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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화하는 日 노숙자, 60세 이상 70% 차지해
- 일본의 노숙자가 고령화하고 있다. 평균 연령대도 약 2세 높아졌으며, 60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생노동성은 2021년 11월 노숙자 1300명을 대상으로 지자체 직원들의 개별 면접 조사를 실시했다. 후생노동성에서 실시하는 ‘노숙자 생활실태조사’는 5년에 한 번씩 진행된다. 2021년 ‘노숙자 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숙자 중 60세 이상은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특히 70세 이상 비율은 34.4%로, 지난 2016년의 19.7%보다 14.7%p 증가했다. 노숙자의 평균 연령대는 63.6세로 2016년 대비 2.1세 높아졌다. 노숙 생활을 한 기간이 10년 이상인 사람은 전체의 56.3%, 20년 이상인 사람은 25.1%였다. 이들이 잠을 청하는 곳은 공원이 27.4%로 가장 많았고 하천이 24.8%로 뒤를 이었다. 현재 수입을 얻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전체의 47.9%였으나, 이 중 80%는 월수입이 10만엔(약 98만 원) 미만이었다. 향후 일을 하면서 자활하고 싶다고 응답한 사람은 19.3%였으며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응답은 39.9%에 달했다. 생활이 어려운 이들을 지원하는 NPO 법인 ‘홋도플러스’(ほっとプラス)의 후지타 타카노리(藤田孝典) 이사는 NHK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취업이 어려운 나이이거나, 연금을 받고 있어도 집세를 낼 수 없다는 이유로 노숙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늘고 있다”면서 “생활 보호뿐 아니라 부족한 상담 제도를 마련하는 등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원책을 생각해야 한다”고 전했다.
- 2022-10-0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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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1호 ‘술 평론가’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술이여!” 한산 소곡주에 취한 그가 감흥에 못 이겨 한밤중 끼적였다는 한마디다. 주선(酒仙) 이백이 그 모습을 봤다면 그냥 가지 못하고 배틀 한번 붙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술 향을 맡았다가 낯선 길로 들어섰다는 허시명(56) 씨. 우리 술 찾아 20여 년간 유랑하듯 전국을 떠돌더니 어느 날 술 얘기 좀 해볼 때가 됐다며 막걸리학교를 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술 인문학 바람의 신호탄이었다. 술 기행 떠났다가 아예 술 평론가가 되어버렸다는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술과 함께하는 삶을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고 한다. 우리 술과의 인연은 기자생활을 그만두면서부터 시작됐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당시 우리나라 최고 인문 사회 교양지였던 ‘샘이 깊은 물’에 입사해 글을 쓰던 그는 5년 만에 사표를 쓰고 나온다. 기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이후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며 여행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양조장에서 우리 술 빚는 장인들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곰삭은 옛 문화를 발견하고, 더러는 불운했던 역사를 들여다보며 그는 우리 술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술 관련 책만 벌써 네 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중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 들어가 고문헌의 기록들을 뒤지더니 2005년에는 우리 술 원형을 찾아 일본 유학까지 감행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행지에서 만난 양조장에 들렀다가 평생을 우리 술에 바친 장인을 만났어요.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술을 한 잔 마셨는데 한 편의 글이 저절로 써지더라고요. 그 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술 기행을 시작했죠.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술 찾아 떠납니다.” 우리 술,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할 때 주당천리. 그가 자신의 술 기행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다면 나중에는 돌아오는 길을 잊거나 잃어버린 채 썼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여기가 어디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나 술이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옛 주당들의 흔적을 발견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게 했다. 주당천리를 돌고 나자, 우리 술이 기록해온 유무형의 길들을 인문학적 이해 없이 제조·기술자·소비자 구도로만 인식해온 현실도 아쉬웠다. “좋은 술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술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의아합니다. 술 마시고 사고 친 얘기는 해도 술 빚은 사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막걸리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수백 개의 양조장이 있고 그곳에서 만든 막걸리 맛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막걸리 맛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죠. 이제는 인식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내 입맛에 맞는 막걸리, 차별화된 막걸리, 새 막걸리를 찾아 마시며 그 맛을 품평해봐야 해요.” 술 기행하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빚어낸 다양한 술을 맛본 후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맛과 향기를 느끼기보다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십니다. 술이 내 몸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요. 음식들의 순환 사이클에 대해 잘 모르는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음주법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없어요. 술 마실 나이 됐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마셔라 하는 상황이죠. 그러면 어른들은 제대로 마실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취하면 누구라도 미투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이게 우리의 술 문화 현실입니다. 술은 마시고 취하면 사고나 치는 음식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돼왔고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던 것 같습니다. 술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죠.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가 술과 공존해야 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저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제대로 한번 장을 마련해 그 역할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 술의 유통과 판매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현대의 술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공모함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이 자기 존재를 알리려면 자본이나 광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에 담긴 문화의 힘이 있으면 순항할 수 있다고 봐요. 모든 술이 함선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러는 쪽배가 되기도 하고 나룻배가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수강생들로 북적이는 ‘막걸리학교’ 그가 쓴 첫 막걸리 책 ‘막걸리, 넌 누구냐?’를 읽고 허영만 만화가는 “이제야 비로소 막걸리 종주국의 체면이 서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주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느라 그가 공을 들인 시간과 노력과 실천이 우리 술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2009년에 문을 연 막걸리학교는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하나의 결실이다. 개교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삼청동에 있던 학교는 1년 전 남산으로 이사를 해 39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그동안 졸업한 학생이 2000명을 훌쩍 넘는다 하니 이런 열풍도 드물다. “1기생 모집 때는 이틀 만에 수강생이 다 차더니 2기 때는 단 몇 분 만에 마감이 되어 얼떨떨했습니다. 해외에서도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어, 우리 막걸리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하고 놀랐어요. 지금도 수강생이 만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만큼 술 교육에 목이 말랐던 모양입니다. 프로그램은 주로 전통주 시음, 술과 관련한 인문학 강좌, 술 빚기 강좌, 하우스 막걸리 창업 강좌, 우리 술 해설사 강좌 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먼 지역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 2013년에는 부산 분교도 열었습니다.” 허 교장은 남주북병(南酒北餠, 서울의 남촌은 술맛이 좋고 북촌은 떡 맛이 좋다 하여 이르던 말) 이야기를 해주며 스토리가 있는 남산 막걸리의 시대를 열고 싶다고 했다. 인문학 체험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컸다. 막걸리학교에선 술 마시며 토론하는 수업시간이 인기다.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 전통막걸리와 개량막걸리 등 다양한 막걸리를 통해 지금까지는 몰랐던 맛들을 경험한다. 색상, 탁도, 향기, 첫맛, 뒷맛 등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해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술에 사로잡혀 비틀대거나 주정이라도 부리면 바로 퇴학 조치가 내려진다니 아무리 흥에 겨워도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시니어와 막걸리의 아름다운 동거 젊은 사람들도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역시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막 은퇴한 사람들이 막걸리학교의 큰 고객이다. 특히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공부한다. 시골에서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우리 술을 빚어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수익을 얻기 위해 막걸리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하우스 막걸리 제조가 가능해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사람도 꽤 있다. 허 교장은 막걸리 교육을 받고 장인의 경지로 깊어지든, 벗들과 나눠 마실 술을 소박하게 빚든 둘 다 괜찮은 공부라 말한다. “대학 교수, 신문사 기자, 음식점 주인, 직장인, 농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일들이 정말 다양해요. 나이도 그렇고요. 이번에 75세 어르신이 오셨는데 친구랑 같이 공부하러 왔다면서 ‘우리 나이 합치면 150이야, 쉿 이건 비밀이야’ 하셨어요. 술 빚어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려 배우러 왔다는 말씀에 ‘선생님, 참 건강하시네요. 일흔이 넘어 마시고 싶은 술이 있다는 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운동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건강 지키셔야 해요’라고 응원해드렸어요. 건강을 잃으면 좋아하는 술도 못 먹게 돼요. 저는 수강생들과 술 기행 가면 ‘술 한 잔에 1km!’ 하고 무조건 걸으라 합니다.(웃음)” 그러고 보니 그의 주량이 슬쩍 궁금해졌다. 막걸리학교 교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릴 만큼의 만만치 않은 주량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들에 비하면 약해요. 같이 대화를 하는 게 좋아 한 잔씩 하는 정도죠. 대학에 들어와 마시기 시작했으니 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술 마시는 줄도 모를 걸요. 말술 마시는 술꾼이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매일 소량이라도 술을 마시게 돼요. 저는 술맛을 느끼고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과음은 하지 않습니다.” 술꾼만이 술맛을 알 것이라는 통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술을 마실 때는 술맛과 향기를 제대로 감상할 것을 강조한다. 수업시간에 “당신이 가진 언어로 가장 길게 이 술맛을 표현해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후각과 미각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훈련이다. 술 한 잔 앞에 놓고 대숲 소리를 듣고, 달과 대화를 나누고, 국화 향 속에 흠뻑 젖어버렸던 옛 주당들의 풍류가 새삼 부럽다. 가끔 월하독작(月下獨酌)의 흉내라도 내어봐야 할까? 혼술 시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우리 사회는 혼자 술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자 혹은 술꾼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술은 독작(獨酌)이라는 말도 있지요.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내면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면 그게 바로 혼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시간 넘게 우리 술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듣고 나니 마치 대숲 바람 부는 양조장에서 백발의 장인이 빚은 탁주 한 사발 시원하게 마시고 온 기분이다. “술에 대해 논하려면 입으로 마시고 가슴으로 하라”는 그의 말이 오래 발효하는 시간들이다.
- 2018-09-0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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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카운티의 행정수장, 미셸 박 스틸 대한민국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다
-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 2017-04-26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