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하여간 그렇대. 우리 나이가 한참 늙느라 바쁜 나이래.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면서
고장 나는 데 생기고, 마음은 공허하고. 살아 뭣하나, 싶은 나이라는 건데. 그게 당연한
마음이라니까 너무 난감해하지 마.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49p
‘피하고 싶은, 그러나 엄존하는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소설가’(제9회 김현문학패 심사평) 김이설의 신작 소설이 출간됐다. 2006년 등단 이후 18년간 꾸준히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가족에 대해 질문해온 그가 이번에는 50대를 앞둔 난주, 미경, 정은, 세 친구의 강릉 여행을 통해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난주, 미경, 정은은 1975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오랜 친구지만 각자 사느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사는 거리가 먼 만큼 마음도 멀어진 무렵이었다. 매번 여행 한번 가자는 말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강릉에 가자고 한 건 난주였다. 늘 그렇듯 말뿐일 게 뻔했다. 혼자 노모를 모시는 미경은 하루 시간 빼는 것도 쉽지 않다. 모두 속으로는 올해도 여행은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데, 불쑥 미경이 “가자!”고 호응한다.
강릉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일, 세 친구는 서울역에서 만난다. 강릉 여행은 스물넷 이후 25년 만이고, 셋이 다 함께 모인 건 난주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7년 만이었다. 낯선 것도 잠시, “왜 이렇게 부었어? 살찐 거야, 아픈 거야?”, “넌 왜 이렇게 늙었니?”라며 서로 장난스럽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X세대, 신세대, 수능 0세대. 한때 이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싱그럽고 통통 튀고 정의할 수 없는 젊음 그 자체로 예쁜 시절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요실금과 고혈압, 탈모 등 다양한 신체 변화를 겪고 있다.
세 명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펜션을 잡고, 여행 내내 잔뜩 먹고 마신다.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 장칼국수를 먹거나 허난설헌의 생가도 가고, 커피도 여섯 잔씩 시켜 나눠 마시고, 질리도록 술을 마신다. 이렇게 셋이 모이는 날이 또 없을 거라는 듯 최선을 다해 즐긴다. 그간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부딪치는 구석도 많다.
기혼인 난주, 정은과 미혼인 미경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고, 투잡을 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정은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인 난주는 자주 투덕거린다. 싸움을 푸는 방식은 간단하다. 마시고, 웃고, 푼다. 술 한잔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누다 보면 당장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도 괜찮다. 이들의 여행 또한 술 한잔과 같다. 앞으로 똑같은 삶이 반복돼도 버틸 수 있는 잠시의 안도, 찰나의 틈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을 견디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김이설 작가의 사이
“5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생각보다 없어요. 각자의 세계와 인생이 있을 텐데 그저 엄마, 아줌마, 며느리, 딸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표지 속 거위처럼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는 2023년 6월 초, 김이설 작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하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무료 소설 연재를 구독할 독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을까지 경장편소설을 마감하려면 스스로를 강제해 진도를 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신청자들의 메일 주소로 매주 1회씩, 원고지 30매 분량을 전송하는 ‘소설가의 생초고 메일링’,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원동력이었단다.
“재앙이 매주 제법 많은 양의 원고를 써야 하는 저에게 해당하는 말인지, 정리 안 된 소설을 읽게 될 메일링을 신청한 분들인지 모호했지만 일단 썼어요. 어떤 노래를 들으며 무슨 마음으로 작업했는지도 함께요. 응원과 애정이 담긴 답장은 물론, 바다 사진을 꾸준히 보내기도 하셨어요. 두 번의 펑크를 내면서도 ‘무리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3개월 동안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강릉으로 떠난 중년 여성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의 주인공 난주와 정은, 미경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감 가는 구석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했다. 노안이 찾아왔지만 ‘안 보면 안 봤지, 돋보기라니’라며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녀들이 독립할 시기에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요실금이 의심되는 상황에도 병원 가는 것을 미루는 등 낯선 몸, 낯선 자신을 만나며 혼란을 겪는다.
“50대가 되면 몸 여기저기가 하나씩 고장 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설익은 상태인 것 같아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때랄까. 아직 힘은 있는데, 40대보다는 ‘쓸모’라는 영역에서 다소 밀려났다고도 느껴요. 우울하고 주눅이 들죠. 하지만 다들 각자만의 큰 세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걸 풀어내고 싶어도 세상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겁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걸 한꺼번에 터뜨리려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닐까요. 난주와 정은이, 미경이 같은 ‘아줌마’들은 쓸쓸함을 견뎌내고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중인 거예요.”
“세상에 안 힘든 이십대가 어딨니? 이십대는 그냥 이십대인 것만으로 힘든 거야.”
미경은 끝을 내지 못했던 학생운동과 이뤄질 수 없었던 성희 언니와의 관계를,
정은은 일도 연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세상의 패자가 된 기분에 빠졌던 나날을,
난주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아줌마로 전락해버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셋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97p
삐거덕거리는 몸과 마음을 안고 세 친구는 강릉으로 떠난다. 김 작가는 강릉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년배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에 배경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1970년대 대학가에 MT 문화가 퍼지면서 강원도는 그 시절 학생들에게 낭만의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강릉은 세 친구의 젊은 시절이 켜켜이 쌓인 상징적인 곳입니다. 저 역시 처음으로 부모님을 속이고 첫사랑과 여행한 곳이에요. 소설의 원제도 ‘강릉에 가자’였어요.”
등장인물들은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카페를 찾거나, 관광지를 들르려 애쓰지 않는다. 안목해변 주변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건 술이다. 과거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과 오해, 깊어진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다투지만, 담백한 건배와 함께 목구멍으로 털어 넘긴다.
“여행 왔다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잖아요. 술에 잔뜩 취해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들이 인연을 이어온 25년이 짧은 시간이 아닌 데다 처한 환경이 너무도 다르니 적당히 술 한잔으로 흘려보내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겠죠. 그래야 아프고 잊고 싶던 기억 위로 이번 여행이 씌워질 테고, 또 살아가니까요.”
앞으로 안도할 우리
김이설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인생을 알아차리게 된다’(110p)는 강릉의 커피 명장 박이추 선생의 말을 빌렸다. 자녀와 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면서 사회적인 위치까지 공고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고단하더라도, 살다 보면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단다.
“흔히들 특정 시절이 가장 찬란했다 말하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실수했던 순간이 자꾸 생각나고 숨고 싶어져도 어느 날부터는 되레 아름답게 여겨져요. 한동안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글을 전혀 못 읽고 못 쓰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극복했지만요. 작가에게 그건 죽음과 같은 건데요, 등단하고 10년 동안 육아와 원고 작업을 병행했더니 지쳤던 것 같아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날카롭고 거칠던 문체가 둥글둥글하고 편해졌어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도하고 감사하면서 계속 쓰다 보면 모르는 새 영글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쓸쓸함도 곧 잦아들기를 바라요.”
‘자유여행은 청년, 패키지여행은 중장년’이라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구글 지도를 켜고 배낭을 멘 채 가본 적 없는 도시로 떠나는 중장년이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체로 용기를 내야 하는 일. 4060이 자유여행에 첫발을 내딛기 전 알아야 할 것들을 이종원 상상콘텐츠연구소 소장과 함께 정리했다.
1. 혼자보다는 여럿이 떠나라
4060 여행자라면 혼자보다는 여럿이 여행을 즐기는 편이 좋다. 가족도 좋고 가까운 지인도 좋다. 다만 역할분담하기를 추천한다. 교통편, 숙소, 식사 등을 나누어 찾는 것이다. 그래야 계획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모두가 공감하며 여행을 떠날 수 있다.
2. 시간을 적극 활용하라
은퇴 후라면 많은 시간을 적극 활용하자. 평일 위주로 여행할 수도 있고, 비수기를 노려 저렴한 해외 항공권을 구매할 수도 있다. 보통 출발 2주 전쯤 판매하는 ‘땡처리’ 상품이나 항공사 자사몰에서 판매하는 ‘미판매분’을 노려보자.
3. 투어 상품 필수로 챙겨라
원데이 투어나 시티투어 상품을 활용하면 체험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해외 원데이 투어 상품은 패키지 상품으로 가기 어려운 곳들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도 함께 하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다.
4. 구글 지도와 친해져라
구글 지도 앱은 필수다. 야놀자, 호텔스컴바인 등 여러 숙소 예약 플랫폼을 통해 묵고 싶은 곳을 10개 정도 고른 뒤 구글 지도에서 다시 검색해보자. 보다 저렴한 경우가 있다. 다양한 리뷰도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이라면 구글 지도가 내비게이션 역할도 해준다.
5. 앱을 적극 활용하라
여행 앱을 깔아 수시로 들여다보자. 여행 정보는 KLOOK(클룩), 와그, 마이리얼트립, KKday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항공 티켓은 skyscanner, playwings, 와이페이모어, 땡처리닷컴, 인터파크 투어, 항공사별 자사앱 등을 활용하자.
6. 여행 정보는 커뮤니티에서 챙겨라
포털사이트에서 ‘가고 싶은 지역 + 네이버 카페’라고 검색한 뒤 이용자가 가장 많은 카페에 가입해 둘러보자. 숙소, 볼거리, 식사, 쇼핑까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예산을 사용했는지도 참고할 수 있다.
7. 체력을 안배하라
체력 안배는 매우 중요하다. 여행을 많이 안 다녀봤다면 특히 나의 ‘여행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5박 6일 여행이라면 사흘은 체험형 여행 코스를 구성하고 이틀은 쉴 수 있도록 안배해야 한다.
“조금 느리고 약간 불편할 수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보세요.”
에디터 조형애 취재 이연지 도움말 이종원 상상콘텐츠연구소 소장 디자인 유영현
황사가 유달리 심해 연분홍 벚꽃이 뿌옇게 흩날리는 봄날, 도쿄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메이지단치(福島県いわき市 明治寸地)를 찾아갔다. 치매 환자들이 일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다. 조용한 주택가에 단독주택을 개조해 앙증맞게 자리 잡은 카페였다.
인지증(認知症, 치매)은 일본에서도 ‘2025년 문제’라고 불릴 정도로 심각한 사회적 과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치매 환자 수는 2012년 기준 426만 명에서 2025년에는 약 750만 명에 도달, 65세 이상 인구 5명 중 1명이 해당될 것으로 예상된다. 후생노동성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해 가능한 한 살고 있던 익숙한 지역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각종 시책을 발표하고 있다.
소중한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고, 단순 계산을 할 수 없게 되고, 일상을 보낼 수 없게 된다. 망상을 하거나 배회하거나 폭언을 반복하는 등 인격조차 바뀌어버린다. 이윽고 가족의 얼굴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의식이 몽롱한 채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치매에 대한 이미지로,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가능하면 평생 치매와 무관하게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며 당당한 삶을 보내고 싶은 건 인류 공통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 치매 환자들이 일하는 카페 후쿠로우(福老) 입구에는 가슴 뭉클한 글귀가 적혀 있다.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은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 노령자(치매 환자)입니다. 처음 만나는 손님에게 “당신, 만난 적이 있어요!”라고 한다든가 같은 내용으로 질문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식사하기 위해 들르는 풍경이 노령자에게는 ‘보람’이자 ‘기쁨’입니다.
치매 환자가 일하는 카페, 후쿠로우
카페에 도착하자 앞치마를 두른 카페 대표 하세가와 마사에(長谷川正江, 57) 씨가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이 셋을 둔 하세가와 씨는 31세부터 방문요양보호사로 일하다가 11년 전부터 BLG이와키(いわき)라는 데이서비스(우리나라 주간보호센터에 해당)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에는 현재 15명의 멤버가 있다고 한다. 데이서비스를 운영하던 하세가와 씨가 치매 환자들이 일할 수 있는 카페를 창업하기로 결심한 건 3년 전이다.
“계기가 된 건 친정아버지예요. 정년퇴직하고 나서 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요양원에서 운전을 하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하셨죠. 그런데 갑자기 요양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하셨는데, 일이 없어지니까 치매에 걸리셨어요. 그때는 사회적으로도 이 병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기 때문에, 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어요. 아이 셋을 키우느라 바쁘기도 했고요. 배회를 거듭하시던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고,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었을 텐데’라는 고민과 후회가 많았어요.”
많은 고령자들이 정년 후 본인의 역할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인지 능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제가 데이서비스를 만들긴 했지만, 이곳에서는 환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고 직원들이 모든 수발을 들어주기 때문에 환자 본인은 점점 하고 싶은 일도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치매 환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역할을 부여해 증세를 완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하세가와 씨는 2층짜리 단독주택을 빌려 후쿠로우 카페를 열게 됐다.
다카하시 부부와 M 씨
“남편 미야히코 씨를 집에서 부인 히사코 씨가 혼자 돌보다가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거의 없었던 남편의 치매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카페에서 부부가 함께 일하면서 표정이 많이 밝아졌어요. 특히 미야히코 씨는 앞치마를 입으면 과거 회사원이었던 때가 떠오르는지 긴장감을 가지더라고요.” 다카하시 부부를 보며 하세가와 씨가 말했다.
후쿠로우를 방문한 날 다카하시 미야히코(高橋宮彦, 85) 씨는 새로 작성한 메뉴판에 오자가 없는지 열심히 확인하고 있었다. 개호도 3등급(보행기나 휠체어를 이용하며, 식사나 양치질 등 일상생활에서 전반적인 개호를 필요로 함)이지만, 과거 회사에서 오래 영업을 한 덕분인지 아직까지 교정을 잘 볼 수 있다고 한다.
부인인 다카하시 히사코(高橋久子, 83) 씨는 주방에서 젊은 직원들과 닭튀김을 만들고 있었다. 부인은 치매 전조 단계인 ‘경도인지장애’가 있다.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은 히사코 씨가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다음 동작을 일러준다고 한다. 경도인지장애는 한 가지 행동을 하면 다음 동작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데, 직원들이 미리 반복해 알려주면 자연스럽게 다음 행동으로 이어진다. 부인에게 다가가 힘들지 않은지 묻자 “괜찮아요, 재미있어요. 허리가 굽어서 오래 서서 일하면 조금 아파요”라며 소녀 같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부부는 고독했던 일상을 벗어나 젊은 직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경도인지장애에서 치매로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카페에서 일하며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보인 사람은 M 씨(67)다. 동그란 플라스틱 통에 젓가락으로 반찬을 담는 데 집중하느라 손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젊은 시절 어떤 일을 했는지 묻자 “목재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어요”라며 또박또박 답했다.
M 씨는 정년인 65세쯤 치매가 찾아왔고, 이후 혼자 살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사는 동생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형을 위해 매일 편의점에서 주먹밥이나 도시락을 사서 배달해주고 있다. 어느 날 도시락을 사온 동생에게 M 씨가 부엌칼을 들이밀며 “왜 매일 찾아와? 이놈, 내 재산을 탐내는 거지?”라며 화를 내 무척 놀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M 씨가 후쿠로우 카페에서 일하면서 많이 온순해졌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들렀는데, 카페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금은 일주일에 네 번이나 나와 일한다.
최고의 보상은 마음 회복
후쿠로우 카페는 하세가와 씨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카페에는 주문표가 준비되어 있다. 손님이 주문 내용을 직접 작성하면 치매 환자가 받아 직원에게 넘겨주는 방식이다. 또한 손님이 너무 많이 오는 날은 ‘매진’ 간판을 내걸고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
카페를 방문한 날 후쿠로우의 방식으로 커피와 한국식 김밥을 주문했다. 히사코 씨가 예쁜 잔에 담은 커피와 김밥을 정성스럽게 내어줬다. 후쿠로우 카페의 도시락은 보기에도 예쁘고 맛도 좋다. 무엇보다 정성이 가득 들어간 게 느껴진다. 카페를 이용한 젊은 사람들이 SNS에 리뷰를 올리면서 멀리 있는 다른 현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치매 환자가 손님을 맞이하며 90도로 인사하고, 손님이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하세가와 씨도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카페 경영은 적자다. 하루에 팔리는 도시락은 많으면 50개, 적으면 5개 정도다. 하루 매출은 2만~3만 엔 정도지만 이마저도 들쭉날쭉 일정하지 않다. 하세가와 씨가 운영하는 데이서비스에서 나오는 약간의 이익으로 카페의 적자를 메우며 겨우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세가와 씨는 너무 매출이 많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손님이 많아 지나치게 바쁘면 치매 환자도 직원도 지치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씨가 신경 쓰는 또 한 가지 부분은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과 치매 환자의 영양 있는 식사다. 혼자 사는 고령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영양 밸런스를 맞춘 건강한 밥상일 것이다.
“저희는 오전에 일하고 오후 1시부터 한 시간 동안 점심을 먹어요. 남은 재료로 만들어 먹는데, 너무 맛있어서 직원이나 치매 환자들이 ‘점심 먹고 싶어 출근한다’고 농담할 정도예요. 특히 M 씨는 스스로 식사를 챙길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곳에 오시면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하도록 당부드리고 있어요.”
후쿠로우 카페에서 일하는 치매 환자들은 먹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들의 하루 보수는 400엔(약 4000원). 일주일 동안 모은 보수로 주중에 맛있는 점심을 사먹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오전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카페를 닫고 하세가와 씨와 직원들은 치매 환자들과 외출한다. 당일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보기도 하고, 가까운 바다를 구경하거나 공원에 가거나 함께 쇼핑하며 시간을 보낸다.
후쿠로우 카페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다카하시 부부와 M 씨를 보며 정년을 맞이하기 전에 한 일이 무엇이든 치매에 걸리면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은 누구나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여주고 일이나 역할을 주는 곳이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치매의 속도가 느리게 간다면, 늙어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봄날이었다.
인공지능(AI)이 음악도 만들고, 그림도 그린다. 인간 고유의 재능으로 여겨졌던 ‘창작’이라는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AI가 더욱 고도화될 거라는 건 정해진 미래다. 사람들이 ‘어떻게 AI를 활용할 것인가’ 고민할 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변호사가 있다. 아니, 그는 소설가다.
장편소설 ‘밤의, 소설가’는 “AI와 공동 집필에 몰두했던 소설가의 미스터리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한 작가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상징적 죽음’이라는 평을 내놨다. AI의 발달로 인간 고유의 영역을 빼앗기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위태로운 저자의 지위’와 ‘왜 창작하는가’ 같은 뿌리에 가까운 질문이 담겨 있다. 저자 조광희 변호사는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됐을까?
영화에서 소설까지 ‘올라운더’
법무법인 원에서 근무하는 조광희 변호사는 ‘올라운더’라 불린다. 올라운더는 스포츠 등에서 모든 역할을 골고루 하는 선수를 가리키는 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이 별명이 이해가 된다.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영화사 봄의 대표이사를 지내며 ‘밤과 낮’, ‘해변의 여인’, ‘멋진 하루’ 등을 제작했다. 그리고 선거캠프에서 세 차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씨네21’, ‘한겨레’, ‘경향신문’의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2003년에는 영화인들의 필독서로 유명한 ‘영화인들을 위한 법률가이드’를 펴냈다. 이후 ‘그래봐야 인생, 그래도 인생’ 산문집 한 권과 ‘리셋’, ‘인간의 법정’, ‘밤의, 소설가’까지 세 권의 소설을 냈다. 이뿐인가. 소설 ‘인간의 법정’은 뮤지컬로도 제작됐는데, 조 변호사는 이 뮤지컬의 각본까지 맡아 각본가로도 데뷔했다.
“변호사 일은 30년째 하고 있어요.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무를 주로 합니다. ‘평판 관리’라고 하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분야도 담당하고요.”
이 정도 이력이면 작가로 전업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조 변호사는 변호사로 오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전업 작가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이유죠.(웃음) 두 번째로 변호사는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일이 결국 소설의 토양이 됩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간접 경험을 많이 할 수 있거든요.”
버스에서 설계하는 소설
조광희 변호사는 뮤지컬 각본 작업도 소설 집필도 변호사 일을 하며 병행했다. 무척 바쁜 일상이었을 텐데 어떻게 일의 균형을 잡았을까? 작품들이 그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은 소설을 쓰는 그의 방식과도 관련 있었다. 조 변호사는 ‘필 꽂히는’ 대로 써 내려가면서 수정을 거듭하기보다, 처음부터 구조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뒤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소설을 설계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아이디어와 콘셉트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밤의, 소설가’는 ‘10여 년 전 알았던 여성이 소설가가 돼 법률사무소에 나타나 일을 맡긴다’는 내용으로 시작했어요. 아이디어는 버스 타고 출퇴근할 때, 산책할 때,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실 때 등 일상에서 떠올리는 편입니다.”
다음으로 시놉시스를 쓰고 트리트먼트를 만든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 변호사는 영화에서 쓰는 개념을 가져와 설명했다.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 역시 산책하다가 휴대폰에 메모하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성하는 방식으로 채워나간다.
“시놉시스는 한 페이지 정도의 줄거리를 쓰는 일이에요. 인물과 사건을 그럴듯한 구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지만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시놉시스가 완성되면 이를 바탕으로 20~30장짜리 트리트먼트를 씁니다. 좀 더 자세한 줄거리죠. 인물이나 사건 설명이 더 상세하게 나와야 합니다. 저는 트리트먼트 작업을 할 때 챕터를 나누어서 써요. 트리트먼트가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셈이에요. 여기까지 완성되면 이제 조금은 기계적인 작업이 됩니다. 살을 붙이는 과정이죠. 이때는 책상에 딱 붙어 앉아 쓰는데요. 주로 집에서 하지만 자주 가는 카페도 있고, 어떤 때는 2~3일 정도 여행을 떠나 작업하기도 합니다.”
소설을 처음부터 설계한다는 건 꽤나 논리적인 작업이다. 변호사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이 소설 쓰기에도 반영된 듯한 방식이다. 하지만 ‘밤의, 소설가’는 기존과는 좀 다르게 완성됐다. 처음에는 한 문예지에서 작품 요청을 받아 쓰게 됐는데, AI는 비서 역할로만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완성한 후 문우들과 대화하다가 생각이 확장됐다.
“발상의 전환이 되면서 ‘소설 쓰기에 관한 소설’이라는 주제까지 다루게 됐어요. 소설 속에 소설 집필 과정 자체를 노출시키는 일종의 메타 소설이 된 셈인데요. AI에게 창작의 영토를 빼앗기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러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왜 사는가’에 대한 고찰
AI ‘레비’와 함께 소설을 써 내려가던 소설가 건우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면 조광희 변호사가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저자의 위태로움’이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지만, 동시에 ‘대중과 시장이 요구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요즘 사람들은 고전문학을 잘 안 읽잖아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쓰면 달콤한 글만 쓰게 되죠. 저자라는 지위 자체가 위태롭다고 보는 지점이에요. 그걸 AI가 가속화하는 거죠. 심지어 AI와 소설 쓰기를 경쟁합니다. 나보다 더 글을 잘 쓰는 AI라니, 그렇다면 저자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에 빠지게 되겠죠. 차라리 AI에 기대는 노예가 될까 고민도 하게 되고요.”
벌써 AI는 단순노동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다. 변호사 업무에도 쓰이니 말이다. 조광희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가 됐을 때만 해도 판례가 전산화되지 않아 법원도서관에서 종이 파일을 뒤져야 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모든 판례를 검색할 수 있고 AI에게 말하면 대신 검색해줄 수 있는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다. 실제로 AI가 영문 계약서를 번역해주는 일은 제법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소설 속 소설가는 AI와 소설 쓰기에 관해 경쟁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호사가 AI와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소송 기록을 주면 논점이 뭔지 분석해내는 것까지 AI가 해낼 거예요. 그렇다면 변호사의 주요 업무는 재판에서 어떻게 전략적인 접근을 할 것인가, 법정에서 증인의 말을 신뢰할 것인가 아닌가 등의 인간적이고 섬세한 일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뀔 거라 봅니다. ‘일’이라는 영역에 AI가 계속 침식해 들어오니까요. 결국 인간은 어떤 일을 도대체 ‘왜’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예술, 문학, 바둑, 체스 등 많은 분야에서 AI는 인간의 창조성과 지적 능력을 대체하고 있다. 조광희 변호사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목표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AI라는 존재가 단 몇 초 만에 허물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활동을 왜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고민에 빠지게 돼요. 그걸 고민하다 보면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이어지겠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단순히 책을 팔고자 하는 일은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로 토로해내는 일종의 쾌감과도 연관된 일이거든요. 자신의 미학적인 정열 때문에 글을 쓰는 건데, AI가 소설을 더 잘 써내는 시대가 온다면 미학적인 쾌감을 빼앗기는 거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위협받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
조광희 변호사의 이런 고찰과 경험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첫 소설 ‘리셋’은 주인공인 변호사 강동호가 현직 서울시장의 의뢰를 받아 미스터리한 정치적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다. 돈과 권력, 그것을 쫓는 정치 세력 간의 블랙 커넥션을 파헤치는 내용인데, 아무래도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을 테다.
두 번째 소설 ‘인간의 법정’은 주인을 살해한 AI ‘아오’가 재판을 받는 이야기다. AI와 인간의 관계, 생명과 소수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제시한다. 이 책이 뮤지컬로 탄생한 것은 뮤지컬 ‘그날들’을 작업했던 장소영 음악감독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무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영화 각본처럼 썼고, 장 감독의 도움으로 극에 맞춰 수정을 거듭해 완성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시를 습작했던 경험이 아리아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됐고, 영화사 대표로 일하며 수많은 영화 시나리오를 본 것이 체득되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도 반영됐다.
세 번째 소설 ‘밤의, 소설가’는 두 번째 소설을 쓰면서 AI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봤던 것이 도움이 됐다. 어느 정도 AI에 대해 학습되어 있었기에 이야기를 확대해갈 수 있었다.
차기작으로 준비 중인 소설 ‘도시의 은자’는 대중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다.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자신은 정작 숨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다.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도 준비하고 있다. 영화감독인 동료 변호사와 함께 드라마 기획을 완성하고 대본을 쓰고 있다. ‘올라운더’의 면모가 돋보이는 행보다. 분야가 무엇이든 그가 만드는 작품에는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아니, 작품으로 녹아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차기작들에도 역시 변호사가 나올 것 같다. 그는 “꼭 변호사를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경험과 인생관을 녹인 캐릭터를 고민한다면 “변호사가 자주 등장할 가능성이 높겠다”며 웃었다. 어쩌면 ‘변호사’라는 등장인물이 그의 상징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소설 쓰는 변호사 조광희가 있고, 그 소설 속에서 변호사이면서 뮤지컬을 만드는 인물이 있고, 소설 속에서 만들어지는 뮤지컬에서 변호사를 연기하는 배우가 있을 것만 같다. 마치 ‘밤의, 소설가’ 작가의 말에 그가 남긴 말처럼.
여기 ‘밤의, 소설가’를 쓰는 조광희가 있다. 소설 ‘밤의, 소설가’에도 소설을 쓰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쓰는 소설 속에서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라는 소설을 쓰고 있는 여자도 있다. 소설 ‘먼저 상상하고 나중에 움직이다’에서도 주인공인 여자가 소설을 쓰고 있을 것이다.
-‘밤의, 소설가’ 中
어떻게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동행이 있다면 더욱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여행관이 맞지 않으면 ‘갈 때는 같이, 올 때는 따로’가 된다는 괴담(?)도 들린다.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 나와 동행의 성향·취향을 계획에 적절히 반영한 뒤 실행해보자. 여행 말미에는 ‘잘 놀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지 모른다.
결국 여행의 목적은 ‘환기’다. 나를 위협하는 그림자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김영하 작가는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기왕 어딘가 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미리 짜인 틀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패키지여행보다 내 취향과 상황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자유여행은 어떨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계획해야 할지 막막할 때 참고할 만한 몇 가지가 있다.
너, 내 동료가 되라! 여행 궁합 보기
가족여행에서 하지 말아야 할 십계명이 화제다. ‘부모님 버전’은 ‘아직 멀었냐, 음식이 달다, 음식이 짜다, 겨우 이거 보러 왔냐, 조식 이게 다냐, 돈 아깝다,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 이거 무슨 맛으로 먹냐,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 물이 제일 맛있다’가 포함됐다.
‘자녀 버전’은 ‘똑같은 거 물어본다고 짜증 내기, 1시간 이상 외출 준비하기, 하루 종일 휴대전화 하기, 30분 이상 맛집 줄서기, 음식 사진 다 찍은 다음 먹기, 못 알아듣는 줄임말 쓰기, 사진 다시 찍어줘, 조금만 더 가면 돼, 다시는 같이 여행 안 올 거야, 엄마는 몰라도 돼’가 꼽혔다.
평소 잘 통하는 사이여도 여행지에서 생각지 못한 문제로 부딪힐 수 있다. 따라서 여행 전 서로의 성향을 확인하는 편이 좋다. 합의점을 찾으며 맞춰갈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동행이 없다고 해도 본인의 스타일을 파악해두면 도움이 된다.
Plus Check
여행 성향 체크리스트
겉핥기는 그만, 맞춤 테마 찾기
# 책방에서 얻는 감성: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명소를 둘러보며 ‘도장 깨기’(유명한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실력자들을 꺾는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 어려운 장벽이나 기록 따위를 넘는 일) 하듯 다녀본 경험이 있는가? 몇 개국 몇 도시를 다녀왔는지 세어보는 재미도 있지만, 낯선 공간과 마음을 나누며 고유의 기억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나에게 맞는 테마를 잡아보길 권한다.
아직 목적지와 테마를 선정하지 못했다 해도 괜찮다. 여행 관련 서적을 소개하는 책방을 방문해 아이디어를 얻어보자. 뮤지컬 주인공의 대사 한 줄에 감명받아 해당 장소를 뒤따르는 이야기, 현지인들의 생생한 삶을 포착할 수 있는 마트와 슈퍼마켓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맛있는 상품을 발견하는 이야기, 유명 화가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러 무작정 떠난 이야기 등 저마다의 가치를 찾는 과정을 엿보다 보면 어느새 묻어뒀던 로망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걸 느낄 테다. 고른 책을 한 손에 들고 여행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다.
Plus Check
가볼 만한 여행 책방(자세한 영업시간은 홈페이지 확인)
책방 여행마을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17길 57 지층. 월·목 정기 휴무. 여행 관련 독립출판물과 여행 에세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한다. 책방지기는 왕초보 여행 짜기, 맥주 마시며 여행 수다, 부루마블로 여행하기 등 관련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책을 만들고 싶은 이에게 한컴으로 책 만들기 수업, 꾸준히 글쓰기 모임을 통해 독립출판물 제작을 돕기도 한다. 캠핑 장비로 분위기를 낸 공간이 돋보인다.
책크인 :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29 2층. 영업일은 매달 상이. 매달 열흘간 여행을 떠날 정도로 진심인 책방지기는 여행사도 운영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상적인 카페 혹은 근사한 맛의 커피를 만나면 원두를 구매하고 돌아와 ‘이달의 원두’로 사용한다. 매달 세계 곳곳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셈이다. 와인도 판매한다.
공간인흑석 : 서울시 동작구 흑석로5길 94, 1층. 예약제 북카페. 시즌별·나라별로 새로 출간된 여행책을 전시 중이다. 러시아, 중국, 몽골, 스웨덴, 독일 등 해외 서적도 보유하고 있다. 2~4층은 게스트하우스 및 임대주택, 옥상에는 셀프 사진관이 마련돼 있다.
스페인책방 : 서울시 중구 퇴계로36길 29 기남빌딩 302호. 일요일 정기 휴무. 스페인 사진집과 여행 에세이를 꾸준히 펴내던 독립출판 제작자들이 연 책방. 스페인어 문화권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한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책과 원서도 있다. 명확한 테마가 있는 장소라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거나 다녀온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AI가 안내하는 코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기 위해 일정을 짜려면 긴 시간이 걸린다. AI는 우리의 여행 코스를 구성해줄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원하는 방향과 인원수, 기간 등을 입력하거나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명소를 추천받을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오류가 조금씩 있고 면밀하지 않기 때문에 참고만 하거나, ‘AI의 말대로’ 떠나는 여행을 시도해보는 데 의의를 두자.
Plus Check 참고 홈페이지
어렵게만 느껴진다고? 작은 목표 세우기
장소 위주로 계획을 짜기보다 나만의 목표를 정해 챌린지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다. 우선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Plus Check
예시에 따른 추천 과제
인간관계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은 사람 : ‘여행 기간 타인에게 하루에 세 번 이상 연락하지 않기’, ‘일상과 관련 없는 현지인 친구 한 명 사귀기’, ‘한 시간씩 바닷가에서 멍때리기’
루틴을 잃어 건강을 되찾고 싶은 사람 : ‘하루에 만 보 이상 걷기’, ‘서핑·승마·스쿠버다이빙 등 레포츠 한 종목 배우기’, ‘간편식 끊기’, ‘7시간 이상 수면하기’
나쁜 습관을 고치고 싶은 사람 : ‘동네 반경 5km 안에서 생활해보기’, ‘전자기기 없이 살기’,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기’, ‘최소한의 돈으로 살기’
흔한 기념품보다 색다른 물건을 수집하고 싶은 사람 : ‘그 나라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향수 구매하기’(뿌릴 때마다 해당 장소를 떠올릴 수 있다), ‘여행지의 언어로 된 좋아하는 책 찾아보기’
숙박·식사·항공·관광·체험에 이르는 여행의 전 과정을 정해주는 패키지여행은 분명 편리한 면이 있다. 자유여행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에 준비할 것도 고민할 것도 많다. ‘자유여행은 청년, 패키지여행은 중장년’이 공식처럼 여겨진 이유다. 하지만 최근 이 공식이 깨지고 있다. 구글 지도를 켜고 배낭을 멘 채 가본 적 없는 도시로 떠나는 중장년이 늘고 있다.
중장년은 어떤 여행 방법을 가장 선호할까?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의 ‘선호하는 여행 행태에 대한 조사’(2023)에 따르면 50대 이상은 국내 여행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가 높을수록 도시 지역보다는 자연 지역을, 3박 4일 이상의 장기 여행보다는 단기 여행을 선택했다. 휴식 여행보다는 보러 다니는 여행을 원했으며, 입맛에 익숙한 음식도 좋지만 해외라면 현지 음식도 먹어보고 싶어 했다. 국내의 경우는 자유로운 일정을 중요시 했고, 해외는 다양한 체험을 고려하는 모습이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자유여행에 대한 선호도다. 그동안 패키지여행은 중장년이 선호하는 여행 방식으로 여겨졌지만, 이번 조사를 보면 모든 연령대에서 자유여행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패키지여행 선호도도 높아지지만, 비율로 보면 자유여행이 패키지여행보다 인기가 있었다.
여행 작가이자 여행 강사로 활동하는 이종원 상상콘텐츠연구소 소장은 “저가 패키지는 옵션이 많아 선택하다 보면 결국 비용이 늘어나거나 원치 않는 쇼핑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런 ‘쇼핑 투어’가 이슈가 되면서 많은 분들이 합리적인 여행을 원하게 됐고, 자유여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포털사이트 카페 등 여행 커뮤니티에 각종 정보가 많아 자유여행 설계도 비교적 쉬워졌다”며 “동남아는 물론이고 유럽, 남미 등에도 배낭을 메고 자유여행 하는 60대가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여행 업계는 소비력 있고 인구수도 많아지는 중장년층의 수요를 반영해 다양한 자유여행 상품을 내놓고 있다. 하나투어는 항공사, 항공편, 호텔 등의 조건을 소비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내맘대로’ 상품을 선보였다. 여행 플랫폼 마이리얼트립은 중장년 맞춤형 조합 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가이드맨은 자유여행과 패키지의 장점을 조합한 단독자유여행패키지만을 취급한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아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면, 이런 여행사의 자유여행 혹은 세미자유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소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여행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고 말했다. 편한 패키지여행을 뒤로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유여행은 그 자체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면 어느새 자유롭게 여러 도시를 누비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이종원 소장은 “기본적으로 여행에 대한 만족도는 내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면서 “상대적으로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많은 중장년에게 자유여행은 패키지여행보다 더 나은 선택지”라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익숙지 않은 지역으로의 여행은 설레기도 하지만 우여곡절도 겪게 된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 여행의 매력이다. 중장년의 자유여행은 조금 느리고 약간 불편할 수 있지만, 여행지에서 생기는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자유여행은 시간이 많은 중장년에게 추천할 만하지만 그만큼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 여행이기도 하다. 따라서 4060이 자유여행을 떠나기 위해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꼭 알아야 할 것들을 모아봤다.
◇자유여행 떠나기 위해 알아야 할 7가지
1. 혼자보다는 여럿이 떠나자
4060 여행자라면 혼자보다는 여럿이 여행을 즐기는 편이 좋다. 가족도 좋고 가까운 지인도 좋다. 다만 여럿이 떠나는 자유여행을 계획할 때는 역할 분담하기를 추천한다. 교통편, 숙소, 식사 등을 나누어 찾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여행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모두가 공감하며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따지기보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줄 수 있다.
2. ‘시간’을 적극 활용하라
은퇴 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시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자. 어느 여행지든 주말이 더욱 붐비기 마련이다. 자연을 좋아한다면 평일에 ‘자연휴양림’ 위주로 전국 투어를 해볼 수 있다.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휴양림도 평일을 이용하면 문제없다. 해외 항공권 역시 저렴한 티켓을 노려볼 수 있다. ‘얼리버드 예약’처럼 출발 한참 전에 나오는 할인 티켓은 경쟁도 치열하고 아무래도 젊은이들과의 속도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많아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건 은퇴 후의 특권이다. 보통 출발일 2주 전쯤 판매하는 ‘땡처리 항공권’이나 항공사 자사몰에서 판매하는 ‘미판매분 티켓’을 노려보자.
3. 자유여행에도 ‘투어’ 상품은 필수!
원데이 투어나 시티투어 상품을 활용하면 체험의 묘미를 살릴 수 있다. 국내의 경우 지자체를 통해 시티투어를 예약할 수 있다. 보통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출발해 하루를 보내는 상품으로, 2박 3일 국내 여행이라면 하루 정도는 시티투어를 활용해 시간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해외여행 역시 원데이 투어 상품을 적절히 섞어보자. 원데이 투어 상품은 패키지 상품으로 가기 어려운 곳들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외국인들도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색다른 매력이다. 본인이 머무는 호텔에서 출발해 일정을 마친 뒤 다시 데려다준다는 점에서 편리함도 있다. 원데이 투어는 추가 옵션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4. 구글 지도와 친해지자
자유여행을 계획할 때 구글 지도 앱은 필수다. 야놀자, 호텔스컴바인 등 여러 숙소 예약 플랫폼을 통해 묵고 싶은 곳을 10개 정도 고른 뒤 구글 지도에서 다시 검색해보자. 지도에서는 각 플랫폼별 숙소가 한 번에 나오므로 업체들이 예약 경쟁을 하기 때문에, 개별 플랫폼에서 찾는 것보다 더 저렴한 경우가 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의 실사용 리뷰를 볼 수 있다. 숙소의 질을 확인하고 싶다면 ‘화장실 사진’을 유심히 보는 게 좋다. 아무리 좋은 필터를 사용해도 화장실은 속일 수 없기 때문. 해외여행이라면 구글 지도가 내비게이션 역할도 해주고 스트리트뷰 기능으로 목적지를 미리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구글 지도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여러 기능에 익숙해지는 게 좋다.
5. 앱을 적극 활용하자
스마트폰에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앱을 깔아 수시로 들여다보자. 호텔·체험권·픽업·여행자 보험 등 여행 정보는 KLOOK(클룩), 와그, 마이리얼트립, KKday 등의 여행 플랫폼에서 둘러볼 수 있다. 항공 티켓은 skyscanner, playwings, 와이페이모어, 땡처리닷컴, 인터파크 투어, 항공사별 자사앱 등을 활용하자. 먹거리는 트립어드바이저, 다이닝코드 등에서 후기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6. 여행 정보는 커뮤니티에서
자유여행 코스를 구성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다녀왔는지 미리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포털사이트에서 ‘가고 싶은 지역 + 네이버 카페’라고 검색한 뒤 이용자가 가장 많은 카페에 가입해 둘러보자. 숙소, 볼거리, 식사, 쇼핑까지 많은 정보를 볼 수 있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이 여행하는 데 어느 정도 예산을 사용했는지도 참고할 수 있다.
7. 체력 안배하기
어느 여행지를 가든 체력 안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여행을 많이 안 다녀봤다면 특히 나의 ‘여행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5박 6일 여행이라면 3일은 체험형 여행 코스를 구성하되 2일은 쉴 수 있도록 안배해야 한다. 남미, 실크로드 등 체력이 필수인 여행지라면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필요한 정보를 얻으며 체력을 기르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춰 떠나도록 한다.
도움말 이종원 상상콘텐츠연구소 소장(한국여행작가협회 작가)
◇이종원 소장의 여행 꿀팁
- No Tip, No Option! 자유여행이든 패키지든 여행사를 통해 준비할 때는 ‘노 팁, 노 옵션’ 상품을 선택하자. 처음 계약 과정에서 고른 것 외에는 추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 숙소를 너무 외딴 곳으로 정하지 말자. 도심에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정해야 저녁 시간에 걸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기 좋다.
-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못했다면 모텔·호텔이 모여 있는 곳을 탐색해보자. 숙소가 많은 곳은 가격 경쟁이 붙기 때문에 쾌적한 숙소를 저렴한 가격으로 얻을 확률이 높다.
- 관광지에서는 맛집을 찾기 어렵다. 국내라면 군청, 시청, 경찰서 등의 주변에 맛집이 숨어 있다.
- 대중교통으로 국내를 여행한다면 내일로 패스를 활용해보자. 11만 원이면 7일간 무제한 탑승이 가능하다.
- 해외여행을 준비한다면, 공항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여행자보험과 환전이다. 보험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 환전은 주거래 은행이 가장 저렴하다. 꼭 필요한 현금만 준비하고 트래블로그나 트래블월렛을 사용하자. 수수료 없이 신용카드처럼 사용하거나 현금을 찾는 데 이용할 수 있다.
- 장거리 여행이라면 이동 시간도 활용해보자. 특히 10시간 이상 가야 하는 해외라면 비행기 안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세계 테마기행’ 등의 방송 중 가고자 하는 여행지 편을 봐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외국어를 몰라도 해외여행에 전혀 지장 없다. ‘구글 렌즈’와 ‘파파고’ 앱을 미리 설치한 뒤 떠나자. 관광지의 안내판은 구글 렌즈로 찍으면 자동 번역되고, 주문할 때는 파파고 앱을 이용하면 자동 음성 번역이 가능하다.
- 오지 여행은 전문 여행사를 통해 준비하자. 실크로드, 히말라야 등은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남미는 한 달 정도 시간을 들여 둘러보는 것이 좋다. 따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는 50대 이상 여행객을 대상으로 남미, 아프리카, 몽골 등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작은별 여행사’와 같은 전문 여행사 이용을 추천한다.
로컬 특별전 ‘로컬크리에이티브2024: 더 넥스트 커뮤니티’가 문화역서울284(서울역 구 역사)에서 17일 첫 선을 보였다. 이번 전시는 오픈 전부터 대전 유명 빵집 ‘성심당’의 참여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성심당은 대전에만 지점을 내고, 그곳에서만 빵을 판매한다는 철학을 가진 브랜드였기에 서울에서도 빵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가 높아진 것. 이에 성심당은 “ONLY 전시, 성심당 빵! 대전에서만 판매합니다. 문화역서울284에서는 빵을 판매하지 않습니다”라는 공식 해명까지 해야 했다. 성심당을 비롯한 로컬브랜드들은 이번 전시에서 제품이 아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알아보기 위해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화역서울284에서 5월 17일부터 6월 2일까지 열리는 ‘로컬크리에이티브2024: 더 넥스트 커뮤니티’는 로컬을 주제로 열리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후원하고 도시 콘텐츠 전문 기획사 어반플레이가 주최했다.
성심당, 태극당, 모모스커피 등 50여 개 브랜드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대표적인 로컬브랜드와 로컬을 이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스타벅스·나이키 등 우리가 잘 아는 대형 브랜드도 첫 시작은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지금은 하나의 문화 흐름을 이끄는 브랜드가 된 것처럼, 국내 로컬브랜드들 역시 창의적 커뮤니티의 중심이자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조명했다.
지역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로컬크리에이티브2024 전시는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 단순히 지역을 살려야 한다거나, 특정 브랜드가 지역을 먹여 살린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규모가 작은 로컬브랜드들이 각 지역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으며, 지역과 어떻게 상생하는지, 지속가능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흐름을 보여준다.
‘지역의 커뮤니티 연결자’로서 로컬브랜드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고, 단순히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도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함께 걸어보도록 한다.
전시장 곳곳에 숨겨진 로컬브랜드의 가치와 철학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앞으로 이들이 지역에서 만들어낼 새로운 문화가 과연 어떤 것일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그렇기에 로컬브랜드들은 지역에서 보았을 때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작지만 강한 로컬브랜드 이야기
전시는 로컬브랜드 100, 당신과 나 사이의 검은 물, 로컬 아카이브 로드, 수집가의 방, 빵 좋아하세요?, 어떤 하루, 도시 미味-술, 뉴웨이브, 대체 불가한 이야기 등 총 9개의 테마로 구성됐다.
전시 티켓을 확인하는 입구에는 높은 천고를 자랑하는 홀이 자리한다. 이곳에는 여러 브랜드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고 있다.
홀 전시 테마는 ‘로컬브랜드 100’이다. 흩어진 기둥을 하나의 끈으로 연결한 현수막에는 100여 개의 로컬브랜드와 슬로건이 쓰여있다. 천정에 있는 양쪽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브랜드들을 비추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3등 대합실에는 ‘당신과 나 사이의, 검은 물’은 로컬 카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커피를 판매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온 브랜드들이다. 컬래버레이션 전시, 전국 투어, 공정 무역 등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서측 복도에는 ‘로컬 아카이브 로드’가 있다. 로컬브랜드들이 만들어가는 문화와 지역의 숨은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매거진들을 볼 수 있다. 로컬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로컬 파인더, 로컬 에디터, 로컬 기록자, 도시 매니아, 도시 산책자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전시 관람객도 자신의 유형을 파악해보고 취향에 맞는 매거진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부인 대합실 ‘수집가의 방’은 로컬 큐레이터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성수, 마포, 서촌, 신사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트렌드를 수집하고 소개함으로써 동네를 향유하는 매력과 재미를 전하고 그로 인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이들이다. 이곳에 소개된 큐레이터들은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지역에 이들과 같은 동네 큐레이터가 생기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1,2등 대합실 ‘빵 좋아하세요?’는 대표적인 로컬브랜드인 두 빵집 이야기를 보여준다. 성심당과 태극당이 주인공이다. “모든 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라는 성심당의 슬로건, “오래됨이 빵을 맛있게 하는 철학으로”라는 태극당의 슬로건을 기반으로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빵을 만들어왔는지를 전한다. 광복이 너무 기뻐 무궁화를 연상시키는 로고를 만든 태극당과 대전 부흥에 소명을 가지고 청년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게 된 성심당의 이야기까지 그저 빵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빵과 도시와 사람을 잇는 수십 년의 노력을 조명한다.
‘어떤 하루’는 크리에이터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 상영관이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개인의 이야기와 공간을 중심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바라볼 것인가’를 사유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귀빈예빈실 ‘도시 미味-술’에서는 지역의 농산물과 자연이 녹아든 로컬 브루어리 제품들을 볼 수 있다. 술이라는 매개체로 어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각 브루어리의 이야기를 전한다. 더불어 작가 ‘쿤스트호이테’의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물성 재료를 활용해 천연 염색한 발 작품과 공예 작가들의 도자기들을 함께 전시했다.
딥다이브 투어를 전문으로 하는 가이드라이브가 마련한 도슨트 투어는 이런 전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다.
당초 도슨트 투어는 4회차로 계획됐지만, 많은 관심으로 조기 매진되었고 주최 측은 추가 회차를 열었다. 추가 회차 역시 단기에 예약이 마감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이번 전시에 관심을 가졌다.
도슨트 투어는 역사 해설가 안지영의 안내로 진행된다. 안지영 해설가는 “이렇게 많은 로컬브랜드를 한 곳에 모아 이야기를 들려주기가 쉽지는 않았다”면서도 “대형 프랜차이즈에 비하면 작은 규모의 브랜드들이지만, 이곳들이 언젠가는 역사처럼 배우는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 지역에서 봤을 때 더 의미 있는 브랜드들을 사람을 소개하는 마음으로 가이드 투어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몰브랜드인 로컬브랜드들이 취향을 연결하고, 도시를 만들고, 문화를 형성했다”면서 “지역과 어떻게 공생할지를 고민하는 브랜드와 그들의 제품이 다음 단계를 맞이해 어떻게 ‘넥스트 로컬’을 만들 것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이번 전시의 의미를 전했다.
새로운 파도, 그래서 넥스트 로컬은?
2층에는 ‘뉴웨이브’와 ‘대체 불가한 이야기’ 전시가 마련됐다. 지속가능성과 다음(넥스트)에 대한 이야기다.
지역 소멸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맞서 의미 있는 도전을 펼치는 로컬브랜드 프로젝트와 ‘넥스트 커뮤니티’에 대한 8명의 로컬브랜드 대표들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뉴웨이브는 지역에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슨하지만 강력한 커뮤니티로 연대하며 각 지역에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로컬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소상공인과 호흡했던 ‘마계인천 페스티벌’, 침체된 상권 활성화를 위해 문화적 팝업을 구현한 ‘이태원 헤리티지 맨션’, 지역 자연환경을 새로운 콘텐츠로 탄생시킨 ‘서피비치’ 등의 사례를 통해 로컬브랜드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역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또한 박준규 서피비치 대표, 김하원 해녀의 부엌 대표, 김민규 복순도가 대표, 이창길 개항로프로젝트 대표, 신경철 태극당 대표, 임성은 헬카페 대표, 박진우 성수교과서 큐레이터, 홍주석 어반플레이 대표 등 8인의 인터뷰를 통해 로컬브랜드에서 시작해 도시 콘텐츠로 이어지는 미래와 현재를 고민해볼 수 있다.
홍주석 어반플레이 대표는 “1:1의 관계가 2명, 3명, 50명, 100명이 되면 하나의 지역 커뮤니티 혹은 라이프 스타일 커뮤니티 등 여러 커뮤니티 형성으로 이어지며, 그 안에서 다시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형성된다”면서 “그런 문화가 있어야 더 성숙한 형태의 도시 모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로컬브랜드에 대해 “삶에서 곁에 항상 있지만 어디에나 있지는 않은 것”이라고 정의 하면서 “가치구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어떻게 시민과 공감하며 브랜드를 성장시켜 나가느냐”를 봐야 한다 강조했다.
물론, 온라인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시대이기에 로컬브랜드도 지역을 넘어 글로벌 시장까지도 뻗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다만, 이들에게 글로벌 시장이란 이익 창출만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문화를 전달하는 통로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단순 소비를 넘어 각 브랜드의 생각과 가치를 들여다보고자 만든 전시인 만큼 전시 기간 동안 매주 금, 토, 일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었다. 오는 6월 1일에는 “성심당, 대전의 문화가 되기까지”라는 브랜드 토크가 열리며 스트릿댄스팀 뱅크투브라더스와 현대무용 그룹 전복된 해부학적 풍경의 컬래버레이션 공연도 준비돼 있다.
한편 전시 관람을 마치면 전시 티켓으로 연남방앗간에서 로컬브랜드의 음료를 맛볼 수 있다. 한쪽에서는 로컬브랜드 제품 일부를 보거나 구매할 수 있다. 전시를 둘러본 관람객의 전시 경험은 로컬브랜드를 떠올리며 지역에 방문해 그들이 만든 문화를 직접 피부로 느끼는 데까지 이어질 것이다. 오래도록 지역과 사람을 곱씹게 하는 것, 그들이 활동하는 장소가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을 만들어 다음 시대로 이어질까 고민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전시의 매력이 아닐까.
카페 브랜드 가배도가 오는 7월 31일까지 시청점에서 카로우 셰지아크 사진전 ‘아마도, 여기’를 진행한다. 이번 전시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년’이라는 생애시기를 조명하는 16점의 사진을 소개한다.
이 전시는 앞서 작년 11월 서울 성수동에서 단독 진행된 바 있다. 카로우 셰지아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양로시설에서 자원봉사자로 5년간 요가를 가르치며 수강생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키웠다. 1.5평의 단칸방을 배경으로 우연히 찍게 된 최고령자 수강생의 사진을 시작으로 입소자들의 초상 사진 연작 ‘아마도, 여기’가 탄생했다. 전시를 주최한 ‘턱괴는여자들’ 팀에 따르면 그의 사진에서는 어느 장소에서든 생생하게 살아있는 노인들의 개성과 다양성 그리고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 사진 연작은 과거와 현재, 젊은이와 노인, 그리고 다국적의 사람들이 교차하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공간 가배도 시청점에서 선보인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멀게만 느껴지던 ‘노년’이라는 낯섦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자세한 전시 스토리는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건물 3층에 상주해있는 ‘턱괴는여자들’ 팀을 통해 들을 수 있다.
한편, 기획은 사회의 밝은 사각지대를 책과 전시로 조명하는 콘텐츠 기획사 toh works의 ‘턱괴는여자들’ 팀이 맡았다. 해당 기획사는 한국이 2025년 초고령 국가 진입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세대 간 생애 경험의 격차를 좁히지 못해 생기는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문화적으로 개선하고자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노인을 생산성이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는 가치를 지닌 존재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전시 기간에 노년을 주제로 자녀와 부모가 함께하는 참여형 워크숍 행사 또한 진행될 예정이다. 서로의 주체성과 나이 듦, 돌봄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송근영 턱괴는여자들 공동대표는 “단순히 시장 논리에 따라 유입된 상품과 콘텐츠가 아니라 진정성 있고 다양한 책과 전시, 행사를 통해 어르신들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언제부터인가 불필요한 물건이나 일을 줄여 단순한 생활 방식을 택하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함으로써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건데, 막상 집 안을 둘러보면 뭐 하나 쉽게 버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가장 좋은 것 딱 두 개만 남기고 다 버리세요!”라는 정리수납 전문가의 말에 물건 정리를 하겠노라 다짐한 김말녀(65세, 가명) 씨. 우선 오래돼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버리고 가장 좋은 걸 꺼내려고 수납장을 열었다가 ‘어머!’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온갖 종류의 프라이팬이 14개나 나왔다. 사은품으로 받아서, 누가 줘서, 홈쇼핑에서 세일해서 등 온갖 이유로 들여온 것들이 어느새 이렇게 쌓여 있었던 것.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또 뭘 샀느냐’는 남편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신발장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프라이팬 하나가 더 있었다. 우스갯소리 아닌가 싶겠지만 실화다. 게다가 이건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라고? 지금 당장 부엌으로 가 찬장을 열어보자. ‘○○은행’ 로고가 크게 자리 잡은 컵과 ‘○○카페’ 로고가 적힌 텀블러가 몇 개나 나오는지 말이다.
“모든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
김민주 한국청소직업전문학원 이사, 이지영 새삶 대표에게 ‘왜 우리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느냐’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내가 사는 집에 있는 물건이지만 남을 생각한 이유가 붙어 있다는 뜻이다. 대개는 이런 이유다. ‘아들이 사준 비싼 가방’,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한 만년필’, ‘결혼 기념으로 산 와인 잔’, ‘딸 결혼하면 줄 그릇’ 같은.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서, 자녀에게 주려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억하려고 등 ‘나’가 아닌 다른 이를 기준으로 가치를 두는 물건들이다. 그렇다고 쓰임이 있는 건 아니기에 어딘가에 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과감히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아 조언한다. 나이 들수록 사람, 시간, 물건, 공간 등 정리할 게 많아진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시도해볼 수 있는 건 물건이다. 물건이 비워지면 공간도 정리된다. 공간은 나의 생활 습관이 남긴 흔적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공간을 비우면 삶도 정리된다. 기준은 ‘나’다.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공간의 쓰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 공간에서 나의 생활이 어떤지도 돌아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사람, 시간 등 내 인생도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미니멀 라이프의 장점이다.
비움에 앞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새 물건을 들이지 말라는 의미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필요한가를 알아가는 것이 미니멀 라이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비우는 과정을 통해 소유에 관한 자신만의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된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미니멀 라이프가 어려운 이들을 위한 실천 방법을 알아봤다.
1. 습관 점검하기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동선을 살펴보자. 하루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방도 있을 테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는 서랍장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비싼 옷을 사도 손이 자주 가지 않으면 옷장 한켠에 자리만 차지하는 것처럼 자주 사용하는 컵, 자주 앉는 소파 자리, 자주 입는 옷 등을 보며 꼭 필요한 것의 기준을 세운다. 그러려면 집 안에 뭐가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내가 자주 쓰는 것들이 무엇인지, 저 물건은 저 자리에 얼마나 놓여 있었는지 관찰해보자.
생활 습관을 바꿈으로써 자연스럽게 정리를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식탁 위를 보자. 각티슈, 건강보조제, 볼펜, 안경, 식물 등 무언가가 반드시 놓여 있을 것이다. 모두 다 치워보자. 항상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식탁을 보다 보면 물 마신 컵을 그곳에 놓지도, 먹다 남은 피자를 그대로 두지도 않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김민주 이사는 “짐 속에 파묻혀 생활하면 집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게 아니라 빼앗기게 된다”면서 “나이 들면 아플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집의 쾌적함을 유지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 주어진 공간에 만족하기
신발장을 열어보면 신발이 위아래로 서로 엉켜 있는 집이 많다. 그러고도 넘쳐서 현관에 줄지어 있다. 버림의 첫 시작은 나에게 주어진 공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발장이 열 칸이라면 신발도 열 켤레만 있어야 한다. 비좁은 공간을 어떻게든 활용해 수납의 묘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을 얼마나 쾌적하게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버려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버리는 게 너무 어렵다면 다음 두 가지를 우선 실행해보자. 이지영 대표는 딱 세 가지를 먼저 버려보라고 조언했다. 오래된 수건, 일회용품 용기, 화장품 샘플이다. 수납장 어딘가에 지금 쓰는 수건 개수만큼의 새 수건이 분명 있을 것이다. 재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쟁여둔 일회용품 용기도 과감하게 버리자. 찬장 속 주방 용기로 충분하다. 발뒤꿈치에라도 바르려고 놔두었던 유통기한 지난 샘플 역시 버리자. 소중한 나를 위해 좋은 것을 바르겠다는 마음으로. 김민주 이사는 하루에 딱 한 가지씩 30일 동안 매일 버려볼 것을 권유했다. 30년 넘게 모아둔 물건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는 없다. 휴대폰에 ‘버림의 행복’이라는 사진첩을 따로 만들어 버린 물건은 사진으로 찍어놓는다. 시간이 지나 사진첩을 보면 ‘우리 집에 이런 물건이 있었나?’ 싶을 것이다. 꼭 지켜야 할 점은 하루에 딱 한 개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30일은 볼펜류, 티셔츠류, 그릇류 등 하루에 한 종류를 모아 버린다. 이렇게 100일을 반복하면 어느새 집이 쾌적해졌음을 느낄 것이다.
3. 현재의 ‘나’ 생각하기
물건의 필요를 고민할 때는 ‘나’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나의 과거가 담긴 물건, 내 미래를 위해 비축해둔 물건을 너무 많이 쌓아둔다. 물건의 용도는 ‘쓰임’이라는 걸 잊지 말자.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다. 제일 좋은 것은 지금 써야 한다. 주의할 점은 다른 구성원의 기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민주 이사는 ‘내 기준을 절대 강요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가족의 물건은 해당 물건의 주인이 버릴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서로 다른 취미가 있다면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지영 대표는 “한 사람의 취향이 모든 공간을 지배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피규어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면 자리를 정해 그 공간에만 둘 수 있도록 한다. 자녀가 독립해 두 부부만 지낸다면 각 방을 자신의 공간으로 쓰는 것도 방법이다. 방의 쓰임을 꼭 침실, 옷방, 서재라는 식으로 나누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다. 이 대표는 “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건 비싼 물건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집이라는 공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들로 채우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도움말 김민주 한국청소직업전문학원 이사, ‘신박한 정리’ 이지영 새삶 대표
“물건을 정리하니 일상의 소중함이 보여요”
‘모델하우스 같다!’
김미희(61세) 씨의 집에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이다. 현관에 줄지어 있는 게 익숙한 신발도, 주방 아일랜드에 나와 있는 물건도,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물건도 없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는 사례자를 찾아온 것이지만, 이렇게 심플할 줄이야. 본래 취향이 심플한 사람을 찾아온 건 아닐까,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40년을 쉬지 않고 사업을 했어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정말 많았죠. 그때는 남을 많이 의식했던 것 같아요. 그릇도 진열해두었고, 술이 가득한 진열장도 있었죠. 또 집에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낼 수 없어 들려 보낼 선물들도 한가득 쌓아뒀어요.”
그 역시 물건으로 가득한 집에 살았더란 이야기다. 김미희 씨는 10년 전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했다. 당시 이사할 때만 해도 물건을 버리려니 마음속 갈등이 컸다고 한다. ‘비싼 물건이라서, 정이 들어서, 갖고 싶었으니까’ 등 갖은 이유가 맴돌았다고. 그러다 2년 전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결심하고 물건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상의 소중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어느 순간 물건들이 장소만 차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쓰지도 않는 물건인데 먼지가 쌓이니까 청소할 것도 많고요. 꼭 필요한 물건만 남기고 다 버렸어요. 집이 작아졌으니 거기에 맞게 가구도 정리하고요. 처음에는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웠는데, 집이 정리되니까 홀가분하더라고요. 이후에는 마음도 가벼워지고 인생이 심플해졌어요.”
무엇보다 자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다. 김 씨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돈 버는 기계처럼 희생만 하는 삶이었던 것 같다고 표현했다. 지금은 스스로 토닥여주면서 ‘그동안 열심히 잘 살았다’고 칭찬할 수 있게 됐다. 지나가는 꽃도 눈에 들어오고,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어르신을 돕는 오지랖(?)도 생겼다. 물건을 정리한 자리에 여유가 들어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소를 잘 못한다고 느낀 김 씨는 지난해 청소 학원을 다녔다. 청소를 배우고 나선 정리수납과 방역·소독까지 배워 자격증을 취득했다. 40년간 쉬지 않고 달렸으니 쉴 법도 한데, 이번에는 블루클린이라는 청소·방역 회사를 차리며 새로운 도전을 선언했다.
김미희 씨의 미니멀 라이프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많이 비웠는데도 아직 버리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옷이다.
“만 원짜리 티셔츠에 구멍이 나도 버리지 못하고 잠옷으로 입게 되고 그렇더라고요. 어떤 계기가 생기면 정리를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한번 비워보니 더 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인생 정리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가면서요. 이제 철드나 봅니다.(웃음)”
전주에서 진안으로 이어지는 소태정 고개 국도변에 아담한 카페가 있다. 외벽에 진분홍색을 입혀 로맨틱한 멋을 풍기는 가게다. 과하지 않게 잔잔한 인테리어로 개성을 돋운 내부는 봄 햇살 내려앉은 듯 상쾌하다. 통유리창 너머에선 연둣빛 숲이 서성거린다. 이 카페는 귀촌인 임진이(48, 카페 ‘비꽃’ 대표)가 폐허처럼 방치됐던 건물을 임대받아 재생했다. 셀프 리모델링으로 되살렸다. 미술을 전공한 그에겐 결혼 전 미술학원을 운영한 이력이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 흑백 모노톤으로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의 작품이다. 카페를 차린 건 4년 전이었다.
전주시에서 살았던 임진이는 2014년 이곳 산 많은 고원지구 진안군으로 귀촌했다. 그에겐 세 자녀가 있는데 초등학생이던 딸 둘의 아토피 치료를 위해 시골 생활에 입문했다. 아토피는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통과 불편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난치성 질환이다. 그러니 엄마로서 심정이 오죽했으랴. 해볼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러다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자유롭게 기르는 게 유력한 대안이라고 여겨 시골에 들어왔다.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내세워 귀촌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이는 밀어붙여 뜻을 이루었다. 남편은 전주에 머물러 하던 사업을 차질 없이 계속하고, 나머지 가족은 귀촌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은 것.
이렇게 주말부부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설고 고즈넉한 시골로 삶을 이동한다는 게,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시골살이에 쏟아붓는다는 게 쉬운 일인가. 그만큼 딸들의 아토피 치유에 대한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인가, 지성이면 감천인가, 마침내 아이들이 피부 건강을 회복했다.
“시골의 좋은 자연환경과 깨끗한 먹거리가 가져다준 성과였다.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이들은 바람직하게 성장했다. 매우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자랐으니까. 아이들이 시골 생활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의젓하게 성숙한 셈이다. 과외를 받지 않고도 학교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했으나 그마저 기우에 불과했다. 딸들이 자랑스럽다.”
아이들의 건강 회복을 계기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며 잘 정착했다. 초기 한때 힘에 부쳐 돌아갈 궁리도 했지만 아이들을 고려해 마음을 다잡았다.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이 한결 단단해지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귀농·귀촌인 대상으로 멘토 역할도 한다지?
“그렇다. 서서히 일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성과가 주어졌고, 자연스럽게 시골살이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처음엔 어려운 게 많았다. 전주 친구들이 이런 얘길 할 정도였다. ‘그것 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난 시골에 가지 않는 거야!’ 그랬던 친구들의 말이 언제부턴가 바뀌었다. ‘어! 나도 촌에서 살아볼까?’로.”(웃음)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
“귀촌 직후 집을 지으려다 실패한 경험을 꼽아야겠다. 주민과 진입로를 놓고 분쟁이 빚어져 결국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곤 주택을 임대해 사는 것으로 귀촌 생활을 시작했다. 집의 상태가 허술해 여름엔 몹시 더웠고, 겨울엔 몹시 추웠다. 그렇게 초기 4년을 이모저모 불편하게 살다 마을과 좀 떨어진 산 아래에 비로소 집을 지어 이사했다.”
진입로를 둘러싼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마찰은 하나의 풍속처럼 흔해졌다. 역귀농의 주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해법은 무엇이라 보나?
“희한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두 번째 집 역시 진입로 문제가 있어 아직까지 고충을 겪고 있다. 사전에 법적인 문제를 충분히 점검했지만, 저 멀찍이 있는 진입로 일부의 소유권을 가진 주민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진입로가 폭우에 망가져도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귀농·귀촌을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시골의 토지를 살 때 법적인 문제를 점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마을에 믿을 만한 지인 하나쯤 미리 만들어 해당 토지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함으로써 불운을 예방하라는 걸.”
원주민의 텃세가 두려워 귀농·귀촌을 주저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합리적인 판단일까?
“텃세로 곤욕을 치른 사례가 있을망정 그걸로 마을 인심 전체를 측정할 일은 아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난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을 실감하며 살았다. 서로 돕고 나누는 관계를 추구할 때 정착이 수월해진다.”
임진이는 아침 일찍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카페 앞 국도를 통해 전주로 출근하는 직장인 중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 같은 아침 간편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아서다. 운영은 순조로울까?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팬데믹이 들이닥쳐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았다. 주변 일대에 카페들이 급속히 늘어 경쟁도 심화됐다. 진안에서 생산되는 청정 농산물로 만든 음료와 간편식을 팔았지만 수요가 많지 않았다. 식재료의 원가 대비 마진도 기대치 이하였다.”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나?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아 다시 뛰고 있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 공간의 구색을 바꾸었다. 진안 홍삼이나 벨기에 와플이 들어가는 브런치 메뉴도 개발했다. 국도를 오가는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메뉴도 만들었다. 으쌰으쌰, 이제 새로 출발한다!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는 거다.(웃음) 좋은 반향이 있을 거라 예상한다.”
뜻밖에 얻은 벽화 그리기 직업
삶이 원래 그렇듯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질주를 했으나 돌아보면 우습게도 원래 자리 그대로다. 그렇다고 무슨 악마의 계략이 거기에 개입됐을 리 있으랴.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시련도 강을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다. 임진이는 부진했던 카페의 상황을 그렇게 긍정의 눈으로 읽어낸다. 사실 귀촌의 날들 속에서 그에게 닥쳐온 고통과 불편의 가짓수가 한둘에 그치지 않았단다. 그러나 그걸 위기가 아닌 충전의 기회로 간주해 허들을 넘어서길 거듭한 것 같다. 고생이 오히려 정신을 단련시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해준다는 걸 깨달으며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래 결과적으로 그의 귀촌 생활은 순항을 위주로 펼쳐졌다. 바야흐로 이젠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존재로 부상했다. 그럴 수 있게끔 부지런히 뛰었다.
“카페 일만 본업은 아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감을 갖는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가장 보람차고 즐거운 일은 마을 벽화 그리기다. 이건 재능기부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커졌다.”
마을 벽화를 그려 수익을 얻는가?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순히 봉사활동으로 그려준 마을 벽화가 맘에 든다며 행정 쪽에서 아예 사업을 위탁해주더라. 그래 주민들과 협업해 본격적으로 벽화 작업에 나섰다. 지금까지 진안군 관내 20여 개 마을에 100여 점의 벽화를 그렸다.”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해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신선한 얘기다.
“내가 미술을 전공했지만 누가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할 경우엔 뜯어말렸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 시골에 살면서 미술 관련 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발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그랬는데 직업적으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주어졌다. 보수는 많지 않지만 돈보다 값진 보람이 크다. 마을 벽화 역시 일종의 창작 행위이기 때문에 작품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다. 벽화를 완성한 뒤 밝고 깨끗하게 변한 마을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낀다.”
지역주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시골에서 잘 살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가 있다.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접받기보다 먼저 대접하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이웃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가령 고령층이 다수인 시골에선 꼭 필요한 민원조차 넣지 않는 걸 알고 내가 나섰다. 가로등이나 과속방지턱 설치에 관한 민원 신청을 해 해결하는 식으로.”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임진이에겐 동네 주민들이 붙여준 별명이 하나 있다. ‘민다리’라 불리는데 ‘민원의 다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관심 갖고 찾아보면 나에겐 물론 남에게도 좋은 일은 시골에서도 얼마든지 많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진안군 정책자문위원을 맡아 주민 편익에 관련한 의견 제시도 한다. 이렇게 생활상의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러자 도시에 살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열리지 않던 안목이 열리더란다. 아울러 소극적이었던 성격이 능동적으로 변했고.
“내가 참여하는 공공활동은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다. 소소한 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익에 관심 갖고 움직이다 보면 얻는 게 많다. 우선 인적 자산이 형성된다. 나 자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선한 사람이 아니건만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정말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 이런 감정은 도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시골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타고 돌아간다. 경제적인 면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귀촌 이후 남편의 사업 부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부를 누린 적도 있지만 졸지에 정반대 상황과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돈이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 아닌가? 낙심하진 않았다. 다만 귀촌 10년 중 절반 이상은 실로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이라는 한정된 조건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덕분에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 경제적인 면의 성공? 글쎄, 돈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삶에 더 큰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귀촌을 통해 비로소 삶의 진정성 있는 방향을 잡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산다는 건 복잡한 퍼즐 맞추기와 닮았지만 희로애락을 거쳐 마침내 완성으로 가는 드라마인가? 솔깃한 이야기에 즐거웠다.
임진이가 주는 귀촌·귀농 Tip
•땅을 사거나 집을 짓는 일을 서두르지 말자. 적어도 2년 정도 집을 임대해 살면서 마을의 물정을 익히고 풍토를 파악, 과연 나의 성향과 어울리는 동네인지 판단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땅을 구입할 때는 진입로에 따른 원주민과의 분쟁 소지가 없는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하자.
•시골에 가면 관의 많은 지원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산이다. 자립 의지를 가지고 뛰어들어야 한다.
•시골의 제도권 교육 환경은 오히려 도시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 승마, 골프, 사격까지 거의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차질이 생길까봐 우려해 시골 생활을 꺼려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은 시골의 자연환경 속에서 한결 듬직하게 성숙한다.
•재력에 의지한 과시적 처신은 금물이다. 원주민과 갈등을 빚고 외로운 처지에 몰리기 십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