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막을 올리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축구 대표팀 명단이 지난 6월 27일 발표됐다. 손흥민(토트넘) 등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23세 이하 선수 15명과 와일드카드인 24세 이상 선수 3명 등 18명의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이번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 수비수로 누가 뽑히느냐’는 것이었다. 유력한 후보였던 홍정호는 소속 클럽인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가 차출을 거부해 탈락했고 중국 리그 광저우 푸리에서 뛰고 있는 장현수가 뽑혔다. 신태용 감독의 와일드카드 구상은 2+1(수비수 2+공격수 1)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2(장현수+손흥민 석현준)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열린 올림픽에 축구종목이 있었다면 수비수 김호와 김정남은 나이 제한과 와일드카드 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표 선수로 발탁됐을 것이다. 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수비수 네 명이 일(一)자로 늘어서는 포 백을 쓰고 있는 요즘과 달리 1960~70년대에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자리를 잡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1967년 9월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69년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등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김호는 한국 축구의 수비 버팀목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7cm의 김호가 스토퍼로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170cm의 비교적 작은 키인 김정남이 스위퍼로 나서 상대 공격을 쓸어냈다. 김호-김정남 콤비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 축구가 누리고 있는 월드컵 4강 등 명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호의 이력서는 그의 오랜 축구 인생에 견줘 보면 간략하다. 학력은 더욱 그렇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물론 동래고는 축구 명문이다. 김호곤(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박성화(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최용수(중국 장쑤 쑤닝 감독) 등 우수 선수들이 김호의 뒤를 이었다. 김호의 학력을 내세운 이유는 그가 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축구계에 이러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학연과 지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학벌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OO시에서는 OO고를 나오지 않으면 전자 제품 대리점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 OO협회는 OO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호는 은퇴한 뒤 국가 대표팀이든 단일팀이든 어느 팀을 맡아도 학연 지연 등과 관련한 뒷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그랬다. 김호는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제일모직은 뿌리를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의 명문 구단인 수원 삼성의 할아버지쯤 된다. 삼성그룹 계열이다. 이 무렵 실업 축구는 군 축구의 대표격이던 방첩대가 해체되면서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등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실업 정상권 팀에 들어갔으니 김호는 요즘으로 치면 특급 고졸 신인이었다.
김호는 은퇴한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호는 지도자로서도 이력서가 간략하다. 동래고와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 등 지휘한 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팀에서 최소 3년 이상 지휘봉을 잡았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는 얘기다.
김호의 고향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우수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호도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린이 김호가 더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다. 두룡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축구로 60년 축구 인생을 살게 됐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 틈에 끼어 통영시 초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6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했고 김호가 통영중학교에 진학한 뒤 후배들이 3년 연속 우승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그 우승기가 여전히 모교에 있다고 한다. 통영은 우수한 축구 선수가 많이 나온 고장이니 초등학교부 3연속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유소년들이 그랬듯이 김호도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김호는 10대 초반에 들었던 라디오 중계방송 내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무렵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축구를 잘했다.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자유중국에 2-3으로 졌다. 그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김호가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은 경기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이었다. 1950년대 자유중국에도 밀리던 한국 축구는 뒷날 김호가 국가 대표로 뛰게 됐을 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을 8-0으로 이기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김호는 통영중학교~동래고를 거치면서 축구 선수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뛰어난 수비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호도 학창 시절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신세대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레프트 인사이드 등으로 뛰면서 동래고 시절에는 그 무렵 전국 최강인 서울 동북고를 2-0으로 꺾기도 했다.
김호는 1965년 처음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때, 이제는 50년 지기가 된 김정남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남이 레프트백과 하프백을 오갔고 김호는 라이트백이었다. 그때 국가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는 둘의 선배인 김정석이 있었다. 둘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에 나란히 입단하면서 김용식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에 의해 중앙 수비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김호-김정남 콤비의 출발이었다.
>>>글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위원,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