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혼자 가면 안 된다. 파도만 넘실대는 곳이 아니라 역사와 장인의 솜씨마저 희망처럼 요동치는 곳이다. 혼자서는 통영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에 제한이 있고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도 울렁대기 마련이어서 시인처럼 낮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우체국 창을 바라보며 연애편지를 하염없이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통영은 온 발바닥을 땅에 대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지키려는 열망으로 가득했고 사랑의 기억으로 응축된 항구도시의 역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시인 백석의 표현대로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가 있으며, 유치환처럼 행복론을 시로 쓸 수 있는 곳이요, 윤이상의 창작의 근원이었던 한려수도의 해조음을 들을 수 있는 도시다.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지만 축복받은 자연에서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 감각을 쪽빛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게서 배운 듯하다.
이순신과 통영의 예술
충무공의 통제영이 있었던 도시이며,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의 배후 항구였고, 전국적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던 인재와 문화의 집합소였다. 통영이란 도시는 이순신과 불가분의 관계다.
통영의 시작은 조선 수군의 통제영 설치와 연관된다. 3도수군 통제영(統制營)의 설치로 12공방을 비롯한 전국적인 장인집단이 대량 유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시를 짓고 문장을 쓰던 예술가였다. 초대 수군통제사로 이곳에 와 혼합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통영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군사도시 통영에서 예술가들이 많이 나온 건 이순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통영은 그리하여 다양한 예술과 음식문화를 꽃피웠다. 통제영이 있던 세병관 뒤쪽에 가면 통제영의 물적 기반을 제조하던 12공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통영의 거리를 걷노라면 통영 출신 예술인들의 거리명을 통해 그들이 남긴 흔적을 훑게된다. 보도블록 사이로 유치환의 ‘행복’을 비롯해 통영을 빛낸 시들이 새겨져 있고, 건물의 벽이나 창에는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통영의 처자를 찾아 이 도시를 찾았던 백석 시인의 시도 있다. 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작품도 보인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각 학교 교가 악보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 출신의 전혁림 화백의 그림이나 통영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이중섭 화가의 그림이 새겨진 동판도 볼 수 있다.
통영은 홀로 다니는 여행자에게 음식 쪽에서는 불친절하다. 1인분짜리 음식도 있기는 하지만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은 다찌나 정식으로 통영의 다양한 맛을 보고 싶다. 다찌란 일본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통영 지방 특유의 음식 문화다. 부산과 여수 사이의 주요한 항구에는 스쳐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아서 서서 먹었나보다. 다찌는 항구에서 ‘서서 마시는’(立ち飮み) 항만 노동자들의 음식문화였다. 충무김밥이라 불리던 음식도 항구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상하지 않게 밥과 음식을 따로 제공하던 전통 풍습에서 만들어졌다. 서서 음식을 먹던 다찌 문화는 그 후 다소 변화되어 테이블에 비닐을 깔고 다양한 통영의 음식을 곁들인 정찬 요리, 잔치 음식으로 바뀌었다. 가격은 보통 1인분에 3만 원 정도 하는데 대부분 2인분부터 주문한다.
요즘에는 2인분도 꺼려하는 분위기다. 항만 노동자들의 선술집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이다. 대신 반다찌가 있는데 온다찌의 화려한 비주얼을 상상하던 사람은 실망하고 만다. 술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비스로 나오며, 음식은 손님이 먹는 속도에 따라 맞춰 나온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지만 밥을 먹을 때는 아쉽다. 특히 통영은 그렇다. 요즘 같은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은 서호시장의 시락국이 최고다. 특히 아침 식사로 일품이다. 중앙시장의 물메기탕은 별미다.
물메기, 꼼치, 잠뱅이
명품은 심플하다. 통영의 음식은 바다의 밭이라는 천혜의 환경 덕분에 재료가 탁월하여 요리법이 심플하다. 기교를 거부한다. 겨울에만 한정 판매되는 물메기는 명품 해장국의 주인공이다. 명품에는 유사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정판도 나온다. 물메기는 동해에 가면 꼼치, 서해로 가면 잠뱅이라고 불린다. 겨울에만 나오기 때문에 한철 음식에 쓰인다. 식도락가와 주당의 목이 타는 이유다. 그만큼 사랑도 듬뿍 받는다.
음식 기행을 한다면 단연 통영이다. 사시사철 먹거리가 넘친다. 남해의 건강한 바다에서 때맞춰 해산물이 올라오고 남풍을 맞고 자란 싱싱한 채소가 어우러져 통영은 미식가들이 들락거리는 한국 최고의 ‘미항’(味港)이다. 역사적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어서 중인계급이 발달하였고 이들에 의해 문화와 예술이 진작된 도시이며 음식 맛도 여수에서 통제영이 이전하면서 전국의 맛이 집합했다. 또 지리적으로도 음식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 우스갯소리로 맛의 고장으로 대표적인 전주 사람들이 왔다가 기죽어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져가면서부터는 통영이 맛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도다리, 갯장어, 물메기, 굴, 미역, 전복, 졸복 등이 차례로 밥상에 오르는 통영은 단 한 번의 여행으로는 그 맛을 다 볼 수 없는 곳이다. 미항에서 미도(味都)로 발돋움하고 있다.
무한하지 않아서 인생이 애틋하듯 단 한철이라 애지중지 각광받는 물메기는 겨울에만 등장하는 미식계의 겨울 진객이다. “인생의 으뜸은 만취”라는 바이런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통영의 제철 안주 상차림 명물 다찌집에서는 취하기 마련이다. 통영에서는 취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른 새벽 서호시장으로 가서 시락국으로 해장을 하거나 강구안 쪽 중앙시장으로 들어가 복국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라면 더 취해도 좋다. 바로 물메기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 한철 통영은 물메기로 뒤덮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메기가 대형 공장의 빨래처럼 걸리는 섬이다. 조그만 포구마다 이 천하에 못생긴 물고기를 다듬는 데 여념이 없다. 겨울 물메기철 어부는 밤새 물메기를 퍼 올리고 날이 밝으면 아낙들과 퇴역 어부들이 포구에 나와 물메기 등을 따서 내장을 꺼내 손질하고 세척한 뒤 건조한다.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물메기는 표준어가 꼼치라고 한다. 서해안 보령에서는 잠뱅이라고 부르고 강원도에서는 곰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영의 꽃인 동백꽃도 수백 가지 종류가 있듯 비슷하면서 다른 이 물고기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요즘은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꼼치와 물메기를 같은 어종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해장국의 명품을 맛보려면 통영으로
물메기탕은 물메기국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무를 푹 고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물메기를 넣고 살짝 데칠 정도만 끓인다. 모자기와 다진 마늘을 넣으면 맑은 국물이 나온다. 맑은 국물을 낼 때 대파를 얹고 고기와 함께 마시듯 먹는다. 물메기는 지방이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육질이 부드럽다. 멸치젓을 곁들이기도 한다. 통영의 겨울 새벽의 맛은 맑은 국물 맛이다. 물메기는 탕을 만들 때는 주로 생물을 쓰고 건메기는 찜을 해서 먹는다. 육질이 매우 부드러워 해장국으로 끓여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면서 한입 떠 넣어 삼키면 간밤의 숙취가 그 뜨거움과 부드러움에 도망을 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술병을 잘 고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해장에는 빠질 수 없는 물고기였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라고 쓰여 있다.
11월 마지막 주 정도가 되면 주당들은 물메기탕을 먹으러 몰려든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통과의례이자 어민들에게는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맛을 찾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가 더해져 대구에 육박하는 인기를 끌고 있다. 가격도 대구 값에 가깝다.
통영에서 물메기 경매는 서호시장 옆 통영수협 도천위판장에서 열린다. 새벽 4시부터 물량에 따라 한두 시간 경매가 이루어진다. 시장은 새벽 5시경부터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다. 인근의 500원짜리 커피가 불티나게 팔리고 시장 내의 시락국집에는 한 그릇을 해치우는 시장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건메기는 12시에 경매를 한다.
대구나 복국도 물메기로 만든 시원 담백한 해장국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 겨울철 통영에 가서 술 마시고 새벽에도 깨어나지 못한 여행자는 뜨거운 위로를 받는 듯한 물메기 해장국 맛을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겨울철만 놓고 봐서는 최고의 해장국이다. 봄날 도다리쑥국이 나오기 전까지는 겨울 통영에서 해장국 명품의 호사를 누려보시라!
파도가 멈추는 해안선이 기다란 통영은 오목하게 들어간 포구가 발달해 있다. 한려수도의 바다와 섬 전망은 미륵산 정상이 최고이고 통영항 전망은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서 봐도 좋지만 20여 분 땀을 흘리고 올라 북포루에서 보면 완벽하다. 백석의 시 ‘통영2’처럼 충렬사 계단에 앉아 동백꽃 필 무렵 한산도 뱃사공이 되어도 좋으리라.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1 김종억 동년기자의 '설레는 손주와의 첫 만남, 잊지 못할 첫 여행'
일정 40일, 미국
구성원 김종억 동년기자 부부, 아들, 딸 내외와 손자
코스 미국 콜로라도 덴버→로키마운틴→레드락→라스베이거스
2014년 정년퇴직 후 꿈에도 그리던 미국여행을 계획했다. 미국 콜로라도에 사는 딸네 가는 것인데,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자와의 첫 만남이라 몹시 설다. 스마트폰 앱과 인터넷 웹서핑을 이용해 일정을 짰다. 그렇게 준비하고도 인천공항 출국수속대 앞에서 전자여권만 손에 든 채 비자신고를 하지 않아 퇴짜를 맞고 아연실색 허둥대고 말았다. 출국 2시간 전, 여행사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비자신청을 마쳤다. 무사히 딸네 도착해 손주의 방학식 겸 발표회 파티에 참석해 아이의 모습 하나하나를 카메라에 담았다. 40일간의 일정 중 로키마운틴에서 가족들과 신나게 스키를 탔던 시간은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4박 5일은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해준 좋은 시간이었다. 대형마트에서 막걸리를 사 마시며 가족들과 호텔에서 보낸 그날 밤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자녀들에게 무한 신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미래에 떠날 여행도 계획했다. 다음 가족여행은 플로리다 해변과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정했다.
#2 가재산 동년기자의 '사돈, 손주들과 다시 찾은 제2고향 오사카'
일정 3박 4일, 일본 오사카
구성원 가재산 동년기자 부부, 사부인, 딸 내외와 두 손녀
코스 오사카→녹지공원(살던 아파트와 아이들 유치원)→오사카 시내관광(도톤보리, 오사카성, 레고마을 등)→교토관광(청수사, 금각사 등)
아들 내외가 추석에 장인·장모를 모시고 손주들과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은근히 시샘이 나서 사위에게 “우리도 여행가자”고 해서 떠나게 됐다. 특별히 35년 전 상사주재원으로 4년간 아이들과 살았던 오사카를 여행지로 골랐다.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통해 15만 원에 아담하고 깨끗한 32평 아파트를 통째로 사용했다. 그 외 정보는 딸이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맛집과 관광지를 알아보고 예약한 덕에 여행 중 특별히 힘든 점은 없었다. 오사카에 도착해 35년 전 살던 집을 맨 처음 들렀는데, 반갑게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딸이 다니던 유치원을 방문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개원 70주년이 되었다는 유치원을 배경으로 가족 단체사진도 찍었다. 이번 여행에서 특별했던 점은 해외에서 사돈댁과 함께 추석 차례를 지냈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음식을 사다 약식으로 제사상을 차리고 아이들과 절을 올렸다. 여행을 계기로 외손주들과 놀아주며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내년에는 아들네 가족, 사돈 내외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가보려 한다.
#3 최원국 동년기자의 '통영 겨울 바다로 떠난 감성 충전 가족여행'
일정 2박 3일, 경남 통영
구성원 최원국 동년기자 부부, 딸 내외와 손녀
코스 부천→천안→마산→통영
통영에서 겨울바다를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한산도를 보며 국가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떠난 가족여행이다. 직접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박할 곳을 예약하고,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맛집을 찾았다. 우리 가족이 묵은 아파트는 변두리에 있어 통영 바다로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관리가 소홀한 탓에 취침 중 벽의 부착물이 떨어져 사고를 당할 뻔했다. 숙박지를 찾을 때는 저렴한 가격도 좋지만 사전 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동차로 한산도를 일주하며 멋진 풍경을 즐기고,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니 한껏 감성이 고양됐다. 여행 중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족이 협력하며 긴밀해진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평소 서로 몰랐던 면모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 여행은 중국 청두로 가보려 한다.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데 의미가 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가족여행을 가자고 정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을 미룰 테니까!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글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정유재란 첫 전투 칠천량 해전의 치욕은 예고되어 있었다. 수하 장졸과 백성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장수를 내치고, 무능하고 용렬한 장수를 앉히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선조는 정유년(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을 충청·전라 양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경상수군통제사로 발령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한 계급 강등되고, 육군으로 전출되었던 원균이 수군에 복귀하여 최전방 수역을 맡게 된 것이다. 한산도 통제영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이 인사에는 조정을 장악한 서인세력의 비호를 받은 원균의 모략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통제영을 왜군 본진(부산포)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한산도에서 거제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이순신의 입지를 더욱 압박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 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군은 임진년 이래 경남 동부 해역 요소마다 견고한 성을 쌓고 2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진을 코앞에 둔 곳으로 수군총사령부를 옮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죄를 뒤집어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노한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았다.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백의종군 길에서, 그는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전멸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포구와 고을을 순회하면서 흩어진 수군병력을 불러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찾아냈다. 그 사이 다급한 불부터 끄려는 듯, 조정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혔다.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
이순신이 한양으로 잡혀간 것은 정유년 2월 26일이었다. 시류에 편승한 조정 중신이 모두 침을 튀기며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노 재상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라는 상소 덕에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난 것은 잡혀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1일이었다. 그날부터 백의종군 길에 나선 그가 복직되어 다시 통제사가 된 8월의 회령포 취임식까지,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을 자동차로 둘러보았다. 이순신이 5개월 넘게 걷고 말달렸던 길을 주마간산처럼 달린 1박 2일 여행이었다.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남대문 밖 관노 집에서 아들과 조카의 마중을 받았다. 고문에 시달린 육신을 치유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쉬어 길을 떠난 그는 아산 선영에 들러 눈물의 참배를 한다. 전라 좌수영(여수) 마을에 머물던 어머니의 귀향 소식 덕분에 고향 집에 며칠 유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에게 먼저 당도한 소식은 어머니 부음이었다. 아들의 하옥 소식에 허겁지겁 서해안을 따라 배편으로 올라오다 풍랑으로 와병, 끝내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호송관의 독촉에 못 이겨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는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안고 남행길에 오른다. 공주-여산-전주-남원-하동을 거쳐 초계에 당도한 것이 6월 4일이었다.
초계는 도원수의 진을 둘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영호남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면서 육군과 수군 작전을 지휘할 적지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왜적의 내륙 진출을 막으려면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는 게 상식인데, 어찌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로 이어진 궁벽한 곳에 도원수의 진을 친 것인가.
도원수가 주둔했던 곳이 어딘지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한때 초계면사무소 자리가 그곳이었다 해서 표지판까지 있었다지만, 향토사학계가 들고 일어나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뒤 경남도와 합천군은 마을 앞 농경지를 사들여 역사공원을 꾸미면서, 고증도 없이 호화로운 원수부 건물과 객사까지 세웠다. 많은 예산을 들인 보여주기 식 사적지로 보였다.
백의종군 당시 이순신의 숙소 모여곡이라는 마을에도 이설이 있지만, 합천군 율곡면 낙민마을 설이 유력하다. 그가 묵었던 집 주인 이어해(李漁海)의 13대손이 지금도 살고 있고, 당시의 일화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섰고, 그 뒤편 야산 기슭에는 마을이 정겹게 들어앉았다.
칠천량 패전 소식에 낙담한 도원수의 한탄을 듣고 이순신은 “제가 한 번 나가보고 계책을 세움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7월 18일이었다. 곧바로 남행하여 사천 노량의 해안마을을 둘러보고 진양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孫景禮) 집에 머물 때인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는다.
에는 이때의 일이 매우 덤덤하게 적혀 있다. “맑음.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다. 분부 내용인즉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며칠을 두고 큰비가 내려 근심과 우울증이 심해진 탓이겠으나, 복직인사에 대한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무덤덤한 이 점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이순신에게 미안했는지, 선조는 유서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백의종군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尙何言哉)’를 반복했다.
사적지 손경례 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목화 시배지로 유명한 산청군 단성에서 남으로 뻗은 지방도를 한참 달려가니 길가에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 전주에는 ‘손경례 가(家)’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급히 차를 세우고 찾아들어갔으나 동네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참 찾아 헤맨 끝에 12대손이라는 손도근(孫道根·80) 옹을 만날 수 있었다.
직계자손이냐는 물음에 손 옹은 손사래를 치면서 “직계는 서울에 살고 관리인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꼴이 이렇소” 했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 이름을 함부로 부른 데 대한 불쾌감을 내비추었다. 얼른 사과하고 당시의 일화를 물으니, 이은상의 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라면서도 “비가 많이 와서 충무공께서 우리 조상 집에 닷새를 묵어가셨다”고 자랑했다.
비에 갇혔던 길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이순신은 발길을 재촉하여 하동-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 땅을 지나 보성에 당도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난리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피란민들 손을 부여잡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안쓰러움을 표했다. 젊은 장정들은 처자에게 “나는 대감을 따라갈 터이니 너희는 천천히 찾아 오거라” 하고 따라나서기도 했다. 노인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바쳤다. 통제사가 받지 않으니까 울면서 사정했다. 더 이상은 사양할 수 없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
보성 땅에서 제일 먼저 찾아든 곳은 조양창(兆陽倉)이었다. 다행히 이 국창(國倉)에는 곡식이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순천 부유창 등 고을마다 창고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군량으로 쓸 곡식을 구했으니 얼마나 요긴했겠는가. 창고들이 잿더미가 되고 사람 그림자가 끊긴 것은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청야작전을 재촉한 탓이었다. 왜적은 그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칠천량 패전으로 남녘 바다와 뭍을 안마당처럼 누비게 된 왜적이 본격적으로 호남 침공에 나선 것이었다.
조양창 자리는 지금 흔적도 없다. 그 사이 간척공사로 바다가 뭍으로 변한 것이다. 통제사가 묵었다는 김안도의 집도 마찬가지다. 400년 넘는 세월의 무게가 짓누른, 보이지 않는 흔적일 것이다.
보성에서 이순신은 흩어진 장수와 병졸을 모으고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아흐레를 머물렀다.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던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有旨·편지)를 가져왔다.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통제사는 “공문 작성 때 영의정 유성룡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영의정은 경기지방 순행 중이었다는 선전관 말로 보아 조정 대신들이 유성룡 부재를 틈타 다시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통제사는 대취했다.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다시 함거에 실려 올라가게 될 것이고, 명을 받들면 조선수군 재건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괴로움을 잊고 싶어 그는 군관들을 불러 통음을 하고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은 결심한 듯 열선루 누각에 앉아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썼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아직도 할 수 있사옵니다.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왜적이 바다와 뭍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는 와중에 그런 용기를 가진 인물은 이순신 한 사람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열선루는 지금 없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적이 보성 땅을 분탕질할 때 불타 없어졌다. 전란이 끝난 뒤 복원되었지만 일제 때 다시 철거되었다. 불공대천지수의 사적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주춧돌 넷과 댓돌들은 지금 군청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에 따르면 곧 있을 열선루 복원공사에 그대로 쓸 계획이라 한다.
보성을 떠난 이순신은 18일 회령포(會寧浦·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닿아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고 그 유명한 ‘회령포 결의’를 다진다. 에는 그날 “수사 배설(裵楔)이 뱃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포구 관청에서 잤다”고 씌어 있다. 17일자 일기에 “군영구미(軍營仇未·강진군 대구면)에 당도하니 경내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 배설이 우리가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두려워 피한 것이 분명하다.
20일 일기에는 배설이 임금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 숙배하기를 거부했다면서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기에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썼다. 수사의 체면을 봐서 권율처럼 고위 군관을 직접 벌하지 않고 수하에게 벌을 주어 경고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은 19일이었다.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참석한 초라한 행사였다. 그러나 구국의 결의만은 드높았다. “우리는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어야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에 적힌 통제사 취임사는 이토록 뜨거웠다. 임금과 조정을 속이고 명을 받들지 않은 죄인의 신분에서 다시 수군 총수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직첩 하나였다.
회령포는 오늘날의 정남진 바닷가다. 서울에서 정남쪽 끝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해남 땅끝 마을 가기만큼 멀다. 오전에 초계를 떠나 해 안에 당도하기 어려워 장흥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달려간 오월의 아침, 회진포 바다는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성이 모두 피란 가고 빈 포구였을 그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선창에는 산뜻하고 날렵한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번듯한 주민복지 시설과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취임식 행사를 치렀을 회령포 성터는 아름다운 역사공원으로 바뀌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던 바다는 1960년대의 개간사업으로 비옥한 들판으로 변했다. 면 소재지가 되었으니 인구도 몇 곱절 늘었으리라.
칠천량 참패의 씨앗
글머리를 되돌려 이순신 삭탈관직과 나국(拿鞠, 잡아다 심문함)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직접 죄목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 군을 영격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을 어긴 일이었다. 그 까닭에는 아직 정설이 없다. 기록이 서로 달라 연구자마다 추론에 그칠 뿐이다.
정유년 초 경상도우병사 김경서(金景瑞·일명 김응서)의 진에 드나들던 왜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가 김 병사에게 달콤한 정보를 흘렸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였던 그는 강화회담 결렬이 기요마사 탓이라고 헐뜯으며 “이번에 기요마사가 다시 건너오게 되었으니 통제사를 시켜 길목을 지켰다가 일제히 공격케 하면 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기요마사가 건너온다는 날짜까지 말해줬다. 김경서의 보고를 받은 임금과 조정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이순신에게 영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초계에서 한산도까지 와 출동 명령을 전한 도원수에게 이순신은 “반드시 왜의 간계가 있을 것이오. 배를 많이 끌고 나갔다가는 도리어 역습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어찌 간첩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대한해협을 건너온 기요마사는 울산 서생포에 진을 쳤다. 이순신의 판단이 어떠했든 가나메의 정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진노한 선조는 “우리나라 장수가 유키나가보다 못하다”고 펄펄 뛰었다. 당장 이순신을 묶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순신을 그 자리에 천거하고 뒤를 보아준 영의정 유성룡도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을 잡으러 온 의금부 도사 일행 가운데는 얼마 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원균도 있었다. “내가 통제사라면 당장 부산포로 달려가 왜적을 무찌르겠다”던 그였다. 그 시간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려고 가덕도 앞바다에 나갔던 통제사는 왕명 소식을 듣고 급거 귀항했다. 갖가지 병기와 화약류, 병력과 군량미의 끝 단위까지 세세히 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사또,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는 겁니까!” 백성들은 함거를 가로막고 울부짖었다. 원균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을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치욕 칠천량 참패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칠천교를 건너다가 소나기를 맞았다. 칠천량(漆川梁) 해전 기념관을 둘러볼 때는 청명한 봄날이었다. 버스 기다리기 지루해 걷기로 작정하고 나섰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한두 방울씩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리 한가운데 이르러서는 소나기였다. 세찬 바람까지 몰아쳐 금세 신발과 바지 자락이 젖었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 치욕의 날도 이런 날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년 난리 이래 적선이 얼씬도 못하던 부산 서쪽 바다에 150여 척 전선(戰船)이 모조리 수장된 참담한 패전의 날도 비바람이 거세었다는 기록을 읽은 탓이리라.
기념관에서 관람한 영상물에는 수군이 곤히 잠든 한밤중 왜군이 작은 배를 몰고 와 판옥선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모르고 자던 조선 수군이 미처 응전 태세를 갖추지 못해 속절없이 왜적의 창칼과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패주해온 군대가 적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자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장수 한 사람 잘못 쓰면 이런 일도 일어난다는 교훈을 칠천량 패전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주말에 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유년 7월 16일 자에 칠천량 전투 상황 개략이 나와 있다. 격군으로 출전했던 세남(世男)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알몸으로 찾아와 전한 참상이었다. 7월 4일(음력) 한산도 통제영에서 출진해 칠천도와 옥포를 거쳐 7일 부산 다대포에 정박한 왜선 8척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왜군이 뭍으로 도망쳐 빈 배들을 불 지르고 절영도 바깥 바다로 나갔다. 때마침 대마도 쪽에서 적선 1000여 척이 건너오기에 싸우려 했더니 적이 회피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판옥선 6척은 서생포 앞바다로 표류하여 뭍으로 오르다 왜적에게 거의 다 살육당하고 자신은 숲으로 도망쳐 간신히 살아왔다는 내용이다.
늑장을 부리다가 도원수 권율 장군에게 곤장을 맞고 부산포에 출진한 통제사 원균은 제대로 싸워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왜군 함대가 1000척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엄청난 규모였음에 틀림없다. 병력과 군량, 병참물자 등을 싣고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수송선단이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선들은 흩어져 달아나기만 했다. 부산 앞바다는 섬이 없어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좀 멀리 나가면 파도가 높은 물마루[水宗]다. 바람은 거칠고 물결은 높다. 왜선들은 접근하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의 힘을 빼려는 것 같았다.
간신히 선단을 수습하여 후퇴 길에 들어선 원균은 가까스로 가덕도에 기항했다.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섬에 닿자마자 병사들은 다투어 내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
칠천도로 가는 중에 거제도 북단 영등포에 닿아 밤을 보내려 했으나 적선 500여 척이 추격해왔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피난지가 거제도 서북쪽 칠천도였다. 본섬과 어깨를 겯고 있는 이 섬에는 아늑한 포구가 많아 선단을 숨기기 좋았다. 칠천도 도착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여러 포구에 전선을 분산 정박시키고 원균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후퇴를 제안했다. “용기백배할 때와 겁낼 때를 구분하는 것이 병가의 계책인데 지금은 싸움을 회피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원균은 이 말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쉬고만 싶었던 것일까.
그대로 주저앉아 뭉개자 권율이 다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가덕도에 부하들을 버려두고 도망친 죄를 문책한 것이었다. 원균은 부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드러누었다. 이 모습을 본 장수들과 병졸들이 통제사를 어떻게 보았겠는가.
배설은 몰래 제 부하들을 이끌고 한산도로 튀어버렸다. 다른 부대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영화 에서 배설은 비겁한 도망자로 묘사되었지만, 그가 인솔해간 전선 12척은 뒷날 이순신의 수군재건에 밑천이 되었던 유명한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그 배들이다.
칠천량 해전의 수치
운명의 날은 16일 새벽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지만 어떻게 번을 섰기에 소형 적선 5~6척이 밤중에 수군선단 정박지에 잠입하는 것을 몰랐을까. 추격을 당하는 패주 길이라면 평소보다 더욱 경계하는 게 마땅할진대, 적병이 판옥선 밑창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도록 모르고 자기만 한 것인가!
원균 함대 곳곳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놀라 일어난 수군들은 미처 전투 태세를 갖출 새도 없이 허둥거리다가 왜군의 총격과 창칼에 쓰러져갔다. 불붙은 판옥선들은 맥없이 침몰했다. 적은 3중 4중으로 조선 수군 함대를 둘러싸고 소총과 포화를 쏘아댔다. 적은 포구에 갇힌 조선 판옥선에 붙어 자기 배 돛대를 누이고 사다리처럼 타고 건너와 맹수처럼 날뛰었다.
단병접전에는 세계 최강이라는 사무라이들이었다. 일본 수군의 전법은 적선에 올라 칼과 창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일대일로 벌이는 단거리 접전에 대적할 상대는 없다는 자부심을 가진 그들이었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
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金軾)의 장계(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김식은 시종 통제사와 같이 행동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임진년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수많은 패전에 절치부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 전력을 크게 강화해 떼 지어 건너보냈다. 해전의 명장이라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도라 (藤堂高虎) 등이 거느린 정예 수군이었다.
원균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나 도망쳤다. 칠천도 남쪽으로 빠져나가 허겁지겁 서북쪽으로 노 저어 갔다.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해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수하 병사에게 업히다시피 뭍에 오른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는 그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추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는데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 보고서로 인해 원균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던 사실이 뒷날 조사로 밝혀졌다. 조선 수군 전 재산인 전함 150여 척과 1만 안팎의 장병 목숨을 수장시킨 장수가 천명을 다 살았다는 사실은 칠천량 해전의 또 다른 수치다.
원균의 무능이 패인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조선 수군이 왜 그런 치욕을 당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추상같던 기율의 해이와 사기 저하라는 게 임진왜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상승 조선 수군이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누렸던 수군 장졸들은 후임 통제사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 옥에 갇히게 한 세력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수군을 지휘해 전투를 수행할 실력도 지략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수들과 군졸들이 그와 따로 놀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병사들 사이에는 “이런 군대로는 왜적을 이길 수 없어!”, “적을 만나면 36계 줄행랑이 상책이야” 하는 말들이 돌았을 정도다.
거기에다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 더욱 영이 서지 않았다. 2년이 넘도록 수군을 떠나 있었던 원균은 전투가 두렵기도 했다. 도원수에게서 득달같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날아오는데 따르지 않는 장졸을 이끌고 나가기가 무서웠다.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여 배후를 튼튼히 한 뒤에 수군이 부산을 치는 수륙(水陸) 병진론을 거듭 건의하면서 날짜를 끌다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
경상·전라·충청 삼도수군을 거느린 삼도수군통제사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명령을 듣지 않은 죄가 크기는 하지만, 참모총장을 곤장으로 다스린 사례가 있을지 모르겠다. 육군 책임자인 도원수 권율이 수군 장수를 징치한 이상한 사건이었다.
얼마 후 권율은 또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6월 안골포 출동에 직접 앞장서지 않고 수하 장수들만 보냈다는 이유였다. 합천 초계에 진을 치고 있던 권율은 사천 곤양까지 내려가 원균을 불러올렸다. 매 맞는 통제사는 수하 장졸들 사이에 웃음거리일 뿐 존경과 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수하 장졸의 사기가 어땠는지는 물어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조정의 전투 수행 능력 부족도 큰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전투 지휘자 원균의 무능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칠천도로 가지 말고 좀 더 항해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갔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칠천도로 갔더라도 경계를 철저히 폈으면 그런 치욕은 면했을 것이다. 쫓기는 군대가 경계를 소홀히 해 적선이 접근하는 것도 몰랐다면 전투의 ABC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주둔지 주변뿐 아니라 물길 곳곳에 척후를 박아 적의 움직임을 손금 들여다보듯 한 이순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능이고 태만이고 무책임이었다.
패전의 결과는 수군에게만 참담한 것이 아니었다. 남해바다를 마음껏 휘젓게 된 왜적은 마음 놓고 전라도 땅을 유린할 수 있었다. 도망친 배설이 한산도 본영에 남은 군량과 병기들을 바다에 처넣고 불을 지르고 도망친 뒤 한산도와 전라우수영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남해와 순천을 차례로 손에 넣은 적은 전주를 목적으로 두 갈래 협공을 시작했다. 남원성을 지키던 군민이 모두 참살당하고, 전주성도 허무하게 떨어졌다. 두 성만의 불행이 아니었다. 삼남의 백성들은 조정의 청야(淸野)작전에 삶의 뿌리가 뽑혀나갔다. 청야란 왜적에게 이용되지 못하도록 집과 경작지를 태워 청소하듯 깨끗이 들판을 비우는 것이다. 도체찰사가 경상·전라·충청 삼도에 파견되어 제 손으로 제 집과 곡식을 태우지 않는다고 백성들 목을 쳤다. 왜적에게 당하고 제나라 조정에 당한 중첩된 비극이었다.
원균이 상륙한 장소는 고성 ‘추원포’로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춘원포’의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춘원포는 오늘날 통영시 광도면 황리 안정 국가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곳이다. 통영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그곳에 갯마을은 흔적도 없었다. 바닷가에 높다란 조선소 크레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이런 데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조선소와 협력 업체들이 타운을 이룬 산업단지가 춘원포일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택시를 내려 나이 지긋한 현지 주민에게 물으니 “어릴 때 저 너머에 목 없는 장균 묘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포구 뒤편 야산을 가리켰다. 거기서 원균이 최후를 마쳤다는 기록에 근거한 설화일 것이다. “옛날부터 이 포구마을을 춘원개라 불렀다”는 주민들 말에서 춘원포 위치를 믿게 되었다.
왜적의 소굴이었던 안골포도 거기서 멀지 않다. 육지가 바다로 길게 뻗어 나온 곶이다. 그 끄트머리 야트막한 야산 꼭대기에 안골포 왜성이 있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고 택시를 내렸더니 바로 성터 입구였다. 숨을 헐떡이며 한참 나무계단 길을 오르자, 무너진 성터 위에서 아낙네 둘이 봄나물을 캐고 있었다. 그 너머로 부산 신항 크레인들이 줄지어 서 있고, 성 아래에서는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이었다.
성터에서는 가덕도와 거제도가 보인다 했지만 초행자 눈에는 구별이 안 갔다. 남쪽 오른편 어름에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거제도가 아닐까 짐작만 해보았다. 다만 거제도 가덕도 앞바다를 감제할 수 있는 작전 요충지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칠천도에 기항한 조선 수군을 공격한 왜군의 출진 기지가 바로 그곳이었다는 사실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칠천도도 이제는 자동차로 갈 수 있다. 2000년 거제도와 연결된 다리가 생겨 연륙이 되었다. 통영과 연결된 거제대교, 부산과 이어지는 거가대교를 건너 본섬 서북쪽으로 달려가면 바로 칠천도다.
본섬 서북단 칠전삼거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잠시 벚꽃 길을 따라 걸으니 이내 칠천교였다. 다리 건너편에는 크루즈 관광선 터미널이 자리 잡았고, 주변에는 횟집 숙박업소들이 고객을 부르고 있다. 다리에서 20여 분 더 가면 2013년에 문을 연 칠천해전기념관이다.
거제도 본섬을 마주 보고 걷는 칠천도 바닷길에는 온갖 봄꽃이 다투어 피고, 호수 같은 바다는 에메랄드빛이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어약연비(魚躍鳶飛)의 바다가 그런 참극의 현장이었다고 누가 짐작이나 하리오!
근래 경남도에서 거북선 찾기 운동을 벌였다. 칠천량 바다에 가라앉았을 잔해를 건져내 거북선의 실체를 마주해보자는 취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10억 가까운 비용과 3년이 넘게 걸린 그 사업의 결실이 보도된 일은 없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선진리(船津里) 왜성을 다시 찾은 것은 꼭 13년 만이었다. 남해안 꽃마중 길에 벚꽃 명소라는 소문에 이끌려 찾아간 것이 2004년 4월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사천만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든 한적한 어촌 마을 야산을 뒤덮은 벚꽃이 제철이었다. 그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자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에 잠시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지금의 가고시마(鹿兒島) 땅인 사쓰마(薩摩) 영주였다.
그 벚나무들이 일제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잠시 세월의 나이테를 헤아려보았다. 성의 주인이었던 시마즈 후손들 입김으로 조선총독부는 그곳에 공원을 꾸미고 벚나무를 심었다 한다. 더러는 그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고목도 있었다. 벚나무들은 봄마다 무심한 꽃잎을 쏟아낸다. 올 4월에도 벚꽃 축제가 또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첫 방문 이후 13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성터 발굴사업에서 의미 있는 출토품이 나왔다는 사실은 몰랐다. 고려시대의 자기류 같은 출토품은 왜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왜구의 분탕질에 대비해 고려수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옛 모습의 편린을 짐작케 하는 성터가 복원된 사실도 알 턱이 없었다.
첫 버스로 진주에 도착해 삼천포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선진리 정류장에서 내려 3km를 걸어서 갔다. 1598년 가을 사천벌을 붉은 피로 물들인 치욕적인 패전의 흔적은 남았을 리 없겠지만 분위기만은 느껴보고 싶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들판 여기저기서 봄 기지개가 한창이었다. 농수로마다 물이 흘러넘치고,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들 모습이 정겨웠다. 논두렁, 밭두렁 너머 울타리마다 피어나는 매화도 반가웠다. 420년 전 초토에도 봄은 왔다.
싸움에 패해 달아나다가 왜군의 소총에 맞아 죽고, 칼과 창에 찔려 죽은 수많은 조·명 연합군 병사들의 비참한 최후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일 뿐이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 턱이 없는 시대다.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
선진리 왜성도 순천과 울산처럼 바다와 뭍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순천과 울산 육전(陸戰)에서는 명군이 적장의 뇌물을 받거나 몸을 사려 비겁하게 물러난 데 비해, 선진리 전투는 어이없는 패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병력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았던 조·명 연합군의 선진리 패퇴는 정유재란 최대의 치욕으로 기록됐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과를 크게 부풀려 3대첩의 하나로 자랑했으랴!
서전은 연합군의 승승장구였다. 중로(中路)군 장수였던 명군 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명군 3만7000명과 정기룡(鄭起龍) 장군 휘하의 조선군 3000명은 1598년 9월 20일 진주성을 차지했던 왜군을 쉽게 물리쳤다. 이어 남강 변 망진산 왜성까지 함락시켜 왜군을 바닷가로 내몰았다. 진주성과 망진산을 거점으로 연합군에 저항하던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에 위축되어 사천 읍성과 선진리 성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사천읍도 쉽게 탈환됐다. 정기룡이 읍성을 포위하고 야간 기습공격을 가해 가볍게 수복한 것이다. 시마즈군은 7km 서남쪽 선진리 성으로 철수하면서, 수백 명의 병력을 남겨 수성하도록 했다. 그 병력으로 4만 대병을 막으라는 것은 연합군 남진의 속도를 늦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선진리 전투는 10월 1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었으니 4만 연합군과 1만 안팎의 시마즈군이 가을 들판에서 벌인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싸움이 되지 않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역사적인 치욕을 당했다. 사천만 바닷가 고지대에 견고한 성을 쌓고 농성하던 시마즈군은 독 안에 든 쥐 형국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그 쥐에게 급소를 물린 꼴이 됐다.
성내를 향해 포화를 집중하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돌격대를 투입했다. 성문만 열리면 전투는 끝이었다. 왜군은 유리한 지형을 등에 지고 결사항전으로 나왔다. 주변에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조총을 총동원해 연합군의 행동반경을 묶었다. 전투 중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가 연합군 식량 창고를 불화살로 공격해 군량미가 소실됐다. 군량이 사라진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연합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까지 일어났다. 사고였는지 적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군 화약고가 폭발해 큰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왜군의 불화살로 일어난 일이라 하고, 어떤 기록에는 명군의 실수로 돼 있다.
아비규환의 사천벌
연합군 진영이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왜군은 일제공격으로 돌변했다. 불끄기에 동원된 병사들이 미처 무기를 챙겨 들 사이도 없이 밀려든 왜적의 공격에 연합군 전선은 허무하게 와해됐다. 진중은 너나없이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도리 없이 동일원은 남은 군사를 진주성으로 철수시켰다.
왜군은 달아나는 병사들을 추격하면서 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둘렀다. 사천벌은 순식간에 단말마 비명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피로 물들었다. 연합군이 철수해 달아난 진주까지 핏자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는 제각각이다. 뜻하지 않은 전과를 크게 자랑하고 싶었던 일본 측 기록에는 2만~3만으로 나오는 데 비해, 에는 7000~8000명에 달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크게 늘리고 조선이 크게 줄였다고 가정한다면, 1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타당해 보인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그 후의 일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전사자 시체에서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보냈다. 전공을 증명할 수급 대신 잘라 보낸 코와 귀는 지금 교토의 유명한 사적지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에 묻혀 있다.
그곳에 묻힌 원혼은 이 전투의 희생자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 코도 베어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모두 12만 명이 넘었다. 그 한을 풀기 위해 1992년 박삼중 스님(부산 자비사 주지)이 원혼이 깃든 교토 이총의 흙을 떠다가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선진리 전투 패전 보고를 받은 명나라 만력 황제는 크게 노하면서 즉시 진군해 성을 빼앗고 왜장을 징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겁에 질린 동일원이 남은 병력을 추슬러 11월 17일 다시 왜성 공격에 나섰으나, 시마즈는 이미 성을 버리고 귀국한 뒤였다.
그 치욕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왜군이 만행을 저지르고 쫓겨 간 뒤 현지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조명군총이다. 여기저기서 썩어가는 악취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코와 귀가 잘린 수급을 모아 성 옆에 묻었다. 명군 수가 훨씬 많아 ‘당병무덤’ 또는 ‘뎅강무데기’라 불렸다. 뎅강무데기란 말이 섬뜩했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던 무덤은 원형대로 보전되다가 1983년 사천문화원과 민간이 협력해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30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혼들에게 한 가닥 위안이라도 하려는 건지 왕릉 규모 못지않은 거대한 무덤 주위에 올해도 매화와 동백이 피었다.
선진리 왜성은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말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5년 발굴사업에 이어 복원 공사와 공원화 공사가 끝난 탓이다. 동쪽에 있던 성문 터에는 육중한 문루도 복원됐다. 전형적인 일본 성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천수대 자리에 우뚝 선 6·25 전몰 공군 장병 위령탑은 엉뚱해보였지만, 허물어졌던 성곽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줬다.
성 마루에서 바라본 사천만 바다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잔물결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가 옛날 그 자리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임진년 해전에 처음 출전한 거북선 용머리가 포효하며 왜선들을 수장시켰던 성난 바다의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치욕적인 육전과는 반대로 7년 전의 임진년 해전은 통쾌한 승첩이었다. 세계 해전 역사에 그 명성을 떨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처음으로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사천만 해전은 유명하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하순에 일어났던 전투다. 첫 승첩인 옥포해전(1592년 5월 7일) 직후 전라좌수영(여수)으로 돌아간 이순신이 전열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던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서 다급한 지원 요청이 왔다. “왜군 전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바다를 침범해 노량에 대피했으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경상도 바다로 달려갔다.
거북선의 첫 승리
삼천포 해안에서 멀리 내륙으로 파고 들어간 사천 바다로 가니 선진포구에 왜선들이 오색 깃발을 날리며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이순신은 처음 거느리고 온 거북선 성능을 실험해볼 겸 적선을 너른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적은 그 계책에 넘어가 따라나섰다. 두려운 척 물러가던 이순신 함대는 수심이 깊은 바다에 이르러, 돌연 뱃머리를 돌려 거북선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거북선 용구(龍口)에서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 화포들이 불을 뿜고, 여러 판옥선들이 일제히 불화살과 총통공격을 퍼붓자 적선들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여 엎어지고 깨지고 가라앉았다. 불이 난 선상의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뛰어들고,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병사들은 산으로 도망치며 통곡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왜선 10여 척을 분멸시키고 당파한 쾌거였다.
이 해전의 의미는 단연코 거북선의 성능에 귀일한다. 무시무시한 용머리를 앞에 달고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달려드는 괴물 같은 전함에 왜적은 크게 당황했다. 선재도 두꺼운 적송으로 돼 있어 가볍고 날렵하기만 한 왜선들은 부딪히는 대로 깨졌다.
이순신은 뒤이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임금에게 전투보고서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을 올렸는데 전투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산 위와 배를 지키는 곳에서 왜적들이 빗발치듯 철환을 쏘았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도 섞여 있어 분하여 배를 급히 저어 앞으로 나아가 배를 두들겼습니다. 여러 장수들이 한 번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자, 지자 대포들과 장편전, 화전 등을 쏘아 천지를 뒤흔들었고, 고막이 상해서 엎어지는 자, 부축해서 끌고 달아나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며, 언덕으로 물러가서 감히 앞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선들은 처음에는 거북선의 무서운 외양에 겁을 먹었으나 판옥선보다 크지 않은 몸집에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일단의 왜병들은 2층 층루에서 사다리를 걸고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다. 육박전에 도가 튼 그들은 단병전에 승부를 걸 요량이었겠지만, 뛰어내린 적병마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북선 등을 덮은 가마니 거적 속에 촘촘히 박힌 철추에 팔다리와 배가 찔린 것이다.
사천해전 승전의 중요한 의미
첫 해전이 끝난 뒤 이순신은 신병기 거북선 보안을 위해 삼천포 대방진 굴항에 깊숙이 정박시켰다. 이순신 선단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모자랑포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거북선만은 안전하게 멀리 숨겨둔 것이다. 이 굴항(窟港)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시키려고 만든 시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그 뒤로도 이 굴항은 조선수군의 주요 시설로 보전돼왔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전상을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부하 장수의 상처를 돌봐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에 따르면, 이순신은 신변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줄곧 대장선 꼭대기에 선 채 전투를 지휘하다가 어깨에 적탄을 맞았다. 피가 발등까지 흘러내렸는데도 활을 놓지 않고 지휘를 마쳤다.
전투가 끝난 뒤에야 상처를 내보인 그는 생살을 두 치(6cm)나 째고 철환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태연하게 웃으며 부하들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상처는 1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해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상처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뽕나무 잿물로도 바닷물로도 씻어보지만 차도가 없어 민망할 따름”이라며 고통을 실토했다.
이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왜군의 호남 진출 거점인 선진리를 잃어 임진왜란 초기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천해전 직후 당포해전에서도 승리한 이순신의 장계에는 “사천선창에서 바라보니 험준한 산 위에 400여 명의 왜적들이 긴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모양의 진[長蛇結陣]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난잡하게 꽂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왜성을 쌓는 모습이 그렇게 묘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사천해전에 패했다면 그 축성 공사는 바로 완공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순신의 본거지인 전라좌수영과 뒷날 한산도 통제영까지 감제하는 요지가 그들에게 제공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사천해전 승첩은 전쟁 초기 제해권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기였다.
선진리 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10월 왜군 장수 모리 요시시로(毛利吉城)에 의해 축성됐다. 공사가 불과 2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곡창 호남을 도모하려는 작전 계획이 얼마나 시급했는지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런 곳에 갇혔던 왜장을 징치하지 못한 선진리 전투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의 전쟁과 남의 전쟁, 나의 염원과 남의 인식 간의 상관관계를 골똘히 천착하게 됐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로 , , , 등이 있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 금년 1월은 예년에 비해 큰 추위 없이 포근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이즈음부터 남쪽 지방에서는 때 이른 붉은 동백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하얀 눈이 쌓인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핀 동백과 푸른 잎사귀는 삭막한 겨울을 아름답게 빛내준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들이 한겨울의 세찬 눈보라를 견디고 피어나는 동백을 예찬했다.
동백은 흔히 자생 동백나무의 꽃을 일컫는 말이다. 제대로 표현을 하자면 ‘동백나무 꽃’으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멀리서 보는 동백나무 꽃은 짙은 녹색 잎에 가려져 그 화려함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붉은색 꽃잎과 희고 노란 꽃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궁극의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동백나무는 꽃만 아름다운 식물이 아니다. 동백나무 종자로부터 얻는 불휘발성의 동백기름은 잘 굳지도 않고 강한 향기가 없어 예전부터 생활에 널리 이용됐다. 질 좋은 식용유는 물론이고 약용유, 화장유, 등잔기름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변변한 여성용 화장품이 많지 않았던 옛날에는 최고급 머릿기름이나 목욕 후에 바르는 향장유로 사랑받았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백기름에는 건강에 유익한 팔미트산, 스테아른산, 올레산, 리놀렌산 등의 지방산이 올리브유 이상으로 포함돼 있다고 밝혀졌다.
차나무와 동일한 차나무과에 속하는 동백나무의 어린 잎은 녹차 대용으로 마셔도 좋다고 한다. 동백나무차는 맛도 좋고 열탕으로 우려낸 차 추출물에는 다양한 종류의 항산화 물질과 항암 활성물질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백나무 목재는 담황색을 띠고 조직이 치밀하여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사람 손을 많이 타는 다식판, 장기 알, 주판 알, 악기, 얼레빗 등을 비롯해 절에서 사용하는 목어, 견고한 농기구나 목공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됐다. 또 동백나무로 구운 숯은 단단하고 그을음이 전혀 없으며 화력이 오래 가기 때문에 옛날에는 화로에 사용하거나 찻물을 달이는 데 이용됐다. 말린 동백나무 꽃봉오리는 ‘산다화’라 하여 한방에서는 귀중한 생약으로 이용하고 있다. 일 년 내내 번쩍이는 녹색 잎이 무성한 동백나무는 불에 잘 타지 않기 때문에 남부지방에서는 방화수로 많이 식재했다. 지금도 오래된 사찰 주변에는 인위적으로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동백나무 숲이 잘 보존돼 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북 고창 선운사, 전남 강진 백련사, 해남 대흥사 등의 절 주변에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꽃도 아름답고 쓸모가 많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오던 동백나무가 어느 순간에 ‘일본을 상징하는 식물’ 혹은 ‘왜색(倭色)을 띠는 식물’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점차 우리와 멀어지게 됐다. 심지어는 1964년에 가수 이미자가 발표해 무려 35주 동안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고 당시에 10만장의 음반이 판매됐던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동백아가씨’라는 대중가요는 왜색풍이라는 이류로 한동안 방송이 금지되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동백나무의 자생지가 일본으로 알고 있다. 식물지리학적으로 일본에는 광범위하게 넓은 지역에 동백나무가 분포하고 있다. 또 일본인들이 동백나무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분포 면적은 일본에 비해 적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름다운 동백나무가 흔하게 자생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동백나무는 위도상 가장 북쪽에 분포해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많은 학술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백나무 분포 북한계선에 자생하는 한국의 동백나무는 성질이 강건해 혹독한 환경 하에서도 잘 적응하고 다양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선입관 때문인지 아직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나라의 동백나무는 주로 따뜻한 남부지방의 해안가에 많이 자생한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울산의 목도에서부터 남해안 일대 및 서쪽의 인천시 대청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는 것이 자생 동백나무이다. 해안가뿐만 아니라 기후가 온화한 남부지방의 상록수림에도 널리 자라는 수종이 동백나무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귀중한 우리의 자생 식물자원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된다. 각국에서 21세기의 식물유전자원은 나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국부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의 자생 동백나무는 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알리고 우수한 형질을 개발하여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하다.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자생 동백나무에 대한 오해를 씻고 보전과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