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산림청 개청 이후 47년 만에 첫 여성 고위공무원이 탄생했다고 떠들썩했다. 외부 인사가 아니라 연구직 공무원이 국립수목원장 자리에 오른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수목원 역사를 그려온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의 이야기다.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에 여학생이라고는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 혼자였다. 그저 막연하게 누구나 하는 일 말고 다른 일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식물’이었을까.
내 삶은 ‘녹색 우주’
“대문 앞 가장 굵고 오래된, 집의 기둥 같은 단풍나무는 우리 아빠 나무, 동그랗고 아름다웠던 늘 푸른 사철나무는 우리 엄마 나무, 주목 나무는 동생 나무였어요. 저는 맏딸이라 꽃을 맡았어요. 황철쭉이었죠. 어머니가 꽃을 워낙 좋아하셔서 집 안에도 꽃이 많았고, 봄이면 매년 어머니랑 꽃씨를 심었어요.”
이 원장의 가족은 조그마한 정원 한편에 저마다의 나무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식물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된 건 어릴 때부터 꽃과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가정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일까. 대단한 목표를 가졌던 게 아니라 그저 남들과 다른 일을 하고 싶었고, 식물이 좋아 선택한 전공이기에 이 원장은 식물 연구하는 일이 ‘우연이면서도 필연’이라 생각한다고.
그에게 지도교수는 식물의 가장 중요한 기관인 ‘꽃’을 연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식물분류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다. 이후 1994년 산림청 임업연구원 임업연구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왔다. 우리나라에 ‘국립수목원’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연구를 시작한 이 원장은 식물 분류 및 수목원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식별이 쉬운 나무 도감’,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 등 30여 권의 저서와, ‘한국산 조팝나무 속의 분류학적 연구’ 등 100여 편의 논문을 냈다.
1999년에는 임업연구원 중부임업시험장 수목원과가 산림청 국립수목원으로 신설되면서 광릉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수목원으로 승격했다. 이유미 원장은 수목원 발전의 흐름 속에서 희소멸종위기 식물 보전, 전국 생물 다양성 조사, 국가표준식물명 제정, 한반도 식물지 사업 등 다채로운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14년에는 국립수목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원장은 취임 후 3년 동안 유용식물증식센터를 개원하고, DMZ 자생식물원을 열었다. ‘우리 식물 주권 바로잡기’로 소나무에도 붙어 있던 일본식 이름을 영어 이름으로 바꾸어 알렸다. 우리 특산식물 33종을 세계자연보전연맹의 권위 있는 보고서 ‘레드 리스트’에 국내 최초로 등재했고, 국내 자생식물 2945종을 망라한 ‘한국 관속식물 분포도’를 발간했다.
“돌아보면 참 놀라워요. 어쩌면 남들이 가는 길을 막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민간이 할 수 없지만, 꼭 필요한 일은 국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에는 도감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라, 그런 일을 찾다 보니 굵직하고 지평을 여는 일들이 된 것 같아요. 수목원이 발전해온 흐름 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셈이죠.”
이유미 원장은 “내가 평생 몰두하는 일이 자연이라는 건 정말 큰 축복”이라고 했다. 자연을 보면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매일 다르게 느껴졌단다. 무궁무진함이 담긴 자연과 식물이야말로 그에게는 ‘녹색 우주’라고 했다.
‘여성’이라는 타이틀과 ‘최초’라는 수식어를 늘 달고 다녔던 이 원장이다. 대학 시절부터 여학생은 혼자라 희귀한 존재 취급을 받았다. 이에 대한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가 ‘최초’라는 말이 좀 많이 붙긴 했죠?(웃음) 남녀 차별이 많던 시절이었고, 필드를 다녀야 하는 일이다 보니 선입견도 많았죠. 직업 특성상 ‘여직원 혼자 보내도 돼?’라는 말이 종종 나오니까요. 하지만 남자도 힘이 센 사람, 약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빨리 달리는 사람, 느리게 달리는 사람 정도의 차이를 두려고 하죠. 한창 연구할 때는 ‘여성’이라는 말이 따라다니지 않도록 ‘여성’을 지우고 ‘전문가’로서 일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또 그런 시간을 다 지내고 보니 오래 일하는 여자가 드문 모양이에요.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할 때는 ‘여성’을 지우려고 노력했는데, 기관장이 되니까 반대로 조직이나 사회 안에서 여성이 가지는 어려움에 대해 선배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를 더 고민하게 됐죠.”
식물과 세상 연결하는 ‘플랫폼’
이유미 원장은 처음 국립수목원장을 맡을 때부터 수목원을 식물과 세상이 만나는 플랫폼으로 만들고 싶었다. 국립세종수목원으로 온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식물 덕후들이 모이는 장을 보고 나니 더욱 확신을 얻게 됐다. 반려식물로 유명한 베고니아를 키우던 배 팀장에게 사계절전시온실의 작은 공간을 내주었더니, 온라인에서 식물 인플루언서로 유명한 안 주임의 활약으로 약 300종의 베고니아 컬렉션을 만들더라는 것.
어느 날 열린 수목원 축제에서는 분야별 식물 덕후 40여 명이 모여 자신의 장을 열더니 그들의 팬들이 새로운 걸 보러 모여들었다. 말 그대로 반려식물 축제 마당이 열린 것. 이제는 식물 덕후들이 자발적으로 수목원 내에서 ‘반려식물 상담소’도 운영한다. 수목원을 식물과 세상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꿈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광릉숲을 중심으로 한 국립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세종수목원, 이렇게 세 개의 국립수목원이 있다. 각 수목원은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식물을 보전하고, 전시하고, 교육하는 건 국립수목원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죠. 다만 기능적으로는 조금씩 달라요.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은 기초 종에 관한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시드볼트라는 야생식물 종자저장고가 있고,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훼손된 생태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을 합니다. 국립세종수목원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수목원이죠. 축구장 90개만 한 면적의 논이었던 곳을 가꾸어나가는 거예요.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보니 정원·교육에 무게를 두고 있어요.
연구원 시절부터 우리나라에도 국립수목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연구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막연하게 꿈꿨던 일들이 구체화되고 있어요. 훨씬 잘된 것들도 많고요. 수목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했던 일들이죠. 보전도 처음 해보고, 기초 연구 틀도 만들고, 정원이라는 문화가 들어오면서 수목원법이 제정되고, 도심형 수목원까지 왔죠. 이런 것들이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20여 년 전부터 젊은 연구자들이 모여 꿈꾸고 만들어온 그림에서 파생된 결과예요. 지금도 참 기적 같습니다.”
이유미 원장은 국립세종수목원에서 ‘도심형 국립수목원의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열섬 현상, 미세먼지, 탄소 줄이기, 기온 낮추기 등 식물이 가장 필요한 곳은 역설적으로 도시가 되었다. 코로나19로 조금 더 가속화된 반려식물 트렌드가 이를 보여준다. 이 원장은 이제 공존과 생명 순환을 고민한다. 보기 좋게 개량된 야생 식물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매해 버려진다. 심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것. 그동안의 정원이 ‘식물 소비’였다면, 이제는 생명이 순환되도록 할 때다. 자연주의 정원이 유행한 배경이기도 한데, 그만큼 이제는 생물 다양성, 다른 생명과의 공존 등이 중요한 화두가 됐다. 한국식 정원은 자연을 들여온다는 점에서 좋은 사례가 된다.
“야생에 있던 식물들이 공원에 들어와 매해 피고 지려면, 나비나 벌 같은 ‘폴리네이터’가 있어야 하거든요. 꽃을 피웠을 때 수분을 해주어야 할 친구들이니까요. 그런데 요즘 꿀벌도 사라진다는 말이 종종 들리죠. 다양한 생명이 함께 깃들어 살아야 하는 거예요.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도록 만드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되어야겠죠.”
야생의 식물이 우리 곁으로 오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반려식물로 유명한 식물은 대부분 외국 종이다. 정원과 관련해 화분 같은 소재도 대부분 수입품이다. 이유미 원장은 ‘홍지네고사리’, ‘파초일엽’ 등 우리나라 자생종이 반려식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연구 개발을 하고 있다.
‘실험적인 정원’이라는 뜻의 트라이얼 가든(Trial Garden)도 시도한다. 일명 케이테스트 베드(K-Test Bed) 사업이다. 자생식물이나 우리나라 꽃과 나무로 만든 신품종이 정원 소재로 적합한지 시험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민간 육종가들이 연구한 품종들이 꽃 농사로 이어지도록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정원식물 전시·품평회는 높은 관심 속에 성황리에 마무리돼 수출까지 이어지려는 참이다.
19세기 영국에서 긴 항해 동안 운반되는 식물을 보관했던 상자 ‘워디언 케이스’(Wardian Case)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가정에서 쓸 수 있는 미니 온실처럼 현대식으로 개량해 특허도 냈다. 아직 판매는 시작하지 않았지만, 집 안에 온실을 만들 수 있는 길을 하나 내었다. 식물과 사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드는 일이다.
이유미 원장은 “나무를 꼭 친구로 두세요”라는 말을 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고 크게 자라는 존재는 ‘나무’다. “수백 년씩 자라 속이 비어가고 굳어가는 나무들도 봄이면 어김없이 말랑말랑한 새싹을 내놓습니다. 그 새싹이 또 꽃을 피워요. 나이가 들수록 자아가 강해지고 고집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나무처럼 평생 말랑말랑한 느낌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늘 지나다니는 집 앞, 회사 앞에 어떤 나무가 서 있는지 아세요? 혹시 은행나무 꽃을 본 적 있으세요? 가을이 되어 온몸이 노랗게 물들고서야 ‘은행인가 보다’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나무 안에 삶도 위로도 나의 모든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 아래 멈추어 서서 한번 바라보세요.”
동화 작가 권정생(1937~2007) 선생에겐 남이 없었다. 사람은 물론, 보잘것없는 쇠뜨기풀이나 강아지 똥조차 그에겐 남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를 남으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남의 일이라는 것도 없었다. 남의 일도 내 일로 알아 남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삼았다. 가뭄이 길었던 어느 여름날. 벌겋게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저것들이 얼마나 목마를까?” 그런 중얼거림이 새 나왔고. 이런 눈, 이런 연민, 이런 삶의 태도가 어떻게 가능할까.
머리맡에 두고 지내는 책이 있다. 국립수목원장을 역임한 신준환(동양대·64) 교수가 쓴 ‘다시, 나무를 보다’다. 책 속에 별처럼 반짝이는 게 있어 영롱한 책이다. 이 멍청이에게 평소 잘 보이지 않던 걸 보게 하는 눈을 달아주는 책이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나무는 커갈수록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간다. 나중에 엄청난 크기로 자라면 엄청난 적막을 이겨야 한다. 이런 적막은 묘한 울림을 자아내어 바람을 조금도 느끼지 못해도 가지 끝은 우주의 율동을 감지한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도 그만큼 내려앉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도 그만큼 떨린다. 고요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찰의 힘이다.”
자랄수록 점점 커지는 적막의 무게를 이겨야 하는 나무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 가볍지 않은 사유의 궤적이 보인다. 우리는 모두 지독한 고독의 대가. 나무에 감정이입을 하더라도 ‘나’의 고독만 도려내 읽기 쉽다. 적막한 숲에서 홀로 견디는 나무의 무참한 고독에까지 마음이 닿기는 쉽지 않다. 더 흔치 않은 건 나뭇가지 하나에 내려앉은 우주의 기미를 보는 눈이다. 그러나 신준환은 보고 있지 않은가. 나뭇가지가 ‘우주의 율동’을 감지하는 걸.
한 걸음 더 들어가 그는 그 ‘우주의 율동’의 양상을 통찰한다. 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가는 짧은 순간에 나뭇가지가 지어 보이는 몸짓의 관찰을 통해서다. ‘새가 내려앉으면 그만큼 내려앉고, 새가 날아가도 그만큼 떨리는’ 가지, 즉 새와 가지가 만나는 사소한 물리적 동향을 우주적 조응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미 ‘우주적 율동’을 감지한 나뭇가지는 제 몸에 앉은 새 한 마리가 ‘남’이 아님을 자각하고 새가 날아갈 때 몸을 떤다. 새가 떠나며 남긴 티끌만 한 온기에 전율한다. 이렇게 새와 가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채는 신준환의 촉수가 환해 눈부시다. 그는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된 ‘우주 패밀리’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리고 그걸 읽어내는 유심한 눈길은 ‘성찰의 힘’에서 나온다는 메시지를 던진 게 아닐까.
‘다시, 나무를 보다’는 ‘성찰의 서(書)’다. 사물의 속을 보지 못한 채 수박 껍데기만 핥는 단세포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길을 귀띔하는 책이다. 부엌에서 숟가락을 들고 “이것은 숟가락이다!” 외치는 식의 빤한 허세를 깨라 권유해오는 책이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구미에 맞는 책 내용에 동해서. 마침내 몇 차례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뒤 마주앉게 되었다.
“책 곳곳에서 나무를 유심히 관찰하는 당신의 눈길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현미경과 망원경까지 달린 눈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눈으로 보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보지 못했던 것까지 볼 수 있는 과학적 관찰도 필요하다. 내가 미친놈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양 정색을 하고 달려들어 보지 않으면 내가 나를 볼 수 없다.”
“그렇게 ‘나’를 관찰했더니 무엇이 보이던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깊어질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며 살았는데도 벗어날 수 없더라고. 온갖 책을 읽어도 우물 안 개구리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뭘 몰랐던 것이지. 인간이란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이후 생각의 전환이 있었겠다.”
“우물 안 개구리들끼리 연결돼 함께 살면 해결될 문제라는 걸 알았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게 가장 좋은 삶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관계를 맺는 방식에 변화가 왔지. 흔히 ‘나’ 안에 인간이 존재하는 걸로 알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나’와 ‘너’ 사이에 인간이 존재한다. 부처나 예수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다. 인간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자 과거와 다른 새로운 관계 형성이 가능해지더군.”
근본적으로 남의 말 듣지 않는 인간
외적으로는 좋은 사이로 보여도 내적으로는 불화하는 게 사람 관계다. 삶의 괴로움은 주로 이 대목에서 나온다. 불화의 정직한 해소가 쉽지 않아서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기보다 상대를 타박하며 교정하려 든다.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콕콕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 옆구리 콕콕 찔렀냐?”는 식으로. 닭싸움처럼 뒤엉길 수밖에 없다.
신준환도 40대 때까지는 사람 또는 세상과의 관계에 혼선이 많았다고 한다. 그가 갈구해온 자유나 사랑에 이르는 길 역시 훤히 보이는 게 없어 조바심쳤던 것 같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그 문제부터 화급히 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 수학과 철학, 물리학과 생태학을 공부했고, 산림학자인 그의 믿을 만한 동행인 나무에 관한 유심한 탐구를 거듭했다. 그 일체의 몰입을 그는 ‘성찰’의 과정으로 본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자극을 받는 동물일 뿐이다. 따라서 관계의 상위 하위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마다 우위에 서서 상대를 끌고 가려 하지. 이래서는 안 된다. 직장 동료든 아내든 친구든 하나의 세계로 인정해야 한다. 극과 극으로 다른 존재까지 그 자체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선의를 베풀면 되는 거다. 이럴 때 사랑을 중심에 둔 ‘관계’가 이루어지며, ‘너’와 ‘나’가 분리되지 않는 소통, 즉 ‘관계의 춤’을 추게 된다.”
“약육강식을 근본 축으로 돌아가는 인간사에서 그게 가능하겠나?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利他)로 살기가 쉽겠느냐는 말이다.”
“‘정글의 원칙’이나 약육강식을 믿지 마라.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알려진 동식물의 세계만 보더라도 약탈을 일삼는 게 아니라 서로 싸안아 공존하는 걸 알 수 있다. 또 모두가 긴밀한 연결 관계 속에서 생명을 지속한다. 가령, 사자가 버펄로를 잡아먹는 건 학살이 아니라 숭고한 지속의 과정이거든. 사자는 버펄로를 먹어 제 새끼를 키우며, 사자는 죽어 풀을 기르는 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 버펄로는 그 풀을 뜯어먹고 제 새끼를 기르고. 한마디로 너 없이는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는 세계. 모든 게 그 세계 안에서 움직인다.”
누군가가 죽어줘야 나의 삶이 지속된다는 거. 자연에서 나온 인간이지만 먹고살기 위해 자연을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라는 거. 이걸 흔히 골치 아픈 딜레마로 여기지만 신준환은 다르게 본다. 관점을 넓히면 딜레마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거다.
“부분적으로 갈라놓고 보면 무엇에건 좋고 나쁨이 있다. 반면, 일체를 연결해 바라보면 모순이 사라지고 우주만 남는다. 자연스러운 연결망 안에 조화로운 생물다양성이 내재한 걸 알 수 있다. 그걸 아는 게 ‘이치’를 아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아득한 신화의 시대엔 인간과 동물이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았거니와 의사소통도 했다고 한다. 현대의 인간들은 동물과 좋은 사이가 아니다. 고라니 문제에서 보듯이 전전긍긍을 일삼기도 한다. 동식물과 자연은 인간에게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 보는가?”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인류의 지성도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저 자연의 움직임에 개입돼 있을 뿐 자연을 보호할 자격을 갖지도 못했다. 자연은 자연대로의 이치를 따라 스스로 그러할 따름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게 인간인 한 지속가능한 자연을 위한 어떤 겸손한 실천은 있어야 하지 않나?”
“기본적으로 큰 차원에서 보면 지속가능한 건 아무것도 없다. 시공간 개념을 넓게 잡을 경우 지금의 둥그런 지구가 네모나 세모로 바뀔 수도 있다. 자연보호나 지속가능 같은 걸 따질 거 없다. 나의 날숨과 들숨이 이미 자연계와 연결돼 있다는 걸 기억해 자연과 가급적 좋은 관계를 맺고 살면 그만이다.”
“소피아(sophia)라는 이름의 로봇이 있다.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너는 누구냐고 묻자 ‘환경오염으로 망해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온 소피아’라고 농담으로 응수하더군. 인공지능(AI)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인간과 똑같은 AI가 출현할 것을 겁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공연한 걱정이다. AI와 인간의 합체는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변한다. 유인원이 변한 게 인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의 인류가 다른 존재로 다시 진화할 수도 있는 거거든. 그 진화의 모습이 AI 로봇으로 드러나더라도 이상하거나 두렵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다.”
“인류가 매우 기이한 종이긴 하지만 기계인간에게 제자리를 내줄 만큼 자비로울까? AI 로봇으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로봇과 쌈박질을 하다 깨져 멸종할 수는 있겠지.”
“인간이 지금 할일은 좋은 생각과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잘 살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돈을 주지 마라. 돈을 많이 가지면 칼 맞아 죽을 수 있거든. 돈 대신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자면 마음을 지금 당장 잘 닦아야 한다.”
‘관계의 춤’으로 마음 보살펴야
마음. 결국 마음의 문제에 닿았다. 마음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게 다시없어 마음을 중심에 놓으면 세상의 모든 풍진과 미래가 난적처럼 어렵게만 보이진 않는다. 신준환이 말하듯 마음을 잘 닦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놈은 걸레로 닦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게다가 마음은 놈팡이를 닮아 자주 몸 밖으로 튀어나가 길길이 날뛴다. 또 게다가 선가(禪家)의 전언에 따르면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 없는 마음을 무슨 수로 닦나?
“마음을 닦아 도통하기는 어쩌면 아주 쉽다. 문을 딱 닫아걸고 나 하나만을 집요하게 살피면 도통할 게 아닌가. 그러나 이런 식의 도통은 문을 열자마자 부서지기 쉽다. 사람과의 관계가 없는 도통은 무의미할 수 있다는 얘기지. 내가 생각하는 마음 닦기는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존재와 연결돼 추는 ‘관계의 춤’으로 마음을 보살피자는 의미이니까.”
“요즘 당신을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은?”
“가끔 손주들을 만나 놀며 감동과 즐거움을 느낀다. 녀석들이 내 마음까지 읽더라고. 마치 영리한 반려견처럼. 까만 눈망울은 아예 우주적 블랙홀이더라.(웃음) 나의 모든 게 빨려들어간다.”
“최근 관심사는?”
“사랑이라는 화두다. 가까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다가가고자 한다. ‘관계의 춤’을 통해 사랑을 확장하고 싶은 것이지. 그러나 몸과 삶으로 잘 풀어내지 못하고 생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 미안함을 느낀다. 아직 부족해서다.”
그가 다시 ‘관계의 춤’을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중과 사랑이 넘치는 유대를 통해 좋은 삶,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 관계의 춤. 예수의 어법으로 말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겠고, 불가의 전언을 빌리자면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바로 그런 공공선(公共善)을 지향하며 살자는 의미일 게다.
이는 새로울 게 없는 언설일 수 있다. 그러나 신준환에겐 남다른 게 있다. 그의 논지는 유창하게 우주까지 뻗어 있지만 거기엔 모호하게 드리워진 신비나 추상이 없다. 세상을 오랫동안 유심히 바라보고 공부를 해온 사람다운 통찰이 있다. 이미 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리얼리티가 있다. 그는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고 낮춘다. 어쩌나, 나 같은 석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