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 가운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대표 인물로 꼽아봤다. 그들은 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통법
“여기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넘어 신세계백화점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졌죠. 지금도 장례식 때의 장관을 잊지 못합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이자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를 담당한 허영엽 신부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 5일간 명동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기간 동안 방문한 추모객은 약 40만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허 신부는 “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추기경님의 존재감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허영엽 신부. 신학대 학생 시절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한 그는 김 추기경과 처음 만났는데, 당시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학생인데도 편안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홍보팀에 있으면서 김 추기경과의 만남이 종종 있었지만, 같은 성당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얘기하는 대표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되며, 대표적으로 1987년 6·10 항쟁이 언급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피신을 위해 명동대성당에 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품어줬다.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김 추기경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추기경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했다.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달동네를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연민이 많고 늘 베푸시는 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선종 당시 김 추기경의 통장에는 1000만 원 정도의 잔액밖에 없었다. 그 돈마저도 신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왜 어른으로 통했을까. 허영엽 신부는 ‘소통법’이 답이라고 봤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대화의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을 느끼셨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에게 그동안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값진 선물이다. 허 신부는 “크리스마스 때 신부, 수녀 등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셨는데,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한 내용이 담겼다”면서 본받고 싶은 인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무엇이 됐든,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상대방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그 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으면 바꾸기도 한다. 생각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영엽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대 갈등이 악화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5060세대와 2030세대 간 갈등 요인을 묻는 질문에 ‘소통이나 세대 이해의 부족’(36.0%)이 1위를 차지했다. 나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 아닐까요? 추기경님께서는 선종을 앞두고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큰어른이었던 추기경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집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요.”
◇이어령 장관의 감수성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문학관’. ‘영인’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붙였다. 이곳에서는 이어령 장관의 문화적 업적과 철학을 되새길 수 있다. 현재도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시간이 갈수록 선생이 더 그리워진다. 60여 년을 늘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기에 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강인숙 관장은 동갑내기 남편을 ‘이어령 선생’이라고 불렀다. 남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관장은 “한눈 팔지 않고 원하는 길만 걸어간 선생의 용기를 존경한다”면서 “그와 함께하면서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정직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삶에서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가장으로서도 어른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강 관장은 “선생은 평생 직장 두 곳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고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도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답했다.
문학인부터 문화부 장관까지 직업도 다양했던 이 장관은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따른다는 그는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장관이 즐기면서 일하는 시간이 쌓이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의 글과 말, 즉 생각에서 배움을 얻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 선생은 팬이 많았다.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서 “팬은 정신적인 면에서 친지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유에 대해 강인숙 관장은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지식, 미래를 투시하는 안목, 독보적인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 이 장관은 고독했던 것 같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저)을 보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척을 할 뿐이라면서, 모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질문자의 삶을 산 이어령 장관은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고 고백했다. 또한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이어령 장관은 존경받았으나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까. 강인숙 관장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얼마 전에 이 선생의 2주기였어요. 어느 회사의 회장인 제자가 큰 꽃을 집에 보내왔어요. 당시 저밖에 없어서 꽃을 방까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죠. 연세가 많은 기사분이 꽃을 나르다가 선생의 사진을 보더니 짐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애독자였다’면서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꽃 보내는 사람과 꽃 배달하는 사람 모두 진심으로 선생을 사랑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지금도 선생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제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 선생은 잘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라고 하지만, 이 남자의 손주 사랑은 꽤 유별나다. 여름에는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를 준비해 손주들과 강원도 농막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겨울에는 산타 할아버지로 변신해 아이들 앞에 깜짝 선물을 들고 찾아온다. 그 모든 기록은 그의 블로그에 빼곡히 담겨 있다. 조용경(70)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의 이야기다. ‘워커홀릭’ 인생 2막을 매듭짓고, ‘손주홀릭’으로 노년을 지내고 있는 조 전 부회장의 특별한 손주 사랑법을 들여다봤다.
“축하해주세요. 제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 전 부회장의 블로그 중 ‘손자바보의 육아일기’ 카테고리에 게시된 첫 글이다. 글 안에는 그의 첫 손주 현우의 신생아 적 사진이 담겨 있다. 첫 글부터 1년 단위로 나뉘어 있는 폴더를 눌러보면 늘어나는 숫자만큼 쑥쑥 자라난 손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남이 봐도 대견한데, 할아버지 눈에는 오죽 사랑스러울까. 손주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지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표정은 싱글벙글하다.
“손주들이 태어나고 나니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어요. 인생이 달라지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 저는 6·25 전쟁통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의어떤 기록도 남아 있는 게 없어요. 그냥 백일 사진, 돌 사진 한두 장 정도가 다예요. 그게 참 안타까워서 우리 손주들은 태어나서부터 성장할 때까지의 기록을 남겨줘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블로그를 시작했죠.”
손주는 절친한 벗이자 스승
손주들을 위한 기록을 남긴 지 어느덧 11년째. 그 사이 고사리 같은 손발로 기어 다니던 두 손주는 친구들과 노는 데 푹 빠질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할아버지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다. 손녀 현아도 할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껌딱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즐기는 놀잇거리가 꽤 다양하다. 바둑, 알까기, 배드민턴부터 최근에는 복잡한 보드게임까지 연마하고 있다.
“거창한 교육 철학은 없지만, 몸이 힘들어도 친구처럼 놀아주려고 해요. 누가 보든 말든 홀랑 벗고 팬티 하나만 입고 같이 수영장 들어가서 놀고, 침대에서 레슬링하고, 음식도 만들어서 먹이고 그러는 거죠. 어떨 때는 우리 집사람도 한심하다는 듯 봐요.(웃음) 그래도 손주들은 잔소리하는 할아버지보다 같이 놀아주는 할아버지를 좋아해요. 아이들에게 어른의 기준을 요구하는 대신, 어른이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때로는 친구가 아닌 스승과 제자처럼 지내기도 한다. 대신 여기서 스승은 손주다. 그는 ‘논어’에 나오는 고사성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를 인용하며 손주를 통해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강조한다. 손주와 가까이 지내는 그만의 두 번째 비결이다.
“작년에 동영상 편집을 공부하려고 학원을 알아보는데, 승우가 가르쳐주겠대요. 그러더니 영상 자르고 붙이기, 자막 쓰기, 음악 넣기 등 영상 편집하는 방법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1번부터 10번까지 적어온 거예요. 감동도 감동이지만 충격이었어요.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아이들과 소통을 잘하려면 계속 배워야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날 승우에게 ‘이제부터 승우가 할아버지 선생님이다!’ 하니 무척 좋아하더라고요.”
할아버지의 특별한 자연 수업
2014년 우연한 계기로 마련한 강원도 춘천의 농가 주택은 손주들의 또 다른 놀이터다. 봄에는 상추나 고추 모종을 심으며 싱그러운 계절을 느끼고, 가을에는 밤송이를 줍기 위해 뛰어다니고, 겨울에는 내리막길에서 썰매를 탄다. 모니터 안의 게임 화면보다 생동감 넘치고 즐거운 놀이다. 사계절 내내 자연 속에서 손주와 뒹굴며 행복을 느끼는 건 조 전 부회장도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그는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를 잊지 못할 추억으로 꼽는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이어져온 가족만의 작은 연례행사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걸 손주들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하더라고요. 걔들 눈에는 모든 게 다 장난감이잖아요. 돌멩이도 장난감, 개구리도 장난감. 그 모습에 제가 위안을 받은 것 같아요. 덕분에 추억이 참 많아요. 낮에 너무 열심히 논 나머지 손주 녀석이 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린 적도 있고, 세 녀석과 파고라에 누워 별을 보며 잠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마냥 평화롭게만 보이는 농촌 생활이지만, 위험천만한 상황도 종종 겪었다. 뱀이 수시로 마당이나 텃밭을 기어 다녀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기본, 말벌에 이마를 쏘여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자연에 신물 날 법도 한데, 손주들이 즐거워하면 그만이라는 그다.
“벌에 쏘였을 때는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줄 알았어요. 병원에 가려고 집 밖을 나서다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들어가서 손주들을 한 번씩 안아주기까지 했다니까요. 위험한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손주들이 자연과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것 같아 좋더라고요. 더 이상 송충이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요.”
배려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때때로 자신의 조부모를 떠올린다. 조부모 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이 있어서다.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조 전 부회장의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2~3년 주기로 전근을 다녔다. 어린 동생들은 아버지를 따라갔지만, 장손인 그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할아버지와 사랑방에서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매일 새벽이 되면 깨워서 세수를 시키시고, 호롱불을 켜놓고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알려주셨죠. ‘일생지계재어유’(一生之計在於幼·일생의 계획은 유년 시절에 세운다)라는 옛말처럼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한 덕분에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제가 인생의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 세 분 있는데, 그중 할아버지가 첫 스승이에요.”
손주 사랑도 유전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조부모 역시 그를 애지중지 아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안다”는 그의 말이 이해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손자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인 분들이셨어요. 모든 것을 제 중심으로 맞춰주셨죠. 집 앞 산이나 강도 쉽게 못 갔어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서 성장 과정에서 버릇없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죠.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손주들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더라고요.”
마지막까지도 ‘손주’
건설업계에서 30년간 굵직한 족적을 남기고 자식 농사도 성황리에 끝마쳤으니 이제는 느긋이 노년을 즐기며 쉴 법도 한데, 조 전 부회장은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여 년 전 작성한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특이한 점은 버킷리스트 대부분이 손주들에게 해줄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손주들과 몽골 초원에 누워 밤하늘의 별 바라보기, 2년에 한 번 손주들과 해외여행 가기, 장학금 만들어주기 등 온통 손주를 위한 이벤트뿐이라 손주들이 쓴 버킷리스트인지 헷갈릴 정도다. 물론 ‘할아버지의 여름 캠프’도 그중 일부다.
“2008년에 영화 ‘버킷리스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밤을 새워가며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 30가지 정도를 꼬박 적었죠. 3년 뒤 현우가 태어나고 다시 펴봤어요. 그때 보니 손주하고 아무 관계 없는 것들만 써놨더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손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로 다시 썼죠. 몽골 여행은 올해 목표였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려워졌지 뭐예요.”
이야기 도중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USB 카드 3개가 눈에 들어왔다. 세 손주의 성장 과정과 함께한 추억을 사진으로 정리한 것이다. 틈날 때마다 사진기를 든 덕분에 두 손자는 2000장, 뒤늦게 태어난 손녀 현아는 700~800장 정도의 사진이 모였다. 첫머리에는 할아버지가 보내는 영상 편지도 담았다.
“올해 안에 선물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요. 나중에 이걸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도 영원히 제 곁에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요. 세 녀석이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기억해주었으면 해요.”
조 전 부회장과 함께 사는 둘째 손자 승우 군이 인터뷰 중 할아버지를 찾아 카페로 왔다. 자다 일어나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런 손주를 바라보는 조 전 부회장의 눈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인생 후반전에 주어진 새로운 삶의 에너지원, 나의 부활”을 마주할 때만 짓는 표정이었다.
손주 마음 엿보기
Q. 할아버지랑 뭐하고 놀 때 제일 좋아요?
A. 알까기 할 때요. 하지만 제가 이겨요. 오목은 할아버지가 더 잘해요. 여름에 같이 파고라에 누워서 자는 것도 재밌어요.
Q. 할아버지 왜 좋아요?
A. 너무너무 착해요. 잘 놀아주고, 원하는 거 많이 해줘요.
Q. 앞으로 할아버지랑 같이하고 싶은 건요?
A. 단둘이 미국으로 여행 가고 싶어요.
Q. 단둘이? 현우, 현아랑 셋이 가면 좋잖아요.
A. 아뇨, 할아버지랑 둘만 갈래요.(웃음)
올림픽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88올림픽 때 점화되었던 성화가 아직도 타오른다. 88올림픽 참가국의 국기도 바람에 펄럭인다. 드넓은 공원은 가을의 정취로 가득하다. 이곳 88호수 옆 조각공원에는 소마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동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개관과 휴관을 거듭하다 다시 문을 열었다. 11월 10일부터 현대 구상조각의 선구자이자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 조각가 류인(1956~1999)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파란에서 부활로’라는 제목으로 전시되는 이번 기획전은 구상조각의 독보적인 작가로 활동했던 류인 작가의 15년간 예술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호암미술관 등 여러 곳이 소장하고 있는 류인 작가의 작품을 한곳에 모아 전시를 한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포스터에 담긴 작품 ‘부활-조용한 새벽’은 휘날리는 거대한 망토와 단단한 근육질 인물에서 부활을 꿈꾸는 영웅의 모습을 보게 해준다.
소마미술관(SOMA, Seoul Olympic Museum of Art)은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목재를 마감재로 사용한 지상 2층, 지하 2층의 건물로 야외조각공원과 어우러지는 소통의 미술관이다.
제1전시실의 주제는 ‘흙으로부터’. 류인 작가는 작업할 때 먼저 흙으로 소조를 빚는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고 한다. 그에게 흙은 작업의 시작이자 끝을 의미했으며 조각은 곧 삶의 의미와도 같았다. 작가가 말했듯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 그 표현 방식들의 긴 여행은, 흙으로 시작해서 다시 흙으로 돌아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제1전시실은 자소상과 목우회 공모전 특상을 받은 여인입상, 심저, 입허Ⅱ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제자 원승덕이 스승을 위해 조각한 류인 초상과 작가의 연대기가 그의 생애를 엿보게 한다.
제2전시실에서는 하산과 입산이라는 주제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기하학적 입방체와 사실적 인체를 결합한 작품들은 1980년대 류인 작가의 작품 특성이다. 당시 개인전에 출품한 ‘파란Ⅰ’과 ‘입산Ⅱ’ 등은 신체가 완전체가 아닌 상태로 입방체 속에 갇혀 있으면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약을 알리듯 튀어나오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신체적 고통을 뛰어넘는 강렬한 생(生)의 의지와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제3전시실은 삶의 무대다. 이 무대에서는 한때 쓰레기더미로 산을 이루었던 난지도에 인체 조각을 던져놓거나 벽과 천장에 걸어놓는 등 다양한 실험적 모색을 하며 작품 영역을 확장한다. 작품 ‘난지도’에서 버려진 인체 조각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속성’이라는 작품은, 통관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아니라 근육이 불끈 솟아 있는 다리, 들어올린 팔로 표현해, 암울함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강인한 저항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제4전시실의 주제는 동시대인의 초상. 류인 작가의 조각은 그 시대 우리들의 초상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깨우침이며 살아 있음의 확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가 느낀 현실과 감정의 크기는 같은 시대를 겪었던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작품 ‘급행열차’는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머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제5전시실의 주제는 ‘조각가의 혼’이다. 작가의 생애를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다. 조그만 소품부터 드로잉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다 보면 마치 20년 전의 그가 살아 있는 듯 느껴진다. 그동안 각종 책에 소개되었던 이야기와 류인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기까지의 사진이 짧게 살다 간 천재 작가의 발자취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부활-그의 정서적 자질’이라는 작품이 정원에 놓여 있다. 근육질의 몸매, 길게 뻗은 팔, 비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갈망하는 듯 보이는 인체 상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뛰어넘어 부활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소마미술관을 찾으면 류인 작가 전뿐만 아니라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건축물 중앙에 설치된 ‘미니 쿠베르탱’은 감상만으로도 미소를 짓게 한다. 상설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백남준 작품의 진수를 볼 수 있는데 사진 촬영이 불가해 아쉬웠다.
이외 소마미술관 주변으로 조성된 조각공원에서는 약 222점의 조각 작품을 돌아볼 수 있다. 대부분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만들어진 세계적인 조각가들의 작품이다. 현재 생존 작가로 한국을 대표하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을 소마미술관 앞쪽 잔디밭에서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관계항-예감 속에서’라는 작품은 자연의 돌과 인위적인 철판을 자연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과 돌과 철판의 미묘한 어긋남의 어울림으로 미지의 세계를 나타낸다.
코로나19로 우여곡절 끝에 재개관한 소마미술관을 찾아 코로나 블루를 털어버리는 것도 힐링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956년생인 류인 작가의 작품은 1980년의 암울했던 정치 현실을 보여줘 동시대인 세대에게 작가의 고뇌를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소마미술관 류인 展
○ 기간: 11월 10일~12월 6일
○ 위치: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방이동, 올림픽공원)
○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심리를 인정투쟁(認定鬪爭)이라고 정의했다. 타인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인정하는 가치만큼 다른 이에게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내가 당신을 인정하는 만큼 나 또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르는 것이다. 직원은 상사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제자는 스승에게 등 저마다 인정받는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여긴다. 우리의 삶이 어찌 보면 악셀 호네트가 주장한 대로 서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임에 틀림이 없다.
자격시험을 치르는 것도 결국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일이고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하는 것도 그런 일의 하나다. 블로그 방문자 수가 많아지고 ‘좋아요’를 비롯하여 긍정적 댓글이 많이 달리면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경우다.
상대를 인정해주는 방법으로는 ‘칭찬’을 들 수 있다. 상대방의 인정투쟁심리를 끌어내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정받는 전 단계다. 대인관계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를 산다. 20세기 경영은 철저한 관리가 중심이어서 성실과 노력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경영의 핵심은 소통과 협업, 집단 지성을 통한 창의성이다. 성공은 주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협업을 끌어내는 방법이 바로 ‘인정’이다.
칭찬은 돈 들이지 않으면서 상대를 인정하는 삶의 지혜다. 어느 회사 임원은 자신이 최고의 경영진이라고 여겼지만, 외부 컨설팅 회사에서 한 직원들과의 상담에서 퇴출 1위의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직원들을 호되게 부려 먹으면서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칭찬에 인색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상대를 인정해주지 않은 결과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칭찬 방법이 근래에 재조명되고 있다. 보좌관이 보고서를 들고 오면 세밀히 그리고 정성껏 살펴본 후에 이렇게 얘기했단다. “당신의 보고서는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보고서 중에서 최고입니다. 이런 부분을 보완하면 더 최고가 될 것 같습니다.” 보좌관은 신이 나서 보고서를 다시 정성 들여 쓰게 된다. 우리의 경우는 대개 그렇지 못했다. 나의 직장 초기만 하여도 상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보고서를 올리면 “이걸 보고서라고 썼느냐!”며 당사자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면 ‘다시 잘 써야지’라는 마음보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라는 악심만을 갖게 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칭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는 대체로 칭찬에 약하다. 아니 인색하다. 서구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그들이 활용하고 있는 생활방식도 함께 유입됐다. 합리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칭찬도 그중에 하나다. 인정투쟁 심리를 최대한 활용한 케네디 대통령의 칭찬 방법을 활용해보면 어떨까?
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라 연극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녀. 그래서일까? 무대 위에서 더 건강하게 빛나는 배우 예수정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79년 연극 으로 데뷔, 그야말로 인생의 반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온 예수정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내면 연기로 보는 이의 심장까지 쿵쿵거리게 만드는 그녀가 요즘 가장 설레는 일은 무엇일까?
“나이가 들면서 실질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설레는 게 줄어서인지, 자연이 주는 설렘이 커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여명(黎明), 길을 나설 때 찬란한 햇빛, 이렇게 꽃이 핀다든지 나뭇가지가 새순 내느라고 그러는 것을 봐도 설레고요.”
조금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예수정 하면 ‘배우’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데, 작품 속 역할이 주는 설렘은 없는지 궁금했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설레는 것보다는 어떤 작품을 대할 때 설레는 마음이 커요. 내 심장을 가장 뛰게 했던 작품은 2012년과 작년에 했던 이에요.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죠. ‘구조가 왜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가?’, ‘우리는 해방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한다.’ 등의 메시지는 평생 머릿속에만 있거든요. 실제로 내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늘 삶의 과제처럼 남아 있는 거죠. 근데 작품에서는 액팅(acting)이 되어 있고 난 액팅 아웃(acting out) 하잖아요. 그런 작품을 만나면 피가 뜨거워지죠.”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가슴속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펼쳐낸다는 기분일까? 그녀는 그보다도 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했다.
“펼쳐볼 수 있다는 말로는 모자라요. 그대로 행위하니까, 그때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것을 느껴요. 평상시 제 삶은 고즈넉해서 뭔가 역동치는 것은 없거든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만나면 굉장히 행동적으로 변하죠. 실제 삶 자체보다도 더 큰 의지를 갖고 한 발을 딱 내딛는 거예요. 언젠가 나도 내 삶에서 그 한 발을 분명히 내디딜 것을 희망하지만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작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그 한 발을 내딛거든요. 사고가 현현화되고, 나의 이상이 현상화되는 순간인 거죠. 그래서 공연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배우로서의 삶이 어렵지만, 실제 삶은 굉장히 생생하고 풍부해지죠. 우리 딸도 연극공부를 해서 지금은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물론 고생할 게 눈에 선하죠.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요. 연극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삶이 풍부해질 것이란 거죠. 그래서 딸에게도 ‘훌륭한 길 택했다’고 얘기해줬어요.”
내겐 참 고마운 직업 ‘배우’
단순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기한다’기보다는 한 인간이 거대한 사고를 이뤄내는 과정에 연기가 양질의 영양분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았다.
“배우라는 직업이 무척 고마워요. 내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을 향하는 길에 현재 내 직업이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온전히 만족하고 행복하죠. 직업과 내 인생은 서로 보탬이 돼요. 작품을 통해서 나 개인 예수정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여다보고, 그 정신을 들여다봄으로써 나의 삶이 더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죠. 사실 작품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누추해지거든요. 그것을 인지하면서 덜 누추해지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되고, 그 노력한 만큼이 분명히 작품에 입혀진다고 봐요. 그런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인생을 사는 폭도 넓어지죠. 이렇게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최고의 직업이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이 숙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이 숙명을 직감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순간 역시 운명과도 같았다.
“대학교를 (고려대) 독문학과를 나왔는데, 그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됐어요. 브레히트의 ‘극장은 시민계몽의 공간이다’라는 말을 알고서는 ‘아, 내 평생 여기(극장)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죠. 그 이후로 연극반에 들어갔고 엄마(배우 故 정애란) 몰래 연기를 시작했어요. 내가 고생할까 봐 연기하는 걸 반대했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했지만, 저 나름의 신념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라는 것이 굉장히 소망이 가득한 일이라는 것 말예요.”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살아 숨 쉬는 ‘열정’
처음 배우를 꿈꿨던 그때의 열정이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연기 인생 37년, 그때 가슴을 울렸던 그 결심이 현재는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생각을 남 앞에서 이야기할 만큼 내 삶 자체가 계몽적이거나 혁명적이지는 못했어요. 때문에 입으로 말할 순 없지만 부끄러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가슴속에서 없어지지는 않죠.”
그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이 있는데 나름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은 분명할 것 같았다. 그런 기자의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내공’이나 ‘연륜’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끄럽기만 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까지는 없고요. 소신이라면, 내 사고가 계속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는 한 이 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나도 모르죠.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느낄 때 내 사고가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빨리 떠나야죠. 무대나 필름에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그때는 무슨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때문에 질질 붙들고 있지 말고 떠나야죠. 떠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걸어나가야겠지만.(웃음)”
그녀의 말처럼 정년이 없는 배우로 살아가다 보면 쌓여가는 경력만큼 부담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담을 설렘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떤 작품이 나에게 왔을 때 내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그 특성을 얼마만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겉으로 찌글찌글한 모습만이 나이든 사람은 아니거든요. 나 역시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큼(60년)을 살아왔다면 중간에 실수도 있었겠지만, 단 1초라도 은총을 받아 한 발자국이라도 걸어나갔다면 그 흔적들이 어떤 작품을 만났을 때 여태 먹은 끼니만큼의 밥값은 해야지 될 텐데, 그게 어떻게 묻어져 나올까? 나도 궁금해요.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는 없어요. 어떤 역할이든 좋아요. 거기에 내 끼니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궁금하고 설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좋다고 말한 그녀. 요즘 떠오르는 중년의 로맨스, 특히 젊은 남자배우와 중년 여배우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도 적지 않다. 유독 멜로물과는 거리가 먼 배우 예수정. 혹시 그녀도 그런 로맨스를 꿈꿔본 적은 없을까?
“저는 뭐랄까. 사람이 참 건조해서. 아마 제가 만에 하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된다면, 그리고 그 역할이 제 피를 끓게 한다면 조금 또 다른 시각을 볼 것 같아요. 인생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역으로 젊었을 때 청춘의 삶 속에 있었던 보석 같은 정서가 흐려졌을 수가 있죠. 어떤 젊은이를 만났을 때 남성이라서 끌리는 로맨스가 아니라, 그 젊은이를 통해서 다시 내 안에 생성되는 조금은 잊고 지냈던 그런 것들이 소생되면서 꽃처럼 피어나는 그런 거라 할까? 아, 소통하는 것. 그 노인 안에도 있는 젊음의 생기, 그 외부의 매개체와 함께 소통할 수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런 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이 아닌 실제 그녀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남달랐다. 아니, 오히려 방법이 없는 것이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별한 방법은 없어요. 그냥 친구처럼 지내요. 그게 아마 동지의식이 있어서인가 봐요. 같은 작품을 하다 보면 동료애로 만나게 되죠. 제자들이 스승의 날 이야기를 꺼내면 ‘야야, 친구의 날은 없니? 하긴 에브리데이 친구의 날이니 친구의 날은 없나 보다.’고 말하기도 해요. 저는 아마 ‘공연’이라는 분명한 매개체가 있어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 무대 앞에서는 다 같은 배우니까요.”
조금 전 이야기와는 다른 면모였다. 자신을 건조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친근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녀는 왜 자신을 건조하다고 생각할까?
“옛날에 어떤 분이 날 표현하기를 ‘습기 없는 나무’ 같대요. 어? 이 사람 나를 참 잘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람이 좀 촉촉한 느낌이 나야 로맨틱하고 그런데, 그걸 아마 무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사는지 몰라요. 스스로 습관들인 자신의 삶이 건조한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말하다 보니 그게 나만의 (실수하지 않으려는) 방어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극’을 먹어 건강하고, ‘연기’를 해서 행복한 그녀
그녀는 배우로 살아가며, 연극을 하는 것이 곧 삶의 행복이자 건강의 비결이라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건강한 에너지가 샘솟는 법. 그녀가 하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지 물었다.
“하고 싶은 역할이요? 다 해봤어요. 대학 때부터 굉장히 하고 싶었던 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한 여성이 굉장히 육체적으로는 쇠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젊었을 때 순수성을 잃고 거기다 마약까지 하게 되죠. 그 여인은 자기가 본의 아니게 영혼, 정신, 육체가 다 망가진 삶 속에서도 순수함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게도 그 역할을 두 번이나 할 수 있었어요.”
예수정의 데뷔작 의 연출을 맡았던 한태숙 감독은 당시 ‘예수정은 속에 불덩이가 있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불덩이는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늘 내 속에 있으니까요. 없어지지 않아요. 넘칠 듯한 석유통을 품고 있거든요. 불은 언제나 붙어요. 오히려 그게 내 인생의 커다란 함정이랄까?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나를 건조하게 만드는지도 몰라요. 삶 속에서 그게 확 타버리고 난 다음에는 어떠한 고통으로 다시 그 열량을 채워가야겠죠. 배우는 숙명적으로 ‘고통은 성숙의 미로’라는 말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한 송이 꽃을 피워내야 해요. 그 고통을 지나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땐 ‘아, 이 고통이 결국 내 삶을 꽃을 피우는 대미지였구나’라는 것을 깨닫곤 하죠. 또 한 가지, 나는 연극을 먹고 건강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연극이 날 건강하게 하고, 내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죠. 누구든 매 순간 충실하면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요. 저는 연기가 생활이니까, 그걸 날마다 충만히 하는 가운데 늘 무언가가 채워지는 거죠. 그게 제겐 힘이 되고 행복인 셈이에요.”
예수정(芮秀貞)
1979년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 1980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대학원 문학석사, 1984년 독일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연극학석사, 2004년 제5회 김동훈연극상, 2005년 제26회 서울 연극제 여자 연기상, 제10회 히서 연극인상, 제41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2006년 제1회 한국 여자 연극인상 등 수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19그리고 80’, ‘고곤의 선물’, ‘벚꽃 동산’, ‘허난설헌’, ‘바다와 양산’, ‘그린 벤치’, ‘손님’, ‘늙은 부부 이야기’ 등 주연.
국내 최초로 개방병동을 시행하고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는 등 정신과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소탈하고 편안한 얼굴은 맘씨 넒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는 철학을 갖게 된 이 교수는 자기 삶의 능숙한 선장으로서의 노하우를 정리한 책 를 베스트셀러로 올려놨다. 서울 신영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이 교수를 만나 노년을 재미있게 보내는 지혜들을 들어봤다.
인터뷰 송광섭 편집장 정리 김영순 기자
노년은 누구에게나 온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한 과정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해도, 나이가 드는 건 역시 슬픈일이다. 특히 나이듦을 슬프게 만드는 건 외로움이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외로움에 대한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이타심을 뛰어 넘는 이기심이 있어야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대비책은 바로 ‘적응’이죠. 살아남기 위한 욕구가 바로 적응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적응이 필요합니다. 가족이란 내가 편하고자 자식을 가르치고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서로 적응해 나가기 위한 몸부림, 즉 ‘합의된 언어’를 만들어서 살아가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면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살펴 봐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이 교수의 충고는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가 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교수는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살다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옵니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능력이에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면서 길러집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그쪽에서 내게 먼저 다가오기를 바란다면 점점 더 외로워질 뿐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한 적극성’의 실천으로 이타심을 넘어선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이 들수록 외롭지 않으려거든 온전한 자기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남의 보살핌 없이 자기 앞가림을 잘하기 위해서 이기심이 필요하다. 결국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그럼으로써 나를 편하게 하는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길임을…”
존경받으려 애쓰는 건 인위적이고 즐겁지 않은 일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존경받는 일과 흡사하다. 존경받기 위해서 시니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존경받는 행동을 하면 존경받는 것이고 존경받을 짓을 하지 않았으면 못 받는 겁니다. 존경받자고 어찌 한다는 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인위적인 건 즐겁지 않은 일입니다.”
이 교수는 젊은 후배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에, 자신이 배우기 위해서라도 젊은이에게 자세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얘들은…, 내가 젊었을 때는, 너도 늙어봐라, 언제까지 젊은 줄 아냐’ 이런 얘기나 하며 자기 경험과 기억만 옳다고 고집할 일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인정해야 해요. ‘젊은 세대가 내 선생이다’라 생각하면 존중하게 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는 제자들의 스승이었지만, 퇴임 후에는 “여러분들이 나의 스승이 되어 많은 정보를 주기 바란다”고 고마움을 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그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쓸모’를 발견할 줄 아는 것도 나이를 먹는 기술 중의 하나라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대접받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부하는 게 좋습니다. 비굴해지라는 게 아닙니다. 젊은이들 관심사에 동참하고 공감하려 애쓰라는 것입니다.”
자식과 갈등이 없을 리 없어… 연습이 필요
이 교수의 집에는 3대 13명이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걸로도 유명하다. 21세기에 극히 드문 이 크고 복잡한 대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젊어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라.’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맡기고 기대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식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자식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이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식에게서 독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철칙이 있습니다. 상호 불간섭 주의와 독립성 보장입니다.”
노후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자식과의 보이지 않는 감정 싸움이다. 갈등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 자체를 바라는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었다. 이 교수가 큰 며느리에게 강조한 게 바로 ‘거절하는 법’이었다고 한다.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솔직하게 ‘노’라고 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싫어요”보다는 “안돼요”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했다. 시부모와 며느리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통해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거절은 불편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따라서 효도가 아니라 '효부(孝父)-효모(孝母)'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자식 입장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강조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공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손주 녀석들에게는 이메일로 소통한다. 요즘 애들은 벅차다. 시대에 못 따라간다. 현실적인 정보를 알고 대한다면 가정안에서 조부모의 자리는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
“손자 손녀와 어울리면 최신 문화와 사고방식을 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내 어릴 적 생각과 행동 성장 과정, 에피소드, 추억거리, 아픔, 혼난 일 등을 상세히 적어서 메일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손주들의 의견과 생각들을 교류하게 되고 함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공감대가 생깁니다. 4명의 손주들이 답장을 써주면 원고료(?)를 지급해요. 1명당 무려 100만원 씩,,,,이런 나를 멋쟁이라고 외부에서는 보겠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하는 것이죠.”(하하)
절박한 최선이 아닌 여유로운 차선을 선택하자
“저는 ‘최선’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최선은 내가 가진 100을 다 쓰라는 겁니다. 그런데 차선이라 해서 적당히 하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무엇이든 완벽에 매달리기 보다 잘하는 정도에서 즐기고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이 교수는 50년간 환자를 돌보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 30년 넘게 네팔에 의료봉사를 하고, 40년 동안이나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76세의 나이에 사이버대학에서 늦깎이로 공부를 하여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으로 졸업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늘 자신의 능력을 30% 가량 아껴 두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1등을 하기 위해 바닥까지 짜내다 보면 옆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풍경의 즐거움도 인생의 다른 가치도 놓치게 되죠.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 덜어 내어 여유를 갖고 살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풍요롭게 즐길 수 있습니다. 그걸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어른입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임석환 불화장(69)의 전통 불화 정신을 계승하다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탑골미술관(관장 희유)은 탑골미술관의 개관 1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부터 5월 21일(수)까지 기획전 ‘불화(佛畵), 전통으로 피어나다’를 연다.
불화(佛畵)란, 사찰전각에 걸려 있는 각종 탱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의 일대기, 설법장면, 경전 내용, 사찰의 전설 등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번 전시는 오늘날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서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기법을 이어받은 불화를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즉 불화(佛畵)가 불교 교리와 의미를 고도로 압축하여 표현한 종교적 색채를 띤 그림이지만, 넓게 본다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약 1800년 전부터 계승된 우리 고유의 미술이자 전통문화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화와 그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감각, 미술에 대한 전수에 대해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마련됐다.
단청장이면서 불화장
이번 불화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인 임석환 선생과 그 제자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선에서 선으로 이어지고, 면으로 채워 또 선으로 마무리하는 섬세하고도 화려한 불화의 그 장엄함을 표현한 임석환 선생은 故혜각스님으로부터 단청을, 故혜암스님으로부터는 불화를 배운 장인이다. 임석환 선생은 2005년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받았으나, 그 내용과 기법의 단청과는 다르다고 판단되어 2006년에야 분리되어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이번 불화전은 특별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임석환 선생의 스승인 故혜암스님께서 1920년대 처음 기초 과정을 공부하시면서 그렸던 습화(習畵)와 그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초(草)가 함께 전시된다. 이 ‘습화’와 ‘초’는 전시로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미술과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료를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불화는 붓 손질 한번, 선 하나에도 정신과 혼을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의 자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불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를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기보다 수행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 시대의 문화재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열정과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임석환 선생의 말처럼 장엄하고도 혼이 담기는 불화가 그려지는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4월 9일(수)부터 4월 20일(일)까지는 다양하고 화려한 전통문양을 부채에 직접 그려보거나 자신의 띠에 맞는 십이지신을 액자에 그려볼 수 있는 체험도 진행된다.
임석환 선생의 불화장 시연은 4월 11일, 12일, 13일 오전(10시~12시)과 오후(2시~4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복지와 미술이 함께하는 탑골미술관을 운영하는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인 희유(希有)스님은 “불화를 그린다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혼을 담으려는 고집과 그 시대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혜안을 필요로 한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와 스승의 습화를 바탕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온 현장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해 은퇴한 김석현(62세) 씨는 아침부터 부산한 아내를 보면 걱정이 앞선다. 아내가 어디가는지 보다는 오늘도 점심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아내에게 한마디 건넨다.
“나도 같이 가면 안돼?”
은퇴한 부부의 싸움은 의외로 단순한 일에서 비롯된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냉장고 문 열었다 닫었다, TV 보며 빈둥거리는 남편들은 분노한다. “평생 고생하며 가족들 먹여 살렸는데, 퇴직하고 돈 못 버니 아내들의 괄시가 시작됐다”며 서운해 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누구 일방의 잘못이 아니라 은퇴 이후 40~50년을 함께 살아야 할 부부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방법을 몰라 빚어지는 갈등이라고 말한다.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싫거나 미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남편이 직장 생활을 했을 때 하루 종일 ‘자유’를 누리던 것들이 갑자기 그 자유가 없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짜증과 스트레스가 쌓여 결국 심리적 균형이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부이혼 전문가는 "은퇴한 부부 사이의 가장 무서운 싸움은 ‘침묵’에서 시작한다. 남편은 뭐든 아내가 말하는 것은 ‘잔소리’로 생각한다. 서로에게 성의 없이 대답하면 대화를 조기에 차단함으로서 번거롭지 않고 필요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할 것"이라 의사소통 단절을 지적했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소통이 될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은퇴는 끝이 아닌 30~40여년이나 남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인생의 중간기착점이다. 따라서 은퇴 시기에는 남편과 아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부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서로 감정 소통이 안 돼 서먹서먹하게 지내거나 심지어 얼굴을 맞대면 짜증이 나는 사이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며 “힘들겠지만 상대가 뭘 원하는지 뭘 하려는지 맞추려는 최소한 노력과 적응하는 시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은퇴와 함께 찾아오는 건강과 인간관계의 위기, 외로움과 허무함, 노후 계획 등 은퇴를 계기로 부부가 함께 우정을 나누듯 충분히 생각하고 작은 일부터 함께 하고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길어진 노후생활을 위해 특히 감정이 동요하고 통하는 감성소통을 해야 한다.”
곽 교수는 공통된 관심사를 만들어 감정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에 일단 배우자가 표현한 감정은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곽 교수는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가를 느끼고 그것을 상대에게 적절히 표현해서 그에 대한 해답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소통이 잘되는 부부는 외롭지 않아
프라우스 부부심리상담센터 송금희 원장은 “부부 간에는 풀 수 있는 것보다 풀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다. 갈등 해소의 핵심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를 하다 보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특히 송 원장은 황혼 부부들에게 가장 먼저 ‘들어주는 연습’을 주문했다.
“소통이 안 되거나 갈등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는 닫고 입만 연다는 것입니다. 자기 말만 하고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요. 상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야 미처 깨닫지 못했던 배우자의 감정에 대해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거든요.”
이에 이혼전문 H변호사는 은퇴 후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진 황혼 부부에게 각자가 실천해야 할 두 가지를 제시했다. 남편에게는 아내와 하는 말의 수를 늘리라는 것과 본인 스스로에게 좀 더 유연해지라는 것이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원하는 행동에 동행해주도록 노력하라는 것과 자신만을 위한 동적인 취미생활을 하라고 조언했다.
부부행복전문 A코치도 행복한 노후생활을 위해서는 부부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대화라고 피력했다, "일상 속 의사소통을 위한 대화만으로는 부부 사이의 갈등을 해소되거나 유대감이 높아지지 않는다"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는,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자주 해야 행복한 부부로 살 수 있다"고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얘기를 꺼냈다.
송 원장은 “상담센터를 찾은 중년 부부들의 대부분은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소통을 원하지만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의사소통의 의미를 자신에게 맞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요점, 자신의 주장에 맞춰서 진행되는 게 의사소통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송 원장은 “자신의 주장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답답해하고 심지어는 ‘우린 말이 통하지 않는 부부’ 라고 결정 짓고 포기해버린다”며 “상대에 대한 어설픈 배려로 오히려 얘기를 혼란 속에 밀어 넣을 때가 많은데 그냥 다 털어놓고 밑감정을 얘기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래야 듣는 사람도 훨씬 이해가 빠르게 되니까”라고 설명했다.
부부행복 전문 A코치는 "아내가 ‘내 마음이 우울해’라고 말했을 때 남편이 ‘그래 너 마음이 슬프구나’ 라고 반응이 돌아와서, 아내가 ‘그래, 저 사람이 내 마음이 슬프다는 걸 알아주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소통이 이뤄진 것"이라 조언했다.
세상에는 싸우지 않는 부부, 문제가 없는 부부는 단 한 쌍도 없다. 갈등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을 하면 갈등은 해소되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 받을 수 있다.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면 내편, 동반자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더 이상 외롭다고 느끼지 않게 되고, 부부 사이에 애정과 신뢰, 친밀감도 높아진다.
부모 자식간 소통 방법은 공감대 형성부터
가화만사성이라고 했다. 집안이 화목해야 바깥일도 잘 풀린다는 이야기이다. 화목한 집안을 만드는 중심에 바로 부모가 있다. 화합하는 부모는 자녀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하며, 이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원활한 소통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화목한 가정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 그리고 가족을 변화시키는 부모의 소통방법이 더욱 중요해지는 오늘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직장을 다니거나 대학생이 되면 말 붙이기 조차 어렵다는 고백을 한다. 물론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커져 말 붙이려 하면 “바쁘니까 나중에 말씀하세요.”라고 훅 가버린다. 부모는 배신감마저 든다. 특히 일만 해 온 아버지와 대화는 더 어색하고 불편해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다며 자식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게 문제이다.
아버지들은 자식들과 대화를 한답시고 자식 붙들고 옛날 과거 얘기하면서 늘어지면 더 어렵게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 갈등이 생겼다면 ‘난 그 말 듣고 좀 화나고 기분이 안 좋았어’라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대광고 김철경 교장은 “마음을 전달하는 말을 할 때는 감정의 주체가 자신이기 때문에 ‘나 전달법’으로 말해야 합니다. 나 전달법은 ‘나는~’으로 시작해 자신의 감정까지 넣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죠”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내 마음을 이해받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이때 ‘너는~’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 상대방은 그 말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으로 느낀다. 그래서 상대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도리어 방어, 공격, 회피로 대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들이 계속 늦게 집에 오는 경우 아버지가 ‘너는~’으로 시작하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란노 아버지학교 관계자는 "부모자식 간에서는 반드시 자식이 잔소리로 여기면 세상없이 중요한 말도 잔소리임을 인정하고 중단해야 한다. 특히 요즘 부모들은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매고 자녀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보내야만 부모 도리를 다 하는 것으로 믿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대부분 대학 입시를 앞둔 고3만큼 바쁘고 고달프다. 부모는 그런 자식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알아서 저자세를 취하기 쉽다. 사소한 일로 툴툴거리고 짜증을 내도 공부만 잘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 습관이 굳어지면 자식이 성장해도 “어머니 그만 간섭하세요.” “아버지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등의 무관심한 말들을 서슴지 않고 내뱉게 된다. 단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존경심이 우러나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환경이 되버렸다고 한다.
김철경 교장은 "부모자식 간 대화부재의 원인은 가족들의 개인주의,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느끼는 스트레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이 가장 멀어진 데는 서로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손을 먼저 내밀지 않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중년 남성이 가장 외로울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자녀들이 모른 척할 때’라는 응답이 50%를 넘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접받고 싶은 만큼 상대에게 대접하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의 소통의 방법을 제시해도 나이가 들수록 그토록 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사실,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전에 속내는 대접받고 싶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에서는 “논리나 말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상사의 의견이 명예와 명분을 중요시 하는데 실리를 따지며 얘기 하면 천박하다 할 것이고, 실리를 중요시 하는데 명예와 명분을 따지면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의 어려움을 설파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존경과 신뢰가 있는 소통 사례를 잠깐 살펴보자. 선일여중의 호빵맨 최용범 교사는 SBS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서 학생지도 달인으로 소개됐을 만큼 유명하다.25년 경력의 베테랑 학생주임 최용범 (56)씨.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순찰을 돌며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에게는 ‘짜잔~’하고 나타나는 그는 학생들의 수호천사이자 효과 빠른 긴급 구조대다. 윽박 대신 애정으로, 강요 대신 믿음으로 인근 지역에서 학생 선도의 최고봉이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학생들과의 실시간 소통을 위해 양팔에 찬 휴대폰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더 놀라운 점은 학생들에게도 그의 번호가 모두 저장돼 있다는 것. 학생들의 119 역할은 물론, 전교생의 생일까지 빠짐없이 축하 메시지를 챙겨 보낸다.
단순히 전교생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문자를 보낸다고 해서 쌍방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든 선생이지만 그의 진심이 인성교육 철학과 만나 고스란히 아이들의 마음에 전해지면서 변화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재능교육 양병무 대표(60)는 소통을 잘하는 CEO로서 “공자의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아랫사람에게 묻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소통 덕목을 제시했다.
나이 먹었다고 세상사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이는 결코 소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윗사람이 말을 걸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입을 열지 않는다. 아버지는 열렸는데 왜 자식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느냐고 채근할 일이 아니다. 소통의 부재는 전적으로 윗사람 탓이다. 그냥 기다리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묻는 것은 사실 말을 거는 행위이기도 하다. 물음에는 답이 따른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대화가 되고 저절로 소통이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묻고 대답하며 가르쳐 주는 관계가 형성되면 아랫사람도 어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와 묻는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자식, 아내, 부하, 학생, 후배 등 이들에게 권위와 가식, 억압과 통제의 사슬을 벗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건 자신의 위신을 깎는 게 아니라 자신의 관용과 적극적인 이해의 태도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권위는 강요하는 게 아니라 존경에서 온다. 윗사람이 어렵게만 느껴져서는 존경의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만 쌓이는 건 순식간이다.”
불치하문의 소통, 그것이 비로소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최적의 답이 아닐까 싶다.
결코 나이가 들어서 문제가 아니라 부부, 부모 자식, 스승과 제자 등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작은 진심부터 시도, 원활하고 건강한 소통 메커니즘이 작동되기를 희망한다.
"세대공감 세바퀴 2040 vs 5070"
'배고팠던 세대' 5070, 인생 이모작은 이제 시작에 불과
지금 시대는 어떤 시대이고,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어떤 미래가 예상되며, 그 미래 속에서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어떤 것들을 갖춰야할까?
이러한 생각과 고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늦은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어느덧 2040세대와 5070세대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세대간 차이가 극도로 발생할 수 있는 세대간 사각지대,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배고팠던 세대' 5070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산업화-극화 속에 어찌보면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이제 각 세대 계층을 바라보는 바로미터를 말하는 배고픔과 2040를 '앵그리'(Angry)세대, 5070을 '헝그리'(Hungry) 세대라 일컫는다. 어느 기업의 CF가 우리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왠지 쓸쓸한 느낌을 더하게 하는 것은 진정 우리만의 가치관 때문일까?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르면 베이스 캠프가 방향이 될 것이고, 어떻게 가야할 지 묻는다면 지도가 될 것이고, 계속 가야할 지 망설인다면 용기가 될 것입니다. 당신의 베이스 캠프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며 힘든 시기가 지나면 봄처럼 따뜻한 순간도 찾아오듯이, 성장과 정체를 겪어 온 우리 5070세대를 향한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클은 더이상 그냥 쓴 웃음으로만 넘기기엔 너무도 힘든 삶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다.
경제성장속에 어느덧 아파트가 곳곳에 자리잡고 아파트들을 가르켜 닭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닭장 속에 갇힌 닭들의 신세나 아파트에서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5070 세대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답답한 구조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1층 없는 2층은 없고 둥지 없인 새들도 없으며 스승 없는 제자 없듯이 이제 우리는 5070세대를 think base 세대, 액티브 시니어 (Active Senior) 세대로 말하고 싶다.
그렇다. 산업화 시대에 불어 닥친 도심집중 현상과 개인주의 성향이 모든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고 한국전쟁 이후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간성이 상실됐고, 그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2040세대가 존경과 효를 모르는 지금 이 순간도 대한민국 곳곳 어디선가 5070세대들은 서러움과 가난을 그저 숙명으로 이겨가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불과 10년이 지나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사회적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일본의 경우 1970년과 1994년에 각각 고령화사회, 고령사회에 들어가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고령사회 대응방안이 일찍부터 논의돼 왔기 때문에 기업들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나 법적 체계 전환과 거의 무관하게 각각 개별 기업의 상황에 맞게 자발적으로 대응체계를 구축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 시작에 불과하고 제도적으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돼 있지 않다.
대기업이나 관공서 등 울타리가 튼튼할수록 더욱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후회나 그때 가서 이게 아니었구나, 삶이란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구나 하며 뉘우쳐도 지난 세월은 되돌리지 못한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안락하고 안주할 현실을 갖춘 50대 이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보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든 후배든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저 시대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는 이방인처럼 물러날 때가 아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언젠가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최재영 생활공감정책 용인대표는 "이제 정부는 다양성과 깊이를 함께 담아내는 문화정책, 정부가 말하는 생애주기별 문화복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5070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적극적인 사회, 세대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대가 되었으면 한다.5070세대를 더이상 현실을 침묵하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라고 지적했다
요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처럼 앞으로 5070세대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성공신화가 아닌 우리 이웃들의 소소한 자기 이야기를 쓰는 붐을 일으켰으면 좋겠다고 한 말은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다.
앞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온갖 스트레스를 등산과 여행을 통해 정신적 피로를 힐링으로 펼치는 모습, 봉사와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삶, SNS를 통해 소통하는 '실버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 최재영(kthigh11@naver.com)
△OCJP 국제공인자격 △RABQSA ISO9001 △27001 국제 심사원 △KBS n 리포터△정부3.0 맞춤형서비스 △생활공감정책모니터 용인시 대표 △서울시 인터넷시민감시단 △한국소비자포험 화이트슈머 △금융감독원소비자리포터('금소리') △한국가스안전공사 경영공시모니터 △분수네신문사 칼럼리스트 △직업 특강 & 컨설턴트 △IT 및 보안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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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립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시니어 기자단’ 모집
-다시 뛰는 인생2막 ‘나도 기자다’
프리미엄경제신문 이투데이의 자회사인 이투데이 PNC(Passion & Creative)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시니어 기자단’을 모집합니다.
시니어 기자단은 액티브 시니어들의 치열하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 소식과 함께 인생2막-자기계발 성공 스토리, 애환과 고통, 기쁨 등을 취재하게 됩니다.
선정된 기자단은 소정의 교육을 거쳐 2014년 2월부터 시니어 모니터링 업무와 현장 취재기사를 작성하게 되고, 작성된 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사이트에 게재됩니다.
50대 이상 신장년층들은 우리 사회의 주춧돌이자 근간이며 버팀목입니다. 하지만 직장-자녀문제-부모-집안 대소사-건강-대인관계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습니다. 단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신장년층은 명분과 격식, 보수적인 사회적 가치에만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온갖 혼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투데이 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당당한 시니어들의 고품격 Life 정보 웹진으로 ‘2막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e-시니어’ ‘‘Dynamic Senior’의 신나는 놀이터’‘시니어들의 애환과 고통을 나누는 사랑방’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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