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하고 65세에 은퇴한 뒤 일본어 학교 교사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나가시마 에쓰코(永嶋悦子, 71세)씨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나가시마 씨는 일주일에 네 번 유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결혼 후 출산을 망설일 정도로 일이 너무 좋았던 나가시마 씨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2년간 금융업계 누빈 커리어우먼
나가시마 씨는 1975년 산와은행(三和銀行, 현 미쓰비시도쿄UFJ은행)에 입사했다. 산와은행에서 17년간 일하면서 긴자지점 지점장대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계열 회사인 에스에이서비스(エスエサービス, 현 미쓰비시UFJ웰스어드바이저스 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겨 6년 동안 재무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전근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금융업계라고 볼 수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산와종합연구소(三和総合研究所, 현 미쓰비시UFJ리서치&컨설팅)에서 19년 근무하고, 2017년 42년간 몸담았던 금융계를 퇴직했다. 나가시마 씨에게 과거 금융업계에서 일했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을 묻자 연구소에서의 일화를 꼽았다.
“산와종합연구소에서 일했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기업의 경영 상담도 하고, 관공서에서 수탁받은 조사 업무도 했죠. 가끔 금융 세미나 강사로 초청되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리포트 작성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 같아요.”
45세, 출산을 선택하다
나가시마 씨의 이력을 보면 선구적인 여성으로 정년퇴직까지 걸어온 커리어우먼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힘든 순간이 있었다. 과거에는 금융기관 합병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상사와 부하로 만나 다른 기업 문화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단다. 또 같은 수준의 보고서를 내도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받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은행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남녀고용기회균등법(1986년 시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출산 후에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가시마 씨는 44세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고, 45세에 첫 출산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일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출산할 때까지 직장을 쉬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가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 지내던 어머니가 나가시마 씨의 육아를 도왔기에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1986~1991년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였다. 당시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투자 과잉으로 주택과 주식 가격이 나날이 높아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가시마 씨는 그동안 저축했던 돈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했는데, 이후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큰 손해를 보았다.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도 1억 엔 이상의 대출이 남아 있었어요.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죠. 경제 파산이 얼마나 큰일인지 경험했어요. 하지만 남편이 ‘그 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옆에서 설득했죠. 이후 7년 동안 월급과 보너스를 모두 은행 대출 갚는 데 썼어요. 두 번의 전직으로 받은 퇴직금도 고스란히 대출 상환에 썼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투자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다시 시작한 커리어, 일본어 교사
금융업계에서 42년 일한 그녀는 어떻게 일본어 학교 교사로 커리어를 전환하게 된 걸까. 나가시마 씨는 연구소에서 퇴직 직전 정부 수탁조사 업무를 하다가 ‘일본어 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흥미를 느껴 퇴직 후 바로 자격 시험에 도전했다고 한다. 일본어 교사 자격증은 문화청에서 추천하는 420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면 취득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 전국 일본어 교사는 4만 1755명에 이른다. 독립행정법인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따르면 외국인 유학생이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본어 학교는 약 600개가 있으며, 학생 수는 약 6만 명에 이른다.
나가시마 씨는 퇴직 후 6개월 정도 일본어 학교에 다니며 일본어 교육 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800명 정도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니는 도쿄 기타구의 JCLI 일본어 학교에 취직했다. 나가시마 씨는 대학교나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유학생반을 담당하고 있다. 비상근 강사로 일주일에 네 번 근문한다. 주 2회는 오전 11시 5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일본어 지도를 하고 주 2회는 대학원 진학 희망자를 대상으로 오전 8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개별 수업을 진행한다. 연구계획서 작성법, 면접 연습, 소논문 지도를 담당한다. 이후 오후 2시까지는 추가 개별 지도를 한다.
“제가 담당하는 반은 진학이 목표여서 대부분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아요. 초급반에는 네팔,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유학생이 많고요.”
과거에는 한국 유학생도 많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베트남, 네팔 유학생이 많다고 한다.
“요즘 일본으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을 보면 얼마나 상냥하고 착한지 몰라요. 중산층 자녀들이 일본으로 유학 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중국이 한 자녀 정책을 할 때 태어난 아이들이라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나가시마 씨를 만나러 JCLI 일본어 학교를 방문한 날, 학교 측에서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필자도 교단에 섰다. 나가시마 씨의 말처럼 중국 유학생들의 순수하고 해맑은 눈빛이 보였다. 특강 후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장래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열정이 엿보이는 시간이었다.
퇴직 후 얻은 보람
나가시마 씨에게 퇴직 후 일본어 교사 커리어를 선택해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제가 열심히 지도한 학생이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저를 찾아와 ‘정말 고마웠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느껴요. 금융기관에서 40년 이상 일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제가 일한 경험, 인생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미래가 유망한 젊은 유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도록 돕고, 그동안 가르쳐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교사로서 무척 뿌듯한 일일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연구 테마를 같이 고민하고 방향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최고로 즐거워요. 학생의 연구 테마를 보며 새로운 지식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 순간도 아주 설레고 신나죠. 그렇게 힘을 합쳐 대학원에 합격하고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많아요.”
학생들과 교류하며 보람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가시마 씨에게 교사는 무척 매력적인 직업이다. 또 하나의 장점은 긴 휴가가 있다는 점이다.
“3개월의 수업 기간이 끝나면 일주일의 쉬는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에는 국내나 해외로 가고 싶었던 여행을 떠나요. 저에게는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노년에 잡은 행복의 파랑새
“지난달 은행 직원들 모임이 있었어요. 30여 명이 모였는데 여자는 저 혼자뿐이에요. 다들 70대가 됐으니 지금 뭐하는지 물었더니 절반 정도는 회사의 사외이사나 감사 일을 하고 있대요. 어떤 기업에 감사 관련한 일이 생기면 과거 금융기관에서 알고 지낸 동료나 선후배에게 소개한다더군요. 일종의 네트워크인데, 여자인 저에게는 그런 정보가 들어오지 않아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나가시마 씨가 말했다.
“저는 금융과 전혀 관계 없는 일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재미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저는 정년까지 했던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즐거워요. 이 일은 취미를 살리는 일과 같아요. 한 달 평균 10만~15만 엔 전후로 큰 수입은 아니지만, 연금 외에 충분한 용돈 벌이도 돼요. 일본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감각도 얻을 수 있고, 전철 타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나가시마 씨처럼 4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하며 어느 정도 저축도 해두었고 퇴직금도 있으면서 연금도 매달 받는 경우라면, 무리하게 일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 노후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시마 씨는 특히 여성 시니어에게 일본어 교사를 추천했다.
“여성에게는 일본어 교사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정년 후에 큰 무리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도 많지 않고요.”
현재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나가시마 씨에게 앞으로의 꿈이 있는지 물었다.
“일본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이제는 세계의 도시를 찾아 다니면서 혼자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어요.”
자립한 여성이라면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고 묻자 “지금! 지금이에요!”라며 주저 없이 말하는 나가시마 씨. 활짝 웃던 그녀의 목소리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일본의 버블 경제라는 파도에 휩쓸려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온 그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유학생들의 꿈을 함께 실현하는 교사라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멋진 삶이 아닐까!
자격증에 관심을 두는 중장년이 늘어났다.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의 도구로 자격증을 취득하듯, 시니어 역시 재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노소를 떠나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은 시간, 돈 낭비에 그치기도 한다. 2019년 등록된 자격증 수는 3만2000여 개. 관심 있는 자격증 정보를 선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에 고민인 중장년을 위해 자격증을 분야별로 나눠 알아보려 한다. 이번 호에는 ‘이번 호에는 ‘문화·예술’ 분야를 소개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한국산업인력공단, 한국관광공사
은퇴 후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지역 대표 미술관, 박물관 등에 방문하는 등 문화생활을 즐기는 중장년이 많아졌다. 큐레이터나 도슨트, 문화해설사 등 문화·예술 계통의 직업군에도 관심이 모아지며, 관련 자격증이나 교육을 희망하는 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PART1. 국가기술자격
문화·예술 분야 국가전문자격으로는 ‘박물관및미술관준학예사’(이하 준학예사)가 있다. 소위 ‘큐레이터’라 일컫는 ‘학예사’가 되기 위한 초입 관문 중 하나로 보면 된다. 학예사는 준학예사와 1·2·3급 정학예사로 나뉜다. 석·박사 학위(전공무관)가 없다면 준학예사 자격 취득과 경력인증을 통해 정학예사에 도전할 수 있다. 상위 급수로 올라갈 때마다 경력이 추가로 요구되는데, 누적경력이 아닌 하위 급수 취득 후 경력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3급에서 1급까지 최소 12년의 경력이 필요하다. 준학예사의 경우 학력에 따라 준학예사 자격시험 합격 후 실무경력을 1년(학사 이상)에서 5년(학사, 전문학사 미취득자)까지 쌓아야 한다. 즉, 목표하는 급수에 따라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을 투자해야 하는 셈이다.
정학예사부터는 경력인증(재직경력, 실습경력 등)을 통해 급수가 올라가기 때문에, 관련 시험은 준학예사 필기만 치르면 된다. 그야말로 한 우물을 파는 전문 분야라 응시자와 합격자 수가 타 자격증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다. 지난해 기준 50대 이상 필기 합격자는 15명으로 20대 이하 합격자(158명)의 10%에 못 미쳤다. 그러나 50대의 합격률은 44%로 전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물론 관련 전문가들이 응시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PART2. 국가기술자격
손재주가 좋은 이들이라면 기술을 익혀 개인 공방을 여는 꿈을 가져봤을 것이다. 몇몇 기관이나 아카데미 등에서 공예수업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자격증을 위한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예기능사는 응시자격에 제한은 없고 실기시험 시 주어진 도면에 따라 6시간 정도 작업을 수행하면 된다. 지난해 공예기능사 실기 합격자 수는 목공예 59명, 석공예 2명, 도자기공예 283명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목공예기능사의 경우 최근 3년간(2016~2018) 응시자 수는 2배 이상씩 증가했으나(46명→131명→274명) 평균합격률은 38%→73%→48%로 변화폭이 크게 나타났다.
PART3. 민간자격
준학예사나 공예기능사 등은 자격 취득 후에도 전문가로 활동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중장년에겐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은퇴 후 문화·예술 분야 활동을 원하는 이들은 민간자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자격시험보다는 훈련이나 교육이수 등을 통해 수료증을 취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활동할 수 있는 주요 직업으로는 문화관광해설사, 역사문화체험지도사, 전통놀이강사, 도슨트 등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경우, 광역지자체에서 연간 선발 계획 수립 및 선발 공고를 하는데 지자체별 선발 시기, 규모, 자격요건 등이 달라, 주기적으로 관련 정보를 살펴봐야 한다. 지자체에서 신규 교육생으로 먼저 선발된 후 한국관광공사 또는 지자체에서 선정한 위탁교육기관을 통해 신규양성과정(100시간) 수강 신청이 가능하다. 이후 지자체에서 정한 현장수습(105시간)을 이수해야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주로 지방자치단체나 지역 내 문화재시설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할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2019년 8월 기준 전체 인원 대비 50대 이상의 비율이 약 90%에 달한다. 교사(역사, 과학, 미술 등) 출신이거나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외국어 가능자가 활동에 유리한 편이다. 많은 돈을 벌기엔 적합하지 않고, 거의 자원봉사 형태로 문화재 탐구를 즐기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도전하기에 좋다. 지속적으로 문화,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며, 관광객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과 청중 장악력 등이 요구된다.
깊고, 넓고, 짙고, 푸른 강 같은 느낌이었다. 휘몰아침 없이 잔잔해 보이지만 물속 안은 빠르게 흐르기도 하고 느린 속도로 쉬기도 하다 소용돌이를 만들어 새롭게 정리한다. 그리고 또다시 흐르는 강물 말이다. 인생을 두고 큰 그림 그릴 생각은 없었을 게다. 그저 걷다 보니 길이 만들어졌고 어딘 가에 서 있었다. 인생 속에서 받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호응하며 살아온 방송인이자 역사학자 정재환(丁在奐·58)을 만났다.
장소 제공 숲숨
훤칠한 키에 중절모를 쓴 신사가 대나무 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교수님 소리가 좀 더 자연스러워진, 우리 세대에게는 미남 개그맨으로 기억되는 정재환이다. 현재 그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이 잘생긴 교수님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나이 든 교수라고 생각하겠죠. 육십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학생들이 볼 땐 ‘진짜 할아버지 교수가 들어왔구나’ 할 겁니다.”
역사학 교수로서 강단에 서고,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각종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 자리를 맡아왔던 그. 정재환은 마음에 꽂혔다 싶으면 간만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갈 데까지 가보는 강한 의지로 산다. 마흔에 대학에 들어가더니 박사가 됐고, 한글 역사 연구를 위해 일본어를 배웠다.
잘나가는 개그맨, 역사학자 되다
정재환은 긴 세월 연예인으로서 대중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더욱 특별했던 이유는 이경규, 이주일, 이용식 등 한눈에 봐도 성격 강한 개그맨들 사이에서 재치 있는 언변과 입담이 필수인 스탠딩 코미디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조곤조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엉뚱한 말을 쏟아내면서 가랑비가 옷 적시듯 관객에게 장난을 걸었다. 이게 제대로 먹히면 청중들은 크게 환호하며 웃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농담을 좋아했어요. 오락부장도 했고 친구들 만나서 웃기기도 하고요.”
방송이 우리말로 하는 활동이다 보니 한글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한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됐다. 하나만 잘하는 것도 힘든데 너무나 다른 분야들에 찾아들어 지독하게 몰두하며 살아왔다. 마치 럭비공이 지구 반대편을 찍으며 크게 지나다닌 삶 같다고 말을 건넸다.
“럭비공이죠. 아마 다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면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은 처음 봤네요.(웃음) 젊었을 때는 뭘 좀 하다가 다른 게 하고 싶어지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반드시 했습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요. 20대 중반 넘어서면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쉽사리 포기하는 일 없이 뭔가를 꾸준히 했습니다.”
안정적으로 방송 생활을 하던 정재환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겠다며 마흔의 나이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뜻밖의 선택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방송 관련 학과가 아닌 사학과로 진로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제가 살면서 관심사 중 큰 것 세 가지만을 말씀드리자면 첫 번째는 방송이죠. 또 하나는 한글이었고, 마지막은 역사였어요. 전공 선택 때 이 세 가지를 놓고 고민했어요. 연기예술은 방송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스스로 공부하자. 국어국문학은 한글운동 열심히 하면서 필요한 책을 열심히 보자. 그렇게 정리하니 남은 게 역사였어요. 그렇다면 한글과 국어 문제를 역사적으로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은 거죠. 일반적인 선택을 했다면 연기예술이나 국문학이었겠죠. 제가 역사를 택했기 때문에 튀어보인 거 같아요.”
학사과정을 3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석사에 이어 박사학위까지 마친 정재환. 사람들은 그가 방송계로 돌아올 생각이 없나보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방송일에 대한 더 큰 열망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인기라는 건 파도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인기 있는 사회자로 살겠다는 생각은 헛된 꿈입니다. 단, 좋은 진행자가 되겠다. 이건 가능하다고 본 거죠. 두루두루 공부해놓으면 프로그램에 조금씩이라도 반영될 것이고 좀 더 나은 프로그램을 시청자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들이 가지 말라는 길은 알아서 잘도 찾아갔다. 앞뒤 안 보고 그냥 자신만을 믿고 끝까지 파내려갔다. 특히 박사과정을 앞둔 정재환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학자도 있었다. 박사과정만큼은 편하고 유리한 길을 택하길 권유받았다.
“혹시나 제가 연기예술 쪽을 택했더라면 전임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분이 왜 그런 얘기를 저에게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어요. 비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죠. 저는 진짜 현실감각이 없어요. 실리가 있다 없다를 판단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역사 공부를 끝까지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선택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학문에 관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는, 요즘 보기 드문 학자의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그가 방송에서 사회를 보는 것과 강단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형식상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전에는 대중이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학생들이 있는 대학 강단으로 주 무대를 옮긴 것뿐. 슬랩스틱 코미디가 대세이던 시절 그는 늘 꼿꼿하게 마이크 앞에 섰다. 지금도 여전히 강연을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인 모든 신분을 다 떠나서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제가 개그를 하던 시절에요,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방청객이 막 웃더라고요. 그럼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을 느끼는 거예요. 내가 웃겼구나. 다들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어요. 웃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처음에는 뭘로 사람들을 웃기지? 스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고민을 했겠죠. 그런데 일하면서 보니까 내가 사람을 웃기는 건 그들을 잠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더라고요. 지금은 이제 뭐 그 무대에서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지만요. 가끔 요즘 젊은 개그맨 후배들을 보면, 다 예뻐 보여요. 그들의 개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힘든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웃고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길 없는 길에 매력을 느끼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신의 생활신조라고 말하는 정재환.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았고 할 수 없는 일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도 물론 욕심 있겠죠. 버려지지 않는다면 줄이기라도 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40대부터는 철저히 버리고 줄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해서 좋더라고요. 욕심을 내려놓으면 크게 걱정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뭔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시간이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실행에 옮기며 살아왔다. 일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보였지만 정재환이기에 가능했다.
“‘정 선생은 길 없는 길을 가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30대 때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인상 깊게 읽기는 했죠. 그래요. 저는 ‘길 없는 길’에 대한 매력을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몰라요. 성인이 되어서 더 남들이 안 가는 곳, 안 하는 것에 대해 재미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제가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격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제 마음에 드는 일을 해요. 재미없는 일은 안 하는 게 맞고요.”
변한 세상에는 영어가 필요하다
세상 요구에 발맞추기 위해 나이 50이 넘어 영어 공부에 흠뻑 빠져버렸다. 작년 10월에는 영어 공부와 관련한 경험담을 엮은 책 ‘나는 오십에 영어를 시작했다’를 출간했다고.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지금까지 영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20대 때 영어 공부를 좀 해보려고 학원도 등록해서 다녔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결국 그때는 포기한 거죠. 한글문화연대에서 한글운동을 하면서 영어건 다른 외국어건 부차적인 것으로 봤어요.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이 변한 거예요. 과거에는 직업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외국어를 구사하면 됐는데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를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생각보다 학생들의 영어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선생이 되어 영어를 못해도 되나 싶었다고 했다.
“영어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제가 교수가 된 2013년 첫 학기 때였습니다. 한 학기 마치자마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1년 예정하고 갔다가 1년 5개월 있었습니다. 쉰셋 되던 해였는데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
영어는 활용도가 높은 언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어를 할 줄 알면 다양한 영역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리고 시니어에게 고스톱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학 공부라는 얘기를 접했다.
“어학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건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나덕렬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저도 오십이 넘어서 어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언어는 말하고 듣고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잖아요. 집중해서 단어와 표현 등을 외워야 하죠. 그것도 꾸준히 지속적으로 말이죠.”
정재환도 영어 공부를 시작한 이후 쉬지 않고 말하고 듣고 읽기를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미국 드라마를 틀어놓고 대사도 따라 해본다. 중·고등학생용 영어 역사책을 보거나 SNS으로 외국인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또 어학연수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필리핀 영어 선생과도 꾸준하게 화상 통화를 한다.
할아버지 교사를 꿈꾸는 교수
공부가 일종의 직업이 된 삶을 사는 정재환. 그는 이미 준비하고 있는 미래의 직업이 있다고 했다. 완숙한 노년기에 접어들면 동네 할아버지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왔다.
“60대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사회활동을 하겠죠. 물론 70대에도요. 책을 쓴다든가 가끔 어디서 불러주면 가서 특강을 한다든가 이런 거는 할 수 있겠죠. 몇 살까지 살지 모르지만 더 나이가 들면 제가 사는 동네에서 할아버지 교사를 하려고요.”
요즘 지역에 도서관이라든가 평생학습관이 잘되어 있으니 기관과 협의를 해서 공간 하나를 구하거나 혹은 직접 얻어서 60대 중후반 이후의 삶을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의사도 변호사도 훌륭하지만 그분들도 결국 선생님이 키워내는 거잖아요. 제가 좋은 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학교에서 강의는 계속할 것 같고요. 그 뒤에는 동네에서 한국사 강의도 하고, 아직 영어가 시원찮지만 그때가 되면 가르칠 만한 수준은 되지 않겠어요? 아이들에게 영어도 가르쳐주면서, 동네에서 그렇게 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 악수를 하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멀뚱히 검정색 스쿠터 옆에 서는 정재환. 알고 보니 자동차도 아니고 수원에서 서울 강남까지 스쿠터로 달려왔다는 것. 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설까. 정재환의 반전 매력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정재환
역사학자 겸 방송인. 1979년에 친구 유성찬과 개그듀엣 ‘동시상영’을 결성해 MBC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로 방송계에 데뷔했다. 1989년 MBC 코미디 프로그램 ‘청춘행진곡’ 진행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2000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해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글 역사를 깊이 공부하기 위해 배운 일본어는 유창한 정도이고, 현재는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저서로 ‘나는 오십에 영어를 시작했다’, ‘큐우슈우 역사기행’,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등이 있다.
나는 수원이란 작은 동네 서둔동에서 살았다. 초등 1학년부터 결혼할 때 까지 이사 한 번 안 하고 컸다. 서둔동에는 서울 농과대학과 진흥청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오랫동안 수원의 교육열이나 교육관계의 문제라면 모두 통계로는 전국 1위권이었단다. 수원에서 자라는 동안 연습림이라는 하늘이 안 보이게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밭을 놀이터로 뛰어다니며 그 왼쪽으로 달려가면서 산속에서 나는 따먹는 앵두, 보리수, 오디, 산딸기... 건 다 우리들 것이었고 버섯이라든지 나물들은 우리의 밥상 반찬이었고 화가 나도 서러워도 산 속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노랠 불러가며 풀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배우면 뭐든지 다 실험할 수 잇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개미에 대해 배운 날, 나는 쇠로 된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산으로 가서 개미 집 구멍에 그걸 깊이 끼워서 위로 세차게 올려 보면서 개미들이 만든 집 구조를 열심히 공부했다. 내 공부를 위해 놀란 개미들이 번데기를 입에 물고 질서정연하게 도망가는 걸 어리석음에 공부하는 거라고 불쌍히도 안 여겼으니... 언딘가로 이어지는 행렬은 대답했고 작은 구멍은 작은 집이었고 큰 구멍은 으리으리한 대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개미’ 란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많이 슬퍼했었다. 하나 밖에 모르는 단순한 애였었다.
그러한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 축산학과 교수가 아버지로 형제는 5이었고 딸이 넷인 딸부자 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화산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출산 주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임신한 내내 입덧이 심해 고생은 했지만, 낳을 때는 별로 큰 아픔도 없이 세상 구경을 나온 나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줬다고 한다. 날짜도 안 잊어버린다며 7월 13일에 사과가 먹고 싶다하니 아버지가 그 당시 근무하던 사리원 중학교 학생들이 익지도 않은 풋 사과를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왔더라나? 아마도 아무리 찾아도 사과를 구할 수 없으니 학생들에게 말한 듯하다며, 어머니가 먼 하늘가를 가끔 바라본다. 너무 일찍 가버린 낭군님이라도 생각하는지...‘뭐가 그리 바빠 정년도 못 채우고 갔는지...’ 하며 요즘엔 입버릇이 되었는지 더욱 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하얀 칼라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귀밑 2센티미터의 머리로 자르고 다녀야 하는 중학생이 되자 제일 큰 사건은 우리 집 우편함에 연애편지가 다발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배원 아저씨는 노끈으로 묶은 편지 다발을 뒤흔들면서 내 동생들과 일하는 언니를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게 했다. 밤에 그걸 읽어대며 쿡쿡 거리고 신나할 생각으로 달뜨게 하는 편지다발이었다. 정작 읽어야 할 본인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벌을 받는 기분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내게 중, 고등학생 시절은 길에 다니는 남자들은 나를 그냥 보내면 섭섭했던 듯...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하는 말은 ‘내가 자기들 말에 홈빡 속아 넘어 갈 듯 순진하게 보이나봐. 병신같이 쉽게 생긴 거지 뭐~~’ 대학에 갈 목적이 서 있던 나는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정직하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엔 눈도 안 돌렸다. 제일 바보라는 모범생으로 6년을 보냈다. 시시콜콜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저 배우고 공부하면서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 나와 오만가지 구경에 빠지기 시작한 거였다. 만나는 것, 보는 것들이 다 생소했고 흥미유발에 호기심 난동이었다. 배울 것, 사람 만날 일, 영화와 연극 볼 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일, 숙제할 일, 모르는 곳 찾아다니기...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지면서 즐기다 보니 내가 보기에 언제나 오동통했었는데 몰라보게 아주 급 날씬해져버렸다. 더군다나 버스 안에서의 투쟁은 나에게 큰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콩나물시루 버스타기가 다이어트의 주요인이었지만 집에서부터 40여 분을 넓은 대로를 내 맘대로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던 여고 시절 12년간의 여유로움과 조용함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렸다. 홍릉과 신촌을 오가는 1번 버스는 S대와 Y대 학생들과 우리들을 가득가득 실어 나르기 바빴다. 완전 짐짝 같았다. 그 속에서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는 정말로 끝이 없는 얘기 거리다. 그런데 5월부터 데모를 해대는 바람에 휴교령이 내려져 수원 집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로 서울로 가고 그 대신 수원 살림을 내가 도맡게 되어버렸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아버지 시중드는 것과 처음으로 두 여동생 도시락 준비와 청소 집안 일 그리고 세끼 밥 해 주는 일이 내겐 버거웠고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 편했던지 가을이 되면서도 어머니는 내 생활을 되돌려 주지 않아 나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서울로 통학을 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 하는 통학생 생활에 어리바리 적응도 어려워 힘 드는 판에, 남학생들은 새로움을 맞아 즐기는 속에 나는 밀려들어 쳐 박히게 되었다. 봄(입학시즌)에는 없었는데 가을바람 부는 계절에 새로운 여학생이 나타났다는 뉴스는 첫 칸부터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통근열차기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E 여대 배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의 S대, Y대, E대 생으로 구성된 코라스(지금은 판코라고 함)라는 클럽의 힘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클럽 남학생들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으며 늦게 타도 자리는 언제나 맡아져 있었다. 그 덕으로 심심한 적도 없이, 내가 일학년이니 모두가 선배님들이라 든든했다. 집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나는 남자들의 세계를 처음 새색시 방을 몰래 숨어서 훔쳐보듯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 접했다. 여러 가지 성격의 남자들을 한꺼번에 대해 가면서 생소한 경험들을 했다. 남동생은 한참 아래였고 딱 아버지라는 남자 한 사람이 있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에게는 무엇이든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도 같은 문장과 단어들이지만 나랑은 완전 다른 반응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해하기 쉽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보여 ‘으응?’ 하는 날들이 많았다. 점점 약아져 가는 나를 얼핏 발견하고는 웃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떤 일이든지 면전에서는 아무 것도 트집을 잡는 다거나 이상한 발언을 못하는 성격이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이해해줘서 모든 것들은 다 편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대학 생활은 평탄했고 놀라운 재미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활동도 해 가면서 잘 보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실력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 오는 9월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소리와 함께 은행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초등 담임 교수님께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은행으로 가는 거냐며 호통을 쳐서 무서웠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똑똑 이였으면 그 교수님 심중의 깊은 뜻을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뭘 알았을까? 기껏해야 교수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정도였으니... 그렇게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으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멍청이였으니.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철이라곤 없는, 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밥통이었던 나였음이었다. 자기주장이 약했고 남이 살아 주는 듯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못 벗어난 덜 떨어진 상태로 그때 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계속 꿈을 꾸면서 이뤄지리란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고모에게 여러 가지 작문을 지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배워서 외우면서 언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 일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혼해서 나의 보물 1호와 2호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남편이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갈래 길로 갈팡질팡 이었다. 가자니 4학년이었던 위의 아들이 5,6년 있다가 오면 교육적인 문제로 학교생활 적응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이란 나라는 어려서부터 ‘왜놈, 아니면 일본 놈..’이라면서 36년간의 설음으로 뭉친 원한 맺힌 선생님들과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경험담들을 귀에 딱지 앉을 듯 교육 받으며 살아왔었던 지라 겁도 났었다. 한국을 업신여겨 아이들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서려왔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남편의 우격다짐은 담임선생님과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나의 소원이었던 일본어는 외국인에게 일어를 가르칠 수 있는 일어 교사자격증을 따는 정도의 실력을 쌓게 되었지만,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심각했다. 내 꿈은 저절로 이뤄졌지만, 나의 보물 1,2호는 쪽발이라는 수모까지 받아야 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위상을 빛내며 멋진 형제로 뛰어난 아이들로 칭송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모국에 와서 더군다나 강남 8학군이라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기가 막혔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무식한 선생님들이 쪽발이라면서 구박을 일삼았다나?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선배들이 심심하면 교육시킨다며 데리고 가서 때렸다고... 두 형제는 딱 하루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완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야. 어떻게 자기 나라가 더 어렵고 힘든 거지? 이해가 안 돼’ 라며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거역하고, 한국으로 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두 녀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집을 피워서라도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하는 후회막급한 날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물 안 개구리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와 당해 가며 사는 세상은 험악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것도 상식을 벗어났고, 공중도덕이 없는 세상은 우리 식구를 어느 늪 속에 내동댕이쳐버린 거 같았다. 계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 갔다. 명랑 발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을, 언제나 즐거웠던 대화를 잃어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주 놀랍게도 똘똘 뭉치는 가족애를 만들어 갔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가며 일본에서 배워서 익혀 온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달팽이처럼 속으로 감춰가며 간직해가며 살아냈다. 우리가 겪어낸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이란 글을 거실에 걸어 놓고 새겨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굳은 의지로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늦으막하게 나마 익혀 가며 깨달아가며 말이다.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의 안쓰러운 눈물 닦아줘 가며 그렇게 아프게 살아가며 덕을 쌓아오고 있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의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우릴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 일은 우릴 마구 두들겨 팼다. 깡패가 이유를 묻나 불문곡직하고 두들겨 패면 맞아야 하는 그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 속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졌다. 우리는 그 나락으로 계속 떨어져 갔다. 나의 1호 보물이 슬어져 갔다. 겨우 남은 2호 보물과 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법이란 것에의 올바름에 억울하기만 한 원통함과 원망, 용서, 거짓말. 진실, 미움, 그리움, 보고픔, 사랑, 하늘, 별, 내 아들.... 내 아들... 나의 인생 50년이 마감되던 날이었다. 1995년 11월 20일 새벽이 나를 개벽시켰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넋 놓고 있기를 거부했다. 세상 밖의 어지러움 속으로 스며들며 이겨내려 발버둥을 친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은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봐야지...번데기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날아 봐야지... 나비야 네가 허공으로 새 삶을 위해 날아오를 때, 나도 나의 새 삶을 위해 네다리 폴짝 거리며 연못으로 뛰어 들 꺼야...
“인생이 열 배는 더 재밌어진 것 같아요.”
이춘계 씨는 지금 택시기사다. 하지만 그의 지난 경력은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부장, 삼성SDS에서는 금융개발팀 팀장, 그리고 삼성에서의 마지막 경력을 삼성SDS의 협력사인 화이넥스의 CEO로 현역을 마친 소위 삼성맨, 그것도 아주 뼈가 굵은 삼성맨이었다. 자신이 택시기사임을 밝히는 그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아주 시원하게 자신이 하는 일이 재밌다고 말했다. 1953년 생, 서울대 출신 삼성맨, 올해로 예순 두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꾸준하게 쌓아 올린 탄탄한 경력을 가진 이 남자가 택시기사를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이춘계 씨는 30년에 걸친 삼성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2009년 1월 1일부터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시간에 쫓기던 생활만 겪다가 한가롭게 시간을 낚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게 되니 너무도 좋았다. 그러나 유유자적도 한 두 달이 지나 3개월이 되니 지루함으로 변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수도 하루 이틀이지…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자”
“저는 사범대 물리교육과를 나왔어요. 그런데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는 바람에 한 번도 교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교사를 해보자, 싶어서 공부를 했죠. 그런데 교장을 하는 친구에게 ‘내가 기간제 교사로 과학 선생을 할 수 없겠느냐’ 물어봤더니 이 친구가 단칼에 자르는 거예요. 친구는 ‘너가 하는 얘기는 알겠고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학교 풍토가 기간제 교사들도 다 젊은 교사들만 뽑는다. 학교의 소비자는 학생이잖느냐. 이 학생들이 나이 든 교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일 없이 집에서 지내던 이 씨. 그러던 어느 날 2009년 5월 1일 오후 9시 KBS뉴스에 시선을 확 끄는 뉴스가 등장했다. 외국인관광택시(International Taxi) 발대식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택시기사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년 500만 명에 달하고 그 중 130만 명이 택시를 이용하는데 가장 불편사항이 언어 소통 문제라고 한다. 영어 또는 일어 소통이 가능한 운전자를 선발하여 외국인관광택시를 운행하게 함으로써 언어소통을 원활히 하고 부당요금 과속난폭운전을 근절하여 외국인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고한다는 취지였다.
택시기사로의 첫걸음, 녹록치 않았다
이 씨는 삼성에서 근무할 때 일본NEC와 교류가 많아 일본어는 어느 정도 가능했기에 딱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외국인관광택시 운전 자격 취득 절차를 물어 보았다. 3개월 이상 영업용 택시 운전 경력이 있어야 하고 서울시에서 위탁한 회사에서 실시하는 영어 또는 일어 구술 시험과 인성 면접에 합격하면 된다고 했다.
2009년 7월 1일, 이 씨는 드디어 6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마감하고 택시기사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사가 잘 안 나왔다. 그래서 매일 운행 시작하기 전 10번쯤 큰 목소리로 구령 조정을 했다.
이 씨는 택시기사가 수입에 비해 근무여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걸 인정했다. ‘항상 사고위험을 안고 근무한다(Dangerous). 매주 주야간 교대 근무로 밤과 낮이 바뀌는 생활에 신체가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Difficult). 가끔 술 취한 손님이 주정부리거나 토하거나 하면 대책이 없다(Dirty)’는 점에서 택시기사는 3D 업종이었다.
“서울 250여 개 택시회사에서 운영하는 차량대수가 23,000대 정도 됩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택시기사 부족으로 5~10%는 가동을 못하고 있습니다. 근무여건이 이렇게 열악한데 누가 하려고 할까요? 신규로 택시운전자가 100명이 취업을 하면 한 달 이내에 50명이 퇴직하고 3개월까지 다시 25명이 퇴직합니다. 택시기사로 입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택시운전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지난해 개인택시로 전환하면서 5년째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기로 한 결과다.
“‘가만히 놀고 있으면 100만 원이 거저 생기나?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정도로 낮춰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집사람도 같은 생각입니다.”
“150만 원도 황송하다”
이 씨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얻게 된 3D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 즐겁다(Delightful). 택시기사는 상사나 부하 직원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 혼자서 일하기 때문이다. 고객을 만들고 유지시키는데 힘들 일이 없다. 수주 매출 수금이 대부분 한 시간 이내 이루어진다. 보험설계사 같은 경우 한 사람의 고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이 만나야 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지 비교해 보라. 만나는 것 차체를 부담스러워하고 다른 약속 있다고 핑계 대는 일이 다반사 아닌가.
두 번째 역동적(Dynamic)이다. 대부분 회사 생활이 사무실내 몇 평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택시기사가 일하는 공간은 서울시 전체 면적 625평방킬로미터이다. 한 밤중에 예술작품과도 같은 찬란한 한강 다리 조명을 바라보며 달리는 올림픽대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었다.
세 번째 자기개발(Developable)이다. 택시에서는 일하면서 외국어 공부가 가능하다.
새벽에 중국어 카세트를 들으며 홍대 앞 삼거리포차에 가면 밤새 술 마시고 집에 가는 대학생이나 젊은 직장인이 탄다. 머리가 허연 택시기사가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자기는 밤새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택시로 일을 하며 중국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부터 각오를 새로이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일도 있었다.
즐길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얻은 수많은 즐거움들
“월 소득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면 택시기사도 할 만 합니다. 단순 노동이라 골치 아플 일이 없습니다. 건설 노동자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아닙니다. 손님이 내릴 때마다 택시요금 계산을 하니 치매 예방도 됩니다. 여러 곳을 다니며 길을 많이 알게 됩니다. 여러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인생을 배우게 되는 건 덤입니다. 회사택시를 무사고 3년 이상 하게 되면 개인택시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되죠. 개인택시는 이틀을 일하고 하루를 쉽니다.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거죠. 정년도 없습니다. 건강이 허용한다면 80세까지도 할 수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일이 있는 게 좋은 겁니다.”
요즘 댄스스포츠를 부인과 함께 복지센타에서 배우고 있다는 그는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 자부했다.
“부부는 공동의 취미생활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같이 댄스스포츠를 다니며 취미를 즐기니까, 스킨십과 대화가 잦아지고 눈을 마주치니까 자연스레 서로 더 의지하게 되데요. 부부 금슬 비결은 같이 삶을 즐기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 씨는 선뜻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시니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전했다.
“100세 시대의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60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은퇴 후 무위도식한다고 하면 너무 시간이 많이 남습니다. 뭔가를 해야 하죠. 그래서 후회하지 않도록 즐기는 일을 하는 게 좋아요. 제가 삼성에 있을 때 일을 좋아는 했지만 즐긴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지금 택시기사 일은 즐기고 있어요.”
‘知者不如好者(지자불여호자) 好者不如樂者(호자불여락자) 아무리 많이 아는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즐기는 자를 따를 수 없다’라는 논어 옹야편 구절을 직접 써 주면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야말로 노후를 즐기는 지혜라고 그는 강조했다.
택시기사 이춘계 씨가 20년이 지나면 82세가 된다. 그때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그땐 댄스스포츠를 전파하러 다녀야죠. 또 한편으로는 어릴 적 꿈인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겠죠. 아마도 기업이나 사람들에게 제 인생을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 강사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매력적이지 않나요. 이게 자유로운 인생 3막 아닐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