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희경(56)은 유난히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 그녀에게서는 나이를 잊은 사랑스러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당차고 열정적이다. 문희경의 에너지는 강철 추위도 꺾지 못할 정도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동백꽃이 떠올랐다. 문희경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이맘때쯤 활짝 피는 꽃. 지난해 ‘대세’로 떠오른 그녀는 올해도 기지개를 활짝 켰다.
문희경의 2021년은 찬란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 이어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이하 ‘쇼윈도’)에 출연했고, 티빙(TVING) 웹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도 특별출연했다. 연이은 화제작 출연으로 시청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2월에는 앨범을 발매하며 가수로서 못 다 이룬 꿈도 이뤘다. 문희경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행복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재작년에도 바빴지만, 작년에도 정신없이 일들이 휘몰아쳤죠. 올해 더 많은 일을 할 것 같아요. 한마디로 2021년은 올해 더 열심히 하라고 준비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체력은 늘 유지하고 있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편이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받는 게 좋아요. 현장 체질인가 봐요. 집에 있는 것보다 편안해요.”
‘쇼윈도’로 새로운 배역의 갈증 해소
회를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시청률도 상승 중인 드라마 ‘쇼윈도’. 문희경은 주요 역할로 출연 중이다. 그녀가 맡은 김강임은 패션 기업의 회장이다. 한선주(송윤아 분)의 엄마이기도 하다. 즉 문희경은 여성 회장이자 엄마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쇼윈도’와 김강임에 대해 “하고 싶었던 작품, 역할”이라고 강조하며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쇼윈도’ 제작진은 문희경의 캐스팅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그녀가 송윤아의 엄마로 보일지 우려했다. 다행히도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제작사에서 제가 송윤아 엄마를 하기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해서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과감히 전화했어요. ‘나 김강임 역할 하고 싶다, 나를 대체할 배우 없을 것이다’라고 어필했죠. 제작진분들이 저를 직접 만나본 후 고민을 떨치고 저를 과감히 캐스팅했죠. 연기를 해보니까 저하고 송윤아는 진짜 엄마하고 딸이 되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어필하는 편이에요. 기다리고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처럼 문희경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는다. ‘쇼윈도’에 앞서 출연한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랬다. 석형(김대명 분)의 엄마로 출연한 문희경은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나왔다 하면 통통 튀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려한 스타일링도 한몫했다.
“모든 배우가 신원호 감독님, 이우정 작가님 작품을 하고 싶어 하잖아요. 어느 날 작가님이 저를 원하신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진짜 소리 지를 정도로 좋았어요. 그래서 덥석 물었죠.(웃음) 저나 김갑수 선배님, 김해숙 선배님은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좋은 배우들, 스태프들과 같이 작업하는 것을 즐거워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좋은 기억이고 잊을 수 없는 일이죠.”
문희경은 부유한 상류층 역할을 많이 맡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사모님이었고, ‘쇼윈도’에서는 회장님이었다. 그녀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사모님이지만 아들만 바라보는 평범한 엄마였고, ‘쇼윈도’는 재벌 회장 역할이다”라고 차이점을 짚었다. 문희경은 그동안 사모님 역을 많이 맡은 것보다 ‘누군가의 엄마’에 그친 것에 아쉬움이 더 커 보였다.
“늘 배우로서 갈증이 있었죠. 살림하고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쇼윈도’의 김강임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룹 회장이고 여성 경연인이잖아요. 그동안 부잣집 사모님은 많이 연기했지만 경영인은 처음이었어요. 엄마보다는 일하는 여성이죠. 그래서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사모님 역할을 주로 맡다 보니 캐릭터가 철부지거나 얄미운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인생작으로 꼽는 2010년 SBS 드라마 ‘자이언트’ 때부터 이어져온 이미지 같다. 극 중 계모 오남숙 역을 맡은 문희경은 악녀 연기로 큰 사랑을 받았다. 카카오TV 웹드라마 ‘며느라기’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평범한 시어머니로 분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더 얄미웠다.
“사실 저도 착한 역할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못된 역할, 카리스마 있는 역할만 기억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며느라기’ 역할은 악역도 아니고 가정밖에 모르는 현실적인 시어머니죠. 착하고 좋은 것 같으면서도 며느리들에게 시킬 것은 다 시키니까 욕을 먹더라고요. 이게 욕 먹을 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문희경은 “포스 있고, 예민할 것 같고, 못될 것 같다”는 오해를 받는다. 때문에 실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정반대 이미지에 깜짝 놀란다고. 귀엽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역할에 충실할 뿐이에요. 배우는 맡은 역할을 100% 해내야 하는 게 숙명이죠. 배우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요. 빨간색, 검은색 등 다양한 컬러를 입힐 수 있어야죠.”
출연작
드라마 SBS ‘자이언트’, KBS2 ‘감격시대’, JTBC ‘귀부인’, JTBC ‘품위있는 그녀’, MBC ‘슬플 때 사랑한다’, MBN ‘우아한 가’,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카카오TV ‘며느라기’, 채널A ‘쇼윈도 : 여왕의 집’ 등
영화 ‘좋지 아니한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간신’, ‘글로리데이’, ‘인어전설’, ‘어멍’ 등
가족, 그리고 제주
실제 엄마로서의 문희경은 어떨까. 그녀는 슬하에 작곡 공부를 하는 딸이 있다. 문희경에게 딸은 제일 친한 친구고, 둘도 없는 존재다. 딸 얘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 그녀. 그러다가 이내 언젠가 딸이 시집 갈 때를 떠올리고는 “어떻게 보내야 하나”며 울컥하기도 했다.
“딸은 제 인생의 원동력이에요. 허투루 살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줘요. 엄마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더 느끼고 열심히 하려고 하죠. 딸을 낳은 것은 축복이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 딸은 소통이 잘되고 친구 같아요. 걔가 더 언니 같아요. 저를 막 혼내요.(웃음) 결혼은 안 하겠대요. 친구들과 같이 실버타운 들어갈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너한테서 해방되고 싶다고 하고요. 그런데 막상 걔를 보내면 눈물 날 것 같아요.”
도시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녀의 고향은 제주도다.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문희경을 포함한 여덟 남매는 아옹다옹 살았다. 중산층이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다 보니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남아 선호사상이 심했어요. 아들 두 명을 낳으려다 보니 딸 여섯 명을 낳게 된 거예요. 그래서 8남매가 됐죠. 저는 다섯째고요. 부모님은 과수원도 팔며 자식들을 공부시킨, 자식들을 위해 사신 분들이죠. 형제들이 공부는 잘했어요. 선생님, 대학교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공부를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 잘하면 시키고, 못하면 안 시킨다고 하셨거든요.”
문희경이 공부를 필사적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남몰래 가수라는 꿈을 키웠기 때문. 어린 시절부터 친척들 앞에서 빼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소녀는 자신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 나이 들면서 가수에 대한 꿈은 확고해졌고, 꿈의 실현을 위해서는 제주도를 벗어나 서울로 가야만 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님이 서울행을 반대하셨어요. 당시 집안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제주교대에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저는 서울에 가야만 했어요. 그래야 대학가요제든지 강변가요제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요. 서울 안 보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데모도 하고 그랬죠. 결국 대학에 합격하니까 보내주시더라고요.”
마침내 문희경은 숙명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고,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렸다. 1986년 ‘제1회 샹송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쇼86’에 출연했다. 이어 1987년 ‘강변가요제’에서는 ‘그리움은 빗물처럼’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대학에 가고 상도 받으면서 제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 같았어요. TV에도 나오니까 부모님도 ‘어릴 때부터 노래 좋아하더니 하네, 가수 할 수 있으면 해라’라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벗어난 제주도지만, 고향은 고향인가 보다. 문희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도, 애정도 커졌다.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인어전설’, ‘어멍’에 출연하기도. 배우로 제주를 찾아 해녀 연기를 하기까지, 감회가 남달랐을 듯싶다.
“내 고향 제주는 정신적 지주죠. 내게 배우로서 가수로서 감성적인 부분을 줬다고 할까요.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기도 하죠. ‘내가 어떻게 고향을 떠나왔는데,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야’ 그런 마음이 강했어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그렇게 벗어나고만 싶었는데, 나이 들면서는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귀향 본능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에는 내려가서 살 거예요. 촬영이 있을 때만 서울로 올라오고, 귤 농사도 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어요.”
25년 만에 다시 가수
앞서 얘기했듯이 문희경은 1987년 강변가요제 대상 출신이다. 가수가 되는 지름길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녀의 가수 인생은 잘 풀리지 못했다. 문희경은 1989년에 1집 ‘갈 곳 잃은 연정’, 1994년에 2집 ‘예전 같지 않은 너’를 발표하며 발라드 가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계에 부딪혔고 결국 뮤지컬 배우로 전향했다. 첫 작품은 1996년 ‘노트르담의 꼽추’ 에스메랄다 역으로 기록된다.
“문희경이라는 사람도 점점 잊혀갔죠. 가수는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꿈을 키워서 서울에 왔는데 아닌 길을 억지로 갈 수는 없잖아요. 과감히 포기하고 뮤지컬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는 뮤지컬이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미래도 안 보이고, 암흑 같은 시기였죠. 하루하루 버티면서 그날그날에 충실하면서 열심히 살았어요.”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찾아오는 법이다. 마침내 문희경은 2007년 어둠을 벗어나게 됐다. 연극 무대에 선 그녀를 보고 정윤철 감독이 러브콜을 보내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 출연했다. 문희경은 제8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녀는 정윤철 감독을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린 문희경. 오히려 가수의 꿈에 가까워지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2015년 문희경은 MBC ‘복면가왕’ 출연으로 노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후 2016년에는 JTBC ‘힙합의 민족’에 출연했다. 딕션이 좋은 그녀는 놀라운 랩 실력을 보여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에는 MBN ‘보이스트롯’에 출연해 트로트 실력을 뽐냈다. 아름다운 음색으로 최종 5위를 거머쥐었다.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문희경은 결국 다시 가수가 됐다. 지난해 2월 트로트 정규 앨범 ‘금사빠 은사빠’를 발매한 것. 가수를 포기하고 배우가 된 지 꼭 25년 만이다. 그리고 지난 12월에는 ‘보령에 가자’, ‘서해랑길에서’, ‘대천에 가자’ 총 3곡을 발매했다.
“제가 ‘보이스트롯’을 하면서 정의송 선생님 노래를 세 곡이나 했어요. 그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고맙다고 곡을 선물로 주시면서 앨범을 내게 됐죠. 제가 다시 가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생각도 없었어요. 악착같이 가수를 열망할 때는 정말 안 됐잖아요. 다 내려놓고 노래를 즐기면서 했더니 가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거예요. 지금은 인사할 때 ‘배우 겸 가수 문희경’이라고 해요.”
정리해보면 문희경은 ‘가수→뮤지컬배우→배우→가수 겸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노래 부를 때보다 연기할 때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연기를 할수록 깊이와 재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노래 잘하는 배우’로 봐주기를 바랐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제주도 꼬마는 50여 년이 흐른 뒤, 자신이 배우 겸 가수가 될 줄 알았을까.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그녀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게 와 닿는다.
“결국 돌고 돌아 가수도 하고, 뿌듯하고 만족한 삶이죠.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사람 일은 몰라요. 그러니까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이기 때문에 나이가 있다고 망설이거나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꿈이 있다면, 꿈을 꾸라고 하고 싶어요. 꿈에는 나이 제한이 없잖아요.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면, 삶에 긴장감이 생기고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자는 거예요. 여러분, 꿈을 꾸고, 도전하세요!”
이주호는 느리고 부드럽다. 맑고 고요하다. 푸근하고 꾸밈없다. 그의 진솔함과 진득함에는 포크계 거장의 이미지보다 웅숭깊은 우물에서 노래를 길어 올리는 구도자의 모습이 어려 있다. 이성보다 직관으로, 분석보다 느낌으로, 머리보다 가슴으로 우리의 영원한 테마이자 구원인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다. 인생 전체를 사랑바라기, 행복바라기로 영위해온 해바라기 이주호, 그의 참 좋은 시절은 그때고, 지금이고, 앞으로다.
영혼으로
그에게 언어는 마지못해 빌려온 연장 같다. 한 가지를 가지고 이것저것 때우듯 쓰는 것 같은데도 충만한 감성 덕에 자연스럽고 멋스럽다. 가령 그가 말하는 ‘동반자’는 아내를 의미하기도 하고 기타를 뜻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동반자인 기타라는 친구는 처음 만남에서부터 그렇게 소리가 좋을 수 없는 거라.” 이런 식이다. 그런가 하면 코로나를 ‘그 친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모두를 힘들게 했지. 이제는 그 친구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다.
언어는 이분법의 도구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름이 틀림이 되고, 그로 인해 상처 주고 상처받는 데는 언어만 한 비수가 없다. 말로, 글로 받은 생채기를 싸안고 보듬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이분법의 경계를 지울 수 있다. 내 안에 너를, 네 안의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영혼과 마음의 대화인 셈이다. 그 사랑을 선율에 앉히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나약함을 강함으로 바꾸는 그의 노래는 언어적 이분법을 해체한 자리에 사랑을 흘려보낸다. 어언 50주년을 맞는 이주호 노래 인생의 주 테마는 그렇게 사랑인 것이다.
그는 1956년, 10남매의 일곱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사업가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평탄하게 성장했다. 너나없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도 심적 고생도 이주호만큼은 빗겨갔다. 노래처럼 인생이 술술 풀려나갔다고 할까. 그에게 노래는 인생과 같은 말이니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로 행복했다.
“아버지는 명보당이라고 보석 다루는 일을 하시면서 삼성물산 초기에 이병철 아저씨한테 돈을 대주던 전주였어요. 운수업도 하셨고요. 어머니와 이모들은 성악을 전공하셨지만 십대 때의 저는 음악적 재능이 표출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지요. 그냥 취미로 한 게 전부였죠. 형제들도 음악 하는 사람은 없고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음악이 제게 왔어요. 온몸과 온 마음에 세례를 받았다고 할까요? 저절로 곡이 떠오르고 가사가 써졌어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몰라요. 영혼이 노래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이 또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저 천부적 재능이 주어졌다고 할 수밖에.
그는 곡을 만들 때 감성의 원형인 자연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 자연의 곡선을 따라 선율이 흐른다. 해바라기가 해바라기인 것도 의도함 없이, 인연 따라 무위로 다가온 결과다. “당시 명동가톨릭회관에서 젊은이들이 음악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 방 이름이 들국화, 코스모스, 장미, 해바라기 등이었어요. 제가 주로 이용한 곳이 해바라기룸이라 수녀님이 그룹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대로 따른 거죠.”
인연으로
아는 사람은 알지만 해바라기는 원래 혼성 4인조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주호,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렇게. 1977년의 일이고, 첫 앨범이 그때 나왔다. 그러다 이정선이 입대하고, 이광조가 그 자리를 메웠다.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 나왔다. 이후 김영미의 해외 유학으로 4인조 해바라기는 해체를 맞게 된다. 이주호는 군 입대로, 이광조, 한영애는 솔로로 나섰다. 제대 후 이주호 또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으로 솔로 데뷔를 한다.
1982년 유익종과 듀엣 해바라기를 만들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바라기가 이때 탄생한다. 그러다 유익종이 떠나가고 이광준이 옆지기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가 부상하기 시작하던 때였고, 이어 ‘이젠 사랑할 수 있어요’, ‘어서 말을 해’ 등이 주목받았다. 3집에서는 다시 유익종과 함께하며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내 마음의 보석상자’가 히트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심명기,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그의 옆을 지켰고, 강성운과는 1999년 이래 10년간 호흡을 맞췄다.
왜 그렇게 자주 파트너를 바꾸냐는 의아한 시선도 있었지만 그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인연 따라 일어난 일이라 여긴다. 의도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함께하자거나 계획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인연에 대해 담담할 수 있었던 것. 함께 노래하고 싶어 만났고 떠날 때가 되어 떠나갔다. 그러다 바람처럼 또 휘감겨올 때 그 인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와 함께 가장 오래 노래한 강성운은 해바라기의 ‘찐팬’으로 고등학교 때 ‘해보라지’라는 팀을 만들어 고교 축제 무대에 섰다. 애오라지 해바라기 노래만 부르던 그가 해바라기의 정식 일원이 되어 언감생심 이주호 옆자리를 꿰찼을 땐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
최근에는 건반을 맡는 아들 이상 씨가 합류하면서 밴드 해바라기가 탄생했다. 이상은 2000년 그룹 유.피.에스(U.P.S)로 데뷔했다. 래퍼 도끼 등과 그룹 레이원으로도 활동했고, 2005년부터 솔로로 전향해 1집 앨범 ‘올 어바웃 다 러브’(All About Da Love)를 냈다. 미국인 외할아버지를 둔 혼혈 3세로 두드러지게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 덕에 모델로도 활동했다. 아버지 이주호와는 위례신도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면서 음악인 이전에 자연인으로 부자의 정 또한 돈독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세요. 항상 뒤에서 묵묵히 후원해주시죠. 음악이 아닌 다른 삶을 생각해보신 적이 없었듯이 저 또한 음악 외의 길을 간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음악을 하면서 해바라기 밴드로도 활동하는 ‘따로 또 같이’의 시간이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만든 곡은 약 1000곡, 그 가운데 이주호가 가장 마음에 품고 싶은 노래는 1989년에 만든 ‘사랑으로’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애창곡 ‘사랑으로’의 배경에는 사연이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곡과 가사가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곡이 먼저 진행될 때도 있고 노랫말부터 완성될 때도 있다. ‘사랑으로’는 곡을 만들어놓고 2년이나 흘렀지만 어찌된 게 가사를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라 국민의 정서적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처럼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적 주목과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잃어버린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신문 기사를 접한다. 김포공항 부근 환경미화원 가정의 네 자매가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궁핍한 생활을 비관하여 농약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중 세 살 막내가 생명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여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수입은 고작 월 25만 원, 올림픽을 치를 정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에서 라면값도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던 이주호는 눈물을 글썽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받아 적는 손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울림 가득한 노랫말이 쏟아졌고, 두 볼과 가슴에는 눈물이 타고 내렸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이 다시 떠오르네 /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사랑으로’가 알려지면서 막내딸을 잃은 환경미화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뻤다. 힘든 사람들을 위해 낮고 어두운 곳에서 노래로 위로와 행복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사랑으로’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공감대의 동심원은 국내의 문턱을 넘어 세계로 번져나가, 2001년 키예프 국립오케스트라와 ‘For the Peace’ 음반을 녹음하고,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는 세계 명곡 음반 ‘Around the world’에 자신이 직접 부른 ‘사랑으로’를 수록했다. 만국어인 사랑이 ‘사랑으로’ 노래가 되어 국제가요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행복으로
내 인생은 행복했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에게도 원초적 아픔은 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끝을 만나야 하잖아요.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이 우리 모두를 슬프고 아프게 하지요. 아무리 찬란했던 인생도 늦가을 나뭇잎처럼 어느 순간에는 다 놓고 떠나야 하니까요. 바람 같고 낙엽 같은 인생, 그런 것들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혼자 슬피 울기도 하고. 나만 이런가,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원초적 막다름을 마주하나 살펴보려고 시장을 한 바퀴 휙 돌기도 하고. 일부러 이것저것, 여기저기 부딪혀보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요. 그렇게 얻은 내 사유와 정서를 타인들과 공유하고, 내가 하는 고민과 번민을 딴사람도 할 거라고 믿기에 그런 것들을 노랫말에 녹이는 거지요.”
그는 1993년 유럽 순회공연 때 스위스 바젤에서 만든 곡 ‘해지는 강변’(11집에 수록)을 떠올렸다. 각자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면서. 지난 8월, 스위스 바젤의 한 비영리단체를 통해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64세 한국인 폐암 말기 환자를 배웅하고 온 필자에게 위로차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해지는 강변에 홀로이 찾아와 물빛에 비치는 금빛 햇살은 / 조약돌 세는 내게 지나간 시간에 아름다웠던 얼굴들을 보이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강변에서 오랜 시간 지나간 후라도 서로가 서로를 찾아보자 했지/아름다웠던 기억들이 보이네/ 그 후론 우리는 나름대로 길을 갔었지/ 물살이 지우는 그 사람들의 얼굴은 어느덧 세월의 골이 새겨있어 아무도 모를 우리의 시간들
“저의 온 존재가 노래를 통해 사랑했고 사랑받았습니다. 저는 지난달 가수 인생 처음으로 제가 만든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배의 곡이죠. 원래는 제게 편곡을 부탁하러 온 건데 나중에 제가 꼭 좀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간청하는 거예요. 받아들였습니다. 이 또한 해보지 않았던 경험이자 새로운 행복일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버티고 버텨온 내 삶의 끝에서 당신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그리움을 참고 밤하늘을 보면 당신 얼굴이 보여요/ 이렇게 사랑한 내 마음, 당신을 잊어야만 하는데/ 때로는 우는 얼굴, 우는 버릇, 눈물 버릇 언제나 받아주던 당신이기에/ 가라고 가라고 하진 마세요/ 지금은 갈 곳이 없어요, 조금만 있으면 떠날 테니까/ 서둘지 말아요, 이미 끝난 사랑 서둘지 마세요
”올 한 해도 그리움과 함께, 코로나와 함께 지냈네요. 어렵고 힘든 시기를 소망 꺾지 않고 헤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고생하신 모든 분들, 제가 만든 노래로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고, 나보다 못한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우리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기도하고 붙잡아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끝자락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그중 ‘가을이면 오시려나’의 노랫말 중에 ‘겨우내 얼었던 가슴들은 서로를 위로하는데’라는 구절이 있어요.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내 아픔이 네 아픔이고, 네 고통이 내 고통이라는 걸 서로 알아주는 것, 그런 게 공감이자 행복이 아닐까요? 이만큼 살아보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이고 캐롤 음악이 들려오더니 결국 성탄절이 돌아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집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가족들과 보내는 오붓한 성탄절도 충분히 따뜻하고 즐겁다. 이번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집콕’ 크리스마스를 풍성하게 채워줄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
크리스마스에 로맨스를 빼기는 아쉽다. 매해 크리스마스부터 연말연시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정통 크리스마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통한다. 2003년 처음으로 개봉한 후 2013년과 2015년, 2017년, 2019년, 2020년에 이어 올해도 12월 23일에 재개봉했다.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부부간의 사랑부터 남매간의 사랑, 영국수상과 직원의 사랑, 소설가와 가정부의 사랑,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등 저마다의 사랑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따뜻하게 그려낸다. 휴 그랜트, 리암 니슨, 콜린 퍼스, 키이라 나이틀리 등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들이 전하는 여덟 커플의 사랑이야기는 다양한 사연을 담은 만큼 모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꼽힌다.
영화에 삽입된 OST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Christmas is all around’를 시작으로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노라 존스의 ‘Turn me on’,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사랑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1998)
1998년 개봉한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멜로영화 중 손꼽히는 걸작이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 ‘정원’은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여름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을 만나게 되고, 잔잔했던 그의 일상에 햇살처럼 불쑥 찾아온 그녀는 정원의 마지막 여름을 함께한다. 뜨거운 태양의 한여름에서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시한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담담하고 잔잔하게 그려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를 제작한 허진호 감독이 가수 김광석의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허 감독은 “생활에서 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일상생활을 더 빛나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밝혔다. 영화가 그려내는 90년대의 아담하고 소박한 아날로그적인 배경은 중장년층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빽 투 더 퓨쳐 (Back To The Future, 1985)
크리스마스에 로맨스 영화가 지겹다면, SF 장르의 ‘빽 투 더 퓨쳐’를 추천한다. 시간여행과 그에 따른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이 영화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다. 1985년부터 1990년에 걸쳐 총 3편의 시리즈로 제작됐는데, 개봉 당시 전 세계 무려 9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흥행작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별 볼 일 없는 가족사를 가진 소년이 기상천외한 시간 여행을 하면서 개인의 역사를 바꾸고 뒤틀린 미래를 바로잡으려는 모험극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모든 세대가 흥미로워 할 주제 안에 역사, 연애, 가족 등의 요소를 유려한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중장년층에게는 지금은 없어진 유년의 놀이동산에 지금의 자녀와 노니는 기분을 선사한다. 당시 상상하던 미래의 패션과 지금의 패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다.
"무대에서 연기하다 죽고 싶다." 배우 이순재가 한 말이다. 이순재는 노년의 나이에도 무대 위에 올라 연기를 펼친다. 그와 같이 배우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유명해지더라도 무대를 잊지 못해 돌아온다. 최근 개막을 했거나 앞둔 작품들을 보면 연기력을 인정받은 중장년 배우들이 출연해 눈길을 끈다. 추워지는 날씨에 문화생활을 즐기기 좋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여 소개한다.
오영수, 오일남 벗고 프로이트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 역을 맡은 배우 오영수. 20대 초반 1963년 광장 극단의 단원으로 입단한 그는 연기 생활 50여 년 만에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오징어 게임' 이후 오영수의 차기작에 관한 관심이 뜨거웠는데, 그는 무대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오영수가 선택한 작품은 연극 '라스트 세션'이다.
오영수는 '라스트 세션' 기자 간담회에서 "갑자기 '오징어 게임'을 통해 많이 알려지고 나서 나의 중심이나 연기자로서의 의식 흐름이 흩어지지 않을까 염려했다"며 "광고가 들어오고 하는데, 왜 연극을 선택하냐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가 연극을 선택한 게 잘한 일인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지향해왔던 모습 그대로 가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뜻깊다"고 강조했다.
연극 '라스트 세션'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한다. 정신 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S. 루이스가 직접 만나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반한 2인극이다. 오영수와 신구는 프로이트 역에, 이상윤과 전박찬은 루이스 역에 각각 더블 캐스팅됐다.
오영수는 "대사가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고 관념적이고 논리적이어서 헤쳐나가기가 상당히 힘들다"며 "신구 선배가 이 역할을 하셨다고 해서 용기를 갖고 참여하게 됐다. 결과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라스트 세션'
일정 2022년 1월 7일 ~ 3월 6일
장소 대학로 티오엠
연출 오경택
출연 신구, 오영수, 이상윤, 전박찬
황정민, 다시 리차드3세
'믿고 보는 배우' 황정민이 2년 만에 연극 '리차드 3세'로 무대에 돌아온다. '리차드 3세'는 2018년 초연 이후 4년 만이다. 황정민은 초연 당시 10년 만의 무대 복귀작으로 '리차드 3세'를 선택해 화제를 모았으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악인 연기로 호평받았다.
'리차드 3세'는 영국의 장미 전쟁기 실존 인물 리차드 3세를 모티브로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가 탄생시킨 희곡이다.
황정민은 선천적으로 기형인 신체 결함에도 불구하고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유머 감각,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쟁 구도의 친족들과 가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악인 리차드 3세를 연기한다.
황정민은 "시대를 막론하고 명작은 보는 이들이나 만드는 이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과 에너지를 전달한다. 많은 분이 쉽게 접하고 연극과 예술을 어렵게 느끼지 않도록 양질의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리차드 3세'는 그러한 편견을 깰 가장 적합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작품 출연 이유를 밝혔다.
'리차드 3세'
일정 2022년 1월 11일 ~ 2월 13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서재형
출연 황정민, 장영남, 윤서현, 정은혜, 임강희, 박인배 등
신성우, 연출 겸 배우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은 가수 신성우는 뮤지컬 '잭 더 리퍼'의 연출을 맡은 동시에 배우로 출연도 한다. 앞서 신성우는 지난 2019년 10주년 기념 공연 당시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는 섬세한 연출로 극의 몰입도를 높여 호평을 이끌고 있다.
'잭더리퍼'는 1888년 실제 런던에서 일어난 미해결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극 중 사건을 따라가는 극 중 극 형태다. 퍼즐 조각처럼 얽힌 살인마의 존재를 파헤쳐 가는 스릴러 뮤지컬로 강력한 반전을 선사한다.
신성우는 극에서 잔혹한 살인마 '잭' 역을 맡아 연기한다. 그 외에 김법래, 강태을, 김바울이 잭 역을 연기한다.
'잭 더 리퍼'
일정 12월 3일 ~ 2022년 2월 6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공연장
연출 신성우
출연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MJ, 인성, 신성우, 김법래 등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가는 너를 지키고 있네/ 어느새 굵은 눈물 내려와 슬픈 내 마음 적셔주네/ 기억할 수 있는 너의 모든 것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너의 사랑 없인 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은데/ (…)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혼자 외로울 수밖엔 없어/(…)”
1985년 내가 겪었던 처절한 이별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당시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고 만든 노래를 임지훈에게 들려줬고, 이 노래가 그의 히트곡이 됐다. 이별을 잘하는 것은 어렵다. 어린 시절의 바보 같은 나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날카로운 이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별은 늘 난제(難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문세의 노래처럼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기도 한다.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1987년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당시의 청춘들은 이별의 말을 날카로운 비수로 비유한 노랫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사람들은 늘 수많은 이별의 슬픔과 상실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래나 이야기를 원한다. 그것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노래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하며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는 듯한 위로를 받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랑 혹은 머물고 싶은 순간들을 지키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한 상처를 앓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매듭이 필요한 이별
풀린 신발 끈을 묶듯 이별에도 매듭이 필요하다.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이창호 9단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든다”라고 했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헤어져야 할 사람과 관계를 잘 정리하고, 새로 맞이할 관계와 삶의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꼼꼼하게 매듭을 묶으면 적어도 끈 때문에 넘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 이별이라고 했나? 예기치 못한 이별일수록 아픔이 더 크다. 제대로 된 정리를 못 하고 남겨진 사람은 허탈하다.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혼란만 가중된다. ‘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었나?’, ‘그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 남는다. 결국 상대에 대한 분노 혹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뎌지거나 아예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해서는 나름의 의식이 필요하다. 후회 없는 이별이란 원만하고 균형 잡힌 마무리다. 감사함을 서로 전하고 받을 기회를 갖기 위해, 우리는 이별하기 전에 만나고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교환하고 배웅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치른다.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행복했던 순간을 서로의 일부로 각인시키는 마지막 과정을 치르는 것이다. 사진을 같이 찍어 남기고, 편지를 보내서 손에 쥐고 기억할 수 있는 소위 ‘기념품’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이별 방법이다. 만날 수 없다면 최소한 통화라도 해서 좋은 감정을 직접 전달해야 한다.
이별은 첫 시작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함께 나눴던 감정에 대해서 다시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종의 정서적 준비가 필요한 셈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해도 모자라겠지만 아낌없이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에 대한 명확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긍해야 더 좋은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별은 이별하지 못한 이별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별을 할 때도 이별의 의식이 필요하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후회하며 신년에는 달라질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잘했던 것들, 보람 있었거나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1년, 올해도 우리는 꽤 잘 살았다.
사랑의 썰물-임지훈
임지훈은 1980년대 6인조 포크 그룹 ‘김창완과 꾸러기들’ 출신의 포크가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 중 하나다. 이 노래는 내 작곡 데뷔곡이자 그의 솔로 데뷔곡이었다. 이 곡을 계기로 산울림의 김창완으로부터 가수 권유를 받아서 이듬해 동물원으로 데뷔했다. 참고로 김광석을 김창완에게 소개해준 이도 임지훈이다. 소설가 이외수가 이 앨범의 속지에 적은 글도 인상적이다. 그는 임지훈의 목소리를 “포유동물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절실한 그리움이 실린 서정시”라고도 했다. 김창완도 임지훈의 솔로 데뷔에 도움을 줬다. A면 타이틀곡 ‘기다리면 대답해주시겠어요’는 그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직장에 청춘을 바친 시니어에게 은퇴는 사회생활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새로운 출발점이다. 100세 시대의 시니어들은 인생 2막을 위해서 또 다른 직업을 찾거나, 취미나 여가활동을 즐긴다.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하기엔 부담스러운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평생교육’이다. 고령화 사회 속 평생교육의 의미와 더불어 다양한 평생교육을 소개한다.
평생교육은 생애를 걸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활동을 이른다. 평등교육법의 정의에 따르면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제외한 학력보완교육, 성인 기초·문자해득교육, 직업 능력 향상교육, 인문교양교육, 문화예술교육, 시민참여교육 등을 포함하는 모든 형태의 조직적인 교육 활동을 말한다. 학교교육의 대안으로서 주로 성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사이버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 복지관,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평생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출산율 저하와 상대적인 고령 인구 증가로 생산연령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기대수명이 대폭 늘어났다. 평균 은퇴 연령은 50대 전후지만, 실질 은퇴 연령은 70대 초반으로 차이가 크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격차가 높은 편에 속한다. 따라서 은퇴 이후에도 전직과 재취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직과 재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계발이 요구되는데, 그래서 더욱 평생교육이 필요하다.
고학력 U턴 입학생이 많은 원격대학…중도탈락 많아
대면이 어려워지면서 원격교육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사이버대, 방통대 등을 중심으로 한 원격대학은 퇴직한 고학력 중장년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방통대는 고령화와 고학력화가 뚜렷이 드러났다. 원격교육연구소에서 실시한 방통대 재학생 실태조사에 따르면 재학생 평균 연령은 45.2세이며, 최근 5년간 고졸의 비중은 8%가량 줄었으나 대학교 졸업자는 5%가량 늘었다. 실제로 대졸자들이 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U턴 입학 현상이 생겨났다.
김영철 한국원격대학협의회 사무국장은 “코로나19 이후 원격수업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고 있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연령대가 원격대학에 입학하고 있다. 원격대학은 디지털이 서툰 중장년층에는 원격 지원 등을 통해 원활한 교육을 지도하고, 일반대학과 차별화를 위해 4차 산업혁명에 맞춰서 AI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융합 전공학과를 신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이버대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원격대학의 ‘쌍두마차’다. 사이버대학교는 고등교육법에 따라 운영되는 사립 원격대학으로, 강의 수강과 시험 응시 등 모든 수업과 학사과정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실습이 요구되는 교육은 오프라인으로 진행된다. 4년제와 2년제 대학과 동등하게 졸업하면 학사 또는 전문학사를 취득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인 정규 대학교다. 대학원이 설치된 대학에서는 석사학위 취득도 가능하다. 2021년 기준 21개의 사이버대학교가 있으며, 약 13만 명이 재학 중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사이버대학교와 달리 4년제 국립 원격대학교다. 국내 최초로 원격교육을 도입했으며, 졸업하면 4년제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4개의 단과대학(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교육과학대학) 아래 총 24개 학과가 있다. 모든 강의는 온라인으로 제공하지만, 일부 과목은 출석 수업을 운영한다. 전국에 분포한 13개 지역 대학과 학습센터 및 학습관에서 대부분 수업을 했는데,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실시간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두 대학의 장점은 용이성과 가성비다.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언제든 쉽게 강의를 수강할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일반대학과 비교해 등록금이 저렴하다. 사이버대의 등록금은 일반대학 등록금의 3분의 1 수준이다. 수업료는 1학점당 6만~8만 원으로, 수강하는 학점에 따라 등록금이 달라진다. 방송통신대는 계열에 따라 다르지만 한 학기당 약 30만 원 중후반이다.
다만 중도탈락하는 학생이 많다. 대학 알리미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방통대의 중도탈락률은 22.7%이며, 사이버대는 14~23% 정도였다. 일반대학의 중도탈락률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중도탈락률이 높은 편이다. 김 국장은 “1주에 평균 8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온라인 수업이다 보니 1주만 놓쳐도 타격이 크다. 한번 놓치면 따라가기 어려워서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학점은행제
한편 중장년들은 학점과 더불어 자격증 취득이 가능한 학점은행제에도 관심이 많다. 학점은행제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제도로, 온라인 수업뿐만 아니라 자격증 취득, 전적 대학 학점 활용, 시간제등록제를 활용한 과목 이수 등을 통해 학점을 인정받으면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 학사는 전공 및 교양 학점을 포함해 140학점 이상, 전문학사는 전공 및 교양 학점을 포함해 80학점 이상(3년제는 120학점 이상)을 인정받아야 학위를 받을 수 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관계자는 “보통 학점제로 운영하지만, 학위 수여가 2월과 8월이라서 교육 훈련기관에서 사이버대의 학기제와 비슷하게 학사일정을 운영한다”라며 “원격대학은 한 기관 내에서만 들을 수 있지만, 학점은행제는 400여 개 기관에서 원하는 강의를 골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중장년들이 학점은행제를 선호하는 이유는 자격증 취득과 효율성 때문이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학점은행제 학위 취득자 사회적 경로 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50대 이상에서 학점은행제의 목적으로 자격증 취득을 꼽은 이가 34.9%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은퇴를 준비하면서 학점은행제를 선택하는 이들은 이 제도의 장점으로 용이성(34.9%)과 시간 절약(32.6%)을 꼽았다.
비용 측면에서도 정규 대학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는 시니어들이 고려해볼 만한 제도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 관계자는 “현역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은 경력 향상을 위한 학위 취득에 관심이 많고, 은퇴하신 분들은 사회복지사, 한국어 교원 등 자격증 취득으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기술과 취미로 인생 2막을 열다
학위 이외에도 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통해 재취업을 하는 중장년들도 생겨났다. 실제로 한국폴리텍대학교는 은퇴한 중장년들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직업 역량을 강화하는 맞춤형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종합기술전문학교로, 기술 중심의 실무 전문인을 양성하는 고용노동부 산하 국책 특수대학이다.
취업을 희망하는 만 40세 이상의 미취업자(학력 무관)는 이 대학의 신중년 특화과정을 통해 숙련된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시니어 헬스 케어 등 중장년들이 선호하는 학과 위주의 과정이다. 훈련비 전액 무료이고, 80% 이상 출석 시 훈련수당 및 교통비를 추가로 지급받는다.
한편 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인 삶을 성취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명지대학교 미래교육원 시니어센터는 중장년을 위한 맞춤형 재취업과 취미 수업을 제공하고 있다. 다양한 취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시니어 모델, 트로트 가수, 전통 민화 등 문화예술 분야의 수업을 마련했다. 햇병아리극단과 오페라싱어 및 뮤지컬배우 수업, 트로트 가수반 등은 무대까지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니어센터 관계자는 “시니어 모델, 트로트 가수 등 시니어들의 관심이 많은 과정을 운영 중인데, 인기가 좋다.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동시에 동년배들과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코로나 시대의 찾아가는 평생교육
코로나19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평생교육에 대한 갈증을 해결해준 사례도 등장했다. 대전 대덕구는 찾아가는 배달강좌를 통해 평생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전염병 우려가 커지면서 최소 학습 인원을 5인에서 3인으로 조정했고, 특정 장소를 방문해 도시농업, 생태해설 등 다양한 강좌를 진행 중이다.
대구 수성구 평생학습관은 평생교육 시 지켜야 할 방역수칙을 온라인 콘텐츠로 제작해 배포했다. ‘오오운동’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대처의 일환으로 평생교육 현장에서 생활방역 실천을 위한 온라인 콘텐츠 개발과 공유 사업이다. 여기서 ‘오오’는 강의 5분 전, 강의 5분 후를 의미한다. ‘오오운동’은 평생교육 현장에서의 방역을 위한 실천 내용을 담은 영상 콘텐츠로, 수성구 평생학습관이 개발하여 전국에 무료로 공유됐다. 수성구 평생학습관 관계자는 “감염병 예방을 위한 수칙을 말과 글보다는 영상으로 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제작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진로와 더불어 문화활동을 위한 평생교육은 행복한 노후를 위해 필요하다. 논문 ‘노년기 평생교육 참여와 삶의 질’에 따르면 평생교육에 참여한 노인집단은 인지 기능이 높고 우울감이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직업 진로교육에 참여할수록 인지 기능이 높았고, 취미 등 문화적 교육에 참여할수록 여가 만족도나 친구 및 지역사회 관계 만족도가 높았다.
이혜진 교육부 평생학습정책과장은 “노인은 평생교육을 통해 자기계발과 더불어 성취감을 얻기도 하지만, 나아가 평생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 앞으로의 평생교육은 공부 차원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공론의 장을 만들어주는 평생시민교육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저를 믿으세요.” 배우 이한위(61)가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그는 답이 정해져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을 날카롭게 알아봤다. 특히 이한위가 지양한 것은 어떠한 단어 혹은 수식어에 갇히고 규정되는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명품 조연’, ‘잉꼬 부부’ 같은. 그는 꾸며지고 포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한위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1983년 KBS 공채 탤런트 10기로 데뷔, 연기자로 산 지 약 40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한위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배우의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는 중후하고 단단한 사람이 됐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한위. 그가 털어놓은 인생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우 이한위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성격 개조하다, 어느새 배우
학창 시절 이한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조잘조잘 떠들면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과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한위는 중학생 때까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한위. 그의 어머니조차 “가장 통제가 쉬웠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속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던 것.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두근두근거렸죠. 크면서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점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내는 일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는 반장까지 해봤어요. 응원 같은 것도 하고, 노래도 부를 기회가 있으면 하고요.”
그렇게 성격을 개조해나간 이한위는 조선대학교 정밀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당시 인기였던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았고, 때마침 기적적으로 연극반 공고를 보게 됐다. 성격 개조의 방점을 찍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간 이한위. 그와 함께 ‘성실 한위’의 서막이 올랐다.
“연극을 하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겠구나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서 매달리다시피 한 거죠. 절대 잘할 수 없었고 잘하지 못했지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지더라고요. 주연의 기회도 찾아오고, 연출도 하고, 선배들이 만장일치로 회장도 시켜주셨죠.”
그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다는 이한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가 되어서는 때마침 KBS 공채 탤런트 공고를 보게 됐다. ‘저게 나한테 취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한위는 시험에 응시했고, 단번에 1983년 KBS 10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그렇게 연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 우연이 이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제 평생 배우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나는 KBS가 공인한, KBS에 의해 발탁된, 직업이 배우구나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철부지 생각이죠.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는 배우를 지속할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았던 때죠.”
39년 차 배우로 사는 법
이한위는 1985년 방영된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첫 영화는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다. 이후 그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학교’ 시리즈, ‘태조 왕건’, ‘가을동화’, ‘왕꽃선녀님’, ‘불멸의 이순신’, ‘쾌걸춘향’,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제빵왕 김탁구’ 등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미녀는 괴로워’, ‘울학교 이티’, ‘국가대표’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도 다양했다. 이한위는 맡는 역할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됐다. 깡패, 사채업자 같은 특색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도 있고, 직업이 의사, 교사, 시장이어도 어딘가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들면서는 점점 누군가의 아빠가 됐고, 서민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악역을 해도 사람들이 웃는다. 장점이자 단점이다”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이한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자평했다. KBS 공채 탤런트가 된 후 매일 KBS로 출근하면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열심히 하고 한결같고 건강하게 하니까 감독들이 저를 많이 써줬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라 공채 탤런트가 되면 기용해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트레이닝해주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시대에 배우가 됐다면, 4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오디션 제도가 있었다면 배우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적응이 된 거지, 내성적이에요. 근본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죠.”
이한위의 말대로 그와 작업해본 감독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위는 계절드라마 시리즈 ‘윤석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고 있고, ‘또 오해영’의 송현욱 감독하고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위는 이를 두고 자신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배우는 운이 좋아야 해요. 감독이 봤을 때 이 배우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모르듯이, 배우가 봤을 때도 이 감독이 어떤 감독이 될지 모르잖아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저를 써주신 분들도 꾸준하게 감독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저를 꾸준히 기용해주고, 낯선 감독들이 저를 또 캐스팅해줘서 계속 일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이한위는 사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2006년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엽기 성형외과 의사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무명 시절은 누구나 다 힘들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무명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로 생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맷집이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맷집과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안심이 안 되고, 시켜주는 사람도 불안하죠. 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비극 중에 소년출세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유약하기 때문에 어려서 출세하면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제가 무명 기간이 길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계를 잘 밟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가 하면 이한위는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인생작을 뽑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연기를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 그는 지난해 KBS 2TV 드라마스페셜 ‘그곳에 두고 온 라일락’을 통해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그의 인생작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해야 인생작인가? 스코어가 좋다고 인생작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드라마가 트로트 모창 가수 이야기예요. 작년에 ‘보이스트롯’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할 즈음 감독님이 단막극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저를 방송에서 보고 ‘저분이다’ 생각해서 캐스팅한 거죠. 그동안 했던 서민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인데 그것이 길게 나온 단막극이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고, 1인 2역 연기도 하고, 단막극상 수상도 하고. 좋은 경험이었고 고마운 기억인 거죠.”
기세를 몰아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어휴~ 없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곡을 부를 기회가 오면 부르고 싶단다. 즉 좋은 기회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수가 될 생각은 없는 것.
예능감이 뛰어난 그는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예능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회가 생겨 나가면 열심히 할 뿐이라고. “저는 연극, 영화, TV 다 해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넘나드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능 출연이 곤욕스러운데 나갈 필요는 없죠. 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갔으면 뭔가 하고. 나가기만 할 거면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그리고 끝까지 배우
이한위는 배우로서 연기 말고도 화제가 된 부분이 있다. 바로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다. 그는 2008년 49세의 나이에 19세 연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와 스타일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에는 우려의 반응도 많았지만, 현재 부부는 누구보다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한위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저를 따진다든지, 뒤진다든지, 캐묻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순종적이에요. 제가 뭔가를 번복하더라도 아내는 이해하는 편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면 참 좋지만 이해가 안 될 때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오해가 없고 갈등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불규칙한 것이 루틴이잖아요. 제 연기 생활 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해할 필요 없이 잘 받아준다는 거죠. 제 아내는 방송인의 아내로 베스트예요. 항상 고맙죠.”
올해는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한위.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둥이 아빠이기도 하다. 슬하에 열네 살 딸, 열두 살 딸, 열 살 아들이 있다. 한 방송에서 이한위는 2년마다 애를 낳았다면서 ‘비엔날레 스타일’이라고 농을 쳤다.
“제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애가 서른 살이 넘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늙은 아버지에 속하죠. 아이들하고 잘 살려면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대로 재밌더라고요. 올해는 식구들하고 여행도 몇 번 했는데 의미 있고 재밌었어요. 우리 애들은, 특히 열 살짜리 막내는 지나치게 건강해서 가끔 등산을 같이 가죠. 제가 부암동 쪽에 사니까 가까이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으니까 능력껏, 형편껏 가죠. ‘무조건 정상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아주 좋아해요. 늙은 아버지로서 노력하는 거죠. 고맙게도 애들은 아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루틴이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한위. 그래서 그는 당장 2022년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정해져 있는 스케줄은 이달부터 광주방송 라디오 ‘이한위의 그리운가요’의 DJ를 맡게 됐다는 점이다. 이한위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온 것처럼 뭔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한위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길어지는 촬영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약속을 잘 지키려고 한다. 배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였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한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저는 그냥 수식어가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수식어를 굳이 단다고 하면, ‘재밌는 배우’, ‘신뢰받는 배우’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명품 조연 배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품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명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만약 저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하죠. 저는 단지 배우로서 끝까지 소용되는 것, 그것이 제 바람이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정할 수 없지만, 배우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신 것처럼요.”
세상은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간다. 자고 일어나면 유행이 바뀌어 있고, 며칠 전 신나게 쓰던 신조어는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좁히려 해도 좁혀지지 않는 급격한 변화의 틈,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을 한눈에 파악하고 싶은 시니어를 위해 알다가도 모를 최신 문화를 파헤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소개한다.
올해 초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의 노래 ‘롤린’이 발매된 지 4년 만에 역주행하며 화제가 됐다. 브레이브 걸스 본인들만큼 롤린의 역주행을 기뻐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롤린 음원에 투자한 이들이다. 최근 좋아하는 노래에 투자하며 매달 저작권료 수익을 얻고, 음원에 대한 권리를 매매하며 수익을 내는 음원투자가 유행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투자해 돈을 벌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가수나 아티스트를 후원할 수 있는 일종의 덕질인 셈이다.
좋아하는 노래에 투자하며 돈 번다
음원투자 플랫폼은 ‘뮤직카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뮤직카우 내에서 음악은 ‘주’라는 분할된 단위로 거래된다. 투자자는 좋아하는 음악을 구매해 가지고 있는 지분만큼 매월 저작권료를 정산받는다. 주식을 가지고 있을 때 배당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주식 배당은 분기, 반기 등 지급 단위가 상품마다 다른 반면, 저작권료는 매달 지급된다. 투자한 곡이 유명해져 1주당 가격이 오르면 뮤직카우 내의 ‘마켓’이라는 곳에서 이용자들끼리 거래를 통해 시세차익을 낼 수도 있다.
음원 저작권 지분은 ‘옥션’에서 공개된다. 옥션은 매주 평일 낮 12시에 열려서 6일 후 오후 9시에 마감된다. 월요일 낮 12시에 공개된 곡은 일요일 오후 9시, 화요일 낮 12시에 공개된 곡은 월요일 오후 9시에 마감하는 방식이다. 마감 당일 오후 9시에 높은 가격에 입찰한 투자자에게 수량에 따라 순차적으로 낙찰 여부가 정해진다.
덕질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음원투자도 수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음원의 정보를 잘 따져봐야 한다. 살 곡을 정하기 위해선 마켓이나 옥션에서 거래되는 곡의 정보를 확인해야 한다. 곡 정보 표시란에 들어가 보면 해당 음원의 발매일, 수량, 낙찰가 같은 정보와 시세 변화 추이를 차트로 볼 수 있다. 특히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저작권에 대해서는 최근 5년간 저작권료의 정보와 최근 1년 저작권료의 출처(방송, 공연, 광고 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비스라 ‘내가 좋아하는 옛날 노래가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옥션으로 새로 공개되는 곡이라고 해서 신곡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선희, 김경호, 강수지 등 시니어들이 추억하는 유명 가수들의 명곡도 많다.
음원투자, 시니어 적합도는?
매력적인 투자처인 음악도 여느 투자처럼 유의할 점이 있다. 투자자들은 흔히 저작권에 대한 권리를 직접 사들이는 것이라 혼동하지만, 뮤직카우 설명에 따르면 투자자가 구매한 것은 저작권료 수익을 요구할 수 있는 ‘저작권료 참여 청구권’이다. 따라서 저작권료 지분을 구매했더라도 저작권자 승인 없이 저작권을 사용할 수 없다.
다른 투자처와 마찬가지로 음원투자 역시 리스크가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브레이브 걸스 등 소수의 역주행 사례만 보고 인기 없는 곡의 저작권료 지분을 구매한다면 원하는 시기에 팔기 힘들 수도 있다. 저작권을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몇 가지 위험 요소만 인지한다면 음원 투자는 시니어에게도 괜찮은 투자 수단이다. 주식과 코인, 음원 등 다양한 투자를 경험해본 40대 투자 블로거 A씨는 “저작권 시스템이 잘 형성돼 있고 저작권 협회가 저작권을 보장하는 것과 별개로 뮤직카우라는 서비스가 언제까지 존속할지 모른다는 점은 불안 요소”라고 설명했다. 주식은 한국예탁결제원에서 관리하므로 증권사가 망하더라도 보존되는 반면, 뮤직카우는 약관에서 저작권료 청구권은 보존된다고 설명하지만 한국예탁결제원만큼 공신력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저작권료 수익이 주식 배당보다 크고 주식투자보다 어렵지 않다는 점은 음원투자의 매력으로 꼽았다. 또 주식 배당은 경제 상황과 기업의 매출에 따라 바뀌지만, 경제가 좋지 않아도 사람들은 음악을 듣기 때문에 저작권료 수입은 배당보다는 일정하게 들어온다는 점도 음원투자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A씨는 “몇 가지 위험 요소를 유의하고 과하지 않은 금액으로 장기 투자한다면 시니어에게도 음원투자는 좋은 투자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이 기사는 매거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려져 혼자 남아 있네.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괜찮다 말해줄게. 다 잘 될 거라고. 넌 빛날 거라고. 넌 나에게 소중하다고. 모두 끝난 것 같은 날에 내 목소릴 기억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일상적 언어로 담담하게 위로를 건네는 이 노래는 가수 커피소년의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다. 커피소년은 201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디 가수인데, 위 곡은 그의 대표곡 중 하나다. 특히 이 노래는 삶에 지친 청춘들의 맘을 달래는 곡으로 당시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드라마와 라디오 등에서 자주 BGM으로 등장한다. 곡을 쓴 커피소년은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말이지만 가사를 통해서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힘을 드리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노래는 듣는 이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전달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의 위로나 격려보다 음악이 더 큰 위로가 된다고 한다. 가수인 나 역시 내 노래를 듣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참 고맙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선 걱정이 앞선다. 진심 어린 위로를 나눌 이가 적은 것은 아닌지,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쌓이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래에 의지하게 된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다.
물론 위로는 쉽지 않다. 좋은 일을 축하하는 것은 익숙하고 쉽지만, 나쁜 일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참 복잡하다.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나 부담을 주거나, 좋은 의도와 달리 본인이 상처받을 수도 있다. 고심해서 상대방의 상황에 적절한 위로가 되는 언행을 한다고 해도 원했던 결과를 얻기는 힘들고, 얻는다 해도 시간이 걸린다.
위로는 단순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따뜻하고 친절한 감정을 통해서 상대의 부정적 감정을 ‘완화’하는 행위다. 어떤 감정 상태로 향하는 논리적 행위가 아니라, 견딜 힘이 더 커졌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감정적 행위다. 이를 통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위로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로받은 이가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주어진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까? 위로의 첫 단계는 능동적인 청취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다시 일어서기 전에 울며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로의 첫 단계는 먼저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집중해서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고, 이해받고 있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고통의 수렁에 빠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잠시나마 마음을 기댈 어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보다 비언어적 표현과 행동이 더 중요하다. 친밀감, 따뜻함, 신뢰감 등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눈을 마주 보고 다정한 표정을 보여주며 신체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중요하다. 들어주며 상황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단계에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솔직하고 간결한 말로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한 상황을 정리해서 들려주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상대방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말하면 된다.
시니어는 갑작스러운 은퇴와 부모의 죽음, 배우자와의 사별 등 말 못 할 아픔이 많다. 삶에서 축적된 상처의 상흔도 저마다 다르고, 원하는 위로 방식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의 위로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럴 때는 섣부른 조언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곁에 머물면서 네 편이라는 연결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라는 엉거주춤한 도움보다는 가끔씩 안부와 마음의 안녕을 묻거나, 상대가 혼자 하기 힘든 일을 먼저 나서서 도와주면 좋다. 홀로 살아가는 인생에 내 편이 있다는 것, 그것만큼 든든한 일이 있을까? 매몰찬 현실에서 뜨끈한 손난로처럼 필요한 것이 위로가 아닐까?
내가 니 편이 되어줄게 - 커피소년
커피소년이란 이름은 짝사랑하던 여인이 좋아하던 아메리카노에서 모티프를 가져왔고,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 ‘커피소년’이라 작명했다. 실제로 첫 번째 곡의 제목은 ‘아메리카노에게’다. 짝사랑하던 여인이 결혼하면서 가수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KBS 2FM ‘유인나의 볼륨을 높여요’ 등 라디오와 방송에 그의 노래가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된다. 소년과 같은 목소리와 단순하지만 따뜻한 노랫말 덕분에 삶에 지친 2030세대에게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커피소년은 이제 40대 중년으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특유의 감성을 잃지 않고 활동 중이다.
현존하는 최고령의 연예인은? 바로 '국민MC' 송해다. 올해 그는 만으로 94세가 됐고,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로 활약한 지도 33년이다.
연예인, 그리고 인간으로서 송해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윤재호 감독)이 오는 18일 개봉한다. 송해와 프로듀서 이기남이 함께 집필한 동명의 에세이집도 17일 출간된다.
'국민MC'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무대 위에서는 항상 밝고 친근한 모습이지만 무대 뒤의 진짜 송해는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가족으로서 아픔을 갖고 있기 때문. 영화는 이처럼 우리가 몰랐던 송해에 대해 조명한다.
송해는 지난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송복희였다. 바닷길을 건너온 데 착안해 '바다 해(海)'자를 예명으로 썼다. 그는 현재도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송해는 "제 꿈은 제 고향 황해도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그는 6·25 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 온 뒤 창공악극단의 단원으로 유랑 극단 무대에 오르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송해는 지난 9일 진행된 언론시사회와 기자간담회에서 당시가 가장 힘들었다면서, "그러다 보니 건강을 해치게 되어서 병원에 6개월 입원했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니깐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그는 당시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남산 팔각정에서 뛰어내렸지만, 소나무 가지에 걸려서 가정으로 돌아간 순간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또 기회를 줬구나 생각이 들었고, 제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온 게 오늘날까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살아남으려고 애쓴 송해는 이후 가수, 희극인, MC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이순주 등과 함께 무대에 서며 이름을 알렸다. 교통방송 라디오의 시초가 된 동아방송 '가로수를 누비며'를 17년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또다시 아픔이 찾아왔다. 지난 1986년 송해의 아들이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 송해는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반대했었고, 이는 사무친 한이 됐다. 영화에서는 아들이 남긴 자작곡을 30년이 흐른 뒤에야 뒤고 오열하는 송해의 모습이 담겼다.
송해는 기자간담회에서 "아버지 노릇을 잘했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더라. 자격을 잃은 아버지로서 후회가 크다"며 "(아들) 사고 이후에는 한남대교를 건너가지도 못했다. 나는 죄인이었고 몹시 마음이 아프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면서 자식을 밀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족의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겠나.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잘 됐었으면 그런 화는 면하지 않았을까 해서, 솔직하게 아버지로서는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 송해는 "가족끼리 많이 대화하시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기도.
아들을 떠나 보내고 힘들 때인 1988년,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만났고, 에너지를 얻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은 여러분과 만나는 기회가 됐다"며 "대화를 통해 고통받은 분들의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송해는 '살아있는 전설', '일요일의 남자' 등 수식어도 많다. 그중에서도 그는 '영원한 오빠'라는 별명이 가장 좋다고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 "'전국노래자랑' 출연자 가운데 최연소자가 만 3세고, 최고령자가 115세 되신 할머니셨는데, 세대를 넘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해온 만큼 난 '영원한 오빠'기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