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순옥(제1회 브라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여기 이 쇼핑 봉투에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보나마나 작아. 이건 너무 크고, 어쩐다?”
아이가 건네준 서너 개의 쇼핑 봉투는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차례로 옆으로 놓였다. 내 앞에는 아이가 가져갈 옷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담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양이 어중간해서 쇼핑 봉투로 한 번에 담으려는 손길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 길을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기에는 번거로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무언가 떠올라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갑 속에서 두둑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꺼낸 것이 바로 보자기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조각보로 만든 보자기들, 그중에서 제법 넉넉한 크기로 골라 짐을 싸니 한 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때? 좋다. 손에 들기도 편하고 예뻐서 보기에도 좋고.”
“응? …으응.”
아이의 얼굴에는 마뜩치 않은 웃음이 흘렀다.
“됐어. 어차피 내가 들고 갈 텐데.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제 짐을 쌌으니
나갈 준비해야겠다.”
하긴 나도 보자기를 서슴없이 손에 들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공부 중인 아이에게는 영 어색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는 쇼핑 봉투가 나오기 전에는 짐을 옮기는 일을 전담했고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썼다. 내 기억 속에도 생전에 엄마가 볕 좋은 날 툇마루에 앉아 보를 만드는 모습이 있다. 주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크기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가며 만들었는데 특히 한복은 화사함이 좋아 조각보로 이어 붙이며 상보나 베갯잇. 보자기 등으로 탄생하곤 했다.
조각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고, 홑겹이기 때문에 시접을 서로 맞물려 고정시켜 나가는 쌈솔로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한 번에 ‘뚝딱’이 아닌.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어 붙여가는 부분은 홑겹이 두 겹으로, 바탕보다 진한 부분으로 드러나고, 그렇게 도드라진 선은 다시 이어지며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자칫 설렁설렁 바느질을 했다가는 모양이 엉성해지는 것은 물론 이음 부분이 벌어져 제 기능을 못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일그러지고 만다.
삯바느질로 자식 넷을 키워낸 엄마는 시내에서 꽤 이름 있는 한복집에서 일을 맡아 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이나 바지런했던 것처럼 바느질 솜씨도 좋아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에 단골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늘 화사한 한복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 곁에서 어쩌다가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세모난 눈길로 바늘을 놓게 했다.
“엄마는 한복을 만들지만 너는 한복을 맞춰 입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특히 한복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나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고 조각보로 이어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시간은 뿌듯함마저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보자기에 짐을 싸면 특별함이 더해져 참 좋았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러운 질감도.
지금 돌아보면 조각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탕이 되는 기본 조각보에 덧대어지는 크고 작은 조각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던 서러움으로 채워진 조각보 하나,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덤벼들 기세로 마음의 날을 세웠던 조각보 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힘을 얻었던 조각보 셋….
처음에는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이리 삐죽, 저리 툭, 이음 부분이 삐져나오고 시접 부분이 불거져 풀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힘듦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내 삶의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고 은근한 배짱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 내 삶은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조각들로 이어질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소소함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이 풀어내는 것들로 조각보는 이어져가고,
한 숨 쉬어갈 때쯤이면 상보가 되고, 보자기가 되어
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이 되어준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앙증맞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상 위에 놓인 상보가 전해주던 맛있는 즐거움으로. 자식의 나이에서 벗어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싸주던 보자기가 품어주던 설렘으로,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 이제 나가야 해요. 버스 도착 10분 전이에요.”
“그래. 가자.”
나는 아이의 짐을 싼 보자기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음으로 전해져 왔다. 삶의 너울로 울퉁불퉁한
내 삶을 한 번에 안아주는 든든함으로.
조각보자기를 통해 내 삶을 마주한다. 빳빳한 쇼핑백보다는 조각보자기가 더 좋은 만큼 그 어떤 감정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의 여유로움을, 색도 크기도 다른 조각보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이 소중함을, 조각보를 바느질하며 남아 있는 내 삶을 담아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쥐어본다.
우동집 앞에는 공원이 있었다. 11월의 찬바람에 느티나무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벗어던져야 할 지난날의 안락했던 생활의 옷처럼 그렇게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공원 안에는 낡은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 위에 소주병이 몇 개 던져져 있었다. 낭만을 말하기에는 현실감의 무게가 너무 큰 풍경이었다. 누군가 먹고 버린 소주병이 낙엽 위에서 뒹굴었다. ‘공원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이 공원의 느티나무와 사귀어 친구가 되어야지. 내가 가는 곳마다 다행히도 나무들이 늘 있었어.’ - '행복한 우동가게' 중에서.
비로소 평범함이 좋다
소설 '행복한 우동가게'의 강순희 작가는 전남 강진에서 평범하고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문학소녀였던 작가가 결혼과 함께 충주 땅에 살면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일상은 여전히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오지게 고단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평범치 않은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학교 때 가출도 해봤어요.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늘 살던 곳이 지루했고, 엄마랑 아버지랑 늘 같이 사는 평범함이 싫었어요. 그러나 보름 만에 돌아왔죠. 쬐끄만한 아이의 머릿속에 평범함이 싫다 해서 달라지는 건 불편함인걸 알았나 봐요. 하하... 이젠 미래에 대한 반전을 기대할 생각도 없고. 비로소 지금의 평범함이 너무 좋아요.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반전이 없길 바라요."
느닷없는 파도에 실리다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애환이 서린 IMF는 강순희 작가의 일상에도 태풍처럼 덮쳐왔다. 그리하여 세상 어려움 모르고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밀가루 풀풀 날리는 주방에서 더딘 손으로 반죽을 하고 우동을 끓여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우여곡절로 마주한 세상은 녹록지 않았죠. 남들이 보기에 열심히 살아온 것 같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산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힘이 날 이끌고 온 겁니다. 우동 먹으러 오는 분들, 그리고 글 쓰는 이들의 모임이나 성당의 신부님 말씀을 비롯해서 늘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요. 듣는 것만이 내 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어느날 나 보고도 말을 좀 해보라고 해요. 뭐 근사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요. 다만 '사는 게 내 힘대로 안되더라, 다만 남아있는 내 인생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최고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말만 하고 돌아왔어요." 해탈한 듯 편안하게 소리 내어 웃는다.
강순희 작가는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보내고 1996년 평화신문 평화문학상과 1997년 문예사조 '이발사는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로 등단했다. 그 후 소설 '백합 편지' 등 차분히 창작활동을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삶의 풍파에 떠밀려 시작한 우동가게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내 삶이 지극히 소설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말들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삶 또한 소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안 쓰곤 못 배기는 이상한 우동가게 아줌마는 어느 날인가부터 우동을 끓이다 조금만 짬이 나면 글을 쓰게 되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동소설을 쓰다
"이전에는 소설을 썼죠. 문학 소설을 썼는데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나만의 글을 써요. 문학 장르의 틀에 맞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나만의 우동소설을 씁니다. 정석이나 기본을 배제하지는 않으니 반란은 아니겠죠. 한때 난(蘭)을 그렸어요. 선생님께서 '난이라는 식물의 기본이나 속성을 알고 쳐야지 난이 나오지' 말하셨어요. 그렇게 우동소설을 쓰고 있어요."
문학과 생활의 구분이 없는 나날 속에서 틈틈이 적어둔 우동 가게의 단상이 '행복한 우동가게' 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며 함께 부대끼고 삶의 애환을 나누던 주방 여인들의 고된 삶의 체취를 순한 눈으로 풀어놓은 두 번째 이야기, 이어서 우동 가게에서 내다보이는 작은 공원의 느티나무와 소통하며 나눈 위안의 시간을 글로 빚은 세 번째 이야기, 이른바 그녀의 우동소설이다.
"우동소설이 언뜻 수필 같지만 소재와 주제가 거의 똑같아요. 조각보처럼 이것저것 옴니버스로 엮어서 책을 만든 것입니다. 이젠 기회가 되면 펴내려고 한 사람을 배경으로 써 놓은 또 다른 장편소설이 있어요. 우동을 끓이면서 소설 쓰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해서 어려움은 있어요.
제겐 책이 나오고 나면 이어질 책을 또 준비해 두어야 하는 숙제 의식 같은 게 있어요. 요즘도 원고 청탁이 오면 그제야 써보려고 머리를 짜내며 집중하려 하면 진전이 잘 안돼요. 시간에 쫓기며 책임을 완수하고 싶지 않아서 가능한 미리 준비해 두는 편이죠. 나만의 고질적인 준비성이나 책임감도 한 몫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습작이 되고 말지도 모르겠지만 숙제를 잘하고 싶은 거죠."
"그러나 써내고 나면 잊어버리려 합니다. 써낸 후엔 독자의 몫이니까요. 전에 책 나오고 출판기념 모임이 있었어요. 진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자칫하면 내 자랑이 될 수 있고 책과 내 모습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이니까요."
지금은 충주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나 여류 등단 작가들과 '문향회‘ 활동을 하며 소통을 한다. 연수동 우동가게 옆 느티나무가 만들어낸 시인의 공원에서 시 낭송회도 하고 문향회의 밤을 열기도 한다.
우동집을 향해 손을 내민 소박한 사람들의 악수
작가의 우동가게에 들어서면 놀라운 풍경에 멈칫하게 된다. 가게 내부의 모든 벽에는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들로 도배되어 있다. 우동을 먹고 가는 사람들이 털어놓은 고단한 삶과 넋두리가 빼곡히 적혀있어서 다가가 읽는 맛이 특별하다. 무명 시인의 가슴 저미는 속 깊은 이야기, 아픔과 슬픔 가득한 몇 줄 글의 애잔함, 누군가의 사랑의 언어, 또는 반짝이는 축하의 말이나 행복한 재잘거림들이 줄줄이 겹쳐서 펄럭인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내 이웃들의 이야기다.
"우동을 먹고 메모쪽지를 남기고 가면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봐요. 사람에 대한 진정성을 봅니다. 이웃 사람이거나 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 등 다 자기의 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필휘지 써낸 글에선 자칫 자신감만 엿보일 수도 있어요. 눈물로 쓴 듯 마음 저린 몇 줄도 있고요. 휘갈겨 썼거나 마음 담아 꼭꼭 눌러 쓴 것이나 그 분들이 한 장씩 써 놓고 간 것이 그 사람의 대표작이 될 수도 있기에 소중합니다. 내게 힘을 주는 이유죠.
우동, 사람, 느티나무, 강 작가의 행복의 쓰리콤보
그래서 책 속에는 시원한 우동국물을 우려내고 우동가락을 뽑아내던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시간을 견디며 살았던 날에도 다녀가신 분들이 두고 간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 깊이 그 진심을 담아 두었다. 마음이 심란할 땐 창밖으로 보이는 시인의 공원에 나가면 느티나무가 그녀의 말귀를 알아들었다. 이런 것들이 작가에겐 더없이 충분한 행복의 쓰리콤보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하고 있는 문학이나 그림이나 사진 등 예술은 어쩌면 사치일지 몰라요. 물론 그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누군가를 위한 휴머니즘이라고 또는 약자를 위한 대변이라고 하면 자칫 오류가 될 듯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매체를 통해 굳이 표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진정한 소설가고 멋진 사람이다 싶어요. 진실을 안고 가잖아요."
가게 안에 붙어있는 작가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나지막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노트북이 열려있었고 몇 권의 책과 필기도구들이 편하게 흩어져 있다. 사람들이 두고 간 이야기들이 그녀의 소설 속으로 저장되고 있는 중일 게다.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이전의 우동 가게에서 떨어져 뒷골목으로 옮겨왔어요. 서른아홉에 시작한 첫 가게에서 다시 고요하게 이 골목으로 스며든 게 나이 육십이었어요. 이곳도 생각만큼 고요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조용하게 이 상황을 즐기려 합니다."
어느덧 시니어로서 넓어진 품도 생겼고 여유로움도 생긴 표정이다. 그 얼굴에서 치열함이나 조바심이 엿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내민 우동소설에 저자 사인을 해주며 그녀는 주방을 향해 파전과 막걸리를 청한다.
"내게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은 너무도 평등해요. 나도 편하게 누리며 잘 살던 시절이 있었죠.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의 여파로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가족들이 해체되고 생계를 위해 우동 가게를 시작한 게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죠. 그러나 젊었으니까 마흔 중반까지는 버틸만 했어요. 생계를 위해서 힘들게 일은 하지만 기운이 있고 젊고 이쁜 때였잖아요. 갱년기가 지나고 조금씩 아프기 시작하며 50이 넘으니까 여자라기보다는 비로소 사람으로 살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더라고요."
밤새 우려낸 깊은 우동국물의 담백함이 배인 그녀의 미소가 환하다. 이젠 그 품으로 예기치 않은 세월이 와락 다가온다 해도 두 팔 벌려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 세월이란 게 우리에게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것만이 아니란 걸 강 작가는 말한다.
"이제 60이 넘었어요. 쉰의 아홉수를 지나고 60 초반엔 나이가 나를 위축시키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나이 먹는 게 차츰 나쁘지만은 않아요. 내 나이 63세. 이젠 누군가 객기를 부리고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아들여요. 나랑 다르다고 불편해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렇구나 이해하고 빨리빨리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제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하하..."
△갬성 충만,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카페 식물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초록의 푸릇푸릇함과 유니크한 의자와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한 옆의 라운지로 나가보자. 바람이 통하는 야외 공간의 자연 속에서 건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꽃을 피운 선인장과 높은 천정에 닿는 떡갈나무와 함께 편안함에 잠길 수 있는 힐링 포인트다. 커피, 녹차라떼 등의 다양한 음료가 있고 와플이 맛있는 충주의 감성 카페다. *주소:충주시 연수동 1154
-정봉기 아뜰리에
충주는 온천지역으로 알려진 수안보가 아주 가깝다. 충주 사람들은 수안보 온천물에 세수하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충주에서 조금만 달리면 수안보에 조각가 정봉기 님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있다. 이탈리아 유학 후 수안보 숲 속에 자리 잡은 작가의 안목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의 마당에서부터 조소 작품이 가득하다. 뜰에서 바람 쐬며 구경하다가 카페에 들어가면 독특한 내부구조와 조각 작품들로 눈이 호강한다. 인체와 꽃을 오브제로 한 조소 작품들이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다. 2층 테라스 테이블에 앉으면 푸른 숲 속에 잠긴 채 계곡 물소리를 듣는 시간이 된다. *주소: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관동 길 74-1
“먼 길 오셔서 뭐라도 건져 가셔야 할 텐데 저는 작업실이 따로 없어요.” 한 땀 한 땀 공들여 바느질하듯 상대를 배려하는 목소리는 촘촘하고 결이 고왔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이 조각보를 구입해 소장할 만큼 경지에 이른 솜씨이지만 헝겊 자투리 갖고 잘 놀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소박하게 말하는 이소라(53) 섬유공예작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을 앉아 바느질을 해도 지루하지 않다니 그야말로 혼자 놀기의 고수 아닌가. 그녀의 손바느질이 피어나는 공간을 들여다보니 제대로 놀아본(?) 사람의 방이 맞았다.
등받이가 있는 좌식 의자, 조각 천이 수북이 쌓여 있는 낮은 나무 탁자, 바늘 바구니, 작고 오래된 분홍색 라디오 하나, 그리고 막 구상을 끝낸 듯한 조각보 도면 위로 감칠질한 조각 천들이 알록달록 놓여 있다.
삶의 공간은 주인을 닮아간다고 했던가. 그녀 방에는 유별난 포즈도 없고 포장된 풍경도 없다. 그저 반짝이는 것들에 자주 마음을 빼앗기는 한 사람이 앉으면 종종 시간을 잊어버리는 곳이다. 하루는 거실 한쪽에 쪼그려 앉아 매일 바느질만 해대는 이소라 작가에게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던졌다고 한다.
“당신은 한 평짜리 인생이야.”
그러나 한 평짜리에서 시작된 그녀의 바느질은 10여 년 전부터 전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한·일 공예특별전, 프랑스 보졸레 섬유엑스포 등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 그녀의 작품이 걸려 있을 만큼 예술성도 인정받았다.
바느질 놀이가 좋았다
뭐든 만들어 남 주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의 매력은 퀼트를 배우면서 알았다. 누가 아이를 낳으면 손수 예쁜 이름 수놓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불도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렇게 시작한 바느질이 조각보로까지 이어질 줄은 그녀도 몰랐다.
“딸이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남편과 주말 부부가 됐어요. 남편도 없고 아이가 일찍 자면 할 일이 없어 너무 무료한 거예요. 그때 문득 ‘아이가 다 커서 내 손을 안 타고 직장도 관두고 나면 난 뭘 해야 하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에 들어가 산업공예를 배웠어요.”
그러나 대학원 공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심지어 실크스크린을 공부할 때 맡게 되는 물감 냄새조차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김현희 자수 명장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하는 단기 강좌 정보를 접하고 서울까지 올라가 수강을 했는데 그 뒤 조각보 바느질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조각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아요. 세 번 기초 강의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 공부하며 바느질 기법을 터득했어요. 더 배우고 싶었지만 수강료가 너무 비싸 엄두를 못 냈거든요. 비록 혼자 하는 공부였지만 좋아서 하는 거라 열정이 넘쳤죠. 청주에 천연염색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염색을 조각보에 응용하면 좋겠다 싶어 배워뒀지요. 나중에 여러모로 도움이 됐어요.”
조각보로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10만 원 어치 재료만 사면 몇 달 잘 놀 수 있어서” 바느질을 했다. 그런데도 좋은 결과들이 자꾸 이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점점 조각보의 세계로 그녀를 이끄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 옻칠을 적용해 모시의 단점 보완과 함께 개성 있는 조각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상도 했다.
2007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구입했을 때는 뉴스 보도가 쏟아졌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청주시가 2년마다 개최하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사전홍보행사 일환으로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박물관에서 ‘한·미보자기-동서의 만남’ 특별 전시회가 열렸는데, 저명한 대학교수들 작품과 함께 출품된 50여 점 중에서 그녀의 작품이 박물관 관계자 눈에 띈 것이다.
“죽기 전에 개인전 한 번 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당시 청주시 담당자가 특별 전시회에 참가할 작가 선정을 할 때 평소 조각보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들은 배제했대요. 저로서는 특별한 기회가 된 거죠. 그게 인연이 되어 해외 전시회에 계속 참여하게 됐어요.”
조각보와 함께 써나가는 이야기
우리의 조각보는 조선시대 때 서민들이 자투리 천도 버리기 아까워 만들어 쓴 물건이지만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될 만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이소라 작가는 요즘은 생활문화가 바뀌어 조각보를 실생활에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의 전통 규방공예를 세계에 알리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강조한다.
“해외 전시회에 나가보면 외국인들이 우리 조각보를 보며 많이 놀라워해요. 기하학적 무늬가 아름답다며 감탄도 하지만 홑보자기의 바느질 앞뒤가 없는 게 굉장히 신기한가봐요. 믿기 힘든지 정말 손으로 바느질한 게 맞냐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바느질 기법으로 보면 별것 아닌데 말이죠. 서양의 퀼트는 홈질이 많고 조각보는 감칠질이 많아요. 그 차이로 보면 돼요. 조각보를 바느질할 때는 바늘땀을 뒤로 숨기기도 하지만 실 색깔을 달리해서 아예 장식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법도 써요. 서양 사람들은 그런 바느질 기법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죠.”
20여 년간 바느질을 해온 그녀의 손끝은 오래전부터 굳은살이다. 간혹 바늘에 찔려 고통스러워도 골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골무를 끼면 섬세한 바느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의자 위에는 똬리방석도 놓여 있다. 작업량이 많아 하루 10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엉덩이가 짓물러 사용하고 있단다. 그래도 여전히 손바느질이 고달프거나 지루하지 않다니 그녀의 조각보는 아무래도 유희의 물건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녀 스스로도 ‘놀이’에 적극 비유하곤 한다.
“저는 자투리 천만 있으면 하루 종일 잘 놀아요. 제 주변엔 골프 치는 지인도 있고 이틀만 집에 있어도 못 견뎌하는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일 행복할 때가 일주일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을 때예요.(웃음) 뭔가 조몰락거리며 혼자 노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요.”
그러나 8000여 개의 조각 천을 이어 붙이고도 “어느 날 한번 세어보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놀이’라는 저 의미심장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놀이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이었을 결기의 시간들을 자꾸 헤아려보게 되는 것이다.
조각보가 그녀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생’이라는 답변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저는 조각보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 인생은 조각보를 떼어놓고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보석처럼 발견해낸 이 황홀한 놀이가, 우연이 빚어준 조각보와의 필연적인 동행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지 궁금하다. 놀이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작품세계도 확대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혼자 있는 시간을 제대로 마주하는 이유다.
자고 나면 줄줄이 올라오는 다른 동년기자들의 글이 쌓여 가도록 생각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이고 있었다. 동년기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글쓰기’에 대한 기본기를 다지고 싶었다. 무조건 해보자는 결단으로 글쓰기 강좌를 신청했다. 물론 기사를 쓰는 형식과는 다르겠지만, 기본 글쓰기가 능수능란해지면 기사에서도 ‘요것 봐라?’하는 재치를 가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2막 글쓰기’라는 강의 부제에 걸맞게 50대부터 80대까지의 학생이 모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총 8주 과정으로, 장르나 주제에 관계없이 글을 메일로 전송하면 선생님의 첨삭 출력물을 수업 전에 받아볼 수 있다. 30여 명 수강생 중에 보통 10명 정도의 작품은 선생님이 직접 읽고 학생들은 경청한다. 그러고 나서 토론을 하는데, 이때 나오는 이야깃거리가 아주 풍성하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자란 유년기를 풀어낸 글, 울음 끝에 웃음을 주는 글, 자신의 일터가 고스란히 담긴 글 등 각양각색이다. 그중에서도 수십 년 전 첫사랑 얘기는 단골 메뉴다. 조각보 같은 학생들의 재주에 감탄이 이어진다. 그 틈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맛에 다음 시간이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필 폭염기와 수강 기간이 겹쳐 힘들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대전에서 KTX를 타고 다닌다는 유치원 원장님은 술떡을 한 상자 해 오셨다. 그다음 주는 다른 수강생이 달걀을 삶아 왔고, 누군가는 찰떡을 가져오는 등 수업 내내 간식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학생들의 인정과 열정 덕에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는 가는 더위마저 퍽 아쉬웠다.
글쓰기를 배우려면 책으로 독학할 수도 있고, 강연을 찾아갈 수도 있다. 또, 이런 수업을 통해 자신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느낌을 나누며 전문가에게 조언을 얻는 방법도 있다. 내 글의 민낯을 보이는 과정이 어쩌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토론과 개별 첨삭은 우등생이 되기 위한 오답노트 같기도 하다. 달고 쓰게 공부한 노트가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글 좀 쓴다는 속 빈 격려라도 받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수업 내내 기록이 꼼꼼해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우선 펜을 잡아 보자는 생각으로 나선 글쓰기 수업이었다. 하루 한 시간 무조건 써보는 작은 습관이 중요함을 인정하게 됐다. 처음엔 잡지 기사를 잘 써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더 큰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바라고 원해서 한 일인 만큼, 글쓰기가 나에게 인색함 없는 행복을 한없이 안겨 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