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랭킹 1위 퀴타야 골프클럽(Kytäjä GC)은 36홀 규모로, 세계적인 골프 코스 컨축가 토머스 맥브룸(Thomas McBroom)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첫 번째로 디자인한 골프장이다. 북미의 골프 건축을 잘 보여주듯 넓고 대담하며 아름다운 이곳은 핀란드 최고 골프클럽으로 인정받고 있다.
핀란드 퀴타야 골프클럽 & 호텔은 유럽 100대 골프 리조트 중 83위에 랭크되어 있다. 헬싱키 공항에서 북쪽으로 60km 지점, 휘빈캐(Hyvinkää) 근처에 있으며 차로 40분 소요된다. 호텔은 모두 34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을 리모델링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여름엔 백야 체험할 수 있어
퀴타야 골프클럽 연습 시설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다. 따라서 라운드 전후로 드라이빙 레인지와 쇼트 게임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12헥타르의 드라이빙 레인지와 인근 퍼팅 그린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으며, 양질의 골프공으로 언제든지 진짜 잔디에서 연습할 수 있다. 400m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양방향 연습이 가능하며, 동시에 100명씩 200명이 연습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멋진 드라이빙 레인지다.
벙커드 타깃 그린(Bunkered Target Greens) 7개와 퍼팅 그린 2개가 있으며, 3개의 연습 벙커가 있다. 퀴타야 골프클럽은 연 6개월 정도 라운드가 가능하며,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이 하이 시즌이다. 1년에 약 3만 6000라운드가 진행된다고 한다. 6개월의 기간을 보면 결코 적은 수는 아니다.
핀란드는 한여름 백야(Midnight Sun, White Night)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북쪽은 가능하지만 남쪽은 조금 어렵다고 한다.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65km 지점인 이곳 퀴타야 골프클럽은 오후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어두웠다. 6월 22일 하지 때 가장 낮이 길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다 반기는 남동 코스
사우스이스트 코스(South East Course)는 2003년에 오픈했으며 핀란드 1위, 유럽 65위에 랭크되어 있는 최고의 명문 코스다. 넓은 페어웨이, 깊은 벙커, 그리고 경사진 언듈레이션이 심한 엘리베이티드 그린을 보여주며, 핀란드 풍경 중 가장 쾌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웃 코스 9홀은 환상적인 고도 변화(Elevation Changes)가 있는 넓은 숲 풍경(Forest Landscape)을 굽이굽이 지나간다. 기복이 심한 페어웨이와 높은 티 박스에서 티 샷 하는 장면이 매우 많은 도전적인 마운트 타입이다. 인 코스 9홀은 숨 막히는 파노라마 뷰가 펼쳐지는 퀴타야 호숫가를 따라 여러 개의 홀이 이어져 있으며, 링크스 타입이 가미된 아름다운 파크랜드 코스다.
4번 홀(파5, 539/485m) 페어웨이 오른쪽 넘어 뒤로 펼쳐지는 퀴타야 호수가 바다처럼 멋진 뷰를 보여준다. 왼쪽으로 살짝 도그레그로, 랜딩 에어리어 왼쪽으로는 벙커들이 즐비하게 그린 쪽으로 이어진다. 벙커를 피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샷을 하면 거리 손실이 적지 않다. 엘리베이티드 그린이어서 그린 공략할 때 정확한 거리가 요구된다. 그린 오른쪽 앞의 2m가 넘는 어마무시한 커는 절대 피해야 한다. 실제 거리는 최단 30m 이상 업해야 할 것이다.
18번 홀(파5, 473/437m) 왼쪽으로 환상적인 퀴타야 호수가 바다처럼 펼쳐지면서 도그레그 모습을 보여주는 시그니처 홀이다. 14번 홀과는 방향만 바뀐 모양새다. 티 샷 시 오른쪽으로 에이밍해야 유리하다. 그린 공략할 때 55m 앞에 펼쳐진 나무가 시야를 방해할 수도 있다 그린 오른쪽 카트길을 따라 하얀색 몸통의 자작나무가 멋진 인상을 남긴다. 파이널 홀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홀이다.
도전 부르는 험한 지형, 북서 코스
노스웨스트 코스(North West Course)는 2004년 8월에 오픈했다. 핀란드 4위에 랭크되어 있는 명문 코스다. 첫 다섯 개 홀은 넓고 탁 트인 풍경에 위치하며, 나머지 홀은 고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는 다양하고 험준한 지형에서 진행된다. 퀴타야 호수와 클럽하우스 단지가 내려다보이는 17번 홀 챔피언 티에서의 전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50m의 낙차 큰 뷰를 자랑한다. 왼쪽으로 멋진 호수와 페어웨이 뒤로 길게 이어지는 벙커가 환상적이다.
7번 홀(파5, 504/449m) 서드 샷을 할 때 왼쪽 도그레그이며, 오르막의 멋진 파5 홀이다. 165~229m 지점 랜딩 에어리어 좌우에는 벙커들이 길게 이어진다. 티 샷부터 쉽지 않다. 오르막으로 최단 46~55m는 더 봐야 한다. 세컨드 샷부터 페어웨이가 좁고 가파른 오르막이며, 그린 에지가 긴 런오프라 그린 공략할 때 충분한 거리를 봐야 한다. 디자인과 뷰가 매우 인상적이다.
10번 홀(파4, 324/275m) 재밌는 홀이다. 세컨드 샷을 할 때 높은 슬로프를 계산해야 한다. 최단 20m 높이에 그린이 있다. 그린에서 내려다본 클럽하우스 외에 티 박스, 9번 홀과 1번 홀이 멋지게 한눈에 들어온다. 티 샷 시 볼이 왼쪽으로 가면 그린이 가려져 방향이 중요하다. 정확한 방향과 세컨드 샷 때 거리 계산이 매우 중요하며, 그린이 계속 오르막이어서 때로는 매우 어려운 순간을 맞이한다. 그린 앞은 에지가 런오프여서 짧으면 페어웨이 밖으로 굴러떨어지므로 스마트한 공략이 필요하다.
17번 홀(파5, 516/426m) 가장 높은 티다. 무려 50m 높이로 장엄한 모습이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큰 폰드가, 오른쪽으로는 벙커들이 길게 수놓아져 있다. 스펙터클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필자는 이 멋진 느낌을 위해 챔피언 티에서 티 샷을 했다. 세컨드 샷과 서드 샷 모두 오르막이어서 실제 거리는 549m 정도 된다. 이날은 골프장 총지배인과 함께였다. 운 좋게도 이 홀에서 파다. 체면치레는 했다. 그리고 18홀 내내 볼 한 개 갖고 라운드를 했으며, 운수 좋은 날임에 틀림없었다.
사방 천지로 빛이 뿌려진 날들이다. 멈출 수 없는 일상은 늘 촘촘하다. 이럴 때 가뿐히 가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잘 찾아왔다고 스스로 흐뭇해지는 길 위에 서본다. 굳이 계획을 세우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가볍게 나서거나, 편안히 자동차 핸들을 돌려서 잠깐만 달리면 닿는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곳, 기분 좋게 훌쩍 길을 나설 수 있는 곳, 광교다.
수원은 당연히 익숙한 도시인데 같은 지역권의 광교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낯설지는 않은데 옆 도시에 비해 어쩐지 새것 느낌이다. 신상품이라는 뜻의 신조어, 이른바 신상 또는 ‘새삥’ 같달까. 수원이 18세기 조선의 신도시라면 수원시 영통구에 속하는 광교는 21세기에 조성된 또 다른 신도시다.
광교가 특별한 것은 도시의 녹지율이 41.7%에 달하는 자연친화적 도시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그 안에 엄청난 넓이의 호수가 포함되어 있어 그야말로 쾌적한 주거 환경 속에 살아가는 걸 부러워할 만하다. 인구밀도도 국내 신도시 중에서 최저다. 광교라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호수공원이 도심을 따라 연결돼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산책 코스가 되고 있다. 도서관, 호수, 수목원, 박물관, 미술관, 감성 맛집까지 일상과 이어진다. 그들이 가꾸어나가는 도시의 건물과 건물을 잇는 정감 어린 골목길도 아름다운 것은 라이프스타일의 초점을 문화 기능에 맞추어서인 듯하다.
독서 캠핑을 아시나요, 알싸한 숲속 도서관 책뜰
요즘 각기 다른 레저 활동의 이름으로 호캉스나 차박, 차크닉 등의 다양한 신조어들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독서 캠핑 또는 북캉스라는 말도 생겨났다. 가을이면 책을 읽는 계절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조용히 집에서 책을 읽어도 좋겠지만, 호수를 둘러싼 고요한 숲속 공간에서 책과 함께하는 시간은 어떨까. 광교푸른숲도서관에 가면 정말 이런 곳이 있다.
광교푸른숲도서관은 광교호수공원이라는 멋진 경관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서 힐링을 주제로 한 도서관이다. 푸른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비탈의 기울어진 숲 경사를 그대로 살렸다. 숲 사이에 입체감 있게 설계된 열린 공간 형태의 도서관은 외부와 내부 모두 예쁘다. 푸른숲도서관만으로도 충분한데, ‘푸른숲 책뜰’이라는 독서 캠핑장 콘셉트의 독서 힐링 공간이 특별하다.
도서관 옆의 경사진 숲길을 따라 걸어 오르는 길은 비밀스러운 정원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가끔 사람들이 나지막이 말하는 ‘나만 알고 싶은 곳’이다. 그 언덕 나무들 사이에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다섯 개 동의 독립적인 공간 ‘책뜰’이 앉혀졌다. 백리향, 산수국, 바람꽃, 물봉선, 금강초롱(장애인 우선 예약). 각 캐빈마다 붙여져 있는 이름은 광교호수공원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계절 꽃인데 시민들의 제안으로 지어졌다.
내부에 드니 초록 이끼로 덮인 굵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신비한 트리하우스 느낌이다. 책뜰 주변을 알싸한 숲 내음과 푸른 기운이 감싼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작은 새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3~4평 정도 공간에 편안한 의자 몇 개와 작은 테이블, 그 위엔 책 받침대 하나, 옆쪽으로 안내 자료와 책이 꽂힌 서가가 전부다. 창문을 열면 아담한 전용 테라스도 있다. 문을 닫으면 소음이 완전히 차단된다. 빈백 체어에 깊숙이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평온함이 온몸에 퍼진다. 이런 호사라니. 비로소 크게 숨을 쉬고 느리게 책장을 넘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사계절 언제나 책을 읽든 숲멍을 하든 오롯하게 사치스러운 쉼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3시간의 이용 시간 동안 자신만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볼 수 있다. 친구나 연인,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독서와 힐링의 시간을 나누기도 한다. 소풍 나온 만족감과 함께 충분한 사색과 쉼을 주는 3시간이다. 여기에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책이 있는 정원 문화, 영흥수목원
빽빽한 빌딩과 아파트의 도심 속에 숲과 연결된 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롭게 숲속 산책로가 구현되었다. ‘더 살아 있는 정원을 시민의 일상 속으로’라는 의미를 갖고 정원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되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다. 분수가 솟아오르는 온실 앞의 이국적인 풍경을 지나 아열대 식물을 주제로 꾸며진 온실에는 망고 열매가 매달려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끄는 것은 수목원 입구의 책마루였다. 이 지역의 식물이나 정원 도구 전시실 등을 돌아보고 나면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진 마루에 그냥 앉아 책을 읽는다. 숲과 책의 어울림이 아름다운 공간이다.
광교 도심을 한눈에, 프라이부르크 전망대
광교푸른숲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몇 걸음 숲으로 나가 산책길에 들어서면 도서관 뒤편으로 우뚝 선 탑이 보인다. 프라이부르크 전망대(Freiburg Observatory). 세계적인 환경 도시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전망대와 같은 형태라고 한다. 환경 도시를 지향하는 수원시와 프라이부르크시가 자매결연을 맺어 의미를 더하는 전망대다.
건물 10층 정도인 33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광교 도심을 360도 조망할 수 있다. 각 층마다 카페, 전시관, 쉼터, 전망대가 이어진다. 남쪽으로 탁 트인 전망으로 내려다보이는 원천호수와 빌딩들의 스카이라인이 압도적이다. 전망대 밑에는 ‘풀빛누리 광교 생태환경체험교육관’이 있어서 환경을 살피는 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다. 호수공원 주변 산책길에서는 자작나무 쉼터와 하늘정원, 수초섬 등 계절별로 변화하는 호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운치 있는 자연 생태 속으로, 신대호수
광교호수공원 중앙에 조성된 공원 산책로는 원천호수와 신대호수로 연결되어 있다. 프라이부르크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였던 신대호수 쪽으로 걸어가면 금방 이어진다. 도심 속 호수공원을 잇는 순환 보행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누린다. 신대호수 쪽 수변 보행 데크에 들어서 둑방길 방향으로 쭉 걸어가면 연꽃이 피어나고 뿔논병아리가 노니는 곳이 나타난다. 이처럼 습지식물과 야생 조류들이 살아 있는 생태계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안개 낀 이른 새벽의 몽환적 풍경과 해 질 무렵의 노을 풍경이 더없이 멋진 신대호수는 모든 시민의 생활 속 휴식 공간이다.
광교박물관, 아트스페이스 광교
실내에서 즐겨볼 만한 곳으로는 광교박물관이 있다. 광교의 역사와 도시 변천사를 알려주고 다양한 체험도 준비되어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2층에는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했던 소강 민관식 님의 이야기와 올림픽을 비롯해 한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가득하다. 유명 선수들의 기증품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예술 공간 아트스페이스 광교는 지역의 풍부한 문화예술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갤러리아 광교 옆 수원컨벤션센터 지하 1층에 위치한다. 광교중앙역에서도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전시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대부분 무료 관람이다.
광교푸른숲도서관 책뜰 이용 방법
대상 수원시도서관 관외대출회원(정회원) 이용 인원 최대 4명 운영시간 1회 09:30~12:30 2회 14:00~17:00 / 3시간 예약 신청 수원시도서관 홈페이지(www.suwonlib.go.kr) ‘푸른숲 책뜰’ 예약 기간 매월 1일 10시부터 선착순 이용료 1만 원
햇살이 마냥 싱그럽다. 어찌나 밝고 환한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날들이다. 서늘한 숲과 푸름이 제맛인 곳에서 초록의 신선함에 한껏 파묻혀보고 싶은 날들이다. 짙어져가는 녹음 속을 호젓하게 걸으며 치유의 숲을 누릴 수 있는 적기다.
‘생거진천 치유의 숲’은 충북 진천군에서 조성한 산림욕장이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일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건강한 삶의 가치를 누릴 수 있도록 휴양 활동을 제공하는 곳이다. 바쁜 세상에 살면서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숲을 떠올려보자. 숲속에서 풍성한 피톤치드와 숲 사이의 햇빛과 바람을 즐기는 힐링 여행은 스스로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살아서는 진천이 좋다는 뜻의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산과 물, 그리고 풍수적으로도 빠질 것 없는 여행지다. 더구나 조금 덜 알려진 편이고 인적도 드물어 유유자적한 힐링의 시간이 된다. 진천둘레길 힐링 숲으로 떠오른 무제산 무제봉 아래 치유의 숲은 사색하며 걷기 좋은 숲이다.
치유의 숲에는 입구의 전통 한옥 힐링비채와 마주 보는 산에 위치한 숯채화효소원 두 동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4경로의 치유숲길은 물소리맑음숲길 700m(청각), 마음치유숲길 1.2km(촉각), 숲내음숲길 1.5km(후각), 하늘맑음숲길 2.8km(시각)로 이어졌다. 단아한 한옥 힐링비채는 건강치유센터다. 숯채화효소원은 숯온열치유실은 물론이고 세미나실을 이용해 자연과 함께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두 군데 모두 다양한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구나 신청만 하면 참여할 수 있는 생활밀착형 산림 치유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숲은 대체로 완만해서 아이뿐 아니라 몸이 불편해서 천천히 걷는 이도 큰 무리가 없는 산길이다. 신록으로 물든 숲에 들면 신선한 숲 내음에 자신도 모르게 기분 좋은 아찔함을 느끼게 된다. 입구에서 몇 걸음 이동하면 곧바로 계곡이다. 물소리맑음숲길과 마음치유숲길 이정표를 따라서 가기만 하면 어려울 게 없다.
걷다 보면 산길 옆으로 쉼터가 보이는데, 그리 힘들지 않아도 잠시 앉아 숲을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몇 걸음마다 네트벤치나 명상욕장이 나타나 편하게 누워서 숲 사이로 하늘을 보며 쉬는 시간은 세상 더없는 힐링 타임이다. 탁 트인 기분으로 ‘오늘 이 숲은 내 거다’ 해볼 만하다. 네트망에 한참 누워 있다 보면 청량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복잡한 생각도 사라지며 한없이 평온해진다. 그러다가 깜빡 잠들기도 하는 달콤한 시간이다.
걸을 때마다 푸름으로 꽉 찬 숲이 운치 있다. 깊은 숲으로 오를수록 빼곡한 나무 덕분에 피부로 느껴지는 서늘함이 기분 좋다. 건강한 숲길과 싱그러운 풍경에 몸과 마음이 정화되고 묵은 체증도 사라진다. 산길 어디에나 피어난 야생화가 눈에 들어오고, 작은 옹달샘에서는 유영하는 물고기도 보인다.
운동 삼아 장시간 걷는 것이 습관인 사람들에게는 짧은 느낌일 수도 있으나 숲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치유의 숲 포인트다. 흙길과 데크가 반복되는 오감테마 치유 숲길을 거치고 나면 온몸이 기분 좋게 반응한다.
생거진천 치유의 숲에는 자연휴양림도 있어서 하루쯤 숲속에 파묻혀 지낼 수도 있다. 진천자연휴양림과 산림문화휴양관이 연결되어 있고, 무제산 무제봉 등산 코스가 이어진다. 무장애나눔길과 데크로드, 놀이 공간과 습체원의 운치 있는 자작나무까지 멋지게 조성된 치유의 숲이다.
숲의 다양한 환경 요소를 통해 인체의 면역과 이완을 얻는다.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정신적 건강의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는 시간,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떠나 숲을 다녀오면 비로소 부드럽고 투명해지는 일상이 이어진다. 더 나아가 삶의 활기와 자신감이 채워진다. 여름은 역시 숲이다.
아름다운 농업, 똑똑한 농장 ‘뤁스퀘어’
‘농업 기술과 문화가 연결되는 미래 농촌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뤁스퀘어’(Root Square)가 충북 진천의 이월면에 자리 잡았다. 산과 들판, 골짜기와 하천, 논과 밭으로 펼쳐진 풍경이 떠오르는 농촌, 뤁스퀘어는 뉴노멀 시대의 농촌을 보여준다. 농업을 주 테마로 하여 미래 농업 복합문화공간 스마트팜 재배 시설이 생겨났고, 카페나 식당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미래 농촌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공간이다.
요즘 도심 근교나 시골에 카페나 책방을 차려놓고 핫플레이스로 등극하는 걸 종종 본다. 뤁스퀘어 또한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충북 진천군 시골 외곽에 자리한 그저 멋진 카페인 줄 알았다면 시종일관 놀랄 일을 마주하게 된다. 약 6000평 규모의 공간에 온실, 재배 공간, 책방, 음식점, 카페, 주거 공간이 각각 색다르게 마련되어 원하는 곳에 머물 수 있다.
뤁스퀘어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작고 귀여운 식물을 키우는 공간을 만난다. 뤁스퀘어는 스마트팜 농업회사 ‘만나 CEA’의 스마트팜 기술로 재배하는 작물들이 꽃보다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바질이나 유럽 상추 등인데, 이것을 구해 직접 집에서 키워보며 수확의 기쁨도 느껴볼 수 있다.
스마트팜 바로 옆 라운지엔 기프트 숍과 일식 레스토랑이 연결된다. 농사에 필요한 갖가지 농기구와 장바구니가 얼른 집어 들고 싶게 예쁘다. 텃밭을 가꾸고 가족이 먹을 식재료를 담을 도구들을 보며 작게나마 농사를 짓고 싶은 충동이 인다. 식물이 자라는 것이 인테리어가 되고, 창밖 수(水) 공간을 내다보며 식사할 수 있는 소바공방의 냄새도 잘 어우러진다. 공방 창 너머로는 물을 가득 채워 하늘이 담기고 초록의 나무가 담긴 풍경이 눈앞에 있다. 은은하게 물속에 담긴 자연이 또 다른 힐링을 불러온다.
수(水) 공간 밑에 위치한 스템가든이야말로 이게 뭘까 하며 살피게 되는 놀라운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확 풍겨오는 냄새는 흙냄새와 이끼 냄새인가 싶기도 하다. 식물이 가득 차 있으니 당연히 풀 냄새가 진동한다. 그리고 나무 향까지. 그야말로 자연의 냄새만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높은 천장고와 넓은 공간 안에 이끼 낀 바위와 식물들, 사방으로 낸 큰 창 밖으로는 주변의 논과 밭으로 이루어진 풍경이 펼쳐진다. 정원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진천을 둘러싼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실내로 들어온다. 논 한가운데서 백로가 먹이를 쪼아 먹는 풍경도 뤁스퀘어만의 전망이다. 평화로운 정경에 절로 눈이 시원해진다.
스템가든은 자연을 내부로 들였다. 물이 흐르고 물이 떨어지고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난다. 식물들 사이로 데크가 가로지르고, 꽃이 피어 있는 작은 언덕 옆 무대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한 공간 안에 다양한 콘셉트의 공간이 자리하고, 이동하는 동선 또한 매력적이다. 이곳에서 자란 예쁘고 깨끗한 채소와 식재료가 브런치 메뉴와 디저트가 되고, 근사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문밖으로 나오면 잔디가 깔린 너른 광장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한다. 잔디밭을 거닐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망중한을 보내는 이들이야말로 평화로운 전원의 그림 한 점이다. 잔디밭 저편으로 야외에 설치된 뤁스퀘어의 새로운 공간 LG스마트코티지를 관람하면 때때로 로망이던 현실이 여기 있음을 알 것이다. 작은 집 오두막이란 뜻의 코티지(Cottage)는 목가적인 시골 생활에 어울리는 건축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 돌봄을 위한 공간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주춤해지면서 소비자 맞춤 여행 상품이 곳곳 출시되고 있다. 이 가운데 농촌진흥청은 국내 여행 활성화와 농촌체험 여행 참여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농촌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상품인 ‘농촌체험 여행지 8선’을 지난 6월 소개했다.
이번 여행상품은 소모임 단위 여행객이 농촌교육농장, 농촌체험농장에서 1박 2일 동안 체험·관광·식사·숙박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일정으로 설계됐다. 각 농촌교육농장, 농촌체험농장은 지난 4월에 실시한 ‘농촌체험·관광 활성화 프로그램’ 공모에서 선정된 곳이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농촌문화, 자연경관, 지역 먹거리 등을 소재로 한 농촌체험 여행에 관심이 높은 40~60대 여성 취향에 맞춰진 점이 특징이다”고 설명했다.
여행지 8곳은 △강원 강릉 ‘해품달’ 농장 △강원 횡성 ‘횡성 예다원’ △전북 고창 ‘책마을 해리’ △전남 화순 ‘화순허브뜨락’ △경북 김천 ‘송알송알 산골이야기’ △경북 안동 ‘토락(土樂)토닥’ △경남 고성 ‘콩이랑 농원’ △제주 서귀포 ‘폴개 협동조합’이다.
△강원 강릉 ‘해품달’ 농장
강원 강릉 ‘해품달’ 농장은 4만 여권의 책으로 꾸며진 실내장식과 야외 조형물이 인상적인 곳이다. 2~4인이 머물 수 있는 쾌적한 숙소와 대형버스를 개조해 만든 이색 숙소도 마련되어 있다.
맷돌로 직접 커피콩을 갈아 마시는 체험과 뗏목 타기, 농장 산책 등을 할 수 있으며 야간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잔디밭에서 밤하늘의 별을 관측할 수 있다. 둘째 날 조식으로 초당순두부가 제공된다. 또한 오죽헌, 주문진 수산시장 등 지역 명소와 가까워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
△강원 횡성 ‘횡성 예다원’
강원 횡성 ‘횡성 예다원’은 해발 300m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예절교육 지도사이자 차(茶) 연구가인 농장주에게 다도(茶道)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찻잎을 덖어 차를 만드는 제다(製茶)체험, 계절별 전통음식 만들기, 둘레길 걷기 등 체험 거리가 풍성하다. 또한 찜질방 이용, 별 보기 등 심신 힐링을 할 수 있다. 주변 볼거리로는 횡성호수가 있어 산책하기 좋다.
△전북 고창 ‘책마을 해리’
전북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고창 ‘책마을 해리’는 폐교된 초등학교가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된 곳이다. 이색적인 도서관들이 많고, ‘읽고 쓰고 펴내는 인생 책 농사’를 주제로 나만의 책을 만들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지역 명소인 선운사, 고창읍성, 상하농원 등과 연계하면 1박 2일 일정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전남 화순 ‘화순허브뜨락’
전남 화순 ‘화순허브뜨락’ 농장은 약 4000평에 달하는 정원에 꽃과 허브가 가득한 곳으로 안온한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다. 둘레길 걷기나 허브 오일·허브 소금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지역에서 생산된 식재료로 만든 향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숙소는 편백나무방, 황토방으로 나뉘어 있다.
△경북 김천 ‘송알송알 산골이야기’
경북 김천 ‘송알송알 산골이야기’ 농장은 500미터 고지의 호젓한 산골에 있다. 산세가 수려해 야영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곳이다. 천연염색 스카프 만들기, 숲속 걷기 후 새송이버섯 수확 체험을 할 수 있다. 김천을 대표하는 수도산 자작나무숲, 사찰 청암사, 용추폭포 같은 지역 명소와 연계하면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경북 안동 ‘토락(土樂)토닥’
경북 안동 ‘토락(土樂)토닥’ 농장은 ‘카페형 치유농장’을 지향하는 곳으로 도자기 공예를 체험하며 나만의 접시를 만들 수 있다. 농장주가 요리한 ‘안동한우불고기’에 텃밭에서 딴 쌈 채소를 곁들이는 저녁 식사가 별미다. 밤에는 사과나무 장작으로 만든 모닥불 주위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도보로 낙동강 산책길, 마애솔숲공원을 갈 수 있고, 차로 15분만 이동하면 하회마을, 병산서원 등 지역명소에 갈 수 있다.
△경남 고성 ‘콩이랑 농원’
경남 고성 ‘콩이랑농원’은 1000개가 넘는 항아리가 길게 늘어선 모습이 진풍경인 곳이다. 콩으로 만든 다양한 전통 장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고, 고추장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농장 인근에는 영부저수지 산책길, 민간정원인 그레이스 정원 수목원, 상족암 군립공원 등 다양한 걷기 여행길이 있다.
△제주 서귀포 ‘폴개 협동조합’
제주 서귀포 ‘폴개(뻘이 있는 갯벌이라는 제주 방언) 협동조합’은 제주 귀농인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다. 제주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한 이들의 제주살이 이야기를 도움말 삼아 농장에서 머무는 동안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유기농 블루베리 수확, 생화로 꽃다발 또는 꽃모자 만들기, 농장 주변 산책길 걷기, 잔디밭에서 밤하늘 보기 등을 할 수 있다. 아침 식사는 농장에서 준비한 소풍 도시락을 가지고 정원에 나가 먹을 수 있다.
각 여행상품 예약은 여행플랫폼 ‘노는법(nonunbub.com)’ 누리집이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할 수 있다. 올해 11월 말까지 상품가격의 약 50퍼센트를 할인하는 특가 행사를 진행한다.
농촌진흥청 농촌자원과 박정화 과장은 “코로나19 이후 삼삼오오 모여 자연 속에서 휴식과 여유를 누리고 싶은 소비자들의 경향을 반영해 농촌여행 상품을 공모하게 됐다”라며 “상품개발은 지방자치단체, 예약은 새싹기업 여행플랫폼에서 맡아 진행하는 이번 여행상품이 정부-지자체-민간이 협력해 만든 농촌여행 우수사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숲에 들면 차분해진다. 그리고 푸근하다. 나무 숲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은혜롭다. 더 바랄 것 없이 관대해지기까지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밀린 숙제 하듯 허둥대며 떠밀려온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느긋하고 풍요해지는 마음이다. 걷기만 해도 지지고 볶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듯하다. 차분해지고 감사함이 생겨난다. 숲이 주는 고마움, 풍성하게 누린 날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리 온 것 같진 않았다. 고갯길을 넘고 간간히 조붓한 길을 주춤주춤 달리기도 했지만 자동차는 어느새 나남수목원 앞에 다달았다. 나남수목원은 한평생 책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의 인생을 전해주는 숲이다. 경기도 포천의 산비탈에 '세상에서 가장 큰 책, 나남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숲에 들었다.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수목원의 검둥개가 꼬리를 흔들며 앞장선다. 느릿느릿 두리번거리면서 사진도 찍느라 늦장 부리면 가다가 뒤돌아서 한참씩 멈춰서 기다리기를 반복한다. '일루 와요, 나만 따라오면 된다니까' 하는 표정이다. '알았어, 갈게.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수목원의 개와 노닐며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
책과 나무의 숲에 살다
‘나와 남이 어울려 사는 우리’라는 포부를 담고 시작한 나남출판사의 조상호 회장이 2008년부터 일군 나남 수목원. 포천의 왕방산 산자락에 20여만 평의 땅에 만들어낸 숲이다. 이런 숲을 개인이 가꾸다니... 언감생심 부러워할 수조차 없지만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일이 생각만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짐작이 된다. 적어도 고된 노동과 긴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수목원의 아름다움은 역시 아침 무렵이다. 숲 사이로 유난히 도드라지는 빛이 눈부시다. 온누리에 아침빛을 받은 숲의 투명함 또한 참 이쁘다. 숲길에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자연스럽게 무더기를 이루어 피어났고 꽈리꽃의 붉은빛이 선명하다. 산책로 옆으로 5리쯤 된다는 실개천이 촉촉하게 흐른다. 숲길을 걸으면서 와, 좋구나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굽이진 산속이다 보니 여타 수목원처럼 주변과 입구에 음식점이나 카페도 없다. 내부에 놀이 공간이나 즐길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흔한 포토존이나 무슨 촬영지였다는 표지판도 없다. 인위적 기교 없이 수수한 숲은 마냥 자연스럽다. 온전히 숲을 받는 느낌이다. 그저 숲이기만 한 게 이렇게나 고맙구나 싶다.
책 박물관으로 이르는 길의 연못에 푸른 하늘이 풍덩 빠져 있다. 연못 앞에서 세찬 바람에 머리를 날리는 듯한 여자의 조각상이 인상적이다. 짐바브웨이의 조각가 Witness Bonjisi의 A Windy Day라는 작품이라는데 그 풍경 속에서 잘 어울린다.
수목원 중턱쯤에 있는 책 박물관에 오르니 딱 그 자리가 제 자리인양 앉혀져 숲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편안하고 멋스럽다. 안이 훤히 보이는 3층 건물에 가을볕이 에워싸고 숲이 둘러있다. 숲지기인 조상호 회장이 나남출판사를 통해서 평생 만들어 낸 책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리고 책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책 박물관, 이 또한 책의 숲이다. 나남출판사에서 40년간 3500여 권의 책을 펴낸 숲지기 조상호 회장이 직접 심은 나무가 10만여 그루라 했다. 이젠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이라 일컫는 나무를 키우는 일에 파묻혀 있으니 더 할 일이 있을지.
서가 벽면에는 몇 해 전 나남출판 40주년 기념으로 펴낸 조상호 회장의 '숲에 산다' 포스터가 멋지게 붙어 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책과 나무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나남에서 펴낸 책으로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이 많았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책으로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등이 있다. 2층과 3층에는 이러한 것들을 들여다볼만한 공간이다. 특히 3층에는 책과 인연인 된 사람들이 모여 서가를 채워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숲과 책에 둘러싸인 날의 행복
북카페는 널찍하고 시원하게 트여서 그저 여유롭다. 한적한 실내엔 군데군데의 책장이 인테리어 몫을 다한다. 세미나룸인 듯한 아늑한 공간도 따로 있어서 의미 있는 모임을 계획할만하다. 북카페 안과 테라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데크에 앉아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멍 때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1층 북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숲, 눈앞에 꽉 찬 짙푸른 숲이 압도한다. 숲이 주는 힐링, 세상 더 할 말을 잊는다. 숲을 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초록빛에 왜 그리 환호하지?" 그럴 리가, 생생한 자연의 색감만으로 눈앞에 있으니 감동이 아닐지. 가을 색으로 물들면 또 그것으로 미칠 듯 반할 것이다. 나남 수목원 저편의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의 풍경은 또 어떨지 상상해 보게 된다. 숲을 앞에 두고 보니 철마다 달라지는 나남 숲의 풍경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사실이다.
북카페의 직원에게 조회장님에 관해 궁금해 했더니 지금 마침 숲에서 수목 전지작업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직접 나무를 가꾸고 관리하느라 늘 바쁘시다며 숲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면서 연락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벌써 산 능선을 훌쩍 넘어가서 너무 멀리 계시어 만나보기 어렵겠다는 것이다. 괜찮다.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숲 속에서 나무를 가꾸는 숲지기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일, 전망 좋은 인수전과 자작나무 숲을 지나 언덕을 올라 산을 넘어가 더 많은 숲을 보는 일을 남겨두는 것, 어찌 한두 번으로 숲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길 다시 올 수 있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냥 숲과 책에 둘러싸인 채, 서늘한 마젠타 빛으로 가득 채운 레몬 블루베리 에이드 한잔 앞에 놓고 나니 세상 더 바랄 게 없다. 감성도 깊어지는 시절이다. 이 계절에 이만한 여행 없다는 생각에 숲을 찾은 자신에게 뿌듯하다.
◎가볼 만 한 곳 1. 술이 익어가는 느린 마을, 산사원
포천에 가면 술 익는 마을 산사원을 빠뜨릴 수 없다. 이 계절의 따사로운 햇볕이 딱 어울리는 곳이다. 두 팔 벌려 안아도 모자랄 커다란 술독 500여 개에 내려앉은 햇살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쏟아지는 볕을 받으며 술이 익어가는 포천 산사원의 세월랑에 들면 느긋하게 계절의 풍류를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는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술독 사이를 걸으며 저만치 한시름 밀어내고 술 향기만으로도 취하고픈 시절이다.
포천의 느린 마을 양조장 배상면주가는 입구에 술박물관이 자리 잡았다. 그곳을 지나 '느린 마을'이라는 문패가 높이 매달린 정원으로 먼저 마음이 간다. 약 4천 평 규모의 산사원에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술항아리 행렬들이 맞아주고 있다. 전통주들의 숙성 공간 '세월랑'이다. 한 켠의 풀밭 근처 '줄행랑'에는 그 옛날 술이 만들어지던 모습과 술통을 매달고 배달하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산사원 저편으로 펼쳐진 너른 정원에는 소쇄원의 광풍각을 본뜬 취선각이 마주 보인다. 건너편으로 2층 석조 누각이 멋스러운 우곡루, 바로 옆으로 경주 포석정과 같은 유상곡수가 있으나 코로나19가 방문자의 만고 시름 잊고 취해도 좋을 한나절 풍류를 온통 막아버린다. 그리고 전통술에 빠질 수 없는 부재료 누룩 이야기를 살필 수 있는 부안당. 누룩의 미생물을 이용해서 술의 주원료 쌀과 곡류를 분해해서 알코올을 생성하는 과정. 한 줄기 빛으로 술의 향기와 맛을 내는 부안당의 누룩을 비춘다.
이제 그 과정들을 통해 만들어진 전통술을 빚어낸 우곡 배상면 선생의 양조 철학을 살피고 우리 술의 역사를 풀어낸 박물관에서 술 문화의 면면을 살피는 시간이다. 전통주의 규제가 심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고유의 술을 살리기 위한 그 분만의 노력을 본다. '백번을 시도하고 천 번을 고쳐라' 누룩 왕으로 불리던 배상면 선생의 기록실에서 술을 향한 일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가볼 만 한 곳 2. 허브 마을에서 만난 산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허브아일랜드 위로 푸른 하늘이 빼꼼하다. 지중해식 건축이 얼핏 이국적이다. 허브 정원, 허브 식물박물관, 허브힐링센터... 무수한 허브 이야기로 가득한 '어쨌든 완전히 허브나라에 들어왔습니다'... 하는 듯하다.
언덕 위 스카이 허브팜에 오르면 핑크 뮬리로 핑크 핑크 하다. 잔털처럼 피어나 너른 산 아래 밭에 함께 모여 뭉쳐있는 핑크빛 물결의 군락들, 핑크 뮬리는 개화기간이 길다. 아직도 산속에 갇힌 듯 조용히 피어나 환하다. 숨차게 올라 땀 식히며 핑크 뮬리에 담뿍 빠져볼 수 있다.
이곳은 허브관광농장으로써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것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볼거리는 물론이고 갖가지 체험과 먹고 자고 사색하고 힐링하는 것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서울을 떠나 멀리 산속으로 들어오니 강원도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곳은 경기도 포천이다. 허브 숲에 드니 심리적으로 온몸이 이완되는 듯한 느낌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겐 숨통을 트이게 하는 곳이다. 쭉 돌아보고 나오기 전에 허브마을 깊숙이 들어가 보면 숨겨진 듯 나타나는 곳, 거기 산타마을이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
강원도라 하면 누구라도 산과 바다가 고루 펼쳐진 대자연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해로 떠나고 바다를 둘러싼 수려한 강원도의 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자연 속에 문화 예술의 멋이 자리 잡고 있다. 폐교에 펼쳐진 예술의 풍성함과 메밀꽃 이야기의 정취 속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시골 학교의 폐교가 늘면서 비어 있는 공간 이용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면서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떠나버려 폐교가 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잇따르며 생긴 공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떠난 학교가 미술관이나 창작실, 도서관 캠핑장, 또는 카페와 같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무이예술관은 시골마을의 자그마한 무이초등학교였다. 폐교된 이후 서양화가 정연서, 이천섭, 조각가 오상욱, 도예가 권순범 등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관으로 변신시켰다. 폐교를 이용한 공간을 여러 군데 가본 적이 있는데 무이예술관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예술작품이 넘쳐나는 게 특별하다.
교실마다 장르별 작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다. 가끔은 조각 작품을 앞에 두고 버스킹도 한다. 무이예술관, 이곳이라면 꽉 채운 가을날 하루를 보낼 만하다. 이곳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덧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고 감성은 더없이 말랑해져서 비로소 숨통이 트여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무이예술관은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시골 학교를 그저 조촐하게 꾸민 예술관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전한다. 복도에 발을 들이면 창가의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랑이고 흰색 천의 직조 틈 사이로 복도 가득 빛이 쏟아진다. 창가에 줄지어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가을볕에 멋스럽게 빛난다.
둘러보니 원래도 작은 학교였던 것 같다. 몇 개의 교실이 있는 건물 한 동이 전부인데 교실(전시실)마다 회화, 조각 작품, 도예 작품들이 가득하다. 빽빽하게 전시된 서예 작품도 고요히 묵향을 풍긴다. 또 한쪽 전시실에는 역시 봉평의 예술 공간답게 새하얀 메밀꽃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복도에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삽화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감상할 수 있어 문학적 분위기에도 잠겨보게 된다.
볼거리는 끝이 없다.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 열려 있어 예술가의 공간을 훔쳐보는 맛도 쏠쏠하다. 체험 공간과 아트 숍이 함께 꾸며져 있어 참여 활동도 가능하다. 복도 창가나 틈새 공간도 그냥 놔두지 않고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계단참의 소품들을 구경하면서 위층에 오르면 모임이나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문 열고 옥상으로 나가면 무이예술관의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공간이다.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조각공원은 자연이 주는 넉넉함이 있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잔디 마당은 발걸음마다 부드럽다. 아이들은 조각품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엄마 아빠는 예술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가는 운동장엔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날리고 발아래는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곳을 오가는 누구라도 갬성 충만이다.
커피 향 따라 가본 전시관 끄트머리의 갤러리 카페. 사방으로 널찍한 덱에 앉아 운치 있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 안은 운동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아 테이블에 앉아 편안히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시간을 누릴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소통이 공존하는 무이예술관에 가면 가슴 가득 예술의 기운을 얻어 나오게 된다.
살다가 잠시 멈추고 천지의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깊게 숨을 쉬어볼 만한 곳. 폐교에 담긴 예술 작품과 따스한 휴식 공간에서 충분한 감성 충전을 했던 참으로 괜찮았던 가을날 하루,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었던 시간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이효석 문학의 숲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이 소설의 배경지인 봉평엔 메밀밭뿐 아니라 소설 속 내용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이효석 문학의 숲’이 있다. 발걸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덱 주변에는 자작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책길을 따라 소설 속 장터와 등장인물들이 막걸리를 마시던 충주집과 물레방아 등 소설 속 내용이 길목마다 새겨져 있어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새 전편을 다 읽게 된다.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에 이효석 문학의 숲에서 단편문학 한 편 읽으며 산책하는 시간, 좋지 아니한가.
1년 중 가장 아름답고 활동하기 좋은 시기는 이맘때 봄이다. 4년 전 파주시와 고양시의 경계에 오픈한 66,115㎡(2만 평) 규모의 퍼스트 가든은 경기도에서 가볼 만한 곳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소다. 사계절 다양한 꽃이 피고 지는 이곳에서 낮에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고, 밤에는 환상적인 야경을 볼 수 있다.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하루를 보내기에 좋다.
서울에서 인접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아 한적하다.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등 수많은 영상물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가구제조업체 ㈜대주의 김창희 회장이 40여 년간의 제조와 유통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지금처럼 빼어난 공간으로 만들었다. 최근 봄꽃들과 초록 식물들이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
유럽식으로 단장한 야외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다 보면 화려한 꽃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구조는 아기자기하다. 초입에서 생태 정원을 거쳐 자작나무 숲까지 한 바퀴를 둘러보려면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곳곳에 평상과 나무 그늘 쉼터가 있어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잠깐씩 쉬어갈 수 있다.
복합 문화시설을 표방하는 이곳은 16㎡(5평)에서 99㎡(30평) 크기의 정원을 30여 가지 테마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식당, 카페, 웨딩홀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입구에는 그리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눈에 띈다. 유럽 고대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코린트 양식의 구조물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나는 토스카나 광장.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로 장식한 분수대에서 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린다.
정원 한쪽에는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조형물이 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했던 미소년 아도니스는 사냥을 하다 멧돼지에 물려 목숨을 잃는다. 아도니스가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는 아네모네가 피어났고,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는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하세계와 지상세계를 오가면서, 겨울에는 땅속에서 지내다가 봄이 오면 새싹을 틔우는 식물의 신이 됐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농사의 풍요와 사랑의 결실을 축복하는 아도니스 축제가 펼쳐진다.
이 신화에는 사랑과 이별, 사계절의 변화, 축제의 기쁨 등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이 녹아 있다. 퍼스트 가든은 이 스토리에 맞춰 4가지 테마의 정원을 만들어 시즌별로 다양한 축제를 연다. 봄에는 ‘꽃의 정원’, 여름에는 ‘물의 정원’, 가을에는 ‘축제의 정원’, 겨울에는 ‘빛의 정원’이라는 콘셉트 아래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달 초에는 튤립이 압권이었고, 이즈음엔 장미꽃이 만발했다. 매일 밤 ‘별빛축제’도 열리는데, 특히 요즘은 화려한 조명과 함께 운치 있는 봄밤 산책을 하기에 좋다.
왼쪽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대형 화단이 발길을 사로잡는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분수를 중심으로 곳곳에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석상과 푸른 상록수가 조화를 이뤘다. 경사지에 이탈리아식 건물을 짓고 계곡 형태의 공간에 단을 쌓아 만든 구조도 독특하다. 거대한 벽화를 뒤에 두고 시원스레 쏟아지는 분수는 청량감을 준다.
신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장밋빛 향연으로 펼쳐지는 로즈 가든도 멋스럽다. 중앙을 따라 길게 펼쳐지는 길은 측백나무가 줄지어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작은 식물원과 동물원에서는 새와 동물 먹이 주기와 승마 체험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작년 12월에 오픈한 자동차극장에는 젊은층뿐만 아니라, 옛날 향수를 그리워하는 40~50대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와 10시에 최신작 영화 2편을 바꿔 상영한다. 규모는 차량 70대 정도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
퍼스트 가든의 로고에는 ‘Happiness, Together’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나무, 사람, 지구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이곳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곳을 찾은 어르신들은 자연 속 힐링을 체험하며 “여기가 천국”이라며 행복해한다.
“이곳에 있으면 무엇이 화려하고 과장되고 오만한 것인지, 무엇이 즐거우면서 신선하며, 창조적인지 분명하게 알게 된다.” -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서
경기도 파주시 탑삭골길 260(상지석동 1021-3)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미술관 자작나무숲' 원종호 관장 인터뷰
“요즘 정원들을 보면 다 똑같아요. 그리고 너무 철저히 관리되어 빈틈이 없어요. 그게 너무 소름 돋아요. 그런 정원들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곧 지루함을 느끼죠.”
자연은 스스로 ‘자(自)’와 그럴 ‘연(然)’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그 단어에 맞게끔 자연은 스스로 그리 되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보조 역할만 해야 하는 법. 그러나 사람이 주가 되고 자연이 억지로 끼어들면 식상해진다.
원종호 관장은 작년에 독일에 있는 인젤 홈브로이히(Insel Hombr oich) 미술관에 가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곳은 완전한 자연이었다. 간판도, 안내사항도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가서야 전시장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몇 점의 작품을 전시한 건물에는 전기 시설도 관리인도 없었다. 게다가 어떤 길로 들어서든 미술관을 가려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하지만 그런 공간은 들어가는 순간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죠. 내가 볼 때는 그게 완벽한 정원이에요. 딱히 길이 아닌데도 마음대로 걸어가 보고. 미술관 자작나무숲에는 안내 지도도 없고 표시판도 없는데, 왜 없냐며 항의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일상에서 맨날 지시받으며 살다가 여기까지 와서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그러한 콘셉트를 못 읽는 거죠.”
원 관장은 숲을 가꾼 사람으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신념이 있었다. 물론 지난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그도 경영자로서 부침(?)을 겪어야 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입장료를 2000원을 받았다. 그랬더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오더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7000원으로 올렸고, 1만 원을 거쳐 지금은 2만 원이다. 낮지 않은 가격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고 말한다. 입장료가 어떻게 보면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바로미터라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이상해져가고 있어요. 공기도 나빠지고 사람들 생각도 혼란스럽고. 가끔씩 아이들이 오는데 길이 아닌 이상한 곳으로 가곤 하는 거예요.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따라 길을 가는 거죠. 그러니 자연의 길은 없는 거고 길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원 관장은 이러한 세태를 ‘섭리를 모르게 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부모님께서는 일부러 아이들을 여기로 보낸다고 해요. 저와 여기 정원을 보며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고집스럽게 만든 정원이 때로는 작은 쉼과 여유를 주는구나’ 혹은 ‘저렇게 사는 분도 있구나’ 하면서 하나의 메시지라도 얻고 가면 좋겠어요.”
이 여름이 지나면 핸드폰, TV 없이 쉬고 싶을 때 묵상에 잠긴 가을의 자작나무를 보러 다시 발길을 돌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