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럼] 폐암 더 이상 두려운 암 아니다
- 국내 사망원인 1위는 단연 암이다. 한해 전체 사망자 5명 중 1명 이상이 암으로 사망한다(2022년 통계청 기준 22.4%). 그중에서도 폐암은 사망률이 가장 높은 암이다. 국내를 포함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암 사망률 부동의 1위를 차지한다. 실제 2022년 국내 폐암 사망자는 1만8584명으로 전체 암 사망자의 22.3%를 차지했다. 인구 10만 명 당 사망자 역시 36.3명으로 단연 많다. 간암(19.9명), 대장암(17.9명), 췌장암(14.3명), 위암(13.9명) 등이 뒤를 잇는다. 폐암이 무서운 암으로 꼽히는 이유는 조기진단이 어렵고 생존율이 낮다는 데 있다. 실제 폐암은 특별한 증상이 없어 초기 발견이 쉽지 않다. 조기에 진단되는 환자는 전체의 5~15%에 불과하다. 증상이 나타나면 이미 진행된 경우가 많다. 또 폐암으로 진단받고 5년 이상 생존할 확률은 38.5%에 불과하다(2017~2021년 기준). 그마저도 다른 장기로 전이된 4기 이상 전이성 폐암은 5년 생존율이 10% 아래로 뚝 떨어진다. 전체 암의 5년 생존율 72.1%보다 턱없이 낮다. 그만큼 치료가 힘들고 생존율이 낮은 암이 폐암이다. 그러나 최근 폐암 치료에 표적 항암치료나 면역 항암치료 등 새로운 항암 전략이 속속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폐암은 더 이상 두려운 암이 아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다른 암에 비해 치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금연과 검진을 통한 예방과 조기 발견으로 완치가 가능한 경우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폐암 치료는 면역항암제가 표준치료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암 치료의 글로벌 가이드라인으로 불리는 ‘NCCN 가이드라인’에서도 전이성 비소세포폐암의 표준치료로 면역항암제를 권고한다. 치료 성적에서도 눈에 띄는 성적표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최근 세계폐암학회가 발표한 면역항암제 1차 치료의 장기 생존 치료 성적을 보면 4기 비편평비소세포폐암 환자가 1차 치료로 면역항암제 병용 치료 시 생존 기간이 기존 10.6개월에서 22개월로 2배 증가했다. 또 2년간 면역항암제 1차 치료를 완료한 환자의 80.4%가 4년간 생존했다. 국내 4기 이상 전이성 폐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이 10%에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면역항암제가 보인 성과는 눈부시다. 더불어 수술 후 재발이 높은 2, 3기 환자에 대한 수술 전·후 항암치료가 도입되며 수술 후 재발률을 낮추는 새로운 치료 방법이 속속들이 연구되고 있고, 곧바로 현장에 적용되고 있다.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닌 극복할 수 있는 병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당뇨병이나 고혈압이 완치되지 않는 병이라 하더라도 병원에 열심히 다니면서 잘 조절하면 되는 것처럼 폐암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병 중 하나로 생각하고 본인에게 맞는 치료를 선택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 2024-07-10 09:21
-
- 맘 편히 아플 권리, 사치가 아니다
- 은퇴가 눈앞에 보이는 A씨는 최근 고민이 생겼습니다. 한 친구가 위암으로 수술받은 소식을 듣고, A씨도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그에게 암이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아직 암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또 A씨는 생각합니다. ‘내가 아파도 되나?’ 이 질문은 참 이상합니다. 아픈 것은 선택도 아니므로 누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을뿐더러, 아픈 것은 오히려 피하고 싶은 일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 떠올려보면 이전에 아팠을 때, 또는 최근에 아플 때 저 생각이 머리 한구석을 스쳐갔음이 생각날 겁니다. 우리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아플 수 있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 사회가 다른 나라처럼 병원에 가는 것이 무척 힘들다면, 예컨대 미국처럼 비용 걱정이 눈앞을 가리거나 영국처럼 병원에 가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저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병원에 가는 일 자체는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고, 병원 가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라서 ‘아파도 되나’ 싶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재난적 의료비(소득 수준에 비해 과도한 의료비를 부담하게 됨 또는 그 비용을 말합니다)로 어려운 일을 겪는 분들도 계시지요. 이것은 우리의 의료 제도가 질병에 따라 비용 부담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많은 병을 적은 부담으로도 치료받을 수 있는 한편, 그렇지 못한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빠른 산업화, 그 안에서 의료 제도가 맡아야 했던 역할에서 그 이유를 찾아내곤 합니다. 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는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의료는 여기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지요. 당장 아픈 곳을 싸매어 다시 일자리로 돌려보내는 것과 죽지 않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의료 제도의 대전제였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몇 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 제도 안에서 아픔은 빨리 지워져야 할 무엇이었을 뿐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오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위한 노력에 병과 병자의 자리는 없었지요.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게 된 지금에야 우리는 의학에 다른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가. 후자의 질문에 대한 제도적 답이 연명의료결정법이지요. 말기 질환 환자가 삶을 연장하기만 하는, 많은 경우 고통스러운 치료를 계속 받을지 중단할지를 본인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제도 말입니다. 하지만 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학이 아픈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아직 진지하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프면 빨리 회복해서 다시 일해야지 하는 생각이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을 뿐이기에, 우리는 아픈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학은 훨씬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질병이라는 혼란 속에서 돌봄과 지지가 필요한 환자가 잠깐의 지지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의료인을 만나 풍랑을 함께 넘어가는 경험을 주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감기를 앓는 이에게 감기약을, 근육통을 앓는 이에게 진통제를 주고, 상처 입은 이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만 하는 것이 의학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의학은, 의료는 환자와 의료인이 서로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는 공간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여전히 가능한 꿈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의 효율 좋은 의료 제도 속에서 이런 것은 사치스러운 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아파도 될까요? 당연합니다. 그것은 권리로서 확보되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역사 때문에, 누군가는 심지어 아플 권리를 외쳐야 하는 상황처럼 느껴질 뿐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픔을 통해 다른 질문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의학이, 의료가 아픔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할 때가, 아픔의 가치를 생각하고 아픔을 통해 서로 무엇을 나눌지 따져볼 때가 되었다고 저는 말하려 합니다. 아픈 사람이 타인에게 끼칠 폐를 걱정하며 자신의 아픔을 숨겨야 했던 시절은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픔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아픔을 그토록 무가치한 것으로, 빨리 떨쳐버려야 할 나쁜 것으로만 여겨왔습니다. 노화는 말할 것도 없지요. 물론 누구도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고, 아픔은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픔은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철학자 니체는 아픔을 통해 숨어 있던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에게 병은 자신을 일깨우는 사건이었지요. 저 또한 우리 아픔의 역사를 살피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픔을 찬양할 필요도, 깨달음을 위해 일부러 아플 필요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픔이 숨겨져 있던 것을 우리에게 밝혀주는 통로가 된다면, 적어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임에도 깨닫지 못했던 이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병과 아픔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 아닐까요. 파슨스라는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병자는 특수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며, ‘병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병을 빨리 떨쳐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병자에게 빨리 나아야 할 책임은 주어지지 않으며, 우리는 병자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아픔도, 아픈 사람도 모두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픔의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다시 자리 잡을 때에야, A씨가 떠올렸던 ‘아파도 되나’ 하는 생각도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곰곰 생각해봅니다.
- 2022-03-25 09:12
-
- “내 고민과 번민, 공감 기대하며 노랫말에 녹이지요”
-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 2021-12-31 08:00
-
- 아버지는 일체의 연명 의료를 거부하셨다
- 200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안락사를 다룬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권투 코치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키우던 선수 매기가 경기 중 부상을 해 절망적 상황에 이르자 산소호흡기를 떼고 주사약을 투입해 안락사를 돕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딸처럼 생각했던 매기의 고통을 멈추게 하고 싶다는 생각과 윤리적 판단 사이에서 생기는 프랭크의 갈등에 감정이 이입돼 가슴이 저렸다. ‘당신은 물러서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신부님의 말에 프랭크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더러 도와 달래요.” 라고 고개를 떨군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매기에게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당장 고통을 멈춰줄 특단의 조치, 안락사였다. 안락사, 회복하기 어려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해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이다. 죽음을 앞당기기 약물을 투여하거나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등의 행동이 수반되어 적극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등 안락사를 선택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도 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국가 중 스위스는 외국인에게까지 이를 허용하고 있어서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들이 스위스를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몇 해 전 호주의 104세 노교수가 스위스에서 안락사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버지는 병상에 있을 때 안락사를 한 노교수를 진심으로 부러워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반면에, 2018년 연명 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이후 연명 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 즉 존엄사는 허용하고 있다. 안락사가 질환의 유무를 떠나 고통 없이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면, 존엄사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는 것으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만 선택할 수 있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만난 말기 암 환자들의 소원은 고통 없는 곳으로 빨리 가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조금만 더 곁에 있기를 바라지만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모르핀을 맞아도 통증에는 답이 없었다. 그들의 소원은 절실했다. 만성폐쇄성 폐 질환에 말기 암까지 더해지니 아버지도 목숨을 연장하는 일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알고 계셨다. 일체의 연명 치료를 하지 말라면서 빨리 가게 하는 게 효도라고 강조했다. 병의 진행에 죽음을 맡기기보다는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길 원하셨다. 이럴 때 사전에 연명 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었다면 좋았겠지만 없어도 괜찮았다. 말기 환자는 연명 의료 중단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당 의사와 상의하여 연명 의료계획서로 남겨 두면 이를 근거로 연명 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미처 연명 의료계획서를 작성하지 못했을 때는 환자 가족 2인의 사인으로 연명 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도 있다. 아버지는 연명 의료에 대한 거부 의사가 확실했으나 연명 의료계획서에 사인을 하기 전에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기계를 달고 처치실로 옮겼다. 기계에서 버저가 울리면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밤에 연명 치료 여부를 급하게 결정해야 해서 아들과 딸이 대신 사인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존엄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의료 행위는 더는 없었으니 아버지의 불필요한 고통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 2020-05-07 09:31
-
- 너희,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 2010년 봄,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필자의 마음은 쉬지 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들은 2006년 4월에 전신 3도의 화상을 입었다. 주치의는 심한 열에 달궈진 아들의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불길을 온몸으로 품은 듯 아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차분했는데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솟는 마음의 병은 착했던 아들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아들이 그럴수록 필자도 말수가 줄어갔다. 아들의 고통에 어떠한 말도 감히 할 수 없었다. 엄마라도 그 고통은 알 수 없을 거야… 그게 필자의 마음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주치의의 말만 되새김질하는 날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어느 날 결혼을 하겠다는 소릴 한 것이다.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에 놀라서 아들을 올려다봤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병이 다 나은 듯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덥석 손을 잡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깨를 다독여줬다. 그러자 아들은 “잘살게!” 했다. “어떻게 해주면 되지?” 하고 물으니 “엄마, 그동안 제가 너무 속만 썩였지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요. 결혼반지는 커플링으로 할 거고 결혼식장은 다 준비되었어요. 청첩장은 300장 정도 만들 거니까 엄마가 필요한 만큼 가져가셔요. 신부 쪽엔 친척이 거의 없어서 제 친구들과 형들만 초청할 거예요.” 집 걱정을 하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란다. 그날은 필자 귀를 의심하면서 눈물만 쏟았다. 필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아들 아닌가! 필자의 친구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축하해줬다. 그리고 드디어 주례도 없이 아들이 신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주며 아주 색다르고 멋진 결혼식을 했다. 이런 걸 보고 꿈같은 일이라고 하던가? 감동에 젖어 아들 결혼식을 무사히 잘 끝냈다. 주치의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는 빈손으로 한 결혼이었지만 아무 불평 없이 딸아이 낳고 행복해하면서 잘 살았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작년 5월에 며느리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세 식구 똘똘 뭉쳐 행복을 만들며 살더니… 아내가 가자 아들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은 왜 그렇게 가혹한 걸까. 이제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버린 것 같다. 부모에게 손 안 내밀고 저희들끼리 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 멋진 커플을 정말 사랑했는데… 부모의 마음을 넘어 존경하기까지 했는데… 또 얼마나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나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그날의 한강 선상 결혼식은 이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필자의 가슴에 아프게 못 박혀 있다.
- 2017-09-08 11:25
-
- 8월부터 지원 대상 확대, 호스피스 병원이 하는 일은?
- 호스피스는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가 육체적 고통을 덜 느끼고 심리적·사회적·종교적 도움을 받아 ‘존엄한 죽음(well-dying)’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다. 하지만 아직 의료기관 중에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이와 관련,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한 법률이 8월부터 시행된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되던 호스피스가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비암성 말기 환자(만성폐쇄성폐질환, 간경변, 후천성면역결핍증)에게도 서비스가 확대되는 것. 이로 인해 관련 질환 환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시범사업을 위한 의료기관도 지정했다. 일산서구 탄현동 소재 연세메디람내과에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황의동 원장을 만나 호스피스의 역할에 대해 들어봤다. 호스피스 지원 대상이 확대된다던데 어떤 서비스인가요? 말기 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돼 담당 의사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를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암 관리법에 따라 말기암 환자만 호스피스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8월부터는 만성간경화·후천성면역결핍증(AIDS)·만성폐쇄성폐질환 말기 환자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이런 법률이 시행됐나요? 대형 병원은 대기 환자가 넘쳐나고 다른 환자에 비해 호스피스 대상 환자의 수가도 떨어져 병원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말기 환자가 많이 찾는 대형 병원들의 상황이 이처럼 엉망이니 보건당국이 나서서 호스피스 대상도 확대하고 시범으로 운영할 병원도 지정한 거죠. 5월 말 기준으로 전국 상급종합병원 43곳 중에서 16곳만이 호스피스 병동과 병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보건당국이 8월 4일부터 호스피스 서비스 시범사업을 의료기관 45곳에서 시행합니다. 호스피스 병원을 설립한 이유는 뭔가요? 대형 병원은 치료 중심의 병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호스피스나 완화의료에 대한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족한 부분을 완화의료기관에서 보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했고 의사로서 사회적인 책임도 느꼈어요. 이제 설립 4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도심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해서인지 100일 넘게 집에 못 들어 갈 정도로 치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많습니다.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일반 병원은 환자-질병-치료-퇴원의 흐름을 생각하는 게 대부분인데,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 및 가족-증상조절-육체적·심리적·영적 안정을 목표로 하는 게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하는 환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퇴원보다는 병원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환자의 심리는 어떤 상태인가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임종의 심리단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이 다섯 단계가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심리상태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에서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가족을 위한 상담이나 환자가 임종한 후 유가족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개별적인 법률, 보험 등의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일대일 케어 서비스가 특별해 보이는데 간병인과 다른 점이 있나요? 저희 병원은 환자와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병원을 목표로 설립되어 모든 병실을 개인 병실로 구성했습니다. 또 간병은 가족 간병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병이 안 되는 예외적인 환자의 경우 간호사와 직원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줍니다. 저희 병원은 환자 수 보다 직원 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인력 충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관리 프로그램을 알고 싶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의 ‘통증 완화’가 가장 기본적인 목표입니다. 그다음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전담 목사가 환자 예배와 종교 상담을 하고 있고 천주교, 불교 등에서도 내원합니다. 미술 치료, 아로마 치료, 원예 치료, 음악 치료, 마사지 치료 등도 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목욕·미용·말벗·성가봉사·연주회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말기암 환자에게는 심리 치료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통증이 우선 해결되고 호흡곤란 등이 해결되어야 심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의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접근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숨이 차고 아픈데 환자에게 무슨 소리를 해준들 들리지 않겠지요. 따라서 심리적 접근은 의학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 의료진, 사회복지사, 가족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환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 위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잘 죽는다’는 의미를 남다르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글쎄요. ‘잘 죽는다’는 의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잘산다’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의 마지막까지 육체적으로 편안해야 하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유지되어야겠지요. 호스피스 병원의 간호사들은 특별 교육을 받나요? 저희 병원의 모든 간호사는 채용 전 반드시 60시간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인력 표준과정을 수료해야 하고, 입사 후에는 보수교육 이수가 의무사항입니다. 또한 병원 프로그램을 통한 반복적 교육으로 환자에 대한 서비스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요? 병원에 입원했던 모든 환자들이 기억에 남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첫 환자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어렸던 30대 여자 환자였는데 마음을 열 때까지 가족들과 직원들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가족과 의료진이 함께 기도할 때 임종 순간을 편안히 맞이했습니다.
- 2017-08-03 08:49
-
- [유병장수 시대의 그늘, 치매-①] 한류스타도 비켜가지 못한 50만의 비극
-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씨 가족의 비극을 계기로 사각지대에서 곪아있던 '노인 치매'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이투데이는 [유병장수 시대의 그늘, 치매] 시리즈를 통해 치매환자 실태와 가족의 애환을 점검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① 한류스타도 비켜가지 못한 50만의 비극 ② 폭식에서 실종까지…치매의 모든 것 ③ 구둣솔로 양치질을 해도 치매 아니다? ④ 80대 치매부모와 60대 간병자녀…고령화 가족의 눈물 ⑤ 정부 대응 기다리느니…치매 공포, 이렇게 대처하자! 한류스타도 치매의 비극은 비켜가지 못했다. 지난 6일 가수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씨의 아버지 박모(57) 씨가 치매를 앓고 있는 노부모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이특의 아버지는 1998년 부인과 이혼한 뒤 자식들과 떨어져 살며 홀로 노부모를 부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부모는 모두 치매를 앓았는데 특히 치매 중증 환자였던 모친은 지난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며 병세가 악화됐다. 그는 평소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였지만 그런 그도 생활고와 우울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부모를 숨지게 한 뒤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외에도 지난해 2월 50대 아들이 병간호에 지친 나머지 치매에 걸린 80대 노모를 폭행해 숨지게 하는 등 우리 사회에 치매로 인한 살인 사건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치매 문제는 치매를 앓는 환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치매 환자와 치매 가족의 비극은 더이상 남의 일만이 아니다. 한국치매가족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는 약 45만명으로, 그 중 약 70%가 기억상실, 판단능력 상실 등의 배회증상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부의 조사 결과에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2008년 8.4%, 2010년 8.8%, 2012년 9.1%로 해마다 치솟고 있다. 치매 환자의 증가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진료 통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지난 2012년 한 해 동안 치매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모두 29만5370명으로 2003년에 비해 6.5배 이상 급증했다. 이처럼 치매환자가 급증하면서 치매 진료비도 해마다 급증해 2006년 총 2051억원에서 2011년 9994억원으로 5년새 5배가 늘었다. 이와 같이 치매환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치매환자와 치매가족들의 심리적ㆍ재정적 부담도 커지고 있다. 치매는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돼 단순 유지치료에만 최소 10년 이상의 간병이 필요한 위험한 병이다. 특히 치매는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어 가정을 파괴하할 수도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고령화되면서 치매의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지만 이에 비해 사회적 안전망과 대책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특 가족의 비극을 통해 국내 치매환자의 실태와 치매가족의 애환을 점검한다. 우선 치매의 정확한 증상과 실제 사례를 통해 치매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또 치매 환자의 애로사항과 사회안전망의 맹점을 짚어본 뒤 한국의 고령화 실태, 핵가족화 등을 통해 치매 가족이 겪고 있는 심리적, 재정적, 정책적 한계를 점검한다. 마지막으로 치매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매 예방법 및 대처법에 대해 논의해볼 예정이다.
- 2014-01-10 08:26
-
- [유병장수 시대의 그늘, 치매-①] 한류스타도 비켜가지 못한 50만의 비극
-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씨 가족의 비극을 계기로 사각지대에서 곪아있던 '노인 치매'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이투데이는 [유병장수 시대의 그늘, 치매] 시리즈를 통해 치매환자 실태와 가족의 애환을 점검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① 한류스타도 비켜가지 못한 50만의 비극 ② 폭식에서 실종까지…치매의 모든 것 ③ 구둣솔로 양치질을 해도 치매 아니다? ④ 80대 치매부모와 60대 간병자녀…고령화 가족의 눈물 ⑤ 정부 대응 기다리느니…치매 공포, 이렇게 대처하자! 한류스타도 치매의 비극은 비켜가지 못했다. 지난 6일 가수 슈퍼주니어 멤버 이특 씨의 아버지 박모(57) 씨가 치매를 앓고 있는 노부모를 목 졸라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이특의 아버지는 1998년 부인과 이혼한 뒤 자식들과 떨어져 살며 홀로 노부모를 부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부모는 모두 치매를 앓았는데 특히 치매 중증 환자였던 모친은 지난해 폐암 말기 판정을 받으며 병세가 악화됐다. 그는 평소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였지만 그런 그도 생활고와 우울증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부모를 숨지게 한 뒤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외에도 지난해 2월 50대 아들이 병간호에 지친 나머지 치매에 걸린 80대 노모를 폭행해 숨지게 하는 등 우리 사회에 치매로 인한 살인 사건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치매 문제는 치매를 앓는 환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치매 환자와 치매 가족의 비극은 더이상 남의 일만이 아니다. 한국치매가족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는 약 45만명으로, 그 중 약 70%가 기억상실, 판단능력 상실 등의 배회증상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부의 조사 결과에서도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2008년 8.4%, 2010년 8.8%, 2012년 9.1%로 해마다 치솟고 있다. 치매 환자의 증가세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진료 통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지난 2012년 한 해 동안 치매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모두 29만5370명으로 2003년에 비해 6.5배 이상 급증했다. 이처럼 치매환자가 급증하면서 치매 진료비도 해마다 급증해 2006년 총 2051억원에서 2011년 9994억원으로 5년새 5배가 늘었다. 이와 같이 치매환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치매환자와 치매가족들의 심리적ㆍ재정적 부담도 커지고 있다. 치매는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돼 단순 유지치료에만 최소 10년 이상의 간병이 필요한 위험한 병이다. 특히 치매는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어 가정을 파괴하할 수도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고령화되면서 치매의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지만 이에 비해 사회적 안전망과 대책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이특 가족의 비극을 통해 국내 치매환자의 실태와 치매가족의 애환을 점검한다. 우선 치매의 정확한 증상과 실제 사례를 통해 치매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또 치매 환자의 애로사항과 사회안전망의 맹점을 짚어본 뒤 한국의 고령화 실태, 핵가족화 등을 통해 치매 가족이 겪고 있는 심리적, 재정적, 정책적 한계를 점검한다. 마지막으로 치매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치매 예방법 및 대처법에 대해 논의해볼 예정이다.
- 2014-01-09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