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드’ 배우 황석정
모두가 아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기원전 13세기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 간의 전쟁 이야기를 다룬다. 그 방대한 텍스트 속에는 이름을 다 읊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신과 병사가 등장해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며, 전투를 벌인다. 반면 원작을 기반으로 한 연극 ‘일리아드’에는 오직 단 한 명의 배우가 무대에 선다. 그녀는 100분간 전장을 이끄는 영웅이 되었다가, 이들을 태우는 말(馬)로, 초월적인 신으로 변신하며 그 치열한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두려움이란 무기를 쥐고, 무대라는 전장 속에 홀로 뛰어든 배우 황석정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학로 연극은 오랜만이다. 소감이 어떤가?
저는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해서 젊은 날에 고생했던 기억이 대학로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사실 이곳에 오는 걸 꺼려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 사랑하면 오히려 싫어지는 거. 돌아오니까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함께 작품 하던 배우, 스태프도 없고, 심지어 제가 연극을 했다는 걸 모르는 분들도 있고요. 이제 내가 서 있을 곳은 없구나 싶었어요. 고향이 재개발된 기분? 근데 저는 두려우면 오히려 도전하는 사람이거든요. 두려움을 무기 삼아 용기를 냈죠.
작품에 어떤 매력을 느껴 참여하게 되었나?
개인적으로 고전을 굉장히 좋아해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내면에 자양분이 되어주잖아요. ‘일리아드’도 신화 속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시대에 맞게 잘 풀어낸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또 제가 맡은 역이 남자예요. ‘일리아드’를 쓴 시인 호메로스 입장을 대변하죠. 여러 가지로 좋은 도전이 될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어요. 이 작품은 힘이 닿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수록 호메로스처럼 더 깊이 있고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내레이터’ 역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
흔히 아는 ‘내레이터’처럼 상황을 객관적으로 읊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일리아드’에는 전쟁을 치르는 이들 간의 대립 관계가 있잖아요. 인물 각각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려 하고, 가슴 아파하는지 표현하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극의 중심을 잃지 않고 전쟁의 잔혹성을 비판하죠. 큰 이야기를 아우르는 만큼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1인극인 만큼 부담도 클 텐데, 어려움은 없나?
안 어려울 수가 없죠. 1인극은 제가 기둥이 돼야 해요. 감정을 내보내고, 쓸어 담고, 통제하는 과정을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죠. 혼자서 집을 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것 같달까요? 게다가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3자로서 타인의 감정을 대변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죽어가는 사람들, 고통에 젖은 사람들의 이야기를요. 그래서 공연하는 날은 새벽부터 사제의 마음처럼 경건해져요. 신화에 나오는 그림처럼 돌덩이를 메고 산을 오르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기꺼이 올라야죠.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면?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해 적의 진영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인 당사자지만, 프리아모스를 보는 순간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라 시체를 돌려주며 눈물을 흘려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분노를 놔버리고 함께 울어요. 우리도 살면서 명예나 자존심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리르고 후회하는 순간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그 장면이 좋더라고요.
작품을 통해 관객이 느꼈으면 하는 바는?
지금이야말로 ‘일리아드’를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이 세상도 전쟁통과 다를 바 없잖아요. 패권 다툼부터 환경 문제까지 무기만 안 들었지 무언가와 맞서 계속 싸우고 있죠. 그 과정에서 분명 희생되는 존재도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하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요. ‘일리아드’는 그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줘요. 평소 고전을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도 흥미롭게 감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뮤지컬 '일리아드'
일정 9월 5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2관
연출 김달중
출연 황석정, 최재웅, 김종구
교보문고 광화문 세미나실에서 ‘생각의 깊이 사진으로 더하다’라는 제목으로 달을 넘기며 강의한 내용이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출판사에서 제안한 인문학이란 단어에 손사래를 쳤다. 솔직히 부담스런 제목이었다. 그런데 몽골에서 다시 인문학을 꺼내 들 일이 생겼다. 아직 추운 몽골 봄 평원에서 인문이란 단어가 푸른 하늘로 경쾌하게 피어났다.
사진기를 들고 며칠째 몽골의 부자를 따라다녔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부자란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요즘 재물의 척도는 물론 돈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몽골 부자는 양과 약대를 많이 치고 있는 사람이며, 몽골 정부로부터 ‘새끼 잘 키우는 목자 상’을 받은 사람이다. 난 이 부자를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한 마을 공무원과 경찰까지도 애를 먹였다. 몽골 거부라는 그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떠돌아다녀야 하는 그의 일 때문에 그들을 찾기가 참 힘들었다.
어렵게 그들을 만난 후 내게는 부자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유목민에게는 자기가 키우는 생명의 수를 늘리는 것이 목표이지만 돌보는 가축이 많아질수록 생활은 고단하고 삶은 바빠진다. 유목민이란 시장에서 사료를 사다 먹이는 목축업자가 아니라, 자기 가축을 위해 날마다 신선한 목초와 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목자가 거느리는 가축의 수가 늘수록 다른 이웃 유목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먼 변두리 지역으로 떠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서 내가 만난 몽골 유목민 부자는 아주 단출한 집 한 채만 갖고 있었고, 살림살이에도 사치가 없었다. 좋은 옷을 입고 누구에게 자신의 부를 뽐낼 일도 없다. 몽골 유목민의 삶을 지켜보는 것은 부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일깨우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른 봄, 마침 가축들이 새끼를 낳을 때였다. 그의 가족들은 벌판 여기저기에 낳은 새끼들을 가죽 부대에 담아오기 바빴다. 목자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갓 태어난 새끼들은 늑대에게 잡혀 먹히고, 추위와 바람에 얼어 죽기 때문에 목자의 식구들은 말과 오토바이를 이용해 생명과 시간을 최대한 아꼈다.
부지런히 새 생명을 거두고, 종일 그런 어미들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그나마 나은 초장을 찾아다니다 날이 저물어 양과 염소를 몰고 돌아온 몽골 부자 바뜨비앙의 얼굴에는 오늘도 지친 기색이 없다. 어린 생명이 가여워 이처럼 그들을 하루하루 돌보다 보니 어느 날 번성해 떼를 이루었단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는 일이 보람 있고 재미있어 매 순간이 행복하고, 우러나 하는 일이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바뜨비앙의 아이들은 어린 양과 염소들을 한 마리씩 들어보고 어미가 기다리고 있을 우리 방향으로 던져준다. 새끼들에게 들볶이지 않고 잠을 잘 잔 어미들이 젖을 줄 시간이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엔 그 녀석이 그 녀석 같은 어린 양과 염소들의 어미를 분별하는 아이들의 눈썰미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학교에서 배운 인문학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에서 시작한다. 그 얘기 중 전쟁을 마치고 귀향길에 하데스로 내려간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전우 아킬레스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자 대답하는 말의 의미가 심장하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위로하지 마시오, 내가 여기서 죽은 자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차라리 재산도, 이름도 없는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며 살고 싶소!”
죽음의 위력에 굴복해 살고 있는 당시 사람들을 일깨우는 호메로스의 위대함이 그 말에 있다. 사고의 전환을 선언하는 서양의 첫 서사시는 그렇게 열린다. 결국 생명! 특히 인생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것에서 인문학은 방향을 잡는다.
몽골에서 가장 약대와 양이 많다는 몽골 부자의 아이들은 막상 사설학원에 갈 시간도, 부자 부모의 돈을 쓸 시간도 없다.
저만치 떨어져 막 태어난 양과 염소를 돌보면서 바뜨비앙 부부가 아이들에게 외친다.
“누가 어미인지 잘 모르겠거든 아빠 엄마에게 물어봐라!”
아직 추운 중앙아시아 너른 봄 평원에서 사람의 무늬[人文]가 푸른 하늘을 채우고 있다.
함철훈(咸喆勳) >>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Gems of Central Asia',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Quando il Vento incontra l’Acqua'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