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고려대학교를 출발한 자동차 한 대가 남산1호터널을 지나 한남대교, 올림픽대로, 여의도 63빌딩에 도착했다. 특별할 게 없어보였던 이 차는 운전자 도움없이 작동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핸들과 엑셀, 브레이크를 컴퓨터가 작동시켰다. 그리고 이 차는 1995년 8월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로 시험주행하는 데도 성공했다.
자율주행이라는 말이 매우 낯설던 1990년대에 한국 과학자가 세계 최초로 도심 자율주행에 성공해냈다. 그가 바로 한민홍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첨단차 대표다. 정년 퇴임 후에는 2000년 7월에 교내 벤처로 설립한 첨단차에서 자율주행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 만79세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독일 법원 ‘오토파일럿’ 용어는 허위 광고 판결
자동차 자율주행에 대해 30년 넘게 연구한 전문가로써 바라보는 자율주행의 미래는 어떨까? 한 대표는 “완전한 자율주행은 아직 멀다”고 단언했다.
그는 “최근 테슬라 자율주행 차량이 사고를 내며 2명이 사망했다”며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 금방이라도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할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현재 완전 자율주행은 허위”라고 설명했다.
최근 독일 뮌헨 법원은 ‘오토파일럿’ 명칭 사용이 허위 광고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동안 테슬라의 ‘오토파일럿’이나 ‘완전 자율주행’ 같은 용어가 운전자들을 기술을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며 비판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율주행은 언제쯤 가능할까? 한민홍 대표는 “외부환경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술이 나와야 한다”며 “당분간은 기술 발전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고속도로에서의 자율주행 기술 수준은 괜찮은 편이지만 시내주행에 한계가 있고, 완전한 자율주행으로 가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한민홍 대표는 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자율잠수정 연구를 진행했다. 사람을 타지 않은 잠수정이 혼자서 적진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연구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 연구를 진행할 수 없어, 국방부와 탱크에 응용할 수 있는 연구를 추진했다. 그리고 1991년 군용 지프차를 개조하며 본격적으로 자율주행차 연구를 추진했다.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해당 차량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율주행 2단계 수준이었으나 정부 프로젝트 탈락으로 상용화 실패
1992년에는 상용자동차로 차량을 바꿔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1992년 10월 고려대학교 캠퍼스 안에 500m 정도를 시험 구간으로 설정하고, 처음으로 자율주행 시험운행에 도전했다. 이 시험운행에는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지켜보며 응원했다. 이 시험운행으로 문제점을 보완한 한민홍 대표는 1993년 6월 도심 자율주행에 성공했다.
한민홍 대표는 “진정일 교수 등 여러 교수들이 많이 응원해줬다”며 “재정 후원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고려대에 고마운 마음이 많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언급했다.
한민홍 대표가 1990년대에 선보였던 자율주행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한 대표는 “현재 자동차에 탑재되는 자율주행 2단계와 비슷한 수준”이라며 “생명보험도 들지 않고 시험운행에 나설 정도로 당시 기술과 안전을 확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안전벨트 규정도 까다롭지 않던 시기여서 그는 시험운행 중에 안전벨트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잊혀진 기술이 됐을까? 한 대표는 “프랑스에서 관심을 보여 초기 기술을 제공했다”며 “폭스바겐에서는 업무협약(MOU)까지 제안했으나 국내 기술을 지키려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국내 기술경쟁력을 높이려고 외국 기업과의 협력을 거부한 그는 정부 지원을 받아 상용화 추진에 나섰다. 하지만 정부의 산업기술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탈락하면서 상용화의 꿈은 사라지고,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79세에도 재밌고, 기여할 수 있어서 좋다”
완전 자율주행에 한계가 있다면 자율주행 분야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한민홍 대표는 “농기계와 항만과 같이 교통법규를 받지 않는 분야가 있다”며 “여기는 사람이 타지 않거나 속도가 느려서 혹시라도 사고가 나더라도 상대적으로 매우 안전하다. 이런 분야에서는 자율주행 기술이 현재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배송 차량이나 로봇을 이용한 자율배송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최근 65세 이상 고령자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자율주행이 고령자 운전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한 대표는 운전대에서 손을 완전히 떼고 졸 정도로 자율주행을 과신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나이가 들면 순간 대응 능력이 떨어지고, 장시간 운전이 어려워지므로 이에 대해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보조받는 수준에서 활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팔순을 코 앞에 두고 있는데 활동에 어려움은 없을까? 한 대표는 “건강이 비실비실해 악으로 버티고 있다”며 “하지만 재미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기여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강조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침에 일어날 때 할 일을 떠 올릴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재밌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라는 설명이다.
한민홍 대표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에게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게 그냥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가족이나 사회에 계속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주들과 함께 읽고 싶은 과학서 by 진정일 교수
*진정일 교수는 특정 출판사와 저자(역자)를 추천하는 대신 무엇이든 아래 도서의 인물과 주제에 얽힌 책들을 읽길 바랐다. (이번만 넣어주세요)
찰스 다윈 평전 (김영사)
진화론은 창조되었는가, 만들어졌는가? 어떻게 다윈은 진화론의 경쟁에서 승리하였는가? 다윈이 쓴 수만 통의 편지와 일기, 수천 종의 논문과 연구서를 바탕으로 다윈과 진화론을 둘러싼 의문들의 진위를 밝힌다.
빛의 아버지 아인슈타인 (자음과모음)
상대성이론을 상시하며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의 삶을 소설처럼 쉽게 풀어쓴 평전이다. 성공적인 과학자의 삶 이면에 감춰진 고통과 아픔을 통해 인물의 성장을 보여준다.
이중나선 (궁리)
DNA 나선구조를 발견하며 노벨상의 영예를 안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공학의 발전과 DNA 연구과정을 보여준다. 논문 작업과정은 물론 여러 과학자들과 협력하고 갈등하는 모습까지 가감 없이 담았다.
주기율표 (교유서가)
국제주기율표의 해를 맞아 읽어봄 직한 과학서다. 멘델레예프를 비롯해 주기율표의 발전에 기여했던 과학자들을 소개하고, 그에 관한 핵심적 과학 이론들을 짚어본다.
2019년은 국제주기율표의 해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외워봤을 주기율표가 탄생한 지도 어느덧 150년. 최초의 주기율표에는 60여 개의 원소뿐이었지만, 수많은 과학자의 노력으로 오늘날 118개의 원소가 채워졌다. 그리고 올해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 50주년이 된 세계적인 화학자 진정일(陳政一·77)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 소년의 꿈으로 시작된 과학자의 길은 수많은 청소년의 꿈이 되어 우리나라 과학사의 면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이들이 과학자를 꿈꾸길 바라며 ‘진정일 교수의 교실 밖 화학 이야기’, ‘진정일 교수가 풀어놓는 과학 쌈지’ 등을 펴내온 진정일 교수. 줄곧 청소년을 위해 집필해온 그가 폭넓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오늘도 나는 과학을 꿈꾼다’를 출간했다. 이번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2년 전 ‘제자들이 바라본 나’를 주제로 글을 엮어 ‘과학자는 이렇게 태어난다’를 펴낸 적 있는데, 이번엔 ‘내가 바라본 나’에 관해 직접 썼습니다. 학창 시절의 추억은 물론 교수로서, 가장으로서의 삶을 담아 중장년이 공감할 내용도 많지요. 책을 낼 때마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고민하지만, 결국 내 의도보다는 ‘독자가 무엇을 읽고 얻느냐’가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누군가는 과학자로서 그의 철학에 감탄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학창 시절의 일화와 가족사랑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책에는 진정일이라는 한 사람의 삶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제목 또한 이중적인 뜻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과학을 꿈꾼다는 건, 우리나라에 노벨상까지 거론될 수 있는 훌륭한 과학자들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의 의미가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실제 내가 과학을 꿈꾼다는 거예요. 농담 같겠지만 뭔가를 깊이 생각하면 꼭 꿈에 나타나더라고요. 며칠 전에도 제자들에게 이런저런 화학 연구에 대해 가르치는 꿈을 꿨어요. 깨자마자 얼른 적어뒀다가 잊어버리기 전에 애들에게 일러줬죠. 제자들이 ‘우리 선생님 정말 못 말려’ 그러더라고요.(웃음)”
융합적 사고를 통한 과학윤리
40여 년 동안 고려대학교 화학과와 융합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쳐오며 그가 전수한 것은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었다. 진 교수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찾길’ 강조하며 그 일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도 탐구해보길 권했다. 그는 자칫 행복만을 추구하면 쾌락의 길로 빠지기 쉽다고 염려하면서, 특히 과학자는 ‘과학윤리’를 함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과학윤리라는 건 좁게 보면 논문 표절이나 아이디어 도용 등의 행위에 언급되는데, 넓게는 우리 사회와 인류의 문제까지 적용됩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그 부작용도 늘어나고 있지요. 가령 내가 연구해온 플라스틱 분야도 그것이 일상을 편리하게 했지만, 최근 환경오염의 원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정말 우려스러워요. 그러니 재활용 기술 등을 더불어 연구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특수상대성이론 공식(E=mc²)도 훗날 원자폭탄 문제에 영향을 주리라곤 예측 못했겠지요. 이렇듯 과학자는 설령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까지 고민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진 교수는 과학윤리 의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융합적 사고’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쉬운 예로 비빔밥을 ‘혼합’, 잘 익은 김치를 ‘융합’에 비유했다. 숙성된 김치는 여러 재료가 한데 어울려 ‘발효’라는 과정을 통해 맛을 내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각적 시선으로 한 가지 현상을 폭넓게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학문이 세분화하고 있어요. 같은 과 후배들하고도 대화가 안 통해요. 화학 안에서도 서로 분야가 다르니까요. 인류의 문제는 날로 복잡해지는데 각자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어요. 요즘 초연결시대라고 하지만, 인터넷만 된다고 소통이 잘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 예로 근래 러시아에서 운석이 떨어져 큰 인명피해가 난 적이 있어요. 당시 운석이 떨어진다, 폭발이 엄청날 거다, 사람들이 다칠 거다 등 다양한 위험 상황을 예측했음에도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사람은 없어 재난을 겪고 말았지요. 이렇듯 전체를 바라보는 태도, 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학적으로도 융합하는 사고를 지녀야 초연결시대에 참다운 소통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중장년이 과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아마 대부분 중장년은 그의 이야기를 젊은 세대를 향한 조언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진 교수는 노년의 지혜와 현대 과학 지식의 융합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 강조했다.
“중장년은 우리 사회와 가정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 사회와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과거 지식이나 인습에만 머문다면 과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노인은 지혜롭지만,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신지식이 뒤떨어지면 결국 세대 간 소통은 물론 복합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지식 습득을 위해 젊은 시절보다 독서량이 늘었다는 진 교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섭렵하면서도 빼놓지 않고 읽는 것이 있으니, 바로 대학교 1학년 ‘일반화학’ 교재다. 해를 거듭하며 개정되는 ‘일반화학’을 통해 학문의 기본을 되새기는 동시에 교육의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가끔 괴리감을 갖는다고 했다. 교재의 수준은 꽤 높아졌지만, 다루는 지식이나 학생들의 수준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 진 교수는 ‘창의성 결핍’이 문제라 지적했다.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우리 교육의 화두입니다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저 역시 고민이 많습니다. 그동안 제가 느끼고 공부한 바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꼭 새로운 것의 창조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혀 무관한 사물들 사이에서 남이 보지 못했던 연결성을 찾음으로써 창의력이 발현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것들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거죠. 그런 연결성이 창의적 사고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는 실제 ‘진정일 교수, 時에게 과학을 묻다’, ‘진정일 교수, 소설에게 과학을 묻다’ 등을 통해 과학과 문학을 연결 짓는 창의적 시도를 해왔다. 요즘도 과학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는 일이 즐겁다는 진 교수다. 과학이라는 말만 나오면 쌈지 풀어 헤치듯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에서 ‘천생 과학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건 ‘DNA의 자기(磁氣)적 성질’이에요. 이 역시 서로 다른 두 요소의 융합이라 볼 수 있지요. 요즘엔 이게 자꾸 꿈에 나타나고 그러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