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가가 노리는 주요 시청층은 시니어, 즉 중장년층이다. 젊은 세대는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OTT 프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TV 앞에 남은 세대는 시니어가 된 것. 이에 방송가에서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즘 방송의 트렌드를 보면, 트렌디하고 재밌기보다는 시니어들이 보기 편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편이다.
그 프로들을 보면 공통점이 많다. 먼저 장치적인 부분을 보자면, 자막은 보통 시니어들이 알아보기 편하게 크고 강한 편이다. 소리를 잘 못 들었을 경우의 시청자를 위해 이해를 돕는 자막도 찾아보기 쉽다. 사회자도 톤이 높고 큰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얘기한다. 다인원의 패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의 큰 리액션은 시청자도 함께 반응하게 하고,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제작진의 노력에 시니어들은 응답했다. 물론 앞서 말한 장치적인 부분은 부가적인 것이고, 콘텐츠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어떤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공통점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오디션 프로의 식지않는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다.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이후 판도가 바뀌었다. '미스-미스트롯' 이전에 트로트는 기성 세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젊은 세대가 간드러지게 트로트를 부르자, 시니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푹 빠져버렸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이 주는 긴장감과 함께, 덧붙여지는 참가자들의 사연이 시니어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아들, 혹은 딸을 보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고, 팬덤까지 형성하게 된다.
최근 '미스-미스트롯' 제작진은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국민가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트로트가수가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K-POP스타, 국민가수를 뽑는다. 1회 16.1%, 2회 15.4%(닐슨코리아 유료방송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미스-미스터트롯' 시청자들이 '국민가수'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에서 'K-POP'으로 주제가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성이 이전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자막, 진행자, 패널 등 장치적인 부분 역시 비슷하다. 아무 정보 없이 '국민가수'를 본 시청자는 '새로운 트로트 오디션인가?'라고 착각하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미스-미스터트롯'과 달리 이번에는 다양한, 시니어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는 노래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여러 번의 오디션을 거치면서 시니어들도 실력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길러졌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 중장년층은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오디션이 특히 그러한데, 한 번 빠지면 끝까지 보고 진심으로 출연자를 응원하게 되는 것. 때문에 '국민가수'가 더욱 대박나려면, 송가인, 임영웅과 같이 시니어들을 확 사로잡을 출연자가 필요해 보인다.
# 전원생활도 예능으로
나이가 들수록 전원 생활에 대한 욕망이 강해진다. 과거에는 드라마 '전원일기'가 있었다면, 현재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니어들은 대리 만족하고 있다. 전원 생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힐링하게 되는 것. 특히 이러한 프로들은 잠깐만, 어쩌다 봐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이다. 2012년부터 방송된 스테디 인기 프로그램으로 중년 남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다. 현재도 평균 시청률 4%대가 나오고 있다. 여성 중년들은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에 마음을 뺏겼다. 현재 세 번째 시즌이 방영 중이고, 수요일 저녁 방송인데도 5~6%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 중인 혼자 사는 중년 여자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전원생활과 함께 같이 밥 해 먹고 수다 떠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오고 가는 아줌마 입담이 웃음을 자아낸다. 리얼하고 현실적이어서 공감하면서 보기 좋다.
# 스포츠 예능의 감동
스포츠 예능도 시니어들이 사랑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이 올림픽 경기에 열중해서 보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스포츠 예능의 인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시니어들은 출연자들을 자신의 자녀를 보는 듯이 보고 응원하게 되는 것. 또한 '왕년에는 나도 저랬는데'라는 생각으로 이입해서 예능을 보기도 한다.
시니어들에게 인기를 끈 대표적인 스포츠 예능으로 JTBC '뭉쳐야 찬다'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시즌2가 방영 중이며, 6~8%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화려한 스타 캐스팅은 물론, 웃음과 감동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다. 지난 6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또한 시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본업이 축구선수인 것처럼 연습하고 임하는 출연진을 보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시니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재밌거나 공감이 되어서 몰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웃음보다는 감동과 서사가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보여진다. 시니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다음 프로그램은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손효정 기자 shjlife@etoday.co.kr
TV, 라디오, 영화 등 어디선가 우연히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누구나 한 번쯤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진한 향수를 경험한다. 한때 지겹도록 들었던 음악이 어느 순간 들리지 않고, 익숙한 멜로디가 가물가물해지는 나이가 되면 반가움은 더욱 크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추억 여행이 고픈 시니어를 위해 그때 그 시절의 팝송을 실컷 들을 수 있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맘마미아! (Mamma Mia!, 2008)
지중해 코발트빛 바다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세 명의 소녀들. 이내 주인공 소피가 폭탄 발언을 한다. “아빠를 결혼식에 초대했어.” 놀랄 일은 아니지만, 소피에게는 놀랄 일이다. 엄마 도나의 옛 일기장에 적힌 세 남자 중 누가 진짜 아빠인지 알 수 없기 때문. 소피의 충격 고백으로 소녀들의 수다는 뜨거워지고, 찬란한 풍광을 배경으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허니 허니, 하우 유 스릴 미~” 곧이어 장면이 전환되고, 도나의 ‘허니’일지 모를 세 남자가 섬으로 도착한다. 결혼식을 앞둔 소피가 엄마의 옛 연인을 섬으로 초대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맘마미아’는 시니어의 추억을 똘똘 뭉쳐놓은 작품이다. 잊고 지낸 첫사랑이 생각나는 서사는 물론, ‘아이 해브 어 드림’ ‘댄싱퀸’ 등 러닝타임 내내 울려 퍼지는 팝그룹 아바(ABBA)의 노래가 젊은 시절의 추억을 선물한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세월이 흘러도 낡지 않는 아바의 명곡, 메릴 스트립, 피어스 브로스넌 등 할리우드 원로 배우의 퍼포먼스까지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작품. 흥겨운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맘마미아!”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2. 예스터데이 (Yesterday, 2019)
나이‧국적 불문 전 세계가 사랑한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 어느 날 세상에서 비틀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비틀스를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비틀스의 명곡을 기억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면? 영화 ‘예스터데이’는 이 같은 발칙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명의 뮤지션 잭이 비틀스 없는 세상에서 스타가 될 기회를 맞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무명생활을 이어오던 잭이 작은 공연을 끝으로 꿈을 포기하려는 순간, 전 세계에 정전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잭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퇴원한 뒤 친구들 앞에서 퇴원 기념 ‘예스터데이’를 부른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어리둥절한 표정.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잭이 비틀스를 언급하자 친구는 말한다. “무슨 비틀즈를 말하는 거야. 곤충, 자동차?”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한 잭은 이날로 제2의 비틀스가 되어 성공가도를 달린다. 영화는 ‘헤이 주드’ ‘렛 잇 비’ 등 20여 곡의 비틀스의 노래를 잭의 목소리로 재구성한다. 원곡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여전히 반가운 멜로디가 두 귀를 즐겁게 한다. 그야말로 비틀스의, 비틀스를 위한, 비틀스에 의한 영화다.
3. 로켓맨 (Rocketman, 2019)
‘로켓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이름처럼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날아갈 듯한 4차원적인 의상에 알록달록한 안경을 쓰고, 피아노로 록을 하는 천재 뮤지션 엘튼 존이다. 영화 ‘로켓맨’은 그의 지나온 인생과 음악, 숨겨진 고뇌를 오롯이 담아낸다. 영화는 알코올 중독 상담에 참여한 존이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시작된다. 대중이 기억하는 무대 위 화려한 모습보다는 부모의 무관심과 친구의 배신, 약물 중독 등 알려지지 않은 그의 어두운 개인사를 내밀하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전기 영화의 형식을 취해 외로운 유년을 보낸 천재 소년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해나간다. 같은 감독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는 달리 음악보다 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지만, ‘유어 송’ ‘크로커다일 록’ 등 적재적소에 흐르는 명곡들이 감정을 극대화하며 제 몫을 다한다. 감각적인 연출과 엘튼 존을 완벽 재현한 태런 에저튼의 열연도 재미를 더하는 포인트. 러닝타임 120분간 엘튼 존의 인생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생경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쟁쟁한 수천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오디션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시니어 모델이 있다. 바로 시니어 모델 ‘윤영주’다. 우승한 것도 대단한데, 그녀의 나이는 올해 73세. 최연장자임에도 다른 시니어 모델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당당하게 우승을 거머쥐었다. 더욱이 놀라운 건 종갓집 며느리라는 사실. 종갓집과 모델, 한식과 양식만큼이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조합인데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직접 만나서 그간의 여정을 들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의 매력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MBN 시니어 모델 오디션 예능 ‘오래 살고 볼일’은 방영 후 화제가 됐다. 오디션에 등장한 시니어 모델들이 인터넷에서 주목을 받았다. 탄탄한 몸매, 동안을 자랑하는 외모,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패션 감각,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대단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시니어 멋쟁이들이 총집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쟁쟁한 선남선녀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 시니어 모델 윤영주는 어떤 사람일까? 일단 그녀가 이 오디션에 참가한 계기를 물어봤다.
“사실 접수를 안 하려고 했어요. 이 프로그램 전에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면서 회의감이 많이 생겼죠.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불러주는 곳도 많지 않았고, 어느 때는 불합리한 대우를 받기도 했어요. 모델 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해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마침 그때 이 오디션 공고가 올라왔는데, 접수하지 않으니까 주위에서 많이 권했어요. 다들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까짓것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접수했어요. 그때 안 했으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아요.(웃음)”
상금은 가난한 예술가를 위해
그녀는 오디션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아서 심사위원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동안 외모와 남다른 패션 감각은 확실히 돋보였다. 특히 긴장하는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표정이 한결 부드럽고 여유 있어 보였다. 실제 현장에서는 어땠을까?
“연장자라서 그런지 편했어요. 다들 열 살 이상 차이 나다 보니 동생들 같았어요. 대기 시간이 길어 얘기할 시간도 많았고요. 그래서 경쟁을 한 것이 아니라 동생들과 수다 떨면서 재밌게 노는 기분으로 임했죠. 예전에 방송국에서 리포터 활동을 해서 카메라 앞에서의 촬영이 익숙했어요. 그 경험 덕분에 확실히 조금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도 있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와이어 액션을 소화하는 화보 미션에서 탈락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기 없는 결말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 런웨이 미션을 멋지게 소화하면서 짜릿한 역전승을 이뤄냈다.
“우승자를 호명할 때 순간 머리가 하얘졌는데, 기분은 정말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박윤섭 씨한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눈을 못 마주쳤어요. 속으로 그분이 1등이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전에도 현장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모델로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분이에요. 그러고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나이가 많지만 어떻게든 쫓아가려고 했던 걸 많은 분이 좋게 봐주신 것 같기도 하고요.”
어렵게 차지한 우승으로 받은 상금은 어디에 쓸 거냐고 묻자 “상금은 나를 위해서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쓰고 싶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일단 오디션 동안 제일 고생한 며느리랑 상금을 나누고, 나머지 내 몫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곡을 만들고 있는 음악 제작자 친구들을 지원하는 일에 쓰고 싶어요. 아들이 음악을 해서 그런지, 그 친구들이 자꾸 마음에 걸려요. 가난한 예술가의 아픔을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장점은 자연스러움
화려한 시니어 모델 삶의 이면에는 종갓집 며느리의 삶도 있었다. 그녀는 시니어 모델이 되기 전 종갓집 며느리로서 성실히 살았다. 일 년에 명절을 포함한 13번의 제사를 군말 없이 준비해야만 했다. 다른 요리는 못 해도 제사 음식은 눈 감고도 할 정도란다. 특히 생선 손질은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그렇다면 종갓집 며느리가 어떻게 모델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제사 규모가 줄어들면서 조금 여유가 생겼어요. 특히 50대에 접어들면서 남들이 은퇴를 준비하듯이 노후를 생각해봤어요. 그러다 문득 미학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한 15년 동안 미학 공부를 하고 박사 논문까지 썼어요. 음악이나 미술, 철학과 관련된 칼럼도 틈틈이 썼고요. 그런데 어느 날 눈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시력 보호 차원에서 책을 보지 말라는 거예요. 청천벽력이었죠. 좋아하던 책을 못 보니 참 무료했어요. 무엇보다 할머니가 아니라 여자 ‘윤영주’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시니어 모델을 알게 됐어요. 마침 며느리가 모델 출신이었고요.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며느리에게 모델 하고 싶다고 넌지시 말했어요. 그때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웃음)”
하지만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었다면 지금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를 이 자리까지 이끌게 한 모델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미학이나 철학이 깊은 희열을 맛보게 한다면 모델은 짜릿한 희열이에요. 쇼를 한 번 하는 데 정말 많은 과정을 거쳐요. 메이크업하고 머리 만지는 데 최소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씩 걸리고, 리허설도 몇 번씩 하고, 전날 와서 옷도 미리 입어보죠. 근데 쇼는 15~30초면 딱 끝나요. 그 순간만큼은 무대가 다 내 것이에요. 그 찰나의 희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좋아요.”
무대에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모델로서 각자 내세울 수 있는 매력이나 장점도 필요하다. 그녀는 어떠한 장점이 있고,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주위에서 말하기를 자연스러움이 제 장점이라고 해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남들이 보기에 인위적이지 않은 나만의 멋이 있다고 해요. 예전에 방송국 리포터 할 때도 PD들이 연신 애 엄마 맞냐고 물어봤어요. 쇼나 무대 같은 생방송에 최적화된 체질인 것 같아요. 덧붙여서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해 어디서나 영감을 받으려고 노력해요. 미술, 영화, 음악, 전시 등 가리지 않고 좋은 걸 자주 보고 듣는 것이 모델로서 표현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가족은 바탕
티 없이 밝아 보이는 그녀에게도 아픈 사연이 있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남편은 선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친오빠랑 친한 친구였어요. 워낙 가족 같은 사이라서 남편이 좋다고 했을 때 친오빠가 사귀자고 하는 것처럼 너무 어색하고 이상해서 피해 다녔어요. 근데 못된 우리 오빠와는 다르게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결혼해서도 날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던 참 좋은 사람이에요. 돌이켜보면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만약 지금 같이 있었다면 제일 좋아했을 거예요.”
그녀의 남편은 꽉 막힌 구석도 있는 남자였지만, 아내를 위해서 때로는 화려하고 예쁜 옷을 사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늘 예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로 주위 사람들에게 정평이 나 있었다고. 요즘 말로 하면 사랑꾼이라고 할까?
그의 빈자리가 그립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소중하고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메이크업부터 의상, 촬영 스케줄 등을 관리하는 매니저이자 모델 스승인 며느리부터, 화양연화 미션 때 감정을 잡을 수 있도록 슬픈 노래를 정리해서 보내준 아들까지. 화려한 그녀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안 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지원해주는 가족이 있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은 바탕이죠. 누구나 그렇지만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바탕과 같아요. 바탕이 없으면 나도 없어요. 특히 며느리와는 절친이에요. 저런 며느리가 없어요. 좋은 며느리를 얻은 건 내게 큰 행운이에요. 며느리와는 별의별 얘기를 다 해요. 가끔 아들 흉도 같이 봐요.(웃음)”
책임감 있는 모델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날개 중 하나가 가족이라면, 다른 날개는 바로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그녀는 늘 어제의 나와 다르게 살기를 원했다.
“돌이켜보면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나로 살지 않기를 원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항상 새로운 나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책을 읽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보고, 좋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자 했던 마음은 지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하루하루가 다른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모델도 마찬가지고요. 매번 무대에 설 때마다 감회가 달라요.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해요.”
인상적이었던 댓글을 들려주며 앞으로 시니어 모델로서의 포부나 계획을 밝혔다.
“내가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댓글이 하나 있어요. ‘나이 든다는 게 두렵지 않다는 걸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댓글을 읽으면서 책임감을 많이 느꼈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70대도 이렇게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고 싶어요.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서 많은 분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싶어요.”
방송국 리포터부터 시작해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고, 정말 남들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 외려 과감하게 모델에 도전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첫사랑과의 추억을 꼽을 때는 영락없는 소녀였고, 할머니가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인정받는 모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말할 때는 당당한 여인이었다.
첫사랑의 어머니가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며느리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남편이 그녀를 아껴주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인터뷰를 하면서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화려함에 숨겨진 내면의 미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남에게 양보할 줄 알고, 욕심 부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묵묵히 정진했다.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의 자세를 몸소 실천하고, 모델로서 가진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간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이 일에 임하고 있었다.
흔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 일컫는다. 그녀는 첫사랑과의 추억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꼽았지만, 사실 그녀의 진정한 화양연화는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아닌 여자 윤영주로서 앞으로도 아름답고 당당하게 꽃길을 걷기를 바라며 마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 음악 속 숨겨진 사연이나 명사의 말을 통해서 클래식에 쉽게 접근해보자. 아래의 인터뷰는 가상으로 진행했다.
“죽음은 쓰라린 고통이지만,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한 죽음만큼 힘든 건 없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이 요절의 비애를 표현한 말이다. 역사적으로 박수칠 때 떠나는 사람처럼 화려한 족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는 천재들이 있었다. 이렇게 요절한 천재를 비운의 천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그도 마찬가지다. 31세에 요절한 젊은 천재는 생전에 1000곡 이상을 작곡했고, 음악적 수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를 만나 삶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를 들어봤다.
안녕하세요, 슈베르트 씨.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반가워요. 먹을 것이 좀 있나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힘이 없네요. 좀 먹고 나서 인터뷰를 합시다.
오는 길에 간식거리로 챙겼던 비스킷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소량의 간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왜소했다. 왜소한 체구와 더불어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는 간식을 먹은 후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생전의 삶과 지금은 얼마나 비슷한가요?
달마다 용돈을 받습니다. 취약계층을 위한 지원금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개인적인 모임에 참석하는 친구 중에 법에 밝은 친구가 있는데, 그가 나를 대신해서 신청했어요. 정말 고마운 친구예요. 물론 받은 금액을 늘 까먹어요. 매달 얼마씩 오는지 잘 몰라요. 그냥 내키는 대로 쓰다 보면 돈이 없더군요. 며칠 전부터 돈이 바닥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가끔 나를 위해서 집 앞에 빵을 놓고 가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도 요 며칠은 바쁜지 안 보여요. 말하고 나니 나의 삶은 생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군요.
이곳에서도 모임을 하고 있나요?
물론이죠. 생전에는 시대적 상황 탓에 밖에서 뭘 하기가 꺼려졌어요. 대신 그냥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수다나 떨려고 만든 모임이에요. 그런 소모임이 당시 유행이기도 했고요. 친구들이 내 음악을 좋아한 덕분에 그곳에서 연주도 하고, 춤도 추면서 흥겨운 파티를 열었죠. 저는 기분이 좋아서 그 파티에 가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시곤 했지요. 그래서 얼마 없던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어요. 친구들은 그때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서 여기서는 계모임을 하자고 하더군요. 예전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회비를 내고 만나고 있어요.
폰 슈파운과 쇼버, 둘은 당신에게 어떤 친구인가요?
폰 슈파운은 동지고, 쇼버는 친구예요. 오선지를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을 때, 슈파운이 내게 오선지를 사줬어요. 그는 똑똑하고 유능한 고위 관료였고, 법에 밝았어요. 앞서 내게 용돈을 받을 수 있게 해준 친구가 그예요. 생전에 소모임도 그의 집에서 자주 열었어요. 이 소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어요. 덕분에 당대의 예술가들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어요. 그가 없었다면 작곡을 이렇게 많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쇼버는 나의 마음을 잘 아는 친구였어요. 마음이 잘 통해서 많이 어울려서 놀았어요. 내가 가곡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건 쇼버 덕분이에요. 그 친구는 독일 문학에 참 능통했어요. 내게 좋은 시도 많이 알려줬고요. 그의 문란한 사생활과 사상을 좋아하지 않던 친구들도 많았지만, 나는 그를 많이 아꼈어요. 내 안에 감춰진 천재성을 일깨우는 데 그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도 나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어요.
곡에서 괴테의 시를 많이 인용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괴테는 독일이 낳은 천재 시인이죠. 괴테는 시를 쓸 때 콧노래를 부르면서 쓴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 버릇이 반영되는 것인지 몰라도, 노래로 쓰기에는 아주 적합한 시가 많아요.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그의 시를 노래로 썼죠. 저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괴테에게 곡을 보냈지만, 그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죠. 후일에 듣기로 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극찬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는 내 시에 곡을 붙인 게 아니라 시 자체를 노래했고, 그는 내 시를 훔친 거야”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습니다. 생전에 그와 마주 보며 그런 말을 들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베토벤은 만나고 오셨죠?
조금만 늦었으면 거기서 못 뵙고, 여기서 인사를 드릴 뻔했어요. 이곳으로 오시기 일주일 전쯤 인사를 드리고, 제 곡의 악보를 보여드렸죠. 다른 이들은 제 곡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은 보시고 칭찬하셨어요.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거라고 할까요? (웃음) 물로 저도 그 당시 죽음에 가까운 시기였던 탓에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선생님과 제가 좀 더 건강한 상태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이곳에 와서는 늘 그런 상상을 해본답니다.
그때 쓰신 곡이 ‘겨울 나그네’인가요?
그렇죠. 그 시기 즈음 쓴 곡이에요. 세상에 남긴 나의 유언 같은 곡이에요.
이 곡을 쓴 이유가 있나요?
‘겨울 나그네’는 뮐러의 시를 바탕으로 쓴 곡이에요. 그 시를 볼 때마다 나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못생기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한 여자들에게 버림받았고, 나의 모든 것을 쏟았던 곡들은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지요. 존경하는 괴테 선생님도 사후에 나를 인정하셨어요. 모임에서 나와 어울렸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난 외톨이였어요.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 교사가 되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그걸 뿌리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가난한 음악가로서 곡을 쓰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나그네였어요. 말년에는 이런 삶을 청산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썼어요. 궁정의 부악장 자리였는데, 큰 기대를 했지만 결국 탈락했어요. 정처 없이 방황했지만 정착하지 못한 삶, 그게 내 모습이에요.
뮐러의 시와 다른 점이 있나요?
뮐러의 시와 개수는 동일하지만 순서가 조금 달라요. 처음 발표한 곡은 뮐러의 12개 시로 마무리를 했는데, 이후 그가 추가로 시를 발표하면서 곡의 구성을 조금 다르게 했어요. 뮐러의 경우 고난 끝에 결국 희망찬 내일을 위해서 나그네가 여행을 떠나지만, 나의 곡은 더 큰 절망과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 삶에는 절망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까스로 찾아온 희망이 있었다면, 내가 죽은 해에 참가했던 연주회가 다예요. 그것마저 이어갈 수 없었죠. 처음으로 내 소유인 피아노가 생겼지만, 제대로 쳐볼 시간도 없이 이곳으로 오게 됐어요.
이 곡은 4원소설을 기반으로 한 곡인가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요. 하나의 감정이라고 해도 비추는 거울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가령 사람마다 ‘슬픔’을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애인의 배신일 수도 있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시험, 반려견의 죽음 등 하나의 감정이 개인에게 어떤 이미지로 그려질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물론 이 곡에 제가 특정한 이미지를 담은 것은 아니에요. 다만 31년 삶을 살면서 축적된 슬픔이란 감정을 이 곡에서 표현하려고 했어요. 지독한 가난과 불행, 외로움, 사람으로부터 배신, 절망, 육체적 고통. 저를 괴롭혔던 수많은 일을 곡에 녹여내려고 했어요.
본인에게 음악이란?
삶의 이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태어나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닌 내가 유일하게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곡을 쓸 때였다. 어느 때는 곡을 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가곡의 왕이란 별명이 무색할 만큼, 생전에는 인기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소모임을 하는 친구가 그에게 전부였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버림받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은 그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의 삶은 처절하고 비참했다. 하지만 그는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자연스럽게 고통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살았다. 콤플렉스 덩어리였지만, 오히려 그 콤플렉스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 안에 있던 감정을 음악에 녹여낼 수 있었다. 나그네처럼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했지만, 그 자유로움이 곡을 쓰는 데 하나의 좋은 밑거름이 됐다. 그가 좋아했던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그의 방황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숱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최선은 여전히 곡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찻집을 찾을 때 보통 분위기가 좋은 곳을 우선시한다. 그런데 차 맛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분 좋은 맛과 향기 가득한 곳으로 찾아가 봤다. 정성스레 준비한 차는 기본. 고즈넉함에 취하고, 이야기에 물들고, 사람 냄새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는 곳. 각양각색의 찻집 다섯 곳을 소개한다. 차에 대한 깊은 철학이 있었고, 그 아름다운 향취에 반하고 말았다.
우리 차의 내음을 맡다 ‘차 마시는 뜰’
차 한 잔 시켜놓고 닿을 듯이 가까이 보이는 인왕산을 바라보고 앉았다. 웅성이던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고 온전히 차와 나, 산이 가을 숨과 연결되어 자연스레 하나 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뜰에 핀 꽃과 장독대의 유유자적한 모습은 오래전에 멈춘 듯한 모습이다.
‘차 마시는 뜰’에서 제공하는 차는 전통차의 비중이 높다. 집에서 직접 담근 대추탕과 쌍화탕, 오미자차 등이 인기가 좋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우전차도 많이 찾는다. 특히 녹차류나 꽃차 등 우려내서 마시는 따뜻한 차의 경우 다기 세트와 함께 손님상에 오른다. 중국 차와 커피도 찾는 이들이 있어 판매한다. 단, 커피는 찻집 고유의 향을 위해 더치커피로 내린다. 커피 머신을 사용하면 커피 향이 곳곳에 배일 수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 다도를 배우던 조영희 대표는 집 근처 고택을 장만해 찻집을 열었다. 그저 차가 좋아서 벌인 일이었다. 차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이들의 공간이나 하나 마련하자는 의미가 컸다. 요즘 이곳은 세계인이 찾는 한국의 관광 명소가 되어버렸다. 손님 대부분이 외국 관광객일 정도. 일본은 물론 프랑스 등 유럽 언론에까지 소개되다 보니 외국인들로 늘 북적인다. 마치 외국에 있는 한옥 카페 같은 분위기다. 특히 공휴일과 주말에는 줄이 길게 늘어설 만큼 손님이 붐빈다. 평소에는 일본 관광객 비중이 높으나 기자가 찾았던 날은 중국의 국경일과 겹쳐서인지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차 마시는 뜰’은 단아하고 깊은 차 맛과 함께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해질 무렵의 노을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그 자체. 찻집 입구로 들어가는 유리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하여간 당신에게 고맙기만 합니다.” 높은 곳까지 걸어 올라오는 것이 쉽지 않기에 이곳까지 와 앉아 차 마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안다는 말이다. 차와 함께 한국적인 문화를 흠뻑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가보시길. 단, 편안한 신발을 신고 가기를 권한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11나길 26)
대만 차와 만나다 ‘포담 티하우스’
대만에서 건너온 양질의 차를 마시고 또 이야기를 통해 알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포담 티하우스’(이하 포담)다. 젊은이들이 오가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을 지나 한적한 골목에 있다. ‘포담’은 ‘아름답다’는 뜻의 포르투갈어 ‘포모사(formosa)’와 ‘이야기하다’라는 뜻의 ‘담(談)’을 붙이고 줄여 만든 합성어다. 16세기 중국을 향해가던 포르투갈인들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만 섬을 보고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말했다고. 이 ‘아름답다’라는 뜻의 ‘포모사’는 20세기에 들어와 ‘대만’의 별칭이 됐다.
차를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여러 차례 방문하는 대만 차의 성지 같은 곳. “포담” 하면 “아~”라고 답할 정도. 2017년 10월에 문을 열었고, 대만 차 전문가로 통하는 권남석 씨가 공동대표로 있다. 매주 수요일(오후 7시 30분)과 토요일(오후 4시 30분)에는 권남석 씨 진행으로 다양한 대만 차를 맛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차 모임이 진행된다. 세대의 경계 없이 차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시간으로 회비는 1만 원이다. 대만 차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유료 강의도 있다.
EBS 프로듀서였던 권남석 씨는 IMF 때 회사를 그만둔 뒤 2000년부터 안동에 있는 한 전문대 교수로 재직했다. 차에 깊이 빠지기 시작한 건 그 무렵. 특히 보이차의 잎을 따고 제다까지 해서 전부 완성하는 시기인 4월이 되면 중국 운남성 차밭을 12년 동안 들락거렸다. 그 사이 대만인들과도 교류하면서 대만 차의 매력을 알게 됐다. 현재는 그 지역 다원과 직접 거래를 하면서 차를 수입해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적어도 우롱차 다법은 대만이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는 차뿐만 아니라 문화를 교류하는 공간으로 ‘포담’을 이용할 계획이다. 대만 차 탐방 프로그램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포담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대만 차를 구입할 수 있다. 비싼 차의 경우 한 번에 우려먹을 수 있는 양으로 적당히 덜어놓은 미니어처 형식으로도 판매한다.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1길 26-13)
샤로수 옆길에서 우아하게 차 한 잔 ‘반조’
‘반조’라면 어떤 차든 믿고 마실 수 있다. 차를 알고 마시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사랑받는 공간이다. ‘홍차의 거의 모든 것’과 ‘커피의 거의 모든 것’(열린 세상)의 공동저자인 하보숙 대표가 2015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한국 차와 중국 차, 꽃차, 커피 등이 손님 찻상에 올라간다. 차로 시작해 차로 끝나는 곳. 모든 디저트도 차를 위해 준비된다. 이곳에서는 특히 가향하지 않은 다양한 차를 간편하게 마실 수 있게 제공한다. 테이블로 나가는 모든 차는 손님들이 직접 우려 마시는 것이 기본. 차는 누군가 시중을 들어줘야만 마실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차를 마시기 전 30초에서 1분 속성으로 차 우리는 방법을 배우면 누구든 차를 즐길 수 있다. ‘차는 어렵지 않다’가 ‘반조’의 콘셉트.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젊은 학생들과 물어물어 찾아오는 이들, 차를 마실 줄 알거나 혹은 모르는 이들까지 다양한 손님들이 이곳을 찾는다. 개업 초창기에는 다양한 차 수업과 문화 강좌, 인문학 강좌, 음악회 등 차가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현재는 카페를 찾는 손님이 많아 맞춤형 수업 정도만 진행한단다. 하보숙 대표는 “반조를 통해 사람들이 차를 가까이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하 대표는 차 중심의 카페를 열기 전까지는 어떤 고정관념이나 틀에 갖혀 있었는데, 서서히 그 틀을 깨나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도 차를 온전히 즐길 줄 알자는 쪽으로 말이다. 좋은 차가 있기에 지역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찾아와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요즘은 반조가 대세다.(서울 관악구 관악로12길 11, 2층)
홍차 키즈가 일군 홍차 나라 ‘티에리스’
‘티에리스’는 홍차를 좀 마실 줄 안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최종적으로 찾아가는 곳이다. 홍차를 좀 안다며 좀 읊어대던 사람들도 티에리스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고. 메뉴판도 책 한 권을 읽는 마음으로 봐야 할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홍차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꽤 높은 편이나 편하게 접근하면 좋겠다는 게 정다형 대표의 바람이다. 이곳에는 가향되기 전 단계의 홍차를 주로 판매한다. 산지 농장 단위를 다니면서 수입하는데 지난봄에도 인도 다르질링 지역에서 생산한 홍차 7종류를 들여왔다. 현재 이곳에서는 10종류 이상의 다르질링 홍차를 선뵈고 있다.
티에리스는 마포구 합정동에 사무실 겸 티 룸이 있고 방배동에도 두 개의 티 룸이 있다. 조만간 하나는 정리할 계획이다. 그것도 한창 잘되는 카페의 문을 닫을 예정. 정다형 대표는 “왜 잘되는 카페를 닫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사업 확장보다는 작고 좁아도 깊이 있게 이 길을 걷겠다는 의미”라고 답한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는다. 지난 3월에 오픈한 매장은 좀 더 작고 빈티지한 느낌. 이곳에서는 홍차와 디저트인 스콘에 집중할 생각이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홍차에 마음을 빼앗긴 정다형 대표는 차와 함께 성장한 홍차 키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앞 홍차 전문점에서 파트 타이머로 시작해 일본의 홍차 브랜드 루피시아를 거쳐 미국의 유기농 홍차 리시티코리아에서 4년가량 브랜드 매니저로 일했다. 인도에서는 티 테이스터 과정을 밟았고, 영국에서는 티 소믈리에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만든 다원이 인도에 있기 때문에 차에 대한 기본을 배우려면 영국보다는 인도로 가야 한다고. 홍차는 보이차를 비롯한 기존 차와는 달리 새로 수확한 차를 마시는 것이 훨씬 신선하고 맛이 좋다. 정 대표는 단 한 번만 우려먹는 것을 추천한다. ‘티에리스’의 홍차 수업은 합정동 티 룸에서 진행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천로4안길 84,1층/ 서울 마포구 성지1길 39, 2층)
예약제로 여는 꽃차 티 룸 ‘화려한수다’
‘화려한수다’의 티 룸은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예약을 해야만 열리는 곳. 올해 1월에 강남의 스터디카페 작은 공간에서 예약제로 운영하던 티 룸을 능동의 주택가로 8월에 옮겼다. 한국꽃차아카데미의 송주연 원장이 운영하는 이곳은 꽃차를 순수하게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은 물론 카페 업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동백꽃 차이, 꽃차를 이용한 아포카토 등 다양한 레시피를 접할 수 있다. 꽃차를 적당하게 잘 우리는 방법도 배우고 코스별로 4가지의 꽃차와 디저트를 함께 맛볼 수 있다.
제일 먼저 마시는 차는 꽃차만을 우려 손님에게 대접한다. 장미차, 목련꽃차, 노란 코스모스차 등을 주로 낸다. 그다음으로 동백꽃차를 걸쭉하게 우린 뒤에 크림을 얹어 동백꽃 차이티를 낸다. 동백꽃은 꽃차 중에서도 가장 진하게 우릴 수 있는데 얹은 크림 위에 장미나 목련 꽃잎을 잘게 부숴 올리기도 한다.
좀 더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하루 코스 꽃차 수업을 받으면 된다. 꽃차를 이용한 아이스티를 만들거나, 다양한 차 칵테일을 배울 수 있다. 정기적으로 수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꽃차를 이용한 알코올 칵테일 코스도 운영하고 있다. 벚꽃 혹은 매화꽃을 보드카에 넣어 칵테일을 해먹는다. 차 코스에 나오는 디저트 대신 술과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디저트도 준비된다.(서울 광진구 능동로 24길 100, 1층)
대부분의 여행지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혹은 맛있는 음식으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해 매혹적인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문화와 각종 체험으로 여행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그렇게 대부분의 여행지는 오감의 쾌락으로 여행자를 기쁘게 해준다.
가을이 한창일 즈음 찾아간 곳은 특별한 곳이었다. 일반적인 여행지처럼 감각의 만족만을 주는 여행지가 아니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고,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는 도시’였다. 마치 이탈리아의 친퀘테레와 프랑스의 투르빌을 합쳐놓은 것 같았다. 그곳은 한반도에서 해돋이로 유명한 해오름의 도시 ‘동해시’다.
동해시 묵호진동의 ‘묵호등대 담화마을’은 동해가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묵호 등대를 중심으로 묵호항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등대오름길을 따라 올라가 바람의 언덕에 서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탈리아 북서부 라스페리아 지방에 있는 다섯 개의 해안마을 ‘친퀘테레(Cinque Terre)가 떠올랐다. 해안 절벽의 가파른 지형에 테라스를 갖춘 화려하고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집들의 마을 풍경과 지중해를 따라 마을이 이어진 산책로로 유명한 곳이다.
묵호 등대 담화마을은 오랜 세월의 담에 지나온 시간의 소박한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그려 여행자들에게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일으켰다. 겹겹이 쌓인 골목의 담벼락들은 저마다의 굵직한 사연을 여행자들과 함께 한다. 한적한 골목에도 자기만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의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렸던 시간을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느끼면서,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고 곱씹을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노스탤지어가 아픔이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를 끌어내는 원천이 된다. 화려한 구경거리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이 빚어낸 삶과 추억의 기억들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941년 개항된 묵호항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마을에는 4개의 길이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묵호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골목이 주제인 ’논골 1길‘, 떠난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 찾아올 사람들 모두가 기억하고 희망하는 묵호와 논골담길에 대한 사랑이 주제인 ’논골 2길‘, 묵호의 옛 이야기와 추억이 담겨있는 ’논골 3길‘, 새로운 희망과 바람에 관한 이야기로 지역사람들이 참여한 ’등대오름길‘.
시간의 흔적들이 있는 골목길을 걷다 보니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가 생각났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정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발아래로 보이는 동해를 바라보니 마치 어두운 배경 속에 밝게 처리된 여인의 나신을 그린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처럼 바다의 한정된 일정 부분만이 가을 햇살에 눈부시게 찰랑거렸다. 슬쩍 내 옆에 누군가 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를 덮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과거에 대한 후회가, 또 한 모금을 마시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졌다. 결국,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동안 현재를 위협하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마을 앞 해안을 따라 2km의 거리에는 도시풍 카페와 횟집들이 즐비한 풍경이다. 모네가 끝없이 변하는 바다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배운 프랑스의 투르빌 해변이 떠올랐다. 그곳의 싱싱한 해산물처럼 이곳 역시 동해 어업기지로 갓 잡은 싱싱한 활어를 즉석에서 맛볼 수 있다.
언젠가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한편 동해시에는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존과 일상 공간이면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의미 있는 곳으로 “북평 민속시장”도 있다.
전국에 있는 다른 장터와 달리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영동지방 최대의 전통 오일장이다.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에 열리는 장으로 200년 전통의 장터다. 1796년부터 시작된 이 장터에 가면 짙은 향토색과 서민들의 삶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동해시는 이렇게 오래된 흔적들을 고택의 기왓장처럼 가지런히 쌓아놓은 느낌을 주는 도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사람들과 담과 골목의 이야기들이 넓디넓은 동해 옆에 살포시 앉아있다. 그래서 동해시는 여행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설렘이 지속하는 특별한 곳이다.
김 서린 다관 속에서 따뜻한 잠영을 하는 총천연색 꽃들을 나른하게 바라본다. 꽃다발을 받는 느낌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향긋한 기운과 느긋함이 찻잔 속에 한아름 안겨 담긴다. 추운 겨울 얼었던 손에 꽃차가 담긴 잔을 감싸쥐고 한 모금, 또 한 모금. 몸도 마음도 봄날 꽃처럼 활짝 핀다. 아름다운 모습만큼이나 순하고 착한 꽃차의 매력에 빠진 이들을 만나봤다.
고혹한 색감에 빠져들다
서울시 광진구의 잘 익은 주홍색 감이 탐스럽게 열린 단독주택.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라는 문패가 달린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니 형형색색 잘 덖어 말린 꽃차들이 집 안 가득하다. 아카데미 진열대에 모아놓은 꽃차만 해도 100여 개 정도. 잎차나 뿌리차까지 더하면 훨씬 많다. 꽃차는 말 그대로 꽃잎을 따서 다양한 제다법(차를 만드는 방법)을 통해 음용할 수 있는 차로 만든 것이다. 물감을 썼나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맑은 색깔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못해 신기하다.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는 송주연 원장의 이름을 따 ‘송주연꽃차문화아카데미’로 시작했다. 2016년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로 개칭하면서 영역을 더 확장했다고 송주연 원장은 말했다.
“15년 전쯤 꽃차를 처음 알게 됐어요. 몇 년 후부터 문하생을 한두 명씩 만나 가르치고 공부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지금은 꽃차는 물론이고 잼이나 수제청, 디저트, 티플래닝 등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꽃차 잎 면면을 들여다보니 마치 생화가 그대로 담겨 있는 듯 고운 색과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 벽에 거꾸로 매달아 말린 장미꽃과 판이하다. 꽃 원형을 간직한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팬 위에 한지를 깔아 간접 열로 꽃을 덖는데 열을 오래 가할 수도 없다.
“잎차는 몇 번만 덖고 난 뒤 건조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데 꽃은 그럴 수 없어요. 네 번을 덕어도 수분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덖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야 마음에 드는 꽃차가 나옵니다.”
계절마다 지역마다 피고 지는 꽃이 각양각색인 데다가 꽃마다 특징이 다르니 몇 번을 덖는지 평균치를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그저 꽃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섬세함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만 머리에 새기면 될 듯싶다. 꽃잎의 결은 물론이고 노란 수술도 살아 있는 꽃차도 있다. 정성으로 만든 꽃차는 눈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안정감을 주는 향과 맛, 효능까지 듬뿍 머금고 있다. 이리도 예쁘고 몸에도 좋은 차를 만들어내는 게 쉽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밟아 자격증을 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 이름을 걸고 제주를 비롯해 전국에 35개 지회가 생겨날 정도이니 말이다. 취미는 물론이거니와 창업과 함께 인생 2막을 열고자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셈. 최근에는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 내에서 전 교육 과정을 이수한 차 전문가인 티큐레이터들이 모여 꽃차 브랜드 ‘화려한 수다’를 출시, 11월 열린 ‘2018카페쇼’에서 첫선을 보였다. 꽃차를 만나면서 인생의 색깔도 알록달록해진 이들이 모여 있으니 향긋한 이야기가 쌓여갔다.
누워만 있던 엄마가 꽃차를 덖다
6년 전 우연히 TV에 나온 송주연 원장을 보고 꽃차와 인연을 맺었다는 윤정희 씨. 윤기 나는 피부에 꼿꼿한 모습이 인상적이지만 꽃차를 처음 알았을 때는 지금처럼 몸이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수술을 많이 했어요. 병원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또 들어가고 할 정도로요. 병원에 있을 때 송 원장님 얼굴을 TV로 한 번 봐서 기억이 나는데, TV에 또 나오시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주소만 확인하고 무조건 찾아갔어요. 인연인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아카데미가 있었거든요. 다리를 다쳐서 수술을 했는데 또 잘못돼 맨날 울던 시절이었어요.”
첫 수업 날,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었지만 7시간 내내 수업을 받았다.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그만해야지 다짐했다가도 일주일 후면 몸이 회복돼 수업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꽃차를 예쁘게 만드는 것에만 신경 썼어요. 잡념도 없어지고 아픈 것도 서서히 잊히더라고요. 병원비도 많이 썼고 가족들한테 미안해서 꽃차 배우는 것을 그만두고도 싶었어요. 그런데 병원에 있는 것보다 좋은 것 같다며 남편이랑 딸들이 도와줘서 자격증 코스도 다 밟았어요. 지금은 서울 1호 지회장을 맡고 있고요.”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꽃길
경기도 하남에서 커피숍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은수 씨도 꽃차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커피숍만 10년 정도 한 것 같아요. 너무 치열하게 살다 보니 어딘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조금 우울했어요. 그러다 엄마가 신문에서 약용작물협회에서 강의가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2년 전이었는데 거길 다녀오고 나서 곧바로 꽃차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제가 카페를 하니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꽃을 몰랐고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게다가 비염으로 꽃을 만지면 콧물이 나와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이때 김은수 씨의 어머니 김영숙 씨가 딸을 대신해 차 만드는 일을 돕게 됐다.
“꽃을 덖는 것은 기본이고 멀리 경북 영주에 있는 땅에 예쁘다는 꽃은 무조건 심어봤어요. 메리골드, 달리아, 한련화를 심었고 내년부터는 더 많은 꽃을 심으려고요.”
힘들게 꽃차를 만들면서 김은수 씨는 큰 꿈이 생겼다고 했다.
“지금은 커피만 다루지만 언젠가 영주에 내려가서 직접 재배도 하고 덖어 만든 차를 제 이름 걸고 납품하고 싶어요. 그래서 ‘화려한 수다’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제2인생 꽃차로 열다
경기 7호 지회장인 김명례 씨는 전업주부로만 살아오다 꽃차를 알게 됐다.
“노년을 어떻게 살아갈까 구상을 하고 있을 무렵 친구인 송주연 원장이 권했습니다. 커피를 배워볼까 하고 있었어요. 제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꽃을 보면서 그냥 기분 좋은 상상도 할 수 있고, 예쁜 꽃을 만지면 너무 행복해요. 노년이 좀 재밌을 것 같아요.”
간호사였던 박상숙 씨는 아프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잘 먹고 잘 지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시는 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인체의 70%가 수분으로 이뤄져 있고 물을 어떻게 먹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차를 마시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꽃차의 매력은 색깔이 아닐까요? 다관에서 우러나는 색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꽃 자체가 매력입니다.”
동생과 함께 노인재가사업을 하는 양미순 씨도 꽃차가 사업에도 새로운 힘을 줬다고 했다. 그냥 커피를 타서 내는 것보다 꽃차가 사무실에 진열돼 있고 또 그 차를 꺼내 마시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이도 많다고 했다.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는 본원과 함께 전국의 지회가 꽃차 레시피 등을 공유하고 교육 프로그램 연계를 하고 있다. 창업의 신호탄인 브랜드 사업은 물론 꽃차를 대중적으로 보급하고 알리는 차원에서 예약제로 운영하는 꽃차 쇼룸을 1월 중 강남에 오픈할 계획이다.
mini interview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 송주연 원장
멈출 수 없는 ‘꽃차’를 탔습니다
‘2018 서울카페쇼’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11월 11일, 송주연 원장을 만났다. 한국꽃차문화아카데미 구성원들과 힘을 모아 만든 꽃차 브랜드 ‘화려한 수다’를 세상에 내보이는 중요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교육에만 집중하다 제품은 처음 내놓았어요. 꽁꽁 숨겨놓고 있다가 이번에 드디어 공개했습니다.(웃음) 10년 넘게 만들어왔던 꽃차를 제품으로 승화시켰어요. 교육 프로그램에서 나아가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 박람회장에 커피 향기와 더불어 향긋한 꽃차 내음이 은은하게 퍼졌다.
“꽃차는 가벼워요. 순수한 차입니다. 갱년기에 좋은 차 등 사람들 각자에게 맞는 것이 있어요. 두통이나 스트레스가 많은 분은 남색 계열, 위장이 좋지 않은 분들은 노란색 계열의 꽃차가 잘 맞아요. 체질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거죠.”
송주연 원장이 꽃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 년 전. 그때는 꽃차가 아닌 꽃집 주인으로 꽃을 대했다.
“지금 아파트가 쭉 늘어선 왕십리 쪽에서 플라워숍을 2~3년 정도 했어요. 꽃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꽃차에도 눈을 뜬 것 같아요. 계기는 남편의 당뇨와 혈압이었어요. 약차에 관심을 갖다가 꽃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배울 생각으로 찾다 보니 서울에는 배울 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여행 간다 생각하고 지방으로 다녔습니다. 꽃차를 배우는 데만 처음에는 1~2년 걸렸습니다.”
꽃으로 시작해 또 다른 꽃길로 갈아탄 송주연 원장이다. 꽃차가 주는 남다른 재미도 있다고 했다.
“꽃집을 하던 시절에는 꽃 이름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꽃차는 하나하나씩 만들다 보니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만들면서 이건 무슨 맛이 날까? 무슨 향이 날까? 설레고 두근거려요. 연인이 바뀌는 거처럼요. 지루함 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꽃차 관련 강의가 최초로 개설된 곳은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 이곳에서 강의할 당시 송주연 원장이 매스컴을 타면서 꽃차를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송주연 원장에게 꽃차를 배우려는 이들도 점차 늘었다.
“이곳을 거쳐 간 분들이 자부심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더 많이 꽃차를 알리고 이 분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도 제가 할 일이죠.”
58년 개띠, 올해로 환갑이 된 송주연 원장은 기념 삼아 우롱차로 유명한 대만에 차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차에 대한 전문가로서 한 발짝 더 앞서가기 위해 원광 디지털 대학교에서 차문화학과 학위를 따고 현재는 대학원 휴학 중인데 내년 복학할 계획이다. 시간이 좀 나면 언젠가 꼭 하고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꽃을 따라서 가는 꽃차기행을 하고 싶어요. 강원도 삼척에 해풍 맞은 구절초, 영주 소백산 자락의 국화꽃, 봄이 되면 해남의 목련꽃도 보고 제주는 동백꽃 필 때 가고요. 지회장들도 만나 한마디 인터뷰를 해서 책을 만들고 싶어요. 아직 젊으니 할 일이 많고 지회가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저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인물도, ‘힙’이 터지는 젊은 패셔니스타도 브로치에 자신을 투영한다.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하고, 어떤 액세서리보다 의미 있는 브로치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주얼리의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남편이 처음으로 사줬던 목걸이, 아들이 선물한 귀고리, 시어머님이 물려주신 브로치 등등 이야기가 담긴 주얼리는 패션의 영역을 넘어 주술과 같은 의미로 우리와 함께하게 된다. 그중 목걸이와 반지처럼 옷 속에 감춰지는 은밀한 주얼리와 달리 대놓고 자신의 존재감을 풍기는 브로치가 다시 트렌드의 쳇바퀴를 돌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어느 때보다 젊어진 모습으로 말이다.
브로치가 말하는 것들
패션 디자이너 서정기는 한 인터뷰에서 브로치에 대해 정의하길, “브로치는 옷 위에서 ‘나를 봐주세요!’,‘나는 이런 취향을 가졌어요!’라고 외치죠. 고상하게도, 천박하게도, 화려하게도, 얌전하게도, 크게도, 작게도, 엄청 비싸게도, 싸게도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브로치 입니다. 브로치는 개성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죠”라고 했다. 브로치는 자신이 어떤 취향의 사람인지를 드러내기도 하고, 때때로 말보다 더 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까만 드레스 위로 ‘Time’s Up’이란 브로치를 단 여배우들이 등장했다.
이 브로치는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타임스 업(Time’s Up)’ 캠페인을 의미한다. 또 여성 정치인이 입은 옷은 정치적 성명 발표와 같다는 말처럼 종종 정치인들은 브로치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암시적으로 전달한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퇴임 후 ‘내 브로치를 읽어보세요’라는 이름으로 전시회까지 열 정도로 브로치 정치의 대가였다. 그녀를 비롯해 IMF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힐러리 클린턴 등 브로치를 패션 그 이상의 의미로 이용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스타일의 방점, 브로치
최근 하이 주얼리 브랜드 반클리프앤아펠은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보그의 전설적인 에디터이자,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뮤즈인 카린 로이펠드와 함께 브로치 스타일링법을 소개하는 ‘브로치 더 서브젝트(Brooch The Subject)’를 기획한 것. 몇 개의 하우투(How to) 영상과 사진으로 이뤄진 이 기획은 브로치에 대한 생각의 틀을 넓혀준다. 브로치의 자리를 으레 가슴쪽이나 스카프 위라고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카린 로이펠드는 클래식한 반클리프앤아펠의 브로치를 평범한 블라우스의 깃(칼라의 뾰족한 부분)이나 스커트 벨트 라인, 원피스의 어깨 부분에 살포시 얹었다. 아무것도 아닌 옷을 일순 특별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화장대 구석에 방치해둔 오래된 브로치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스타일링법은 무엇을 입느냐보다, 어떻게 입느냐가 더 중요한 요즘 시대에 딱 알맞다. 특히 옷장을 열면 한숨만 나오는 이들에게 옷에 대한 스타일링의 영역을 우주만큼 확장해준다.
브로치를 고리타분한 액세서리의 자리에서 ‘힙’, ‘핫’ 같은 요즘식 형용사를 붙이게 만드는 것은 비단 이 프로젝트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고전으로 불리는 버버리 프로섬 역시 이번 시즌에 얼굴만 한 사이즈의 브로치를 선보였다. 어떤 주얼리보다 화려한 버버리 프로섬의 ‘왕’ 브로치는 스트리트 감성이 풍만한 젊은 세대들을 동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액세서리 리스트에 브로치 영역을 추가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젊어진 브로치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의 패션을 신선하게 만들어준다.
다가올 설, 철 지난 한복이 촌스럽게 느껴진다면 브로치의 힘을 빌려보자. 하나도 좋지만 여러 개의 브로치를 레이어드하면 또 다른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이때 유색과 무색의 조합을 적절히 이용하면 촌스럽던 한복도 한결 세련돼 보일 것이다. 또한 브로치를 옷이 아니라 진주목걸이 위에 연결해 펜던트로도 활용해보자. 심플한 니트에 브로치를 더한 진주목걸이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다가올 봄,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는 패션을 위해 브로치 처방을 내려보면 어떨까. 그것도 당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브로치라면 금상첨화겠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북쪽 90km 지점에 있는 ‘노비사드(Novi Sad)’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다. 세르비아어로 ‘새로운 정원’을 뜻하는 도시 명을 가진 노비사드.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 시절 때 세르비아인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이뤘다. 도심 메인 광장에는 번성기의 멋진 건축물이 남아 아름답게 빛을 낸다. 거기에 도나우 강변과 페트로바라딘(Petrovaradin) 요새의 어울림은 환상적이다. 현지인들은 참으로 친절하고 순수하다. 누군들 이 도시에 머물고 싶지 않겠는가.
여행 안내소 여직원과 ‘안드리아’의 친절에 감복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역내에 있는 여행안내소의 여자 스태프의 친절은 반할 만하다. 기차역에서 노비사드로 가는 표를 사들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안내소 부스에서 밖으로까지 나와 반긴다. 이렇게 적극적인 친절은 동유럽 관광지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다. 그녀는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묻지도 않았는데 그날 저녁, 도나우 강변의 보트타기가 무료라는 정보를 알려주며 꼭 예약해야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히 세르비아의 애국자다. 노비사드행 기차는 곧 폐차해야 될 정도로 낡아 보인다. 기차 안팎으로 그려진 그래비티가 어지럽다. 빈자리를 찾아 앉아 있다가 몸을 완전히 돌려 플랫폼에서 잠시 스쳤던 귀여운 청년 ‘안드리아’에게 말을 건다. 기차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에게 이것저것 여행 정보를 묻는다. 말 튼 김에 수다도 떤다. 노비사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유명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그.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프랑스어도 가능하단다. 그날은 애인을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 내친 김에 여행 안내소 직원이 말해준 “오늘 유람선이 무료라고 하니 예약 좀 해줄래”라는 부탁까지 한다. 그가 기차 안이 시끄러워 안 된다고 해서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유람선 타기는 포기한다. 그런데 노비사드역에 내리자마자 보트 회사에 전화를 하고 있다. 결국 정보 착오로 보트타기는 실패했지만 생판 모르는 여행객에게 베푸는 친절함에 감동이 물결친다. 시내버스 타는 곳까지 그를 따라가면서 “버스비 내가 내줄게” 했다. 전화비는 줘야 한다는 한국적 사고의 행동이다. “왜? 뭐하러?”라는 그의 말에 또 감동받는다. 그날 그에게 교훈을 얻는다. 고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안드리아와 같은 친절을 베풀겠다고 다짐했으니 말이다.
19세기의 문화 부흥을 알려주는 중심 광장
노비사드 극장 거리에 내리자마자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필요할 찰나에 발견한 중국인 가게. 빨간 우산 하나 사들고 노비사드에서 교수로 있다는 젊은 중국 여성을 만나 또 한참 수다를 떨다가 길 건너 성모 승천 교회를 보고 세르비안 국립극장으로 다가선다. 1861년에 세워진 국립극장은 남부 슬라브인들의 첫 번째 극장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연극, 클래식 오페라, 현대 발레 등이 공연되고 노비사드 재즈 축제도 열린다.
몇 걸음 더 걸어 노비사드의 가장 번화한 슬로보데(Slobode, 자유) 거리에 이른다. 네오르네상스 스타일의 웅장한 시청사의 건물 중심부에 뿔 같은 탑(60m)이 불쑥 솟았다. 시청사 말고도 첨탑이 뾰족한 성 마리 성당, 보이보디나 호텔을 비롯해 화려한 건축물들이 주변에 한가득이다. 노비사드의 기원은 7세기경, 남슬라브족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지만 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때 황금기를 맞는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발칸에 진출하자 투르크족의 지배를 거부하는 인근 세르비아인들이 도나우 강을 넘어 이곳으로 이주해오면서 일궈낸 영광이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즈마이 요비아 거리
자유 광장에는 스베토자르 밀레티치(1826~1901)의 청동상이 있다. 작가, 극작가이자 이 도시의 시장(1861년, 1867년)이었던 밀레티치는 노비사드 발전에 큰 역량을 발휘한 위대한 인물. 그의 청동상은 20세기 유고슬라비아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반 메슈트로비치(1883~1962)의 작품이다. 이어 즈마이 요비아(Zmaj Jovina) 거리로 들어선다. 길 양쪽으로 쇼핑가, 식당가가 쭉 이어진다. 매일 축제가 열리는 흥겨운 거리라지만 이른 시간이라 그런 모습은 볼 수 없다.
우선 마음 내키는 식당에 들어가 풍요로운 늦은 조식을 먹고 거리 끝으로 간다. 두나브스카(Dunavska) 광장이다. 비누거품 놀이에 빠진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배시시 웃음 지으며 쳐다보다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의 동상을 발견한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이었던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 골목을 걸었던 듯하다. 1984년에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된 기념비다. 동상 앞에는 주교 궁전이 있다. 1741년에 만들어진 정교회는 1849년에 폭발해 새로 지었다. 세르비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니콜리치(1857~1922)가 1899년에 지어 1901년에 완공했다. 비잔틴 스타일에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멋진 궁전이지만 아쉽게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
메인 타운을 벗어나 도나우 강 쪽으로 향하면 거리는 다소 한적해진다. 이 거리의 외국인 아트 컬렉션 건물 앞에서 또 동상을 만난다. 기자, 정치가, 작가였던 자사 토미치(1856~1922)다. 그는 이 도시의 시장이었던 밀레티치의 사위였다. 부인 밀리카 토미치(1859~1944)를 모함한 상대 정치인(Branik 매거진 편집자)을 찔러 죽여 7년 동안 복역했지만 출옥 후 다시 정치에 출마해 현세에도 위대한 정치인으로 남았다. 동상의 손가락에 끼워진 빨간 반지는 눈이 좋아야만 보게 될 것이다.
이어 도나우 공원과 길거리 시장을 지나 근대 미술관을 보고 도나우 강 앞에 선다. 대교와 부서진 다리 등이 있고 강 너머 야트막한 언덕(40m) 위에는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있다. 그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그래서 ‘도나우 강의 지브롤터(Gibraltar, 스페인의 영국령 반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강변에는 레이드(Raid) 희생자 조각(The Family)이 서 있다. 1942년 1월, 3일(21~23일)간 헝가리의 파시스트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처형했다. 비극적인 역사의 기록을 노비사드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1920~2005)가 작품(1971년)화했다.
도나우 강변의 페트로바라딘 요새
다리를 건너 페트로바라딘으로 가면 시내 중심가와는 확연히 비교될 만큼 낡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낡은 건물들과 112헥타르(33만8800평)나 되는 요새가 촉촉이 비에 젖었다. 성채는 긴 세월 동안 파괴, 복구, 확장 등의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요새에는 시립 박물관, 시계탑, 카페, 아티스트들의 공방과 작품 숍 등 볼거리가 많다. 창조적인 디자인 숍에서는 기념품을 판매한다. 또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를 위해 시침보다 분침을 더 길게 한 시계탑도 볼 만하다. ‘한눈에도 예술가’처럼 보이는 화가 라이코 페트코비치의 아틀리에가 있다. 그 외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의 기념관도 있다. 이 성채의 지하에는 무덤이 있어서 매년
7월 ‘EXIT 페스티벌’이 열린다. 비에 젖은 성채의 커피숍에 앉아 한참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다시 도시로 되돌아와 유대인 회당도 보고 아인슈타인과 그의 부인인 밀레바 마리치(1875~1948)의 기억 접시관도 찾는다. 밀레바는 노비사드에서 멀지 않은 티텔(Titel)에서 태어나 노비사드에서 중등학교(1886년)를 다녔다. 아쉬움이 남는 노비사드 여행이었지만 두말이 필요치 않은 아름다운 도시다. 언젠가는 현지인처럼 이 도시에 머물고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