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오묘하다. 차의 맛과 향을 살리는 것은 찻잎과 물, 그릇, 그리고 사람이다. 최고의 맛을 찾아가는 여정이 즐거워 차를 마시게 된다. 특히 차는 담아내는 찻그릇이 있어야 하고, 찻그릇 또한 차가 담겨야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게 된다. 찻그릇의 고마움을 아는 차인과 차의 맛을 보다 깊게 담아내고자 하는 도예가가 넉넉한 마음으로 만나 차를 나누게 됐다. 차를 마시는 도예가들 모임 ‘다유(茶裕)’다.
‘다유’는 경기도 여주시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모임이다. 찻그릇을 빚는 이들의 모임은 선향다례원 구자완 원장의 권유로 시작해 10년 넘게 차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유만 이청욱, 유담 문찬석, 유장 최민록, 아얼 이성현 작가가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최민록 작가의 도자기 작업장 겸 전시장인 민토. 흙이 켜켜이 쌓인 작업장을 통과해 밖으로 난 철 계단을 올라가니 다양한 찻그릇이 진열돼 있는 전시장이 모습을 보였다. 차인답게 전시장 안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문찬석 구자완 원장님을 만나 뵙기 4~5년 전부터 여주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모임’ 도예가 20명 정도가 이미 모여서 차를 마셨습니다. 도자기 관련 연구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죠. 구 원장님은 2005년 여주도자기축제 행사장에서 만났습니다. 그 인연이 모임 다유로 이어진 것이죠. 2007년 9월부터 정식으로 차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자완 원장은 차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찻그릇이 필요했고 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 찻그릇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다유 회원들은 구 원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차를 기본으로 중국 차, 일본 차 등 각 나라 차의 역사를 배워나갔다. 행다(行茶) 실습도 꾸준히 했다. 제다(製茶)하는 곳에도 찾아갔다. 녹차잎을 하나하나 직접 따고 무쇠솥에 덖어 1년 치 녹차도 만들고, 발효차인 황차를 만드는 과정도 체험했다. 여주 출신인 구 원장은 고향 도예 작가들에게 본인이 쌓아온 차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나누어주면 한층 더 높은 예술 세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주 서울과 여주를 오가며 차 공부를 이어갔다.
구자완 원장 다유를 통해 여주의 도자기를 알리고 싶어서 제안했습니다. 도예가들이 차를 알아야 찻그릇을 더 잘 만들 테니까요. 그리고 다유 회원들과 서울에서 만나 함께 전시회에 가서 감상도 하고요. 10여 년 함께 공부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차원이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다유의 도예가들은 구 원장에게서 다호(茶號)를 받았다. 차를 3년쯤 공부하면 선생으로부터 받게 된다고. 이들이 다호를 받던 해, 구 원장 산하 차회의 돌림자가 넉넉할 유(裕)자였기 때문에 유장(裕匠), 유만(裕滿), 유담(裕潭) 등의 호가 내려졌다. 차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이청욱 배우고 익혔으니 이제 차인이 된 것이죠. 저희는 차를 마시는 도예가입니다. 다유의 근원은 차를 통해 도자기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알아가자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술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잖아요. 정식으로 배우면서 그 깊이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차 맛을 알기 전에는 찻그릇에 대한 차인들의 평가에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갈피를 잡기 위해 애쓰기를 반복했다. 차생활을 하면서 찻그릇을 빚고 대하는 마음이 많이 변했다.
최민록 차를 배우기 전에는 찻그릇을 주문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좌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도예가도 결국은 도자기를 만드는 제조자잖아요. 이용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차를 배우게 된 이유는 찻그릇을 보러 오시는 분마다 선생이시더라고요. 지역마다, 사람마다 의견이 참 많이 달랐습니다. 차를 모르던 제 입장에서 기준을 정하는 게 어려우니 수긍하며 작업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나 그릇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차 도구에도 유행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크고 투박한 문경 쪽 다기가 유행했다면 요즘은 중국 차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다기도 작아지고 잔도 좀 더 얇아졌어요. 그런 변화들을 가늠하는 것도 쉽고요. 차 공부 이후 다양한 찻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유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장작가마 문화제’다. 원래는 다유 회원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다유 브랜드 데이’ 행사로 5년여 이어오다 좀 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자기 굽는 모습을 재연해보자는 의미로 확장했다. 여주 신륵사의 전통가마에서 구워낸 찻그릇을 꺼내고 감상하고 저렴하게 판매도 한다. 특히 이때 헌다례(獻茶禮,제례의 한 순서라는 의미 외에도 종교적 대상에게 예배의 한 행위로서 차를 올리는 것) 시연을 다유 회원들이 직접 한다는 점. 차 공부를 하는 인구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차인이 시연하는 모습은 ‘장작가마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해 행사는 아프리카 돼지열병 파장으로 전면 취소됐다고.
이청욱 다유 회원의 기본은 차를 배운 사람으로서 차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희만큼 시간도 낼 수 있어야 해요. 차도 마셔야 하고 행다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또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다례 행사가 있으면 동작도 맞춰봐야 합니다. 이런 작업들 외에도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습니다. 가끔 저희가 행사에서 행다 혹은 헌다례 시연을 할 때도 있거든요. 차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성현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더 계시지만 전문적으로 차 도구를 빚는 분이 드뭅니다. 회원 기본 조건에 안 맞는 분들의 가입을 허락해드리지 못할 때는 저희도 많이 아쉽습니다. 다유 회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차생활도 해야 합니다. 다유는 이런 기본적인 요건들이 충족 안 될 때는 신입회원으로 가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주가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기는 하나 찻그릇을 만드는 작가들보다 생활자기를 만드는 이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활발해지는데 여주는 문경이나 이천 같은 곳에 비해 차 마시는 인구가 적고, 전문 차인 단체가 미미한 수준이라고 다유 회원은 입을 모았다.
최민록 여주에는 차 마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차 모임이 아주 드물죠. 그래도 차과 관련해서 명성왕후 탄신제와 여주문화원에서 차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주에서 차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다유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변이 확대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행위를 해도 홍보도 안 되고 즐기는 사람이 없으면 이 일이 재미없어질 수도 있겠죠.
찻그릇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수년간 차를 배운 사람들의 모임인 다유 작가들과의 만남. 한참을 앉아 차를 마시는 도예가가 엄선한 차를 나눠 마셨다. 차를 이해하는 작가가 우리의 흙으로 빚고 장작 가마에서 구운 찻그릇이 상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찻그릇에 우려먹는 차 맛이란? 말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감동 그 자체다.
현미와 섞인 녹차 티백이 ‘녹차’로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동네 빵집에 가도 로즈메리부터 재스민, 루이보스 등 다양한 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야흐로 기호식품의 시대, 다반사(茶飯事)의 전성기다. 그러나 이 많은 차 중에 우리 차의 향과 맛을 지닌 게 얼마나 될까. 30여 년 전 지리산에 들어가 산야초를 공부하며 우리 차의 고유한 향취를 개발하고 전파하는 데 매진한 전문희(57) 씨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것이다. 지리산 산청에서 만난 차의 달인에게 우리 차와 차 문화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 차 문화의 새로운 전기가 열리는 분위기다. 지자체마다 차와 관련한 행사를 경쟁적으로 열고 있고 사람들도 좋은 차를 찾아 여기저기 물색하고 다닌다. 시니어 세대의 문화가 점점 고급화, 다양화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차를 마신다는 의미
그런데 다도(茶道)라 하면 사람들은 일본을, 그리고 차의 원산지라 하면 중국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차 대신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신다. 이런 와중에 우리 차의 미학을 찾아 보급하는 데 삶을 바친 사람이 있다. 바로 산야초 전문가 전문희 씨. 그녀가 우리 차의 우수성과 차 문화를 제대로 전파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지 벌써 30여 년이 된다. 요즘도 그녀는 전국 각지에서 알음알음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 산야초 차의 깊은 맛과 멋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산야초 차란 어떤 차일까? 그녀는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바로 ‘산야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바꿔 부르게 된 이유를 “약초는 아픈 사람이나 먹는 약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다도’라는 말보다는 ‘다담’(茶談)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이 차는 어디에 좋은가요?”
전문희 씨가 ‘건강을 위한 산야초 연구회’를 이끌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녀에게 이러한 질문은, 몸에 좋은 것은 일단 먹고 보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에서 나온 조급증으로 다가온다. 약도 아닌 차 한 잔 마신다고 당장 몸에 어떤 효험이 나타난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무조건 몸에 좋다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싶어 나름 답변을 준비해놨다.
“인간의 몸은 콩나물시루와 같습니다. 위에서 아무리 물을 부어도 밑으로 다 빠져나가고 남는 게 없죠. 그러나 보십시오. 콩나물은 자라 올라오지 않습니까? 차도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차를 마시면 당장은 다 오줌으로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 오줌과 함께 우리 몸에 있는 노폐물도 배출이 돼요. 그리고 피는 그만큼 깨끗해집니다. 피가 깨끗해지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도 가뿐하죠. 이것을 생활화해야만 우리 몸은 병균이 서식할 수 없는 건강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좋은 차를 마신다는 것
전 씨는 식물마다 약성과 성질이 다르므로 자기 체질을 확실히 알고 그에 맞는 차를 마시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깊이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니 처음 접하는 이는 일단 동글동글하게 가는 것이 맞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혈액순환이 잘되면 피부가 좋아지고 얼굴이 맑아져서 노화가 덜 와요. 그러면서 마음이 맑아지고 표정이 예뻐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거죠. 차를 마신다는 건 내 마음을 맑게 하는 것과 같아요.”
그녀의 모습은 이미 차의 능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차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이끈다”는 그녀의 말이 와 닿았다.
그런데 다도의 정신처럼 느껴지는 이 설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도라 할 때 떠올리는 격식과 절차와는 거리가 있었다. 아니, 되레 그런 것들에 대한 반박에 가까웠다.
“누구나 다반사로 숭늉 마시듯 하라”
“좋은 차를 마시면 스스로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돌볼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니 차를 마시면 소통이 없을 수 없겠지요. 차 맛은 그 차가 내게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어떻게 만든 것인지, 누구와 함께하는지, 마실 때의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전 씨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도라고 할 때 치르는 복잡한 과정들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소위 차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소모하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차가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에 담긴 역설과 일맥상통한다.
원래 다반사라는 단어는 한자 뜻대로 ‘차 마시듯이 늘 있는 예삿일’을 말한다. 과거에는 그런 말이 만들어질 정도로 차 마시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나마 남은 차 문화는 중국 차와 커피가 잠식한 우리네 차 문화의 현실이 안타깝단다. 그래서 그녀는 번잡함과 불필요한 의식을 치우고 어떤 수단으로든 좋은 차를 가까이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너무 바빠서 차 생활에 몰두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텀블러도 좋고 담을 용기라도 좋아요. 차를 우려서 들고 다니는 습관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차인이 아닙니다. 차 생활의 일상화가 중요해요. 하루에 물을 2ℓ씩 마셔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수분 보충을 차로 한다고 생각하면 삶이 바뀔 거예요. 찻물의 빛깔을 바라보고 차 향을 맡으며 차 맛을 혀끝에서 음미할 때 우리는 하루의 피로에서 놓여나고 마음의 평안함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릇을 따지고 격식을 차리는 것을 거부하는 그녀는 육체의 피로와 함께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피로해소제보다 차 마시기를 권한다.
“다도는 예의와 격식을 상당히 중시하지요. 하지만 차를 그렇게 어렵게 마실 필요는 없어요. 편안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다담 문화’가 더 보편적이고 서민적이지요. 너무 격식 따지지 말고 깊은 산에서 나는 깨끗한 산야초를 차로 달여서 그냥 물 마시듯 자주 마시면 건강에 좋아요.”
자연에서 채취한 차가 좋은 차
차를 생활화하는 것은 멋도 중요하지만 멋은 나중 일이라는 그녀의 차 문화관은 실학적이기까지 했다. 그것은 내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게 우선이라는 간절함에서 비롯된 설명이었다. 사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그녀만의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녀가 지리산에서 살게 된 것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젊은 시절 통기타 가수, 모델, 인테리어 사업가로 활동하던 중 어머니가 암 말기 선고를 받자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리고 직접 채취한 각종 산야초로 자연치료법과 한방요법을 병행해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어머니를 3년 넘게 병구완했다. “차를 마시면 자연에 대한 감사함이 저절로 든다”는 그녀의 철학은 철저히 체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이었다.
“차를 마신다는 건 약성과 각종 비타민, 미네랄, 항산화 물질을 섭취하는 겁니다. 그러니 차에서 제초제나 농약 잔류물이 나오면 안 되는 게 당연하죠.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어야 좋은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 좋은 차를 잘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싼 차라면 무조건 좋은 차라고 생각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인스턴트 차만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산야초 문화의 최전선에서 수십 년째 활동하고 있는 그녀가 안타까워하는 현실이다.
“제가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지리산에 머물러 산야초 대중화에 투신한 참뜻에는 ‘중국 차와 커피를 덜 마시자’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갖자는 거죠. 너무 커피만 마셔대는 문화는 우려스러워요. 그러나 하루에 커피는 한두 잔 마시되, 나머지 수분 보충은 우리 차로 하자. 그렇게 질 좋은 수분 섭취를 하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차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전 씨가 우리 차에 대한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차는 병을 고치는 도구이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주체는 오롯이 자기 자신이다.
“평소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차를 마셔 당장 몸이 좋아져 무슨 병이 낫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죠. 생활은 건강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이어가면서 차만으로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지나친 욕심이고요. 차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녀가 일궈낸 ‘백초차’가 있다. 백초차는 말 그대로 100가지 산야초로 만든 차다. 오염이 없는 청정하고 깊은 산중에서 채취한 새순만을 녹차 같은 방법으로 덖어서 만든다. 100가지 식물의 약성이 섞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성분이 상승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혹시 그중 어느 식물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독성을 중화하는 작용도 한다고 한다.
100여 가지 새순으로 만는 ‘백초차’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선생은 “그녀가 정성들여 만든 백초차를 우려 마시면서 이것은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을 통째로 내 몸에 모시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백초차의 주요 원료는 가시오갈피나무, 산복숭아나무, 소나무, 산뽕나무, 두충나무, 고로쇠나무 등의 어린 잎사귀와 다래, 으름덩굴, 칡, 찔레, 인동초, 복분자, 하수오, 두릅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무들의 새순이다. 이름을 모르는 나무라도 뾰족이 올라온 새순은 무엇이든 다 채취한다. 산속에서 자라는 야생 차나무의 새순도 백초차에 빠져서는 안 될 재료다. 물론 안전은 필수다. 그녀는 이 새순들을 채취하면서 직접 씹어서 맛을 보며 독성 여부도 체크한다.
“혀끝에 아릿한 맛이 느껴지면 약성이 강한 식물이죠. 나중에 차를 마시다 채취하면서 씹었던 맛이 그대로 차에 살아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나무에 깃들어 있던 모든 기운이 차 한 잔에 담긴 듯하거든요.”
3~5월에 채취한 100여 가지의 새순은 덖어서 모아두었다가 6월이 되면 전부 섞어 백초차를 만든다. 봄이 오기도 전에 산과 들로 뛰어다녔던 시간들이 모두 녹아 있는 차가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다. 마셔본 사람들은 저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진다며 효험을 검증해줬다. 특히 오랫동안 차를 마셔온 스님들은 백초차에 자연의 기가 충만하다며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바로 알아차린다고 한다.
차를 매개로 한 자연과의 교감
“누구나 나이가 들면 건강 문제가 절실해집니다. 생활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건강을 잃고 각종 병에 시달리게 되죠. 건강을 잃고서야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좇아 다닙니다. 그런데 좋은 차를 마시면 자신의 몸이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제대로 돌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그녀는 차를 접하기로 마음먹으면, 산과 들에 와서 직접 채집하고 욕심 부리지 말고 만들어보고 교감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차 문화의 발전이란 단순히 차에만 고착되는 게 아니라 차를 매개로 한 생활의 변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교육에서도 그와 같은 과정이 꼭 들어간다고 한다. 직접 채집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향을 느끼며 집에 와서는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행복해질 수 있는, 그 잊기 힘든 시간이야말로 차가 삶과 연결됨으로써 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잘 덖은 차는 우려냈을 때 산야초 본래의 색깔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처음 마셨을 때는 약간 씁쓸한 맛이 나지만, 오래 음미하고 있으면 달큰한 것 같기도 하고 시큼한 것 같기도 한 독특한 맛이 느껴지죠.”
그녀는 차를 덖을 때 구증구포(九蒸九曝)를 고집한다.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비는 전통 제다법이다. 산야초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고 건조시킨 뒤엔 살청(殺靑)을 한다. 뜨겁게 달군 가마솥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쉼 없이 휘젓고 뒤집기를 반복한다. 엽록소의 산화효소를 파괴해 차의 변질을 막고, 맛과 색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다.
“처음 딸 때의 찻잎 향과 아홉 번 덖은 손의 차향이 같아야 제대로 된 차입니다.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몇 번을 우려내도 첫맛을 잃지 않습니다.”
차 문화는 생활 밀착이 중요
그녀는 “옷차림, 도구, 공간 등 고급스러움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연에서 채취한 질 좋은 차를 감사하면서 먹는 것이며 각자의 생활환경에 맞춰 차를 일상적으로 마셔야 한다”고 말한다. 차가 생활과 밀착해 음용돼야 한국의 차 문화가 될 수 있음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올곧은 소리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한국의 차 문화가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자연스러움을 갖출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팽주(차를 다려 내는 사람)인 그녀로부터 건네진 차에서 우러나는 향을 맡으며 그런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다인(茶人)을 만나고서야 차는 예이고 덕이고, 도이며 소통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주는 백초차를 마시니 자연에게 무한한 감사함이 절로 들게 하는 웅숭깊은 가르침이 향기로 퍼졌다.
4월의 찬란한 신록을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간다. 악양행 버스를 타고, 화개천 옆을 지난다. 간밤에 흩날렸을 벚꽃 잎을 상상하며 아름드리 벚나무 가로수 길을 달린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 은빛 섬진강과 푸른 보리밭이 봄볕에 반짝거린다. 섬진강가 산비탈에는 야생차밭이 연둣빛 생기를 뽐낸다.
걷기 코스
화개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 타고 악양면으로 이동▶매암제다원(매암차박물관)▶하덕마을 담장 갤러리▶드라마 ‘토지’ 촬영지▶박경리문학관▶최참판댁▶시내버스 타고 화개장터 또는 화개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산자락 아래 볕 좋은 동네 악양
화개시외버스터미널에 악양행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린 행복버스 안내 도우미가 연로한 승객들을 부축해 승하차를 돕는다. 기사도 승객이 승하차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안내 도우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악양(개치)정류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매암제다원이 있다. 매암제다원은 3대에 걸쳐 40년 동안 친환경 자연농법으로 차밭을 가꾸고, 악양에 전해오는 전통 제다법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다. 다원 안으로 들어서 매암차박물관 옆을 지나자, 초록빛 야생차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원에 따사로운 봄볕이 가득하다. 높을 岳(악), 볕 陽(양) 자를 쓰는 악양다운 풍광이다.
마침 매암차박물관의 장효은 학예실장과 이윤경 기획실장이 야외에서 차담을 나누고 있다. 매암제다원에서 파는 차가 녹차가 아닌 홍차인 이유를 묻자 장 실장이 “많은 사람이 녹차나무와 홍차나무가 다른 나무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나무예요. 찻잎을 발효하면 홍차 잎이 돼요. 악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홍차로 만들어 먹었어요. 서양 홍차는 우리나라 찻잎보다 크고, 맛과 향이 진하죠”라고 대답한다. 이 실장도 거든다. “이곳 할머니들은 찻잎을 잭살이라 불러요. 4월에 처음 딴 찻잎을 참새 雀(작), 혀 舌(설) 자를 써서 작설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서 유래한 것 같아요. 식구들이 감기나 배앓이를 하면 잭살을 한 움큼 넣고 푹푹 우려 약차로 만들어 먹였대요.”
13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차가 처음 전래된 곳이 하동이다. 임금에게 차를 진상했던 곳도 하동이다. 악양과 화개 산비탈에 자리 잡은 대규모 야생차밭은 한없이 경이롭다. 하동 사람들의 차 사랑과 자부심이 대단할 만하다.
은은한 차 한 잔의 위로
2만여 평의 차밭이 굽어 보이는 매암제다원 마당에 매암다방이 있다. 나무꾼이 살 것 같은 아담한 오두막이다. 실내에 차밭이 보이는 벽마다 큰 창을 내어 자연을 담은 액자처럼 꾸몄다. 실내에 있기에는 아까운 계절. 찻그릇을 담은 차 쟁반을 들고 나가 차밭이 잘 보이는 감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간지러운 봄볕을 즐기며 찻잎을 우린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고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발효된 홍차는 녹차보다 맛이 순하고 구수하다. 찻잔이 작으므로 마주앉은 이의 잔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서로 잔을 채워주며 따스한 차담을 나누라고 찻잔이 작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찻잔 위로 스치는 봄바람에 참새 혓바닥 같은 찻잎들이 쫑긋거린다. 연둣빛 여린 찻잎에서 천 년을 이어온 생명력을 느낀다. 다원 입구에 있는 매암차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수목원 관사로 사용했던 적산가옥이다. 흰 목조 건물과 푸른 차밭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차와 관련한 다양한 유물 130여 점을 전시한다. 차 문화사 강좌, 차 만들기 체험, 차 따기 체험, 하동 차문화 기행 등 문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암제다원(매암차문화박물관) 여름철 10:00~19:00, 겨울철 10:00~18:00, 월요일 휴무, 관람 무료, 매암다방(셀프) 찻값 3000원.
사계절 차꽃 피는 하덕마을
매암제다원을 나와, 시골길을 타박타박 20분쯤 걸어 하덕마을에 도착한다. 27명의 작가가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사진, 조형물을 만들어 골목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벽화뿐만 아니라 나무, 철, 도자기를 활용한 다양한 작품이 담장에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 ‘팥이야기’ 카페에서 출발해, 발소리를 죽이고 고요한 돌담길을 스며들듯 거닌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차꽃이 흩날리는 그림 ‘차꽃’과 매화가 핀 찻잔과 보름달을 그린 ‘달 아래에서’, 장식장에 찻잔이 가득한 ‘찻잔’ 벽화가 눈길을 끈다. 기와지붕 처마에 거꾸로 매달린 차꽃 조형물은 이름도 어여쁜 ‘꽃비내림’이다. 담장 위에는 농악대를 형상화한 철 조형물이 곡예를 한다. 가만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는 ‘푸근함’이다. 시골 정취가 가득한 하덕마을과 정감 있는 예술작품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낸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골목길을 만나 가슴이 설렌다. 마을 중앙에 있는 ‘차꽃오미’ 한옥 민박집에도 잠시 들른다. 위엄 있는 솟을대문과 잔디가 깔린 앞마당과 100년 된 고택의 조화가 멋스럽다. 하동군 악양면 악양서로 227.
최참판댁에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보며
하덕마을을 뒤로하고, 박경리 소설 ‘토지’를 드라마화한 토지 촬영장으로 향한다. 찻길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구재봉 자락에 40만여 평에 달하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 펼쳐진다. 들판 한가운데에 깃대처럼 서 있는 부부송(夫婦松)이 옛 친구 만난 듯 반갑다. 하덕마을에서 약 15분 걸으면 오른쪽에 ‘토지’ 촬영장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나온다. 이곳이 평사리 상평마을 입구다. 여기서 ‘토지’ 촬영장까지 10분 정도 다시 오르막길을 오른다. ‘토지’ 촬영장에 용이네, 판술네, 두만네, 월선네, 김훈장댁, 송관수네가 살았던 초가와 읍내 장터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에는 황소와 토끼가 살고, 곳간에는 장작이 그득하다. 사립문 옆에는 샛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 텃밭에는 상추가 싱싱하게 자란다. 실제 사람이 사는 마을처럼 관리한다. 일부 한옥은 민박집으로도 사용한다.
촬영장 바로 위에 2016년에 개관한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박경리의 유품과 작품, 각 출판사가 발행한 소설 ‘토지’ 전질, 초상화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최참판댁 솟을대문에 이른다. 서희가 자란 별채와 최치수가 머물렀던 사랑채가 그 모습 그대로다. 최치수인 양 사랑채 마루에 올라서서 평사리 들판을 굽어본다. 아득한 섬진강에 봄 아지랑이가 아롱거린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09:00~18:00, 연중무휴.
주변 명소 & 맛집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
화개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화개장터다. 화개장터는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과 광양시의 경계 지점에 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 지방의 토산물들을 사고팔았던 곳이다. 원래 위치는 화개천의 화개교 아래였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상설시장이 됐다. 시골 오일장의 구수한 정취는 사라졌어도 파는 물건과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동 향토음식 전문점 ‘은성식당’
섬진강가에 자리한 은성식당은 하동 특산물인 재첩, 은어, 참게를 이용한 요리를 판다. 재첩국, 은어튀김, 참게탕이 인기가 많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을 넣고 맑게 끓인 재첩국은 하동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송송 썰어넣은 부추가 향긋함을 더한다. 집게다리에 털이 북슬북슬한 참게에 된장과 고추장을 풀어 푹 끓인 참게탕은 구수한 맛이 별미다. 밑반찬도 모두 맛깔나다. 창밖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차밭 풍광은 덤이다.
팥 전문 카페 ‘팥이야기’
하덕마을 입구에 있다. 도시에서나 볼 법한 이층 양옥이어서 눈에 금세 띈다.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을 활용한 감각이 돋보인다. 대표 메뉴는 단팥죽과 팥빙수다. 작은 놋그릇에 담겨 나온다. 단팥죽의 당도가 적당하고, 팥의 풍미가 한껏 느껴진다. 식사 대용으로는 양이 부족하지만, 커피 한 잔 값에 맛있는 단팥죽을 맛볼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 팥이야기에서 1분 정도 걸어가면 토속적인 분위기의 ‘타박네’ 카페(055-883-251)가 나온다. 팥소가 듬뿍 든 우리 밀 찐빵을 판다.
여행 정보 걷기 Tip
-위에 소개한 코스는 수도권 기준, 당일 여행이 가능하다. 대중교통으로도 가능.
-하동을 구석구석 여행하고 싶다면 주민공정여행 프로그램인 ‘놀루와’를 이용하면 된다. 하동 토박이가 여행 상담, 개별 맞춤 여행을 추천·진행한다.
언젠가 KBS1 TV에서 ‘noodle road’라는 다큐메터리를 제작 방영한적이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공통으로 먹는 음식으로 조리법과 굵기의 차이가 다소 있지만 noodle의 모양은 한결같이 몸에 비해서 그 길이가 길게 만들어 진다는게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칼국수를 비롯하여 파스타, 소바, 면 등등의 많은 이름이 있지만 우리식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다 국수의 모양이고 세계 공통으로 noodle 이라고 부른다.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서 하나의 음식을 각자 다른 이름으로 즐기는 현상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말지만 왜? 어떻게? 의 시선을 가지고 보면 꽤 흥미롭다.
취재기자가 마치 실크로드를 찾아가듯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한 noodle의 근원을 파헤치고 찾아갔을 때 그 진원지가 아시아 하고도 음식의 대국 ‘차이나’에 도달했다는게 재미있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징키스칸의 유럽정복과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역사가 인간의 복잡한 속성으로 존재하는한 음식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리는 모든 문화를 너와 나만의 것으로만 분명히 구분할수 없다는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원칙일수도 있겠다.
음식을 담는 그릇을 어떠할까?
세계의 3대 도자기는 헝가리의 헤렌드,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그리도 독일의 ‘마이센’ 이렇게 불리워지고 있다. 그중 마이센도자기는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강남구 논현동에 대표 전시매장이 있다.
마이센 (MEISSEN)은 1709년에 독일 '작센'주에 위치한 한 성(castle)의 명칭이었다. 이 성의 요업장에서 유럽최초의 백자를 구워내는데 성공하게 되면서 마이센은 시작된 이름이다. 도자기와 차, 비단 등 멀리 아시아의 나라 중국, 일본등지로부터 건너오던 물건이 18세기 해양 무역의 발달로 대량수입이 시작되고 사치품에 목말라하는 유럽 귀족들이 아시아의 물건에 물쓰듯 돈을 쓰는것을 보면서 작센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백자를 구워낼 생각에 몰두하게 된다. 귀족들은 백자를 하얀금이라고 부를만큼 백색과 투명함에 매료된다. 처음에 이곳에서는 유럽의 토질상 백자에 비해 품위와 강도가 떨어지는 적갈색 도자기를 구워낼 수밖에 없었으나 아우구스트 2세의 집념으로 1710년에 유럽최초로 백자도자기를 굽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백자를 굽는 열쇄인 고령토의 비율과 흙을 굽는 가마의 고온 기술을 마침내 당시의 연금술사 뵈거트로 하여금 백자를 구워내는데 성공, 개발시키기에 이른다. 이 성공으로 인하여 당시 '작센'주의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궁정공방으로 이 설립이 되고 17,8세기 로코코시대 특유의 디자인이 개발되면서 합스부르그를 비롯한 유럽전역에 보급이 되기에 이른다. 사전에도 마이센 자기는 유럽 도자기의 역사라고 기록되고 있다.
마이센도자기 백자는 이런경로를 거쳐 중국 청나라 '오채자기'에 유전인자를 두고 모방에서 시작하여 그 탄생이 출발 되었다. 오채자기는 명, 청시대에 유행했던 백색바탕으로 구운 자기에다 나중에 다섯색 채색으로 무늬를 넣어 장식, 완성하는 자기를 말한다.
위의 사진중 좌측 마이센 도자기는 현재 영국 로얄 알버트 홀 소장으로 18세기초에 제작이 되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자기의 하단부에는 일본도자기 문양이 흉내내어 그려져 있다. 당시 유행했던 일본도자기 문양의 '짝퉁‘ 이 아니었을까..?를 짐작케 한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짝퉁‘이라는 우아하지 못한 표현은 기자의 표현이다.
서양사람들의 그릇 '커피잔'이라고하는 그릇은 동서양 문화의 교류로 지금의 모양이 되었고 잔의 손잡이는 뜨거운 차를 마시는 중국의 찻잔에서 모방되었고 'saucer'라고 하는 잔받침은 일본의 차문화와 도기에서 흉내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자기의 영어 표기가 China Ware인 것이 그냥 붙여진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좌측 사진속 자기 하단부의 문양보다 상단부의 그림을 보는 순간부터 나올때까지 내내 여운이 남아 혼자 생각하다가 마침내 우리나라 조선시대 유행했던 민속화 ‘초충도’를 기억해내고 나는 가슴이 뛰었었다.가슴이 뛴 이유는 는 ‘초충도’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민속화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충도'는 풀, 작은 곤충, 동물을 배합하는 그림의 구도로 중국 원나라 시대의 화조작가 '여 경보'의 작품이 언제인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따라서 이 같은 구도가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이후에 전해졌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에서는 16세기(조선시대)에 이런 버전의 그림들이 주로 여성들에 의해서 유행하였고 민속화로 분류되고 있고 사임당의 초충도가 대표적이고 '초충도'의 대부분은 사임당의 화첩그림과 비슷한 풍으로 전해질뿐 작품들의 진위도 가리기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초충도'가 종이에 그려진 채색화에 비해 일본의 ‘초충도'는 주로 자수를 위해서 그려졌다고 한다. 위 좌측 도자기의 상단 그림 역시 들쥐가 무슨 덩쿨식물의 열매를 먹고 있는 그림이다. 따라서 기자는 저 윗부분의 그림 역시 아시아 그것도 한국에서 건너간 그림의 흉내일것이라고 혼자 생각하고 우습게도 가슴이 뛰었었던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멀고 가까운 세계 문화교류의 역사가 재미있지 않나요?원초적으로 나만의것 이라는게 존재하기나 했을까요?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사)한국마이크로크레디트 신나는 조합’(정명기 이사장)이 주최한 ‘시니어 취·창업연계교육’에 참가하였다. 시니어가 땀을 흘리면서 길을 찾는 교육현장을 살폈다.
서류심사, 면접을 거쳐 소수정예 교육생을 선발하였다. 민성삼(54) 수강생은 “2년 전 명예퇴직하고 한창 나이이기에 취·창업이 쉬울 줄 알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육을 잘 받고 귀중한 체험을 활용하여 취업에 꼭 성공하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공헌하는 창업을 할 예정이다.” 자기소개 때 명쾌하게 포부를 말하였다.
신나는 조합은 저소득층 및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금융과 사회적 기업·협동조합 지원활동을 한다. 2012년도 부처형 예비사회적기업 지원기관, 2013년도 서울권역사회적기업 통합지원기관으로 선정되어 현재까지 사회적 기업 교육과 경영지원,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총괄 김진호 과장은 오리엔테이션 때 교육계획을 설명하였다.
“3월부터 오리엔테이션과 공통교육, 심화교육을 진행한다. 5월부터 창업팀은 전문적인 추가교육과 멘토링을 거쳐 10월부터 법인설립을 진행하고, 취업팀은 사회적 경제조직에서 약 3개월간 인턴십 과정을 거쳐 취업을 성사시킬 예정이다.” 현재 강의교육 마치고 교육 후 사업 진행 중이다.
공통교육은 사회혁신센터, 성미산 마을 방문 등 현장체험 중심으로 진행하고 심화교육은 실무에 활용 가능한 사례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창업희망자는 경험이 없는 고차원적인 사업모델보다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해보았거나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연계자원이 풍부한 창업아이템을 선정하는 것이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강사가 힘주어 강조하였다.
취업희망자는 어떻게 취업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신입직원의 자세로 새로운 조직에서의 적응능력을 키우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취업희망자와 구인기업을 1:1 연결하여 취업이 성사되도록 꾸준히 지도한다. 이점이 교육으로만 끝내는 것과 다른 방법이다.“
취·창업 성공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한국의 전통차와 차문화 예절에 대해 오랫동안 종사해 오신 분을 여러 창업지원 공모사업에 참여토록 지도하였다. 덕분으로 2016년 사회적 기업가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지원금을 받고 창업을 준비 중에 있다. 취업의 경우 비영리조직에서 다양한 자원봉사 경력이 있던 분을 경영지원을 돕는 사회적 기업으로 재취업을 도왔고 매출향상에 기여하였다.“
취·창업 준비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영리에서처럼 나 혼자 잘 살겠다는 마음으로는 이 분야에서 어떠한 응원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근무환경도 어렵고 보수도 적지만 새로운 인생 2막을 사회적으로 유익한 활동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분들에게 사회적 경제영역은 다양한 역할과 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시니어의 취·창업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기 바라며, 김진호 과장의 보충설명에 감사한다. 연락처: 070-7600-0510 홈페이지: www.joyfulunion.or.kr
올해로 차납 서른을 맞이한 경희대학교 오양가(吳洋嘉· 60) 겸임 교수. 불가에서의 나이를 ‘법랍’이라 하듯, 그녀는 차를 만난 이후 나이를 ‘차납’이라 한다. 짙게 우러난 그녀의 다도 30년은 그윽한 향으로 우리 문화 곳곳에 번지고 있다. ‘차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뇌와 시련도 ‘차인’이라는 사명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오양가 교수의 다도 인생을 돌아봤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능과 감성
어린 시절 어머니는 늘 차를 우려 그 향과 온기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런 어머니를 도와가며 자연스레 차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땐 그것이 그저 평범한 우리나라의 예절인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되고, 행다(行茶)를 처음 봤을 때 ‘아, 내가 고향에 돌아왔구나!’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 어머니랑 늘 하던 건데, 내가 그동안 서양문물에 젖어 다 잊고 살았구나. 내가 왜 플루트를 사랑하고 클래식을 더 고상하다 생각했을까? 그런 깨달음이 있은 후 우리 전통문화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플루트보다 대금을 더 사랑하게 된 거죠.”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때 무용가로도 활약했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오 교수는 무용을 비롯해 발레, 체조, 양궁, 펜싱, 미술 등 다재다능한 끼를 발휘했다.
“차는 ‘찻상에 표현되는 종합예술’과도 같기 때문에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지식은 물론, 그와 어울리는 음악, 꽃꽂이, 손놀림, 복식, 도기 등 갖춰야 할 영역이 많죠.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키워온 재능들은 제가 다도를 하며 다양한 영역을 복합적으로 아우르는 데 큰 힘이 됐어요. 어머니는 조개껍데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하시는가 하면, 돌담 밑에 달맞이꽃을 한 아름 키워 서치라이트처럼 꾸며놓곤 하셨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신 분이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감성이 제가 하는 모든 것들에 접목됐고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됐죠.”
격을 지킨 사람만이 그 격을 파할 수 있다
한국의 차 문화 보급을 위해 달려온 30년. 행다를 익히고 기본을 갖추기까지 10년, 다도를 연구하고 자신의 다법을 정립하는 데 10년, 그리고 창작 다법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익히는데 10년. 오 교수의 30년은 그렇게 정직하게 흘러갔다.
“처음 10년은 좋든 나쁘든 배운 것을 거스르지 않고 똑같이 연습했어요. 혼자 차를 마실 때나, 아들에게 차를 줄 때나 누구를 만나도 순서를 지켜 차를 올렸죠. 절대 차를 쉽게 보지 않고, 그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했어요. 기본이 배어 있어야 잘못된 것을 파악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계(契)도 지킨 사람이 파할 수 있듯, 무언가를 엄격히 지켜보고 행한 사람만이 필요에 의해 그 격을 파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지를 경험해볼 필요가 있고, 그 후에 격을 파하고 자신의 것을 정립할 수 있어요.”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가장 한국적인 다도를 정립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하지만 다도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 또 그 순서와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기록된 문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다도를 우리 전통의 다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죠. 하지만 일본에서 왔다 해서 ‘이건 안 해’가 아니라, ‘우리만의 것으로 가장 한국답게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차 다(茶)’ 자만 보이면 다 챙겨 봤고, 공부가 될 때마다 방향과 순서를 바꿔가며 그 행위에 대해 연구했죠. 다도를 하는 데 물 넣고, 차 넣고, 우리는 것은 전 세계가 같지만, 그 퍼포먼스 속에 한국의 생각, 한국의 몸집, 한국의 철학, 한국의 예술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누구와 견주더라도 자신 있으니까요.”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국의 숨결
오 교수는 행다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한국의 사상과 멋을 담아내기 위해 깊은 고뇌와 마주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그릇을 엎으면 그 집의 살림을 엎었다.’ 해서 그릇을 엎어두지 않았죠. 그런 풍습이나, 어른들의 이야기도 한국의 문화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제 다법에 적용했어요. 그래서 일본 다도는 엎어놓은 잔을 바로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데, 제 다법은 잔을 바로 세워둔 상태에서 시작하죠.”
오 교수의 행다를 본 이들은 그녀의 평온한 움직임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한다. 특별할 것 없이 스쳐 지나가는 동작 하나에도 뜻이 있고, 오 교수의 생각과 노력이 담겨 있다.
“손놀림 하나에도 한국의 온화함과 곡선의 미를 살리려 했어요. 이 세상에 아무런 기물이 없을 때 인간이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했겠어요? 양손을 모았겠죠. 거기서 영감을 받아 잔을 잡을 때도 옹달샘 담아내 듯 양손으로 잔을 감싸요. 다기를 잡을 때도 내가 아이를 안았을 때처럼 편안한 모습을 하려 하고, 손동작 할 때도 초가집의 곡선을 형상화하곤 했죠. 그렇게 무언가가 정립될 때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연습을 끊임없이 했어요. 당시엔 집에 전신거울이 없었는데, 밤이면 베란다 유리창이 제 거울이 됐죠. 밤이면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어디가 비뚤어졌는지,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게 곡선을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또 연습했어요.”
사람의 본질을 사랑하게 하는 매개체, 차
전통문화를 전수받는 이들은 스승의 손사위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과 기풍까지 고스란히 담아내야 한다. 오 교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본질을 바라보는 눈과, 진심 어린 마음’을 강조한다.
“손동작과 기교는 연습시키면 누구나 흉내는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영혼 없는 몸짓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죠. 사람의 본질을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그를 향한 진심을 겸비해야 해요. 육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죠.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스펙이나 환경, 액세서리를 다 거둬낸 본질 있잖아요.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해요. 그 안목을 키우려면 ‘수신(修身)’ 즉, 자신을 다스리고 반성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하죠.”
사람을 위해 차가 존재하는 것이지, 차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터.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마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을 차를 매개로 전하는 것이 다도의 본질이며, 그 속에서 차 문화의 아름다움이 꽃필 수 있는 것이다.
“차는 그저 마셔서 입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그 마음을 달래는 데 의미가 있어요. 다도를 통한 수신은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매개로 상대를 만났을 때 함께 이루어져요. 내 인격체가 반듯하고 교양을 갖추었을 때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원활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함께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처럼 다도를 통해 수신을 이루고, 그 문화가 번지면 곧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존재의 이유, 차 그리고 가족
“그냥 전부 같아요. 내 인생의 전부. 가족 외에는 다 차였으니까요. 차가 머릿속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어요.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더라도 다 차로 귀결됐어요. 지금 보면 차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취미도 즐기고, 모임도 가고 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활이 전혀 없었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차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쩜 그렇게 차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내 청춘을 오로지 차에 미쳐 보내고 나니, 어느새 나는 늙어서 환갑이 돼버렸지 뭐예요. 돌이켜보면 ‘나도 참 힘겨웠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그때는 힘들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차에 몰입해 있었지만요.”
‘차인’으로서 안아야 했던 힘겨운 세월에 가장 버팀목이 되어 준 것 역시 ‘차인’이라는 사명감이었다. 그리고 차인으로 살아온 세월만큼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오 교수에게 ‘가족’은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존재의 이유는 오로지 ‘차’와 ‘가족’이라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차에 몰입했던 세월만큼 가족과 함께 나누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늘 미안한 마음이다.
차가 있는 곳엔 늘 향이 함께 했기에
과거 우리 선비들은 향을 사르고 차를 마시며 꽃과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네 가지 아취(雅趣, 고아한 취미) 있는 일로 꼽았다. 그동안 차인들의 노력으로 차 문화는 뿌리를 내려 뻗어가고 있는데, 향은 아직 그 쓰임과 문화에 대해 생소해 하는 이들이 많다.
“차가 있는 곳에 향이 있고, 향이 있는 곳에 차가 있어요. 늘 함께 하죠. 하지만 항상 차를 해 오면서도 ‘향’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동안은 차를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것에 바빠 향을 더불어 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이제는 향에 대한 갈증을 채워보려 해요. 앞으로는 다도를 해왔듯 향도를 해나갈 계획이에요.”
한국의 향도는 활발한 태동을 일으키고 있다. 오 교수 또한 지난 자신의 다도 발자취를 거슬러 그 시작과 나란히 향도 문화 전파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처음 하는 일에 대해 두려움은 없어요. 어떤 일이든 처음은 있는 것이고, 두 번 세 번 하다 보면 프로가 되는 거잖아요. 향도 시연을 창작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다도가 그랬듯 향도 역시 기본을 익힌 후 연구를 통해 창작해야 해요. 대만이나 중국, 일본의 향도를 살피고 공부를 해서 가장 한국적인 향도를 탄생시켜야죠.”
차인(茶人) 30년 세월이 내게 남긴 것
“전통문화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고독하죠. 남이 알아주지 않고, 돈도 안 되고.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에요. 오로지 차 문화 보급을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초등학교 운동회부터 OECD 장관 접빈 다례, 조정사신연 행사 등 수많은 행사를 치러냈지만 정말 힘든지 모르고 했어요. 거의 자비로 봉사하다시피 해왔지만, 그날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차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면 흐뭇하고 그 자긍심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행사장 테이블에 마련된 차를 즐기는 것이 이제는 생소한 문화가 아니다. 이처럼 ‘티 테이블 셋팅’ 에 대한 익숙함이 싹트기까지 오 교수는 끊임없이 곳곳에 다도의 씨앗을 심고, 애정의 물줄기를 적셔주었다. 모든 것을 바쳐 한국의 다도를 각인시켜 왔지만, 정작 오 교수 자신은 소박하게 남길 바랐다.
“나중에 우리 후배들이 나를 떠올렸을 때 ‘아, 오양가 선생님은 참 아름다운 차인이었어’라고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차인’으로 남았으면 해요.”
천의보다법은 차문화와 우리나라 보자기문화를 접목한 오양가 교수의 창작 다법이다. 천의보라는 명칭은 하늘의 보배로운 옷자락이라는 뜻으로, 복의 기원과 함께 소중한 기물을 싸는 보자기에 차를 우릴 다완(茶碗, 차를 마실 때 쓰는 그릇)을 싸 더욱 귀중함을 나타냈다. 보자기를 싸면 상보를 대신하고, 펼치면 찻상이 된다. 행다 시에 중복되는 행위와 기물을 최대한 줄여 절제미와 단순미가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