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 그의 금메달이 더욱 빛나는 이유

기사입력 2018-01-25 16:39 기사수정 2018-01-25 16:39

[스포츠 스타]

키 157cm의 작은 체구, ‘작은 거인’ 심권호(沈權虎·45)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 선수권에서 총 9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으며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그랜드슬램을 48kg, 54kg 두 체급에서 모두 달성했다. 2014년엔 국제레슬링연맹이 선정하는 위대한 선수로 뽑히며 아시아 지역 그레코로만형 선수 중에선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5년 프라하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쥔 심권호. 그는 일찌감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파블로프와 연장 접전 끝에 4대 0으로 승리하면서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조각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는 100번째 메달이자 애틀랜타올림픽의 첫 금메달이었다. 심권호를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끝으로 그가 속한 48kg급이 폐지된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순간에 최경량급이 54kg이 되었다. 기존의 48kg급 선수 대부분은 이때 은퇴했다. 체중을 불려 변경된 체급에 맞춘 선수들은 평소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권호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48kg에서는 독식을 했지만 그가 54kg으로 옮겼을 때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주위에서 다들 못할 거라고 했어요.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네가 되겠어? 48kg에서는 무적이었지만 54kg에서는 어렵지 않겠냐? 은퇴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근데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번 금메달 따본 경험도 있겠다, 나 자신을 믿고 한계에 도전한 거죠.”

변경된 체급에 적응하기까지는 딱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1998년 예블레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시작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9년 타슈켄트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 (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두 체급 그랜드슬램, 새로운 역사를 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로 선발된 심권호는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란 기록을 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위태로운 순간들도 중간중간 있었지만, 역전승과 테크니컬 폴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 결승에서 당시 54kg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라자로 리바스 선수를 만났다.

“아, 까불더라고요.(웃음)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쿠바 코치석은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고 있더라고요. 저희 쪽은 조용히 있었죠. 신체 조건이나 탄력을 딱 봤을 때 차이가 너무 났었으니까요.”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패시브를 얻은 심권호는 리바스를 좌우로 뒤집으며 8점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수비 상황에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략으로 철통 방어를 하며 점수를 지켜냈다.

“원래는 납작하게 배를 바닥에 붙여서 수비하거든요. 리바스 선수가 절 뒤집는 건 쉬웠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손이 들어올 수 없게 겨드랑이를 닫아버린 거죠. 여기서 겨드랑이가 벌어지면 난 죽는다 생각하고 방어했죠. 나중엔 손이 안 들어간다고 막 심판한테 성질을 부리더라고요.(웃음) 그럼 뭐해요. 반칙이 아닌데.”

지금은 룰이 바뀌어 더 이상 경기 중에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당시 심권호는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끝까지 버텨내며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메달이에요.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메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딴 메달이라 특별하죠.”


북한 강용균 선수와의 특별한 인연

“시드니올림픽 결승전에 올라가기 전에 북한의 강용균 선수는 리바스 선수, 저는 강용균 선수의 상대가 될 선수랑 경기했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류를 했어요. ‘얘는 이런 걸 조심해라, 저런걸 조심해라’ 하면서요. 그리고 같이 단상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켰죠. 저는 금메달, 용균이는 동메달.”

심권호에게 강용균 선수는 조금 특별하다. 1997년 체급 조정 당시 48kg 체급에서 두 명의 선수만 선수생활을 이어갔는데 그 두 명이 바로 심권호와 강용균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강용균 선수를 48kg 시절부터 수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친한 형, 동생이 되었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옷을 줬어요. 제가 처음 용균이를 만났을 때 입던 옷을 그때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시드니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용균이를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용돈도 달러로 챙겨주고. 달러는 좋아하면서 미국인은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웃음) 나중에 나이 들어서 기회가 되면 제자들이랑 한번 만나자 이런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부산아시안게임을 이후로 강용균 선수는 지도자의 길로, 심권호 선수는 은퇴하면서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어언 16년이 지났다.

“용균이가 후배들한테 제 얘기를 종종 하나봐요. 국제대회에 가면 난데없이 처음 보는 북한 선수들이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다음엔 감독으로 나온 용균이를 보고 싶네요. 언젠간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웃음)”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沈權虎·45)(오병돈 프리랜서 obdlife@gmail.com)

세계 최고 레슬링 선수가 되기까지

“열아홉에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서른아홉에 나왔어요.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거의 기계였어요, 기계. 톱니바퀴.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자야 하네? 자고. 20년 동안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요. 심지어 선수촌 밥이 2주 간격으로 비슷하게 나오거든요? 나중엔 식단도 꿰뚫어봤다니깐요.(웃음)”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치아는 마모되고 귀는 터진 혈액이 그대로 굳어 만두 모양으로 변하지만, 선수들은 이를 열심히 훈련해서 생긴 훈장으로 생각한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또 그 당시 심했던 체벌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남모르게 눈물도 훔쳤고 그럴 때마다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가고 그랬어요. 멀쩡한 친척 여럿 죽였죠.(웃음) 평범한 학생들은 방학이나 명절에 다 집에 갈 수 있잖아요. 근데 운동선수들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체육관에서 로프 타고 바벨 드는 걸로도 모자라 360도로 돌리고 있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고 서러웠죠. 태릉선수촌 나올 땐 거기 보면서 오줌도 안 싼다고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악조건(?) 속에서도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레슬러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털 많은 놈, 냄새나는 놈, 오일 바르고 나오는 놈. 아 정말 짜증나요. 특이 오일을 매일 바르는 터키 선수 같은 경우엔 땀이 나면 땀 자체가 미끌거리거든요. 레슬링 특징상 잡고 돌려야 하는데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손이 쏙 빠지니깐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또 털 많은 선수랑 몸을 밀착시키고 경기를 하다 보면 민감한 부위가 찔리기도 하고… 입에도 들어가고 그래요.(웃음) 그리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은 저 멀리서부터 나기 시작하는데 그럼 3분 안에 끝내야겠다 생각하죠.”

몸도 상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온갖 고생 다 했지만 한 번도 레슬러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다.

“당신은 그럼 레슬링 천재입니까?”

“천재요?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그냥 레슬링을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놀다 보니까 어느 한순간 푹 빠져서 계속 놀았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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