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노화시계가 천천히 가면 좋겠습니다 안중호 외·클라우드나인
나이가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노화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서울아산병원 교수들을 중심으로 17명의 전문가가 노화 지식과 관리법을 담은 책을 펴냈다.
시니어 트렌드 2024 최학희·시대인
37명의 전문가가 은퇴 후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돈, 건강, 시간’을 중점으로 시니어의 삶을 조망하며, 전 세계적인 동향을 알아본다.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 거냐고 한스 할터․포레스트북스
쇼펜하우어, 오스카 와일드, 반 고흐 등 세계적 현자들이 남긴 삶의 마지막 문장인 유언을 엮었다. 책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나를 돌보는 묵상독서 임성미·북하우스
30년 경력의 독서교육 전문가인 저자는 인생 후반기에 도움을 주는 70여 권의 책을 소개한다. 인문학,․철학부터 소설과 동화까지, 전 분야를 망라한다.
▪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
로버트 월딩거&마크 슐츠·비즈니스북스
85년간 행복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하버드대 성인 발달 연구팀 결과에 따르면,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결정적 요인은 재산도, 명예도, 학벌도 아니었다.
▪ 80에도 뇌가 늙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니시 다케유키 · 위즈덤하우스
일본 최고의 뇌과학자는 사고·행동의 축적으로 뇌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일상에서 시도할 수 있는 두뇌가 건강해지는 방법을 소개한다.
▪ 한국의 금표
김희태 · 휴앤스토리
금표는 ‘행위의 금지를 표식’한 것으로, 왕실·산림·사찰 금표 등이 있다. 저자는 전국의 금표 총 78개를 다뤘으며, 금표에 담긴 시대상을 함께 읽어냈다.
▪ 야생의 식탁
모 와일드 · 부키
기후 위기와 자연 파괴로 식량 위기 걱정이 커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자연에서 채취와 야생식만으로 1년을 살아본 저자는 건강해진 후기를 전한다.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지난 22일 뉴질랜드와 조별예선 1차전에서 0:1로 패했다. 전문가들은 선수단이 전체적으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와일드카드로 데려온 대표팀 간판 공격수 황의조에게 패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라도 패인을 찾았다.
경기가 끝난 뒤 작은 논란도 있었다. 미드필더 이동경이 상대팀 선수 크리스 우드의 악수를 거부하면서 경기에서도 지고 미성숙한 매너를 보여줬다고 비판받았다. 승자에 대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시니어들은 최근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과거 올림픽과 같은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시니어들일수록 더 이런 지적을 많이 한다.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 앳돼 보인다. 대회 첫 경기에서 긴장하고 있는 모습은 물론이고, 상대팀의 거친 몸싸움에 경기가 끝나고도 분을 못 이기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지금 올림픽 축구에 출전하고 있는 선수들은 서울 올림픽 출전 당시 선수들보다 나이가 어리다. 1988년 당시에는 30세 골키퍼 조병득이 있었고, 최강희와 최윤겸 등 2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았다. 국내 선수뿐 아니다. 브라질의 베베투, 서독의 위르겐 클린스만 같은 20대 중반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현재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와일드카드’ 제도라고 해서 24세 이상 선수 3명을 쓸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로 부른 황의조, 권창훈, 박지수를 제외하면 모두 만 23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다른 종목에는 없는 나이 제한이 왜 유독 축구에만 있을까.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 나이 제한이 처음 생긴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여자 축구는 23세 이상이어도 참가할 수 있다. 축구전문 미디어 풋볼리스트의 류청 취재팀장은 이에 대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오랜 다툼 때문”이라고 말한다. IOC는 206개 나라 올림픽위원회가 소속된 세계적인 기구다. 스포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FIFA의 위상은 IOC를 뛰어넘는다. FIFA 회원국은 211개로 IOC보다 많다.
FIFA가 4년마다 개최하는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 대회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인기가 많다. 농구, 럭비, 아이스하키 등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월드컵’이라는 명칭으로 대회를 열지만 흔히 월드컵이라고 하면 축구를 떠올린다. 그만큼 FIFA가 개최하는 월드컵의 위상이 더 높다.
그런데 올림픽 축구에서 연령 제한 없이 모든 프로선수들이 참가하게 되면 FIFA 월드컵과 별 차이 없는 또 다른 대회가 만들어진다. 월드컵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는 FIFA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FIFA는 나이 제한 카드를 빼들었다. IOC로서는 불쾌한 일이었지만 FIFA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FIFA는 지속적으로 올림픽을 견제해왔다. FIFA는 프로 선수들도 본격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던 1984년 LA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월드컵 경험이 없는 선수만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그래도 면면은 화려했다.
하지만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되자, 올림픽은 설익은 유망주들의 대회가 됐다. 스타플레이어가 없어 대회 수준은 낮아졌고 흥행도 부진했다. 그러자 IOC는 전체 참가 선수 중 3명은 나이와 상관 없이 포함할 수 있도록 하자고 FIFA에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타협안이 바로 와일드카드 제도다. 와일드카드라는 용어는 한국에서만 쓰고 해외에서는 ‘오버에이지(Overage)’라고 부른다.
결국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부터 24세 이상 선수 3명이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올림픽 메달을 따면 군 면제 혜택이 있어 황선홍과 하석주, 유상철 등 와일드카드로 성인 대표팀 주축 선수들을 투입했다. 가장 최근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손흥민과 장현수, 석현준이 와일드카드로 대회에 참여했다.
비록 불의의 1패를 떠안았지만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은 메달을 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다. 한국 대표팀은 25일 루마니아전, 28일 온두라스전을 치른다.
‘버킷 리스트’, ‘인턴’에 이어 시니어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우리나라 문화와는 다소 다르지만, 미국에서는 유명인사들은 죽기 전에 자신의 사망기사를 써 놓는다고 한다. 일종의 보도 자료이다. 이를 위해 사망기사 전문 작가도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마크 펠링튼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80세 노인 해리엇 역으로 셜리 맥클레인, 사망기사 전문 작가 앤 역으로 아만다 사이프리드, 흑인 소녀 브랜다 역으로 앤주얼 리 딕슨이 출연했다.
은퇴한 광고 회사 보스 해리엇은 자신의 사망 기사를 미리 확정해 놓기 위해 사망기사 전문작가 앤을 고용한다. 그러나 해리엇의 까칠한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해리엇에 대해 저주와 혹평을 한다. 좌절한 앤에게 해리엇은 사망기사에 담겨야할 자신의 철학을 얘기한다.
‘고인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하고, 가족의 사랑을 받아야 하며, 사회적 약자인 누군가에게 우연히 영향을 끼쳐야 하고, 자신만의 와일드카드가 있어야 한다’는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못하니 완벽한 사망기사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같이 찾자는 것이다.
까칠한 성격에 막말을 해대서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났으니 동료들의 칭찬은 물 건너갔다. 같은 이유로 가족의 사랑도 포기한지 오래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장애자나 소수 민족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다. 자신만의 와일드카드는 고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말한다. 유명인사라면 몰라도 해리엇에게는 역시 이렇다 할 수식어가 없다.
해리엇은 느긋하게 변한다. 나이든 노인의 여유이다. 그리고 하나하나 4가지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작전 실행에 돌입한다. 자신의 회사, 전 남편과 딸 등 가족에게도 연락하여 화해한다. 해리엇이 워낙 까칠했기 때문에 돌아 섰던 것이지 본심은 역시 가족이었던 것이다. 딸도 어른으로 성장해 보니 엄마를 그대로 닮더란다. 정신과 의사가 ‘강박성 인격 장애’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문제 흑인 소녀 브랜다를 인턴이라며 데리고 다닌다. 그리고 앤과 브랜다에게 자신의 인생 노하우를 가르쳐 준다. “적극적으로 살 것, 마음을 터놓은 사람이 될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 것, 물속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하지 말 것, 자신의 신념을 두려워하지 말 것” 등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되었고 드센 성격으로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라디오 방송국에도 가서 젊은 디제이를 몰아내고 무보수 디제이를 맡아 음악과 함께 인생의 노하우를 느긋하게 멘트한다.
해리엇은 흥겨운 음악을 틀어 놓고 앤과 브랜다가 춤추는 모습을 소파에 앉아 보며 같이 즐기다가 잠깐 조는 듯 죽는다. 교회에서 가진 해리엇의 장례식은 해리엇이 남긴 막대한 재산을 시에 기증하고 음반은 방송국에 기증하는 등의 선행이 좋은 와일드카드 수식어로 장식된다. 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원래 써두었던 사망 기사보다 더 인간적인 조사를 한다.
필자의 경우, 해리엇의 사망기사 4가지 요소를 적용해보니 해당 되는 것이 별로 없다. 동료, 가족, 사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별 문제 없을 뿐이다. 장애인댄스를 한 것이 약자에 대한 영향을 끼쳤다고는 할 수 있으나 내세울 만 한 것도 아니다.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 것이고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조용히 잊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8월 5일 막을 올리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축구 대표팀 명단이 지난 6월 27일 발표됐다. 손흥민(토트넘) 등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23세 이하 선수 15명과 와일드카드인 24세 이상 선수 3명 등 18명의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이번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 수비수로 누가 뽑히느냐’는 것이었다. 유력한 후보였던 홍정호는 소속 클럽인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가 차출을 거부해 탈락했고 중국 리그 광저우 푸리에서 뛰고 있는 장현수가 뽑혔다. 신태용 감독의 와일드카드 구상은 2+1(수비수 2+공격수 1)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2(장현수+손흥민 석현준)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열린 올림픽에 축구종목이 있었다면 수비수 김호와 김정남은 나이 제한과 와일드카드 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표 선수로 발탁됐을 것이다. 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수비수 네 명이 일(一)자로 늘어서는 포 백을 쓰고 있는 요즘과 달리 1960~70년대에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자리를 잡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1967년 9월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69년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등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김호는 한국 축구의 수비 버팀목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7cm의 김호가 스토퍼로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170cm의 비교적 작은 키인 김정남이 스위퍼로 나서 상대 공격을 쓸어냈다. 김호-김정남 콤비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 축구가 누리고 있는 월드컵 4강 등 명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호의 이력서는 그의 오랜 축구 인생에 견줘 보면 간략하다. 학력은 더욱 그렇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물론 동래고는 축구 명문이다. 김호곤(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박성화(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최용수(중국 장쑤 쑤닝 감독) 등 우수 선수들이 김호의 뒤를 이었다. 김호의 학력을 내세운 이유는 그가 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축구계에 이러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학연과 지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학벌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OO시에서는 OO고를 나오지 않으면 전자 제품 대리점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 OO협회는 OO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호는 은퇴한 뒤 국가 대표팀이든 단일팀이든 어느 팀을 맡아도 학연 지연 등과 관련한 뒷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그랬다. 김호는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제일모직은 뿌리를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의 명문 구단인 수원 삼성의 할아버지쯤 된다. 삼성그룹 계열이다. 이 무렵 실업 축구는 군 축구의 대표격이던 방첩대가 해체되면서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등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실업 정상권 팀에 들어갔으니 김호는 요즘으로 치면 특급 고졸 신인이었다.
김호는 은퇴한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호는 지도자로서도 이력서가 간략하다. 동래고와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 등 지휘한 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팀에서 최소 3년 이상 지휘봉을 잡았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는 얘기다.
김호의 고향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우수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호도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린이 김호가 더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다. 두룡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축구로 60년 축구 인생을 살게 됐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 틈에 끼어 통영시 초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6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했고 김호가 통영중학교에 진학한 뒤 후배들이 3년 연속 우승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그 우승기가 여전히 모교에 있다고 한다. 통영은 우수한 축구 선수가 많이 나온 고장이니 초등학교부 3연속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유소년들이 그랬듯이 김호도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김호는 10대 초반에 들었던 라디오 중계방송 내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무렵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축구를 잘했다.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자유중국에 2-3으로 졌다. 그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김호가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은 경기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이었다. 1950년대 자유중국에도 밀리던 한국 축구는 뒷날 김호가 국가 대표로 뛰게 됐을 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을 8-0으로 이기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김호는 통영중학교~동래고를 거치면서 축구 선수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뛰어난 수비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호도 학창 시절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신세대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레프트 인사이드 등으로 뛰면서 동래고 시절에는 그 무렵 전국 최강인 서울 동북고를 2-0으로 꺾기도 했다.
김호는 1965년 처음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때, 이제는 50년 지기가 된 김정남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남이 레프트백과 하프백을 오갔고 김호는 라이트백이었다. 그때 국가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는 둘의 선배인 김정석이 있었다. 둘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에 나란히 입단하면서 김용식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에 의해 중앙 수비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김호-김정남 콤비의 출발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