔은 의수다.
어린아이 때부터 겪었을 시련과 캄캄한 고독을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붓을 내던지지 않았다. 외팔로 삶에 가담해 밥을 벌기엔 그나마 지필묵이 상책이라 본 친척 어른들의 독려 덕이기도 했다.
“몸에 핸디캡이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었지. 그러나 불편한 조건들이 결과적으로 내겐 복이었어요. 부족함과 불편함이 오히려 행운이었던 거요. 나를 무쇠처럼 담금질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예전 작업실엔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불편이 차라리 길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불편을 통해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수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도 불편과의 동행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걸 당호로 다짐했던 셈이다. 이 ‘불편의 사제’의 붓놀림은 성정처럼 쾌활해 일필휘지에 능란하다. 깊고 아득한 먹색이 내려앉으면 그윽한 산경이 화폭에 아롱진다. 분출하는 화산의 기세로 묵을 써 화선지를 한바탕 희롱하고 나면, 거기에 웅장한 대자연이 꿈틀거린다. 정밀한 필선의 운용에 물이 올라 극사실화로도 이미 극치에 이르렀다. 서예는 또 어떻고? 김생과 추사를 진즉에 섭렵한 소산의 서(書)는 빼어나, 듣느니 늘 명필 소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생태계는 다중변주로 비옥하다.
“동양의 필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완벽한가. 소필, 중필, 대필로 구분되는 필(筆)을 좌우사방, 맘대로 돌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서양화 붓은 이게 안 되거든. 우리의 필은 자유로워 걸림이 없지. 대 그림자가 물에 스치듯 평화롭단 말여.”
830점의 작품을 기증한 이후 소산은 고향의 외진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작품량은 더 늘어났고, 대작을 그리는 습(習)도 깊어졌다.
“내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은 창작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으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추사를 때려잡겠다!”
“하하핫! 선문(禪門)에 전해오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추사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인데 감히 넘볼 수 있을까. 그러나 추사는 했는데, 나는 못한다? 그럴 리가. 내가 필묵을 닦기를 추사 못지않을 만큼은 하고 있소.”
소산에게 추사는 서화의 이상적 아이콘을 상회하는 존재다. 그는 선지식으로서의 추사를 타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궁벽한 서해안의 한촌(閑村)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소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도 이곳을 다녀간 후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적었다. 장터 옆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길이라 왕복 3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신작로 주변의 야트막한 산에도 소나무가 지천이었다. 운동장 서편에는 노송 한 그루가 푸른 잎과 검붉은 보굿(껍질)을 자랑하며 개교 68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를 지키고 있다. 뒷동산도 솔밭이라 때론 그 그늘 아래 낮잠을 자며 쉬기도 했다.
송화가 만발하는 5월 무렵 꽃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목에 오래 남았다. 새순으로 빚은 송순주(松筍酒)의 솔 향도 그만이다. 살아서 수백 년, 베어져서도 궁궐이나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로 또 수백 년을 버텨내니 나무 ‘목(木)’에 어른 ‘공(公)’을 붙여 예찬할 만하다.
소나무 화가로 첫손을 꼽는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 1945~) 화백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를 헤쳐 온 예술인이다. 해방둥이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3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한국전쟁 직전 한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잃는다. 빨치산에게 ‘반동 지주’로 찍혀 칼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당시 등에 업혀 있던 박 화백도 왼팔을 잘렸다. 그의 애절한 삶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팔만으로만 살아온 신산한 일상에서도 “제사 때 둘러친 병풍의 그림과 글씨를 따라 그리는 것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예닐곱 살 때, 새들이 와서 부딪쳤다는 신라의 황룡사 벽 ‘노송도’를 그린 천재 화가 ‘솔거’ 이야기를 교사였던 형에게서 듣고 화가의 꿈을 다졌다. 신체의 불구를 야유하던 철없는 학우들 틈에서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였다. 20대 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화백과 서예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석도륜(昔度輪, 1923~)을 찾아가 잠시 지도를 받았고 독학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엔 국전 8회 입선, 1980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대상 수상은 그의 작품이 종래의 화풍을 파격적으로 벗어난 독창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실경(實景)의 맥을 이으면서도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같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열과 성을 다해 그리고 또 그렸다. 1990년대에는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미국 뉴욕에서 1년여를 보냈다. 그때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 서양이라는 뚱딴지부터 찾았구나” 하며 깨달았다. 귀국 즉시 경주 불국사를 찾아 그곳에서 1년 동안 사찰생활을 했다. 1995년에는 경주 삼릉(三陵) 지역으로 하향한다. 어쩌면 유년기에 가졌던 아련한 ‘솔거’의 꿈을 성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박 화백은 회화 435점, 서예 182점, 벼루·먹·붓 213점 등 도합 800여 점을 경주시에 기증, 2015년 8월 경주시 엑스포공원 내 아평지 인근 연못가에 우뚝한 ‘솔거미술관’을 개관했다. 문기(文氣) 어린 그의 작품 중에서도 용(龍)의 형상을 닮은 노송도(老松圖)는 가히 압권이다. 이 그림[사진1] ‘송풍라월도(松風蘿月圖)’는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나무에 감긴 담쟁이덩굴이 달빛 아래 흔들리는 아취(雅趣)를 갈필로 단숨에 붓 놀린 작품이다. 성긴 여백에 달빛 가득한 정경이 솔잎 사이로 고즈넉하다.
우리 부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홍소안(洪小岸, 1958~) 화가를 찾았을 때 그는 화실 바닥에 엎드려 붓질을 하고 있었다. 200호가 넘는 화폭 위로는 노송 두 그루가 용 비늘 같은 두꺼운 껍질과 부딪고 있었다. “제 고향 전남 곡성에 있는 소나무를 현장에서 일주일 스케치한 뒤 옮겨 그리고 있어요.” 화실 창 너머로 인왕산 등성이와 좁은 길 사이로 소나무가 나란히 보였다. 여기저기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도 모두 소나무뿐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해 인왕산을 매일 산책하며 소나무를 깊게 만났지요.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큰 소나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현장에서 며칠씩 머물며 그렸지요.” 그는 화폭의 질감을 돋보이게 하려고, 흰 광목에 흰 물감을 발라 말린 뒤 손으로 비벼 구긴 다음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다시 뒤집어 색을 입히는 배체법(背彩法)을 활용했다.
홍소안이 개발하다시피 한 이런 화면의 구성은 소나무의 음영과 굽은 가지, 솔잎의 입체적인 표현에 아주 적합하다는 평을 받게 되면서 소나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했다. 일찍이 한국화로 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의 결실을 거둔 것도 오로지 독학으로 이룬 성과였다. 화선지를 사용하며 익힌 선염(渲染)의 묘를 광목에 아크릴 물감으로 실현해보기를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뤄낸 1998년 ‘한국의 소나무 전(展)’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획을 그어주는 전기가 되었다. 그를 수차례 만나 보니 실경(實景)의 “소나무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며 자신이 속한 시공(時空)을 기록하고, 언제나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직하고 고집스런 꼿꼿함은 그의 성정과 매우 닮아 있다”는 평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인왕산 소나무’[사진2]는 그의 화실에서 떼어온 작품이다. 인왕산 기슭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를 광목 위에 옮긴 그의 대표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화실을 찾아간 고마움에 다섯 달 분납하도록 편의’를 주어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걸고 매일 바라보며 소나무의 정령(精靈)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중에 으뜸인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범접하기 어려운 신령함이 있다. 그런 소나무를 즐겨 그리다 보면 곧 소나무의 고상한 기(氣)가 화폭에 젖어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맑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