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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을 따라 걷다, 박완서 13주기 추모 공연
-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가 구리시 아치울에서 투병 끝에 타계한 뒤 13번째 봄날이 찾아왔다. 구리시에서는 올해도 그를 추모하는 낭독 공연을 열었다. 박완서 작가를 기리고 그의 문학을 잊지 않기 위해, 구리아트홀이 생기기 전 시청 한편에서부터 시작한 공연이 어느덧 12회 차를 맞았다. 구리아트홀 코스모스 대극장 앞은 공연 30분 전부터 중장년 관객들로 북적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포스터 앞에서 다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관객들은 대극장 1층은 물론이고 2층까지 객석을 가득 채웠다. 공연은 영상, 노래, 연주, 연기, 낭독까지 다채롭게 구성됐다. 관객들은 웃기도 울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기도 하며 공연을 즐겼다. 한 관객은 무대가 끝나자 “낭독 공연은 처음 보는데 색다르네”라고 평하기도 했다. 설교하지 않는, 그러나 여운 주는 동화 자전거를 갖고 달리면서 맛본 공포와 함께 까닭 모를 쾌감을 회상한다. 마치 참았던 오줌을 내갈길 때처럼 무거운 억압이 갑자기 풀리면서 전신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그 상쾌한 해방감. 한번 맛보면 도저히 잊힐 것 같지 않은 그 짙은 쾌감. 아 나는 도둑질을 하면서 죄책감보다 쾌감을 더 짙게 느꼈던 것이다. -‘자전거 도둑’ 中 한국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박완서 작가의 동화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 수남의 독백이다. 토실하니 붉은 볼과 깨끗한 눈을 가진, 청계천 세운상가 뒷길 전기용품 도매상의 열여섯 살 꼬마 점원 수남이. 꼬마의 고백은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자전거 도둑’은 1979년 동화집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에 들어 있던 작품이다. 이 중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것을 모아 1999년 다시 펴낼 때 책의 표제가 됐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기에 한 번쯤 읽어봤을 내용이다. 박완서 작가는 소설, 수필 등 여러 분야의 글을 썼지만, 동화에 특히 애정을 담았다고 전해진다. 이야기꾼 할머니로 남고 싶었기 때문에 동화를 집필할 때는 특히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어느 한 작품을 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화란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쓰기 마련인데, 그는 동화를 통해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어른들도 읽었으면 했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는 ‘자전거 도둑’을 오히려 어른을 위한 동화 같다고 했다. 이날 낭독 공연 사회를 맡은 최지애 소설가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16세에 이미 깨달은 수남이가 2024년 우리 곁에 있다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텐데, 분명 좋은 어른으로 반듯한 삶을 살았으리라 믿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 책 ‘박완서의 말’을 인용해 “박완서 작가님은 문학을 통해 시대와 사회를 고민하고 갈등했지만, 고정관념이나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설교하려 하지 않았다. 교훈을 주려 하지 않는 동화는 참 드물다. 작품을 읽고 오래도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박완서 문학의 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완서 작가의 문장 따라 걷는 길 1년에 한 번 열리는 낭독 공연 외에도 언제든 박완서 작가를 추모할 방법이 있다. ‘박완서 자료실’에서 그의 문장을 음미해보는 것이다. 자료실은 구리시 인창도서관 2층에 있다. 구리시 아치울에서 생을 마감한 박완서 작가의 발자취를 담은 공간이다. 자료실 입구에는 박 작가의 작품을 필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마련돼 있다. ‘박완서 필사’ 코너를 지나 자료실로 가는 길 벽면에는 작가의 삶과 작품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전시돼 있다. 마치 그의 삶을 따라가듯 걸으며 자료실로 들어서면 그의 등단작 ‘나목’부터 소설, 수필, 동화, 문학상 수상 작품 등 분야별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자료실 운영 시간 10:00~16:00) 올해는 ‘리멤버, 박완서’라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주 토·일요일 하루에 네 번(가족 대상 : 10시·14시, 일반 대상 : 11시·15시) 구리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박완서 작가의 주요 작품과 일생을 연결 지어 해설한다. 주제는 △소녀,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여자, 박완서 : 나목 △엄마, 박완서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노인, 박완서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 네 가지다. 해설 프로그램은 박완서 자료실에서 진행되며, 구리시 문화예술과(031-550-2565)로 전화 예약을 하거나 구리시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호원숙 작가 딱 알맞은 사랑 주신 어머니를 그리며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 작가는 책 ‘박완서의 말’을 엮으면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리워지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책을 펼치면 살아 계실 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와 생생한 목소리로 들릴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작품으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매년 열리는 박완서 작가 추모 낭독 공연에 참석하며 호 작가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번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에도 참석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13주기 추모 낭독 공연을 맞이하는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코로나19로 공연을 올리지 못했던 한 번을 제외하고 1주기부터 매년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구리시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번 공연은 작품 ‘자전거 도둑’이 동화라는 점에서 조금 특별합니다. 어머니가 첫 손주를 보았을 때 쓴 작품이죠. 그야말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자전거 도둑’에는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어른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머니를 보며 좋은 어른의 역할을 깨닫게 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머니는 어른으로서 상대에게 알맞은 사랑을 주신 분이에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죠. 누군가에게는 무관심이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북돋아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거든요. 넘치도록 사랑을 붓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아셨죠. 2023년 ‘어른의 부재’가 트렌드 키워드로 꼽혔어요. 그래서인지 박완서 작가님이 더 그립습니다. 그만큼 좋은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쇼츠라는 게 유행이라면서요? 저도 어떤 짧은 메시지를 보면 ‘어머 진짜 옳은 소리다’ 싶은데 순간적으로 날아가 버리더라고요. 휴대폰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누구든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걸 배우면 좋겠어요. 가장 가까운 곳에 배울 게 많아요. 사실 70세가 다 된 제 나이에도 선택해야 할 때 무엇이 옳고 그른가 망설이거나 쉽게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배웁니다. 용기 내어 사랑을 주고, 받은 사랑에 책임지며 살면 좋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그런 것들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어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짧은 영상과 달리 작품 속 인물을 보며 생각하고 배울 수도 있으니까요. 어른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누군가에게 작품을 추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요즘 고전을 봐요. 전에 읽었던 건데도 다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런 게 있었구나!’ 싶어요. 그 시절 작가와 책을 통해 공감하고 교감하며 대화하는 거죠. 어머니 작품 중에서는 ‘미망’을 추천하고 싶어요. 구한말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로,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지만 미래 주역이 될 손녀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데 그냥 꿈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해요. 딱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랑이요.
- 2024-04-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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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 故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씨
- ‘예술가란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는 자다. 예술을 나타내고 예술가를 감추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글을 시작하기 전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의 아름다운 구절은 꼭 인용하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글을 쓰기 전 그 빛바랜 책을 들고 있으면 정말 빛이 난다고 느꼈다.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는 어머니가 아름다움을 창조할 날이 올 거라고 믿었고 그 믿음은 이루어졌다.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면서 ‘행복한 예술가’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어머니에 대한 최상의 찬사라고 생각했다. 현대문학의 어머니 故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 , 등 따스한 작품들로 사랑받아온 그녀도 작가이기 전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 박완서와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이가 있으니, 그녀의 맏딸 호원숙(扈源淑·61)씨다. 호씨가 말하는 어머니 박완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봤다.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신 나의 어머니 1970년 마흔 살의 나이에 소설 으로 등단한 박완서 작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호씨는 어머니가 세상에 알려진 그날이 ‘혁명’과도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화려한 혁명이 휩쓸고 간 다음 날의 허전함처럼, 그녀도 남모를 상실감에 마음을 앓아야 했다. “예전부터 ‘나는 박수근에 대한 글을 쓸 거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아 올 것이 왔다’ 생각했죠. 이미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어머니였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 거란 막연한 예감이 들었어요. 을 읽고 ‘이건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소설일 뿐’이라는 건 알았지만, 도리어 그것이 ‘이제는 어머니가 우리만의 어머니가 아닌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깨달음을 줬죠. 그 깨달음이 저에겐 상실감을 안겨줬고, 어머니가 전과 다르게 행동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식구들의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리셨죠.” 가장 평범하고도 가장 비범했던 어머니 박 작가는 한 강연에서 “마흔 살까지의 보통 여자의 삶의 경험을 지금도 파먹고 있다. 그동안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글을 쓰지 않고 보통으로 산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평범한 엄마로 살아온 넉넉한 경험들이 녹아나 그녀의 작품에 온기와 생명력을 더한 것이다. “어머니는 40세에 글을 쓰셨고, 이미 다섯 아이의 엄마였어요.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갑자기 그런 생각들을 하신 건 아니에요. 언젠가는 쓰려고 했던 인물이나 소재, 모티브 등을 다 어머니의 머릿속에 저장해 두셨어요. 어머니는 어쩌면 태생적인 작가였을지도 몰라요. 만나는 이웃이나 집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에게도 층을 두지 않고 모두 인격적으로 대접을 해주셨어요. 그렇게 따뜻한 만남을 가졌던 인물들의 캐릭터가 모티브가 돼 문학 속에서는 특별한 인물로 다시 태어난 거죠.” 엄마의 말뚝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작품은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무관심을 일깨워주는 보드라운 각성제와도 같았다. 호씨는 문학에 대한 어머니의 강한 소명의식이 일궈낸 산물이라 말했다. “어머니는 40년 동안 단편, 장편, 수필 등을 끊임없이 글을 내시면서 당시의 화제작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어요. 항상 시대상을 읽으면서 쓰셨기 때문이죠. 그 시대의 아픔이나 갈등, 문제점, 인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나치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든 글을 쓰셨어요. 신문 연재소설도 쓰셨는데 산업화 과정에서 피폐해지고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이 어떻게 하면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문학을 통해 세상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소명의식이 강하신 분이셨죠.” 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신여성’이 될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를 말하는데, 그녀 역시 교육을 통한 자존감 확립에 가치를 두었다. “공부를 해서 자존감을 찾고 자유로운 여성이 되는 것이 곧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씀하셨어요. 그렇다 해서 ‘공부해라’라고 말씀은 안 하셨어요. 늘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셨죠. 저에겐 공부하라는 말 대신 을 읽으라 하면서 재미있는 장면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저는 그 장면을 상상하다가 그것을 보기 위해 두껍고 글씨가 촘촘히 박힌 책을 읽어냈어요. 그렇게 책을 읽고 나면 ‘아 해냈다’는 승리감이 들기도 했고, 어머니의 칭찬을 받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죠.” 웃음 뒤에 가려진 어머니의 쓸쓸함 유난히 밝게 웃는 사진이 많은 박완서 작가. 푸근한 미소로 기억되는 그녀지만, 호씨는 시간이 흐른 뒤 읽는 어머니의 글에 숨어 있는 슬픔을 발견할 때가 많다고 했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낸 가슴 아픈 일이 있기 전에도 그녀의 외로운 감성은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언젠가 을 보는데, ‘아 어머니께서 그때부터 벌써 외로움을 예견하셨구나’ 라고 느꼈어요. 그때는 우리 에게 슬픈 일이 생기기 전이었는데도 그런 외로운 글을 쓰셨더라고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이미 70대 노인의 쓸쓸함이라든가, ‘빈 둥지 증후군(자녀 독립 후 부모가 경험하는 슬픔)’ 같은 걸 먼저 느끼신 것 같아요. , 등을 봐도 노년, 중년 이후의 외로움에 대해 많이 쓰셨어요. 근데 그때는 어머니가 외로움에 대해 글을 써도 어머니는 외롭지 않다 생각했었어요. 글은 글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와 남동생이 떠난 뒤 찾아온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박 작가의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슬픔을 극복하고 글로 승화시켰다’는 반응을 보였다. 야속하기만 했다. 슬픔이 가시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호씨는 뼈마디가 녹는 듯한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자신의 아픔을 쓴 글이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된다면 ‘내가 밥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셨어요. 요즘 어머니 작품을 볼때 그 시점을 먼저 봐요. 이 글을 언제 쓰셨는가 보면 그땐 무슨 일이 있을 때였다는 걸 알게 되죠. 작품 속 인물을 통해 그때는 몰랐던 어머니의 감정을 많이 느껴요.” 어머니는 평등주의자 사소한 것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박완서 작가의 통찰력. 세상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봤던 그녀였기에 가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시선에서 태어난 문학은 삐뚤어지고 모난 우리의 마음을 둥글게 다듬어주었다. “하찮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대단함, 대단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하찮음을 단순하게 쓰진 않았어요. 그런면에서 보면 어머니는 평등주의자예요. 잘난 사람도 약한 구석이 있고, 약한 사람도 훌륭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고, 실제로 발견해내는 분이셨죠. 그 발견이 곧 어머니의 문학이에요.” ‘박완서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축복’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지만 늘 겸손을 잊지 않았던 그녀다. 젊은 작가들과 소통하면서도 그들을 거느리려 하지 않았고, 상석보다는 함께 둘러앉아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혼자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으셨어요. 그 겸손함이 과장된 낮춤이 아니라 진실된 느낌이었어요. 자존심을 세울 때는 당당하게 행동하시면서도 항상 다른 이를 존중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의 태도가 제 인생에 가장 큰 교훈이 됐어요.” 문학과 일치했던 어머니의 삶 “어머니는 생활과 떨어진 문학을 하신 분이 아니셨어요.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았고, 그걸 가장 중요시하셨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쓰셨고, 겪지 않았더라도 작가의 모습과 생각을 바탕으로 상상하셨어요. 그래서일까 어떤 인물도 악인도 아니고 완전한 선인도 아니게 쓰셨던 거 같아요. 어머니 작품을 봄으로써 다양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어요. 그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머니의 작품이 주는 큰 가르침이죠.” 호씨는 “나는 박완서 작품을 읽으며 성장해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머니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같이 살았던 거고, 같이 느끼고 고민 한 모든 것들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해 주셨던 거죠. 어머니의 작품은 그대로 어머니의 역사가 되었고 우리의 역사가 된 거예요.” 어머니와 함께한 행복의 나날들 박완서 작가가 평생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이는 그녀의 맏딸인 호씨였다. 호씨는 그런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담아 책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이전에 나왔던 호씨의 책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야기와 개인적인 글들이 많았던 반면 이번 책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느낀 그리움이 주를 이룬다. “제일 행복했던 기억은 마당을 같이 가꾸고, 피어나는 꽃을 보며 즐거워했던 거예요. 제가 꽃을 사오면 함께 심고, 그 꽃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그런 날들이 가장 행복했어요. 또, 어머니께서 제가 해드린 음식이 맛있다며 칭찬해주셨을 때도 참 행복했고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랬던 나날들이 당시에도 굉장히 소중하고 행복해서 깨질까 봐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항상 같이 있는 시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 분이셨으니까요.”
- 2015-01-16 1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