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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개막’ 2020 도쿄 올림픽, 뭐가 달라졌을까?
- 시니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는 단연 올림픽이다. 올림픽은 1896년부터 열린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다. 올림픽 여러 종목의 선수 중에는 올림픽 하나만을 위해 4년 동안 준비해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만큼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자랑하는 지구촌 대형 이벤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월드컵과 급격히 커진 e스포츠에 밀려 스포츠 이벤트로서 중요도가 점점 떨어지는 추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쳐 개최 자체가 불투명했던 시기도 보냈다. 올림픽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시니어들에게 올림픽은 최고의 스포츠 제전이기도 하다. 이에 시니어들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다른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브라보는 올림픽을 즐길 시니어들을 위해 이번 올림픽이 기존 올림픽과 어떻게 다른지, 한국 대표팀 관전 포인트에 무엇이 있는지 정리했다. 도쿄 올림픽, 무엇이 다른가? 2020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된다. 지난해 여름에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여름으로 연기됐다. 대회 명칭은 그대로 사용한다. 사상 첫 무관중 올림픽이다. 당초 일본인과 일본 거주자에 한해 관중을 받으려고 했지만 일본 내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해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결국 IOC와 합의해 일본인 관중도 입장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이래 125년 역사상 최초다. 다만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확산이 덜한 미야기현과 시즈오카현, 이바라키현 경기장에는 일부 관중 입장을 허용한다. 러시아 대표팀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됐다. 러시아 체육계 선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국가적으로 도핑테스트 샘플을 은폐하는 등 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중재재판소가 2020년 12월 러시아의 도핑 샘플 조작을 인정했고, 러시아는 2년 동안 국가 자격으로 국제스포츠대회 참가가 제한됐다. 하지만 러시아 국적 선수가 올림픽에는 참여한다. 파견된 335명 선수들은 ‘러시아’라는 국가명 대신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라는 이름을 달고 뛴다. 메달을 따도 시상대에는 국기 대신 오륜기가 올라온다. 국가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으로 대체한다. 경기 종목에도 변화가 많다. 레슬링과 야구가 다시 정식 종목이 됐다. 여성 선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양궁과 수영, 탁구 등에서 혼성 종목이 대거 늘어났다. 사격에서는 진종오 선수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비롯한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되고, 3개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농구는 세부종목으로 남자 3대3 농구, 여자 3대3 농구가 추가됐다. 사이클은 남녀 BMX 프리스타일, 트랙 남녀 매디슨 종목이 추가됐다. 펜싱은 세부종목인 플뢰레, 사브르, 에페 중 남녀 단체전이 1개씩 번갈아가며 제외돼 총 10개 종목만 배정되던 관행이 있었다. 이번에는 관행이 깨지면서 12개 종목 모두 올림픽 세부종목으로 확정됐다. 야구 종목 부활, 한국야구도 부활할까 2008년 베이징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은 영광의 시간을 보냈다.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이승엽 등 황금세대가 김경문 감독 지도로 9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후 야구 종목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2020 도쿄 올림픽에 한해 일본의 국기인 야구가 정식 종목에 포함됐다. 이런 이유로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이다. 야구선수들은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좋은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국내 야구 상황은 좋지 않다. 10번째 구단까지 출범해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코로나 19여파와 e스포츠에 익숙한 젊은 팬의 선호가 떨어지며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뽑혔던 일부 선수가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리그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선 야구팬들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2024 파리 올림픽부터는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진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야구선수들이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을지 모른다. 베이징 황금 세대의 일원이었던 강민호, 오승환 등 베테랑들에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새로운 세대가 수혈됐다. 영광의 세대와 영광의 순간을 보고 자란 세대가 다시 한번 김경문 감독과 함께 베이징의 감동을 재현할지가 주목된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 새로운 도전 대한민국 사격의 전설 진종오는 한국뿐 아니라 올림픽을 통틀어 사격 역사에서 최고 선수다. 올림픽 개인 사격에서 금메달 4개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런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지난 2014년 IOC가 발표했던 ‘어젠다 2020’에 따라 남자 종목과 여자 종목의 메달 숫자를 맞췄다. 원래 사격은 남자 종목 9개, 여자 종목 6개였다. 하지만 어젠다 2020이 내건 ‘여성 참가 비율을 50%’ 방침에 따라 진종오의 주 종목인 50m 권총을 폐지됐다. 또 다른 남자 종목인 50m 소총 복사, 더블트랩까지 총 3개 남자 종목이 폐지됐다. 대신 10m 공기권총, 10m 공기소총, 트랩에서 3개의 혼성 종목이 신설됐다. 진종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13년 동안 50m 권총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많은 선수가 그와 실력을 겨루었지만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은 진종오의 몫이었다. 올림픽 3연속 금메달이라는 업적을 세우는 동안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주 종목이 아닌 10m 공기 권총 종목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4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 진종오는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 ‘신궁’ 김수녕과 함께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발자취 자체가 곧 역사인 진종오가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사격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이 세워진다. 사격의 전설 진종오의 10m 공기권총 남자 개인전은 7월 24일,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은 27일에 열린다. 한편 올림픽 중계는 KBS, MBC, SBS 채널에서 볼 수 있다. 3사 모두 개폐회식과 일부 종목을 4K UHD로 생중계한다고 밝혔다. 특히 KBS는 특설 홈페이지를 통해 TV로 중계되지 않는 종목도 생중계한다. 네이버와 웨이브, 아프리카TV와 LG 유플러스 모바일 TV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올림픽 중계를 볼 수 있다.
- 2021-07-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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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무(無) 흙수저’로 꽉 찬 운을 뜨다
- 눈을 감고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오톨도톨한 점자혼용 명함을 손끝으로 더듬어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상생 염원을 담은 정 이사장의 평생 화두 ‘동반성장’ 의지가 명함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일생은 동반성장이란 궤적을 따라 굵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관악구 신림동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그를 만나 참 좋은 시절, 그때는 그랬지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본다. 운이 꽉 찬 아이, 그래서 운찬이지 ‘정운찬’, 이름을 짓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녀석 운이 꽉 찬 놈이구먼. 사주가 이렇게 좋은데 이름이 뭐 그리 대수라고 식전 걸음을 하셨나? 세상 나올 때부터 운을 가득 차고 나온 놈이니 이름은 운찬이지.” 충남 공주가 고향이지만 7식구가 상경, 도시빈민으로 동숭동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살았다. 식구마다 칼잠에, 한 사람은 앉아서 자야 할 만큼 방은 비좁았다. 11남매 중 살아남은 5남매의 막내, 그나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니 대박 운과는 애초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그는 태아 적 자궁이란 방마저 허락되지 않을 뻔했으니 세상 빛을 본 자체가 운이 좋았다고 할지. 당장 밥 한 숟가락이 절실했던 곤궁한 살림에 입 하나 더 느는 것이 무서워 어머니는 독한 약초를 진하게 달여 마셨다. 그런데 하필 그게 시궁창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익모초(益母草)였으니, 이름 그대로 산모와 태아를 ‘이롭게’ 하여 노산임에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 그로서는 기가 막힌 첫 운이었다. 그러나 27세 결혼 때까지 운찬은 여전히 ‘5무(無)의 흙수저’로 ‘운 찬’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가 크나, 인물이 좋나, 부모가 있나, 돈이 있나, 장래가 있나.” 예비 장인 장모의 평가는 가혹했다. 그러나 타고난 운은 그를 저버리지 않아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컬럼비아대 교수,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 국무총리,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 KBO 총재 등 올해 74세에 이를 때까지 그의 운은 숨 가쁘게 펼쳐졌다. 물론 그에게 운이란 성실성, 정직성과 같은 뜻, 다른 말이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가르치든 대학에 맡겨야 ▶서울대 총장 시절 / 2002. 7 ~ 2006. 7 서울대를 없애려던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학교를 지킨 것을 비롯, 학원자율화 및 지역균형선발제, 소수정예화 정책을 폈다. “대학에는 자율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을 어떤 식으로 선발하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전적으로 대학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역 균형을 위해서는 전국 1700개 고교에서 최대 3명씩 추천받아 그중 1200명을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서울대 정원을 4000명에서 3000명으로 줄여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 도쿄대나 베이징대학이 3000명대, 하버드대는 1600명대, 프린스턴대·예일대·컬럼비아대는 1300명대인 것을 감안하면 대학 수준이 양질의 교육과 비례하는 것은 자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밖에 기초교육 강화를 위해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재학생들이 여유 있게 진로를 모색토록 했고, 대학 내 건물 증설보다 연구비 후원에 중점을 두었다. 삼성, 웅진 등에서 현금으로 1600억 원을 지원받아 그 가운데 100억 원을 자연과학대에 투입, 생명과학부에서 탁월한 인재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삼성의 도움이 커서 현금으로만 500억 원을 지원받았다. 한편 총장 공관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교수 아파트를 증설하여 250여 세대에 삶의 터전을 보급했다. 그 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칭찬을 받았다고 웃으며 회고했다. 세종시 총리 “한 나라에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다” ▶국무총리 시절 / 2009. 9 ~ 2010. 8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 서울대 관계자들은 실망했다. 옛말로 하자면 총장은 대제학이고 총리는 영의정인데 자고로 대제학이 더 품위 있는 자리가 아니냐며. 그깟 총리가 뭐라고, 그것도 시시하게 이명박 정부에서 총리를 하냐며. “당시 광우병 사태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탕평책의 일환으로 제가 발탁된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신도 서민 출신이고 나도 서민 출신이니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마음을 움직였죠. 경제, 사회 양극화 완화 기회가 아닌가. 어려운 사람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싶었던 거죠.” 양극화 완화, 경색된 남북관계 유연화라는 나름의 청사진을 품었지만 취임 6개월 만인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관계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설상가상 세종시 문제가 불거졌다. 그는 임기 시작도 전에 ‘세종시 총리’로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쪽 행정수도 세종시는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 한 나라의 행정부가 둘로 나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대신 세종시를 기업도시, 문화도시, 과학도시화하자고 제안했으나 수도의 꿈에 부풀었던 지역민의 반대는 거셌다. 공주 출신인 총리가 되레 고향 발전을 저지한다며 ‘매향노’란 소리마저 들었다. “그 당시 매 주말마다 15차례 이상 방문하여 지역 대표들을 설득하고, 삼성·롯데·한화·웅진 등에서 기업도시 투자 명목으로 4조5000억 원을 약속받았어요. 그런데 그 안 자체가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세종시 구상은 끝내 무산됐죠. 반대파한테서 차기 대권 노림수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총리를 그만두게 된 거죠. 제 성정이 모질지 못하고, 무엇보다 정파적 언어를 이해 못 했던 데다 정치적 센스도 부족했다고 봅니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10년 5월, 한 중견기업인이 찾아왔다. 연 매출이 7000억~8000억 원 되는데, 대뜸 이민을 가겠단다. 납품가 후려치기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사유였다.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 길로 대통령을 만났다. “중견기업인이 이민 가겠다고 하니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오죽하겠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 나라 파탄난다”고 직언했다. 그해 9월 경제인들이 청와대에 모였고, 같은 해 12월에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 발족했다. 총리직을 물러난 뒤라 그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코로나 무풍지대 한국 야구, 110개국에 중계방송 ▶KBO 총재 시절 / 2018. 1 ~ 2020. 12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긴 이래 매년 20여 회 야구장을 찾았고, 2008년에는 야구 해설도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가 된 후엔 야구계의 동반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이대호의 연봉이 25억 원인 것에 반해 무명 선수는 2700만 원에 불과해요. 연 수입이 100배 가까이 차이 나는 거죠. 어떻게든 올려보려고 애쓴 결과 3000만 원으로 타결되어 미약하나마 선수 간 연봉 격차를 좁힐 수 있었지요.” 각 팀 간의 원활한 선수 교류를 위해 자유계약제를 개선하는 등 구단과 구단 간의 동반성장에도 주력했다. 세계야구연맹 총재와 미국, 일본, 대만, 호주의 커미셔너(총재)를 자주 만나 국제화에도 기여했다. 코로나 시대 최대 성과는 720회 전 게임을 다 치렀다는 것과 게임 기간 중 1군 선수 가운데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유일한 경우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자국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자 미국의 스포츠 전문 방송 ESPN이 전 세계 110여 개국에 한국 야구를 중계한 것도 뜻밖의 수확이었다. 임기 동안 2018년 아시아야구대회 우승, 2019년 세계야구대회 준우승을 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6월 스코필드 박사 동상 제막식 참석차 토론토를 방문해, 보스턴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한 이후, 2018년 미국 올스타 게임 때 뉴욕양키스와 뉴욕메츠 경기에서 또 한 차례 시구한 것이 큰 추억이 되었죠. 메이저리그에서 한 팀의 시구자는 연 10명 정도라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여담이지만 역대 KBO 총재 중 경비원, 미화원들과 함께 식사한 유일한 총재이기도 했습니다.” 약자에겐 비둘기, 강자에겐 호랑이 ▶멘토 스코필드 박사와 조순 교수 캐나다인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와의 만남은 그에게 신의 선물과도 같았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 1970년 국립현충원에 묻히기까지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스코필드 박사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제게는 아버지 그 이상인 분이셨죠. 중학교 때까지 재정적 지원을 해주셨고 저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입주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면서 약자에겐 비둘기처럼 자애롭고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기개를 보여주신 박사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제가 평생 추구해온 동반성장의 모본이 되신 거지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멘토는 조순 교수. 조 교수는 한국 대학이 반정부 데모로 어수선했던 1960년대 후반에 경제학에 대한 그의 흥미를 북돋웠고, 미국 유학길도 열어줬다. 모교 강단에 섰을 때도 그의 옆에는 조 교수가 있었고, 반대가 극심했던 결혼도 조 교수가 중간에서 부드럽게 풀어준 덕에 성사될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 동반성장이 해법이다 ▶48년 해로한 캠퍼스 커플 아내와 가족 간 동반성장도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9년째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76차례 현장 포럼을 진행했습니다. 동반성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뿐 아니라 빈부 간, 도농 간, 지역 간, 남녀 간, 세대 간 등 사회 전반에 적용돼야 하는 희망의 가치입니다. 코로나 이후 저성장과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테죠. 지금도 재택근무자들은 또박또박 월급을 받는 반면 일용직이나 자영업자들은 고통에 내몰리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동반성장으로 가야 합니다.” 한편 가족은 어떤 동반성장을 해왔을까. “아버지는 어린 제게도 반말을 안 하셨어요. ‘~ 하게, ~는 아니네’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핥으실 정도로 아껴주셨죠. 가난했지만 사랑을 흠뻑 받고 자라서 저도 제 아이들을 민주적으로 대합니다. 48년째 ‘동반성장’을 하고 있는 서울대 미대 출신의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존중하며 키웠습니다. ‘아빠찬스’를 쓴 적도 물론 없고요. 아들과 딸이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한다고 하니 이만하면 가정 내 동반성장도 이룬 것 아닌가요?” ‘신아연 작가와 나누는 참 좋은 시절’ 다음 호에는 서울신문사 발행인, 한국일보사 일간스포츠 사장, 국민일보 대표이사, 경향미디어그룹 회장 등을 거치고,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내며 400여 편의 장편 및 중단편소설을 낸 베테랑 신문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를 만납니다.
- 2021-07-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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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만점 열대식물 매력 탐구
- “여기 한국 아니죠?” 한 SNS에 올라온 사진에 달린 댓글이다. 스크롤을 올려보니 사진 속엔 셀 수도 없이 많은 열대식물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마치 동남아시아 휴양지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발리도, 다낭도 아닌 이곳은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 열대식물 애호가 이대호(42) 씨가 손수 가꾼 하나뿐인 정글이다. ‘가을=단풍’의 공식을 깨고 사계절 내내 열대식물과 함께한다는 이 씨. 쌀쌀한 가을날, 그의 집에 방문해 열대식물의 매력을 탐구해봤다. 답답한 도시생활, ‘몬스테라’가 건넨 작은 위로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자라고 난 이대호 씨는 어느 날 각박한 도시생활에 염증이 났다. 빽빽한 인파 속에서 숨 돌릴 틈 없이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 고된 몸을 누이면, 마음 한구석 고향 생각도 나면서 왠지 모를 갑갑한 기분에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 무렵 이 씨는 단순한 계기로 식물 몇 종을 돌보기 시작했다. ‘남들 다 키우니 나도 키워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처음 키우기 시작한 식물은 몬스테라였다. 몬스테라는 ‘이상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몬스트럼’(Monstrum)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어원처럼 이파리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듯한 독특한 모양새가 특징이다. 범상치 않은 외형 때문에 성인 몸집만 한 몬스테라는 ‘몬스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드센 생김새와는 달리 다루기 쉽고 편해 식물 집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식물이다. 이 씨 또한 몬스테라의 개성 있는 매력에 빠진 사람 중 한 명이다. 몬스테라를 돌보며 식물에 재미를 붙인 그는 자연스레 다른 열대식물도 집 안에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초보 집사였던 이 씨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식물을 희생시키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몬스테라는 그의 곁을 굳건히 지켰다. 그렇게 1년 8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자그마했던 몬스테라가 천장에 닿을 만큼 ‘폭풍성장’하는 동안, 이 씨는 250~300여 개의 열대식물로 집을 가득 채웠다. 회색빛 도심 속에서도 자연의 푸름을 느낄 수 있도록 살고 있는 집을 숲처럼 만든 것이다. ‘필로덴드론’으로 만들어낸 정글 2018년 초, 몬스테라를 시작으로 열대식물의 세계에 입문한 이 씨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거실 전체를 식물 공간으로 꾸민 ‘거실 정원’을 만들었으며, 더 많은 식물을 들일 수 있도록 2층 테라스를 확장 공사했다. 때마침 발육이 빠른 열대식물들은 경쟁하듯 몸집을 키워나갔고, 테라스가 가득 채워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씨의 ‘테라스 정원’에는 다양한 열대식물이 살고 있지만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필로덴드론속 식물이다. 필로덴드론은 알려진 종류만 수천 가지가 넘는 넝쿨 식물로, 화분에서 키우는 직립형과 벽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형이 있다. 그중 이 씨의 테라스에 줄지어 있는 것은 필로덴드론 파스타짜넘, 필로덴드론 마메이 실버클라우드, 필로덴드론 베루코섬·멜라노크리섬 교배종 등이다. 잎이 하트 모양으로 둥글고 넓적하다. 얼핏 보면 모두 똑같은 종 같지만, 잎의 색이나 질감 등은 다 다르다. 열대식물 중 필로덴드론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씨는 마디를 잘라 다른 화분에 옮겨 심는 방식으로 개체수를 늘린다. 넝쿨형 필로덴드론은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지지대를 세워준다. 번식을 시키다 개체수가 너무 많아 감당하기 버겁거나 공간이 부족할 땐 지인에게 나눠주거나 SNS를 통해 분양한다. 흔하지 않아 아름다운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 “희귀하고 독특하잖아요.” 열대식물의 진정한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다. 실제로 필로덴드론을 비롯해 대부분의 열대식물은 우리나라에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씨가 애지중지하는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도 열대식물을 직수입하는 한 블로거를 통해 겨우 구했다.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는 이파리 안에 딸기색 반점이 콕콕 박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질감이 두껍고 거친 대부분의 열대식물과는 달리 잎이 얇고 포슬포슬해 마치 한지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울에 동면을 시켜줬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심어야 해서 손이 꽤 가지만, 그 고고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그리 수고로울 것 같지도 않다.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와 같은 희귀 열대식물은 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어렵사리 구해도 정보가 많지 않아 키우면서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이에 열대식물 집사들은 주로 카페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정보 품앗이’를 한다. 직접 키우면서 겪은 경험담과 정보를 공유해 그들만의 데이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씨 또한 처음 식물을 키울 때 네이버 카페 ‘알뜰한 식물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올해 3월부터는 인스타그램 채널을 열어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 있다. 식물의 ‘시옷’ 자도 관심 없었던 평범한 회사원 이 씨는 최근 실내 정원 관리사로 직업을 바꿨다. 식물을 키우다 보니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싶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 “앞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지금보다 더 많이 키우면서 분양도 하고, 지인들에게도 종종 나눠주려고 해요. 사계절 내내 푸릇하고 싱그러운 열대식물의 진가를 많은 분이 알면 좋겠어요.”
- 2020-10-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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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70년을 빛낸 스포츠 스타들 -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 광복 70년을 맞는 2015년 현재, 스포츠는 경제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한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이후 한국인들의 스포츠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를 창립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했다. 글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국제무대 활약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하계대회(마라톤 김은배·권태하, 복싱 황을수), 1936년 베를린 하계대회(마라톤 손기정·남승룡, 축구 김용식, 농구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그리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대회(스피드스케이팅 김정연·이성덕·장우식) 등 총 3차례의 올림픽에 모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을 뿐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올림픽에 나섰고, 필리핀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일본은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처음 참가한 뒤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 종합 8위(금 6, 은 4, 동 8)에 오르는 등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는 세계 수준은커녕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안에 한국은 세계 스포츠 10강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를 먹고살 만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줬던 한국 스포츠의 광복 후 70년을 살펴본다. 혼란기 이끈 두 효자 종목 복싱과 역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도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45년 11월 26일 이 땅의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경기 단체도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축구협회 등이 속속 탄생했다. 1945년 10월 27일 열린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이어졌다. 올해 제96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은 1920년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며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한국은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두 대회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열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과 1952년에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전쟁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의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고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1940~50년대에 참가한 3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는 복싱과 역도였다. 한국 스포츠의 메카 태릉선수촌 개장… 치열한 남북 경쟁 해방 이후 70년,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진천선수촌에 자기 자리를 거의 물려줬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지 않은 한국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리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선전하는 한편 196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해방 이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스포츠 코리아’를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이 스위스와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난 회담이었으나 남북 스포츠 관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공동 입장 등 일정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1960년대에는 개인 종목의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띤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고, 김일이 이끈 프로 레슬링은 당시 국내에서 해마다 개최한 유일한 국제 대회인 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함께 국민적 볼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북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1972년 뮌헨 대회 사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먼저 따자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양정모(레슬링)의 금메달로 응수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1974년 테헤란·1978년 방콕)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제 경쟁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스포츠의 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표어가 ‘선 체력 후 기술’이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에 오른 김진호, 1978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인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등이 이 무렵 한국 스포츠의 슈퍼스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 올림픽, 한국 스포츠 도약의 발판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만든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꽃을 피운다.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 온 국력의 집결 과정이었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아픈 기억은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서 화합의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1980년대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축구와 민속 경기인 씨름이 프로화돼 스포츠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축구의 경우 프로화에 따른 경기력의 발전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등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했고 북한은 금메달 17개와 은메달 19개, 동메달 20개를 차지해 스포츠의 남북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등은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1980년대의 스타플레이어다.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을 굳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홈의 이점을 살려 종합 순위 4위(금 12, 은 10, 동 11)에 오른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7위(금 12, 은 5, 동 12)를 차지하면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그해 알베르빌(프랑스)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계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후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은 쇼트트랙을 주력 종목으로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와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의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는 등으로 인해 종합 순위 13위(금 3, 은 3, 동 2)로 주춤했지만 2018년 평창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하계 올림픽에서도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은 8, 동 7)이 쏟아지면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원정 대회 최고의 순위였다. 축구가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동메달을 따 국민들에게 금메달 이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에 앞서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이승엽, 류현진, 이대호 등이 힘을 모은 야구가 9전 전승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스포츠는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아마추어의 경우 국제 대회 성적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있으며, 프로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뛰고 있다. 특히 여자 골프는 199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현재 통산 25승에 빛나는 박세리의 뒤를 잇는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의 그린을 휘어잡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사실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대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딴 듯 기뻐한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프로 야구가 800만 관중을 겨냥하고 있고 다양한 종목의 생활 체육이 활성화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스포츠와 즐기는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후 70년, 속도를 우선시하며 나타난 압축 성장의 폐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명철(申明徹) 스포츠 평론가 편집국장과 편집위원,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3년 버팔로(뉴욕주) 유니버시아드대회, 1995년 프로 야구 한일슈퍼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취재했다.
- 2015-07-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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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단신] 모두투어 메이저리그 여행 등 4개 야구테마 상품
- ◇모두투어, 류현진·추신수 경기 관람 후 미국 여행 = 모두투어는 류현진(27·LA 다저스)과 추신수(32·텍사스 레인저스)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 여행상품을 출시했다. 류현진 상품은 4월 8일부터 8일간의 일정(아시아나항공·주 2회 출발)으로 LA 다저스 홈구장인 다저스타디움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2연전 중 첫 경기를 내야석에서 관람한다. 경기 관람 외에도 LA 다저스 스타디움 퍼블릭 내부 관광과 스포츠 아웃렛 매장, 그랜드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 자이언캐니언 국립공원, 라스베이거스, 은광촌 등의 일정으로 구성된다. 요금은 최저 99만원(유류할증료·각종 팁·비자 불포함)이다. 추신수 상품은 4월 6일부터 10일간의 일정으로,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정경기를 관람한다.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 등의 일정으로 진행된다. 요금은 최저 349만원(유류할증료·각종 팁·비자 불포함)이다. ◇글로벌스포츠투어, 오승환·이대호 경기 관람 후 일본 여행 = 글로벌스포츠투어는 일본 프로야구 관람 여행상품을 내놨다. 5월 23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이 상품은 오승환(32·한신 타이거즈)과 이대호(32·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소속팀 맞대결 2경기 관람이 포함된 패키지 여행이다. 후쿠오카 야후돔에서 열리는 한신과 소프트뱅크의 2경기를 3루 측 지정석에서 관전한다. 특히 전문 인솔자와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해 언어적 불편을 해소할 수 있도록 했다. 숙박은 후쿠오카 뉴오타니 호텔과 벳푸 후게츠 호텔이다. 경기 관전 외에도 후쿠오카와 벳푸 지역 명소 관광 스케줄이 포함돼 있다. 벳푸는 일본의 온천 명소로, 가장 잘 알려진 온천은 간카이지온천이다. 이곳의 온천수는 수로를 통해 인근의 호텔과 리조트에 공급된다. 요금은 87만9000원(유류할증료·각종 세금 불포함)으로 선착순 30명이다. ◇하나투어, 후쿠오카 여행 후 이대호 경기 관람 = 하나투어는 일본 후쿠오카 여행 후 일본 프로야구를 관람하는 여행상품을 선보였다. 3일 동안 아소산 활화산과 유후인 온천마을 등을 둘러본 후 올 시즌 오릭스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한 이대호의 경기를 선택 관람할 수 있는 상품이다. 요금은 3월 출발 기준 69만9000원이다. 아소산은 높이 1592m로 구마모토현과 오이타현에 걸쳐 있는 일본의 명산이다. 세계 최대 칼데라 복식화산으로 아소국립공원이 주요부를 형성한다. 기리시마 화산대의 북단과 하쿠야마산 화산대가 마주치는 지점에 있다. 안개 낀 아침으로 유명한 유후인온천은 호수 주변에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와 아기자기한 소품을 판매하는 거리가 조성돼 인기다. ◇여행박사, 이대호 경기 보고 일본 자유여행 즐기고 = 여행박사는 일본 프로야구 관람 후 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는 상품을 출시했다. 이대호의 소속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경기 티켓을 포함한 3일간의 일본 자유여행 상품으로 왕복항공권과 호텔 숙박권 등으로 구성된다. 요금은 최저 22만9000원이다. 3만569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후돔은 1993년 4월 개장, 소프트뱅크의 전신 다이에의 홈구장으로 사용됐다. 일본 최초 개폐식 돔구장으로 메이저그리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로저스센터와 같은 방식이다. 야구장 주변에는 하카다만과 해상공원 등의 위락시설도 갖췄다.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일본 야구 문화와 열기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 선수의 출전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만큼 사전에 경기 일정과 티켓 확보 여부를 확인하고 출발하는 것이 좋다.
- 2014-03-21 1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