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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용도변경’ 무조건 다 쓰고 가자!-변용도 동년기자
-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8-1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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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빨로맨스' 사랑은 정말 운빨로 이뤄질까?
- 7월의 태양은 뜨겁다. 극장을 찾아 대학로에 간 날은 더구나 장마 다음날이라 습기가 만져질 듯한 후덥지근함에 불쾌지수가 끌어 올랐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은 상쾌했다. 이날 보러 간 연극 ‘운빨로맨스’는 네이버 평점 10.0에 빛나는 김달님 작가의 네이버 웹툰이 원작이다. 이후 류쥰열, 황정음 주연의 MBC 드라마를 거쳐 로맨틱연극으로 재탄생했다. 기대가 컸다. 막이 오르자 치렁치렁하고 알록달록한 무당 옷을 입은 점쟁이가 등장한다. ‘달님신녀’ ‘노월희’ 역의 배우 조휘주다. 얼떨떨해 눈만 멀뚱거리는 관중을 향해 ‘난 박수가 없으면 안 나와!’하며 다시 들어가는 포즈를 취한다. 그제야 정신 차린 관객이 박수를 보낸다. 커플 관람객을 불러내 나이와 만난 기간을 묻는 등 추억을 남겨주려 한다. 선택된 관객에 대한 이벤트로 공연관람권을 봉투에 넣어준다. 아마 두 연인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었을 것이다. 평소 자신이 운이 없다고 생각해 점집을 찾아다니며 운명을 극복해 보려는 ‘점보늬’역의 배우 김민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용하기로 소문난 무당 달님신녀를 찾아온다. ‘숫총각 호랑이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으면 올해 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무시무시한 경고에 점보늬는 사색이 된다. 이때 점보늬앞에 건물주로 나타난 호랑이띠 ‘제택후’역의 배우 손성민이 등장하고 첫 만남부터 밀린 집세 때문에 옥신각신 한다. 제택후가 호랑이띠임을 알게 된 점보늬는 다짜고짜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 달라며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정해진 운명을 믿는 여자와 개인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남자, 이들 사이에 스릴 넘치고 달콤하면서도 약간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조금도 딴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100분간 이어진다. 중매쟁이도 거의 사라진 요즘. 부부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첫 만남은 운명처럼 이루어진다. 남녀의 로맨스는 정말 운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잔잔한 여운으로 남았다. 막이 내리고 극장 밖을 나온 오후 5시, 한여름의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다.
- 2018-07-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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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전의 대표 마을, 델포이의 매력
- 나의 운명을 누군가가 알려준다면 인생이 편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에게 자신의 운명을 점지 받았다. 무녀가 아폴론 신을 대신한다고 철저하게 믿었던 것은 그 시대의 역대 왕들은 물론 소크라테스 등 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델포이 마을에 유적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파르나소스 바위산과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첩첩 산골마을 델포이. 아름다운 풍경과 정겨운 주민들은 떠나는 여행객의 옷깃을 자꾸만 부여잡는다. 2500여 년 동안 델포이를 지킨 유적지 델포이(오늘날은 델피로 불린다)는 BC 8~6세기 무렵만 해도 아테네보다 훨씬 번성한 도시였지만 현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길을 묻지 않아도 “뭘 도와줄까?” 하고 말 걸어오는 정겨운 사람들이 있다. 델포이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릿느릿 천천히 돌아다니면 된다. 델포이 마을 주변에는 2500여 년 전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유적지는 크게 두 군데로 나뉜다. 산허리를 가르는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은 신성 지역이고 아래쪽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이 자리한다. 마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신성 지역이다. 우선 입구에서 박물관도 함께 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구입한 뒤 고대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적지 안으로 들어선다. 아폴론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종교 용품과 생활 용품을 거래했던 아고라(시장), ‘블레우테리온’이라 불리던 델포이 의사당, 여러 도시 국가에서 보내온 보물을 보관해놓았던 보물창고 등 흥미로운 유적들이 부서진 채로 흩어져 있다. 옴파로스에 앉은 여 사제 아폴론 신전 앞에는 ‘대지의 배꼽(옴파로스)’이라는 돌이 있다. 이 돌 밑에 작은 구멍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가 ‘델포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독수리 두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들이 다시 만난 곳이 델포이의 파르나소스 산(Parnassos, 2457m) 정상이었다. 제우스는 아들 아폴론을 이곳에 머물게 했다. 아폴론은 파르나소스 산의 코리시안 동굴에 살던 거대한 구렁이 피톤을 죽이고 신탁소(神託所, oracle, 신이 여 사제를 통해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일)를 열었다. 아폴론 신이 사는 곳이라 알려지면서 델포이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당시 델포이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했다. 아폴론은 신이었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여 사제 피티아(Pythia)를 통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을 정갈하게 한 뒤 듣고 싶은 내용을 남자 사제에게 말하면 남자 사제가 피티아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피티아는 그 내용을 아폴론 신에게 전달해 답을 받아 다시 전달했다. 신탁비로 펠리노스라 불리는 세금을 받았고, 제단에 동물을 바치도록 했다. 델포이 신탁소에는 왕은 물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철학자들도 찾아와 무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 리디아의 크리소스 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해서 진 이야기와 소크라테스가 무녀의 말을 듣고 탐구의 길을 떠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번성하던 신탁소도 서서히 쇠퇴했다.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숭배 금지령을 내리면서 델포이는 역사의 페이지를 마감했다. 문득 생각해본다. 현실에서 신이 미래를 점지해준다면 삶의 갈등이 줄어들까? 델포이 원형극장과 스타디움 아폴론 신전을 지나 보물창고를 거쳐 더 위로 오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델포이 극장을 만난다. BC 4세기에 건설된 델포이 극장은 35단의 관람석이 있어 5000명이 동시에 음악이나 연극 등을 관람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넓은 원형 극장과 부서진 유적들 밑으로 시야가 확 트여 눈이 시원하다. 뒤로는 파르나소스 암산이 턱 버티고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밑으로는 울울창창 올리브 나무가 경사진 터를 장악한 풍경이다. 골이 깊어 마치 강이 흐르는 듯한 전경도 장관이다. 극장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이동하면 온통 침엽수로 둘러싸인 곳에 경기장이 있다. 델포이 제전이 개최되던 경기장이다. 바위를 깎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경기장은 길이가 200m, 폭은 50m에 달한다. 델포이 제전은 아폴론이 구렁이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BC 8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시와 음악에 관한 행사를 중심으로 8년마다 개최되던 제전은 AD 582년부터 육상과 말타기 기술, 마차경주 등이 더해지면서 4년마다 열렸다. 델포이 제전의 흔적은 김나지움과 마르마리아 유적지로 남아 있다. 김나지움은 그리스어로 ‘운동하는 곳’이고 마르마리아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과 성역이다. 델포이 신탁소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렀던 곳으로, 부서진 아테네 신전과 BC 4세기경에 지어진 원형 건축물인 ‘톨로스’ 등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특히 톨로스는 현재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유적으로, 그리스를 소개하는 포스터와 책자에 자주 등장한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 노천 유적지를 다 보고 나면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1902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델포이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내부 전시관은 기원전으로 시대가 돌아가 있다. 1896년에 발굴된 청동상과 작은 도상들, 아르카이크 시대에서 로마 시대까지 시대별로 그리스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눈여겨볼 것으로는 아르카이크 시대에 만들어진 은판으로 된 황금머리 황소, 낙소스 인의 작품인 스핑크스, 대지의 배꼽이라는 옴파로스,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 무희의 기둥 등이다. 또 마을 안쪽 끝으로 올라가면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1884~1951)와 에바 팔머(1874~1952)의 축제 박물관이 있다. 이들은 1927년, 델포이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을 기획했다. 세계 각국의 유명한 극단이 모여 벌인 연극 축제였다. 현재도 7~8월의 휴가철이 되면 음악과 고대 드라마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Travel Data 항공편 그리스 직항편은 없다. 프랑크푸르트, 파리, 로마, 이스탄불, 두바이 등을 경유해 아테네로 가면 된다. 현지 교통 아테네 리오시온(Liossion) 버스터미널에서 델포이로 가는 버스가 1일 2~3회 운행된다.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맛집 정보 고급 식당보다는 일반 식당인 타베르나(Taverna)가 인기다. 카페에서도 피자는 물론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숙박 정보 대부분의 숙소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다. 조식이 제공된다. 카스탈리아 부티크 호텔, 레토 호텔, 이니오호스 호텔이 상위 순위에 있다. 대부분 4~5만 원 정도면 이용 가능하다. 날씨 정보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지닌 나라다. 6월부터 여름이 시작된다. 평균기온은 25℃ 이상. 7월은 30℃를 웃돈다. 델포이는 첩첩산중이지만 부서진 유적지는 나무가 없는 노천이라서 뜨겁다. 여름옷은 물론 파라솔, 모자는 필수다. 고온이긴 해도 습도가 낮아 불쾌지수는 거의 없는 편. 물가와 화폐 정보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유로 사용. 인터넷 정보 대부분의 식당이나 숙소에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시니어 여행 포인트 델포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번잡스럽게 움직일 필요 없이 천천히 즐기면 된다.
- 2018-07-0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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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야생의 삶을 느껴보는 '몽골 핫 플레이스'
-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리아다. 면적은 156만7000㎢로 한반도보다 7배 정도 크다. 수도 울란바토르의 거주자는 124만 명이다. 인구 밀도는 1.78명/㎢이고, 평균수명은 65.2세로 남자 62.9세, 여자 67.6세다. 몽골인들은 주로 염소, 양, 소, 말, 낙타 등을 키운다. 가축 수는 총 3270만 두에 이른다. 몽골인의 90%가 라마불교를 신봉하며, 이슬람교도가 5%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개신교 및 가톨릭 등이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약 2%(약 4만 명 추산)에 이른다. 나머지 3%는 무신론자다. 몽골의 국화가 연꽃인 것도 불교의 영향이다. 몽골 표준시는 한국보다 1시간 느리고, 한국과의 거리는 약 2000㎞다.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 공항까지는 비행기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몽골 정보 국명 몽골(Mongolia(영어), МОНГОЛ(몽골어)) 위치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방에 위치 면적 156만 7000㎢, 세계 19위 민족 할흐 몽골족(90%), 카자흐족(5.9%), 브리야트계(2%) 등 17개 부족 언어 할흐 몽골어 90%, 키릴문자, 문맹률 5% 이하 종교 라마불교 53%, 무교 39%, 이슬람교 4%, 기독교 4% 기후 건성 냉대기후 인구 약 300만 명, 세계 138위 수도 울란바토르(Ulan Bator) 국가 형태 공화국 정부 형태 의원내각제적 성격이 강한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책임제의 중간 형태 국내총생산 (GDP)US$ 102억(2012년), 1인당 국내총생산 US$ 3575(2012년) 화폐단위 투그릭(Tg, Tugrik), 1미국달러 = 2458투그릭(2018년 6월 기준) 독립일 1921년 7월 11일(중국으로부터 독립) 국가선포일 1924년 11월 26일 몽골의 날씨 6~8월 몽골 여행의 베스트 시즌. 초원에는 풀이 자라고 맑고 쾌적한 날씨가 계속된다. 한국의 화창한 가을날과 유사한 날씨로 낮에는 해가 강하지만 그늘은 시원하다. 습도가 매우 낮은 여름의 몽골은 고온 다습한 한국의 여름을 피하기 가장 좋은 피서지다. 일교차가 심하고 한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두꺼운 파카가 필요하다. (평균기온 최고 30℃ 최저 15℃) 9~10월 몽골의 가을은 한국의 가을보다 일찍 찾아온다. 약간 쌀쌀하지만 여름 성수기를 지났기 때문에 여행자로 북적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액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중부지역과 남쪽 고비 사막 지역의 경우 9월 말까지도 여행이 가능하지만, 추위가 일찍 찾아올 경우 북부 홉스골 지역은 여행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승마와 트레킹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몽골의 기념품 캐시미어 의류 캐시미어용 염소(산양)의 털을 빗겨 채취한 최고급 100% 캐시미어는 국내 시중가의 절반 가격이다. 여행자들에게는 목도리, 니트류, 숄, 양말 등이 인기가 많다. 고비 팩토리숍, 국영백화점 2층, 서울의 거리 로드샵에서 구입할 수 있다. 여성용 목도리는 한화 약 3만~5만 원 정도. 제품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다. 펠트 소품 양털을 압축한 펠트로 만든 컵받침, 몽골인형, 열쇠고리 등 제품이 다양하다. 국영백화점 6층 기념품 숍에서 개당 한화 3000~7000원 정도다. 보드카 몽골 북부 셀렝게 지방의 질 좋은 밀로 만든 몽골 보드카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 여행자 인기 품목이다. 700ml 1병에 한화 약 2만 원가량 하며, 소욤보, 칭기즈칸, 벌러르 같은 브랜드를 추천한다. 그러나 매월 1일은 몽골 전 지역에서 주류 판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여행기간 중 매월 1일이 포함되어 있다면 사전에 구입하길 추천한다. 또한 국내 입국 시 1인당 휴대품 면세 범위 규정에 따라 주류는 1인 1ℓ 1병까지만 허용되니 이 점도 유의. 초콜릿과 과자류 단것을 좋아하는 몽골인의 기호에 맞게 다양한 초콜릿과 과자가 많다. 특히 러시아에서 수입되는 초콜릿 등은 선물용으로 좋다. 차가버섯 건강식품류 몽골에서 생산되는 차가버섯을 이용한 차, 분말 등의 건강식품도 최근 들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좋다. 몽골의 드럭스토어인 모노스 숍에서 판매한다. 립밤, 수분크림 등 보습제품 겨울이 길고 추운 몽골에서는 다양한 보습 제품이 한국보다 저렴하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히말라야 립밤, 수분크림 등은 국내 시중가의 절반 정도다. 테를지 국립공원 테를지 국립공원은 힌티 산맥 산기슭에 위치한 몽골 최고 휴양지로 울란바토르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으며, 승용차로 약 1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기암괴석, 숲, 초원,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툴 강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이룬다. 여름철에는 에델바이스를 비롯해 각양각색 야생화가 피어난다. 말타기 체험, 야생화 트레킹 등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거북바위 테를지 국립공원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거북바위는 이름 그대로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 웅장한 규모의 거북바위 주변에는 항상 관광버스와 단체 여행객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간단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들도 있으니 한 곳쯤 들러 맛보길 권한다. 테를지 최고 관광지답게 여름 성수기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소지품 관리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엘승타사르하이 엘승타사르하이는 멀리 남고비 사막까지 가지 않아도 대규모 사구 지역을 볼 수 있다. 사막 체험을 할 수 있어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모래 사막은 약 7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초원, 실개천, 사막 지형이 한데 섞여 있는 풍광을 자랑한다. 사막 주변으로는 낙타, 염소, 양을 키우는 유목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계절에 따라 지천으로 핀 에델바이스를 만끽할 수 있다. 천진벌덕 칭기즈칸 대형 동상 칭기즈칸 대형 동상은 울란바토르에서 100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천진벌덕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볼 수 있다. 칭기즈칸 대형 동상은 최근에 생긴 몽골 랜드마크 중의 하나이며 4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이다. 칭기즈칸 거대 동상은 고향 힌티 아이막을 바라보고 있다. 내부에서는 칭기즈칸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과 전망대를 관람할 수 있다. 몽골의 예술문화 몽골 전통 공연에는 한국 탈춤과 비슷한 ‘참(Tsam)과 오직 사람 목청만으로 소리 내 연주하는 ’흐미(Khuumii)‘가 있다. 전통 악기로는 마두금이 대표적이다. 현이 2개인 찰현악기로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해금과 같은 방식으로 연주한다. 현 위쪽 끝에 말 머리 모양을 새겨놓아 마두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2018-07-0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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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고 궁궐에서 찾는 '궁궐의 우리 나무'
- 창경궁에는 영조 38년(1762),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지켜본 나무 두 그루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선인문 앞 금천 옆 회화나무와 광정문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이렇듯 우리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나무들을 궁궐에서 찾아보는 것 어떨까?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궁궐의 우리 나무’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저 자료 제공 눌와 5대 궁궐 안 나무를 한눈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덕수궁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표시한 지도가 담겨 있다. 궁궐별로 나눠 각 파트의 첫 장에 앞서 말한 지도를 펼친 면으로 보여주고, 나무마다 상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확대된 지도도 제공한다. 실제 궁궐에 방문하게 된다면 두꺼운 책 대신 부록으로 들어 있는 한 장짜리 지도를 가져가자. 5대 궁궐 안 나무 위치뿐만 아니라 건물, 탑, 장승, 시설물, 탐방로, 음수대 정보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편리하고 유용하다. 이파리 모양으로 나무 찾기 각각의 나무를 소개하기 전 서두에 나무 이름 아래 이파리 사진을 먼저 보여준다. 형태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이름을 모르는 나무의 경우 이파리 모양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옆 페이지에는 나무의 전체적인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나온다. 물론 계절이나 궁궐의 조경관리, 자연재해 등에 따라 조금씩 외형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을 통해 나무에 대한 기본 정보 및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등에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까지 엿볼 수 있다. 종에 따라 다른 나무 구별법 벚나무만 하더라도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종류만 10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같은 듯 다른 나무들을 구별해볼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밖에 회화나무와 주엽나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 등 종은 다르지만 생김새가 비슷해 헷갈리는 나무들에 대한 구별법도 살펴볼 수 있다. 나무껍질이나 꽃, 열매 등도 사진으로 실려 이파리 모양과 더불어 참고하면 나무 찾기에 도움이 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1 고궁 나들이를 가는 날 시기가 맞는다면 ‘2018 고궁음악회’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6월 중 경복궁에 방문하면 수정전 일원에서 고궁음악회를 관람할 수 있다(주간: 7월 29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15:30~16:15/야간: 6월 17~30일 20:00~20:55). 창경궁에서는 5월 20일부터 6월 2일까지, 7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야간공연을, 창덕궁에서는 8월 3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주간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plus 2 복사나무, 즉 복숭아나무 숲은 흔히 무릉도원이라 불리며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됐다. 조선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사나무 숲에 대해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한다. 이에 안견은 그 광경을 사흘 만에 그림으로 완성했는데 그때 그린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이밖에 천도가 열리는 복숭아 과수원을 지키는 손오공의 이야기가 담긴 ‘서유기’,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상향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복사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plus 3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조감도식으로 상세하게 담은 조선시대 궁중회화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나무 중 현재도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있다.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회화나무들과 봉모당 뜰 앞 향나무가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동궐도에서 보면 동서로 길게 뻗은 향나무 가지들을 6개의 받침목이 지탱하고 있는데, 현재도 당시와 흡사한 모습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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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문화행사
-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진해군항제 일정 4월 1~10일 장소 중원로터리 및 진해 일대 국내 최대의 벚꽃축제로 손꼽히는 ‘진해군항제’가 개최된다. 벚꽃 명소인 여좌천, 경화역, 진해탑 등에선 36만 그루의 아름다운 왕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축제 동안에는 평소 출입이 어려운 해군사관학교, 해군진해기지사령부의 영내 출입이 가능하며 해군복 입기, 요트크루즈 승선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열린다. 특히 금요일 저녁과 주말에 개최되는 군악의장페스티벌은 진해군항제에서만 볼 수 있다.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 일정 4월 3~8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는 출연진과 관객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없앴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중년 여성들에게 아직도 아름답고 열정을 내뿜을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민참여형예술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신나는 예술여행 등의 사업에 선정됐다. 돌아온다 일정 4월 5일~5월 6일 장소 드림아트센터 2관 더블케이씨어터 출연 강성진, 정상훈, 김수로, 김곽경희 등 포스터에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연극 ‘돌아온다’는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필리핀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욕쟁이 할머니 등 후회와 미련이 많은 주인공들의 사연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배우 김수로와 강성진을 필두로 다양한 연극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정상훈, 김로사, 김사울 등이 참여한다. 아드만 애니메이션 – 월레스&그로밋과 친구들 일정 4월 13일~7월 12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아드만 스튜디오’는 영국의 유명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대표작 ‘윌레스와 그로밋’, ‘숀더쉽’, ‘치킨런’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18 앙상블마티네 개막 4월 21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지휘 윤승업 연주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 모차르트 시리즈를 목관, 현악, 금관, 심포니 총 4가지 테마로 나눴다. 이번 첫 번째 시리즈에서는 모차르트 작품 중 유일한 클라리넷 협주곡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1악장’이 연주될 예정이다. 사랑해요, 당신 일정 4월 28일~6월 3일 장소 KT&G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출연 이순재, 장용, 정영숙, 오미연 등 연기 베테랑 이순재, 장용이 남편 '한상우' 역을, 정영숙, 오미연이 아내 '주윤애' 역을 맡았다. 연극 '상랑해요, 당신"은 평범했던 부부에게 치매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렸다.
- 2018-03-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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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의 문화행사 한 눈에
-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보자! 지루함을 날려줄 이달의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에쿠우스 일정 3월 1일~4월 29일 장소 대학로 TOM 1관 출연 장두이, 안석환, 전박찬, 오승훈 등 라틴어로 말[馬]을 뜻하는 ‘에쿠우스’는 17세 소년이 자신이 사랑하던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법정에 선 엽기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기독교인 어머니와 사회주의자 아버지 사이에서 잘못된 사랑과 가치관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의사 ‘다이사트’의 이야기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함께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보여준다. 명성황후 일정 3월 6일~4월 15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출연 김소현, 최현주, 양준모, 손준호 등 1995년 대한민국 초연 이후 국내 최초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뮤지컬 ‘명성황후’.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후였던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2015년 ‘명성황후’ 20주년 공연에 처음 출연했던 김소현이 다시 ‘조선의 국모’로 분한다. 그의 남편 뮤지컬 배우 손준호가 극 중 명성황후 남편 ‘고종’ 역할로 출연해 기대를 모은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일정 3월 9~18일 장소 강원도 평창, 정선, 강릉 세 번의 도전 끝에 대한민국 평창이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3월 9일 오후 8시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18일까지 10일간 설상 4종목(알파인 스키, 바이애슬론, 크로스컨트리 스키, 스노보드), 빙상 2종목(아이스하키, 휠체어 컬링) 등 총 6종목을 두고 금빛 사냥을 펼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개봉 3월 14일 장르 멜로, 로맨스 감독 이장훈 출연 소지섭, 손예진 등 1년 후 비가 내리는 날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 기적처럼 1년 뒤 죽었던 아내가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남편과 아들 앞에 나타나는데…. 판매 부수 100만 부를 기록한 이치카와 다쿠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지섭이 남편 ‘우진’ 역을, 손예진이 아내 ‘수아’ 역을 맡았다. 마마 돈 크라이 일정 3월 23일~7월 1일 장소 아트원씨어터 1관 출연 송용진, 허규, 조형균 등 사랑을 얻기 위해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인간vs불멸의 삶을 끝내고자 하는 뱀파이어. 서로 다른 욕망을 좇는 두 남자의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다뤘다. 다섯 번째 시즌 공연을 앞두고 공개한 뮤직비디오 4편은 온라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2018-03-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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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신 김금화와 소소한 일상을 나누다
- 예닐곱 어렸을 때부터 아는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열두 살부터 무병을 앓고 열일곱에 만신(萬神)이 됐다. 내림굿을 해준 이는 외할머니였다. 나라 만신으로 불리는 김금화(金錦花·87) 선생의 무당 인생 첫 장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무당이 된 이후 세상 숱한 질문과 마주한다. 제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만사형통합니까? 크고 작은 인간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을 모신 지 올해로 71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끊임없이 질문을 받게 될 만신. 그녀와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해 듣는 거 말고 인간 김금화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2018년 대한민국에 대한 축원은 덤이었다. 너무 시간 많이 빼앗으면 안 돼 만신 김금화 선생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대충 낮 12시 이후다. 공연이 있거나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 오후 12시쯤까지 한나절. 김금화 선생은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자택이나 금화당(강화에 있는 김금화 선생의 굿당)에서 점(占)을 보러 오는 손님을 맞이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만신이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이른 아침부터 점 보러 온 손님이 집 안에 앉아 있다. 예약 문의전화도 꾸준히 걸려온다. 무복(巫服)에 다양한 무구(巫具, 굿에 사용되는 도구)를 들고 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는 모습만 머리에 그려왔다. 무복은 특별한 날만 입고 평소 편하게 입고 지낸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무복 대신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었다. 인사를 나누고 잡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대뜸 김금화 선생이 물어본다. “그런데 누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거야?” “저요.” 오전 내내 손님을 받아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고 피곤해 보였다. 힘드니 시간 많이 빼앗지 말아 달라 기자에게 당부했다. “자, 갑시다!(웃음)” 만수대탁굿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년 10월 말, 김금화 선생은 생애 일곱 번째로 만수대탁굿을 성황리에 마쳤다. 황해도 지방의 재수굿(집굿)인 만수대탁굿은 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굿 중 가장 크다. 집안의 번창과 가족의 건강, 불로장생 등을 빌며 노인의 만수무강과 죽은 뒤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굿이다. “만수대탁굿은 굉장히 큰 굿이에요. 소 잡고 돼지도 두어 마리 올리고 말이지…. 첫째 날은 상산부군맞이하고 칠성, 제석굿을 해요. 다음 날은 일월성신을 맞이해서 솔문(소나무를 휘어서 만든 문) 앞에서 대화가 이뤄져요. 세태를 풍자한 사또놀이를 하고, 소 바치고, 도령돌기를 해요. 도령을 돌면서 칠성님한테 아들 낳게 해달라고도 하고, 명공(名公) 많이 달라고도 빕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동참해서 돌지 뭐. 그리고 나중에 굿이 끝날 때쯤 작두 타고, 대감놀이도 하고. 굿거리(극에서 장의 개념)도 마흔 거리는 되나봐.” 만수대탁굿은 무당이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굿은 아니다. 큰무당 중에서도 일정 수준과 경지에 이른 무당에게 허락된 굿이다. 마흔 거리가 넘기 때문에 하루에 다 할 수 없고 최소 3일에서 5일 정도 기간이 걸린다. 특히 10년에 한 번, 무당 평생 세 번만 해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데 김금화 선생은 일곱 번의 만수대탁굿을 치러냈다. 10년에 한 번이란 말에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말이 기자 입에서 절로 나왔다. “왔으면 좋았을걸. 소 한마리 잡고, 막걸리도 많이 남았었는데. 굿을 크게 했어요. 소 잡는 것도 내가 삼지창으로 찍고 다 했어요. 제자들이 받쳐줘서 작두에도 올라가고. 사람의 힘으로는 못하는 거잖아.” 작년 치러진 만수대탁굿은 이제 마지마기라고 김금화 선생은 내내 얘기했다. 10년 후에도 꼭 다시 하셨으면 한다는 기자의 말에 고개를 흔든다. “만수대탁굿을 할 때는 젊어지는가 싶었는데 요즘 날씨가 추워서 운동을 못하니까 영 좋지가 않아요.(웃음)” 세상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운명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건넨 질문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일까?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는 좀체로 꺼내지 않는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14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이야기부터 호되게 시집살이하다 도망친 얘기, 장티푸스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 열일곱 살 신내림 받던 순간과 병에 걸린 한 사내를 낫게 해준 일화, 황해도 옹진군 동남면의 용호도라는 섬에서 했던 첫 대동굿의 감격에 대해서는 또렷이 들려줬다. 그 연세에 생생하게 당시 기분을 기억해내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들은 차창 너머 풍경처럼 넘기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김금화 선생의 이야기다. 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 혹은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녀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알고 싶은 건 만신 김금화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시름, 그리고 그것을 깨쳐내는 일이었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20여 분 지나자 김금화 선생이 시계를 봤다. “나 지금 계속 말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거 같은데…. 힘들다. 어제 맞은 영양제 오늘 이러고 다 쓰겠다.” 다음에 만나 좀 더 편한 얘기를 했으면 하는 바람에 이만 자리를 무르기로 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자택을 찾았다. 밥도 함께 먹고 편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또다시 약속은 낮 12시 이후. 오전 점사(占辭) 보는 일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두꺼운 바지 차림이 예전보다 편해 보였다. 목소리도 밝았다. 그런데 최근 부쩍 입안이 개운치 않고 입맛이 없다고 했다. “배가 고픈데 뭐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 원래는 잘 먹었는데 요즘 입맛이 없어. 밥도 먹기 싫고, 식빵이나 구워 먹을까? 아침도 억지로 먹었어.” 이렇게 말해놓고 재차 방문한 기자가 맘에 걸리는지 숙성시켜놓은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며 손에 쥐어준다. 날씨가 좋지 않아 통 못 나갔던 새벽 운동도 이날만큼은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이라니. 운동하기도 쉽지가 않다고 했다. “아침에 마스크하고 밖에 다녀왔는데 더는 못 나가겠다, 그럼. 좀 나가면 좋겠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어떻게 걸어.” 김금화 선생의 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은 지 5년이 됐단다. 당시 속 썩을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결국 류머티즘으로 왔다. 안마라도 해드릴 생각으로 손을 만지니 얼음장같이 차다. “손에 염증이 있어서 계속 좀 부어 있어. 어떨 때는 얼얼해, 이게. 류머티즘이 자가면역질환이잖아. 자기가 자기를 친다는 거 아니야. 자기 살이. 손이 못생겼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병원이 또 2층이라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못 가. 물리치료 받으면 조금 나아지지.” 그 사이 사무장이 식빵에 블루베리 잼을 잔뜩 발라 김금화 선생 앞에 내주었다. 어려서부터 단 것을 좋아했다지만 입속은 여전히 불편해 보인다. “입안이 되게 아프다. 너무 달아서. 단거 먹어도 아프고, 뜨거운 거 먹어도 아프고.” 사무장이 계란을 권했지만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식사시간이 돼 음식이 한 상 차려졌는데도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 짧게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자신에 대한 소소한 질문이 어색한지 대답 이어나가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만신은 은퇴가 없나요. 드라마 ‘왕꽃녀님’처럼요? 은퇴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니고. 외국에서도 점을 보러 오나요? 꽤 와요. 지난번엔 중국에서 사람이 왔어요. 한국 신이 몸에 들어왔다면서요. 오전에만 점사를 보시는 건가요? 네. 하루에 세 명도 보고 많으면 일곱 명도 보고 그래.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뭐… 그런 거 없어. 어렸을 때 꿈이 있었어요? 꿈 그런 거 몰라. 귀도 한번 안 뚫으셨네요. 그거 왜 뚫어 아픈데.(웃음) 젊은 여성들이 가끔은 부럽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짧게 대답했던 이전의 질문과는 달리 곰곰이 생각하다 기운을 내며 답했다. “으이, 부럽지 않아.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했는데 뭐. 돈 한 푼 안 내고 비행기 타고 외국을 오갔잖아. 그것도 비즈니스석에 타고, 대우받고, 돈도 많이 받아오고 말이지. 그때는 이렇게 문화재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세월이 좋으니까 중요무형문화재지.” 집 안 벽면에 붙여놓은 사진을 찬찬히 보다 김금화 선생이 야자수 나무 아래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복 차림의 모습만 보다 양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35년 전인가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야. 쉰세 살? 하와이대학교 초청을 받아 공연 갔을 때 찍은 사진이거든. 아무튼 사진들을 다 훔쳐가. 인터뷰하러 와서 가지고 갔다가 안 가지고 오기도 하고. 우리도 또 있다 보면 잊고.” 무당이 안 됐으면 뭐가 됐을 것 같은지도 물었다. 넘세(어린 시절의 김금화 선생의 이름)는 꽤 총명하던 아이였다. “무당이 안 되고 공부 많이 했으면. 의사 아니면 검사나… 그런 거 했을 거야. 공부했으면.” 만약 그랬다면 시대를 선도한 검사 김금화로, 의사 김금화로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곱고 당당한 얼굴이 꽤 어울렸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은 평생을 다른 이의 복을 대신 빌어주는 만신으로 살게 했다.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한 적 있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10여 년 전 연안부두에서 기자와 만나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고 했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낸다. “나랑 같이 사진 찍고 우리 김금화 신어머니라고 안 했어?(웃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금화 선생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김금화 선생이 자신의 신어머니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요즘 꽤 된다는 설명. “무속인들이 나하고 사진 찍고서는 김금화가 신어머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대요. 아침에도 어떤 여자가 왔는데 어떤 무속인이 김금화 만신이 자기 선생인데 무슨 큰 일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많은 돈을 보태라고 했답니다.”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져 이제는 사진 찍는 것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자기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길 바란다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괜찮지 그럼 어드래?” 끝으로 우리나라가 올해 잘될 수 있도록 축원의 메시지를 부탁했다. 김금화 선생은 매일 나라를 위해 축원한다고 했다. 나라가 편안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고 전쟁 없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 기도드린다고 했다. “2018년에는 모든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고, 밤늦도록 술 먹고 길에 넘어지고 싸우고 막 그렇게 하지 말고 착실하고 정말 아름답게 모두 하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서로 아끼고. 음식도 아끼고요. 너무 많이 해서 내버리지 말아요. 하늘이 내려다봅니다. 아이도 많이 낳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정에 3명, 4명 낳아서 나라에 좋은 일 하고, 아이 안 낳고 자기들 혼자서만 살면 어떻게 해. 늙어서도 외로울 거 아냐? 가정과 사회에서도 좋은 일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상님,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가 드리는 축원입니다.” 올해 우리나라가 어떤지 물었다. “괜찮지 그럼, 어드래? 안정도 되고….” 나라 만신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안정된다는 말에 근심걱정 없는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본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헤치고 가녀린 노구가 지탱하고 섰다. 평소 조용히 행동하다가도 무대 위에 서면, 작두 위에 오르면 신빨(?) 날리는 젊은 만신으로 되살아난다. 올해도 7월이면 어김없이 서해안 배연신굿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공연과 굿판이 만신 김금화 선생의 몸짓을 위해 준비될 것이다. 김금화 선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기자는 간절한 마음이다. 10년 후 그녀의 여덟 번째 만수대탁굿을 꼭 볼 수 있기를 말이다.
- 2018-01-31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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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동계올림픽은 제가 꾸던 꿈이었습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 박종흔 씨
-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닦아야만 했으니까. 희망이 보이는가 싶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망연자실 고개를 떨어뜨렸지만 초석이 다져졌고 단단한 징검다리가 놓였다. 노력은,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한 달여 남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삼수(三修) 만에 이뤄낸 쾌거’라고 말한다. 세 번의 도전 동안 수많은 사람의 헌신과 노력,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올림픽 또한 없을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노장을 기억해냈다. 前 강원도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자 現 아라웰다잉연구회 회장인 박종흔(朴鍾昕·69) 씨. 꿈이 이뤄진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창동계올림픽의 백전노장을 만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박종흔 씨를 만났다. 이미 10년도 더 된 올림픽 유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해드릴 대단한 얘기가 없다며 멋쩍게 웃는다. 박종흔 씨는 올림픽 관련 업적 외에도 공직자로서 명망 높고 존경받던 인물. 지금도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09년 강원도청 지방부이사관으로 공직을 내려놓기 전까지 지방과 중앙정부 요직을 비롯해 2014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업무까지 두루 섭렵한 박종흔 씨는 나랏일(?) 전문가였다. 현역 시절 인생을 걸고 몰두했던 일은 단연 ‘올림픽’이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재수 시절인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머릿속에는 오로지 올림픽 유치 생각밖에 없었다. “2004년도에 국무총리실에서 재난관리과장을 하고 있다가 강원도로 내려와서 받은 첫 보직이 ‘강원도 국제 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이었어요. 첫 번째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고 난 뒤에도 강원도가 재도전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유치에 관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국제스포츠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올림픽 유치를 위한 준비를 틈틈이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 신청 뒤 후보 도시가 되기까지 각 도시 간 보이지 않는 경쟁은 치열하다. 홍보 담당자로서 어깨가 당연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경쟁 도시와 비교해 최대한 좋은 인상과 올림픽 정신에 입각한 행동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밝힌 ‘드림프로그램’ 국제스포츠위원회 홍보부장을 하면서 단연 보람되고 뿌듯했던 것이 드림프로그램이었다.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는 중 가장 정열적으로 힘을 다하고 관심을 가졌던 프로젝트였다.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고, 성과가 이번 올림픽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드림프로그램입니다. 제가 오기 전부터 기획된 것이었어요. 눈이 내리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는 나라의 청소년을 강원도로 초정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었죠. 스노보드도 타고 스키도 가르쳐주고 스케이팅도 가르쳐줬습니다.” 한편으로는 IOC 위원에게 한 표를 호소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지역은 동계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동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왔던 참가자들을 통해 우리의 뜻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드림프로그램은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열매를 거두었다. 2009년 드림프로그램에 참가했던 말레이시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줄리안 지 지에 이(21)는 말레이시아 동계스포츠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박종흔 씨가 한창 활동하던 2005년 참가했던 남아프리가공화국의 전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타마라 제이콥스는 2월 초 성화 봉송 주자로 뛸 예정이다. 동계스포츠를 널리 알리고 올림픽정신을 실현한 소중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 빛을 발하고 있다. “그땐 정말 용평스키장에서 살았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같이 지내고요. 인솔해온 지도자들에게는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평창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도록 IOC 위원들에게 말해 달라고 막후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다 한 거죠. 지금 생각해도 드림프로그램은 정말 잘된 프로그램입니다.” 겨울 스포츠의 장, 평창으로 오세요! 강원도청에서 홍보부장 업무를 보다가 국제부장직을 맡아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평창이 동계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는 일이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서 스노보드 세계 챔피언십 대회를 한다고 하면, 다음 대회를 우리가 유치해오는 것이었어요.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했고 또 큰 대회도 여러 번 강원도에서 유치했습니다. 동계올림픽에는 국제스키연맹, 스케이팅연맹, 바이애슬론 등이 쭉 있잖아요. 산하 연맹들이요. 거기서 다 호응을 또 해줘야 합니다. 대회를 유치하려고 많이 다녔고 유치도 꽤 했어요.” 국제부장에 이어 올림픽 업무를 총괄하는 국제스포츠지원단장이 되면서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홍보부장 때 용평스키장이 집이었다면 이후에는 전 세계가 올림픽 유치를 위한 영업장이었다. 세계를 돌며 평창에 한 표를 호소했고 열정을 쏟았다. 유리하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뛰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러시아의 소치와 대한민국의 평창이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개최지 결정은 남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는 전세기 한 대로 날아갔는데 러시아는 초대형 화물기 7대를 가지고 날아왔어요. 시내 곳곳에다가 공연장 만들고 엄청난 오일 머니를 갖다 부은 거죠.” 뭔가 전세가 밀리는 기운이었지만 우리 측도 표결이 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발로 뛰고 평창을 알렸다. “권양숙 여사님이 마침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드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테말라의 어린이들을 만나서 미팅도 하고 애써주셨죠.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습니다만 소치를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4표 차이로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러시아 소치에 내주고 말았다. 2007년 7월 3일. 뼈아픈 그날이었다. “평창은 벌써 2차 도전이었고 유치를 확신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더 이상 올림픽 업무를 보기가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쏟았던 정열에 비해서 얻은 게 없었다. 박탈감이 없었다면 세 번째 도전 때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었다. “만약 있었으면 조직위원회에서 활동을 했겠죠. 그런데 한 3년 그렇게 하고 나니까 올림픽은 조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정년을 2년 남긴 상황이었거든요. 좀 더 유능하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유치 업무를 맡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올림픽 유치가 물거품으로 돌아간 뒤 박종흔 씨는 올림픽 업무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며 강원도지사였던 김진선 전 지사에게 학교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이후 주문진에 있는 강원도립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9년 정년퇴직했다. 못다 이룬 평창의 꿈은 후배들에게 넘겨주었고, 올해 마침내 결실의 그날을 맞게된 것이다. 후배들이 선배님으로서 박종흔 씨를 좀 챙기고 있는지 물었다. “안 그래도 후배한테 우스갯소리로 나를 잊은 게 아니냐며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나를 기억하라고 했더니 알았다 하더라고요.(웃음)”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동계올림픽의 꿈을 실현시켰기에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과정 속에서 상당 기간 근무한 것에 새삼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끝내 무산됐더라면 우리의 노력도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거예요. 우리가 못 이룬 일을 후배들이 이뤄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죠. 제 나름대로 훗날 기여할 일이 있다면 물론 당연히 해야겠죠.” 박종흔 씨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이 눈은 설상경기에 좋을 눈이구나, 아니구나’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 올림픽과 함께했던 삶이 여전히 몸에도 생각에도 배어 있다. 나랏일 전문가, 웰다잉 전문가 되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일궈낸 백전노장은 지금 그럼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제2인생도 궁금했다. 최근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웰다잉’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마침 기자와 마주한 곳은 현재 회장으로 활동 중인 아라웰다잉연구회의 공간이었다. 은퇴 뒤 인생에 대해 고민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즉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과거에는 퇴직 공무원이 길가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산불 감시, 교통질서 캠페인 같은 단순노동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죠. 저는 30~40년 공직에 있었던 노하우를 접목해서 전문 재능을 기부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생각했습니다. 퇴직 무렵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조심스럽게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박종흔 씨는 2013년 웰다잉 전문가로 거듭났다. 그때 당시 *각당복지재단이 강원도의 동해가정법률상담소를 포함, 다섯 군데를 선정해 웰다잉교육전문지도강사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16주 교육을 이수한 뒤 웰다잉 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아라웰다잉연구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웰다잉 전문가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경로당과 노인복지원을 찾아다니면서 무료로 강의도 하고 봉사도 한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인생 마무리에 관해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해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혹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 물었다. 또 봉사 이야기를 꺼낸다. 평생 공직생활에 국민들 염원을 담아 발에 땀나도록 뛰어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나보다. “퇴직 전부터 악기로 봉사하고 싶어서 한 10년 색소폰을 배워뒀습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어르신들을 위해 연주하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지금껏 헌신하며 살아온 자신과 더불어 가족과 행복한 인생을 많이 즐기시길 바란다. 2월, 평창 밤하늘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면 손자에게 꼭 말하시라. “저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고 말이다. *각당복지재단 1986년 설립된 각당복지재단은 인류애 정신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준비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말기환자를 보살피는 호스피스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2017-12-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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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 석회성건염 겪은 ‘착한 며느리’와 정형외과 전문의의 라뽀
- 12년 만에 최고로 길었던 추석 연휴가 지났다. 긴 연휴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늘어난 휴일만큼 더 많은 가사에 시달리면서 허리와 손목, 어깨 등에 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정형외과는 명절 연휴 직후가 성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세에이스정형외과에서 만난 이순옥(李純玉·64)씨도 명절이 고달픈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보통의 며느리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겪은 질환은 파스 몇 장으로 끝낼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뒤늦게 시작한 취미가 문제라고 생각했죠.” 이순옥씨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을 통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6년 전 일이다. 처음 배우는 악기라 당연히 쉽지 않았고, 코드를 잡는 손부터 허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기타를 다루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통증은 점점 사라져갔다. 연주로 인한 즐거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유독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통증은 그대로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명절이 지나면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러다 남편의 무릎 치료를 위해 들른 병원이 믿을 만해서 자신의 어깨도 검사해봤다. 진단 결과 석회성건염이었다. 원인 모를 석회화가 통증 불러와 석회성건염은 어깨에 돌덩이 같은 것이 생기는 병이다. 관절에 석회 물질이 저절로 발생한다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치료를 담당한 정형외과 전문의 윤홍기(尹洪基·46) 원장은 석회성건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석회성건염은 말 그대로 어깨 힘줄 부위에 석회 침착물이 생기면서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에요. 이 염증이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사실 이 병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진 바가 없어요. 힘줄의 노화 과정에서 석회화가 일어난다는 가설과 힘줄 세포의 변성으로 석회가 생긴다는 이론이 지지를 받고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어요.” 우리가 흔히 오십견으로 알고 있는 유착성관절낭염과는 완전히 다른 병이다. 어깨에 통증이 발생하는 병이기 때문에 비슷하다 여길 수 있지만, 오십견은 어깨 관절의 운동 범위가 직접적으로 감소되는 점이 가장 다른 부분이다. 석회성건염도 어깨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증상의 정도에 따라 다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는 오십견에 대한 속설이다. 어깨통증을 모두 오십견이라도 단정 짓고 병을 키울 경우 응급실 신세를 질 수도 있다. “아팠을 텐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셨어요?” 윤 원장이 이씨를 만나자마자 건넨 말이다. 윤 원장은 일반 환자보다 커다란 석회덩어리를 보고 걱정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다행히 덩어리 크기에 비해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비교적 적었다. 석회성건염은 생성기, 휴지기, 흡수기의 3단계를 거치는데, 흡수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극심한 통증이 나타난다. 만약 어깨가 너무 아파 응급실을 찾을 정도라면 대부분 석회성건염일 가능성이 많다. 윤 원장은 환자의 통증이 심하지 않아 일단 보전적 치료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함부로 어깨에 칼을 대기보다는 수술을 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한 통증이 없다면 비수술적 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석회를 없애기 위해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입니다. 석회물이 부드러운 상태라면 주사기로 빨아들여 크기를 줄이고, 딱딱하면 체외충격파 치료로 부순 다음 분산시켜요. 이순옥씨의 경우 체외충격파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수술을 결정하게 됐죠.” 제사를 모셔야 하는 며느리의 숙명 올해로 결혼생활 28년째. 집안에선 둘째 며느리이지만 내 손으로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성격 탓에 시어머니로부터 모든 제사를 물려받았다. 제사만 1년에 4차례. 설과 추석의 차례상 준비도 그녀 몫이다. 단 한 번도 빼먹은 적도, 소홀히 넘긴 적도 없다. 이순옥씨가 처음 병원을 찾은 것은 설 명절 직후인 지난 2월이다. 집안의 연이은 행사 때문에 어깨 질환이 생긴 거라고 지목하지 않았어도,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중압감은 그때마다 어깨 위로 쌓이지 않았을까? “워낙에 내 일로 남 일로 바빠요. 가만히 있질 못하는 성향이니까. 한때는 백화점에서 일도 했고, 부대찌개 식당도 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올해부터는 제사를 한 번에 지내기로 했어요. 부담이 좀 줄어들었죠.” 그녀의 활달한 성격은 여가생활에서도 나타난다. 남편을 통해 알게 된 노래 모임 ‘관악산 통사모(통기타 사랑 모임)’는 활동한 지 10년째다. 이제는 보컬을 담당하는 남편보다 그녀가 ‘핵심 멤버’로 꼽힐 정도다. 이 노래 모임은 ‘관악산 통사모 7080 음악회’라는 제목으로 매달 2, 4번째 일요일에 관악산 제2광장에서 정기공연을 갖는다. 관악산 통사모를 통해 알게 된 티뷰크사회복지재단을 통해 봉사활동도 해왔다. 민원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신대방동 인근에서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는 ‘빵 봉사’를 6년이나 했다. 많을 때는 1000명 이상의 사람이 몰렸다. 말 그대로 쉴 틈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어깨를 많이 쓰는 야구선수 사이에서는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는 속설이 떠돈다. 그러나 이씨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윤 원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모든 관절은 과부하가 걸리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많이 쓸수록 좋아지고 건강해진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이 들면 어깨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배드민턴이나 탁구 같은 운동 역시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전기나 배관과 같은 팔을 올리고 작업하는 직업군 역시 어깨 질환이 자주 발생합니다.” 석회성건염의 불편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들의 발병이 남자에 비해 두 배가량 높다는 것. 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30대에서 50대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발병 원인이 아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지, 나이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통증보다 더 무서웠던 것 지난 7월 결국 이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사실 수술은 그녀에게 그렇게 두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대장암 수술을 통해 투병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어깨 수술은 겁나지 않았다. 대장암은 이미 제거되었고 완치 직전에 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제가 폐쇄공포증이 좀 있어요. 아주 심한 편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있을 때가 있어요. TV 장식장 안처럼 좁은 공간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그래서 찜질방도 못 가요. 수술 전 MRI 촬영을 위해 관처럼 좁은 공간에서 30분 정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눈 질끈 감고 노래를 부르면서 버텼어요. 그때 아는 노래 모두 불러버린 것 같아요(웃음).” 수술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얇은 튜브 모양의 관절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어깨의 앞, 뒤, 옆에 작은 구멍을 내 수술을 하는 방식이다. 관절경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석회물이 생성된 부위를 직접 들여다보면서 힘줄이 다치지 않도록 제거해낸다. 윤 원장은 “간혹 수술을 해도 석회물이 남는 경우가 있어요. 이순옥씨의 석회화 부위는 넓은 편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제거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수술 후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0일 입원 지시를 받았지만, 몸이 들썩거려 6일 만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퇴원했다. 어깨는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빠르게 좋아졌다. “수술 후 첫날부터 어깨가 잘 움직여 물리치료사가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운동 치료도 잘되고 몸 상태도 빨리 좋아지자 병원에 계속 누워 있기가 싫더라고요.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이 빨랐던 이유는 아마 요가 때문인 것 같아요. 10년 정도 요가를 꾸준히 해왔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부지런한 성격과 평소에 해왔던 운동이 몸이 회복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가장 말을 잘 듣는 환자는 자신일 거라며 웃었다. 병원 방문날짜를 어긴 적도 없고, 운동도 빼먹지 않고 했다. 시키는 동작은 통증이 느껴져도 모두 다 해냈다. 이씨는 부지런한 성격이지만, 석회성건염 환자들 대부분은 게으르다. 윤 원장은 석회성건염 환자들은 합병증도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부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고 치료를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치료가 지겹기 때문일 거예요. 운이 좋으면 석회물이 자연 흡수되는 경우도 있어 통증이 사라지고 힘줄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이 더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당장 좋아지지 않아도 성실하게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합니다. 아무리 느려도 그것이 가장 빨리 낫게 하는 방법입니다.” 2개월 만에 거의 회복된 몸 수술 후 변화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재미있는 답변을 했다. “이제 차 앞자리에서 뒷자리 물건을 집을 수 있어요. 수술 전에는 뒷자리에 있는 물건을 전혀 집을 수 없었거든요. 기타 연주를 마음놓고 할 만큼 회복되진 않았어요. 통기타는 쇠줄을 잡아야 해서 힘이 필요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요가도 비슷해요. 그러나 정상일 때에 비하면 90% 정도는 회복됐다고 봐요. 더 건강해지기를 기대하지만, 수술 후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자상한 남편은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남편 얼굴만 보였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치료 후 어깨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최근 걷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이씨는 말했다. 많이 걸으면 두 시간도 너끈히 걷는다고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으려고 노력해요.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걸 좋아해요. 지하철 계단도 열심히 걷고. 걷는 속도도 꽤 빨라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도 앞장서서 가요.” 수술 후 하고 싶은 것이 있을까. 그녀에게 묻자 또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요즘 유행하는 플라잉 요가를 해보고 싶어요. 물론 어깨가 완전히 나은 후에 해야겠죠. TV에서 연예인들이 하는 것을 봤는데 멋져 보이더라고요.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도전 같은 것이에요. 나를 위한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요. 플라잉 요가를 위해서라도 빨리 완치되고 싶어요.”
- 2017-11-02 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