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폰카’로 사진을 찍는 세상이다. 별다른 스킬과 강박이 없는 채로 스마트폰을 들이대 일상에 널린 사진 소재와 디자인 요소를 포획한다. 사진으로 유희하고 자랑하고 소통한다. 사진으로 이렇게 나를 표현한다. 낡은 빈티지 카메라를 탐닉하는 이들까지 출현했다. 사진은 이제 일부 애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중과 사진의 사이가 이토록 긴밀한 시대가 있었던가. 그러나 국내에 사진 전문 미술관은 뜻밖에도 별로 없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뮤지엄한미’가 그래서 반갑다. 삼청공원 들머리 한적한 고샅에 있다.
삼청동에는 미술관이 많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까지 걸어보라. 저마다 독특한 외관을 가진 미술관 10여 곳이 눈에 띈다. 갤러리현대, 금호미술관, 아트큐브,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등등…. 미술 작품을 즐기며 한나절 소요하기 좋은 동네다. 미술관들이 펼치는 예술적 레이스로 개성과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이제 뮤지엄한미가 가세했다. 큰길에서 벗어나 한갓진 느낌을 주는 야트막한 언덕길 옆에 있다. 도회 복판이지만 소음과 소란을 따돌린 입지다. 심지어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풍겨 첫눈에 호감이 간다.
뮤지엄한미는 송파구 방이동 한미약품 사옥에 있던 한미사진미술관 본관을 삼청동으로 옮기면서 거듭난 미술관이다. 즉 한미사진미술관을 기반으로 재탄생한 뮤지엄이다. 2년여에 걸친 이전 작업을 통해 2022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2003년에 개관한 한미사진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20여 년간 사진 전시는 물론 소장품 수집, 작가 지원 사업, 출판과 교육 사업을 펼쳤다. 학술 연구기관인 한국사진문화연구소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한미사진아카데미를 설치해 사진예술 연구와 보급을 위한 갖가지 콘텐츠를 가동하기도 했다. 사진 전문 미술관이 전무했던 시절에 발군의 역량을 가지고 탕탕 행진했던 셈이다. 뮤지엄한미는 그 20여 년간 축적한 성과와 실력을 돛으로 삼아 더 광활한 사진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개관했다.
뮤지엄한미의 건물 외관이 야기하는 인상은 뭐랄까, 허세 없는 말쑥한 패션을 입어 단정하다. 또는 단아하다. 담백하지만 싱겁지 않고, 세련됐지만 요란하지 않다. 따뜻한 손을 조용히 뻗어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운? 은근한 내향적 기풍이 느껴진다. 건축가 민현식(건축연구소 기오헌 대표)이 설계했다. 그는 파주출판도시 설계, 수원화성역사문화도시 기본계획 등의 작업을 통해 특유의 건축적 이론을 실천한 인물로, 자주 건축적 논쟁의 중심에 선 원로다. 전통 건축의 중요 요소인 마당의 의미를 근간으로 한 ‘비움의 구축’을 키워드로 삼은 설계로 독자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해왔다.
로비로 들어서자 공간 한 면의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2층 건물 내부 벽면 곳곳에 유리창을 설치했다. 따라서 곳곳이 밝고 투명하고 유려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건 햇살만이 아니다.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푸른 능선과 능선 갈피에 산재한 집들, 그리고 하늘과 구름까지 따라 들어온다. 이렇게 외부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건물이다. 내부 구조는 치레와 꾸밈을 자제했다. 외부 경관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나 앉은 양 간명한 품새다. 그러나 간명하기만 하다면 허전할 터. 건물 디자인의 백미에 해당하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물의 정원’이다. 건물 복판에 중정 역할을 하는 작은 연못을 조성해 물의 양상과 묵상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잠잠한 수면을 희롱하는 햇살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물의 정원’의 이채에 즐겁다.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 설치
‘물의 정원’은 이 뮤지엄을 이룬 세 개의 건물을 하나로 엮는 고리 역할도 한다. ‘물의 정원’을 중심으로 규모와 형상이 저마다 다른 공간들이 3차원으로 교직하는 것이다. 관람 동선 구성에서도 민현식의 건축적 의도와 지향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관습적인 순환 동선을 구사하는 대신, 매트릭스 형태를 구성해 동선을 다양화했다. 심지어 다리까지 만들었다. 관객에게 동선의 선택 폭을 넓혀줌으로써 미술관에서의 한때를 한결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다. 공간의 용도를 미리 규정하지 않고, 전시 작품에 따라 변용할 수 있는 중성적 공간으로 만든 데에도 설계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떤 작품이 들어오더라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국이다. 이모저모 ‘비움’의 은유를 가시적으로 구현했다.
뮤지움한미의 구성원들이 야심과 포부를 가지고 각별히 공들인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구축한 수장고가 바로 그렇다. 이 미술관의 심장부다. 지난 20여 년간 수집한 2만여 점의 사진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와 냉장 수장고를 만들었다. 보관 여건이 좋지 않으면 손상되기 쉬운 게 사진이다. 곰팡이가 슬거나 열화(劣化)가 발생한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완벽한 성능을 갖춘 전문 수장고를 설치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고성능 수장고로 꼽힌다. 첨단 항온·항습 시스템이 가동되는 이 수장고에 보관된 사진 소장품들은 50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니 놀랍다.
19세기 귀한 사진도 보관
물론 일반인은 수장고에 출입할 수 없다. 이를 아쉽게 여긴 미술관 측은 수장고 입구에 자그만 전시실로 꾸민 개방 수장고를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역사적인 사진 중 일부를 보여준다. 어디서도 만나기 어려운 이 저온 수장고 전시실엔 1929년 이전에 촬영한 사진 작품 12점이 걸려 있다. 모두 진귀한 사진들이다. 카메라를 귀신 붙은 괴물체쯤으로 여겼던 1883년에 국내 최초의 사진관을 차린 사진가 황철이 찍은 1880년대 사진을 비롯해, 대한제국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운영한 천연당 사진 작품,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알려진 경성사진관 이홍경이 찍은 사진 등 희귀한 원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고종황제와 흥선대원군의 초상 사진도 전시돼 흥미롭다. 누렇게 빛바랜, 무상한 세월의 잔영처럼 남은 손바닥 크기의 옛 흑백사진들이 스산하지만 뜻밖에도 평화롭다. 영영 지나간 풍경들,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사진으로 남아 한 줌의 온기를 전하는 듯하다.
전시장에선 뮤지엄한미 신축 개관전이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전이다. ‘한국 사진이 어떤 제도적 조건과 역사적 문맥 속에서 역사를 일궈왔는지 밝히고자 기획한 전시’란다. 1929년에 열렸던 정해창의 ‘예술사진 전람회’부터, 1982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있었던 ‘임응식 회고전’까지, 한국 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들을 재조명하는 대형 기획전이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나오는 중에 여운처럼 아른거리는 게 있다. 흑백사진들의 검은빛과 흰빛이다. 단순한 흑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영과 농담(濃淡)과 여백을 통해 피사체를 부각한 흑백사진의 묵직한 호소력이라니. 컬러로 존재하는 세상을 흑백으로 번역하자, 외려 깊은 맛을 풍기는 게 아닌가.
김선영 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꼼꼼히 감상하는 관람객 많아 놀라워”
뮤지엄한미는 사진을 즐기는 이들이 반색할 만한 공간이다. 흔히 습관처럼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일상의 오락으로 삼는 풍속을 고려하면,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맞이한 뮤지엄이기도 하다. 김선영 학예연구관의 얘기는 이렇다.
“사진은 여느 예술 언어에 비해 큰 강점을 지닌 매체다. 가령 회화나 조각과 달리 이미 대중에게 익숙해진 매체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문자보다 사진 영상을 소통의 도구로 사용할 정도이지 않은가. 사진이 보편적인 시각 언어로 부상한 셈이다. 이런 경향을 포괄해서 사진과 타 매체의 접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전시 기획에 주력할 계획이다.”
대중에게 더 다가가겠다는 얘기인가?
“우리 뮤지엄의 목표는 20여 년간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진예술을 확장하는 데 있다.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더 새로운 전시 기획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소장품들을 수장고에 유폐하기보다 개방 수장고를 통해 전시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긴밀한 소통을 추구하는 뮤지엄한미의 상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2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진귀한 사진을 꼽는다면?
“특정 작품을 꼽기는 어렵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진품 원본 사진이 너무 많아서다.”
전시실에 관람객이 많더라.
“진지한 관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작품을 꼼꼼히 관람하는 이들이 많다. 놀라울 정도로. 사진에 관한 대중의 친밀도를 반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진 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면?
“공부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 사진이, 또는 서양 사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한국 사진과 서양 사진은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개론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하면 안목이 생기고, 안목이 생기면 더 흥미로워진다.”
요즘의 사진예술은 추상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파격적인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흥미로운 반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융복합이 매우 활발하다. 현대미술이 사진을 차용하기도 하고, 사진작가들이 외연을 확장해 미술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한편 외연 확장적인 작품이 복잡하고 개념적인 것 같지만, 작가들이 그 레퍼런스를 주로 일상에서 찾아내 작업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 ‘결정적인 순간’의 영향력은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일까?
“한 장의 이미지에 많은 것이 응축된 절대적 순간을 집어넣는다는 게 ‘결정적인 순간’의 개념으로, 사진가들에겐 바이블과 같은 규범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훨씬 자유로운 사진들이 이미 1950년대 이후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진가가 윌리엄 클라인이다. 뮤지엄한미에서 올 5월 말에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文發洞). ‘글이 피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동네는 예부터 문인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했다. 이후 출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현재는 명실상부 한국 출판산업의 뿌리로 거듭났다. 파주출판도시를 기획하고, 반세기 동안 열화당의 대표이자 출판편집인으로 살아온 이기웅(82) 대표를 만나 지난 여정과 더불어 기획자로서의 철학과 책의 가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21세기의 여명을 앞둔 1989년 젊은 출판인들은 새로운 시대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출판도시’란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로부터 어언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끝내 그들은 꿈을 이뤄냈으며, 그 터전에서 새로운 세대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최근엔 출판도시 기획자인 이 대표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도시의 과정을 담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제 삶과 경험을 토대로 출판단지의 과정을 쓰겠다고 했을 때 저도 흔쾌히 동의했죠. 책은 기록의 유산으로 가치가 있잖아요. 다만 책 표지에 제 사진을 쓴다기에 정중히 재고를 부탁드렸죠. 결국 출판사의 뜻에 따라 지금의 표지로 책이 출간됐지만요. 저자와 출판사의 뜻은 충분히 존중하지만, 제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민망해요. 출판도시는 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죠. 단지 제가 한 일은 이사장으로서 순서상 맨 앞에 선 것일 뿐이죠. 가장 먼저 서 있다고 해서 같이 이룬 것을 제가 소유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책을 편집하던 편집자가 왜 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고, 어쩌다 맨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말하자면 ‘공동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죠.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함께 실현해보자, 그런 의기투합이 이뤄졌어요. 당시 출판산업의 체계가 엉망이었어요. 편집, 인쇄, 디자인, 유통 등 출판의 프로세스를 한곳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더 큰 시너지를 얻기 위함이었죠. 산업의 체계를 조정하고 선순환을 만들면 만들수록 더 양질의 책을 만들 수 있다고 봤어요. 그런 차원에서 출판도시를 기획했고, 당시 주위 사람들이 공동성이란 큰 달구지를 우직하게 이끌고 가는 공공의 심부름꾼이란 소임을 제게 맡겨주셨어요. 첨엔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어요.”
편집은 나의 힘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파주에서 첫 삽을 뜨는 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원래 부지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이었다. 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일산출판단지가 됐을지도.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가 땅값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일산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계획을 접고 지금의 문발리로 왔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아찔해요. 근데 운명적이라고 할까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발의 뜻처럼 책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어요. 이 일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열화당 직원들이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이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완수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어요. 그때 우리 직원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못해서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제일 커요. 한편으론 말없이 묵묵히 따라주었던 이들이 고맙기도 하고요.”
그림자의 뒷면에는 빛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출판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꼽은 것은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인 ‘인포룸’이었다.
“출판단지 내 첫 건물이 인포메이션 센터로 지은 ‘인포룸’이에요. 독일의 포츠담광장에 있던 빨간 컨테이너 박스 형태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가에게 부탁했어요. 그 건물보다 더 멋있는 건물로 만들어달라고. 완공된 건물을 본 그날을 잊지 못해요. 의리 있는 소 얘기가 있어요. 자신을 호랑이로부터 지켜준 주인이 죽자 따라 죽었다는 소의 얘기예요. 소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의리를 드러낸 것이지요. 남들에게는 많은 건물 중 하나겠지만, 제게는 남달랐어요. 출판도시를 만들면서 겪었던 곡절의 세월에 대한 보답이자, 저를 믿고 맡겨주고 도와준 모든 이에 대한 신의와 고마움이 그 건물에 담겨 있어요. 의리의 인포룸이라고 할까요?”
출판기획과 도시기획. 기획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과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일로 보였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출판편집자 경력이 오히려 가장 큰 힘이 됐어요. 책은 문자의 도시예요. 정교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죠. 기획부터 시작해 감리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어요. 책을 만드는 데 오탈자는 물론이고,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 색감의 상태 등 여러 가지로 고려할 것이 많아요. 편집자라면 시집은 시집답게, 학술서적은 학술서적답게 그 맥락과 목적에 맞게 편집할 줄 알아야 해요. 이 모든 것이 도시를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무엇보다 책과 건축, 모두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죠. 담는 물만 달라질 뿐 그릇은 변하지 않는 법이에요. 그래서 건축가들과 상의할 때 ‘편집회의 하러 가자’고 그랬어요.(웃음)”
물려받은 DNA와 정직한 삶
그는 어쩌다 출판편집자가 된 것일까? “얼결에 됐지만, 그 결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그 결은 선교장에서 체득한 것이죠. 선교장은 우리 조상이 대대로 터전을 잡은 곳인데, 사랑채인 열화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립도서관 같은 곳이에요. 잊을 수 없는 게 ‘만권의 서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책이 많았어요. 거기서 저는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죠. 고등학교 때는 서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장님은 ‘사지도 않을 거면 뒤적거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죠. 뜨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다가 나오곤 했죠. 책을 사는 날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들어갔고요.(웃음) 친구들은 무섭다고 안 가는데 전 무서워도 갔어요. 제게 책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고, 편집자는 자연스레 제가 해야 할 일이 됐죠.”
1960년대 중반부터 편집자로 일했고, 1971년에 출판사 열화당의 대표가 된다. 그에게 출판사 열화당은 운명과도 같았다.
“선교장은 언어와 미술의 학교였어요. 열화당(悅話堂)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열화는 가까운 이와 정다운 얘기를 나눈다는 뜻이죠. 실제로 어른들은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대화를 나누셨어요. 저도 그런 걸 본받고 싶었고요. 선교장 건물은 미학적으로도 정말 아름다워요. 하나의 작품처럼. 정교하게 건물을 만들었고, 문틀 하나 허투루 짜지 않으셨죠. 편집자로서 출판사 열화당을 통해 이런 정신을 이어가고 싶었어요. 미를 지향하되, 아름다운 언어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는 일. 그게 열화당 대표로서의 소임이자 어른들이 물려준 DNA라고 생각했죠.”
책 ‘산의 기억’에 얽힌 일화를 통해 편집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편집자로서 정직한 삶의 얘기를 좋아해요. 아름다움은 진실할 때 비로소 더 가치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 김근원 사진가는 산악 사진으로 일생을 바친 분이에요. 산이란 게 얼마나 정직해요. 날씨란 변수에 그대로 영향을 받잖아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안개가 끼면 안개가 끼는 대로 고스란히 나타나죠.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곳도 있고요. 정직한 산을 정직한 사람이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모습. 사진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그 순수한 열정과 그가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군요. 생전에 열화당과 작업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해서 참 미안한 맘이 컸어요. 그때 제가 좀 덜 바쁘고, 그가 계속 졸랐다면 했을지도 모를 텐데. 지금이라도 아드님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을 수 있어서 참 기뻐요.”
‘어떻게’를 위하여
정직한 삶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바로 안중근이다. 열화당 근처 다리의 이름을 응칠교로 지었으며, 준비 중인 영혼도서관의 명칭은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다. 그에게 안중근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에서 출판된 안중근 관련 기록을 번역해 엮으면서 장군의 내면세계에 감탄했어요. 부정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 시대정신으로 일본 법정에서 제국주의 일본과 법정 투쟁을 벌이죠. 동양 평화를 꿈꾸던 뜻을 옥중에서 계속 집필함으로써 제국주의를 향한 ‘말’과 ‘글’의 투쟁을 홀로 하셨어요. 이상을 이론으로 남기지 않는 자세. 끝내 실천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그것이 제게 큰 울림을 줬죠.”
안중근 정신의 핵심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물어봤다.
“종이책 시장의 위기라고 하는데,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책을 만날 기회인 거죠.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는 건 빨리 전환하고, 정말로 가치 있는 책을 신중하게 기획해서 종이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봐요. 팔리는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남기는 예술이 필요해요. 가치란 말이 공허한데 개인적으로 삶의 진실한 기록을 담은 책이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준비 중인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 가치 있는 책에 깃든 저자의 진심을 모실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공적으로는 열화당이 이제껏 단단히 지켜온 가치를 오랫동안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를 고민하고 싶어요. 물론 시대에 역행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깨졌다는 이유로 주춧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주춧돌이 깨져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존할지 우선 고민을 해보는 거죠. ‘좋음’이라는 가치에 머물지 않고, 그 가치를 위해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삶의 기록을 열심히 정리하는 작업 중이에요. 쓰려고 30분만 앉아 있어도 몸이 피곤해서 힘들지만, 글로 정리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고 싶어요.”
그가 열화당을 운영하면서 아름다웠던 장면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바로 콧수염 사장님과의 재회였다. 열화당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서점에서 책을 읽던 소년이 어엿한 출판사의 사장이 되는 시간 동안 젊었던 사장님은 백발의 노인이 됐다. 운영하던 서점을 정리하던 차에 그의 소식을 듣고 먼 강릉에서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는 이 만남을 “데미안을 다시 만난 싱클레어”의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서점을 지키던 사장님처럼, 그가 책의 가치를 오랫동안 지키면서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이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사랑채이자, 그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의 근간이었다. 선교장의 어른들은 말의 가치를 중요시했고,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을 근본으로 여겼다. 만권의 책에 둘러싸인 곳에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다. 그로부터 배운 정신을 토대로 그는 ‘열화당’을 반세기 동안 운영해왔다. 열화(悅話)의 뜻처럼 정다운 이와 얘기하듯 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채를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젊은 시절에 매료되었던 정읍의 고택이 다 쓰러져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고택을 출판단지 내의 부지로 옮겼다. 깨지고 닳은 주춧돌부터 시작해 기왓장 한 장 버리지 않고 그대로 문발리로 옮겨왔다. 깨진 기왓장을 버릴 수도 있지만, 그는 문화의 보존이란 이유로 절대 버리지 못하게 했다. 문틀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정교하게 틀을 짰던 선교장의 어른들처럼. 이제껏 그가 실천해온 삶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적(美術的)인 출판을 지향하며 오랫동안 정직한 삶의 언어를 발견하고, 이를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끝내는 모두가 함께 누리는 하나의 정신문화가 될 수 있도록 하나의 도시를 계획하고 완성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흔히 한옥의 미학을 일컫는 말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문자의 ‘주춧돌’ 위에서 그가 지은 책이란 ‘사랑채’는 검소했으나 누추하지 않았고, 아름다웠으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흔히 그를 책마을 연출가라 부르지만 그와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을 바탕으로 보건대, 그는 문자의 주춧돌 위에 美의 사랑채를 짓는 건축가였다. 그의 사랑채가 오랫동안 독자들과 열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마친다.
자유로를 벗어나 파주출판단지로 들어서자 드문 정경이 펼쳐진다. 저마다 개성과 미감으로 돋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늘어선 건물들로 풍경이 생동한다. 너절한 난개발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계획도시다. 내로라하는 건축가 여럿이 숙의하고 궁구해 만들었다. 홀로 있어도 매력으로 튈 건물이 군락을 이루어 볼거리로 족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출판단지 북쪽 끝자락에 있다.
주차장에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으로 이어지는 동선엔 작은 갈대밭이 있다. 하릴없이 누렇게 시든 채 살랑거리는 갈대들. 애잔한 서정을 자아낸다. 겨울 찬 바람 속에서 바라보이는 헐벗은 식물엔 한 번 더 눈이 간다. 괜스레 들머리에 갈대밭 소로를 조성했으랴. 몇 걸음 안 되는 길이지만 갈대들의 고요한 율동에 마음을 조율해보라는 뜻이겠다.
갈대밭을 돌아 너른 잔디 정원으로 들어선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전면부가 와락 시선을 압도한다. 유별한 건물이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형상이다. 수직으로 곧추선 건물의 삼면과 달리 곡면과 곡선의 연쇄로 이루어진 전면부 벽면의 이색이라니. 다각도로 휜 벽면이 두루마리 풀려나가듯 흐른다. 매끄러운 유영을 한다.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이지만 둔탁하지 않고 유려하니 모순적인 웅자(雄姿)다. 곡면들의 부드러운 파동에선 선율이 느껴지고 언어가 흘러나올 것만 같으니 건축으로 구현한 음악이자 시라 할까보다. 무감각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하여금 이토록 고매한 내면을 열어보이게 하다니. 경이로운 건축미라 할 수밖에 없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매년 서너 차례씩 미술 기획전을 펼친다. 언제 방문하더라도 그림을 즐길 수 있다. 그림만이 다는 아니다. “건축물 자체가 예술품이다!” 이렇게, 뮤지엄 측이 표방한다. 관람객의 상당수는 건축 자체의 디자인을 구경할 목적으로 찾아든다지. 국내외 건축가들, 건축학도들의 발길도 이어진다는 거고. 디자인과 미학은 물론 공법을 들여다보기 위해.
문외한의 눈에도 인상적인 건 건축 공법이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건물의 서편 동체는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건물을 떠받친 하부 기둥이 전혀 없는 구조여서다. 이른바 캔틸레버(cantilever, 일명 외팔보) 공법을 적용했다. 이는 건축 일반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경우에선 상황이 다르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내리누르는 어마어마한 하중을 캔틸레버로 감당하기가 실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로 사고가 날 뻔한 일도 있었다. 캔틸레버에 타설한 콘크리트가 한쪽으로 밀리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던 거다. 그러나 극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이 건축물에 동원된 기술력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1400평 부지에 지은 연면적 1100평 규모의 3층 건물로 이루어졌다. 설계를 맡은 이는 알바루 시자(′Alvaro Siza)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 건축가로 흔히 ‘모더니즘의 마지막 거장’이라 부른다. 대표작으로 포르투 세할베스 현대 미술관, 아베이루대학교 도서관, 리스본 엑스포 파빌리온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비롯해, 안양 알바루 시자 홀, 아모레퍼시픽 연구원을 설계한 바 있다.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1988년 미스 반 데어로에 유럽 현대 건축상, 2001년 울프 예술상, 2002년, 2012년 두 번에 걸쳐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알바루 시자를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라 치지만 그는 사실 초기 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에 대해선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복잡다단한 생활환경과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점, 과거 양식과의 과도한 단절로 마땅히 존중하고 반영해야 할 전통성을 무시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합리성만큼은 적극 수용했으며, 건축 패턴의 전통성과 지역성을 외면하지 않는 건축적 고려와 추구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다졌다.
곡면과 평면, 곡선과 직선의 드라마틱한 조합과 변주가 야기하는 감흥은 이 뮤지엄 건물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핵이다. 단순하되 정밀하며, 웅장하되 고요하다. 이 점에서 이 뮤지엄은 시자의 시그니처 스타일에 값한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건축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료성과 단순함이다.” 그는 건축에 덕지덕지 군살을 붙이지 않았다. 군살빼기에 차라리 능하다. 이는 창의 수효를 최소화해 지은 뮤지엄의 외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자가 말한 ‘명료성’과 ‘단순함’은 모든 진리의 요체이기도 하다. 아무리 복잡한 사물이나 현상도 참뜻을 알고 나면 뜻밖에도 간명하지 않던가. 시자의 건축이 그저 하나의 시설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치열한 지적 탐색의 결과물일 수 있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다.
알바루 시자 설계, ‘명료성’과 ‘단순함’ 추구
건물 곡면의 흐름에 편승해 천천히 잔디밭을 가로지르자 뮤지엄 출입구 앞이다. 문을 열고 로비로 접어드는데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기보다 후루룩 빨려 들어온 기분이 든다. 홀리듯 외관에 한참 취했던 바람에 벌어진 심리적 오작동? 뮤지엄을 찾은 재미가 이렇게 쏠쏠하다.
1층 공간은 로비와 카페테리아, 아트숍 등이 있는 휴게 공간과 미술 전시실로 양분돼 있다. 물론 둘을 나누는 벽은 없다. 개방적인 성향의 공간이다. 입구서부터 안통까지 층고가 점차 높아지는 구성으로 홀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북서향으로 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광으로 공간의 반쯤은 밝으나 반쯤은 침침하다. 이곳에 인공조명은 거의 없다. 이게 외부의 자연을 끌어다 내부에 배포하는 것으로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알바루 시자의 방식이다.
한쪽 벽엔 높고 기다란 책장이 있다. 책들이 빼곡하다. 관람자들은 자유롭게 뽑아 읽을 수도 있고 할인가 구매도 가능하다. 출판사 ‘열린책들’이 만든 책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등 외국문학 번역서로 다수의 밀리언셀러를 배출한 출판사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가 지은 미술관이다. 건축에 조예가 깊은 그는 일찍부터 알바루 시자에게 꽂혔다고 한다. 언젠가는 시자의 설계를 받은 건축물을 짓고 싶다는 숙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포르투갈이나 영국에 날아가 시자의 건축물 답사에도 열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자와 손잡고 뮤지엄을 건립했다. “디자인이 정말 맘에 들어. 미메시스는 내 작품 가운데 최고야!” 가슴 깊이 품었던 숙원을 푼 홍지웅에게 시자가 건넨 말이 그랬다.
뮤지엄 건립엔 건축가 김준성(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도 한몫 단단히 했다. 건축평론가들은 김준성을 ‘감성 건축의 대가’라 부른다지. 그는 건축 견습생 시절에 시자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배운 적이 있다. 대가를 사사했으니 무엇으로, 왜, 어떻게 건축을 해야 하는지 옹골차게 얻은 게 많았을 것이다. 시자와의 이런 인연으로 김준성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건축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시자를 말하는 글을 볼까.
“사실 시자의 건축적 행보는 논리적으로 혹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리하기 어렵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투명하리만치 선명한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그의 작업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켜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작게는 재료에서 크게는 관계적인 스케일에 이르기까지 켜켜이, 단단하게.” (2020년 5월 20일자, 서울신문 기사 중)
전시실을 볼까. 1층의 절반과 2~3층 전체가 전시공간이다. 세 개의 전시실은 물론 계단 벽면들도 건물 외부 벽처럼 온통 하얀색으로 칠갑을 했다. 내·외부에 통째 순백색 입히기. 이건 시자의 관습이다. 그가 추구하는 ‘명료성’과 ‘단순함’을 구현하는 데엔 백색이 적격이라 봐서일까? 그러나 순전한 화이트 큐브에 현기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관람자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전시실들에서는 면과 선이 극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곡면과 곡선이, 평면과 직선이, 예각과 둔각이 상호 교접하거나 교차하며, 또는 대비를 이루며 공간에 생기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화이트 큐브의 지루한 단조로움을 타파한다. 이 뮤지엄을 예술적 건축물로 보는 눈이 많은 이유는 선과 면의 다채로운 조합에서 야기되는 심미감 때문일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조명의 구사 방식이다. 전시실마다 인공조명을 자제하고 태양이 무상으로 보내주는 빛을 끌어다 쓴다. 3층 전시실은 숫제 인공조명을 전혀 도입하지 않았다. 슬래브 지붕을 뻥 뚫어 설치한 천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이 천장에 매달아놓은 이중 천장의 가장자리를 통해 공간에 흩어질 뿐이다. 이렇게 살포된 빛은 그 농담(濃淡)의 묘를 붓으로 삼아 화이트 큐브에 수묵을 그린다. 시시각각 광량과 광도가 변하는 게 빛이다. 따라서 전시실의 조도(照度)도 시시각각 변하며 덩달아 분위기도 미묘하게 변전한다. “비 내려 빛이 너무 약하거나 어두운 저녁에는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죠?” 뮤지엄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건축가 김준성이 스승에게 물었다. 알바루 시자의 답은 이랬다. “안 보여주면 돼!”
시자의 건축은 건축 자재들만의 집적이 아닌 거다. 자연의 빛이 가세하고서야 건축이 완결되고, 그 쓰임새와 미감이 완성된다고 본 것 같다. 그렇다면 시자는 빛을 다루는 달인? 빛의 탐식가? 그건 그렇고, 아무튼 자연광이 어슴푸레 아롱지는 3층 공간은 미술 전시실이지만 뭔가 원초적인 동혈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한다. 상상력을 북돋아 아득한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3개의 전시실에서는 기획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30~40대 작가들이 참여했다. 기량도 개성도 저마다 발군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엔 세상에서 그림처럼 재미있는 게 없지 싶다. 오늘도 그런 감흥을 느끼며 깜냥껏 즐겼다. 그러나 뇌리에 남은 건 미술작품이 아니라 건축 자체다.
수도권 2기 신도시인 경기도 파주시 운정신도시가 ‘완성형 신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에는 역세권 단지를 중심으로 프리미엄이 형성되면서 쌓였던 미분양 가구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3기 신도시에 발목을 잡힐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완성형 신도시 ‘운정신도시’가 교통개발 호재와 탄탄한 배후수요를 자랑한다. 특히 정부의 고강도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비규제 지역의 특권과 풍선효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등 서울행 교통망 확충에 따른 지역가치 상승이 기대된다. 실제 운정신도시는 2018년을 기점으로 지가 상승률을 비롯해 매매가와 전세가 등 시세 오름세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GTX 개통되면 강남까지 30분
운정신도시는 경기도 파주시 동패·목동·야당·와동동 일대 1652만2800㎡의 부지에 조성된 수도권 2기 신도시다. 파주는 그동안 군부대에 의지하는 전방지역 이미지가 짙었지만, 최근 LG그룹 계열사 등이 이전해오고 일반 업무단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산업도시로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2023년에 개통되는 GTX-A노선과 현재 추진 중인 지하철 3호선 연장선 사업이 가장 큰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한 제2순환고속도로 전 구간(2026년 완공),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2020년 완공)를 시작으로 파주로, 동서대로, 제2자유로를 통한 사통팔달 교통망이 형성돼 서울로의 직주근접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개통된 경의·중앙선 파주 운정역을 통해 서울 홍대까지 30분대, 용산까지 40분대로 이동할 수 있다. 여기에 GTX-A노선이 개통되면 운정신도시역에서 강남 삼성역까지는 30분대로 오갈 수 있게 된다. 한국고속철도(KTX), 수서고속철도(SRT) 등 전국구 광역철도가 운행되는 서울역(20분대), 수서역(30분대)도 비슷한 시간대로 끊을 수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GTX A·B·C 3개 노선 사업 가운데 A노선 사업이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도 호재”라며 “일반적으로 교통망은 발표·착공·개통 3단계에 걸쳐 15~20%의 집값을 띄우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매력적인 완성형 신도시 아파트
운정신도시는 ‘주거쾌적성’과 ‘여가활용성’도 탁월하다. 신도시 내에 이마트, 홈플러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다양한 쇼핑·문화시설이 있어 생활 전반에 편리성을 더한다. 코오롱스포츠센터와 운정체육공원, 맑은물체육공원 등에서는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통한 여가활동이 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운정호수공원, 소리천수변공원, 운정건강공원 등이 있어 친환경 라이프도 누릴 수 있다. 특히 운정호수공원이 주는 혜택이 가장 크다. 신도시라고 하면 비슷비슷한 붕어빵 도시가 연상되는데, 이곳은 호수공원을 품고 있어 타 도시보다 입지조건이 훌륭하다는 평가다.
이 같은 교통호재와 입지조건으로 운정신도시 내 아파트의 인기가 뜨겁다. 신도시가 완성되려면 적어도 수년에서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주변 생활 인프라가 부족하고 공사로 소음이나 분진 등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 반면 ‘완성형 신도시’는 상가나 문화시설 등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진 덕에 주거 인프라가 우수하다.
수요자가 운정신도시에 관심을 갖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파주 운정신도시에 공급된 ‘운정 중흥S-클래스’, ‘운정 1차 대방노블랜드’, ‘운정신도시 파크푸르지오’ 등은 단기간에 분양을 완료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파주 운정신도시에 대한 미래 가치와 교통호재가 맞물리면서 분양에 성공했다는 후문이다.
최근까지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를 보인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전용면적 84㎡ 규모의 아파트의 경우 야당역 인근 ‘롯데캐슬 파크타운Ⅱ’의 지난해 12월 매매가는 4억4000만 원이었으나, 올 3월 5억1000만 원에 거래됐다. 또 지난해 11월 3억5000만 원이었던 ‘한빛마을 5단지 캐슬앤칸타빌’의 매매가는 올 3월 4억3000만 원으로 올랐다.
권대중 명지대학교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운정신도시는 운정역과 야당역을 중심으로 GTX-A노선 개통 호재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해당 지역은 현재 5000만~1억 원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거나 제2개성공단이 파주에 들어서면 기대심리로 인해 아파트 값이 더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싱글 직장인 위한 오피스텔 주목
운정신도시 오피스텔의 경우 지구 서쪽으로 파주출판단지가 있고, 북쪽으로 파주읍과 LCD산업단지를 비롯한 다수의 산업단지가 있는 만큼 배후수요가 탄탄하다. 산업단지와의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이 수월하고, 전 방위 인프라가 집중 개발돼 독보적 주거환경을 갖췄다는 점에서 최적의 직주근접 배후주거지로 주목받는다.
최근 몇 년간 운정신도시 야당역세권 일대에서는 전용면적 5~8㎡ 규모의 소형 오피스텔들이 1억 원 중반~후반대 분양가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가 논란에도 해당 상품들은 성황리에 분양과 계약을 마쳤고, 입주를 앞두고 적잖은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배후수요가 풍부하다 보니 주택, 비주택을 막론하고 수요자와 투자자가 몰려든 것이다.
이 같은 여건과 상황을 종합해볼 때 운정신도시의 오피스텔 투자는 매력적이다. A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GTX-A노선 개통 호재와 산업단지 조성 등으로 배후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비교적 소액으로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오피스텔에 투자자가 몰리고 있다”며 “직주근접 주거지를 찾는 싱글 직장인 수요가 높아 운정신도시 오피스텔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첫 단추는 ‘합리적인 분양가’다. 실투자금을 줄여야 전·월세 등 임대수익률을 높이면서 부족한 자금에 대한 대출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따라서 운정신도시 오피스텔 분양가 수준을 봤을 때 앞으로 기대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야당역 근처 ‘유니타워’(전용면적 23㎡)의 올 2월 매매가는 1억900만 원이고, 지난 5월 보증금 500만 원에 53만 원의 월세 계약이 이뤄졌다. 또 3월에 9200만 원에 거래된 ‘운정유미어스 1차오피스텔’(전용면적 19㎡)은 같은 달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의 계약이 성사됐다.
오피스텔 매매가는 점차 오르는 추세다. 야당역 근처에 위치한 ‘디베뉴스타’(전용면적 19㎡)는 지난해 9월 1억 원에 거래됐으나, 올 2월 1억3000만 원으로 뛰었다. 또 ‘문정유미어스 1차오피스스텔’(전용면적 19㎡)은 지난해 12월 1억1300만 원대였으나, 올 4월 1억1900만 원으로 크진 않지만 상승세를 보였다.
◇주거·업무 수요 품은 야당역 상권
운정신도시 상권은 지역별로 다르지만 ‘넘치는 배우수요’로 안정화에 근접했다는 분석이다. 운정신도시는 도시형 교통모델 마을버스 등 5개 노선이 신설될 정도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파주시청이 집계한 2020년 3월 기준 파주시 내·외국인 인구 총계는 46만6117명으로, 전체의 39%에 해당하는 18만1097명이 운정1~3동에 거주 중이다.
산업단지 배후수요도 운정신도시의 상권 안정화에 힘을 보탠다. 현재 파주시청 홈페이지에 공개된 관내 산업단지는 국가산업단지인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와 파주탄현중소기업전용산업단지, LCD클러스터산업단지, 그 밖의 일반 산업단지들을 포함해 모두 16곳이다. 곳곳에 종사하는 근로자와 관계자 수는 21만 명으로 추산된다.
B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앞으로 LCD클러스터산업단지 내 LG디스플레이 공장이 증설되고, GTX 운정신도시역 일대에 운정테크노밸리가 조성되면 고용창출에 따른 추가적인 인구 유입으로 배후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운정신도시 내에는 가람마을과 한울마을 등의 상권이 있지만, 투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야당역 일대”라고 귀띔했다.
야당역 상권은 일자로 길게 늘어진 형태로 주거시설과 업무시설에서 발생하는 탄탄한 수요를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은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빠르게 개발되는 야당역 일대는 앞으로 역세권 상권의 진면목을 드러낼 유망 상권으로 꼽힌다. 야당역 인근에 위치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재 일반상가 1층의 임대료는 3.3㎡당 15만 원 수준으로 아직 투자 문턱이 높지 않은 편이다.
물론 운정신도시 가람마을 일대도 먹자상권이 발달했다. 하지만 상가 1층에 공실이 드물게 눈에 띈다. 이 지역은 상권이 분산돼 점점 활력을 잃는 분위기라는 게 인근 주민의 설명이다. 반경 1㎞ 내에 1만3000세대가 포진해 있는 한울마을 상권은 유명 프랜차이즈, 각종 의료시설, 대기업 유명 브랜드 업체들이 입점해 있으나 역세권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지역이다.
파주 출판도시의 중심 도로인 은석교 사거리와 응칠교를 지나다 보면 왼쪽으로 눈길을 끄는 웅장한 건축물이 있다. 회색빛의 ‘북카페 플럼라인’은 전면을 유리로 꾸민 외형만으로도 멋스럽다. 건물 왼쪽 300평 규모의 대형 정원에는 하루가 다르게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공간은 민임석 대표가 6년 전 마로니에북스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민 대표의 남편이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곳 출판도시를 산책하면서 힐링을 했다. 그때 이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1층과 2층이 천장까지 통으로 시원스레 트인 공간을 본 순간 멋진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외부의 건축재부터 내부의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80평 정도의 1층과 2층은 민 대표가 카페와 문화 공간으로 운영 중이고, 3층과 4층은 출판사와 디자인 회사에 로줬다. 테이블은 1층과 2층, 야외 파라솔까지 합쳐 다양한 형태로 10여 개 정도가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높은 층고의 깔끔한 실내와 2층으로 올라가는 너른 나무 계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는 아들의 작품으로 만든 자그마한 책이 디스플레이되 있고, 벽면에도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민 대표는 앞으로 이곳을 더 갤러리처럼 꾸밀 생각이라고 한다.
카페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경관은 무척 빼어나다. 저 멀리 심학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골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심학산을 계절별로 볼 수 있어서 아주 좋다고 말한다. 기자가 찾은 날도 카페 앞에 있는 갈대 샛강에서 커다란 흰색 재두루미 한 쌍이 날아오르며 진풍경을 선사했다.
북카페라는 이름에 걸맞게 2층에는 사진, 예술, 인문학책과 원서들, 기독교 서적을 갖췄다. 1천 권 정도의 책이 비치돼 있는데, 그 앞쪽에 진열된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Annie Leibovitz)의 묵직한 초대형 사진 작품집이 눈길을 끈다. 아늑한 이 공간에서는 소규모 인원이 토론회나 북 콘서트, 강연하기에 좋다. 여기에서 드라마 촬영도 많이 했다고 한다.
“1층은 유리창과 나무 바닥이 소리를 적당하게 울려서 하우스 콘서트를 하기에 제격이에요. 매년 입양 부모들과 미혼모 가정을 초청해 위로 공연도 했어요. 프로가 아니라도 지인들끼리 어우러져서 즐길 수 있는 작은 음악회나 연주회도 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어요.”
민 대표는 틈만 나면 정원을 가꾼다. 요즘 같은 날에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땅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화려한 꽃들은 없지만 자그마한 화초들과 자작나무, 마로니에, 바늘꽃, 덜꿩나무 등이 곳곳에 심겨 있다.
“사람들이 이곳을 보면서 힐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것들을 심었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기에 쏟은 정성을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정원 한쪽에는 눈에 띄는 대형 조형물이 있다. 보스, 복서, 건달 등 독특한 캐릭터를 표현해 금보성아트센터로부터 ‘2019 올해의 창작상’을 수상한 김원근 조각가의 ‘손님’이라는 작품이다. 마치 조폭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성이 꽃 남방을 입고 한 손에 꽃다발을 들었고, 바로 옆에는 정장을 갖춰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다. 작가가 어렸을 때 삼촌이 외숙모와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왔을 때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전한다. 다소 이질적인 느낌의 이 조각상 때문에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바로 뒤편으로는 직사각형의 설계가 독특한 한길사 건물이 있다.
주 메뉴인 커피는 누가 내려도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도록 초고가의 커피 머신을 사용한다. 민 대표가 레몬 청을 직접 만들어 선보인 레몬 에이드도 상큼하다. 커피와 자스민, 루이보스, 히비스커스 등 다양한 음료가 있다. 거리 자체가 한산한 편이어서 언제라도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우리가 추구하는 핵심은 힐링이에요. 손님들이 편안하고 만족을 느끼는 곳이죠. 지금도 동네 사랑방처럼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해요. 음악을 좋아하는 손님들은 피아노나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분위기가 아주 좋아요.”
카운터 뒤편으로 고풍스럽게 진열된 원서와 빈티지 소품들은 외국의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중학교에서 윤리 교사로 재직했던 민 대표가 대학 시절에 사용했다는 타자기도 정감이 있다. 상호에 쓰인 ‘플럼라인(Plumb line)’은 ‘다림줄’이라고도 하는데, 공사를 할 때 수직과 수평을 잡기 위해서 사용하는 일종의 기준선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자이다 보니 종교적인 의미가 조금 담겨있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165
온갖 꽃과 새들의 향연으로 시끌시끌한 봄이지만, 이전처럼 편하게 야외활동을 할 수가 없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때다. 오랜 시간의 칩거로 다소 지칠 때,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훌쩍 당일 여행을 다녀와도 좋겠다. 도시 전체가 분홍, 보라,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파주출판도시는 어떨까.
여기에 자리한 '열화당책박물관'은 출판사 열화당(悅話堂)이 운영하는 곳으로 동서양의 희귀 고서들과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예술 서적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글과 그림, 책의 가치를 가장 품격 있게 보존하고 있는 공간으로 손꼽힌다.
열화당은 이기웅 대표의 고향집인 강원도 강릉 선교장(江陵船橋莊)의 사랑채 이름에서 따왔다. 기쁠 열(悅), 말씀 화(話),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선교장의 열화당은 예로부터 문인, 학자들이 모여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를 논하고 진리를 모색하던 학문의 사랑방이었다. 열화당은 이 고택의 정신을 이어받고,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출판사 이름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1971년에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을 모은 ‘벽위편(闢衛編)’을 복각하여 첫 출판물로 선보인 열화당은 미술 전문 출판사로 토대를 다졌다. 이후 한국의 전통 문화와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해외의 유명 사진가, 건축가, 문학을 조명하는 등 출판의 지평을 넓혀왔다.
열화당책박물관에는 동서고금의 책 4만여 권이 소장돼 있다. 건물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책들의 풍경을 보면 누구나 감탄을 하게 된다. 1층과 2층이 탁 트인 내부 벽면을 따라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고, 앞쪽 진열대에도 온갖 책들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예술 분야의 도서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열화당이 출간한 책들을 주제별로 살펴볼 수 있다. 한쪽 코너에는 작은 제단처럼 꾸민 ‘기억의 공간’이 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들로, 열화당에서 출간된 책의 주요 저자와 위인들 사진을 전시했다.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하려는 이 대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제1전시실을 지나 제2전시실로 들어서면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는 각종 고서들을 만날 수 있다. 자물쇠가 채워진 책장 안에는 문고판 사이즈의 괴테 전집 60권과 백과사전 크기의 마르틴 루터 전집 12권 등 동서양의 희귀 도서들이 보관돼 있다. 중앙 진열대에는 한글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조선 시대의 고서와 영인본들이 자리 잡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그 제자(製字) 원리를 한문으로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 ‘용비어천가’, ‘천자문’, ‘토정비결’부터, 한글 가사 악보집과 시조집, 여성들과 소통하려 한 선비들의 편지글 등이 있다.
이곳 박물관에서는 매년 기획전시와 특별전시가 개최되는데, 지금은 ‘한글과 책’ 전을 진행 중이다. 이 전시는 한글의 역사를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게 꾸민 것으로, 우리말로 새긴 우리네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고서부터 최신의 한글 연구서까지 총 450여 종의 문헌을 볼 수 있다.
제1전시실에는 개화기, 일제강점기, 육이오전쟁, 경제 발전기, 민주화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도서들이 전시돼 있다. 최초의 우리말 띄어쓰기가 구사된 ‘독립신문’ 영인본도 있고, 일제강점기에 판금 되었으나 해방 후 다시 나온 위인전과 역사책들, 최초의 여성잡지도 만날 수 있다. ‘6·25전쟁 직후 한글 소설’ 코너에 있는 육전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소설들도 흥미롭다.
“조선 시대까지는 한글을 독립된 형태보다는 편지글이나 노래 가사로 활용하다가 외국 사상이 들어오면서 대변화가 일어나요. 정조시대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 선생이 한글교리서 ‘주교요지’ 필사본을 만들어 천주교의 전파가 빨랐어요. 기독교와 가톨릭 관련 서적들이 한글발전에 아주 큰 역할을 하죠. 순 한글로 된 필사본을 선교사들이 일본에 가지고 가서 납 활자로 찍어왔어요. 한글은 양반이 아닌 평민들과 여성들이 사회운동과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줬죠.”
책과 출판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내공으로 방문자들에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혜경 학예사의 설명이다. 이 전시를 통해 한글과 책이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이 시대에 맞는 한글의 가치와 미래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올해 5월 22일까지로 예정된 이번 전시는 현재 코로나19로 잠시 관람을 제한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정 학예사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다음번 전시로는 ‘대한민국 국토와 자연’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만들기 까다롭지만 가치 있는 책들, 완벽할 순 없지만 단단하고 부끄럽지 않은 도서목록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열화당. ‘우리 시대를 담아내고 이끌어 가는 책’이어야 한다는 소망과, ‘한국문화의 미래를 떠받치는 책’이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글과 그림의 정갈한 상차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김용택 시인은 ‘봄날’이라는 시에서 “나 찾다가 / 텃밭에 /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 예쁜 여자랑 손잡고 / 섬진강 봄 물을 따라 /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라고 노래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일상이 바뀐 이즈음, 책을 가까이하며 위로를 받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정갈하고 고즈넉한 책들의 고향, 종이의 고향에서 시집을 펼쳐 보고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봄맞이 산책을 떠나도 좋겠다.
‘종이의 고향’으로 떠나는 소박한 여행
파주출판도시는 책들의 고향이자 건축의 도시, 영화의 도시, 생태의 도시다. 출판인들이 모여 도시 건립을 위한 ‘위대한 계약’을 체결한 지 올해로 20년이 흘렀다. 이곳에는 출판사, 인쇄소, 영화사를 포함해 500여 개의 업체가 자리를 잡았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들부터 책방, 박물관, 북카페, 갤러리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다. 근거리에는 야트막한 심학산이 있고, 거리 곳곳에 아담한 벤치가 있어서 잠시 멈춰 쉬기에 좋다. 겨울에 갈대가 우거졌던 샛강 변은 지금 서서히 초록빛으로 변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얕은 강 위를 한가롭게 거니는 재두루미도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오다가 문발IC로 진입하면 오른쪽에 ‘출판도시의 심장부’라 불리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있다. 이곳은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가 돋보이는 건물로 2004년 제14회 김수근 건축문화상을 받았다. 박물관, 강연장, 숙박 시설이 있는 대규모 복합문화공간으로 인문학 강연, 작가와의 만남, 예술작품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2014년 이곳 1층에 개관한 ‘지혜의숲’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동의 서재이자 독서공간이다. 여기에 있는 책들은 모두 개인과 출판사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15만여 권의 책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카페도 있어 커피를 한잔 마시며 독서삼매경에 빠질 수도 있다. 안쪽에는 ‘북소리’라는 할인서점이 있고, 2층에는 헌책방 ‘보물섬’이, 3층에는 출판산업체험센터가 있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책에 둘러싸여 느긋하게 하루를 지내면 어떨까.
바로 옆 ‘지혜의숲3’ 1층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기증한 책들이 다양한 형태의 서가에 들어차 있고, 좌석들은 편안한 형태로 꾸몄다. 2층부터 5층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紙之鄕’이다. ‘종이의 고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 객실은 TV가 없는 대신 책들이 비치돼 있다. 79개의 객실 중 박경리, 박완서, 김훈 등 작가들의 전집이나 소장품으로 꾸민 ‘작가의 방’과 출판사 책으로 구성한 ‘출판사의 방’도 있다. 객실 크기는 9평 정도로 TV없는 하룻밤을 보내기에 적당하다.
건물 왼편의 응칠교 근처에는 전북 정읍에서 ‘김동수 씨 작은댁’의 사랑채를 옮겨 세운 ‘서호정사’가 있다. 열화당 이기웅 대표가 쓴 안내문을 보면, 1971년 중요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된 ‘정읍 김동수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 조상 김명관이 1784년경에 지었다. 김명관의 둘째 아들 김상하가 1834년에 김동수 씨 작은댁을 십여 년에 걸려 지었으니, 현재 186년의 역사를 지닌 고가다. 출판도시에 하나뿐인 이 건물에는 한옥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도시를 지향한다는 출판도시의 뜻이 담겨있다. 5월이면 한옥 담장을 따라 흰 꽃 등나무에 향긋한 꽃이 주렁주렁 피어날 것이다. 국어학자이자 시인인 일석 이희승 선생이 아끼던 50년 수령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
지혜의숲 뒤편에 놓여있는 야외 벤치에 앉아 갈대 샛강을 구경하거나, 건너편 책방거리까지 갈 수 있도록 꾸며놓은 ‘김소월 시의 다리’를 산책하노라면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이 얼굴을 간질인다. 진달래꽃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야간조명 덕분에 밤에는 더 낭만적이다. 출판도시에서는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책 만들기’까지, 책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열화당책박물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등을 해설사와 함께 투어할 수 있는 특별한 산책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건물 정면 맞은편에 있는 피노키오뮤지엄과 카페 헤세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한가롭고 여유 있게 책과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소박한 여행을 떠나보자.
주소: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45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파주출판도시,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곡선 건물 한 채가 눈에 띈다. 연둣빛 잔디밭과 파란 하늘 사이, 마치 흰 종이가 펄럭이듯 살랑살랑 손짓을 한다. 다양한 전시품은 물론 건축물 그 자체로도 미적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이곳, 바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다.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특유의 매력에 이끌려 햇살이 스미듯 자연스레 발걸음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다양한 규모의 전시 공간이 한 덩어리에 담긴 설계가 돋보인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황금사자상(2002·2012)에 빛나는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루 시자(Alvaro Siza)가 설계해 건축물 그 자체로도 예술 작품이라 평가받는 곳이다. 일반 관람객 외에도 국내외 건축가와 아티스트들이 방문하는 등 미술관 그 이상의 가치를 선사하는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흰색에 가까운 연회색 빛 벽면으로 둘러싸인 건물에는 그 흔한 간판이나 전시 현수막도 걸려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 도도함에 ‘대체 정체가 뭐야?’ 하는 호기심이 든다. 벽면의 단조로움은 곡선이 생동감을 선사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단순한 벽면 덕분에 곡선의 날렵함이 더욱 눈에 띈다. 얼핏 두 채로 보였던 건물은 입구에 다다라서야 잘록한 허리를 드러냈다.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건물을 훑어보고 입구에 들어섰다.
자연광이 선사하는 예술의 향연
전시공간으로 가기 전, 1층 로비는 널찍한 카페로 꾸며졌다. 실내 카페와 테라스에서는 커피, 생과일주스, 허브티 등을 즐길 수 있다. 카페에서 슬쩍 미술관 내부를 둘러보면 조금은 침침하다는 생각이 든다. ‘빛으로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인공조명을 두지 않아 자연광으로만 명암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매번 다른 작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자연광에 의존하다 보니 개관은 오전 10시로 동일하지만, 폐관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봄·가을에는 오후 6시, 여름에는 오후 7시, 겨울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전시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새하얀 벽면이다. 전시 작품도 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걸어 여백이 많은 편이다. 오히려 그런 점들 덕분에 작품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하며 감상할 수 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역시 흰 벽면의 단조로움에 곡선 구조가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중간중간 보이는 통유리 자연조명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와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 언제 가느냐에 따라 그림자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면서 흰 여백에 무늬를 수놓는다.
보고 느끼고 체험하며 즐기는 예술
1층 카페와 한 공간에 있는 ‘북앤아트숍(book &artshop)’에서는 미메시스(‘열린책들’이 설립한 예술 전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들을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단순히 비평가들이 쓴 담론보다는 예술가들이 삶의 혼이 담긴 자서전, 창작노트, 일기, 예술 에세이 등을 위주로 출간하고 있다. 미메시스에서는 오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더라도 책의 속살은 실로 꿰매는 전통 제작 방식을 고수한다. 이러한 고집은 디자인 문구를 만드는 데도 발휘된다. 정교한 디자인에 높은 품질의 디자인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놓는다. 출판과 건축, 예술의 만남을 아우르는 문화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지향하며 다양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프로그램 일정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및 신청 가능하다.
△ 이용 정보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53 (파주출판도시)
매주 월요일, 화요일 전시 휴관
카페·북앤아트숍 매일 운영
불현듯 헤이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여럿이 어울려 스치듯 지나쳤는데 그때는 아직 건물들이 제대로 들어차지 않았을 때라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여러 번 듣게 되어 다시 한 번 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움츠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합정역 1번 출구에서 2200번 버스가 파주까지 가는데 헤이리를 경유한다. 편도 2,500원이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자리가 거의 만석이다. 바로 강변으로 빠져 자유로를 타고 가다 보면 오른쪽에 고양시, 일산이 멀리 보이고 왼쪽에는 가시철망 너머로 서해가 보인다. 1시간가량 달리니 출판단지를 지나 헤이리 1번 게이트에 도착했다.
헤이리는 1998년부터 조성된 곳이므로 아직 역사가 20년이 채 안 되었다. 15만 평 부지에 미술인, 음악가, 작가, 건축가 등 380여 명의 예술인들이 각자 개성 있게 자신의 작업장, 갤러리, 공연장, 박물관 등을 짓고 있다. 문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곳이다.
이번에 가본 헤이리의 모습은 5년 전과는 많아 달랐다. 입구에 문화예술단지 답지 않은 어설픈 매표소가 있었다. 영화박물관 등 여러 가지 박물관들도 많이 들어차 있었다. 입장료가 대부분 7000~8000원대라서 양껏 구경하려면 일인당 10만원은 잡아야 했다. 티켓을 구입하면 휴대폰에 영수증이 뜬다. 해당 박물관에 가서 휴대폰에 저장된 영수증을 보여주거나 휴대폰 끝자리를 불러주면 입장할 수 있다.
영화박물관부터 둘러봤다. 입장권은 8000원이다. 입구에서 휴대폰 번호를 대니 연락받았다며 3층부터 구경하고 지하 1층까지 구경하면 된다고 했다. 음향 효과를 내는 방법을 소개하는 영상이 있었고 각종 소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소품들을 갖다 놓았으나 입장료 8000원은 많이 비싼 듯했다. 30분 정도 소요되는 국내외 명작들의 OST와 추억의 장면들을 다시 본 것만으로 겨우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려고 했으나 길이 미로 같아서 몇 바퀴 돌아도 제자리였다. 안내 지도에 현 위치를 표시해놓지 않아 헤매는 사람이 많았다. 화장실 인심도 야박했다. 공중화장실이 한 군데도 없어 화장실에 가려면 업소에 들어가 매상을 올려줘야 겨우 화장실 열쇠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국내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얼마나 헤맬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한길출판사가 지은 북하우스가 좋았다. 독특한 건물 양식에 3층까지 책을 전시해놓았다. 그런데 건물 뒤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책 전시관은 입장료를 6000원씩이나 받았다. 굳이 입장료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무료로 개방한 아프리카 박물관은 좋았다. 쇼나 조각에 관심을 보였더니 1번 게이트 근처의 ‘레오파드 락’이라는 가게를 소개해줬다. 과연 가보니 사고 싶은 조각품들이 많았다. 가격대도 소품이 30만원 정도였다. 차를 가져갔더라면 몇 개 샀을지도 모른다.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점심으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으나 피자, 케이크 등 브런치 메뉴들이 많았다. 겨우 찾아낸 곳이 편의점에서 같이 운영하는 푸드코트였다. 그런데 새우볶음밥이 7,000원이나 했다. 5,000원 정도만 받아도 될 만한 음식이었다. 이런 곳에도 설렁탕이나 감자탕 또는 동태탕, 하다못해 김치찌개를 파는 음식점이 한 집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그 밖에 게임박물관, 인형박물관, 커피박물관, 추억박물관, 악기박물관, 동화세상박물관 등이 있었지만 관람객들이 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것을 보니 입장료 책정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입장료를 대폭 할인하거나 주기적으로 반값으로 할인하는 행사라도 해야 관람객들이 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리 마을 건너에 있는 거대한 영어마을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인적도 없이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저러다 흉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전 기억으로는 입장료도 있었다.
마침 첫눈이 왔다. 비 소식이 있어 눈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싸라기눈이 한나절은 퍼부었다. 우산 없이는 도저히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축복 같은 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서울에 도착하니 이 도시가 좋다. 역시 필자는 도시민이지 헤이리에 거주할 예술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리는 해가 지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란다. 가끔 둘러볼 가치는 있는 곳이지만 살고 싶은 동네는 아니다. 몇 해 지나서 다시 가보면 더 알차게 꾸며져 있을 것이다. 보완되어야 할 점이 많아 보이는 헤이리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