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시간이 여유로울 때는 지난 영화를 검색해서 다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최근에 본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2017년 개봉작으로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 감독의 데뷔작이다. 남편의 동유럽 출장에 동행하려다 감기가 걸리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긴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이 남편 동료의 제안으로 프랑스를 여행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감독 데뷔 전에는 ‘회상, 지옥의 묵시록’과 같은 다큐멘터리 연출도 했고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설치미술가, 작가 등 다양한 이력이 있다.
여주인공 ‘앤’역은 배우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 맡았다. 초반에 잠깐 등장한 남편 ‘마이클’역은 ‘알렉 볼드윈(Alec Baldwin)’이, 프랑스의 연출 겸 작가, 배우로 활약하는 ‘아르노 비야르(Arnaud Viard)’가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역으로 나와 프랑스 남동부 곳곳을 안내한다.
자꾸 어딘가를 들르는 ‘자크’에게 ‘앤’은 “파리, 오늘은 갈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 ‘자크’ 는 “걱정 말아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라고 센스 있는 대답을 한다. 결국 칸에서 파리까지 7시간이면 오는 파리를 거의 40시간 만에 도착하게 된다.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이때 경험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약 6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남편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의 든든한 외조 덕에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은 자신의 이야기를 에 녹여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하는 이 영화는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와 제60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제35회 뮌헨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별하지 않은데 설레게 하는 영화
화면에는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프랑스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칸을 출발하여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는 중년 남녀의 모습 역시 청춘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의 설렘을 준다.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리는 리옹에서는 세계 최초로 영화를 제작한 뤼미에르 형제의 ‘뤼미에르 박물관’이 나온다. 도시의 세련됨과 여유로움이 있는 리옹에서 가장 큰 ‘폴 보퀴즈 시장’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앤’의 작은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프랑스 정통 와인과 프렌치 푸드의 다양한 색감과 화려함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행 중에 ‘앤’이 먼저 가자고 한 곳이 한군데 있다. 성모 마리아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진 ‘성 막달레나 대성당’ 이곳에서 ‘앤’은 마음 깊이 있던 자신의 상처 하나를 ‘자크’에게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다.
남편의 사업 동료가 안내하는 여행은 내내 정중하고 사려 깊다. 특별하지 않은데 아련하게 다가온다. 두 중년 배우가 주는 원숙미와 프랑스 거리의 풍경들. 두 사람의 여행이 길어지면서 불안해하는 남편의 반응과 호들갑스럽지 않지만 덤덤하게 드러나는 서로에 대한 관심도 재미있다.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교과서에서도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민족의 뿌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 탁성에 파장 깊은 목소리는 빠르게 내달렸지만, 여성 방청객이 많았던어느 날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투박하고 투쟁적이었다고나 할까?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한 남자에게 다가가 시간을 드릴 테니 못다 한 뒷얘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시대의 풍파를 억척스럽게 이겨낸 예술가이자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김봉준(金鳳駿·63)은 한 일도 또 할 일도 많다.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헤매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두 시간 정도 거리. 찻길을 지나 숲길, 논길, 밭길을 거쳐 다다르면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곳,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이하 신화미술관)이 있다. 김봉준 관장이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24년째다. 서울 토박이 김봉준 관장은 도시 삶의 피로감을 피해 시골로 탈출을 감행(?)했다고 말을 꺼낸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왔어요. 직장생활도 해본 적이 없고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질서에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요. 생존하려고 적응하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그러니 20년 넘게 여기서 살아온 것입니다.”
강원도 산골까지 왜 왔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다가도 ‘천생 팔자이고 운명’이라는 답에 이른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과 아픔 또한 신화미술관에 담으며 살아왔다.
“나를 치유하고 거듭나지 않았으면 온전하게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망가졌겠죠. 죽었거나 정신병자가 됐거나. 신화미술관 건물도 제가 지었어요. 꿈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에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신화미술관은 김봉준 관장의 안식처이자 낙원이다. 어릴 때부터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기 때문. 이 상처를 끊어내기 위한 여정의 결과가 신화미술관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랐어요. 그게 트라우마가 됐죠. 한국전쟁 직후 세대인데 전쟁으로 인한 폭력 문화가 그대로 계승된 사회였습니다. 군인 출신 아버지에 군대를 경험한 선생이 있는 학교. 체벌이 너무 쉽고 당연한 사회였죠.”
김봉준 관장은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2차 폭력을 가하는 야만적 해소 대신 트라우마를 풀 수 있는 예술을 택했다.
“‘예술가가 되고 싶다’라기보다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이 더 컸죠. 딴 전공은 생각해본 적 없이 홍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입대한 군대에서도,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할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같이 운동하는 선배한테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예술을 하는 입장이니 마음도 여리고 폭력을 당한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것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눈뜬 것이 바로 탈춤이었다. 역동적인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다.
‘굿’은 풍물 자체이자 문화의 뿌리다
“제가 그때 풍물에 미쳤어요. 홍대 탈춤반을 데리고 1970년대에 우리 가락이 있던 곳을 찾아서 답사를 다녔어요. 전라북도 남원, 진안, 임실이 풍물로 가장 유명해서 찾아갔습니다. 남원 산골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농악’이란 말을 못 알아듣더라고요. 열심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그제야 ‘굿, 우리 굿이 셌지’라고 하셨어요.”
농악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우리 가락을 깎아내려서 부른 말이었다. ‘굿’의 의미에는 무당의 굿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풍물, 마을 전체를 합쳐서 하는 큰 행사를 대동굿, 별신굿이라 불렀어요. ‘굿 구경 가자’ 하는 것이 예술굿이었고, ‘두레굿하자, 풍장굿하자’ 하는 것은 노동굿이었죠. 노동의 조직만이 아니라. 이 마을의 난리굿이 셌어. 의병굿이 셌어. 이런 말도 해요.”
당시 일제는 조선민속연구를 통해 조선 사람의 조직적인 힘의 원천이 굿에 있다고 보고 이를 없애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병운동도 당시 사람들은 ‘의병굿’으로 불렀으니 굿이라는 말이 지금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민중의 언어는 한자말이 아니잖아요. 그 말을 써왔고 굿이 다 그 말을 포괄했다고요. 동학굿을 난리굿이라고 불렀어요. 동학 때 그냥 갔을 거 같아요? 풍물굿이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신앙으로서의 굿이 있단 말이야. 그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자기 신앙. 옛날부터 뿌리 신앙 굿이었던 거죠.”
탈춤에 미쳐 있던 시기 자연스럽게 탈에 표현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불화(佛化)를 배우게 됐다.
“옛날 탈을 만들려고 보니까 대학에서 배운 그림 기법으로 안 되는 거야. 가만 보니까 단청 그림하고 비슷해. 양식이 내가 배운 수채화나 유화로는 표현할 수 없겠더라고.”
고민하다 보니 탈에 표현된 느낌이 단청하고 같은 양식이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그림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인간문화재인 봉원사의 만봉 스님을 찾아갔다.
“대처승이던 만봉 스님이 단청 장인이었어요. 어떤 절이든 상관없이 주문이 오면 후불탱화를 그려주는 분이셨어요.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사람은 배우겠다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가 있어서 한 달에 얼마씩 지원금이 나왔고 저는 무료로 불화를 배웠습니다.”
만봉 스님에게 배운 불화는 고대부터 내려온 화법이었다. 대학교의 동양학과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고유의 것. 그렇게 대학 생활 3년 동안 힘을 기울여 배운 불화는 김봉준의 그림과 조각, 글씨에 그대로 배어 여전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유학을 포기하고 신화미술관 문을 열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 생활을 했던 김봉준 관장은 탈춤을 계기로 접하게 된 마을 문화와 지역 신앙, 정신에 매료되기에 이른다.
“마을 문화를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외국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친구들 대개 뉴욕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는 거야. 미대 조소(彫塑)학이다 보니 서양을 유학의 성지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나는 거꾸로 이리로 온 것이죠. 더 공부해야겠다. 그래서 마을 문화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역 문화 축제를 열고 관여하다 2007년에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지역 문화 만들기 프로젝트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신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2008년 10월에요.”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 탈춤으로 시작해 굿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왜 탈춤이 아닌 신화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신화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죠. 굿을 뿌리로 한 신화 구조이죠. 신화에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가 있고, 일종의 기도, 음악, 춤, 미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신화미술관 안에는 김봉준 관장이 직접 제작한 다양한 형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신상을 모아놓은 구역이 있고, 건국신화를 비롯해 창세, 토템(동물상), 저승, 도깨비, 마을의 신화를 모아놓은 것이 각각 있다.
“현대 사회는 마을을 무시하지만 아주 중요한 단위입니다. 가족, 마을 문화가 무너진 광장 문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뿌리가 없는데 시민사회 공동체가 이뤄지겠어요? 사람도 세포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마을 문화도 일종의 세포입니다.”
암 환자의 의지, 씩씩한 조각상으로
초야에 묻혀 사는 것처럼 보여도 김봉준 관장은 지극히 사회 참여적인 인물이다. 광화문에서 열렸던 촛불 집회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찾아가 유족들을 위로하는 조각상과 판화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화가로, 탈춤에 빠져 있었던 연출가로, 시민운동가로 살고 있다. 그저 마음이 가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행동하고 반응하는 전천후 예술가의 삶이 김봉준 관장의 하루하루에 녹아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병이 든 줄도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부천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이곳으로 왔는데 임파선암 3기 말이었어요. 자가진단을 한 것이 잘못이었어요. 위쪽인 줄 알고 위 내시경만 했거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된 상태였어요. 암 치료받은 지 17년 됐고 아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은 아프고 난 다음에 지었다고 했다. 암과 한바탕 결투를 벌인 이후 만든 조각상이라 씩씩하고 힘찬 느낌이라고.
“암에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잖아요. 절망의 시기를 겪고 죽음의 절벽과 언덕을 넘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블랙리스트 인생이 지금의 나를 만들다
“나는 3번의 블랙리스트를 겪은 거 같아.”
1980년대에는 5·18 포고령 수배자였다. 1년 후 다행히 포고령이 풀려 개과천선하고 살 수 있나 싶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들고 나온 보안사 민간인 사찰 문건에도 김봉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지난 정부 9년 동안 그는 예술가 지원 정부 사업에서 제외됐다. 인터뷰 초반 ‘자유롭게 살아왔다’는 말은 알고 보니 당시를 추억하는 씁쓸한 넋두리였다.
“근데 말이지 문화 창조는 비주류에서 나온다고. 지금은 주류에 임박했는데(웃음).”
과거 그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없었다. 탈춤을 찾아 방황하고 탈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배움의 길을 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 졸업을 해도 이미 사회에서 계속 찍혀왔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어요.”
신화미술관 한편에는 그림이 빼곡히 걸려 있다. 동양적 색채가 강한 그림과 광장을 표현한 판화 등 다양하다. 지금의 정권이 아니었다면 걸어놓지도 못했을 거라고 웃어 보인다.
“그런데 촛불 집회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꼭꼭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판화도 다양하게 많은데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컬렉터들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 눈치도 빠른 거 같아요. 춥고 배고플 때 좀 사주지(웃음).”
생업 작가로서의 삶은 계속된다
정말 본의 아니게 전업 작가로 살아온 60여 년의 세월이다. 홍대 미대 출신, 깔끔하고 단정하게 뉴욕의 화랑에서 멋들어진 전시회 여러 차례쯤은 열었을지도 모를 사람. 그러나 많은 시간을 숨어 살았고 민족의 뿌리 문화를 찾아 헤맸으며 지금은 신화와 숨 쉬는 인생을 살고 있다.
“나 그래도 판화도 팔고,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글씨도 써요. 70년대부터 스님으로부터 고법으로 붓을 쓰는 법을 잘 배웠잖아(웃음).”
예술가로서 마음속으로 꿈꾸는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물었다.
“과정에서 좋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가는 거겠죠. 내 세대의 징검다리에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로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야겠죠. 내가 가는 길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나 또한 예술을 배반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뿌듯합니다. 당당합니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곱게 늙은 여배우 다이안 레인, 프랑스의 아름다운 풍광, 여행길에서 남편 아닌 남자에게 느낀 40여 시간의 미묘한 이성적 감정 등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영화 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딸도 2017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코폴라 감독의 아내 엘레노어 코폴라가 80세에 만든 첫 장편 상업영화다. 일단 코폴라라는 이름만으로 믿고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80세의 나이에서 오는 솔직함이랄까, 남편이 아닌 남자와 40시간 동안의 자동차 여행은 엘레노어 코폴라의 실화였는데, 감추기 어려운 감정들을 오히려 남편이 도와줘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앤(다이안 레인 분)은 남편(알렉 볼드윈 분)과 전세 비행기로 칸에서 부다페스트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앤이 귀가 아파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하자 남편의 사업 동료인 자크(아르노 비아르 분)가 자기 차로 파리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한다. 7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자크는 군데군데 들르며 시간을 지체한다. 앤은 빨리 파리로 가자며 재촉하면서도 자크의 낭만적인 매력에 점차 빠져든다. 자크는 앤에게 파리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며 능청을 떤다. 남편은 바람기 많은 프랑스 남자를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자크는 여행 중에 틈틈이 늑대로 변할 소지가 있었지만, 파리까지 앤을 잘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 파리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끝나지만, 앤은 자크와의 재회를 암시하는 여운을 남긴다. 자크는 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묻는다.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지만, 행복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남편과 살 만큼 산 유부녀의 틈새를 노린 질문이다. 일부일처제의 지루함을 찌른 바람둥이 프랑스 남자의 수작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영화제로 유명한 칸에서부터 프랑스 남동부를 영화로 돌아보는 것이다. 실제로 관광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액상 프로방스, 로마의 유적 가르 수도교,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과 뤼미에르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포도주와 음식들이 등장한다. 스토리상으로는 안 넣어도 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풍광을 담으려고 여기저기 들른 것으로 보인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다이안 레인의 매력이다. 1965년생으로 170cm의 늘씬한 여배우다.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던 소피 마르소처럼 책받침 미녀로 유명했다지만, 오십 고개를 넘다 보니 많이 늙기는 했다. 그러나 곱게 잘 늙었다.
영화가 굳이 심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시간 반을 영화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사상이나 이념같이 불필요하게 무거운 지적 허세도 있지만,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는 경쾌한 코미디도 있고, 말초 감정을 자극하는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요즘 문화 트렌드에 맞춘 실용적인 영화도 등장한다. 예컨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영화, 먹는 걸 즐기는 이를 위한 먹방 영화.
모처럼 영화 시사회에 초대되어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의외로 남편이 순순히 따라나선 데는 주연인 다이안 레인의 힘이 컸다. 어떻게 늙어가나 보자는 핑계로 동행했다.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필자는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파리로 가는 길이라니. 이제는 오래되어 낡은 흑백 사진처럼 빛바랜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정도가 떠오르는 20년 전의 기억을 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왕성한 홍보가 없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스크린이 몇 안 되는 작은 영화였다. 다만 코폴라 가문의 영화라는 브랜드가 박혀 있어 짝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가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미 상당한 필모그라피를 쓰고 있으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낯설다. 그녀는 프랜시스 코폴라 아내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을 따라 칸에 온 앤(다이안 레인)이 갑작스러운 귀의 통증으로 다음 행선지인 프라하로 떠나지 못하고 남편과 떨어져 마이클의 동료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의 안내를 받아 파리로 직접 간다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런데 하루면 도착할 길을 40시간이나 걸려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책 없이 낭만적인 프랑스 남자 덕분이다.
대부분의 낭만적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이 영화도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승지의 풍광이 있고, 곳곳마다 풍성한 음식이 있으며, 맥락은 없지만 적절한 로맨스가 조미료처럼 들어 있다. 게다가 미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라니! 캐릭터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익숙하고 우아한 미감의 엔틱 가구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의자인 셈이다.
별다른 스토리가 없다 보니 프라하로 떠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은 줄곧 전화에다 대고 “프랑스 남자 조심해!”만 되뇌고 있고, 도덕적인 미국 여자는 “파리로 곧장 가요.”라는 대사만 읊고, 느글느글한 프랑스 남자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간혹 풀밭에서 피크닉 기분을 내며 세잔의 ‘풀밭 위의 식사’ 장면을 패러디 한다든가 하는 재치는 보이지만, 대체로 익숙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이야기의 빈곤을 느낀 감독이 끼워 넣은 장면들은 맥락이 분명치 않아 조화를 깨뜨린다. 예컨대 우연히 엿들은 전화 통화에서 돈에 쪼들리는 자크의 상황을 드러내는 장면은 그의 허세를 과장하려는 의도겠지만 뜬금없고, 서로 어두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내용은 작위적이다. 아무리 프랑스라 해도 동료의 아내에게 필요 이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코폴라 사단의 도움 때문인지 영화는 더 이상 일탈 없이 적절하게 마무리된다. 80대에 접어든 엘레노어의 데뷔작치곤 박수를 보낼만하다. 홍보의 필요로 그랬겠지만, 주연급으로 소개된 알렉 볼드윈은 사실 카메오라 해도 할 말 없는 정도로 5분 뒤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한 시간 반 동안 프랑스 관광과 음식 구경 푸짐하게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당신이 날 살릴 수 없으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요.”
죽어가는 비올레타가 그토록 간절히 그리던 알프레도의 품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공연된 유럽 오페라가 주세페 베르디의 라고 한다. 1948년 명동의 시공관에서 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뒤마의 소설 '동백꽃 연인'(La Dame aux Camelias) 이 원작인데 베네치아에서는 1853년 3월 6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 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초연되기 95년 전이다.
한국초연 오페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 한국에서 가장 많이 올려진 오페라, 여성성악가가 가장 부르고 싶어 하는 오페라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작품의 시놉시스는 18~9세기 중엽으로 원 제목은 이며 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애칭이다.
그녀는 한 달의 25일은 흰 동백꽃,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꽃을 들고 사교계나 극장에 귀부인처럼 화려하게 나타난다. 이는 그녀가 몸을 판 대가였다. 이런 그녀에게 양가의 순수한 청년 알프레도가 나타나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정열적인 사랑에서 참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파리 교외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3개월이 그들에게 허락된 사랑의 전부였다. 그녀는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의 간곡한 부탁으로 알프레도와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다시 파리로 떠난다. 사랑하는 알프레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정을 내리지만 이를 오해한 알프레도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복수심에 불타 방랑의 길을 떠난다. 뒤늦게 아버지에게서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만나러 달려오지만 이미 그녀는 폐병이 심해져서 더 살기 힘들 것이라는 주치의의 말을 들은 후였다.
그를 만날 수 없어 차라리 죽기를 기다렸던 비올레타는 알프레도를 만나자 더 살 이유가 생겼다며 잠시 희망을 갖는다. 알프레도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이고, 같이 행복한 시간을 갖자며 청혼한다.
“당신이 날 살릴 수 없으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요.”
이 말을 들으며 알프레도는 이제야 만나게 된 자신을 원망하며 오열한다. 애통하는 알프레도의 가슴에서 그녀는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은 파리의 고급 창녀이며 미모로 당시 이름을 떨쳤던 마리 뒤프레시를 모델로 소설화했다고 한다.
비올레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거짓사랑을 놀이삼아 고급 창녀로 살던 그녀에게 진실한 사랑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 앞에선 너무 쉽게 무너졌다.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첫사랑을 시작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다. 재산도 건강도 명예도 모두가 진실한 사랑에 견주기엔 무가치했기 때문인가. 사랑에 빠질 때면 그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이 되는 것인가 보다.
봄의 정서와 딱 맞는 오페라여서인지 주옥같은 아리아와 비올레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봄이면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뭔가를 늘 계산하는 현대인들은 이런 맹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지 않다. 별로 내세울 것 없어도 가문이나 재산이나 학벌이나 가족이나 따지고 계산할 것이 많다. 그래서 열정적인 사랑의 갈망을 이런 대리 만족을 통해 털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절한 사랑의 느낌, 애절한 보고픔에 괴로워하는 연인, 사랑하므로 증오하는 애증 등이 전달되어 필자에게도 4월의 어느 멋진 날이 되었다.
4월의 ‘한 달 여행’ 시리즈는 ‘길 위에 오두막 별장 만들기’다. 한 달간 스페인의 ‘순례자 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그 시작점은 피레네 산맥을 등에 기대고 사는 프랑스 산간 마을, 생장피에드포르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설 준비를 한다.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전 세계의 ‘시니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프랑스 페이 바스크의 아름다운 소읍, 생장피에드포르
프랑스의 남서부, 스페인과 이웃한 작은 도시가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다. 이 산간 마을의 이름은 페이 바스크(Pays Basque)다. 분명 프랑스령이지만 국가에 완벽하게 귀속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전통 색깔을 강하게 지켜나가는 바스크인의 영토다. 이들은 피레네 산맥 지역에 사는 소수 인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1000년도 넘은 천년고도 ‘생장’에는 바스크 지방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암 벽돌로 지은 바스크식의 아름다운 가옥들. 건물마다 이름을 새겨놓은 것도 바스크의 전통이다. 마을은 그림 같다. 성당의 종탑에서는 미사의 종소리가 울리고 맑은 니베 강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이 마을엔 사철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야고보의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을 준비를 하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산티아고’까지 총 800㎞를 걷는 대장정을 시작하는 순례자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필자가 머물던 숙소지기는 “완주하고 나면 다시 태어날 것이다”라는 말로 격려한다.
고산에 피어난 야생화에 고단함을 푸는 시간
‘생장’을 벗어나 ‘운토’ 마을에 이르면 넓은 호밀밭이 펼쳐진다. 야트막한 푸른 언덕에 그림 같은 집들이 군데군데 들어선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 이 지역은 고도여서 사람 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자연 조건이 좋아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초기에는 유목민이었다가 서서히 정착생활을 해나갔다. 아름다운 고원의 풍경에 빠져 걷다 보면 첫 번째 사설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숙소)인 ‘오리손(Orison, 770m)’을 만난다. 올드 팝이 들리는 깔끔한 바다를 마주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의 휴식을 가진 뒤에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가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민가 한 채 없는 허허벌판과 가파른 산길만 있다. 걷는 길이 힘겹지만 가끔 벗이 되는 것들이 있다. 군데군데 피어난 야생화 군락지다. 4월에는 주목나무 잎을 가졌지만 골담초처럼 노란 꽃을 피워내는, 가시 박힌 나무가 온 산하에 펼쳐진다. 벤타르테아 언덕(Collado de Bentartea, 1344m)의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서면 깜짝 놀란다. 한국의 깊은 산에서만 보던 얼레지와 흡사한 야생화가 피어 있기 때문이다. 피레네 산맥에 피어난 아름다운 보랏빛 꽃은 여린 꽃잎을 파르르 떨고 있다.
봄의 잔설과 약수터에 서린 ‘롤랑’의 전설
이 고갯길부터는 우측 능선이 확 트여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운무 자욱한 평원과 저 멀리 있는 고산의 산정엔 봄철까지 눈이 남아 하얗다. 넓은 초지 사이로 몇 채의 목장 건물이 들어앉아 있고 고원의 바람 따라 구름도 함께 춤을 춘다. 행여 산정을 못 넘는 순례자를 위해 바위 틈새에는 대피소가 마련돼 있다.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 들고 휴식을 취하는 곳. 체하지 말라는 듯 ‘롤랑(Roland)의 샘’이 반긴다. 롤랑 백작이 이 산맥을 넘을 때 마셨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약수터 이름이다. 이 약수터를 기점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나뉜다. 롤랑은 11세기(혹은 12세기 초)에 씌인 중세 유럽 최대의 서사시인 ‘롤랑의 노래’에 등장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롤랑은 프랑스 샤를마뉴(742~814) 대제의 군대를 이끌고 론세스바예스 요새로 가다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바스크족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샤를마뉴 대제가 바스크족을 전멸했다는 게 이 서사시의 주요 스토리다. 이 작품이 전설인지 실화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롤랑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바스크족의 요새,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약수터를 지나면 피레네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레푀데르 언덕(Collado de Lepoeder, 1430m)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의 내리막길. 고갯길을 조금 내려오면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고 팻말이 나온다. 한쪽은 3km이고 다른 길은 3.6km. 어느 쪽을 선택하든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일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정도로 힘겹다. 딱 봐도 롤랑 장군이 단련된 바스크족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고개를 내려서면 산맥의 협곡 깊숙한 곳에, 외따로 자리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이 있다. 여전히 요새와 같은 곳. 안내소와 두 동의 알베르게, 식당 두 곳, 서점 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다. 어쨌든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일단 발을 뗀 이상 포기할 수도, 되돌아갈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오직 두 다리로 걷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변화무쌍한 이곳의 봄 풍치는 평생 기억에 남는다.
Travel Data
교통편 파리로 입국하는 게 가장 좋다. 파리 몽파르나스 역에서 바욘 역까지 테제베를 이용하고, 바욘 역에서 생장피에드포르까지 가는 두 량짜리 기차로 갈아타면 된다.
걷는 코스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운토(Hunto, 5km)-오리손(Orison, 3km)-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17km). 총 25km.
현지 정보 ‘생장’에 도착해 ‘산티아고 협회’에서 신청서를 작성하면 순례자 증명서를 준다. 협회에서는 그날 묵을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도 정해준다. 피레네 산맥은 고지대라 거의 산행에 가까우므로 트레킹화보다는 등산화가 좋다. 해빙기 때는 눈이 남아 있고 길도 질퍽거리는 데다 기후 변화도 잦다. 또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는 빵, 음료 등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일요일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영 자신이 없다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까지 이동한 뒤 순례를 시작하면 된다. 배낭은 절대적으로 가벼워야 하고 힘들 경우 배낭을 미리 보내면 된다.
순례자의 길 산티아고의 길(19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은 생장~산티아고까지 총 800km다. 완주하는 데 한 달 정도 예상하면 된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카미노(camino)’ 한마디면 다 통한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road)’이라는 뜻이다. 카미노 여행의 매력적인 장점은 기간 대비 비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다. 내 발로 걸으니 교통비도 들지 않고,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 사용료도 매우 싸다. 이곳에서 취사, 세탁 등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여행 적기 ‘산티아고 성인의 날’은 7월 25일. 이때는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몰려온다. 봄과 가을이 가장 좋다. 겨울은 절대 ‘비추’다. 많은 한국인이 준비 없이 떠나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스페인 친구가 전해주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이 여행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빨리 완주하고 싶어 하는 한국인의 속성이다. 욕망이 앞서면 결코 여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없다. 힘들면 코스는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가장 좋은 10일 코스를 선택하고 스페인 일반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스페인은 한 달 이상 여행할 가치가 있는 나라다.
한 달쯤 전에 유럽 몇 개국을 오랜만에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젊은 시절의 부푼 기대나 해방감,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던 흥분은 이제 없었지만 며칠 동안이라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홀가분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은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 썼듯이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외국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속에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일상으로부터 헤어나는 일이며 나를 다른 세상에 세워보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로부터 ‘다른 저기’로의 이동을 통해 인간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순전히 상한 삶을 새로이 하려는 시도가 여행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고 썼습니다.
벨기에 여행 중 중풍으로 쓰러져 파리로 돌아온 끝에 사망한 보들레르는 일상이 기억나지 않는 곳, 다른 곳, 먼 곳, 다른 대륙으로 가는 걸 늘 꿈꾸었습니다. 그는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환자는 난방장치 앞에서 앓고 싶어 하고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어야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건강을 위해 걷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졌지만, 그런 이들의 도보여행도 상한 삶, 모자라는 삶을 기우고 채우는 일입니다. 40일 가까이 걸어야 하는 스페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에 가는 길)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의 선배 한 분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세 번을 울었답니다. 어느 성당 앞에 혼자 앉아서 종소리를 들으며 저녁노을을 볼 때, 들판 가득 메운 빨간 양귀비를 흔드는 바람 속에 꽃과 함께 섞였을 때, 비가 갠 다음 날 아침 곱다 못해 서러운 일출을 보았을 때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이 여행으로 그는 맑아져 돌아왔습니다. 그 맑음과 성취감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반드시 외국이 아니더라도 낯선 곳으로 가는 것, 모르는 풍광과 사람을 접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모두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꽃 핀 봄밤의 즐거움을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 ‘춘야원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는 “무릇 하늘과 땅은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시간의 나그네로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고 시작됩니다. 이어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린다 한들 얼마나 되랴/옛사람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 논 것은 과연 그 까닭이 있도다.”[而浮生若夢 爲歡幾何 古人秉燭夜遊良有以也]라고 했습니다.
세상이라는 여관에 머무는 우리들 나그네는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언론인 오소백(吳蘇白·1921~2008)은 ‘단상’이라는 글에서 “여행량은 인생량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는 사람은 한 페이지밖에 못 읽는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여행을 해야 합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썼듯이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구성하는 게 인간과 사물에 대한 학습,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세상에 대한 여행 아니겠습니까?
개인의 여행은 그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에 대해 많은 변화를 몰고 옵니다. 모로코 출신 중세 이슬람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는 데 체류기간까지 합쳐 25년이 걸렸습니다. 64년의 생애 중 25년이면 철들고 나서 절반의 생애를 바친 셈인데, 그의 여행을 통해 세계는 좀 더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그보다 앞서 중국 천축 등을 24년간 여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 세계사, 특히 서양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행에 대해 발섭(跋涉)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시경에 나옵니다. 발은 넓은 광야를 걸어가는 것, 섭은 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여행이란 광야를 걷고 물을 건너가는 일입니다. 여행의 규모와 거리에 대해서는 장자의 붕정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이 동양의 언어를 지배해왔습니다. 상상의 새인 붕(鵬)은 크기가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를 정도이며 물을 치면 3천리에 파도가 일고 회오리를 일으켜 날아오르면 높이가 9만리에 이르는데, 6개월을 날아서야 한 번 쉰다고 합니다. 원대한 뜻을 지닌 사람의 일은 소인배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뜻이지요. 같은 여행을 하더라도 남기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이들이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상찬하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중국 문명과 문물에 대한 정밀하고 방대한 관찰과 기록이 읽는 이를 압도합니다. 연암은 이 책의 ‘도강록(渡江錄)’에서 아득하고 묘막(渺漠)한 요동벌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그리고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는 고금에 빛나는 멋진 말을 합니다.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도보여행객이 흘린 소리 없는 눈물과, 여기 나오는 연암의 소리 내는 울음은 다릅니다. 연암은 ‘울음터’ 다음에 인간이 꼭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는 긴 울음론을 펼치는데, 두 경우 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인식이나 깨달음에서 비롯된 울음이지요.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과, 거대하고 웅장해 숭고미를 느끼게 하는 것을 볼 때의 울음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은 기록입니다. 아니 여행은 기록이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떤 작품은 중국 옌볜(延邊)에서, 어떤 작품은 독일에 가서 썼습니다. 머무는 동안 그곳의 책을 많이 사서 보았다고 합니다. 여행이라는 직접 경험에다 독서라는 간접 경험을 결합한 글쓰기인데, 독서와 여행의 중요성을 갈파한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했지만, 한 번 생을 받아 이 땅에 온 사람은 세상을 남김없이 돌아 괴테처럼 ‘하늘이 어디서나 푸르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고요하게 자신의 방에 머물러도 될 것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아니면 여럿이서 여행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번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