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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 닮은 ‘여름꽃’, 털중나리
-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치솟는 6월. 여름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며 뒷산을 오릅니다. 연두색이던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바뀌었고, 길섶은 허리까지 차오른 풀들로 한 걸음 내딛기가 주저될 만큼 무성합니다. 몇 걸음 더 오르자 그만그만한 잡초들을 제치고, 어깨높이 이상으로 껑충 솟아난 꽃이 보입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매혹적인 꽃, 바로 털중나리입니다. 겨우 한 송이 핀 것도 있지만, 대개는 서너 송이가 달려 있습니다. 많게는 열 송이 가까이 달리기도 하는데, 1m 넘게 솟아오른 원줄기 끝에 한 송이, 그 아래 사이사이 좌우로 뻗은 작은 가지마다에도 한 송이씩 다닥다닥 핍니다. 털중나리가 꽃을 피웠다는 것은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털중나리를 비롯해 하늘나리, 중나리, 참나리, 땅나리, 솔나리, 말나리, 하늘말나리, 날개하늘나리, 섬말나리, 누른하늘말나리 등 백합과의 나리꽃들이 곧 우리 땅에서 여름 내내 피고 지는 ‘여름꽃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여 종 나리꽃들의 피고 짐이 털중나리로부터 비롯되기에, 털중나리의 개화는 곧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색은 여름꽃답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은 듯 한결같이 붉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면 붉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홍색(紅色) 일색은 아닙니다. 분홍색의 솔나리와 진한 홍색의 큰솔나리 사이에, 주홍색과 주황색 등 다른 색의 꽃을 피웁니다. 물론 솔나리의 경우 아예 꽃잎이 온통 하얀 흰솔나리, 검은빛이 도는 홍자색 검은솔나리가 따로 있기도 합니다. 털중나리의 꽃은 노란빛이 감도는, 이른바 황적색(黃赤色)입니다. 간색(間色) 특유의 진한 색감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6개로 갈라져 완전히 뒤로 젖혀진 꽃잎, 그 안쪽으로 황적색 바탕에 새겨진 진한 자주색 반점과 6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모두 드러낸 모습은 집시 여인보다도, 삼바 여인보다도 뇌쇄적입니다. 10종이 넘는 나리꽃들 이름의 유래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6개로 갈라진 꽃잎이 하늘을 보면 하늘나리, 땅을 보면 땅나리, 그 중간을 보면 중나리, 줄기 등 전초에 솜털 같은 털이 있으면 털중나리, 꽃잎이 하늘을 보되 잎이 빙 돌려나면 하늘말나리로 불리는 식입니다. Where is it? 털중나리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나 조금만 품을 팔면 만날 수 있는 야생화란 점이다. “제주도와 울릉도를 비롯한 전국의 해발 1000m 미만 지역에서 자란다”는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설명처럼 전국 어디서나 잘 자란다. 그렇다고 도심에서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동네 뒷동산이라도 찾아가야 한다. 서울의 경우 광화문 한복판에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종로구 수성동 계곡에서도 만났다. 다만 각종 공해(公害)에서 벗어날수록 꽃이 더 싱싱하고 탐스러우며 꽃색도 맑고 깨끗하기에, 멋진 털중나리를 만나려면 조금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해발 1000m 미만에서 자란다”는 건 해발 1000m 즈음까지 자란다는 뜻이기도 한데, 높은 곳의 털중나리는 탁 트인 전망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 경남 합천군 오도산 정상에서 일출과 함께 만나는 털중나리는 가히 환상적이다. 경기도 팔당 예봉산 자락과 김포 문수산도 털중나리와 주변 풍광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곳으로 인기가 높다.
- 2019-05-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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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철의 야생화] 자연의 신비, 생명의 외경을 일깨워주는 '너도바람꽃'
- 어느덧 3월입니다. 통상 3월부터 5월까지를 봄이라고 하지만, 도회지에서 조금만 떨어진 산에 가더라도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에선 매서운 한기가 느껴집니다. 산기슭이나 계곡을 바라봐도 파란 이파리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깡말라 거무튀튀한 낙엽만 잔뜩 쌓였을뿐더러, 자꾸 미끄러지는 게 겨우내 꽁꽁 언 바닥이 채 녹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정말 꽃이 핀 게 맞나요?” 아무래도 꽃이 있을 것 같지 않다며 돌아가자는 성화에 스스로 찾을 때까지 지켜보자던 생각을 접고 낙엽 사이 곳곳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라며 탄성을 쏟아냅니다. “어머나, 세상에! 겨울과 다름없는 날씨에 이토록 작고 가냘픈 꽃이 피었다니…” 그렇습니다. 3월이면 꽁꽁 언 산골짝에 바람이 납니다. ‘너도바람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수십, 수백 송이가 활짝 피어 사방에 가득 찹니다. 덩달아 야생화를 찾아 나선 이들도 처음엔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다며 투덜대다가, 어느 순간 하나를 찾더니 곧 지천으로 너도바람꽃이 널렸다며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봄은 발끝에서 온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눈에 보이는 계곡은 아직 얼음투성이이지만, 발밑에선 손톱만 한 너도바람꽃이 봄을 노래합니다. 여리디여린 너도바람꽃이 얼음장 같은 땅바닥을 뚫고 나와 순백의 꽃을 피우는 걸 직접 목도하는 순간 많은 이들이 자연의 신비, 생명에 대한 외경을 체험한 듯 야생화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피는 야생화인 너도바람꽃은 에란티스(Eranthis)란 라틴어 속명 자체가 본래 봄(er)과 꽃(anthos)의 합성어라고 하니, 그 어디서건 겨울잠을 깨우는 봄의 전령사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에 분포하는데, 주로 습기가 많은 산 계곡에서 자생합니다. 콩나물 줄기처럼 생긴 꽃대가 올라와 끄트머리에 흰색 꽃을 한 송이씩 피우는데 다 자라야 10~20cm에 불과합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흰색의 꽃받침 잎이 5~9장 펼쳐지고, 그 안에 수술처럼 보이는 주황색 꽃이 원을 그리듯 빙 둘러납니다. 옅은 분홍색과 흰색의 수술과 암술이 여럿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대개 하나의 꽃대에 하나의 꽃이 달리는데, 경기도 포천 지장산 계곡에서 꽃대 하나에 꽃이 두 개 달린 ‘쌍둥이’ 너도바람꽃을 여럿 보았습니다. 겨울의 끝이자 새봄의 첫머리에서 만나는 너도바람꽃에선?약자의 연약함보다는 강추위도 폭설도 이겨낸?의연함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비록?작고?가냘파 보이지만, 모진 세파를 이겨낸?강자에게서?느낄 수 있는?단단한 힘이랄까 그런 것 말입니다. 특히 복수초 등의 설중화는 꽃이 핀 다음 살짝?내린 눈으로 만들어지는 데 반해, 너도바람꽃은 두껍게 쌓인?눈을 헤집고 올라온, 진정한 의미의 ‘눈속의 꽃(雪中花)’으로 피어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4월에도 눈이 내리는 경기, 강원의 깊은 산에선 눈 속에 묻혔던 너도바람꽃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경이로운 광경도 만날 수 있습니다. Where is it? 전국 어느 산, 어느 계곡에서도 볼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경기 광주 무갑산, 남양주 천마산, 양수리 예봉산 등지가 유명하다. 특히 무갑산 무갑사 계곡과 예봉산 세정사 계곡, 천마산 팔현계곡이 너도바람꽃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며 마구잡이로 찾아다니는 발길에, 더 좋은 모델을 찾는다며 여기저기 훑고 다니는 사진작가들의 욕심에 무참히 훼손당하는 너도바람꽃의 비명을 함께 전한다. “지난해 찢긴 얼굴 성형 몇 번 했어/나도 부러진 목에 디스크래/나는 꺾어진 허리가 펴지지 않아 키가 작아졌어/올해는 밟히지 않도록 조심해” 무갑사 스님이 전하는 ‘너도바람꽃의 속이야기’이다.
- 2016-03-08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