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활발한 활동을 펼친 최정윤(46). 청순한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의 나는 예뻤던 것 같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젊음이 예뻤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가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의 인기를 좋게 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정작 나는 연기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나만의 전성기는 아직 보지 못했다”는 최정윤의 행보가 주목된다.
SBS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등의 캐릭터 때문인지 최정윤은 새침데기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 털털한 사람이다. 과거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에 대해 “시기를 잘 타고났다”라면서 “일찍 데뷔해서 천만다행이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어디 가서 배우라고 명함도 못 내밀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배우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찍은 프로필 사진 덕에 공익 광고에 출연하게 된 그는 당시로서 큰돈인 50만 원을 벌었다. 재밌는 경험이었지만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고와 사진을 본 소속사 관계자로부터 제의를 받아 배우의 삶을 살게 됐다.
“저도 모르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신인 시절 저는 겁이 좀 없었어요. 연기 욕심은커녕 연기가 뭔지도 몰랐으니까 카메라 앞에서도 무서운 게 없었던 거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래서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처음부터 너무 연기 욕심을 부리고, 배우로서의 인정이나 성공이 간절했다면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저는 모든 촬영 현장이 늘 재밌었고, 힘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큰 욕심 없이 살았던 것이 제가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춘스타에서 ‘아침드라마 퀸’으로
데뷔 작품은 1996년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로 기록된다. 27년 차 배우인 최정윤은 대표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이내 “대표작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얘기해주시는 작품”이라면서 MBC 드라마 ‘태릉선수촌’(2005), 영화 ‘라디오스타’(2006), SBS 드라마 ‘청담동 스캔들’(2014~2015)을 꼽았다.
최정윤은 “대중들이 ‘라디오스타’는 PD 역할로 잘 기억해준다. ‘청담동 스캔들’은 인지도가 높아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릉선수촌’에 대해서는 연기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태릉선수촌’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운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다룬 8부작 드라마로, 최정윤은 양궁 선수 역을 소화했다.
“연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진 작품이에요. 그 전까지는 쫓기듯이 연기를 했다면, 그때는 본연의 나로서 진심을 다해 드라마를 찍었죠. 감독님부터 배우들, 현장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좋았어요. 만약 당일 예정된 분량대로 촬영이 진행되지 않으면, ‘술이나 한잔 하자’라면서 서로 위로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랬죠. 배우들끼리 워낙 끈끈해서 이윤정 감독님의 차기작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때, 다 같이 현장에 놀러 가기도 했어요.”
최정윤은 ‘청담동 스캔들’에 이어 2021년 ‘아모르 파티-사랑하라, 지금’(이하 ‘아모르 파티’)에 출연하면서 ‘아침드라마 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그러나 이제 그 수식어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모르 파티’를 끝으로 방송 3사 KBS·SBS·MBC의 아침드라마가 폐지됐기 때문. 최정윤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아침드라마에 출연한 여주인공으로 남았고, 책임감을 통감했다.
더욱이 ‘아모르 파티’는 ‘청담동 스캔들’ 이후 오랜만의 드라마 작품으로 아쉬움을 더했다. 긴 공백 사이, 드라마 제작 현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촬영 환경이 정말 좋아졌더라고요. 일정이 빠듯하지도 않고, 밤샐 일도 없어졌죠. 과거에는 밤새고 첫 신을 찍을 때도 많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중년 배우 과도기 잘 넘겨야
호전된 제작 환경은 배우로 오랜 시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배우로서 역할이 달라질 때도 세월이 체감된다.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린 최정윤은 2013년 방송된 MBC 단막극 ‘소년, 소녀를 다시 만나다’를 시작으로 엄마 연기를 하게 됐다.
“그때 당시는 제가 실제로도 엄마가 아니었어요.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출연을 거절했어요. 엄마 연기를 할 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엄마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됐던 거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기 연습도 할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사를 번복해 출연했는데, 엄마 연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던 거죠. 이제는 엄마 역할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어요. 아역 배우들이 성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뿐이에요.”
40대 중반의 최정윤은 현재 배우로서 과도기에 있다고 본다. 연기를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찬 그는 “지금 이 시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기로 스스로를 테스트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주로 착한 역할을 연기했는데, 해본 적 없는 제대로 된 악역을 통해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 연기가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연기든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현재 중년 배우로서 시간을 잘 보내야 노년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정윤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글을 읽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선배 배우들에게서 보았던 연륜과 삶의 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청담동 스캔들’에 출연한 배우들과 지금까지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자주 만나요. 반효정 선생님도 만나는데, 제가 선생님을 참 좋아합니다. 지금도 안주하지 않고 배우로서 고민을 계속하시는 모습이 정말 멋져 보여요. 반효정 선생님을 포함해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정말 큰 복이라고 느낍니다.”
딸 지우, 그리고 또 다른 가족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정윤은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한다. 그의 슬하에는 2016년 태어난 딸 지우가 있다. 엄마를 꼭 빼닮은 지우는 벌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훈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최정윤은 자신을 ‘적당한 엄마’라고 표현했다.
“좋거나 나쁜 엄마의 기준을 잘 모르겠지만, 엄마로서 저는 적당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 않고, 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게 하죠. 그런데 예의, 사회성 교육은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성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거든요. 또 잘못한 게 있으면 혼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섭함을 느껴 투정 부릴 때도 있지만, 저는 안 받아줘요.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으로 바쁠 때는 어머니와 피아노 선생님이 지우를 돌봐줬다. 피아노 선생님과 최정윤의 관계는 참 특별하다.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4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친구, 조금 어린 친구. 선생님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관계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40년 우정의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연예계 절친으로 유명한 배우 박진희에 대해 최정윤은 ‘나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과는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최정윤과 박진희는 벌써 2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최정윤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가고, 의리가 넘쳤다.
“만약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박)진희가 자기가 무조건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한 거예요. 진희는 정말 일하면서 얻은 보물이에요. 주변에 친구가 많아도, 이렇게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거든요. 진희, 피아노 선생님처럼 가족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해요. 가족이라는 게 꼭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정윤에게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크든 작든 어떤 일에도 스트레스받지 않는 성격 덕분일 것.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그의 앞날에는 당연히 꽃길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해요. 지금 삶도 좋은 점이 많은데 왜 과거로 돌아가서 힘들었던 순간을 반복하나요? 과거를 후회해봤자 시간만 아깝고 아무런 발전도 없어요.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재밌게 살아요!”
운동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운동을 잘해서 국가대표로 올림픽에도 나가고 입상해 메달까지 따온다면 더 바랄 나위 없다. 하지만 국가대표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국민의 0.0001% 이하가 누리는 엘리트스포츠맨이다. 엘리트스포츠맨이 되려면 타고난 천부적인 자질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코치 밑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아야 하기에 돈도 많이 든다. 국가도 태릉선수촌을 만들고 지원도 많이 한다. 누구나 국가대표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일반인은 생활스포츠로 건강을 위해 즐기면 된다. 재능이 있으면 빨리 성장하겠지만 적성에 맞으면 생활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엘리트스포츠와 생활스포츠는 다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획득했다고 또는 위대한 선수를 배출한 나라라고 그 나라의 국민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올림픽의 메달 경쟁에서 상위권에 든 미국이나 중국의 국민들, 세계적인 축구 스타 호날두의 고국인 포르투갈 또는 메시의 조국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체력이 높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기준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국민들이 스포츠를 통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국민을 건강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발달한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닐까?
선진국에서는 학교 체육시간에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경험하도록 해 자신에게 맞는 종목을 평생 자기만의 스포츠로 만들게 한다고 한다. 즉 생활스포츠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학생 시절부터 야구나 배구, 아이스하키를 취미삼아 하던 사람이 성인이 되어도 동호인 클럽에서 운동을 계속한다. 격렬한 운동인 축구도 그렇고, 70세가 훌쩍 넘은 분들이 은발을 휘날리며 탁구와 테니스를 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다. 어디까지나 생활스포츠이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 즐기면서 한다.
나는 30대 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테니스에 입문했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키도 작아 잘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동호인 클럽에서 영원한 현역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생활스포츠로 즐기고 있다. 테니스로 건강을 다져 울트라마라톤에도 출전하고 헌혈 100회를 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내 건강의 8할은 테니스로부터 왔다고 자부한다.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면 건강해서 운동장으로 달려가는 사람과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 그리고 병원에 갈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운동장으로 뛰어갈 만큼의 건강한 사람도 아닌 중간 부류의 사람이다. 중간 부류의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적성에 맞는 스포츠를 찾아 즐겨야 한다.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고 행동도 둔해진다. 이를 더디게 하는 데는 운동만 한 것이 없다는 게 정설이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산다고 해도 아파서 골골거리며 오래 사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국가도 엘리트스포츠맨을 육성하고 아픈 환자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생활스포츠에도 신경 써야 할 때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생활스포츠가 발전한 나라의 국민들은 쉽게 이겨내리라고 본다.
짧지만 강렬하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두 배, 심지어는 세 배가 넘는 무게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내려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남짓. ‘무거움’을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들어 올린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역도 라이트급에 출전해 용상, 인상, 합계 전 종목을 석권한 원신희(74)를 만났다.
“시골에 바벨이라는 게 있었겠어요? 빈 통에 모래랑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돌역기’밖에 없었어요.”
또래 중에서 가장 힘이 셌던 그는 동네에서 돌역기를 들 때마다 “잘한다, 잘한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의 칭찬을 듣는 재미에 본격적으로 역도를 시작하게 됐다. 대전공업고등학교 역도부에 진학한 그는 1965년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추상(125kg)과 합계(392.5kg)에서 주니어 세계 신기록을, 인상(120kg)에선 주니어 세계 타이기록을 세우며 주목을 받았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1966년부터 12년간 역도 국가대표로 활약한 그는 “손가락이 좀 더 길었으면 더 잘했을 텐데 짧아가지고… 그래도 한의사이셨던 아버님이 달여주신 인삼 덕을 많이 봤어요” 하며 웃었다.
“아버님이 항상 술, 담배, 여자는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수촌에서 서로 눈 맞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전 워낙 이성관계에 둔해서… 연애도 안 하고 중매결혼으로 했죠. 아버님의 세뇌(?) 교육 덕분에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웃음)”
‘국가대표’ 하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선수촌. 원신희는 1966년에 설립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태릉선수촌이 설립된 이후 한국의 스포츠가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운동생리학, 운동역학 등 스포츠과학이 접목되면서 체계적인 훈련이 가능했죠. 효과적으로 훈련을 하다 보니 성적도 잘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엔 헝그리 정신이 있었죠.”
스쿼트 훈련을 하고 나면 다리에 쥐가 나서 오르막길을 뒤로 걸으며 올라갔다. 바벨에 쓸려 손 가죽이 찢어지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 상처는 굳은살로 메워졌다. 마치 발바닥 같았다고 말하는 그의 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굳은살 대신 흘러간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름이 자리 잡았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죠. 힘들어도 참고, 포기하고 싶어도 이 꽉 물고 했어요. 죽도록 힘든 와중에도 근육이 붙고 새로운 기록을 내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역도는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무게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역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죠.”
1978년 전국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원신희는 1983년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역도 선수들을 육성했다. 그가 선수들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단다. 바로 ‘욕심을 버려라’다.
“기술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 몸을 내가 이길 때 비로소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해요. 역도도 마찬가지예요. 내 몸이 준비가 안 됐는데 무거운 무게를 들겠다고 하면 그건 욕심이죠. 그전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몸, 기초를 다지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금메달 3관왕의 영광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꼽았다. 라이트급에 출전해 인상(130kg), 용상(165kg), 합계(295kg)의 기록으로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한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개최국 이란의 잔머리 덕분(?)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세 종목의 시상을 따로 하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은 용상과 인상의 합계로만 시상해요. 근데 역도 강국인 이란이 종합순위를 올리기 위해 전무후무하게 아시안게임에도 세계선수권대회처럼 한 체급당 3개의 금메달을 건 거죠. 자국 선수가 금메달을 딸 거라고 확신했었나 봐요.”
그에게 금메달을 예상했냐고 묻자, 후보로는 거론이 됐다고 말했다.
“전년도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라이벌이었던 이란의 데나비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제가 4위를 기록했어요.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결국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만난 그를 꺾고 우승했어요. 아마 이란에서는 아차 싶었을 거예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은 중국을 비롯해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와 더불어 바레인, 이라크, 라오스 등의 국가가 처음 참가한 대회였다. 때문에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종합순위 경쟁도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북한 선수와 처음엔 신경전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로 안 보는 척 힐긋힐긋 쳐다보곤 했어요.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다른 대회에서도 마주쳤는데 그땐 서로 인사도 건네고 대화도 나눴죠. 북한 선수가 밝은 표정을 지으면 남북관계가 좋았던 거고 서로 딴청 피우고 만나주지도 않을 땐 남북관계가 냉랭한 시절이었죠.(웃음)”
우리나라는 금메달 한 개 차이로 북한을 누르고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금메달 3개를 보탠 원신희가 귀국하자 국민들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카퍼레이드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지방까지 환영식이 이어졌어요. 심지어 제 고향에선 사물패까지 동원해서 잔치를 열어줬죠. 그 시절엔 그랬어요.”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그에게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이 더욱 값진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부상을 이겨내고 거둔 우승이기 때문이다. 1967년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당한 그는 선수생활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역도에 추상이라는 종목이 있었는데 무릎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기록을 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은퇴까지 고려했죠. 근데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부터 추상 종목을 폐지하더라고요. 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 거죠.”
그는 메달을 따는 데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 추상 종목이 폐지된 것처럼 말이다.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같아요. 노력한다고 다 목에 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원한다고 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비슷한 실력의 상대에게 패했을 땐 결코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우승자에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 법이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력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면 좋겠어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아시아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의 중심엔 핸드볼 선수 임오경이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여자핸드볼의 전성기를 이끈 임오경(林五卿·48)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만났다.
금메달의 밑거름이 된 ‘지옥 훈련’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핸드볼팀이 금메달을 딴 직후 여자핸드볼팀의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때 임오경 감독도 국가대표로 합류하게 되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생애 첫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부담스럽진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부담감보다 긴장감이 더 컸다”며 “오히려 태릉선수촌에서의 ‘지옥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눈 감는 것도 두렵고 눈 뜨는 것도 두려웠어요. 눈을 감으면 다음 날 아침이 오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니까요. 그중에서도 매주 한 번씩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산악훈련은 그야말로 공포였어요. 기록을 매번 단축해야 했거든요. 훈련이 끝나면 울면서 태릉 귀신한테 기도했어요. 우리 감독님 제발 좀 데려가라고.(웃음)”
매일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견뎌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메달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한국이 메달을 딸 거라고 예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올림픽 직전 독일에서 열린 5개국 초청대회에서도 꼴찌를 했으니까요. 저희끼리도 동메달을 목표로 할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노력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운도 잘 따라줬던 것 같아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러시아 팀이 다른 조로 배정되면서 우리 선수들은 순조롭게 준결승까지 갈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독일과의 경기에선 아슬아슬하게 한 점 차로 이기면서 결승에 올랐다. 그때 한국 팀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가 러시아를 한 점 차이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떨어지고 노르웨이가 결승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저희 선수들 다 뒤로 자빠졌습니다. 예선전에서 노르웨이랑 맞붙었을 때 저희가 큰 점수 차로 이겼거든요. 결승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죠. 그때 ‘아, 3년 동안 지옥 훈련을 견뎌낸 선수들을 위해 하늘이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노르웨이를 28대 21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쾌거였다.
“선수들이 시상 단상에 올라가면 눈물을 흘리잖아요. 그 눈물엔 기쁨의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이 생각나서 흘리는 눈물도 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피나는 훈련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구나’ 하고요.”
일본에서의 새로운 도전
올림픽이 끝나자 그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는 일본의 2부 리그 신생 팀인 ‘히로시마 이즈미’를 선택했다.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가 핸드볼 강국 유럽 팀의 제안도 뿌리친 채 일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유는 뭘까.
“일본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3년 안에 팀을 정상에 올려놓고 유럽에 가자 했는데, 일본에서 14년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웃음) 당시 제가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했는데, ‘내가 스카우트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떠나질 못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이즈미에서 감독 겸 선수로 14년간 활동하면서 리그 8연패를 포함해 총 27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자단이 선정하는 인기투표에서 8년 연속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핸드볼 스타플레이어로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짱구? 이마가 많이 튀어나왔다고 그런 별명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카미사마(かみさま, 신)로 불렸어요. ‘내가 왜 신이야?’라고 물어봤더니 핸드볼을 너무 잘한다고….(웃음) 팬도 엄청 많았어요. 재일교포가 대시도 하고요. 어느 날은 아들이 상사병 걸렸다고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찾아오신 분도 있었어요. 별일 다 겪었죠.”
아쉬움 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임오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에게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다. 한국은 결승에서 만난 덴마크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 페널티 스로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임오경은 두 번째 주자로 나섰다.
“대회를 일주일 정도 남기고 발바닥 부상을 당했어요. 항상 베스트 멤버로 뛰다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굉장히 났죠. 페널티 스로를 앞둔 상황에선 부상 때문에 몸도 유연하지 못했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어요. 던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제가 무조건 던져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가 던진 슛은 덴마크 골키퍼의 오른쪽 다리에 걸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 그다음 주자였던 문필희 선수의 슛도 막히면서 최종 스코어 2대 4로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그동안 잘해왔는데 마지막 순간,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제 핸드볼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생각에 많이 아팠어요. 무엇보다 운동선수는 부상이 없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그리고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게 됐죠.”
그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맡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핸드볼팀 지도자라는 점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첫해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저희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 감독이 이끄는 팀이라는 이유로 심판 판정도 이상하게 해서 불리하게 만들고. 심판실에 따라 들어간 적도 많아요. ‘나 오늘부터 서서 볼일 볼 테니 나를 남자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몇몇 고비를 넘기면서도 조금씩 다가가니 결국은 손을 내밀어주더군요. 근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핸드볼과 함께한 지 30여 년이 넘는 세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볼을 시작하면서 선수가 됐고, 선수를 하면서 지도자가 됐고, 대한민국의 애 엄마도 돼봤어요.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이면 제가 지도자와 선수생활을 모두 해본 사람으로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
당구가 시니어에게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달 태릉선수촌 승리관에서 열린 2018서울세계3쿠션당구월드컵대회 예선 경기들을 TV를 통해 보고 있었다. 18일은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2시부터 4강 1차전으로 우리나라의 김봉철- 그리스의 폴리포스의 경기가 있었다. 5시에 에디먹스- 야스퍼스의 2차전이 벌어지고 8시에 준결승에서 올라온 에디먹스와 폴리포스의 결승전이 벌어졌다.
현장에 간 보람은 세계 유명 선수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계 랭킹 1위 프레데릭 코드롱 선수는 일행들과 대화 중인데도 기꺼이 사인도 해주고 기념 촬영에도 응해줬다. 필자가 누군가 둘이 같이 사진 찍어줄 사람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자 직접 스마트 폰을 셀프촬영 모드로 바꿔 몇 번이고 찍었다. 팬서비스에도 세계 1위 선수다웠다. 코드롱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초반에 탈락했으나 이렇게 대회장에 나와 자리를 빛냈다. 직접 관전도 하고 팬서비스도 염두에 두고 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 당구 3쿠션 1위 김보미 선수는 스폰서 부스에서 팬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팬이라고 하자 사진 찍을 때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호응해줬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해설이 있는 TV로 보는 것만 못했다. 당구대가 너무 멀리 있고 객석도 불편했다. 모니터 화면으로 경기장면을 보여주면 좋았을 것을. 어지간한 당구장에 가도 있는 그런 서비스가 없었다. 스마트 폰으로 현장 중계를 보는 사람은 그래도 좀 나아 보였다. 결과적으로 굳이 현장에서 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서울 중심가에 좋은 공간이 많은데 굳이 멀리 태릉선수촌에서 대회가 벌어지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인 화랑대역에서도 버스로 6정거장이 되는 먼 거리였다. 승리관은 공간이 작다. 조별 예선도 겨우 치렀다는 것이다. 이날은 당구대 하나만 중앙에 놔두고 3면을 객석으로 만들었다. 구리, 양구, 청주 대회에서도 경기장에 당구대가 수십 대였다. 그런데 월드컵 대회인데 그 정도 공간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구가 대한체육회 내에서 스포츠 종목으로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파이크 서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장윤창(張允昌·59). 마치 돌고래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날아올라 상대 코트에 날카로운 서브를 꽂아 넣는 그의 ‘돌고래 스파이크 서브’는 수많은 배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15년간 국내 배구 코트를 지킨 장윤창 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옛날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의 수만 마리는 받은 것 같아요. 또 팬레터의 80~90%는 ‘오빠랑 결혼할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제가 답장을 못했어요.(웃음)”
1980~90년대의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까지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 중심에는 ‘왼손 거포’ 장윤창이 있었다. 수많은 배구 팬들이 그의 시원시원한 공격과 스파이크 서브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와 전 좌석을 꽉꽉 채우곤 했다. 그는 아니라며 수줍게 부인했지만, 그가 받았다는 팬레터와 무수한 종이학이 그의 인기를 증명해줬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배구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팀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를 비롯해 고등학교 2학년의 장윤창도 있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때리던 대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 국가대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선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나이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남자 배구팀은 세계선수권 4강 진출의 기세를 몰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당시 베스트 멤버였던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국가대표 주전들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했다. 웬일인지 ‘철벽 블로커’로 이름을 알린 장윤창은 국내에만 머물렀단 사실이 의아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파이크 서브’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그는 1984년 처음 열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고려증권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6, 인기상까지 휩쓸었다.
15년간의 선수 생활
비교적 선수 생활이 짧은 배구 종목에서 그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워낙 어린 나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제가 대학생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최고참 선수가 됐고 리더 역할을 해야 했어요. 놀고 싶어도 못 놀고, 딴짓할 생각조차도 못했죠. 어릴 땐 죽어라 뛰었고 나이가 들어선 후배한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연습했죠. 속에선 불이 나는데 안 나는 척,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괜찮은 척.(웃음) 항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좀 멍청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생활 내내 몸에 나쁘다는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따로 있었냐는 물음에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등산을 했다”는… 정말 배구만 바라봤던 ‘장윤창’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과 겨룬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배구를 일본한테 배우다 보니 일본팀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일본과 붙으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패배를 맛본 선배들은 일본과 맞붙는 걸 좀 두려워했어요. 반면 저나 김호철, 강두태 이렇게 세 명은 그런 상황을 몰랐으니까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그렇게 신구(新舊)의 조화가 잘 이뤄지다 보니 2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3대 2로 역전승을 거뒀어요. 일본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죠.”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팀 간 신경전은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득점에 성공하면 포효하는 방법이 있어요. 기를 확 눌러버리는 거죠.(웃음) 사실 신경전은 바깥이 아닌 코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공이 공중에 떴을 때 공격하는 사람과 블로킹을 하는 수비수 사이의 눈치싸움처럼요.”
배구선수로서 나름 명성과 내공을 쌓은 그가 왜 배구 지도자의 길이 아닌 교수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제가 은퇴하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까 중압감이 컸어요. 팀이 이기면 ‘장윤창 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지면 ‘장윤창이 못해서’라고 하니 그 부담감 때문에 한 번도 마음 편히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은퇴 후에는 현장이 아니라 내가 못 해본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경기대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은 지도 어언 10여 년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교수와 면담한다고 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은 편하게 와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웃음) 제가 학교에 발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받은 사랑 베풀며 살고파
‘함께하는 사람들’은 1999년 장윤창이 창단한 봉사단체로 황영조, 전이경, 유남규, 현정화, 장재근 등 국민의 사랑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매월 양로원, 보육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간다.
“한 번은 비닐하우스 한 동에 70~80명이 사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가 한창 겨울이었는데 통풍이 안 돼서 그런지 옴진드기가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옷을 빨고 한쪽에서는 샤워를 시켜주고. 근데 옴이 옮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끝나고 샤워하러 가서 소금물로 씻고 또 씻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좀 죄스러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그동안 잠시 쉬어왔던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3년간 황영조 선수에게 운영을 부탁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려고요. 아내가 그 노력을 가정에도 좀 쏟으라고 잔소리하는데…(웃음) 그래도 이해해줘서 항상 고맙죠. 때론 힘들어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전에 봤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국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이들을 회사원으로 따지자면… 사내 커플…? 동료에서 애인으로, 애인에서 부부로! 같은 일을 하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 함께 땀 흘리며 사랑을 키워온 스포츠 선수 부부를 알아봤다.
원정식 ♥ 윤진희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역도 53kg급에서 값진 은메달의 성적을 거둔 윤진희(33) 선수. 시상대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가 8년 만에 복귀해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기에는 그의 남편의 권유와 응원이 한몫했다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다 무릎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겪은 원정식(29) 선수는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윤진희 선수에게 “우리 같이 처음부터 시작해서 최정상까지 올라가 보지 않을래?”라며 다시 바벨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 남편은 부상을 이겨내야 했고 부인은 오랜 공백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낮엔 서로 코치 역할을 해주고 밤엔 격려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같은 종목을 하는 부부로서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일까? 윤진희 선수는 “서로 힘든 점을 이해할 수 있고 조언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다. 반면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운동할 땐 어쩔 수 없이 제일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줘야 해 안 좋다”고 말했다.
안재형 ♥ 자오즈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탁구 남자 단체전 금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따며 이름을 떨쳤던 안재형(54)과 중국의 탁구선수 자오즈민(56)의 결혼 소식은 1989년 큰 화제로 떠올랐다. 특히 그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한국과 중국 간의 국제결혼이란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둘의 첫 만남은 1984년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뤄졌다. 서로를 알게 된 후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비밀연애를 이어나갔다는데! 중간에 둘 사이를 폭로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1989년 스웨덴 스톡홀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혼인신고를 마침으로써 법적 부부가 됐다. 아들 안병훈 씨는 현재 PGA투어(미국프로골프), 유러피언투어에서 골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동문 ♥ 라경민
적에서 동반자가 된 커플도 있다. 바로 한국 배드민턴을 대표하는 최강 혼합복식조 김동문(44)-라경민(43) 선수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만난 박주봉-라경민 조와 김동문-길영아 조. 당시 사람들은 박주봉-라경민 선수의 우승을 점쳤지만 김동문-길영아 조가 역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후에 박주봉 선수는 “김동문 선수가 아내 될 사람한테 엄청 공격을 퍼붓더라”며 그날의 경기를 회상했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박주봉, 길영아 선수가 은퇴하면서 김동문, 라경민 선수는 자연스럽게 혼합복식 파트너가 되었고 14개 대회 연속 우승, 국제대회 70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김동문 선수는 “같은 팀이 되어 운동을 하다 보니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서로 의지하다 애정이 생겼다”고 말했다. 2003년에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당시 김동문의 절친이자 룸메이트였던 하태권 선수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비밀리에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화 중 하나로 김중수 대표팀 감독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두 사람이 진짜 연인관계가 되면 조직력이 더 좋아질까 싶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줬지만 별다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남녀관계는 인력으로 안 되는 것 같다”며 포기했다고 한다. 현재 김동문 선수는 원광대학교 교수로, 라경민 선수는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 중이다.
공병민 ♥ 이신혜
선수촌에서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촬영을? 이 특별한 웨딩 사진의 주인공은 레슬링 국가대표 부부 공병민(27)-이신혜(26) 선수다. 부산체육고등학교 레슬링부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고교 시절부터 연애를 시작해 2014년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일명 ‘쫄쫄이’ 레슬링 유니폼을 입고 웨딩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신혜 선수는 “처음에는 너무 과격해 보일까봐 걱정했지만 레슬링 부부로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마침 남편도 같은 생각이라 진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결혼 전에는 서로를 응원하면 ‘자기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누구보다 남편을 열심히 응원한다는 그녀다. 국가대표 선수인 두 부부에게 선수촌은 그야말로 신혼집과도 같은 곳. 이신혜 선수가 꼽은 태릉선수촌 베스트 데이트 장소는 바로 크로스컨트리 연습장! 산악코스와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어 연습시간이 아닐 땐 거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저녁의 크로스컨트리 연습장은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이라고.
키 157cm의 작은 체구, ‘작은 거인’ 심권호(沈權虎·45)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 선수권에서 총 9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으며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그랜드슬램을 48kg, 54kg 두 체급에서 모두 달성했다. 2014년엔 국제레슬링연맹이 선정하는 위대한 선수로 뽑히며 아시아 지역 그레코로만형 선수 중에선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5년 프라하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쥔 심권호. 그는 일찌감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파블로프와 연장 접전 끝에 4대 0으로 승리하면서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조각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는 100번째 메달이자 애틀랜타올림픽의 첫 금메달이었다. 심권호를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끝으로 그가 속한 48kg급이 폐지된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순간에 최경량급이 54kg이 되었다. 기존의 48kg급 선수 대부분은 이때 은퇴했다. 체중을 불려 변경된 체급에 맞춘 선수들은 평소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권호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48kg에서는 독식을 했지만 그가 54kg으로 옮겼을 때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주위에서 다들 못할 거라고 했어요.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네가 되겠어? 48kg에서는 무적이었지만 54kg에서는 어렵지 않겠냐? 은퇴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근데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번 금메달 따본 경험도 있겠다, 나 자신을 믿고 한계에 도전한 거죠.”
변경된 체급에 적응하기까지는 딱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1998년 예블레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시작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9년 타슈켄트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두 체급 그랜드슬램, 새로운 역사를 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로 선발된 심권호는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란 기록을 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위태로운 순간들도 중간중간 있었지만, 역전승과 테크니컬 폴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 결승에서 당시 54kg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라자로 리바스 선수를 만났다.
“아, 까불더라고요.(웃음)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쿠바 코치석은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고 있더라고요. 저희 쪽은 조용히 있었죠. 신체 조건이나 탄력을 딱 봤을 때 차이가 너무 났었으니까요.”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패시브를 얻은 심권호는 리바스를 좌우로 뒤집으며 8점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수비 상황에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략으로 철통 방어를 하며 점수를 지켜냈다.
“원래는 납작하게 배를 바닥에 붙여서 수비하거든요. 리바스 선수가 절 뒤집는 건 쉬웠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손이 들어올 수 없게 겨드랑이를 닫아버린 거죠. 여기서 겨드랑이가 벌어지면 난 죽는다 생각하고 방어했죠. 나중엔 손이 안 들어간다고 막 심판한테 성질을 부리더라고요.(웃음) 그럼 뭐해요. 반칙이 아닌데.”
지금은 룰이 바뀌어 더 이상 경기 중에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당시 심권호는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끝까지 버텨내며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메달이에요.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메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딴 메달이라 특별하죠.”
북한 강용균 선수와의 특별한 인연
“시드니올림픽 결승전에 올라가기 전에 북한의 강용균 선수는 리바스 선수, 저는 강용균 선수의 상대가 될 선수랑 경기했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류를 했어요. ‘얘는 이런 걸 조심해라, 저런걸 조심해라’ 하면서요. 그리고 같이 단상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켰죠. 저는 금메달, 용균이는 동메달.”
심권호에게 강용균 선수는 조금 특별하다. 1997년 체급 조정 당시 48kg 체급에서 두 명의 선수만 선수생활을 이어갔는데 그 두 명이 바로 심권호와 강용균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강용균 선수를 48kg 시절부터 수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친한 형, 동생이 되었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옷을 줬어요. 제가 처음 용균이를 만났을 때 입던 옷을 그때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시드니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용균이를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용돈도 달러로 챙겨주고. 달러는 좋아하면서 미국인은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웃음) 나중에 나이 들어서 기회가 되면 제자들이랑 한번 만나자 이런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부산아시안게임을 이후로 강용균 선수는 지도자의 길로, 심권호 선수는 은퇴하면서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어언 16년이 지났다.
“용균이가 후배들한테 제 얘기를 종종 하나봐요. 국제대회에 가면 난데없이 처음 보는 북한 선수들이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다음엔 감독으로 나온 용균이를 보고 싶네요. 언젠간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웃음)”
세계 최고 레슬링 선수가 되기까지
“열아홉에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서른아홉에 나왔어요.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거의 기계였어요, 기계. 톱니바퀴.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자야 하네? 자고. 20년 동안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요. 심지어 선수촌 밥이 2주 간격으로 비슷하게 나오거든요? 나중엔 식단도 꿰뚫어봤다니깐요.(웃음)”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치아는 마모되고 귀는 터진 혈액이 그대로 굳어 만두 모양으로 변하지만, 선수들은 이를 열심히 훈련해서 생긴 훈장으로 생각한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또 그 당시 심했던 체벌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남모르게 눈물도 훔쳤고 그럴 때마다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가고 그랬어요. 멀쩡한 친척 여럿 죽였죠.(웃음) 평범한 학생들은 방학이나 명절에 다 집에 갈 수 있잖아요. 근데 운동선수들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체육관에서 로프 타고 바벨 드는 걸로도 모자라 360도로 돌리고 있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고 서러웠죠. 태릉선수촌 나올 땐 거기 보면서 오줌도 안 싼다고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악조건(?) 속에서도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레슬러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털 많은 놈, 냄새나는 놈, 오일 바르고 나오는 놈. 아 정말 짜증나요. 특이 오일을 매일 바르는 터키 선수 같은 경우엔 땀이 나면 땀 자체가 미끌거리거든요. 레슬링 특징상 잡고 돌려야 하는데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손이 쏙 빠지니깐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또 털 많은 선수랑 몸을 밀착시키고 경기를 하다 보면 민감한 부위가 찔리기도 하고… 입에도 들어가고 그래요.(웃음) 그리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은 저 멀리서부터 나기 시작하는데 그럼 3분 안에 끝내야겠다 생각하죠.”
몸도 상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온갖 고생 다 했지만 한 번도 레슬러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다.
“당신은 그럼 레슬링 천재입니까?”
“천재요?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그냥 레슬링을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놀다 보니까 어느 한순간 푹 빠져서 계속 놀았던 거예요.”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