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 남녀공학인 대학에서 몇 명 되지않는 여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느라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당시만 해도 동숭동 문리대 교정에는 여학생 전용 화장실도 제대로 없었다. 지금은 대학로라 불리는 학창시절 동숭동을 떠올리면 유명한 학림다방이며, 중국집 진아춘,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학교앞 개울이 마치 흑백영화가 지나가는 것처럼 생생하다.
친구 모임은 문리대에서 이과 계열은 제하고 문과만 모이는데 각과에 평균 두명 정도라 영문, 불문, 국문, 심리, 사학등을 모두 다 합쳐도 스무명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외국 간 친구를 빼고 지금 만나는 친구들은 열 명 정도이다. 거의가 캠퍼스 커플들이고 남편들이 능력이 있어서 그런지 출세도 하고 또 사업을 해서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이다.
친구들은 몇 십 년을 만나도 성실한 모범생의 모습들은 변하지 않는다. 자녀 교육에도 성공해서 모두 능력 있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60년대 당시 남학생들이 데모로 열을 올릴 때 여학생은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현재도 그 때 즐긴 독서는 내게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길러주었다.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에 대해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독서로 기른 상상력으로 짐작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친구의 아들은 현재 서울대 법학 대학원 교수로 있는데 사법시험 존폐에 관하여 사법시험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가 옛날부터 과거를 중심으로 사람을 등용해 왔지만 그때는 모든 제도나 교육이 발달 되어 있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발전 되어 있는데 옛날처럼 과거제도를 통하여 사람을 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법고시를 폐지하는 대신 로스쿨을 만들어서 법조인을 키우지만 로스쿨의 학비가 너무 비싸서 금수저들만 다닐 수 있다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금수저 아닌 집단에서는 아직도 사법고시 폐지를 반대하는 운동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폐지 될 때가 온 것 같다.
과거제도는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당시로선 선진적인 제도였지만 모든 사람을 상대로 동일한 시험을 치러 성적으로 선별한다는 아이디어는 근대 문명의 다양한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 필자는 여고 시절 법대로 진학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힘들어 보였는지 내가 크면 법관이 되어서 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법대를 지원하는 여학생이 거의 없었고 아버지께서도 우선은 영문과를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셔서 그대로 따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된다.
“거기 선배님들, 저 배고픈데 밥 좀 사주세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구대열과 이인재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학교 정문을 나와 미라보다리를 막 벗어나려던 차였다. “늦게 일어났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반찬이고 뭐고 치워버려서 밥도 못 먹고 나왔어요. 네?” 처음 만난 여자가 후배 행세를 한다. 난감한 두 남자. 그런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행동에 들어가는 여자.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팔짱을 꽉 끼고는 목적 달성(?)을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가자, 진아춘(進雅春)으로!
학림에서 만나자더니 진아춘으로 직행하다
혜화동(서울시 종로구)에서 낭만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인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이인재 동보항공 회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혜화동 일대는 1946년부터 1975년까지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의 본관과 문리대, 법대 등이 있었던 대학 캠퍼스였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서울대 혜화동 캠퍼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리대학이다. 우리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전설 속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출신들과의 데이트라서 그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첫 번째 만남 장소였던 학림다방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옛날 우리 식대로 하자”며 중화요리집인 진아춘으로 향한다. 진아춘에 들어서 앉자마자 시키는 것은 군만두와 배갈. 추억의 음식이라며 그때 느낌을 재연하는 것이란다.
구대열 옛날에 학생이 중국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좀 과한 거였어. 겨울에 차가운 도시락 들고 진아춘에 가서 100원인가 주면 뜨끈한 국물을 줬잖아. 거기에 밥 말아 먹고 했지.
성북동 근처에서 하숙을 했던 이인재 회장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구 교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학생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인재 그때 1인당 GDP가 100달러 안팎이었거든. 도시락 가지고 와서 데워 먹은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하숙집으로 밥 먹으러 다녔다고. 주문을 하면 딱 배갈이랑 군만두였지.
옛 진아춘은 지금보다 많이 작았다. 방과 방 사이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놓고 하나의 전구로 빛을 나눠 쓰며 전기를 아끼던 시절이었다. 개구진 친구 한 녀석은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구경을 해보겠다며 틈 사이로 고개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메뉴판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오로지 군만두 아니면 자장면을 시켜 먹던 시절 메뉴판에서 그나마 특별한 요리는 탕수육이었다.
이인재 우리 마누라하고 연애할 때 어쩌다 와서 하나 시키는 게 탕수육이었어요. 술은 한 10병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진아춘은 당시 서울대생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식당이다. 송형국 사장은 춥고 배고픈 학생들에게 매번 아량을 베푸는 것이 일이었다. 외상도 많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뭘 좀 먹겠다며 신분증이며 시계며 열심히 맡겼다. 1996년,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한 시계를 모아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서울대와의 인연 때문일까. 군만두를 먹고 지불한 돈은 서울대학병원 암센터로 기부된다.
그 시절 시위는 학점 없는 교양과목
당시 서울대학 문리대는 거의 모든 시위의 발원지였다. 64학번과 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한일협정 반대 시위였다.
구대열 우리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초년병에다가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어요.
이인재 그 당시의 ‘시위’는 교양과목 같은 것이었어요.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도 마찬가지고. 다들 거리로 나갔어요. 근데 학점은 없었죠. 출발할 때는 3, 4학년들이 맨 앞에 서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앞장서서 걷더라고요. 다들 어디 가고 없었어요(웃음). 경찰서로 끌려가 곤봉으로 얻어맞기도 했어요. 척추가 원래부터 안 좋았는데 그 후 시위를 위해 길거리 나가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서울법대 학장 출신이던 유기천 총장 퇴진운동도 문리대학에서 크게 있었다.
구대열 그때는 정치 문제로 시위를 한 게 아니고 그 ‘쌍권총 총장’이라고 유기천 총장 있잖아. 군 정부에서 올려놓은 사람 물러나라고 그땐 그랬지. 1, 2학년 때는 한일협정 반대했고 그다음엔 총장….
자유와 낭만의 이름으로 남다
사라진 지 꽤 오래된 그 이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세상 많은 학교의 학부와 학과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서울대학교의 문리대학만큼만은 아련한 향수 속에 회자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구대열 문리대학에는 각 과마다 학생이 10명에서 20명이었어요. 이곳이 좋았던 게 학과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듣고 싶은 과목은 다 들었어요. 내가 2학년인데 4학년 강의를 들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른 과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문리대학 자체가 전인교육장이었던 거죠.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란 자부심이 강했어요. 대신 학점이 형편없었어(웃음).
이인재 머리는 좋은데 가난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 문리대였어요. 먼 길을 돌아서 우리처럼 부산에서 광주에서 많이들 몰려들어 왔어요. 전국에서 별놈들이 다 왔는데 이과와 문과가 갈리지 않아서 그런지 문리대 학생들이 특별한 면이 있었어요.
구대열 학교 정문 미라보다리 앞에서 들어오는 친구들한테 100원만 달라고 해서 300원, 400원 모이면 밥 먹으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