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친 최정윤(46). 청순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예뻤던 것 같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음이 예뻤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정작 나는 연기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전성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최정윤의 행보가 주목된다.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캐릭터 때문인지 최정윤은 새침데기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 털털한 사람이다. 과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대해 “시기를 잘 타고났다”라면서 “일찍 데뷔해서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어디 가서 배우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은 프로필 사진 덕에 공익 광고에 출연하게 된 그는 당시로서 큰돈인 50만 원을 벌었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와 사진을 본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제의를 받아 배우의 삶을 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신인 시절 저는 겁이 좀 없었어요. 연기 욕심은커녕 연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도 무서운 게 없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부터 너무 연기 욕심을 부리고, 배우로서의 인정이나 성공이 간절했다면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모든 촬영 현장이 늘 재밌었고,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큰 욕심 없이 살았던 것이 제가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춘스타에서 ‘아침드라마 퀸’으로
데뷔 작품은 1996년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로 기록된다. 27년 차 배우인 최정윤은 대표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이내 “대표작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주시는 작품”이라면서 MBC 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영화 ‘라디오스타’(2006), SBS 드라마 ‘청담동 스캔들’(2014~2015)을 꼽았다.
최정윤은 “대중들이 ‘라디오스타’는 PD 역할로 잘 기억해준다. ‘청담동 스캔들’은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 대해서는 연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룬 8부작 드라마로, 최정윤은 양궁 선수 역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진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는 쫓기듯이 연기를 했다면, 그때는 본연의 나로서 진심을 다해 드라마를 찍었죠. 감독님부터 배우들, 현장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좋았어요. 만약 당일 예정된 분량대로 촬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라면서 서로 위로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배우들끼리 워낙 끈끈해서 이윤정 감독님의 차기작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때, 다 같이 현장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최정윤은 ‘청담동 스캔들’에 이어 2021년 ‘아모르 파티-사랑하라, 지금’(이하 ‘아모르 파티’)에 출연하면서 ‘아침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식어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모르 파티’를 끝으로 방송 3사 KBS·SBS·MBC의 아침드라마가 폐지됐기 때문. 최정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침드라마에 출연한 여주인공으로 남았고, 책임감을 통감했다.
더욱이 ‘아모르 파티’는 ‘청담동 스캔들’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작품으로 아쉬움을 더했다. 긴 공백 사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촬영 환경이 정말 좋아졌더라고요. 일정이 빠듯하지도 않고, 밤샐 일도 없어졌죠. 과거에는 밤새고 첫 신을 찍을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중년 배우 과도기 잘 넘겨야
호전된 제작 환경은 배우로 오랜 시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배우로서 역할이 달라질 때도 세월이 체감된다.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린 최정윤은 2013년 방송된 MBC 단막극 ‘소년, 소녀를 다시 만나다’를 시작으로 엄마 연기를 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제가 실제로도 엄마가 아니었어요.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어요. 엄마 연기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사를 번복해 출연했는데, 엄마 연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죠. 이제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아역 배우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뿐이에요.”
40대 중반의 최정윤은 현재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찬 그는 “지금 이 시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주로 착한 역할을 연기했는데,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을 통해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연기든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현재 중년 배우로서 시간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정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선배 배우들에게서 보았던 연륜과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청담동 스캔들’에 출연한 배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요. 반효정 선생님도 만나는데, 제가 선생님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고민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여요. 반효정 선생님을 포함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정말 큰 복이라고 느낍니다.”
딸 지우,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정윤은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의 슬하에는 2016년 태어난 딸 지우가 있다. 엄마를 꼭 빼닮은 지우는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훈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최정윤은 자신을 ‘적당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좋거나 나쁜 엄마의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저는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죠. 그런데 예의, 사회성 교육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성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요. 또 잘못한 게 있으면 혼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섭함을 느껴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저는 안 받아줘요.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으로 바쁠 때는 어머니와 피아노 선생님이 지우를 돌봐줬다. 피아노 선생님과 최정윤의 관계는 참 특별하다.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4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친구, 조금 어린 친구.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관계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40년 우정의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연예계 절친으로 유명한 배우 박진희에 대해 최정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정윤과 박진희는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최정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고, 의리가 넘쳤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박)진희가 자기가 무조건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한 거예요. 진희는 정말 일하면서 얻은 보물이에요.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진희, 피아노 선생님처럼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해요. 가족이라는 게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정윤에게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크든 작든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 덕분일 것.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에는 당연히 꽃길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해요. 지금 삶도 좋은 점이 많은데 왜 과거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을 반복하나요? 과거를 후회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아무런 발전도 없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재밌게 살아요!”
경기도 안산이냐, 서울 마포냐, 단원 김홍도의 고향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증이 없어 미지수다. 그런데 단원이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가 있다. 안산은 18세기 조선 예원(藝苑)의 총수였던 표암 강세황이 30여 년을 머문 고장이다. 표암의 시문집 ‘표암유고’에 단원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가령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찍이 맺어진 표암과 단원의 사제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단원을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 일컬은 이도 표암이었다. 정황이 이러니 안산 사람들은 뿌듯하다. 안산의 풍토와 풍정이 표암의 가르침과 함께 단원을 거목으로 길러냈다고 보기에. 안산시가 김홍도미술관을 만든 연유가 완연하다.
김홍도미술관은 안산시 외곽 노적봉 기슭에 있다. 야산 치맛자락을 거머쥔 형국이다. 노적봉 산책과 미술 관람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지다. 건물은 모두 네 동.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으로 구성했다. 너른 뜰엔 조각 작품도 많다. 전체적으로 독특할 것 없는 구색이지만 미술 작품으로 얼마든지 활갯짓할 수 있는 공간이라 훤칠하다. 뒷산의 수목들은 제법 울창해 조연으로 손색없다. 산기(山氣)를 싣고 스쳐가는 청명한 바람과, 연달아 착륙하는 햇살의 대열도 도회를 벗어난 관람객에겐 반가운 작품이다. 미술관 입구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단원콘텐츠관으로 들어간다. 이렇다 할 꾸밈과 치레 없이 간결한 전시관이다. 김홍도미술관의 핵심 공간이다. 단원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기획한 콘텐츠 전시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전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안산에 있었던 단원이라는 이름의 숲과 서호(西湖) 바다를 모티브로 한 전람회로, 단원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보게 하는 전시회다. 어물 장수나 고기잡이 풍속을 그린 단원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단원이 교유한 표암, 심사정, 최북의 작품도 있다. 단원의 예술 정신을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도 등장해 볼거리를 확대했다. 안산의 고지도를 전시한 건 관객을 과거의 안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일 테다.
흥미롭기론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다. 아집도? 아집은 아회(雅會)와 같은 말로 묵객들이 모여 시와 술을 나누며 노니는 야유회다. 그걸 그린 게 아집도다. 즉 ‘균와’라는 산골짝에 화가 여럿이 모여 소풍을 즐기는 광경을 그린 게 ‘균와아집도’다. 때는 1763년 4월. 봇물처럼 터진 춘색이 영롱해 어지러웠으리라. 봄꽃 필 때 묵객은 유난한 ‘심쿵’으로 설렌다. 산야에서 작당해 꽃과 더불어 한잔 아니 마실 수 없다. 모인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림 상단 오른편에 쓰인 발문에 다 나온다. 보자.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이다. 그 곁엔 어린 김덕형이 있다. 담뱃대를 물고 앉은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차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며, 퉁소를 부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다.’
등장인물 모두 안산과 연이 깊었더란다. 다들 일세를 풍미한 거장이다. ‘균와아집도’는 조선 후기 묵객들의 놀이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원이 퉁소를 불고, 강세황이 거문고를 탔으니 고급스러운 피크닉이다.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그린 합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이채로워 우뚝하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허필이 쓴 발문의 귀띔에 따르면 그림의 전체 구도를 잡은 건 표암이다. 능란한 필치로 휘늘어진 솔과 옹골찬 바위를 그려 담황색을 입힌 건 심사정과 최북이다. 당시 19세였던 단원은 가는 붓을 날렵한 속필로 휘저어 인물들을 묘사했다. 10대 청년이던 단원이 대가들과 어울려 붓을 적셨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단원의 예술적 기량이 일찍부터 수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전시장에 나온 작품 전부가 영인본이라는 점이다. 애초 단원의 진본 작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으나 빗나갔다. 단원의 현존하는 그림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 작품을 빼더라도 300점이 넘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이 다수를 소장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신선의 무리를 그린 ‘군선도 병풍’(群仙圖 屛風, 국보 제139호)을 소장했다. 안산시도 7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김홍도미술관이 2년마다 펼치는 진본 기획전을 통해 공개된다. 2021년엔 ‘표암과 단원’전을 열어 진본들을 전시했다. 진본 가운데 ‘공원춘효도’는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풍속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려
단원 김홍도는 조선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이름을 들날린 화가다. 그의 돛을 밀어준 건 표암이었다. 인생의 눈을 트이게 하고 예술의 길을 열어준 이가 표암이었다. 단원을 궁중 화가로 천거한 이도 표암인데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표암이 괜한 선심을 베풀었으랴. 그는 일찌감치 단원의 됨됨이와 천재성을 발견했다. 단원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용을 보았다. 표암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써 단원을 극찬했다.
‘단원의 화풍은 새로워 개벽을 이룰 정도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저마다 부르짖었다. 그림을 구하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단원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나는 모자라 단원에 대해 아는 게 드물다. 그럼에도 김홍도미술관을 관람하며 그의 아우라가 허공에 감도는 것 같은 환(幻)을 느낀다. 전시작이 많지 않아 단원이 항해한 예술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나온 기분을 맛보긴 어렵다. 다만 단원의 옷깃에 살랑대는 실바람 한 오라기를 움켜쥔 느낌이다. 생각나는 건 언젠가 화첩에서 본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불러일으킨 쓸쓸한 정취다.
주상관매라, 배 위에서 매화를 보다! 단원은 매화 마니아였다. 매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매화를 가슴에 담았으니 생애엔 매향이 난분분? 단원은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주상관매도’의 매화는 어이 아득한 허공에 떠 우련한가. 백일몽처럼,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렸다. 천길 벼랑에 걸린 매화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엔 강물이 있지만, 뿌연 안개처럼 경계 없이 흐릿하게 그려 천하가 아득하다. 강기슭에 멈춘 조각배에 비스듬히 앉아 매화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엔 우수가 실려 있다. 초연하다기보다 쓸쓸한 기색이 여실하다. 노경이란 외로워 매화마저 무상감을 돋운다는 걸까? 이 그림은 단원의 노년기 작품이다. 이상을 좇는 열정보다 허무의 성분이 커진 시절에 그렸다.
말년의 단원은 곤궁했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됐다. 가세가 기울어 고달프게 살았다. 단원의 종신(終身)은 미스터리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전해오는 게 없다. 작품이야 불멸! 그가 그림 안에 가둔 자연과 인간사의 총량은 장강(長江)과 맞먹는다.
대중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전으로 전진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와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 둘은 사제지간이었다. 마티스는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읽어 지지와 조언을 했고, 피카소는 마티스를 평생 따랐다.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이 조선의 커플 역시 사제지간으로, 예술적 동지로, 지음(知音)으로 평생 교유했다.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의 얘기는 이렇다.
“복 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 하는데, 단원이 표암 강세황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까.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단원은 흔히 표암에게 먼저 보여줬고, 표암은 강평을 해주었다.”
단원이 표암으로부터 화풍의 영향도 받았나?
“단원이 그 누군가에게 화풍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는 걸로 알려졌다. 표암은 정신적 스승으로서 단원을 북돋았던 셈이다. 단원은 천재였다. 게다가 못 말릴 노력파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거다.”
단원은 풍속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사회의식도 호감을 산다.
“안산시가 소장한 단원의 진본 7점 중 하나인 ‘공원춘효도’에도 사회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제도에 만연한 부정행위를 풍자한 그림이니까. 단원의 풍속화는 30대 초반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단원의 작품 스펙트럼은 훨씬 드넓다.”
표암과 더불어 정조 임금 역시 막강한 스폰서 역할을 함으로써 단원의 순항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단원이 표암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됐다고 보더라. 그런데 단원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정조가 대단한 후원을 했다.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단원이 주장하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궁중 화가로서 단원은 일종의 공공그림을 그렸으나 퇴근 뒤엔 자기 그림을 그렸다. 단원의 집 문간엔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단원의 성향을 알 만한 일화가 있다면?
“풍류에도 일가견 있는 단원이었다. 특히 매화 사랑이 지극했다. 언젠가 한번은 단원의 그림을 원하는 이가 찾아와 작품값으로 3000전을 내놓고 갔다. 단원은 그중 2000전으로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는 술을 사 친구들과 매화를 즐기며 대작했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이름의 술자리였다. 결국 남은 돈은 200전뿐이었는데, 이걸로 쌀과 장작을 사 집에 들였으나 하루 땟거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인(中人,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급) 출신인 단원의 신분 상승 욕구도 정진의 발판이었던 것 같은데.
“선비가 되고 싶은 마음, 선비정신의 정상에 선 삶을 갈망하며 끝없이 노력했다. 말년에 그린 ‘포의풍류도’에 이와 같은 지향이 드러난다. 문방사우와 악기 등 갖가지 기물과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린 작품이다.”
‘포의풍류도’에는 이런 화제를 붙였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만,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가나 읊조리며 살고자 한다.’ 단원의 유토피아가 구현된 그림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년은 고단했다.
“정조가 별세하면서 단원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들의 월사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그러나 선비다운 태도는 끝까지 지니고 살았다. 이게 단원의 빛나는 정신이지 않을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현장에서 배우는 과정이 이야기가 된다. 특별한 일을 평범하게 만드는 데서 큰 동력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을 더욱 들여다본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들의 특별한 일상을 담거나, 평범한 그들의 일상에 이벤트를 넣는다. ‘K-로컬’(Korean Local)을 콘텐츠에 담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지만, 그는 자신을 ‘동네 소년’이라고 소개한다.
이영락(50) 국장은 2001년 MBC충북에 입사했다.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 라디오 PD, 뉴스데스크 앵커를 거쳐 뉴미디어팀장, 미래전략국장을 역임하다 올해부터는 신성장전략국의 장을 맡게 됐다. 직장 생활 20년 차. 이쯤 되면 질릴 만도 한데, 그는 아직도 일이 즐겁다 말한다. 오늘의 경험이 당장은 쓰이지 않더라도 푸티지(Footage, 미완성 필름)로 남아 언젠가 연결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매 순간이 재미있다. 올해 그의 목표는 “‘평범’으로 ‘비범’하고 패기 있게”다.
‘시절의 인연’ 떡국씨
이 국장은 ‘이용자의 즐거움이 끊김 없이 연결되는 경험’을 콘텐츠에 녹이기 위해 늘 고민한다. 그가 기획하고 감독한 글로벌 농촌 커뮤니티 콘텐츠 ‘촌스런 떡국씨’는 귀농한 20대 청년의 경험으로 시작해 세계 각국의 농부 이야기로 확장됐다. 영상으로 시작했지만, AR 지도로 이어지고, 모바일 농사 게임으로 연결된다. 게임에서 키운 농산물은 마동리에서 실제로 교환할 수 있다. 영상 하나만 보고 그치는 게 아니라, 모양을 바꿔 콘텐츠 경험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촌스런 떡국씨’의 주인공은 청주 문의면 마동리로 귀농한 청년농부 안재은 씨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라디오 프로그램 PD로 있을 때다. 섭외를 하고 보니 그녀가 가진 이야기가 너무 좋아 ‘농사는 처음이지’라는 고정 코너를 만들어 3년째 이어가고 있다. 이 국장은 안재은 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가까이서 풀어보고 싶었다. 유튜브 ‘촌스런 떡국씨’의 탄생이다.
‘촌스런’(촌’s Run, Chon is run·learn)은 안재은 씨가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 이름이다. ‘떡국씨’는 마동리에서 어르신들이 그녀를 부르는 별명이다. 귀농하고 가장 먼저 떡국을 끓여 돌리면서, 동네에서 떡국이라 불리게 됐다고. ‘촌스런 떡국씨’는 안재은 씨의 회사 이름과 별명을 따 만들었다. 시즌1은 ‘시골 오지마을에 들어와 여성 청년 이장이 돼보겠다는 꿈을 꾸는 과정’을 ‘정말 이뤄질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으로 바라본 콘텐츠다.
“그냥 농촌에 들어와 사는 청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 영상을 보고 제2의 안떡국씨가 나오도록 하자는 게 저희 제작진의 목표였어요. 그런데 영상을 보고 정말 귀촌한 ‘조떡국씨’가 나왔죠.(웃음)”
그렇게 시즌2로 이어진 ‘촌스런 떡국씨’는 시즌1에 나왔던 마을 주민 신해인 할머니, 김경순 아지매, 해밀당 최고야 씨가 개인의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후위기’가 자주 등장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농촌의 먹고사니즘’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세계가 공감했다. K-농업의 글로벌화를 꿈꾸며 시즌3에서는 ‘글로벌 청년농부’를 다룬다.
“저에게 안재은 씨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자 뮤즈(Muses)예요. 저 혼자라면 다큐 한 편은 기획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여러 편으로 만드는 건 어렵거든요. 뉴미디어를 시작한 지 5년 정도 되었는데, 기존 방송과는 다른 톤&매너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재은 씨 같은 크리에이터 한 명이 있으면, 그가 성장하고 경험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그 과정 자체가 콘텐츠가 되죠. 그런 안재은 씨의 도전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커요.”
‘K-경험’을 수출하다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하는 이 국장의 무대는 세계다. 특히 ‘K-경험’의 글로벌 콘텐츠화 가능성을 봤다. 그래서 기획하고 있는 다음 콘텐츠는 ‘브레이브하트(Brave Heart)50’이다. ‘청년 창업가의 존버(끝까지 막연하게 버티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 인사이트’가 주제다.
“저와 같은 월급쟁이들은 누구나 ‘언젠가 회사 때려치우고 나만의 창업을 할 거야’라는 마음을 품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용기가 없어서, 준비된 총알이 없어서, 미래를 확신할 수 없어서 등 여러 이유로 품고만 있죠. 그렇다면 창업이라는 도전을 한 사람들은 얼마나 용감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집을 사든 창업을 하든 1억 원을 대출받는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부담을 갖게 되잖아요. 창업가들은 그 두근거리는 순간을 매일매일 겪겠죠. ‘첫 대출 1억을 받던 날’이라는 공통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담아보려고 해요. 너도 겪고 나도 겪은 공통의 경험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인사이트가 될 테니까요.”
한 사람을 소개하는 영상을 비틀어본 기획이다. 매월 1만 명의 자영업자가 폐업을 하고 그만큼의 창업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지만 저마다의 인사이트는 달라진다. 외국 사람이 영어로 한 TED 강의 영상을 한국어 자막으로 보면서 우리가 동기부여를 받는 것처럼, ‘K-경험’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도, 알래스카에도, 파리에도 창업가는 있으니까.
그가 글로벌 콘텐츠의 가능성을 본 건 ‘할매레시피’(Grandma’s Recipe)라는 다큐를 제작하면서다. ‘할매레시피’는 마동리 최고령인 91세 신해인 할머니의 떡볶이 레시피를, 마을에 귀촌·귀농한 세 청년이 밀키트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다큐다. 이 작품으로 암스테르담 쇼트필름 페스티벌 어워드에서 수상을 했다.
“충북이라는 지역 창업가의 경험을 처음 해외로 수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어요. 그리고 다큐에 참여한 분들에게 선물이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죠. 그저 자신의 일을 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상을 받은 셈이잖아요. 나의 경험이 세상에 보편타당한 지식처럼 전달된다면 더 기쁘겠죠? 그래서 ‘브레이브하트50’은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와 함께 이들의 인사이트를 모아 학문적인 데이터로 만들어보려고 해요.”
개인의 경험은 특별하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도 특별하다. 특별한 일을 누구나 공감하고 도전할 수 있는 보통의 일로 만드는 것. 이 국장의 기획 동력이다.
가치를 더하는 협업
기획이 콘텐츠로 만들어질 때는 언제나 협업이 필요하다. 그에게 협업이란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막 헤어진 날, 술 한잔에 이야기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프로젝트에 더욱 진심이다. 텐트에 비유하자면 사람이 폴대가 되어준다. 연결을 많이 할수록 더 큰 텐트를 칠 수 있다. 그는 이를 가리켜 ‘가치를 더하는 협업’이라고 했다.
“같은 장르인데 그 안에 약간의 변주를 주는 사람을 봐요. 안재은 씨 같은 지역 창업가들이 주로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요즘은 로컬크리에이터라고도 불리죠. 그냥 내 삶을 배경으로 하는데, 거기에 가치를 더하는 거예요. 지역에 존재하는 기존의 틀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는데, 거기에 내 창호지를 얹어서 조금 색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거죠. 이를테면 농사짓는 방법이 엄청 드라마틱하지는 않잖아요. 로컬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나만의 색을 입히는 것. 어떤 결핍을 그저 자신의 역량만큼 채워보려는 거죠.”
한 마을의 결핍, 농촌의 문제, 기후와 같은 글로벌 이슈 등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문제가 있긴 한데, 해볼 만해’라는 자세로 바라본다. 그런 개인의 노력과 경험을 콘텐츠화하는 게 이 국장의 실험이다.
‘바이5남매’ 시리즈도 개인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세종시에 정부청사가 생기고 여러 산업기관이 자리 잡으면서 서울을 오가는 직장인이 늘었다. 수도권에 가족이 살고 있는데, 직장이 오송이어서 내려온 사람들은 자취 생활을 한다. 친구들도 다 수도권에 있다 보니 일이 끝나면 놀거리가 없다. 그래서 ‘화요조찬운동회’를 만들었다. 매주 화요일 아침 뒷산을 오르고 내려와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고 헤어지는 모임이다. 그때 누군가 ‘K-바이오’가 더 크려면 융복합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신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뭉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바이오 산업의 연결 생태계를 콘텐츠로 풀어낸 것이 ‘바이5남매’다. 바이오라는 산업 이야기를 기술 수혜자가 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콘셉트로,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설명해준다. 이 과정에서 산업계의 연결이 일어났다.
이렇게 그의 기획은 제작하는 사람, 등장인물로 참여하는 사람, 영상을 보는 사람 모두에게 가치가 더해지는 콘텐츠로 완성된다.
“그냥 말로만 가치를 더한다는 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새로운 걸 보여주는 과정이에요.”
‘동네 소년’ 이영락
노트북을 열자 수많은 기획 파일이 쏟아졌다. 실현된 것도, 실현 중인 것도, 실현되지 못한 것도 있다. 주로 일상에서 콘텐츠를 발견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날 기획이 뚝 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실현하지 못한 아이템들도 잘 두었다가 적시에 꺼내본다. 경험이 쌓이면서 기획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예산이 부족하거나 기술이 없어 콘텐츠로 만들지 못한 10년 전의 기획이 기술 발전으로 구체화되는 때가 온다. ‘보이는 라디오’처럼.
“처음 ‘보이는 라디오’를 우리 MBC충북에서도 해보자고 제안했을 때는 가지고 있는 장비나 예산으로는 어려웠어요. 그런데 2년 후에 다시 보니 소프트웨어가 프리웨어로 풀려 있고, 마침 회사에 안 쓰는 장비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서울 방송국처럼 있어 보이지는 않더라도 구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지금 안 된다고 앞으로도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엎어진 기획서라고 의미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죠.”
그는 일상의 결핍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여전히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지만, 그라고 매 순간 목표를 가지고 달리기만 한 건 아니다. 어느 날은 전파로 날아가 버리는 방송 일에 헛헛함을 느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주말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느꼈을 때는 ‘동네 소년단’을 만들었다. 40~50대 어른들이 그냥 주말마다 동네를 뛰는 모임이다. 그렇지만 국가대표처럼 전지훈련까지 가면서 진심을 다한다. 이렇게 쌓이는 하루하루가 언젠가 기획을 할 때 툭 튀어나올 걸 알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를 보며 아내는 ‘동네 소년 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동네 소년’이 됐다.
“아직도 배울 게 많아 일이 즐겁다고 말하지만, 저도 똑같이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요. 고단한 인생이라고 느낄 때도 있죠. 그렇지만 오늘 나의 하루가 내일의 푸티지가 되어줄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아직은 해보고 싶은 마음이 좀 더 큽니다.”
판소리계에는 유명한 왕가네가 있다. 그 중심에는 왕기철(59) 명창이 있다. 왕기철 명창의 동생 왕기석 명창뿐만 아니라 딸 왕윤정도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왕기철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판소리꾼이자 위대한 아버지, 그리고 스승인 왕기철 명창. 이 찬란한 5월에 그를 특히 만나고 싶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안에는 ‘왕 카페’가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다름 아닌 교장실이다. 바리스타는 왕기철 교장이다. 왕 명창은 교장실을 찾는 선생님들, 손님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서 대접한다.
“요즘 시대에 교장이라 권위를 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상대방이 인정해줄 때 나의 권위가 서는 거죠. 저는 우리 선생님들하고도 수평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 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하면서 다가서려고 하죠. 그렇다고 해서 약하기만 한 교장은 아니랍니다. 하하.”
왕기철 명창은 1985년 제1회 동아국악콩쿠르 일반부 판소리 부문에서 금상 없는 은상을 받은 이후 전주대사습놀이, KBS국악대상을 휩쓴 ‘당대의 명창’이다. 소리꾼이라는 삶을 이어온 지 50여 년인데, 예술가의 까탈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것은 행복한 기운이었다.
“소리계에서 그래도 이름 좀 있는 사람이 교장으로 있으니까 학생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공연 단체에도 오래 있었잖아요. 멘토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거죠. ‘너희 세대는 나보다 훨씬 더 길이 열려 있다’고 응원해주고, 좋은 기운을 심어주려고 합니다. 교장으로서 제 목표는 다른 것이 없어요. 우리 학생들이 꿈을 꾸고 이루고 행복해하는 학교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스승 박귀희 명창 만나 소리꾼 돼
왕기철 명창의 판소리 오디션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졌다. 왕 명창의 형인 故왕기창은 서울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왕기창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인 향사 박귀희 명창이 남자 제자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8남매 중 일곱째인 동생 왕기철 명창에게 전갈을 보냈다.
당시 왕기철 명창은 전라북도 정읍의 시골에 사는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그저 형의 부름에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어 신이 났다. 박귀희 명창은 왕 명창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고, 그는 ‘진도아리랑’을 불렀다.
“형님이 잠깐 가르쳐준 대로 소리를 했는데, 뭐 잘했겠어요? 그런데 향사 박귀희 선생님께서 제 목소리를 듣고 마음에 든다고 바로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아마 저의 여러 가지를 살펴보셨겠죠. 시골 촌놈에 옷도 남루하고 뭐 볼 것도 없는 저였는데, 선생님은 정말 제 인생의 은인이시죠.”
그렇게 왕기철 명창은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박귀희 명창은 현재 왕기철 명창이 교장으로 있는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설립자다. 왕 명창은 국립전통예술고에 다니는 한편, 박귀희 선생의 학원에서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웠다. 멀고도 어려운 소리꾼의 길, 왕기철 명창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가야금과 소리를 함께 한다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가야금이 되면 소리가 안 되고, 소리가 되면 가야금이 안 되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때 학원은 종로 3가와 창덕궁 사이에 있었는데 그 길을 다니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죠. 소리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속상해서… 노력해도 잘 안 되니까 속상해서 울었던 것 같아요.”
왕기철 명창은 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진학했다. 당시 한양대학교에서 판소리 전공자를 뽑은 것은 처음이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왕 명창은 ‘판소리 학사 1호’라는 영예로운 타이틀도 얻었다. 그는 “옛날에는 소리 하시는 분들은 배움이 많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석사, 박사까지 하는 분들도 많다. 소리꾼들이 학문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왕기철 명창은 소리꾼으로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01년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던 때라고 밝혔다. 판소리 전공자들은 대통령상을 받아야 명창의 반열에 올라선다고 생각한다. 왕 명창은 1999년, 2000년, 2001년까지 3수 만에 장원을 받은 터라 값진 노력의 결실이라고 느꼈다. 더불어 동생 왕기석 명창도 2005년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왕기철 명창은 “형제 명창은 우리가 1호”라고 자랑하며 웃었다.
교육자 그리고 무대
왕기철 명창은 대학교 졸업 후 1985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은 좋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응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지 못한 것. 국립창극단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서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창극’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는 곳이다.
더욱이 동생인 왕기석 명창은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활약을 펼쳤다. 현재 그는 국립민속국악원의 원장이다. 무대에서 소리를 하는 아우가 형은 부럽기만 했다. 왕기철 명창은 무대에 대해 타는 목마름을 느꼈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다.
“동생의 무대를 보고 나면 그날 밤 내내 무대 생각이 맴도는 거예요.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은 거죠. 무대에 서야 살아 있다고 느끼니까요. 교직에 있으면 안정적으로 평생 일할 수 있어요.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니까 아내도 아이들도 반대를 하더라고요. 동생도 ‘형은 교육계에 계시는 게 어때’ 그랬는데, 저는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과감히 그만뒀죠.”
결국 왕기철 명창은 13년 2개월 만에 교단을 떠났다. 39세로 늦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왕 명창의 실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단원 시험을 보고 1999년 국립창극단 단원에 합격했다.
왕기철 명창은 당시를 회상하며 “소리는 괜찮게 내는 것 같은데, 창극은 안 해봤기 때문에 연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생 왕기석 원장이 롤모델이었다고 밝혔다. 왕 원장은 17세 최연소 나이에 단원이 되어 약 40년 동안 몸담았다.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동생과 같이 캐스팅되면 동생이 발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 이런 것을 계속 보고 배웠어요. 특히 1999년 완판 창극 ‘심청전’을 했는데, 저도 왕기석 원장도 심봉사 역을 연기했죠. 그리고 우리 딸 윤정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린 심청 역에 오디션을 보고 붙어서 저와 같이 연기했어요.”
왕기철 명창은 14년 8개월 동안 국립창극단에 있다가 2013년 다시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2017년에 16대 교장이 됐다. 임기가 끝난 후 재임용에 도전해 지난해 17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2025년까지다. 박귀희 명창이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는데, 그 길을 이어가는 왕 명창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다르다”고 소감을 전했다.
딸과 함께 걷는 국악의 길
왕기철 명창의 딸 왕윤정(32)은 앞서 말했듯이 아빠를 따라 소리꾼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에는 15대1의 경쟁률을 뚫고 국립창극단 정단원이 됐다. 왕 명창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왕윤정이 특히 노래를 잘 부르고 끼가 있었다고. 다른 자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왕윤정은 왕기철의 딸이기 때문에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잘해도 본전’이었다는 그녀는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사춘기 때도 치열하게 열심히 했죠.”
왕윤정은 왕기철 명창에 대해 “아빠와는 친구 같은 사이이긴 한데, 선생님으로서는 엄격하셨다”고 말했다. 왕 명창은 “딸에게 기대도 컸고, 조심스럽기도 했다”면서 “딸이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딸의 마음을 헤아리는 위로의 말이었다.
“딸이 저보다 더 실력이 나은 예술가가 됐으면 좋겠어요. 딸이 국립창극단에 들어가고 공연하는 걸 봤는데 소리의 추임새나 테크닉적인 부분도 괜찮고 이제 들을 만한 실력을 갖춘 것 같아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고쳐주기도 하고요. 최근에 딸이 ‘리어’라는 작품을 했어요. 무용학원에 보냈어서 그런지 춤도 잘 추고, 무대에서 잘 보이는 예술 소리꾼이 됐더라고요. 그리고 딸이 저보다 성격도 좋답니다.”
지난 3월, 왕기철 명창은 20년 만에 국립극장에서 흥부가 완창 무대를 선보였다. 표가 보름 전에 매진될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기에 그의 부담감 또한 컸다. 왕 명창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아쉬운 무대를 남기고 말았다.
“공연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소리가 확 바뀌었더라고요. 진단 키트 검사를 해보니 음성이어서 공연을 했죠. 그런데 갈수록 컨디션이 최악이었어요. 내 목소리가 이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너무 속상했죠. 다음 날 다시 검사를 했더니 양성이었어요. 얼마나 속상하고 아쉬웠는지 몰라요.”
왕기철 명창은 인생의 마지막 완창이 흥부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너무 크게 남아 다시 한번 무대에 서고 싶단다. 딸 왕윤정은 “저는 아빠가 건강만 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고 잘하시는 소리를 오랫동안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완창 무대를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에요. 두 시간 이상 대사도 다 외워야 하고,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 목 관리도 해야 하죠. 이제 완창 무대는 안 하려고 했지만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우리 가족이 함께 예술 무대를 꾸미는 거예요. 왕기석 원장과 그의 딸 왕시연도 소리를 하거든요. 넷이 ‘왕가네 소리판’, ‘왕가네 소리 이야기’라고 해서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왕기철 명창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소리를 계속할 것 같다”면서 삶을 즐기면서 살 것이라고 했다. 왕 명창은 이전에 성대결절로 수술을 한 적이 있고 현재 98% 회복했다고 한다. 아직 2%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거의 다 되찾았으니 행복하다”면서 웃었다. 그의 긍정적인 생각이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틀림없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는 것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60세에 은퇴했다고 해서 다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면서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동안은 가족들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셨잖아요. 저도 그러려고 하거든요. 저는 무엇이든지 즐기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가 소리를 하면 행복한 무대를 만드는 거고, 그럼으로써 내 소리를 듣는 관객들도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에너지를 얻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려져 혼자 남아 있네.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괜찮다 말해줄게. 다 잘 될 거라고. 넌 빛날 거라고. 넌 나에게 소중하다고. 모두 끝난 것 같은 날에 내 목소릴 기억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일상적 언어로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는 이 노래는 가수 커피소년의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다. 커피소년은 201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디 가수인데, 위 곡은 그의 대표곡 중 하나다. 특히 이 노래는 삶에 지친 청춘들의 맘을 달래는 곡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드라마와 라디오 등에서 자주 BGM으로 등장한다. 곡을 쓴 커피소년은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말이지만 가사를 통해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노래는 듣는 이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전달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위로나 격려보다 음악이 더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가수인 나 역시 내 노래를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참 고맙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선 걱정이 앞선다. 진심 어린 위로를 나눌 이가 적은 것은 아닌지,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쌓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래에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다.
물론 위로는 쉽지 않다. 좋은 일을 축하하는 것은 익숙하고 쉽지만, 나쁜 일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참 복잡하다.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나 부담을 주거나, 좋은 의도와 달리 본인이 상처받을 수도 있다. 고심해서 상대방의 상황에 적절한 위로가 되는 언행을 한다고 해도 원했던 결과를 얻기는 힘들고, 얻는다 해도 시간이 걸린다.
위로는 단순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따뜻하고 친절한 감정을 통해서 상대의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는 행위다. 어떤 감정 상태로 향하는 논리적 행위가 아니라, 견딜 힘이 더 커졌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정적 행위다. 이를 통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위로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로받은 이가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위로의 첫 단계는 능동적인 청취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기 전에 울며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로의 첫 단계는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고, 이해받고 있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고통의 수렁에 빠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잠시나마 마음을 기댈 어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보다 비언어적 표현과 행동이 더 중요하다. 친밀감, 따뜻함, 신뢰감 등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눈을 마주 보고 다정한 표정을 보여주며 신체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중요하다. 들어주며 상황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단계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솔직하고 간결한 말로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한 상황을 정리해서 들려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말하면 된다.
시니어는 갑작스러운 은퇴와 부모의 죽음, 배우자와의 사별 등 말 못 할 아픔이 많다. 삶에서 축적된 상처의 상흔도 저마다 다르고, 원하는 위로 방식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의 위로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럴 때는 섣부른 조언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곁에 머물면서 네 편이라는 연결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라는 엉거주춤한 도움보다는 가끔씩 안부와 마음의 안녕을 묻거나, 상대가 혼자 하기 힘든 일을 먼저 나서서 도와주면 좋다. 홀로 살아가는 인생에 내 편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있을까? 매몰찬 현실에서 뜨끈한 손난로처럼 필요한 것이 위로가 아닐까?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 커피소년커피소년이란 이름은 짝사랑하던 여인이 좋아하던 아메리카노에서 모티프를 가져왔고,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커피소년’이라 작명했다. 실제로 첫 번째 곡의 제목은 ‘아메리카노에게’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결혼하면서 가수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KBS 2FM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 등 라디오와 방송에 그의 노래가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된다. 소년과 같은 목소리와 단순하지만 따뜻한 노랫말 덕분에 삶에 지친 2030세대에게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커피소년은 이제 40대 중년으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특유의 감성을 잃지 않고 활동 중이다.
2030세대는 모든 게 빠르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한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세대 차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20대 자녀, 혹은 회사의 막내 직원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카톡)이 MZ세대 사이에 메신저 기능을 넘어 자기표현의 수단, 온라인 커뮤니티 등 다양한 놀잇거리로 활용되고 있다. ‘멀티 프로필’로 숨겨둔 개성을 표현하는가 하면, ‘오픈채팅’으로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과 관계를 맺는 이들도 있다. 카톡을 단순 안부 확인용으로 사용했던 시니어에게는 신선한 광경이다.
프로필 하나로 무한변신!
요즘은 ‘부캐’(부캐릭터)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유재석은 트로트 가수 ‘유산슬’, 음악 프로듀서 ‘유야호’ 등 매회 모습을 달리하며 인기를 끌고, 개그우먼 김신영은 ‘둘째이모 김다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MZ세대는 카톡으로 자신의 부캐를 드러내고 있다. ‘멀티 프로필’을 통해서다.
멀티 프로필은 카톡의 프로필을 대화 상대별로 다르게 보여주는 기능이다. 이를테면 비즈니스로 만난 그룹에는 업무용 사진을, 가족이나 친구를 상대로는 사적인 사진을 올려놓는 것이다. 프로필을 만든 다음 공개할 상대를 친구 목록에서 직접 지정하는 방식으로, 앱 내 ‘카카오톡 지갑’ 서비스에 가입해야 이용이 가능하다.
흥미로운 점은 MZ세대 다수가 멀티 프로필을 ‘덕질’(팬 활동)의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멀티 프로필’을 검색하면 “사회적 체면과 덕질을 모두 챙길 수 있는 엄청난 기능”이라는 한 누리꾼의 유쾌한 평이 나온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인 간호사 A씨(26)도 그 의견에 공감하며 “그동안은 억지로 팬심을 숨겼는데, 가까운 사람끼리만 공유하니 취미 생활이 한층 즐거워졌다”고 말했다. 그녀의 일반 프로필에는 단정한 증명사진이 올라와 있는 반면, 덕질용 프로필에는 BTS 사진이 가득 차 있다. 팬 활동을 별난 취미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감춰야 했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멀티 프로필로 표출하는 셈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은 누구나 변신에 대한 욕망이 있다. 형체가 아닌 이념이 될 수도 있고, 상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A에게는 유능하고 지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반면, B 앞에서는 유쾌한 면모를 드러내고 싶은 심리도 비슷한 이치다”라며 “카톡의 멀티 프로필 기능은 이런 변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라고 말했다.
카톡에도 만남의 광장이?
MZ세대에게 카톡은 새 친구를 사귀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하다. ‘온라인 커뮤니티’ 하면 시니어는 주로 포털 사이트 기반의 카페를 떠올리지만, MZ세대는 ‘오픈채팅’ 기능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채팅’ 탭에 접속한 뒤 화면 우측 상단 돋보기 옆 말풍선 아이콘을 누르고, ‘오픈채팅’ 버튼을 터치해 접속할 수 있다.
오픈채팅은 ‘단톡방’(단체 카톡방)의 공개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관심사나 나이대가 비슷한 익명의 이용자들이 모여 주제별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 3월 전국 17개 시·도 만 15~40세 남녀 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MZ세대가 가장 많이 참여하는 오픈채팅의 주제는 일상, 경제·금융, 게임, 자기계발 순이었다.
대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비스지만, 대화가 금지된 독특한 방도 있다. 일명 ‘고독한 ○○방’이다. 빈칸에는 유명인의 이름이 들어간다. 오픈채팅 안에서 자리 잡은 재미있는 팬덤 문화로, 팬들끼리 모여 소통 없이 특정 연예인의 사진만 공유하는 공간이다. 글자를 써서 보내면 가차 없이 퇴장당한다.
도통 익숙하지 않은 소통 방식에 MZ세대만을 위한 기능인가 싶지만, 시니어 전용 모임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픈채팅 검색창에 ‘5060’, ‘신중년’ 등의 키워드를 입력하면 관련 채팅방 목록이 나타난다. 친목 도모부터 자기계발 모임, 취미 생활 공유 등 주제도 꽤 다양하다. 은퇴 후 연락하는 사람이 줄어 적적함을 느꼈다면, 다시 활력을 찾을 기회. 노란 말풍선 안에서만큼은 나이를 잊고 요즘 애들처럼 놀아보는 건 어떨까.
이모티콘도 구독 시대
메신저의 재미를 더해주는 또 다른 기능은 이모티콘이다. 표정과 행동을 읽지 못하는 채팅방에서 생생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 활용도가 높지만, 단품당 2500~3750원 선이라 무한정으로 구매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제는 월 구독료(3900원)를 내면 15만 개의 이모티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채팅방에 입력한 텍스트를 토대로 이모티콘이 자동 추천돼 눈 아프게 찾을 필요도 없다. 갖고 싶은 이모티콘이 많아 고민이었다면, 커피 한 잔 값으로 귀여운 ‘소확행’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가입 방법 카톡 ‘더보기’ 탭 터치→‘이모티콘’ 터치→화면 좌측 상단 줄 세 개 그림 터치→‘이모티콘 플러스 자세히 보기’ 터치→‘카카오톡 지갑’ 가입 후 구독 신청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요즘 언론보도 기사를 읽다 보면 하품이 나거나 기가 막힌다. 7월 8일(온라인 기준) 모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8일 ‘다시는 아파트 양도차익으로 터무니없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중략) 이 대표는 ‘당에서 대책을 만들고 있는데 가능한 7월에 할 수 있는 조치를 이번 국회에서 하고(하략)’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나? 다시는 사라지게 하겠다? 가능한도 가능한 한이라고 써야 맞다. 이 대표가 원래 이렇게 말을 한 걸까? 아니면 기자에게 후레자식이라고 욕할 걸 미리 알고 미워서 망신 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쓴 걸까? 호감이 가는 취재원의 말은 전달도 잘해주던데.
더 기가 막히는 기사도 있다. 8월 12일(이것도 온라인 기준) 모 일보의 기사에 이런 제목이 있었다. . 육아를 키워? 눈이 의심스러워 죽 읽어보니 기사는 “남편 없이 육아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후 1개월 된 딸을 살해한 뒤 3년간 오피스텔에 방치한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로 시작된다. 육아를 키운다는 말은 취재기자가 쓴 게 아니라 제목을 잘못 붙인 거였다.
育(기를 육)兒(아이 아)라는 한자를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렇게 써도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너무 바빠서 무심결에? 잘못된 건 사후에라도 부장 이상 데스크들이 고쳐야 할 텐데 왜 그대로 두고 있을까? 그들도 너무 바빠서 데스크도 보지 않고 기자에게 기사를 내보내게 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의미상 중복되는 말, 앞뒤가 바뀐 말이 의외로 많이 쓰이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잘못된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경우, 혀가 꼬이거나 음운상 착각으로 인해 웃기는 말이 만들어지는 경우 등이다. 단어나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고 혀끝에서 뱅뱅 도는 설단현상(舌端現象) 때문에 엉뚱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어구전철(語句轉綴), 이른바 애너그램(Anagram)과 관계있는 말장난이다. 이 중 어구전철은 1)장난→난장, 모로코→코모로, 방배역→배방역, 문전박대→대박전문 식의 음절 단위, 2)상주→장수, 김치→기침, 소년→손녀, 출동→충돌 식의 음운 단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먼저 중복 사례부터 살펴보자. 독자들을 위해 억지로 글을 하나 만들었다. “나는 아들 출산 낳고 나서 육아를 키우느라 무지 고생했어. 남편은 1도 도와주지 않았어. 초등학교 입학 넣기 전부터 조기교육 가르치느라 돈도 많이 들었지. 태권도 차고, 체르니 치고, 바둑도 놓고 했던 아이는 초등학교 등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공부 배우고, 필기 쓰고, 작문 짓고, 더러는 백일장도 쓰고, 암산 외우고, 미술 그리고, 음악은 부르고 불고 치고 타고 켜고, 방과 후엔 서예도 쓰고 그러느라 힘들어 했지. 나는 나름대로 식사 먹기, 청소 쓸기, 복장 입기, 인사 숙이기, 용변 누기 이런 예절을 일일이 가르쳤어. 근데 이 녀석이 지 애비 닮아서 공부는 뒷전이고 축구 차고 농구 넣고 야구 때리고 그러는 것만 좋아하는 거야. 유도 메치고 복싱 싸우고 펜싱 찌르고 검도 휘두르고 아이스하키 치는 것까지 하러들면 어쩔 뻔했어? 다치기 쉽고 돈도 많이 들잖아. 역도 드는 건 다행히 지가 안 하겠다고 하데. 고등학교 졸업 나온 뒤에는 이발도 이상하게 깎고 친구들과 음주 마시고 가무 추고 걸핏하면 외박 자고 하더니 면허도 없는 놈이 아버지 차를 몰래 운전 몰다가 가로수 충돌 받는 사고를 냈지 뭐야. 그날도 음주 마셔서 도주 놓다가 경찰에 잡히자 폭행 때리기까지 했어. 이야기 더 하까? 이쯤만 해도 알 만하지?”
이번엔 어구전철 차례. 나는 걸핏하면 물서가 진란하다는 말을 한다. 요즘 나라의 물서가 진란하고, 여당과 국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부동산정책도 엉망인데 도대체 이렇게 물서가 진란해서야 되겠느냐고 목청을 높이면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공감해준다. 한자로 바꿔봐도 말이 된다. 물서(物序)가 진란(盡亂)하다… 어디가 어때?
어떤 젊은이가 SNS에 이런 글을 썼다. “삶은 달걀 글자가 너무 이상해서 닮은 살걀이 맞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이게 다 멸린 말치랑 짚고 긴한 커피 때문임.”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응수했다. 며칠 동안 연구했는지 몰라도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 거의 천재다. “노인코래방, 번둥천개, 껍던 씸, 알르레기, 노란계른자, 동사봉아리, 치자피즈, 곱은 졸목, 통치꽁조림, 야치참채죽, 수없는 씨박, 치킨타올, 모자리나, 우뎅오동, 메장외모리, 중고딘 알라서점, 기능재부, 맥걸리와 막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유세할 때 충남 보령 대천을 보천 대령이라고 한 적 있는데, 나도 그런 거 좀 추가해볼까. 키친마니아, 오장향육, 사우나차이나 모닝토스트(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해문한석사전, 고와 개양이, 소 치는 양년, 소 치는 북년, 잔후소리원, 발따보, 하장외드, 역사의 아이노리, 친공정소기, 닥터와 왈츠만, 민가긴가, 덤벙엄벙, 남씨사정기, 임산배수, 출신임산, 케이데어, 갤프골러리….
그런데, 이렇게 헷갈리게 만들어도 사람들은 금세 알아듣는다. 인간은 모든 글자를 하나씩 읽는 게 아니라 단어 하나를 한눈에 전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래 글은 오래전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예문인데, 정작 케임브리지대에서는 이런 연구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여간 읽어보자.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지는는 중하요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이 중하다요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라을지도 당신은 아무 문제없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하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그러니 어쩌라구? 설마 엉터리 말이나 문장을 만들어 퍼뜨려도 괜찮다는 건 아니겠지? 문학 작품이든 보도 문장이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 글이 어법에 맞는지, 중복은 없는지, 적확한 단어를 쓴 건지 늘 따져보고 점검해야 한다. 갈수록 이상한 말이 늘어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대중의 올바른 어문생활에 기여한다는 힘과 꾸망을 가져야지. 아닌가. 훔과 끠망을 가져야 되나? 아무래도 힘과 꾸망이 더 낫겠다. 이쪽이 더 알아듣기 쉬우니까.
그런데 늉눔은 무슨 말이지? 난 서울 중부경찰서 출입기자이던 1981년 여름 기자실 칠판에 이렇게 써놓고 목욕탕에 가곤 했다. 어구전철 중에는 이렇게 글자를 뒤집어 전혀 다른 말로 만드는 것도 있다. 곰을 뒤집으면 문(문재인 대통령을 말하는 게 아님)이 되고, 논문을 뒤집으면 곰국이 된다. 말장난이 심해서 죄송합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벗들아, 우리는 복된 자다.”
서울 보성고(普成高) 60회의 ‘고교 졸업 50년, 인생 70년’ 행사 초대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싱그럽고 풋풋한 소년으로 처음 사귄 이래 반세기 걸어온 길, 꾸려온 삶은 서로 달라도 나라와 사회를 위해 살리라던 청운의 그 꿈은 어제처럼 여전히 젊고 새롭다.” 말이 그럴듯하지만, 첫 문장은 이은상 ‘가고파’ 후편 가사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를 내가 베껴서 우려먹은 거다.
이 ‘복된 자’들은 6월 1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칠순잔치를 겸한 기념행사를 하고, 18~19일 1박 2일로 강릉 속초 하조대 화진포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10년 전 졸업 40년 때인 2010년에는 남자들끼리 2박 3일 여행을 했는데, 이번엔 아내들이 동행했다.
모내기가 갓 시작됐던 그때보다 1주일 늦은 이번 여행에서는 제법 자란 모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10년 전 여행에서 나는 ‘항아리를 보았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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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뭘 보고 느꼈던가. 10년 전에는 앉으면 마시고 버스에 타면 노래를 불러 ‘유행가 모르는 게 없고 3절까지 다 부르는 녀석’이라는 말을 듣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번엔 시종 점잖고 조신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다들 늙어 기가 빠진 탓도 있지만 마나님들이 계시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지.
1박 2일 여행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일정을 한 달 늦추었는데도 상황이 나아진 건 없었다. 오히려 코로나가 더 번지는 바람에 여행 취소자가 많아 떠나기 전날까지 인원 변동이 심했다. 손자 손녀를 봐야 할 사람이 여행 갔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어떡하냐, 당신은 기저질환잔데 가긴 어딜 가, 이래서 가느냐 안 가느냐로 부부싸움을 하고, 호텔 행사에 마누라 몰래 참석한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총 58명이 버스 세 대에 나누어 타고 잘 다녀왔다.
그런데 여행 다니며 살펴보니 다리를 절거나 질질 끄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배는 볼록 나온 채 어깨는 구부정하거나 몸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차에 타거나 오르는 행동거지가 답답할 만큼 느린 경우도 있었다. 풍을 맞아 얼굴이 일그러진 녀석, 신장을 이식해 술을 한 잔도 못 마시는 녀석, 어머니처럼 늙어 보이는 아내를 손잡아 이끌고 다니는 녀석….
몸에 새겨진 세월의 풍화작용을 보는 게 안타깝고 서글펐지만, 그래도 코로나 와중에 즐겁게 떠들고 웃으며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이게 복된 게 아니고 뭐냐. 아예 수학여행을 취소한 학교도 많더라.
첫날 강릉의 호텔에서 저녁을 먹은 뒤 좀 거닐어보려고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하늘이 잔뜩 흐린 데다 반소매 차림으로 다니기가 어려울 만큼 날씨가 추웠다. 그래서 바닷가를 걷는 걸 포기하고 나와 아내, 다른 친구 둘까지 네 명이 택시를 타고 안목항의 커피거리를 찾아갔다. 제법 큰 집의 2층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는 갑자기 10년 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주 변영로의 명저 ‘명정(酩酊) 40년’ 식 표현을 빌리면 ‘진무류’(珍無類)의 그날 대화는 이런 식으로 전개됐다.
-10년 후에도 우리가 졸업 60년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때는 팔순인데.
-해야지. 몇 명이나 올지 모르지만, 그때는 애들이 어린 자네가 위원장을 하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잖아(이래서 딸 둘이 아직 중2인 친구가 만장일치로 위원장이 됐다).
-좋아, 그러면 궁리를 좀 해보자. 우선 참가자들한테서 돈을 거두면 안 돼. 그때 그 나이에 누가 돈을 내겠냐? 오히려 돈을 벌어야지. 〇〇상조의 협찬을 받아야 돼. 낄낄낄.
-왜 하필 〇〇상조여?
-거기가 젤 커. 큰 데하고 해야 일이 편하고 남는 것도 있지. 낄낄낄.
-그러면 상조회사하고만 하지 말고 리무진 회사, 목발, 휠체어, 지팡이 이런 제조회사들도 끌어들여야겠다. 여행 중에 누가 죽거나 쓰러지면 신속 정확하게 모든 걸 처리해야 되잖아. 낄낄낄.
-의사 간호사도 동행해야 돼. 앰뷸런스도 대기시키고. 낄낄낄.
-행사 중엔 제약회사한테 약을 팔 수 있게 하자. 우리가 몇 퍼센트나 먹을지 미리 정하고. 낄낄낄.
-〇〇〇이 그때는 뭘 하고 있을까? 대통령 되고 싶어 안달인 사람인데, 그 사람 영상메시지도 받자고. 거기다 앞뒤로 광고도 좀 붙이고. 낄낄낄.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대화에는 모두 ‘낄낄낄’이 후렴으로 붙는다. 무슨 말이든 우리가 혼자만 웃은 경우는 없다. 그러니 이하 ‘낄낄낄’ 표기가 없더라도 그걸 꼭 붙여서 읽기 바란다.)
-그러면 캠프를 하나 차리자. 체계적으로, 합리적으로, 단합적으로, 민주적으로 일을 해야지.
-캠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우리가 먹는 게 줄어들잖아. 수익이 확실히 보장돼야 하니까 우리 넷이서만 하자. 돈을 딱 4등분하는 거야.
-고교 졸업 60년, 인생 80년 행사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까?
-신문·방송 보도는 니가 책임져. 노인들이 이런 수준의 기획력 창의력 추진력 단결력과 사업마인드를 갖고 있다니 다들 놀라 자빠질 거야.
-광고 섭외가 들어올지도 몰라. 그럴 때 반갑다고 덜컥 헐값에 계약하면 안 돼. 이런 것도 미리 생각해둬야 해.
-행사 치르고 나면 노인들의 자문, 상담 신청이 국내외에서 빗발칠걸? 컨설팅은 원래 니 전문이잖아? 잘해봐.
이른바 2030프로젝트, ‘일견 과대망상적 10년 대계’의 얼개는 이렇게 빈틈없이 짜였다. 이제 남은 일은 재미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마구마구 더 보태고, 그때까지 건강을 잘 챙겨 몸과 마음이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 사업 추진에 지장이 없게 하는 것이다. 2시간 여 동안 웃고 떠들다 보니 오붓하게 데이트를 하러 온 다른 좌석의 젊은이들에게 좀 미안했다. 저 사람들도 10년 후를 생각하려나.
유리문으로 내다본 바다에는 이미 어둠의 검은 장막이 짙게 깔려 저 멀리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만 바람에 희미하게 굴절되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문을 나서니 파도와 풍랑은 더욱 거세지고, 강풍에 모자가 날아갈 것 같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낄낄거리며 10년 후를 이야기했다. 낄낄낄, 낄낄낄.
지난 4월 엄청난 산불로 피해가 컸던 강원도 고성, 속초, 강릉이 서서히 회복돼가고 있다. 길 옆 소나무는 여전히 검게 그을은 모습이지만 땅엔 초록색 풀이 새롭게 자라고 있다.
다시 살아나고 있는 그 곳, 고성의 깊은 시골길에 멋진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바우지움’ 조각미술관이다.
강원도의 산 속에 나지막한 높이로, 그러나 5000평 규모의 넉넉한 면적에 앉아있다. 바우지움이란 이름은 바위의 강원도 방언인 ‘바우’와 ‘뮤지엄’의 합성어다. 치과의사 안정모씨와 그의 아내인 조각가 김명숙 관장이 설립했다. 산과 하늘이 미술관에 제대로 어울리는 배경 역할을 하고있다.
먼저 근현대 미술 조각관을 들어가 보자. 유리벽으로 밖이 훤히 보인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각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볼 수 있다. 창 밖엔 '물의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밖으로 나오면 '돌의 정원'이 보이고 그 매끄럽지 않은 돌담 앞에 야외 전시가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소나무 정원'의 나무 그늘에서 잠깐 쉴 수 있다.
'잔디 정원'의 거친 담벼락에 조화를 이룬 작품들, 이 담벼락에 설악산 울산바위의 높새바람과 동해의 해풍이 만나 자연과 건축과 조각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김인철 건축가가 설계했다. 그 앞에 오롯하게 놓인 작품들,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 자리 잡은 작품들이 바람을 맞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받고 있다.
실내와 야외의 작품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는 '테라코타 정원'이 있다. 길 옆에 쪼그리고 앉은 소년의 모습이나 나무 아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요한 모습의 작품들이 정겹다. 담 아래엔 아직도 수국이 탐스럽고 옥수수밭 옆엔 해바라기가 8월의 하늘을 향해 있다.
나가는 길에 기획전시실과 아트숍이 있고 그 옆으로 카페 바우가 있다. 입장료에 커피 한잔이 포함되었기에 냉방이 잘 된 카페에 앉아 땀을 식히며 편안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돌과 바람과 물이 조화로운 바우지움 조각미술관, 매일 달라지는 자연이 예술작품을 날마다 달리 보이게 하는 곳.
고성에 가면 설악과 동해의 바람이 넘나드는 바우지움 미술관이 있다.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 온천 3길 37
*영업시간 화~일 10:00~18:00
레트로는 단순히 오래된, 옛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50년째 장사를 이어온 노포와 1970년대 인테리어로 새로 문을 연 식당. 전자는 전통이라 말하고, 후자가 ‘레트로’라 하겠다. 이러한 레트로 콘셉트의 가게들은 중장년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고 있다. 자녀와 함께 데이트 즐기기 좋은 레트로 핫 플레이스를 소개한다.
◇ 익선동 한옥섬을 한눈에 ‘낙원장’
옹기종기 기와지붕 아래 레트로풍 맛집과 아틀리에가 즐비한 익선동 거리. 부티크호텔 ‘낙원장’에서는 골목을 가득 메운 한옥 150채의 전경을 한눈에 담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지어졌던 ‘그린필드’라는 낡은 여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매입, 지역 아티스트와 협업해 탄생시킨 공간이다. 클래식한 건물 외관과 달리 세련되고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가 레트로 플레이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객실은 일반뷰와 한옥뷰, 프리미엄 한옥뷰 총 3단계로 나뉜다. 그중 LP플레이어가 있는 한옥뷰 룸을 선택하면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선동 풍경과 함께 LP음악까지 만끽할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5 숙박비 평일(일~목) 7만~9만 원, 주말(금~토) 9만~11만 원
◇ 아날로그 선율에 빠지다 ‘바이닐 앤 플라스틱’
현대카드가 운영하는 ‘바이닐 앤 플라스틱(VINYL&PLASTIC)’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사라져가는 음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음악체험형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와 나무 소재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입구 왼편으로는 턴테이블이 놓인 긴 탁자가 눈에 띈다. 이곳에서 바이닐 앤 플라스틱이 선정한 200장의 LP명반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서는 클래식, 재즈&소울,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LP음반 9000여 장과 다양한 음향장비를 전시, 판매한다. 2층은 1만6000장에 달하는 CD와 더불어 음악감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페 공간으로 꾸며져 여유를 즐기기 좋다.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이용시간 화~토요일 12:00~21:00, 일요일 12:00~18:00 (현대카드 미소지자도 입장 가능)
◇ 한국·태국의 퓨전 레트로 맛집 ‘동남아’
태국요리전문점 ‘동남아’의 입구.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검푸른색 철문을 활짝 열면 레드벨벳 커튼과 이국적인 샹들리에가 맞이한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이 오묘한 식당은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한 실내는 태국 연회장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로, 동남아 여행에서의 아쉬운 마지막 밤을 표현했단다. 메인 홀 외에 공간을 다양하게 나누었는데, 룸마다 강렬한 색감의 독특한 벽지가 눈길을 끈다. 특히 대중탕 욕조(?)를 연상케 하는 앞마당의 테이블은 겨울철 식사를 즐기기엔 다소 불편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인기 메뉴인 꽃게와 커리로 맛을 낸 ‘뿌빳 퐁 커리’와 태국식 볶음 쌀국수 ‘팟타이’ 등 현지 셰프가 요리한 다양한 오리지널 로컬 푸드를 맛볼 수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23-6 이용시간 매일 12:00~22:00, 브레이크타임 15:30~17:00(주말 제외)
◇ 도도한 모던걸의 화려한 외출 ‘경성의복’
익선동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개화기풍의 원피스와 정장을 입은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궁 일대에서 한복 체험을 하듯, 이곳에서는 개화기 의상을 대여해 레트로 감성을 한껏 즐기는 것이 트렌드. ‘경성의복’에는 다양한 디자인의 복고 의상과 셀프 촬영을 위한 포토존이 구비돼 있다. 고풍스러운 원피스와 장신구로 치장하고 모던걸이 되어 거리를 누벼보는 것 어떨까?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30길 56 2층 이용시간 매일 10:00~20:00
가격 의상대여(의상·장신구·모자·기타소품) 3시간 3만 원/6시간 4만 원/하루 4만5000원/1박2일 5만 원
◇ 딸과 데이트하는 날엔 ‘경양식 1920’
1980년대 전후, 가족외식 하면 떠오르는 경양식집을 테마로 한 레스토랑 ‘경양식 1920’. 레트로 거리로 유명해진 인선동 골목에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와 함께 올 수 있는 외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테리어를 꾸미고 추억의 메뉴들을 불러왔다. 24시간 숙성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부담이 없다. 실제 방문한 고객들을 살펴봐도 젊은 연인부터 엄마와 딸, 노부부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른다. 사이드 메뉴로는 1980년대 경양식집에서 맛보던 수프와 멕시칸 사라다(샐러드)를 선보인다. 특별한 날에는 하우스 와인 한 잔 곁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17-30 이용시간 평일 12:00~22:00, 주말 11:00~22: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주말 제외)
◇ 뒹굴뒹굴 잠시 쉬어가는 ‘만홧가게’
과거 만화잡지 ‘챔프(CHAMP)’를 비롯해 ‘우주소년 아톰’, ‘스타워즈’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책과 그래픽노블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평일에 방문한다면 런치스페셜(라면·즉석밥·계란·김치/단무지+만화 1시간, 6000원)로 이용해보자.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28길 33-7 영업시간 11:00~23:00 가격 1인 기준 10분당 500원, 좌석(주말 및 공휴일) 2000원
동년기자가 직접 다녀온 레트로 핫 플레이스
◇ 최원국 동년기자/ 돌고 도는 레트로 액티비티 ‘자이언트 롤러장’
부천의 레트로 명소 ‘자이언트 롤러장’. 방문한 날은 휴일이라 인파가 붐벼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30여 년 전 부천의 ‘자이언트 롤러장’이 유명했는데, 장소는 다르지만 복고풍에 맞춰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부천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이내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30년 전 롤러를 타던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옛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아이들과 많이 찾는 듯하다. 롤러장의 경쾌한 분위기를 담당하는 DJ가 있어 음악에 맞춰 롤러를 타다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곳곳에 간식을 판매하는 매점을 이용하면 시장기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시절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은 시니어라면 친구 또는 아이들과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위치 경기도 부천시 장말로 376 지하 1층 1일 입장료 성인 1만1000원, 유아~고등학생 9000원 영업시간 평일 12:00~22:00(무제한 이용), 주말 10:00~22:00(3시간 이용)
◇ 윤영애 동년기자/ 시간이 머무는 곳, 우유 카페 ‘희다’
논현동 주택가 골목에 하얀 3층집, 카페 희다. 낮은 계단을 테라스 삼아 나무 소반에 왕골방석이 놓인 테이블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언젠가 분명 와본 듯 너무나 친숙한 느낌!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 냄새도 나는 듯하다. 높다란 1인용 앤티크 의자, 사각밥상 테이블, 양은 개다리소반, 자개문양 화장대와 거울, 낡은 찬장과 괘종시계까지. 곳곳을 돌아보며 낡은 물건들에게 속말로 인사를 건넨다. ‘어디 있다가 여기로 왔니?’ 메뉴를 보니 우유가 주다. 기본 우유에 커피, 홍차, 말차, 페퍼민트, 미숫가루까지 6가지다. 사이드 메뉴로 옥춘당 때때사탕과 큼직한 레몬 마들렌도 있다.
프런트의 젊은이에게 주문을 하고 대표님이 누구시냐 물으니 본인이란다. 긴 생머리가 멋진 나두리 대표 역시 작년 7월 오픈 이래 가장 연로한 리포터가 왔다며 빙긋 웃는다. 주고객은 복고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이고, 우연히 동반한 부모님이 친구들과 다시 와서 단골이 된단다. 대부분의 물건은 나 대표 할머니가 집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때문에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다”는 고객의 평이 가장 맘에 든단다.
느슨한 공간에서 익숙한 것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이 콘셉트였다는 나 대표의 의도는 조용한 음악과 소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갓 씌운 백열등, 도자기, 왕골바구니, 낡은 찬장 속 오래된 커피 잔과 유리컵까지 모든 것이 눈에 익어 정겹다.
‘희다’는 기쁘다[喜]와 많다[多], 즉 기쁨이 넘치는 곳 혹은 우유의 하얀 빛깔을 뜻한다. 오래됨과 잘 어울리는 가게 이름이다. 카페 한편에 ‘검다’라는 글자가 쓰인 화분을 가리키니, 개업 후 “희다인지, 검다인지 카페는 잘돼가냐?” 했다던 아버님의 조크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창밖 현관 옆에는 ‘웃다’라는 이름의 화분도 있다. 잠시 후 혼자 들어온 고객은 동네 주민이라며 아이를 기다리다 들렀는데 편안하고 조용하다면서 레트로풍의 독특한 인테리어에 흡족해한다.
바람 불고 서늘한 가을의 어느 날, 논현동 도심 한복판에서 어릴 적 시골집을 본 듯하다. 500㎖의 대용량 미숫가루우유는 인심만큼 넉넉하다. 남겨온 때때사탕을 구순 노모에게 드리니 어디서 이런 사탕을 사왔냐며 좋아라 하신다. 시간이 멈춘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다녀온 것처럼 왠지 마음이 따시다.
위치 서울시 서초구 주흥15길 16-4층 영업시간 매일 11:00~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