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뜻대로 안 될 때가 많다. 가끔씩 일상에서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자 발길 닿는 곳에서 머리를 식히고 싶어진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감성의 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곳이 그리워 그 마음에 이끌려 자연 속에 어우러진 공간과 마주하게 된다.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한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자연 그대로를 품고 있었다. 엄마 품처럼 보드라운 정원 그 자체가 갤러리였다.
※‘당신을 기다립니다’는 자작나무 꽃말이다.
“10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씩은 꼭 여길 와요, 오면 가기 싫어져요. 무엇보다도 자작나무를 보러 오는데, 겨울 자작나무는 희끗희끗 속살이 보여 좋고요. 봄에는 반짝반짝 초록별이 떠서 좋아요, 가을에는 찬란한 색상의 자작나무가 어찌나 이쁜지 몰라요. 자작나무 단풍은 너무 고와요.”
김해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은숙 씨는 친구 은미숙 씨와 스튜디오 갤러리에서 오미자차를 마시며 자작나무에 취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작나무 향내와 뜻밖의 아늑함.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정원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다.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에 위치한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한 사람의 의지가 이룰 수 있는 어떤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다가온다. 산 중턱 언덕 숲 3만3000㎡에 이르는 커다란 정원에 두 개의 실내미술관과 자작나무숲, 스튜디오 갤러리, 숲속의 집(게스트하우스)이 있는 이곳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8년 동안 손수 심고 가꾼 자작나무
이 자작나무숲의 주인인 원종호 관장(66)은 서양미술을 전공했다. 과거 그는 내면을 찾아 세계 곳곳을 방황하는 여행가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여정을 멈추게 만든 곳이 백두산이었다. 백두산에 조성된 자작나무숲에 도착했을 때, 순백의 아름다움에 압도된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방랑벽을 멈추는 대신 고향 땅에 자작나무숲을 가꾸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작나무숲 조성은 그렇게 1991년부터 시작됐다. 원 관장은 우선 산림청에서 폐기하는 1만2000그루의 작은 나무를 구해 심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위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는북방계 식물. 강원도 횡성은 자작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적의 환경이 아니었다. 결국 자신에게 맞지 않는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많이 죽었다. 그래도 겨우 살아남은 자작나무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는 1000그루를 더 구입해 심었고 5000여 그루의 자작나무가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싱그러움으로 반짝거리며 숨쉰다
원 관장이 자작나무숲을 미술관으로 개장한 것은 2004년이다. 두 개의 전시장 중 제1전시장에는 원 관장의 개인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고 제2전시장에는 외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서재를 공유 공간 ‘스튜디오 갤러리’로 변경하여,다양한 문화 예술 서적과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바리스타인 원 관장의 아내 김호선 씨가 직접 원두를 볶아 로스팅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로도 활용하고 있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움으로 연결된 커다란 공간 그 자체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직접 손품을 들여 숲을 다듬는 원 관장의 철학이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숲을 만들 때 고수하는 원칙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간의 추구다. 그래서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자라난 풀과 나무들의 제거 여부도 자작나무숲 공간의 전체적인 자연스러움을 기준으로 선별된다. 이 과정을 통해 길은 발길을 따라 나게 됐고 나무는 건축과 어우러졌으며 순백의 자작나무숲은 보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는 여백으로서 자리하게 됐다. 그런 노력과 수십 년이라는 세월은 마침내 사람과 숲이 자연의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하는 공간으로 깃들었다.
깨달음의 향기에 취하다
원 관장은 매표소 안에서 “세상이 이상해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문명에 길들여져 자연을 모르게 된 사람들이 보이는 이상한 행동들과 이상해져가는 세상이 세상을 더욱 각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자연스러우면서도 특별한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실 정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손이 자연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원 관장은 그러한 정원의 원초적 속성에 저항하듯 ‘그 어디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한없이 자연과 가까운 정원’을 일궜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의 자연스러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철학은 아마도 그가 품었던 도전의식이 가시화된 답일 것이다. 그 답은 성공적인 듯하다. 편안함에 하루 종일 머물고 싶고 가만히 걸으며 삶에 대해 명상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미술관 자작나무숲이기 때문이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지난 6일 세종문화회관으로 뮤지컬 ‘영웅 안중근’을 보러 갔다.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는 떠올리면 가슴 아프고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다.
공연을 보기도 전부터 마음이 경건해지고 아려왔다.
‘1909년 서른 살 청년 안중근,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을 쏘았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울컥하고 가슴이 저리다.
뮤지컬은 러시아 자작나무숲에서 조선 청년들이 모여 ‘단지 동맹’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자작나무숲에 모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그들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군무와 합창이 가슴을 울렸다.
안중근 의사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첫마디를 자르고 대한독립이라 혈서를 쓰는 순간부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고 감옥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독립운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잘 표현하였다.
화려한 군무와 특수효과로 웅장한 무대가 살아났고 아크로바트처럼 무대 전면에 세워진 기둥을 타고 이쪽저쪽 아래위로 활약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긴박감을 느끼게 했다.
높은 무대 위까지도 날렵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그들의 연습이 치열했음을 알게 해준다.
더블 캐스팅으로 두 명의 배우가 안중근을 연기했다.
내가 관람한 날은 정성화 안중근이었다. 예전에 개그맨으로 또는 드라마의 조연으로 보았던 정성화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당당하고 멋지게 안중근 의사를 연기했다. 목소리도 어찌나 멋있는지 합창과 독창 모두 감동적이었다.
단아한 한복차림의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수의를 전하며 부르는 절절한 아들 사랑과 신념을 지켜주려는 마음, 아들을 위해 끝까지 힘을 북돋워 주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후벼 파듯 나를 울게 했다.
일본 법정의 재판하는 장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죄인인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외친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대한의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이고 조선을 말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인 나는 사형이라니 대체 일본 법은 어찌 이리도 엉망이냐”고 호통을 친다.
마지막 장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처형대에 선 안중근 의사, 그리고 1945년 그가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 되었는데도 일본이 감추어 그의 시신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에필로그가 뜬다.
공연이 끝난 시간에도 여전히 꽃샘추위가 나를 웅크리게 했고 한동안 가슴은 먹먹했다.
고인돌과 습지와 호수를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둘레길이다. 고인돌박물관을 출발점으로 해 고인돌유적지와 매산재를 거쳐 분곡습지에 닿기까지의 거리는 약 4km. 역으로 분곡습지까지 차로 간 뒤 매산재를 넘어 고인돌박물관에 도착해도 된다. 분곡습지 산기슭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호수를 따라 굽이굽이 휘고 꺾이는 길. 그지없이 수려한 시골길이다. 차로 휘익 지나기엔 아깝다 느끼며 한껏 서행을 한다. 숲에 사는 귀 달린 생명들은 자동차 소음이 성가실 게다. 내 길을 쉬 가자고 덤불 속에 깃든 고라니를 놀래니 이게 민폐다. 옛 스님들은 지팡이를 앞세워 땅을 노크하며 길을 걸었다. 행여 무심한 발길에 죄지은 바 없는 개미며 지렁이 밟힐까 저리 가라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야산 모롱이를 돌 때마다 풍경이 바뀐다. 혹은 솔숲 사이로, 혹은 대숲 사이로, 혹은 자작나무 군락 옆댕이로 길이 나서. 기우는 하오의 햇살을 받은 호수에, 혹은 하얀 물무늬 아롱지고, 혹은 초록 물빛 너울처럼 일렁거려서.
호숫가 나무들은 내내 호수에 시선을 던지고 산다. 물 위에 비친 제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 생애를 살아가는 저 나르키소스들. 나무들의 그 붙박이 시선에도 생의 희로애락이 어릴까. 뒤죽박죽 꼬이고 풀리다 다시 꼬이는 생의 아이러니를 바라볼까. 외투 깃을 세우고 망연히 길에 멈춰 서 전율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쓸쓸한, 저 물가 나무들의 정경.
운곡습지 구역에 이르러 차에서 내려 길을 걷는다. 이곳엔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니 ‘구름골’이다. ‘오베이골’이라고도 한다. 매산재, 행정재, 호암재, 백운재, 굴치재 등 다섯 고개가 이 골짜기에서 갈리거나 모여 ‘오방곡(五方谷)’으로 통했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이 지역 사투리다. 오베이란 이름, 오 맛깔스럽구나. 사투리란 우리가 고이 간수할 만한 언어의 순수 오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산야의 젖을 물고 살았던 오베이골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83년 영광원자력발전소의 냉각수 조달을 위한 저수지가 이곳에 조성되면서 모든 주민이 물러났다. 농토의 경작도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냉각수의 오염을 우려해서였다. 이후 이곳은 인적 끊긴 적막강산일 따름이었다지. 그렇게 30여 년이 흐르자, 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생태계가 완연히 살아난 것. 삵과 수달과 담비, 황조롱이와 황새와 팔색조 등 멸종 위기종 생물들이 대거 나타난 것. 폐농경지가 습지로 변하며 생물들의 서식 조건이 좋아진 덕이었다. 비무장지대(DMZ)에 버금갈 생태 경관을 보유하게 된 이 분곡습지는 2011년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었다. 자연과 사람은 길항한다. 사람이 극성을 부리면 자연이 망가진다. 사람이 발을 빼면 자연이 살아난다.
겨울 가뭄 탓일 테지. 물을 담지 못한 습지 일원의 경관은 아쉽게도 무덤덤하다. 봄비 내리고 봄꽃들 자지러지게 필 때면 습지에 수생식물들이 번성하리라. 이채로운 물 위의 야생 화원이 펼쳐지리라. 봄은 벌써 발길을 내딛을 채비를 하는가? 운곡서원 앞 매화나무엔 꽃망울이 소담스레 맺혀 있다. 소녀의 볼우물처럼 앳되고 곱살한 매화꽃이 머잖아 설레며 피어나겠지. 겨울과 봄의 어간에서 들썩이긴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가는 게 인생이지만, 삶도 사랑도 죄짓는 일의 연속방송극일 수 있지만, 매화 망울에서 봄을 예감하는 자의 마음은 소망으로 슬며시 부푼다.
운곡습지를 뒤로 하고 매산재 고갯길로 접어들자 참 걷기 좋은 숲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우리네 삶의 골목골목엔 축축한 상처가 고여 있기 십상이지만 이 숲길에선 가슴 밑바닥부터 말끔한 생기가 돋는다. 이를 신비하다 말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고개 넘어 길 끝엔 고창고인돌 유적과 고인돌박물관이 있다. 유적지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477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단하며 가장 비밀스런 무덤이다. 빗돌이 있을 리 만무하니 파묻혀 흙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의 덧없는 소멸에 관한 적시다. 바위처럼 닳지 않는 영원을 향한 갈망의 표식이고 말이다. 영원이라니. 하루살이에 불과한 게 사람이라지만 영원은커녕 단 하루라도 제대로 사는 일조차 벅찬 게 삶이거늘. 그러나 죽어서라도 영원을 꿈꾸는 게 사람이다. 영원한 고요와 침묵은 거저 얻어지겠지만.
톨스토이만큼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작가가 있을까?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다 해도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리바이벌되고 있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을 통해 젊은이들도 잘 아는 세계의 대문호다. 그가 태어나고 말년에 살았던 곳이 툴라 근처의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다.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남쪽으로 두 시간 남짓한 193km 지점. 툴라에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한 툴라
톨스토이 고향을 가려면 툴라(Tula)로 가야 한다. 툴라는 모스크바를 기점으로 한 ‘황금고리 도시’ 중 한 지역. 황금고리 도시란 모스크바 근교의 역사적인 도시들을 일컫는 말로 도시들의 연결 형태가 반지 모양의 원형과 고리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지칭이다.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Kursk) 역을 통한다. 툴라 기차표를 살 때는 물론 기차를 탈 때도 짐과 ‘여권’을 검사한다. 툴라 기차 안에서 약간의 해프닝을 겪는다. 러시아에서 처음 해보는 기차 이동인 데다 매표소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침대칸을 발권해준 것. 4인용 도미토리 침대칸 중에서 2층으로 배정되었는데 침대를 이용하려면 시트가 필수다. 시트가 없어 결국 툴라까지 가는 동안 올라보지도, 누워보지도 못한 채 보조의자에 앉아 간다. 어느 새 툴라 역에 하차. 사람들이 다 사라진 역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다가 경찰관에게 부탁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간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는 시내에서 약간 비껴 있지만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분위기의 마당에서는 막 깎아낸 듯한 풀 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오래된 사과나무 한 그루와 앙칼진 러시안 고양이가 있는 가정집 숙소가 참 매력적이다.
툴라 중심부 크렘린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
숙소에서 툴라 중심부까지는 천천히 걸어 3분에서 5분 거리. 오래된 나무 가옥을 따라 호젓한 길을 걸으면 어느새 툴라 시내가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서 있고 돔 형식의 러시아 정교회 두 개 그리고 바로 크렘린(kremlin)이다. 크렘린이란 원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러시아의 성채, 성벽을 뜻한다. 러시아 각 주(州)에는 꼭 있어 ‘크렘린’이라는 단어 하나만 알면 길 찾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툴라의 크렘린은 1540년에 완공되었는데 튼튼한 벽돌식이다. 성벽 모서리에는 나무 방어탑 아홉 개가 고깔 형태로 1km 정도 간격으로 뾰족하게 솟아 올라와 있다. 성채 내부는 크지 않지만 안정적이고 정교하다. 중앙에 대성당(1764)을 중심으로 전시관, 특산품 코너와 부속 건물들이 몇 개 더 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필자가 툴라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축제가 열렸다.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만난 세르게이
툴라를 찾은 이유는 19세기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Graf Tolstoy)의 고향을 찾기 위함이다. 툴라에서 남쪽 방향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 택시를 이용해도 큰 부담 없는 10분 거리다. 택시 기사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을 더 치러야 했지만 여행객이라면 늘 감수해야 할 일이다. 톨스토이 고향 입구의 두어 개 난전에서 지역 특산품인 당밀과자를 팔고 있다. 나름 관광지라고 물 값이 시내의 두 배 이상이다. 포기하고 그냥 매표소로 간다. 모든 곳을 다 볼 수 있는 표를 사면 가이드 투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언어로 들어야 하는 상황.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가이드 투어를 하지 않아도 될 법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톨스토이 하우스 관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만나게 된 세르게이(72). 젊은 층은 물론이고 나이 든 사람 대부분이 단 한마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는 영어를 잘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물리학자 세르게이는 부인과 조카가 동행인이다. 영어는 못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격이 밝고 유머러스한 부인 타냐, 그리고 조카 표토르. 낯선 그들과 함께 톨스토이 고향 투어를 시작한다.
사과 농장이 있는 톨스토이의 고향
자작나무숲이 길게 이어지는 길 옆으로 톨스토이가 농노들을 위해 직접 심었다는 사과 농장이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가 20여 년간 머무르며 집필했던 ‘톨스토이의 집’은 본채와는 달리 작고 초라하다. 꼭 들여다봐야 할 공간이다. 지독하게 꼼꼼한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 투어다. 박물관을 소중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소장품들의 인테리어가 얼마나 디테일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톨스토이가 입던 옷, 식탁, 서재 등 그의 삶이 톨스토이 하우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질곡한 삶을 잠시 살았지만 대부분을 이 영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소설 ‘부활’, ‘어둠의 힘’ 등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80세 되던 해, 부인에게 인세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10일간 기차를 타고 부인 곁을 떠났다가 7일 만에 모스크바 남부 톨스토이 역(옛 아스타포보 역)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문득 그의 말년 인생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이 떠오른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10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에서 그의 숨결과 흔적을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인간미 넘치는 러시아 사람들
툴라와 톨스토이 고향이 특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사로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 고향에서 만난 세르게이는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한 후 유럽에서 물리학자로 살았고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했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는 흔한 이름 중 하나인데 그에게 ‘세르게이 예세닌’이라는 시인 이름을 말했더니 금세 ‘자작나무숲’이라는 시를 읊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의 낭만을 고스란히 전해주던 그. “툴라의 당밀과자는 이곳 아니면 살 수 없다”면서 생판 처음 만난 한국 여행객에서 선물로 안긴다. 또 조카 표토르는 기념품을 선물한다. 툴라까지 차를 태워주고 차를 세워 시원한 물까지 사준다. 관광지 앞이라 물 값이 비싸다고 했던 필자의 말을 기억한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과분한 선물을 받은 필자가 한 일은 고작 찍은 사진을 보내준 것뿐. 필자가 한국에 여행 오는 외국인들에게 이런 따사로운 애정을 베풀 수 있을까? 톨스토이 고향이 떠오를 때마다 ‘세르게이’ 가족이 필자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관광 안내소 스테프는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했고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난 할머니는 영어 한마디도 못하지만 맛있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빵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친절히 알려줬다. 크렘린 앞에서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크(kbac)를 파는 아주머니가 시음해보라며 돈은 안 받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툴라에서뿐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정 많고 인심 좋은 고령의 한국인을 닮은 러시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여행이 참으로 행복했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인천 공항에서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까지 직항. 9~10시간 소요.
현지 교통 툴라는 모스크바 쿠르스크 역에서 고속열차로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음식 정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많다. 음식은 약간 짠 편이다. 툴라에서는 고층 건물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인터넷 평점을 보고 예약하면 거의 실수하지 않는다. 3만 원 선이면 중상급 숙소에 머무를 수 있다. 도미토리 룸은 1만 원 이하다.
치안 정보 생각보다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찰이 있기 때문.
유의사항 모스크바 외에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은 나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유심카드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 사서 교체해야 한다.
기타 정보 러시아는 거주지 등록이 필수다. 숙소에 말하면 바로 처리해준다. 무비자 여행 기간은 60일까지. 러시아 여행 중 가장 큰 난고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승차표를 보여주면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친애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 여러분. 저는 바상자브 주한 몽골대사입니다. 지난 5월 16일부터 7월 17일까지 한국·몽골 공동학술조사 20주년을 기념한 ‘칸의 제국 몽골’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몽골 제국의 역사와 유목문화를 주제로 기획되고,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전시된 유물들을 소개합니다. 몽골의 유물들을 경험하는 이번 전시와 더불어 한국의 많은 분께서 몽골을 더 친근하게 이해하도록 몽골 여행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몽골은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정도면 수도 울란바토르에 도착합니다. 인구는 312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서 ‘몽골’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정식명칭은 몽골리아(Mongolia(영어), МОНГОЛ(몽골어))입니다. 몽골어를 사용하며 표기는 키르문자(러시아 알파벳)를 사용합니다.
몽골의 환경과 역사
몽골인들은 동서로는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에서 알타이 산맥, 남북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 만리장성 사이의 땅을 주거지로 살아왔습니다. 북쪽은 자작나무 숲이 빼곡한 시베리아로 이어지고, 남쪽으로 갈수록 삭막한 고비 사막에 다다릅니다. 그 중간에 대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몽골 사람들은 이를 무대로 유목 생활을 꾸려왔습니다.
석기시대 유물
8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의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 후반부터 청동기 흔적이 있는데 이 시기에 사용하던 청동기에서 보이는 특징은 여러 동물 형상을 표현합니다. 히르기수르와 판석묘 등의 무덤에서 사슴돌이 발견되고, 바위에도 다양한 동물의 형상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유목 제국
기원전 3세기 무렵 흉노(匈奴)가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이어 유목 민족인 선비(鮮卑)와 유연(柔然)이 활동했습니다. 6세기 중반부터 9세기 말까지는 돌궐, 위구르, 키르기스가 세운 국가들이 몽골 지역을 지배했으며, 10세기 초부터 거란이 등장합니다. 여러 유목 국가 가운데 흉노 제국(BC 3세기~AD 1세기)과 돌궐 제국(AD 552~745)의 유적이 최근 활발하게 조사되고 있습니다.
흉노는 중국 진(秦)나라(BC 221~207) 및 한(漢)나라(BC 202~AD 220)와 맞선 강력한 나라로 동서 문명을 이어주며, 다양한 유적을 남겼습니다. 돌궐은 아시아 내륙의 초원과 오아시스 대부분을 통합한 거대 유목 제국으로 성장했는데, 그들이 만든 제사 유적 중 고대 돌궐 문자로 쓴 기록 등은 돌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과 그 후예들
몽골은 13~14세기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 시베리아에서 남아시아에 이르는 역사상 유례 없는 초거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수많은 국가와 종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horum)과 타반 톨고이(Tavan Tolgoi)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원과 유물
티베트 불교는 16세기부터 널리 퍼졌는데, 정주(定住) 생활과 불교 사원 주변의 도시화한 모습은 대승 운두르 게겡 자나바자르(Undur Gegeen Zanabazar, 1635∼1723)가 세운 사원과 여러 작품에서 이전의 불교와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몽골의 민족의식과 근현대사
14세기 중반을 전후해 붕괴된 몽골 제국은 초원으로 후퇴하고, 17세기에 만주인들이 세운 청 제국에 복속됩니다. 이후 1912년 청나라가 몰락할 즈음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1917년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1921년에 완전 독립을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많은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최초로 탈사회주의 선언 후 1992년 이원집정부제의 신헌법을 제정합니다. 1996년 총선으로 1997년 바간반디 대통령이 선출되고, 2000년 총리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으로 2004년 연립내각이 출범했습니다. 현재 2017년 당선된 바툴가 대통령과 후렐수흐 총리가 임기 중입니다.
몽골에 남은 독립운동가 이태준
이태준은 1914년 몽골 고륜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 병원을 개업합니다. 그는 몽골인들에게 근현대 의술로 유명해졌으며, 몽골 왕국인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가 되는 등 몽골 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습니다. 1919년 보그드 칸이 이태준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제1등급에 해당하는 국가훈장을 수여합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몽골 정부가 부지 2200평을 제공하고 연세대학교 의학과, 몽골연세친선병원, 주한국 몽골대사관의 노력으로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탄생했습니다. 현재는 이태준기념공원 보존회도 만들어져 한국인들에게 몽골 여행 필수 코스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한국을 떠나 우리 몽골에서 많은 사람에게 의술을 선보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이태준 선생의 지난 세월과 신념을 되새기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몽골과 한국
1990년 수교 이후 양국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우호교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와 대외관계에서도 동반자적 문화, 인적 교류가 점진적으로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서울글로벌센터와 몽골 대사관은 새응배노(‘안녕하세요’의 몽골어) 학교를 열었습니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몽골 출신 어린이들이 모국어 교육을 통해 미래 한-몽골 문화, 경제적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인재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최근에도 앞서 소개한 ‘칸의 제국 몽골’ 전을 통해 한국과 몽골의 역사와 문화의 장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자작나무는 예로부터 쓸모가 많은 나무 중 하나로 꼽혀왔다. 신랑 신부의 두근거리는 첫날밤을 밝혔던 화촉(樺燭)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고,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수피 위에 그려졌다. 그래도 왜 인기 있는지 묻는다면 수많은 쓸모보다 자작나무의 매력은 역시 외형이 아닐까. 흰옷을 차려입고 굽힘 없이 쭉 뻗은 모습은 마치 고고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흰 눈이라도 자작나무 숲에 내리면 몽환적인 풍경이 압도적이다. 자작나무 숲 여행은 겨울에 하라고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참나무목의 큰키나무로 다 자라면 20m가 넘는 높이를 자랑한다. 시베리아나 북유럽, 캐나다 같은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국내에선 강원도에서도 평균기온이 낮은 일부 지역에 생식한다.
국내 최대의 자작나무 숲으로 꼽히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자작나무 69만 그루가 심어졌다. 이 중 일부 지역만 개방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새 고속도로로 관광객 늘어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은 최근 서울서 한층 가까워졌다. 얼마 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거리를 줄여주는 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서울 잠실쯤에서 출발하면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동홍천 IC에서 빠져나와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인제 38대교 앞 남전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자작나무 숲 입구가 보인다.
실제로 자작나무 숲을 찾는 관광객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귀촌했다는 인근 가게 주인장은 “주말이면 수천 명이 찾아요. 관광객이 말도 못하게 많아요. 주변 주차장이 꽉 차서 모자랄 정도니까요”라고 말한다.
자작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는 데에는 방송도 한몫했다. KBS 2TV ‘1박2일’에 소개돼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SBS 드라마 ‘용팔이’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방문을 위한 채비는 필수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여정은 ‘원대리 산림감시초소’에서 시작된다. 방문자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 초소를 지나 마침 내려오는 관광객 일행과 마주쳐 숲까지 얼마나 걸으면 되는지 묻자 대뜸 아래쪽을 훑어본다.
“그 등산화로는 무리예요. 저 밑에서 아이젠을 대여해주니까 그걸 차고 가세요. 저도 빌려왔어요.”
겨울철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에선 아이젠이 필수다.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빙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등산로 수준은 아니어도 경사가 꽤 심하다. 가능하다면 낙상 예방을 위해 등산스틱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인대리 자작나무 숲까지의 거리는 초소에서 약 3.2km 정도. 산림자원을 위해 개발된 임도라 구불구불한 모습이지만, 2012년 개장 이후 관광객이 늘면서 정비는 잘되어 있다. 도착지까지 두 번의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입구에서 1.5km 지점까지 오르막이 이어져 방문자들의 숨이 거칠어진다. 두 번째 오르막은 도착 직전에 있다.
늘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시면서 걷다 보면 어느 새 자작나무 숲에 도착한다. 커다란 표지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준다.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라서 그런지 다른 수종은 섞여 있지 않다. 자작나무로만 가득 찬 새하얀 숲을 볼 수 있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풍광이다. 만약 주변에 다른 관광객이 없다면 쉽사리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나무 사이를 적막이 메우고 있다.
숲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이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움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았다. 또 8월에는 국유림 명품숲으로도 뽑혔다.
이곳 숲은 4개 산책로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자작나무 코스는 둘러보는 데만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치유 코스는 1시간 반, 탐험 코스는 40분 정도 걸린다. 힐링 코스는 최장거리인 2.4km. 두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한다.
흙빛과 갈색이 어우러진 겨울 숲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통 흰색으로 장식된 자작나무 숲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겨울은 집 앞도 나서기 어려운 계절이지만, 용기를 조금만 내어 이 특별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6성급 크루즈 선이 인천 항구에 들어왔는데 인천에 볼 것이 없어 승객들이 내리지 않는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나마 이 크루즈 선은 한국에서 인천이 유일한 항구란다. 동남아 관광객을 부른다면서 명동에 할랄 식당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기사도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인천 시장들은 무엇을 했는지, 관광공사는 무엇을 한 건지 한심한 일이다. 관계자들이 현장 답사라며 뻔질나게 외국을 다녔으면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 있었어야 한다. 사드 보복으로 중국 관광객들이 급감한 지금이 우리 관광 인프라를 점검하고 확충할 때다.
인천은 종이 한 장짜리 관광안내도에 인천 관광 소개랍시고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정도만 소개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차이나타운은 오전에 문을 열지도 않은 곳이 많아 볼 것도 없다는 얘기가 있다. 내가 봐도 인천은 볼 것이 없는 도시다. 앞으로 내국인 관광을 내다보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인천은 우리니라 개항의 역사를 지닌 항구이자 도시다. 당연히 역사가 깊은 곳들이 많다. 이곳들을 잘 다듬고 가꾸어놓으면 볼거리가 될 수 있다. 또 바다와 면해 있어서 풍광도 좋다. 바닷가 횟집만으로 관광 인프라라고 할 수 없다. 그나마 여름철에만 반짝하고 겨울철에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도시 환경이나 길도 정비가 안 되어 있다. 대중교통도 불편하다.
자연적인 게 내세울 것이 없다면 인공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쾨켄호프 같은 꽃 정원 하나 없다.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 박물관도 없다. 재원이 없다면 부산의 벽화 마을처럼 서민들이 사는 동네를 꾸며 관광자원화하는 방법도 있다. 지금 조성하고 있는 신도시도 도시화와 함께 관광 면에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인제의 자작나무숲, 담양의 대나무숲이나 메타세쿼이아 길도 몇십 년을 내다보고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에 잘 맞고 인천을 대표할 수 있는 숲이나 관광마을 조성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빛을 못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행정가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단양에 갔더니 공중화장실은 깨끗한 편인데 좌식 변기는 없고 모두 재래식이었다. 한 해 1500만 명의 외국인들이 몰려오고 더 늘어날 추세인데 이래 가지고는 외국인들을 맞이할 수 없다.
명동의 할랄 식당도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할랄 식당을 몇 군데 만들어야 한다. 회교국 관광객들이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 장소도 만들어야 한다. 건물 하나면 되는데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이다. 이슬람 문자로 관광 안내도 준비해야 한다. 명동 땅값이 비싸서 못한다면 명동 인근 지역이라도 알아봐야 한다. 이슬라믹 국가들은 우리 시니어들이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하며 구축한 인연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슬라믹 교도들은 기독교도 다음으로 많다. 관광 당국이 지역적으로 특성을 파악하고 대비해야 하는데 이슬라믹 국가 관광객들에 대한 준비가 너무 소홀하다.
여기 우리나라 맞아?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북유럽이나 백두산 처럼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가 인제의 한 산골짜기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려면 원대리에 있는 원대산림감시초소에서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임도를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자작나무 숲에 도착해 보면 발품판 것이 억울하지 않을 테니 즐거운 마음으로 오르자. 임도는 콘크리트 포장도로와 흙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길 양 옆으로 활엽수가 울창하여 가을에 단풍이 들면 멋지다.
계절에 따라 꽃구경, 단풍구경, 눈 구경을 하며 1시간쯤 산을 오르면 왼쪽에 아이를 품은 여인을 형상화한 목각상이 보인다. 목각상에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목각상 너머로 새하얀 몸통을 지닌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입은 닫고 마음은 연채로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자작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앞선 사람들이 울창한 숲으로 빨려 들어가듯 금새 사라지고 만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하여 자작나무라 불린다. 플라타너스처럼 생긴 잎을 밟을 때도 자작소리가 난다. 걷다가 자작나무 벤치가 보이면 그곳에 않아 눈을 감아 보자. 나뭇잎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이 새하얀 수피에 반사되어 눈꺼풀 위로 아른 거린다. 바닥에 누워 따사로운 볕이 얼굴을 간질이는 느낌도 느껴보자. 한참을 누워 있어도 조급한 맘이 들지 않는다. 시간은 숲 안에서 정지되고 바닥에 누인 팔다리는 나무뿌리가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이곳은 휴대전화 조차 터지지 않는 두메산골이라 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이도 없다.
자작나무는 수피가 하얘서 겨울에는 더욱 눈부시다. “숲의 여왕”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데 겨울에는 “눈의 여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코발트 불루빛 하늘을 향해 하얀가지를 뻗어 올린 모습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며, 가을엔 황금 빛 단풍이 가슴을 뛰게한다. 사계절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으니 이 숲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광복 이후 한국인을 설명하는 말은 ‘빠르게’다. 무조건 ‘빠르게’에만 집착한 우리는 너무 오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놓치고 부수고 망가뜨렸다. 이제 우리는 걷기에 대해 물어봐야 할 때다. 신정일(辛正一·62)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걷기를 하나의 문화로 정립하고 전파한 독보적인 인물이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동학을 복권시킨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이었으며 현대 시각에 맞춰 다시 쓴 이중환의 고전 ‘택리지’를 포함한 78권의 책을 쓴 작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 위에서의 사색을 전파하는 길 위의 인문학자 ‘자연대학 총장’, 신 이사장이 말하는 걷기의 힘, 걷기의 철학.
“강변의 모래가 아름답다고 쓴 걸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들, 걸으면서 본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죠.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은 우리가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본 것들이 곧 내 살이 되고 정신의 활력소가 된다는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의 말은 나이 들어서 천천히 바라보면서 걸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빨리 걸을 필요가 없어요. 마사이족은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걷는데 그건 아프리카에나 맞지 우리에게는 맞지 않아요.”
우리나라 곳곳은 도서관이고 박물관이다
마사이족 얘기처럼, 요즘 걷기는 소위 건강을 추구하는 걷기가 유행이다. 이 시대에 신 이사장이 생각하는 걷기란 무엇일까?
“겨울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만저우리(滿洲里)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평야만 가고 어떤 때는 자작나무숲만 가고 했죠. 그 길을 가면서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골짜기도 많고 산도 많고, 땅은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런 게 없었어요. 우리나라 곳곳은 어디나 도서관이고 박물관입니다. 허투루 볼 게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는 게 걷기 문화예요. 그래서 어디 갔다 왔는지도 몰라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늙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요.”
신 이사장은 많이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정상까지 안 가도 된다. 중간쯤 가면서도 많은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서는 멀리 바라본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나이가 들면 관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너도 나도 같이 쏠려서 일행이 함께 가는 것은 자기의 자아를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에 휩쓸려 가는 것이지 않나요. 길을 걸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그러지만, 많은 시간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칸트, 니체, 루소 등등 수많은 철학자들도 걸으면서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해파랑길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걷고 싶다
한강 길만 네 번을 걸었고, 낙동강은 세 번, 관동대로를 두 번, 서해안, 임진강, 영산강 등등…. 신 이사장이 지금까지 걸은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 것이다. 그러한 길들 중 어느 길은 모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해파랑길이 있다.
“2008년만 해도 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 제가 제안한 길이 거의 길이 됐어요. 변산마실길, 소백산자락길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답사길을 만들자, 해서 만들어진 게 해파랑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해파랑길처럼 아름다운 길은 없어요. 저는 해파랑길을 시작으로 해서 우리나라에서 북한을 거쳐 러시아, 스웨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까지 걸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너무 길어서 혼자선 못 걷겠는데요’라고. 그럼 3대가 걸으면 되죠(웃음).”
2014년 완공한 해파랑길은 선비들이 걸어가던 관동팔경길, 낙동강변에서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 현대인들이 걸을 수 있게 재정비 했다.
신 이사장에게 좋은 길이란 무엇일까?
“잘 만들어지고 시설이 좋은 게 아니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길인 게 좋아요. 경북 봉화군 석포면 소재지에서 명호면까지 이어지는 낙동강길을 특히 좋아합니다. 거기는 한나절을 걸어도 길 물을 사람조차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에요.”
여기저기를 보고 느끼며 빠져드는 즐거움
신 이사장은 ‘해찰’이란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해찰은 순우리말로 ‘쓸데없는 다른 짓’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신 이사장에게 해찰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걸으면서 유독 여기저기를 보고 확인하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길은 어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다. 마치 도반(道伴)처럼, 그렇게 기억에 남는 길동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많다고 대답했다. 당연하다. 그에게는 인생 자체가 길과 같을 테니까.
“훈련소에서 첫눈에 반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대를 다니던 운동권이어서 강제징집을 당했는데, 신약성경 하나를 갖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42일간 훈련을 함께 했었죠. 이후에 자대 배치를 받을 때 그 친구가 ‘신정일, 너 공부 많이 했다’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고작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인정해주니 참 좋았어요. 이후로도 그 친구와 꾸준히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를 간 게 행복이에요. 그 안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고 자유를 구속당하면서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신 이사장과 김지하 시인, 신영복 교수, 박경리 작가와의 인연도 길을 타고 만나게 된 기연이다. 신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의 시를 즐겨 읽는 애독자 중 하나였다. 김지하 시인의 시는 신 이사장에게 동학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됐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인연들
“향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동학농민운동가인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1993년 5월에 세우게 됐는데,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싶었어요. 그때 만나던 김남주 시인이 신영복 선생을 소개해 주셔서, 신영복 선생이 비문을 쓰게 됐습니다. 4월에 연락이 왔죠. 글을 써놨으니 자택인 목동으로 와서 가져가라고. 그때 가서 비문을 받고자 하는데 김지하 시인 얘기가 나와요. 그날 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기다리려고 파리공원을 갔는데 한 200m쯤 떨어진 자리에서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군요. 지남철에 끌려가는 것처럼 갔더니 사진에서 보던 김지하 선생이었어요. 인사를 드리니 반가워하며 동학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인연의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지하는 장모님, 곧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의 팬이라고, 오늘 자신이 전화할 것이니 전주에 가서 박경리 작가에게 전화하라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박경리 작가도 만나 두 시간여 담소를 나눴다. 에서 나오는 김개주가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는 것도 그날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김개남을 세계적인 혁명가로 생각하고 후배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 쓰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도 안 쓰더라는 작은 불평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인연이 만들어낸 귀중한 경험들이었다.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고상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상하다는 것은 꾸미지 않는 것입니다. 별로 꾸밀 것이 없어요 인생 자체가. 인생은 자기 소신껏 사는 것이죠.” 도인의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로 적용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신 이사장 또한 사람이다. 욕심도 생기고, 뭔가 해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정규 학교를 가고 부모 재력도 있었지만 저는 의지할 데가 없었어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책을 쓰기 전에는 변방에서 시인들 뒷바라지나 했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었고 작가가 되겠다고 시험을 본 적도 없으니까.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으니 오로지 글을 쓰고 걷기만 한 거죠.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삶의 지표였었죠.”
말의 행간에서 조금씩 느껴지는 것처럼, 신 이사장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매일 두드려 맞고 책을 뺏기다가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학교를 관뒀다. 그 후에 그는 14살에 가출을 했고 15살에는 출가를 했다. 출가한 지 두 달만에 스님이 ‘넌 여기 있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 살아라’라고 말해서 절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때 정말 많은 곳을 방랑했습니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성질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던 그지만, 역경은 그의 삶에 꾸준히 자리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극복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이겨냈다.
“돌이켜보면 저는 인생 중에 한 달 남짓 행복했어요. 그런데 한번 헤아려 보세요. 행복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가. 헤아려보면 많지 않아요. 연암 박지원이 누나 제문을 쓴 걸 보면 ‘어찌 이리 짧더란 말이냐. 왜 슬프고 가난하고 곤궁했던 일들만 많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죠. 다 그래요. 인생 자체가 그래요.”
그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게 삶이라고 그는 말했다. 마치 길을 걷는 것처럼.
“들뢰즈가 ‘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좋아해요.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문자조립공’의 나이 들지 않는 길
신 이사장은 태어나 최초로 군대에서 월급을 받는다. 690원. 그는 그 돈으로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 세 권을 사고 나머지 90원으로는 라면 몇 개를 사서 한 달 동안 간식으로 먹었다. 제대할 때가 되자 2만원을 갖고 나오게 됐는데, 그 돈을 종로서적에 가서 책 사는 데 다 써버렸다. 그때 그는 종로서적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보며 ‘과연 내가 쓴 책이 저 자리에 꽂힐 날이 있을까’ 되물었다고 한다. 물론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 이사장은 교보문고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정선으로 열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에 출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표였던 시절에는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을 데리고 섬진강을 걸으며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래서 ’항상 꿈을 꾸자. 꿈은 공짜다’라고 말한다.
그는 현재 자신의 직업을 ‘문자조립공’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 어느덧 일흔여덟 권에 이른다.
“글 쓰는 사람은 모두 ‘문자조립공’이에요. 한문은 몇 만 자를 다뤄야하는데 우린 스물네 자만 다루면 되니 얼마나 행복해요.”
요즘 부쩍 철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신 이사장은 카프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연암 박지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는 내 곁에 놓고 가끔씩 펼쳐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들고 싶어요. 에서 ‘우리는 수백만 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요. 돈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명예도 사라지는 것인 만큼 부럽지 않아요.”
‘현자란 바라보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라는 신 이사장의 마지막 말은 길과 인생에 대한 소회이자 해법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 법이니,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기적인데 깨닫지 못하면 기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기적에 가까이 닿아 있는데, 마땅히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유난히 겨울이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그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태백시다. 고원의 도시 태백의 겨울은 지루할 만큼 길다. 겨울밤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밤새 사락사락 눈이 내리는 날, 석탄가루에 뒤범벅된 도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설원에 감싸인다. 설원은 고산 밑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는, 지붕 낮은 집들의 때 묻은 몸을 잠시 숨겨준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태백산 당골 눈축제장에서 신나게 놀고 광산 갱도 체험
해발 600m에 위치하고 있는 태백시는 기온이 타 지역보다 낮아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도시다. 해마다 민족의 영산 태백산에서 눈축제(1월 22일~31일)가 열린다. 당골 축제장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축제여서 해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축제장 주변에 만들어진 눈 조각품 등은 눈요기와 볼거리를 주고 다양한 공연은 흥을 돋워준다. 개썰매와 스노모빌 썰매 등 체험거리도 많아 재미가 쏠쏠하다.
거기에 1997년 5월 문을 연, 동양 최대의 석탄박물관은 꼭 찾아봐야 하리. 태백시는 198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던 탄광도시였다. 그러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이 시행되고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석탄박물관에서는 잊혀가는 그 시절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지하 체험갱도관은 생동감이 넘친다. 전시관을 다 보고 지하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실제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대형 디오라마(모형도)로 갱내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태백산도립공원 입장권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태백산 설경 보면서 천제단까지 산행하기
진정한 설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태백산(1567m) 산행을 감행해야 한다. 코스는 당골매표소와 백단사, 유일사, 사길령 등이 있다. 최단 코스는 백단사나 유일사 코스다. 겨울 산행이 결코 쉽지 않지만 주목 군락지의 설화나 일출 등을 보기 위해 찾아든 등산객들의 수없는 발자국이 찍힌다. 태백산 9부 능선인 1500고지에 오르면 망경사가 있다.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나중에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망경사에는 물을 통해 바다 용왕과 교통한다는 용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으로 가는 길목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망경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산정 허허벌판에 있는 천제단을 만나게 된다. 천제단 주변에는 죽어 천년, 살아 천년이라는 주목 군락지가 있다. 주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나 설경 감상은 매년 1월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일이다. 철저한 등산 채비는 필수다.
고생대자연사박물관의 삼엽충과 구문소 풍치 감상하기
2010년에 개관한 태백 고생대자연사박물관(033-581-3003, 태백로 2249, www.paleozoic.go.kr)이 있다. 이곳에 박물관이 생기게 된 것은 주변에 다양한 고생대 퇴적 침식지형과 삼엽충, 완족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관심 없으면 화강암인 듯 생각하기 쉽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질이 매우 독특하다. 고생대의 바다가 융기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며 고생대부터 살아온 삼엽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박물관 가까이에 태백 8경으로 손꼽히는 구문소(천연기념물 제417호)가 있다. 낙동강 상류 황지천의 물이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 바위에 구멍이 나고 소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고생대에 석회암이 용해되어 생성된 석회동굴은 볼 때마다 신령스럽다. 주변의 얼어붙은 마당소, 삼형제폭포 등의 겨울풍치도 나름 볼만하다. 태백시내에선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둘레 100m가량의 ‘황지연못’도 가볼 만하다. 상지, 중지, 하지로 구분돼 있는데 연못에선 하루 5000톤가량의 물이 자연 용출된다.
상장동 벽화마을과 샘터마을
태백시의 또 다른 볼거리가 상장동 벽화마을이다. 이 마을은 1970년대 광부만 4000여 명이 거주했던 국내 대표적인 광산 사택촌이었다. 저탄장으로 사용된 문곡역을 중심으로 탄가루가 날리고 검게 그을린 광부들의 막장 생활을 달래는 대폿집이 줄지어 있던 번화가였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시행으로 폐광이 늘면서 젊은 광부들이 하나둘 떠나 지금은 400여 명의 주민들만 남았다.
지붕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겉으로 보기엔 태백시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다. 마을 골목 벽마다 크고 작은 70여 점의 작품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과 이야기, 사진 등을 통해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검은 황금’으로 불렸던 석탄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지나가던 누렁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전설 속의 개를 형상화한 ‘만복이’가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철암동에 가면 탄광역사촌이 있다. 철암역 앞에 있는 역사촌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살려, 탄광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작나무 숲과 검룡소 겨울 트레킹
태백산 산행을 못했다면 검룡소로 대신해보자. 검룡소(검룡소길) 주차장에서 왕복 2.6㎞ 정도만 걸으면 된다. 곧게 뻗은 낙엽송 군락지 숲은 한겨울에도 빛이 난다. 검룡소에 이르는 길은 나무 데크가 연결한다. 데크에서 소(沼)를 바라보면 된다. 약 20m 둘레의 암반에서 늘 9℃의 수온을 유지하는 물이 하루 2000~3000톤씩 솟아오른다. 하지만 눈으로는 용출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도 이곳의 의미는 크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다. 임계를 지나 정선, 평창, 단양, 충주, 양평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데 36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지나며 12개의 하천과 만나 한강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