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에 나오는 대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방주’가 멈춘 곳은 해발 5000여m 높이의 아라라트 산이다. 노아는 비둘기를 이용해 세상으로 나올 때를 확인한 뒤 제단을 쌓고 첫 포도원을 가꾸는 등 새로운 삶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아라라트’라는 명칭은 ‘우라르투’(Urartu)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국가 아시리아와 대적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총독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라르투는 ‘아르메니아’(Armenia)로 불렸다. 이렇게 노아의 후손들이 지켜온 땅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을 버텨오며 생긴 슬픔의 생채기를 처연한 바람의 아름다운 숨결로 들려주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도시 예레반의 품격
아르메니아는 한글보다 1000년 이상 앞서 만든 그들만의 고유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3분의 1 정도 되는 2만9000㎢ 면적에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대가 전체의 90%를 차지한다. 총인구는 300만 명.
이 중 35%인 106만 명이 수도 ‘예레반’(Yerevan)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어디서든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이 산은 삶의 시작이자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될 아름다운 보금자리다. 그리고 영혼을 치유해주는 곳이다. 치유는 밝은 곳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시작되며 그런 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년의 슬픔을 덮어온, 자신들의 시작이자 끝인 아라라트 산을 언제나 보고 싶어 한다. ‘베르니사시 시장’ 한복판, 화가의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그림은 아라라트 산과 노아의 방주를 그렸다. 아르메니아에 입국할 때 출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에 찍어준 스탬프에도 아라라트 산을 의미하는 산 모양이 선명하다.
인간이 살아온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한 곳인 예레반은, 구 소련의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yan)이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 지배하에 있을 때 설계한 계획도시다. ‘공화국 광장’에서 ‘자유 광장’을 거쳐 ‘캐스케이드’에 이르는 시내 거리는 신고전주의풍 건물들로 장식해 마치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행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예레반은 잃어버린 낭만을 되찾아줄 것만 같은 분홍색 빛을 띤 도시다.
해외 유명 브랜드숍과 유럽풍 분위기의 레스토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은 광장과 광장을 연결해준다. 노천카페에는 까맣고 짙은 눈썹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누군가를 하루 종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지나가는 여행자를 바라본다. 원형 형태의 오페라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체리빛 노을 색을 띤 바이올린의 흐느낌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잡는다. 수업시간을 기다리던 발레 아카데미의 청소년들은 수줍어하면서도 주차 요금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외부인을 위해 기꺼이 무언의 손길을 내민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문화적 품격이 돋보인다. 무엇을 흉내 낸 가벼움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그들만의 자연스러움과 자존감이 스며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에 다시 가고 싶어 하고,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로 꼽는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 국화는 ‘물망초’다. 6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들에게는 20세기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제국에 의해 행해진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이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고 있던 250만여 명의 아르메니아인들 중 150만여 명이 살해당했다. 이 참화는 1973년 유엔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규정됐다. 이어서 많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의 차이 등으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로 인정했다. 이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건 야만과 폭력으로부터 우리와 후손들의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레반의 서쪽 언덕에는 ‘제노사이드 추모 공원’이 있다. 아르메니아를 방문하는 다른 나라 정상들도 이 공원에 꼭 들러 기념식수를 한다. 추모탑 밑에는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 무조건적인 망각은 아니기에 물망초를 국화로 선택한 아르메니아의 아픔에 공감이 된다.
제노사이드 때 학살을 피한 난민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교포)를 형성했다. 현재 해외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80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많다.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성공한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아르메니아에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그 힘이 막강하다. 미국에서도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정치,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병상련일까. 미국 L.A. 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건립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디아스포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세계 최초 기독교 공인 국가
아르메니아인들이 특별하게 생각하는 아라라트 산. 그러나 현재 아르메니아인들은 갈 수 없다. 과거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억압하고 무력화하기 위해 이 산을 터키에 분할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아라라트 산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은 산자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코르 비랍’(Khor Virap)’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에는 지하 20m 깊이의 동굴이 있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레고리’(St. Gregory)가 왕의 명을 거역해 13년 동안 갇혀 있던 곳이다. 그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왕의 병을 고치자 왕은 크게 감동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이때가 301년. 로마보다 91년이나 빨랐다. 코르 비랍 수도원은 7세기 때 동굴 위에 세웠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독교를 지켜왔다. 심지어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도 아르메니아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통일을 시킨 힘은 신앙이었다. 동방정교회, 서방 가톨릭, 개신교가 아닌 ‘아르메니아 사도회’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의 엄숙한 신앙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과 절제, 소박함이 많이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커진 주요 원인은 그들만의 고유문자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중요한 예술, 문학, 교육센터이자 ‘카트치카’(khatchkars, 십자가 문양을 판 돌비석)의 완성처가 됐다.
아르메니아에서 가볼 만한 여행지
에치미아진 (Echmiadzin)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중심지로 300년경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최초의 교회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추정되는 창이 보관돼 있다.
가르니(Garni) 신전, 아자트(Azat) 계곡 헬레니즘시대에서 로마시대에 걸쳐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하기 위해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운 신전. 신전 밑 아자트 계곡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주상절리가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 (Geghard Monastery) 고대 아르메니아의 동굴 수도원으로 예수님을 찌른 창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계곡의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
타테브 수도원(Tatev Monastery) 해발 2000m 높이에 위치한 수도원. 외부에서 침입을 하면 말발굽 소리에 기둥이 흔들렸다고 한다. 고즈넉한 풍광과 코카서스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세반 호수(Sevan Lake) 바다가 없는 아르메니아에서 유명한 호수. 해발 190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물이 맑고 깨끗해 가재도 잡힐 정도라고. 세반 호수의 송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프로메테우스에 관해서는 네 가지 전설이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신의 비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고 신들이 독수리를 보내 자꾸 자라는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 때문에 고통스러워 점점 깊이 자신의 몸을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에 따르면,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 그의 배반은 잊혀 신들도 잊었고, 독수리도, 그 자신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네 번째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에 대해 지쳤다고 한다.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고, 그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바위산이었다.
-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프로메테우스’ 중에서
제우스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인간의 창조성을 위해 주신(主神) 제우스에게 반항한 프로메테우스가 좋았다. 그가 묶여서 끝내 바위가 되어버린 이상한 바위산이 보고 싶었다. 좀 더 알아보니 노아의 방주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아라라트 산도 그 지역에 있었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코카서스 산맥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곳. 고대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가 흐르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초원의 산맥 지대. 그곳으로 떠났다.
문명과 종교의 충돌 지역
코카서스 지역은 인류 문명의 충돌과 종교 간 대립으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팽창하려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저항과 지배에 늘 시달려왔다. 이런 아픈 역사와 상처 때문에 코카서스 산맥 하늘에는 안식하지 못하고 떠도는 학의 무리가 아직도 날아다니고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OST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대중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이 노래한 ‘백학’의 배경도 이 지역이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최고봉 엘브루스 산(5642m)과 아라라트 산(5137m) 사이의 평원에 자리한 이곳에서 유럽계 백인들의 조상인 코카서스 인종과 수많은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다양한 민족이 다국가,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과 투쟁을 벌여온 것이다. 코카서스 산맥은 크게 ‘볼쇼이캅카스(大코카서스, 북코카서스) 산맥’과 ‘말리캅카스(小코카서스, 남코카서스) 산맥으로 구분한다(코카서스는 영어식 표현, 캅카스는 러시아어식 표현).
‘북코카서스 산맥’은 유럽의 동쪽, 아시아의 서북쪽 경계다. 전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전체 산맥이 아시아에 속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러시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 접해 있다.
‘남코카서스 산맥’의 길이는 600km. ‘북코카서스 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접해 있다.
북코카서스 산맥과 남코카서스 산맥을 연결해주는 길은 ‘조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Highway)’다. 러시아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해 1799년 완공되었다. 도로는 해발 3000m 이상의 가파른 낭떠러지로 이어지며 쉽게 접할 수 없는 자연 풍경을 선사한다. 조지아의 수도 티빌리시(Tibilisi)에서 러시아의 블라디카프카츠(Vladikavkaz)로 이어지는 214km의 거리다.
이 길을 통해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했고, 코카서스 지역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반대로 오스만튀르크의 힘이 강해지면 이 도로는 러시아 영토로 쳐들어가는 통로가 됐다.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된 후 이 지역에 있는 3개 공화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다. 북코카서스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있던 10여 개 소수민족들도 분리 혹은 독립을 했거나 요구하고 있다(체첸공화국, 다게스탄, 북오세티야, 남오세티야, 잉구셰티야, 압하지야 등으로 전쟁 위험이 있고 치안이 불안하므로 여행을 가지 않는 게 좋다).
코카서스 3국의 역사
요즘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코카서스 3국은 남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다. 남북으로 이란, 터키,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아제르바이잔에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 세 나라는 각각 고유의 문자와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다. 종교도 다르다.
노아의 후예들이 사는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301년)해 ‘신이 선택한 나라’로 불리며 ‘아르메니아 사도회’를 믿는다.
조지아는 과거 러시아명으로 ‘그루지야’로 불렸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후에는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 국민의 대다수(85%)가 ‘조지아 정교회’ 신자다.
‘불’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아자르’와 나라의 의미를 지닌 아랍어 ‘바이잔’을 합쳐 국가 이름을 지은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같은 종족으로 국민의 93%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공존한다. 서로 접해 있는 이들 사이에 분쟁은 계속 있어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적대국이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무력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또한 신냉전 질서와 석유 자원을 둘러싸고 강대국들의 개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이 욕심을 낼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하지만 대립과 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코카서스 3국은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사람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땅이다.
웅장한 코카서스 산맥은 만년설과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는 야생화를 비롯해 6400여 종의 식물이 살아 있는 생태의 보고다. 또 빙하 지역 트레킹과 야생화 천국의 고산지대 트레킹, 하이킹 등을 할 수 있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의 땅이다.
산악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척박한 땅 목초지 언덕에 서서 두 팔을 벌리면 BC 4000년경부터 시작된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바람에 실려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골목길 바닥에 깔린 돌들은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세월에 둥그렇게 마모되어 반짝반짝 윤이 난다. 그 위로 하루에 다섯 번, 절대자를 향한 인간들의 애절한 구애의 선율이 울려 퍼진다.
신이 살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던 땅을 인간에게 준 곳이라는 이야기가 허투루 전해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신의 마지막 땅을 받게 된 카르트벨리(Kartveli). 그들이 조지아인들이고, 그 땅이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불렸던 지금의 조지아 땅이다.
이곳 사람들은 비행기의 무사 착륙에 손뼉을 치며 신에게 감사할 줄 안다. 8000여 년의 와인 역사를 가진, 인류 최초로 와인을 만든 나라답게 방문자에게 최대의 배려를 하고 와인을 함께 나눈다. 그것이 하나의 생활이다. 9월이 되면 포도송이들을 신에게 바치는 하비스트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중앙선이 없는 도로, 그 길을 점령한 소와 양떼들 앞에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 풍경이 그곳에 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문화가 있는 땅
생소한 곳을 여행할 때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음식을 불평 없이 먹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지역 음식은 한국 음식과 묘하게 통하는 친밀감이 있다.
야채와 고기류를 쇠꼬챙이에 끼워 포도나무 장작에 구운 샤슬릭(Shashlyk) 므츠바디(Mtsvadi), 요구르트의 일종인 마초니(Matsoni), 다진 고기와 야채와 밥을 포도 잎에 싸서 찐 돌마(Dolma), 한국의 왕만두랑 비슷한 힝칼리(Khinkali), 치즈 피자 맛의 하차푸리(Khachapuri) 등 코카서스 3국 여행은 맛있는 음식을 함께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조지아의 음식 하나하나는 마치 시와 같다’고 극찬을 한 걸까.
이뿐만이 아니다. 코카서스에는 사랑과 강인함, 낭만적 기질의 예술문화도 있다.
어디에서든 두 사람 이상 모이면 자연스럽게 화음을 맞춰 다성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의 폴리포니(Polyphony)를 듣고 있으면 성(聖)스러움이 느껴진다. 전쟁에서 죽은 연인의 무덤을 찾는 이야기의 조지아 민요 ‘술리코(Suliko)’에서는 연민의 정이 우러나온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등장했던 아르메니아 관악기 ‘두둑(Duduk)’의 구슬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면 눈이 저절로 감긴다. 코사크족 이야기인 ‘대장 부리바’에서 배우 율 브리너가 췄던 춤처럼 격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동작에 혼을 뺐기기도 했다.
안전한 치안, 가성비 높은 매력적인 여행지
이토록 경이로움과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 신과 순박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 오랜 세월 지탱해온 종교와 문화, 맛있는 음식이 있는 코카서스 3국은 치안도 안전한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잘 몰라야 더 감동적일 수 있다. 가성비 높은 물가도 놀랍다. 달고 향기로운 복숭아가 10개에 800원 수준이다. 이들도 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때가 덜 묻어 있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여행의 맛이 분명히 다르다. 화려한 감동은 아니지만 풍미가 더 깊게 느껴지는 곳이다. 누군가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사진에서 포토샵으로 인공적인 요소들만 지우면 코카서스가 된다고 말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여정이 끝난 뒤에도 그곳을 생각하면 설레는 마음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코카서스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떨린다. 많은 이야기와 감동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설레는 그 기억들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