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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⑦ 해남 대흥사(大興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 2018-10-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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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④ 순천 선암사(仙巖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 2018-09-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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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김제 시골에 사는 이경주·지관 부부
- 차갑고 흐린 겨울 한낮. 집 앞 황토 구릉지 쪽에서 불어온 맵찬 바람이 나무들의 몸을 흔든다. 이미 누드로 늘어선 초목들은 더 벗을 것도 떨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삭풍을 견딘다. 좌정처럼 묵연하다. 봄이 오기까지, 화려한 꽃들을 피우기까지 나무들이 어떻게 침잠하는지를 알게 하는 겨울 정원. 봄이면 화들짝 깨어날 테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제전을 펼친다지. 6년여를 공들인 정원이다. 정원의 임자는 이경주(61) 씨. 그녀는 귀촌 이후 거의 모든 날들을 정원 가꾸기에 매달렸다. 애초 근사한 정원을 만들고 싶어 귀촌했다. 나무를, 꽃을, 자연을 가꾸고 배우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은 그녀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하지만 자꾸 미루어야 했다. 도시를 벗어나기 쉽지 않아서였다. 박인환의 시구였던가.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것.’ 일과 관계의 고리에 코 꿰어 진부한 일상에 안주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러나 꿈꾸지 않고서도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저마다 오아시스 하나를 내심에 담고 사는 게 아니던가. 이 씨는 시골에 살며 정원을 맘껏 가꾸는 일로 티끌세상을 사뿐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겐 롤 모델이 있다. 미국의 동화작가 타샤 튜더. ‘타샤의 정원’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 타샤는 100여 권의 동화책을 낸 작가이자 지상 낙원과도 같은 정원을 창조한 원예가다. 텃밭을 일궈 거둔 채소와 과일로 특별한 밥상을 차린 요리의 대가이며, 어지간한 생필품은 손수 만들어 조달한 자연주의자였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 즈음, 내가 나의 삶을 진정 사랑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회의가 몰려들 즈음, 이 씨는 타샤의 삶과 책에 함빡 필이 꽂혔다. 해서, 타샤의 삶을 닮기로 했다. 타샤가 그랬듯이, 50대 중반에 이르러 시골로 이주했다.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서양화가로, 미술교사로 살아왔었다. 귀촌을 통해 정원 가꾸기에 일단 신명을 바친 뒤 그림에도 치열하게 몰두하겠다는 게 그녀의 스케줄. “지난 30대부터 50대까지의 인생이 어쩌면 허송세월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밀려들었어요. 물론 제가 맡았던 일엔 늘 최선을 다했죠. 리더로 뛰기도 했어요. 찬사도 자주 들었어요. 하지만 한 분야를 깊이 파 이름을 날린다거나 부를 누릴 인물은 아니었죠. 나는 도대체 뭘 했지? 이게 진정 나를 위한 삶이었나? 이젠 바꾸자, 육십이 다 됐지만 뭐 늦은 건 아니잖아? 이제라도 한바탕 근사하게 살아보는 거야! 그런 생각, 그런 작심으로 귀촌했어요.” 옳다구나! 내 삶의 행보에 회의가 있고서야 어찌 행복하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고 병들어 죽음이라는 놈과 턱 조우하기 이전에 정말 내가 바랐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어중간하게 늙은 이제라도 가슴 쿵덕거리는 일에 나를 거침없이 쏟아 붓는 일은 가상한 미담에 속한다. 그녀는 복스럽게도 귀촌 장소를 물색하는 수고는 면제받았다. 유년기에 병아리처럼 뛰놀던 기억이 서린 외갓집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전북 김제시 백구면의 농촌이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근현대 불교미술의 거장 일섭 스님(1900~1975). 일섭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 백구면에 태고종 사찰 부용사를 창건했다. 현재 부용사의 주지는 이경주 씨 남편인 지관 스님이다. 전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돌연 삭발 출가, 아내의 외가 쪽 개인사찰 주지 소임을 맡은 거다. 기혼자가 어이 스님을? 의아해할 수 있지만, 태고종은 승려의 혼인을 허용한다. 남편은 태고종 승려 교수에서 승려로 신분이 바뀐 남편의 뒤를 따라 이경주 씨가 부용사에 딸린 외갓집으로 귀촌한 것은 지난 2012년의 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부부가 차례로 오랜 삶터였던 광주를 벗어났다. 주야로 도 닦는 남편과 사는 일은 수월할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지? 남편에게 부처님 대접을 받아 날마다 평강하신가? “남편이나 저나 서로 원했던 삶을 산다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나 불편이 없어요. 선(禪)을 추구하는 남편, 자연과의 교감을 원하는 나.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각자가 바랐던 길을 간다는 게 만족스러워요. 소소한 언쟁은 가끔 벌어지지만 피차 적당한 침묵으로 충돌을 피하죠. 새로운 무기랄까, 그런 건 생겼어요. 아니, 스님이라는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리 밀어붙이면 꼼짝 못하니까.(웃음)” “선에 마음을 둔 스님은 속세의 뜻을 이미 접었을 테고, 자연으로 쏠린 이 선생의 마음도 비슷한 풍경일 것 같고, 그렇다면 부부가 공히 수행자처럼 사는 거예요? 부군을 따라 덩달아 출가할 생각을 하진 않았나요?” “살아가는 자체가 수행이라는 게 남편의 생각입니다. 사실 자주 참아야 하고, 자주 져줘야 하는 결혼생활만 하더라도 치열한 수행일 수 있겠죠. 그런 기본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남편과 저의 길은 달라요. 각자의 개인적인 삶이니까. 출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질 않았어요. 그럴 만한 인재가 되질 못해서.” “인재? 경 읽고, 우렁차게 목탁 치고, 얌전히 좌선할 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녜요? 발심(發心)이 선행한다면.” “반듯한 생활에 자신이 없어서죠. 제가 원래 너그럽고 원만하고 순한 천성의 소유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성향이에요. 매우 온순해 보이지만 삐딱한 기질도 다분해요. 하지 말라는 건 오히려 더 나서서 해보고서야, 아 그렇구나, 그렇게 직접 느끼고 깨닫는 걸 좋아해요. 그림만 하더라도 대담하고 열정적인 작풍을 좋아하고, 뭔가 격한 기복과 강약 리듬이 있는 생활을 선호했어요.” “교직 역시 적성에 맞질 않았겠어요. 범생이들을 길러내자면 교사 자신부터 범생이 시늉을 해야 할 테니까.” “교직을 일찍 그만뒀죠. 저와 어울리질 않아서. 교사란 보편적이고 모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틀에 갇히는 게 싫었어요. 내 개성과 성질을 죽여야 하는 공기가 싫었던 거죠.” 미술교사직에서 물러난 그녀는 요상하게도 정당 활동에 뛰어들었다. 처신도 운신도 교묘하게, 머리도 여우처럼 굴려야 할 정치판. 그 북새판에 가담해 실력을 발휘, 모 정당의 여성부장까지 맡았더란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와 날카롭게 돌아보면 그마저 자신의 진정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 실수나 실패의 기록은 드물고 일련의 성취가 뚜렷했지만, 내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하는 종목은 아니었다는 것. “마음은 점점 자연으로 흘러갔어요. 원래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성향의 여자라는 걸 깨달았던 거예요. 사람들 속에서보다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의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사람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가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사소한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풀꽃아, 너는 왜 그렇게 예쁘니? 이렇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감성, 맑은 정서, 그런 게 제 본성에 더 가깝다는 걸 알았던 거예요.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 귀촌을 추동했죠.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며 스스로 정직하게 사는 게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길이라 판단했어요. 그게 교직에 있었던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도 했고.” 수굿하고 정겨운 정원의 꽃 잔치 이경주 씨의 정원엔 이제 알아주는 눈들, 일부러 찾아와 감상하는 객들이 많단다. 6년여 동안 땀 흘린 덕이다. 애면글면, 그녀는 온몸을 써 노동을 했다지. 온갖 꽃씨를 뿌리고, 갖가지 나무를 심고, 제초를 하고, 거름을 주고, 전지를 하고,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너른 마당을 초목으로 채워나갔다. 정원 전면엔 백련 방죽을 조성했고, 장미나무 터널을 거쳐 연지를 한 바퀴 휘돌 수 있는 산책로를 마련해뒀다. 담장이라는 게 일체 없으니 저편 황토 구릉지와 한달음에 이어지는 조망이 시원하다. 그녀는 인위적 조경을 극도로 배격했다. 최대치의 자연미를 구현한다는 미학을 염두에 두었다. 인위가 만들어내는 허영과 허식에서 벗어나 무위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심을 담았을 수도 있겠지. “어릴 때 보았던 시골의 꽃 풍경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 곱고 애틋한 경치를 말이죠. 사실 인위적 치장을 할 돈도 없었어요. 비싼 조경수나 조경석을 사들일 형편이 아니었죠. 억척스럽게 모든 걸 자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요. 손수 정원용 도예 작품들을 만들어 슬쩍슬쩍 꽃밭에 배치했고, 무너진 폐가에 뒹구는 돌이나 기왓장, 인삼밭가에 버려진 폐목을 수시로 손수레로 날라 조경 소재로 재활용했어요.” 자로 잰 듯 치밀하게 꾸민 인공 정원이나, 규모로 압도하는 수목원과 달리 이 씨의 정원은 스산한 이 겨울에 보더라도 각별히 아기자기하고 수굿하고 정겹다.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방문자들이 즐비하단다. 그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꽃 잔치에 불러들일 작정이다. 내친 김에 꽃과 자연, 문화와 예술이 남실거리는 공간으로 진급시킬 계획이다. ‘야가(野歌)문화예술촌’이라는 이름도 이미 지어두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도시의 지인들을 인근에 귀촌시켜 함께 거사를 도모할 작정이다. 생활도 낭만도 꿈도 도시에서보다 자연의 원초적 숨결이 뜨거운 시골에서 그 성취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게 이 씨의 지론. 그녀는 자연의 그 무엇에 매료를 느낄까? “자연 안에 사는 생명들의 자유스러움이랄까, 태연한 생태와 순환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무상의 혜택이죠. 사람을 순하게 만들고, 안심을 부여해요. 말없는 초목들과의 대화는 얼마나 값진지요. 그건 사람들과의 영혼 없는 대화보다 진실하고 절실해요. 결국은 자기 성찰에 이르게 되죠.” “나름의 파란만장을 겪으며 반백 년 이상을 산 사람들의 배후엔 저마다의 상처가 아른거리죠. 자기성찰이 치유의 길일까?” “일테면, 불가에선 남들에게 미소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보시를 했다 보는데요,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자연 속에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그게 자연스럽게 됩니다. 귀촌의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녜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다질 수 있고,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영감이 솟구치고, 성숙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으니까. 도시에서 부대끼며 허겁지겁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뭐람.” 도시라고 악조건의 수렁일 리가. 그러나 자연에 삶의 한 자락을 슬며시 걸치고 살아가는 귀촌생활이란 자주 마음을 돌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지. 삶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엔 늘 초심자에 불과한 우리에게, 자연은 성찰의 눈을 달아주기도 하니까.
- 2018-01-08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