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권(67) 관장은 미술을 좋아하는 취향에 추동돼 자하미술관을 만들었다. 처음엔 그저 경치 좋은 인왕산 기슭에 살림집 한 채 짓고 싶었단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꿔 미술관을 지었다. 그의 전직은 회사원. 기업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니 미리 길러둔 미술에의 조예와 경륜이 깊었을 리 없다. 뒤늦게야 미술과 미술관의 물정을 파고들었을 텐데, 평소의 공부 습성을 기반으로 실력을 키웠던 것 같다. 즉 출발은 다소 무모했지만, 이후의 행보는 견고해 뜻을 이루었다.
“회사 다닐 때 즐겨 찾기 시작한 곳이 미술관이었다.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으로 미술관보다 나은 게 없다는 걸 알고 더 자주 미술관을 다녔다. 이게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동인이다. 남들도 나처럼 위안받기를 바라며. 그게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미술관을 만든 것이다.”
건물 설계시 모델로 삼은 곳이 있나?
“건축을 구상하기 전에 100여 권의 건축 관련 책부터 읽었다. 그러고 내린 결론이 안도 다다오(노출콘크리트와 자연 채광을 건축에 끌어들인 일본 건축가)의 기법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지중미술관을 보고 착상한 게 좀 있었다.”
입지의 자연 풍광이 빼어나다. 서울 도심이 지척인데 깊은 맛을 주고.
“미술 작품과 산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다들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 같더라. ‘높고 외진 곳에 관람객이 오기나 하겠어?’ 처음에 숱하게 들었던 얘기가 그랬다. 그러나 기우에 가까운 소리였다. 적다고만 할 수 없는 관람객들이 찾아오니까.”
명산 인왕산 기슭인 데다 북한산과 북악산이 전면에 펼쳐져 수려하다. 덕분에 전시 작품은 뒷전이고 풍광에 더 관심 갖는 이들이 많을지도.
“작품으로 다 채우지 못한 갈증을 자연경관으로 보충할 수 있어 양수겸장이라 봐야 하겠지. 재미있는 건 이곳의 풍수 여건이다. 절묘한 터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실제 인왕산은 애니미즘의 센터였다. 이에 착안해 샤머니즘을 주제로 기획전을 펼친 적도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자연의 물상을 신앙으로 바라보는 건 성향에 맞지 않아서.”
그럼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만든 미술 작품이 제아무리 걸작이라도 자연을 넘어설 수 있겠나? 인간의 예술이냐 자연이냐, 그 우월성을 논하는 경우도 있지만 난 웃고 만다.”
전시 작가 선정엔 어떤 기준을 두나?
“개성적인 자기 세계를, 실험적 표현 기법과 형식을 구현하는 작가를 우선시한다. 콜라주 작가나 여성주의 작가,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들도 선호한다. 일단 배제하는 건 상업주의에 물든 작가다.”
배고픈 작가가 태반이다. 사립미술관들도 형편이 열악하다.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예술도 장사가 돼야 지속 가능한 게 아닐까?
“사립미술관만 말하자면, 영리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엔 딜레마가 있다. 사립미술관이야말로 ‘적자 창고’니까. 기부 문화의 확산으로 문제를 푸는 게 가장 정당한 해법이다. 요원하지만.”
그는 요즘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 연구에 한창이다. 나혜석 기획전을 준비하는 것. 남도의 섬에 미술관을 꾸릴 구상도 하고 있다.
고즈넉한 정취로 포근한 골목길, 시간의 퇴적으로 빛바랜 집들, 저 너머가 궁금해지는 언덕…. 서울에서 이제는 쉬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딱딱한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희한하다. 그래 부암동은 매혹적이다. 음미할 만한 옛날 맛이 남은 동네다. 아파트촌보다 한결 따사로웠던 옛날 동네에 관한 추억이 금빛을 머금고 살아난다. 향수겠지. 이럴 때 마음은 물살처럼 번져 과거의 기슭으로 흘러간다. 자하미술관은 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의 이름은 무계정사길.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서북부 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하미술관은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있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들 중 가장 고지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이다. 인근엔 석파정 서울미술관과 환기미술관이 있다. 둘 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다. 저만치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이상적인 도시란 어떤 걸까. 내 생각엔 크고 작은 문화공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즐비한 도시다.
싱싱하고 유쾌한 콘텐츠를 장전한 문화시설이 편의점처럼 숱하다면? 아마도 풍속은 덜 야박해 매정한 도시를 견디기가 용이하리라. 삶의 비루함과 지루함을 잠깐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는 문화예술의 폭약이 생필품 목록에 오르는 세상. 나는 그런 도시가 그립다. 이 점에서도 부암동은 사람을 매혹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으니까.
레트로 바람일까. 해묵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처럼, 곰삭은 시간의 흔적이 서린 이 동네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색다른 운치를 돋운 카페들도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또는 갈피 없이 마음이 들썩일 때 커피 한잔 즐기기에 좋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무계정사길 풍경이 이렇게 다채롭다. 서정과 시정을 누릴 만하다. 그렇다면 이건 미술관에 차려진 예술의 성찬을 예감케 하는 애피타이저?
좁은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잠깐 사이에 자하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일 아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거닐며 풍경을 즐기라. 그러라고 골목길들이 무언의 환영사를 읊조리는 게 아닌가? 삶의 과속과 과욕은, 직진을 관습으로 삼은 넓고 개방적인 큰길들이 암암리에 인간들에게 퍼뜨린 병증일지도 모른다. 넥타이처럼 좁고 골방처럼 안온한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길의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으나, 부암동에 듬성듬성 남아 있다. 도시개발의 캐터필러에 깔려 이마저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간신히 생존한 저 골목의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골목길이지만 애틋하다. 옛 친구를 만난 양 반갑다. “그래, 또 만나!” 기약 없는 석별을 하고 몇 십 년 전에 헤어진 친구가 문득 골목 모롱이에서 전설처럼 등장할 듯 괜히 설렌다.
과거에는 많은 일들이 골목길에서 벌어졌다. 일상의 인간관계가 맺어졌다. 벌게진 얼굴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수줍은 연애편지를 전해주고 냅다 달아나기 좋은 곳도 골목길이었다. 정든 주점 하나쯤 골목에 있게 마련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 숨듯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이 골목이었다. 세사의 긴장과 소음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곳이 골목길이었다. 그러니 못내 그리운 게 골목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하미술관에 가려거든 골목을 걸어 예열할 일이다. 자글자글 들끓는 향수에 취해볼 일이다.
산경(山景)도 영락없는 예술
자하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웅숭깊은 역사 한 자락이 깔려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종의 아들로 서예의 달인이었던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무계정사 옛터에 지금은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이 들어섰지만, 고명한 옛사람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니 깃든 뜻이 예사로우랴.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당최 잊히지 않는 꿈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속의 지상낙원을 들려주고 그림으로 그려주길 청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이 천하 걸작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더 나아가 몽유도원의 현실적 지형을 찾아냈다. 여기 부암동 산간을. 그러곤 무계정사를 지었다. 무계란 무릉계곡이다. 즉 이곳은 안평대군의 무릉계곡이자 무릉도원이었다. 무계정사 일원이 통째 옛사람의 원림이었다. 자하미술관 역시 원림 구역이었다. 순전히 안평대군의 행장에 이끌려 부암동 길을 거닐다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이도 드물지 않을 테다.
자하미술관은 언덕길이 끝나는 고샅에 있다. 인왕산이 늘어뜨린 치마 한 자락을 부여잡은 미술관이다. 그저 살포시, 산 그림자 드리워진 미술관의 형상도 담박하다. 꾸밈과 치레를 자제해 얼룩이 없는 둘레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린다. 건물은 노출콘크리트 벽체로 골격을 삼았다. 개성을 돋우기보다 기능성을 살려 지은 집이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있다. 외부의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장 한쪽엔 유리판을 설치했다.
미술관 외부에 가득한 건 초록을 내뿜는 산이다.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인간사의 광기와 탐욕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양 무심히 흐르는 구름이다. 상상력을 광폭으로 키울 경우 모든 게 미술이다. ‘본디부터 그냥 그런’ 저 자연을 모방하는 게 예술이지 않던가. 이런 자연을 예술로 관조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게 자하미술관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 했으나, 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산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락없는 예술이다. 조물주의 붓질이 스친 자리다. 신이 구현한 설치 작품이다.
산중 고요에 폭 파묻힌 자하미술관은 작은 미술관이다. 하나 허투루 봤다간 큰코다친다. 수준 높은 기획전을 빈번히 펼치는 미술관으로 나름 이름났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전시회들을 기획해요?” 그런 얘기 매번 들었다며, 설립자 강종권 관장이 홍소를 터뜨린다. 그는 미술관 건물을 손수 구상해 지었다. 2008년 개관 이래 독특한 기획전들을 펼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랫동안 안평대군에 꽂혀 헤어나지 못했다. 6년을 내리 안평대군을 테마로 한 갖가지 전시회들을 열었다. 몰입도 이런 뜨거운 몰입이 없다. 그럼에도 양에 차지 않았던가. 2017년엔 ‘안평대군의 비밀정원’이라는 타이틀의 대형 전시회를 펼쳐 갈 데까지 가봤다. 이 전시회에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 22명이 참여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주재환과 성능경의 2인전 ‘도르래미타불’전 역시 성황리에 펼쳐졌다. 방문 당시에는 김상표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화폭에 난사한 액션 페인팅으로 아나키즘을 표출했다.
자하미술관에서 시선이 머무는 건 그림만이 아니다. 외려 산 풍경에 쏠린다. 북한산 비봉능선에, 북악산의 옹골찬 품새에 넋을 잃는다. 후미져 제 발로 찾아오기 쉽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웬걸, 와서 보고선 흥취에 반색한다. 그림과 풍광, 둘을 잡았으니 남은 허기가 없다. 종내 마음으로 들이치는 건 안평대군의 꿈이다. 그의 몽유도원 한 자락을 훔쳐본 기분이라니.
세계 곳곳에 불고 있는 도시화(Urbanization, Citification) 바람은 꺾일 줄 모르고 진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물론 대형 빌딩이 지닌 물리적 인구 흡입력과 첨단 IT 융합 현상이 도시화를 가속시키는 데 큰 몫을 하고 있지만, 도시 속 대형 빌딩들이 숲을 이루면서 나름대로 뿜어내는 예술성도 배제할 수 없는 원인일 것이다. 그것은 빌딩 건축물을 예술적 감각이 배어 있는 대형 조형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건축예술품만을 찾아나서는 전문 관광객 그룹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3년 전에 건축가 중심의 동호인 25명이 독일에서 서울을 찾아오더니, 금년에도 45명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서울에 산재한 도시 빌딩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보기 위함이다. 당시 서울을 찾은 독일 건축가들은 한결같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보는 것만으로도 서울을 찾은 보람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하기야 ‘DDP’는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지만, 세계 각 도시에 산재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 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20년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메인스타디움 디자인 공모를 하면서, 건축설계자로 ‘자하 하디드’를 선정했다. 그러나 일본 내 강한 반대 여론에 봉착하고 말았다. 막대한 건축비를 반대한다는 이유를 내걸었지만, 일본 건축계가 자존심이 많이 상해서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래서 우리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대형 조각품 같은 건축물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가꿔가야 할 새로운 개념의 문화재가 아닌가 싶어서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올해 정유년(丁酉年)은 열두 동물로 나타내는 12지신 중에서 ‘닭[酉]’띠 해가 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새해마다 정해진 열두 동물이 윤회하며 한 해를 상징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용(龍)을 빼고 열한 동물은 인간 주변에 있는 것들이고, 날개 있는 동물로는 닭이 있을 뿐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에는 ‘한(韓)에는 꼬리가 5척(尺)이나 되는 세미계(細尾鷄)가 있다’고 적혀 있고, 송(宋)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었다는 에도 ‘마한(馬韓)에 장미계(長尾鷄)가 있는데 꼬리가 다섯 자[尺]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唐)의 위징(魏徵 580~643)이 지은 에 ‘백제에는 닭이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토종화된 닭을 키웠다고 여길 수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닭’의 어원(語源)이 산스크리트어로 해동(海東=우리나라)을 부르던 kukuta[닭] svara[귀함]가 한자로 구구타귀(矩矩吒貴), 계귀(鷄貴)에서 ‘구구, 꼬꼬댁’ 등으로 음전화(音轉化)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漢)의 한영(韓嬰 ?~?)이 지은 에는 닭이 다섯 가지 덕(德)이 있는 덕금(德禽)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닭 벼슬의 관(冠)은 문(文), 발 갈퀴는 무(武), 죽을 때까지 용감히 싸우는 모습은 용(勇), 먹을 것을 보고 친구를 부르는 행위는 인(仁), 밤을 지켜 때를 잊지 않고 알리는 것을 신(信)이라 표현해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칭송이 아니더라도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울음만으로도 신령(神靈)한 동물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악귀(惡鬼)들이나 무서운 맹수들이 활개 치던 길고 두려운 어둠을 그 낭랑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둬내고, 밝은 새날을 맞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을 불러오는 상서(祥瑞)로운 동물인 것이다.
새해가 돌아오면 집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닭 그림을 붙였다. 와 에 실린 김알지(金閼智 65~?)의 탄생 신화도 닭의 울음에서 비롯된다. 당시 신라 4대 왕 석탈해이사금(昔脫解尼師今 ?~80)은 그 닭이 울던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國號)로 삼았다. 이후 15대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로 바뀔 때까지 계림은 두 세기 이상 국내외에서 통칭되었다.
이만익(李滿益 1938~2012) 화백의 그림 은 여러 ‘닭의 신화’를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다. 빛나는 태양과 눈부시게 서기(瑞氣)를 내뿜는 닭 울음의 순간이 가히 백미이다. 간결한 구도와 짙은 색감, 굵은 선이 신화의 한 장면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닭이 올라앉은 복숭아나무는 꽃이 만개하여 무르익은 봄의 정취도 그만이다. 잘 아는 수집가를 졸라서 입수하게 된 이 그림을 큰아이의 결혼청첩장에 쓰려고 의논하였더니 이 화백도 아주 기뻐하였다. 수집한 미술품으로 가족달력을 만들 때도 온 가족이 손꼽는 작품이다.
이 화백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남하하여 서울의 효제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전국의 미술대회를 석권한 빼어난 인재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서울예고 등에서 10여 년의 교직 생활 후 파리로 유학, 빈한한 여건 속에 괴츠아카데미(Goetz Academy)에서 앙리 괴츠(Henri Goetz, 프랑스 화가)에게 사사(師事), 그러나 2년여 후에 뜻한 바 있어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서양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해, 우리라는 주체를 잃어버린 채 서양의 재료와 방법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미술 교육이 서양 사람이 되도록 그 감성마저 바꾸어놓았다”고 개탄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 우리나라의 신화와 설화를 주제로 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다시는 서쪽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미술감독을 맡아 세계에 “한국 고유의 문화를 격조 높게 승화시켰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조각가 엄태정(嚴泰丁 1938~ )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 2004년까지 모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재학 시절 스승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의 첫 철조작품 (1958)을 접하고 “장시간 부식된 철재 판재의 스크랩으로 철재가 지니고 있는 시간성과 사물성을 통해서 교묘한 철재의 공간성과 함께 이 조각 작품에 담겨져 있는 숨겨진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기억이 난다”고 그의 책 에 쓰고 있다.
엄 화백은 197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도쿄(1975), 런던(1980)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조각 정체성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금속조각에서 받은 깊은 감동에서 비롯된다. 브랑쿠시는 “조각 본래의 요소는 우의적인 사고, 상징, 성스러움 혹은 물질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의 탐구를 의미하지, 결코 외관을 사실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유(思惟)와 명상(冥想)의 구도자(求道者) 같은 조각가였다. 한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문하에 들까 하다가 “큰 나무 밑에선 작은 나무도 자랄 수 없다”며 독자의 길을 개척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엄 화백은 “브랑쿠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의 대상을 주제로 삼고, 그 속에서 본질을 찾아 조각을 이루며,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빛으로, 하늘로, 대지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예술적 사물이 되어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서 브랑쿠시를 ‘넘어야 할 산’이라 하였다.
1997년 현대갤러리, 2009년 성곡미술관 등 엄태정 조각가의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거대한 금속괴(철, 구리, 알루미늄)를 관류(貫流)하는 스케일 큰 그의 예술세계를 느꼈다. 언제나 그의 조각상을 보고 싶으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문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를 기리는 연못, 자하연(紫霞淵) 앞에 우뚝한 그의 작품
를 찾아간다. 1998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작인 이 청동 작품은 곧게 뻗은 네 개의 기둥이 공간에서 넓은 나래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웅장하고 높은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다.
그의 소품 조각은 아예 없어서 수집할 길이 없었는데 1998년 10월, 한 옥션에 소품 석 점이 올라왔기에 하도 반가워 이 작품 을 낙찰받았다. 원형의 두툼한 구리판을 열일곱의 크고 작은 세모꼴로 부식시키고 철 기둥에 붙인 이 작품은 원형을 이루며 조응하고 있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팽팽히 확산과 응집을 이루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부식된 자리는 검은 철로 마무리해, 빛의 그늘로 입체감을 주었다. 빛은 밝음이며, 따뜻함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