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을 대하는 자세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마음을 좀 바꿔보았거든요. 윗집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짜증만 낼 게 아니라 차라리 그 시간에 도서관 가서 시원한 바람 쐬며 밀린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 집에서 좀 쉴라치면 매번 위층 아이들 콩콩콩 쿵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는 청취자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분노가 폭발해 인터폰을 누르고 쳐들어갈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놨던 독서 목록도 챙기고 이참에 은퇴 이후 설계도 할 겸 주택관리사와 노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마음을 탁 달리 먹었더니 퇴근하는 발걸음이 전처럼 무겁지 않고 한결 가벼워졌다고 고백합니다.
화살의 방향과 성격 유형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나 고통을 당할 때 이웃집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눈앞에 닥친 불행과 갈등을 오로지 자신을 탓하며 자책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살의 방향을 외부로 겨눌수록 점점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에너지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팔방으로 퍼집니다. 비난과 원망과 책임 전가라는 독화살을 누구에게 쏠지 그 궁리로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온통 뾰족한 가시를 두른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까요. 그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향할 때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입니다. 화살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인지 살펴볼까요.
‘남 탓 형’과 ‘내 탓 형’ 인간
자신에게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남 탓을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은 그 사람 탓이야’, ‘내가 마마보이가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엄마 탓이지’ 이런 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탓합니다. 탓할 사람이 없으면 친구를 탓하거나, 직장 상사를 탓하거나, 아니면 길에서 부딪혔거나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조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식, 배우자 등 가까운 사람부터 탓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경우를 ‘남 탓 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매사에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정작 자기는 멀쩡합니다.
“나 걔랑 헤어졌어. 내가 찼지. 애가 좀 사이코야. 베풀 줄도 모르고. 수십 번 만나도 밥은커녕 커피 한잔을 안 사더라고, 인색하기 그지없어. 아 시원하다.”
연애가 깨졌어도 상대방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을 내립니다. 자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굳게 믿는 탓에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기분이지 남 사정이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인간이 방어기제로 흔히 사용하는 ‘투사’(Projection)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기 외부에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매사 남 탓을 하면 불안과 죄책감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가 ‘내 탓 형’입니다. 어떤 일이 터질 때마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겁니다. 모든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 ‘내재화’(Introjection)라는 방어기제도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화살의 방향을 떠올리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겸손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사건이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신을 꾸짖고 벌주고 심판하고 자책하고 자학하는 유형입니다. 분노나 불안을 억눌러놓아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겁’과 ‘오만’ 사이
남 탓을 하는 경우는 한마디로 비겁한 병에 걸린 분들입니다. 자기는 쏙 빼고 다른 사람을 들들 볶는 사람이니까요. 거꾸로 내 탓 형은 오만한 병에 걸린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달달 볶는 사람입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 되는데’, ‘거기서는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러면서 자꾸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책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유형입니다. 두 유형 모두 부족하고 실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이나 판단에서 책임을 자신이 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어떤 유형이 더 위험할까요?
내 탓 형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자신을 완벽하고 빈틈없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오판이 시작되고 ‘오만(傲慢) 병’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높은 기대치에 도달했던 몇몇 순간의 모습만 자기 본모습이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착각과 불행이 쌍두마차로 자신을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두 가지 유형 모두 상처를 입고 불행한 상황에 놓이는데, 더 심각한 것은 남 탓을 하는 것보다 내 탓을 하는 경우입니다.
남 탓도 종종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 탓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때가 의외로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원인이 아닌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인과가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대안을 찾아 자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 문제까지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처방전처럼 헛짓거리를 하게 됩니다. 최소한 남 탓이라도 하면 삶을 놓아버리는 극단적 선택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럽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남 탓은 필수라고요. 남 탓을 열심히 해야 자신이 정신적으로 안정된다고 말입니다. 고칠 수 없는 문제에 자기 탓을 하면 자존감은 추락하고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져 불안과 우울을 달고 살 수 있으니까요.
남 탓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탓은 위험합니다. 자신을 탓하는 병에 걸리면 그 오만함이 어떻게 펼쳐지냐면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 허물에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고 다 품고 배려하는 척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으로는 무시하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운 높은 기대 수준을 타인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오만함은 위험천만한 부분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십니까?
탓탓탓 말고 타타타!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요? 이 노래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 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후략)
‘꽃순이를 아시나요’, ‘은하철도 999’ 주제가를 불렀던 김국환이 1992년 세상에 선보인 노래, ‘타타타’. 마지막에 ‘어허허허허허!’ 웃음소리가 백미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는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뜻합니다.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라고도 하며,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이라고 합니다.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일평생을 살아가는 게 우리입니다. 이 세상을 ‘탓탓탓’ 하지 말고 ‘타타타’ 하면서 살아 볼까요. 편 가르고 고집과 만용을 부리며 대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삶으로 남은 인생 아름답게 수놓아볼까요. 그럴 때 ‘탓 병’이 치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더위와 습기 탓하지 말고 허허허 웃으며 몸도 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마음 미장공 여덟 번째 이야기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4년여 전 필자가 은퇴연구소 소장이 되었을 당시만 해도 은퇴연구소라는 곳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친구와 동료, 후배들뿐 아니라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를 하신 선배님들께서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셨다. 몇몇 분은 도대체 은퇴연구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며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해프닝 한 토막.
필자가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필자를 주빈(?)으로 초청한 선배님이 들어오셨다. 필자가 일어나서 인사하는 걸 보신 선배님께서 대뜸, “아니, 은퇴도 안 해본 양반이 무슨 은퇴연구소장을 한다고 그래?” 이 말에 머리만 끄덕거릴 필자가 아니지 않은가? “선배님, 외람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꼭 당해 봐야 알겠습니까?” 좌중이 웃음보가 터진 것은 당연지사! 그 선배님께서도 함께 박장대소를 하시다가 자리에 앉으시면서 왈, “역시 은퇴연구소장 할 만 하구만.”
당해야 아는 우둔한 사람을 넘어 당해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지만 은퇴를 하고 나서도 자신이 은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한두 번은 은퇴를 하고 그러다 완전히 은퇴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다 보니 은퇴연구소장인 필자는 은퇴자와 은퇴예비자들에게 둘러싸여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큰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유명한 점쟁이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에 따라 점점 더 경험과 통계가 쌓이면서 더 용한(?) 점쟁이가 되는 것과 같다. 용한 점쟁이가 스스로 익힌 이론과 타고난 식견에 더해 실전을 통해 쌓인 사례와 결과를 가지고 이리 엮고 저리 엮어서 처방(?)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은퇴 컨설팅을 통해 터득한 제1 원칙은 “눈높이를 낮춰라!”이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 “너 자신을 알라!”와도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수천년 전부터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다음 노래 가사가 우리 마음에 와 닿겠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가수 김국환의 ‘타타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 사는 인생. 사실 이 말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우리들은 그에 맞게 옷차림을 바꾸고 또 우산을 들고 나서는 등 상황에 맞게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퇴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십중팔구 마음의 준비 등 나름 은퇴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하고 나면 그게 아니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 중에서 말과 실제가 가장 크게 달라지는 이벤트가 은퇴라는 것이다. 특히 고위직 공무원이나 군인, 회사 임원을 하거나 자영업자로 한때 잘나가던 사람들이 은퇴 후를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은퇴 후에도 예전의 영광과 지위(?)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행복한 마음과 생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내가 왕년에 ~~”하는 마음가짐과 말이다. 겉으로는 다 내려놓았다고 하면서도 행동거지와 말투를 보면 아직도 어깨와 목소리에 힘이 많이들어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복지회관이나 문화센터에 남자들은 거의 없고 여자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가을 단풍철에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가보면 남자들끼리 여행가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대부분 여자들끼리 가거나 남자 몇몇이 끼어 있을 뿐이다. 도대체 남자들은 다 어디에 가 있는 것일까? 필자의 추측으로는 하루에 1만원을 받아서 TV를 끼고 있거나 당구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조금 나은 경우가 친구들과 청계산이나 북한산 산행을 다녀오는 정도일 것이다. 함께할 친구가 없거나 혼자가 좋다면서 나홀로 산행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은퇴한 후에도 뭔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진찍기 또는 그림그리기 등과 같은 취미활동에 나서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요리학원에서도 50~60대 남성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눈높이를 낮추는 일이다. 내가 왕년에 뭐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들과 이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마련이다. 반대로 내가 그간 일에 바빠 이렇게 좋은 것과 좋은 사람들을 모르고 지냈구나, 세상에는 할 일, 재미있는 일과 나와 다른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모든 게 새로워 보이고 좋아 보인다. 눈높이를 낮추는 데서 시작되는 변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눈높이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 회사에 들어가면 그 회사에 맞는 눈높이가 필요하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더없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손자손녀를 보게 되면 더 극적으로 눈높이가 낮아진다고들 한다. 내 눈높이를 맞추거나 낮추면 배우자와 아이들은 물론 손자손녀들의 눈도 보이고 그들과 생각도 함께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눈높이를 낮추면 보다 많은 친구들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고은(高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짧은 시이다. 산에 오를 때는 정상을 향해 앞만 보고 가느라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내려오면 그때서야 주위가 눈에 들어오면서 못 보던 꽃도 보일 것이다. 우리 인생도 젊어서는 앞만 보고, 위만 보고 정신없이 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이가 웬만큼 들고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은퇴를 했다면 이제 그런 짐들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그래야 그간 미처 보지 못한 세상과 미처 보지 못한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꽃이나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내 눈높이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느낌과 모습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추면 할 일도 친구도 더 많아지는 것은 물론 더 넓은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