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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가 준비한 도시락
- 도시락의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게 한다. 저학년 때는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로 나누어 등교했지만 고학년(4학년 이상)은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를 했다. 지금은 어느 곳을 가도 음식점이 많아 끼니를 건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젊었을 때는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나 직장을 다녔다. 일반인이 매일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다. 시간이 촉박하거나 도시락 준비가 어려울 때를 은근히 바란 적도 있다. 어머니가 점심 값을 주시면 비싼 것은 아니어도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사는 학생들은 계란말이, 소시지, 소고기장조림 등 맛있는 반찬을 싸오지만 가난한 학생들은 김치, 장아찌 등의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맛있는 반찬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점심시간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도시락 챙기기는 직장생활을 할 때도 계속되었다. 그래도 직원들과 도시락을 펴놓고 함께하는 시간이 늘 즐거웠다. 직원들 중 한두 명씩은 도시락 싸오기가 귀찮았는지 점심시간 되면 밖에 나가 먹고 들어오거나 배달을 시켜 먹기도 했다. 그러나 배달 음식은 금세 싫어졌다. 점심시간만 되면 ‘오늘은 뭘 먹지?’ 하고 고민을 했지만 선택은 전날과 동일했다. 심지어 밖에 나가서 메뉴를 찾다가 그냥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하고 식사 후 차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시 도시락을 싸오자는 의견이 나와 다시 도시락을 부활시켰다. 귀가해서 “어머니, 내일부터는 도시락 싸주셔요” 하자 어머니는 “그동안 도시락 안 싸가서 편했는데 나는 언제나 이 신세 면하고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어보냐?” 하셨다. 결혼을 빨리 하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어머니 내일은 빈 도시락 하나 더 넣어주셔요.” 어머니는 느닷없는 아들의 요구에 궁금하셨는지 “아니, 빈 도시락은 뭘 하려고?” 하고 물었다. 필자가 “며느리가 해주는 밥 드시고 싶다고 하니 도시락에 좀 싸오려고 합니다” 하자 “야 웃기지 마라. 네 주제에 여자가 있기나 하냐?” 하셨다. 사실은 대학 축제 때 만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아가씨가 있었다. 당시 필자는 공부 열심히 했다. 과에서 1등을 하고 탄 장학금으로 함께 덕적도를 다녀왔다. 그 당시 필자의 집은 작은 신발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아가씨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고 싶다고 해서 밥할 사람 데리고 왔습니다.” “야 이 녀석아, 미리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이렇게 갑자기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 아가씨는 대담하게 미싱사에게 재봉틀을 사용하겠다 양해를 구하고 가져온 천을 가위로 잘라 5분 만에 예쁜 앞치마를 만들어 입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당황하셨고 공장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이집 큰아들이 며느릿감 데리고 왔다며?” 모두들 하던 일을 내려놓고 다들 부엌으로 몰려왔다. 그러고는 다들 한마디씩 했다. “예쁘네”, “일도 거침없이 잘하네”, “잘 데려왔네” 등등 다들 칭찬을 한마디씩 하셨다. 어머니도 싱글벙글하셨다. 그날 예비 며느리가 준비한 메뉴는 두부 된장찌개였다. 그리고 때 이른 저녁 밥상 위에 예쁜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 2018-06-2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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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 감소 문제, 이대로 괜찮을까?
- 딸애들이 결혼을 안 하고 진드기처럼 붙어서 부모와 함께 살 때부터 알아봤다. 어느덧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어 죽는 인구가 태어나는 아이들을 추월한단다. 인구는 늘 느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줄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 젊을 때 귀에 못이 박이게 듣던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씩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등의 구호가 아직 생생한데 왠지 잘 적응이 되질 않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불과 3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이 땅에는 ‘2305년이면 한국이 지구 상에서 사라진다’라느니 ‘북핵보다 무서운 게 저출산’이라느니 하며 온통 정반대의 구호와 주장들이 난무한다. 기록을 보니 정부가 앞장서서 저출산을 돌이키기 위해 각종 정책을 입안하고 무려 22조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 있단다. 도대체 이러한 냄비 죽 끓는 듯한 변덕의 이유는 무엇일까? 인구가 줄어든다는 뉴스는 사실 새로운 정보도 아니다. 옆 나라 일본뿐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미리미리 대비하고 정책을 준비하면 될 일을 닥쳐서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또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문명과 시대의 추세라면 정부가 나선다고 바뀔 일인지도 의심스럽다. 달리 생각하면 인구가 많아 자원 부족과 환경파괴로 고민하는 우리에겐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그에 반해 또 한쪽에는 넘치는 실업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년실업 문제는 이미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직업을 못 구해 결혼도 못 하는 청년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히 불임 사회가 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중소기업의 구인난이다. 중소기업에는 일할 사람이 없어 불법으로 외국인을 고용하는 실정이란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회이다.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이런 현상들이 각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연관된 문제임을 상식적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60대인 우리 세대와 요즘 20, 30대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고도성장기가 지나 신분 상승의 희망이 사라진 청년들의 좌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대기업에 집착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이 키우는 문제도 그렇다. 아이가 기본이 대여섯 명인 우리 세대에는 아이 키우는 일손을 언니 누나 등 가족 전체가 분담하여 비용도 별로 들지 않았고 사교육도 없었지만, 요즘은 아이 하나나 둘을 키우는데도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경력을 포기해야 하는 딸들의 처지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구조적으로 얽힌 문제를 어찌 개인의 힘으로 풀 수 있으리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것이 ‘소확행(小確幸)’이란다. 어차피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세상에 그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손을 늘리라는 DNA의 강력한 명령도 이제 더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인구감소도 황폐해진 자연의 체력을 회복하려는 하늘의 뜻일 수 있다. 그러니 껌딱지 같은 딸들 더는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일지도 모른다.
- 2018-06-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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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순간에 닥친 슬픈 불행
- 몸이 불편한 나를 돕기 위해 우리 집에 오는 가사 도우미 이야기다. 우리 가족은 그분을 ‘이모’라고 편히 부른다. 이모의 큰아들은 30대 후반 한의사라고 했다. 며느리는 아들과 동갑으로 아주대학 수간호사 출신이었다. 7년 전, 아들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경쟁 심한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한의원을 열었다.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며느리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갔고 경력이 단절됐다. 두 딸 아이 낳아서 어느 정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나니 며느리는 취업이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청주에는 일할 만한 큰 병원이 없었다. 간호사 면허가 아까웠던 며느리는 병원 대신 양호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2년여 피나는 노력 끝에 이모의 며느리가 올 초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도 “소 한 마리라도 잡아야 한다!”며 축하하는 마음으로 환호성 쳤다. 교사 임명장을 받자마자 며느리는 출근할 때 쓰겠다며 빨간 폭스바겐 중고차부터 샀단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차라고 했다. 호사다마라고 며느리가 출근 첫날부터 아프다고 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단순한 병이 아니었다. 폐암이었다. 본인이 간호사고 남편은 한의사인데 어떻게 증상을 모를 수가 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들 가족은 청주에 있는 한의원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병원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모는 사정상 우리 집 일을 못 하겠다고 했다. 나 또한 이모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처지다. 남편 혼자 나를 돌보기도 힘들다. 나는 이모가 편한 시간 아무 때나 와달라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새벽이건 밤이건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날 도와주었다. 며칠 전, 이모의 며느리는 결국 하늘나라로 떠났다. 발병한 지 3달 만이었다. 암이 증상 없이 오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건강에 관한 한 전문가 부부에게 이런 일이 생겼다니 믿기 어려웠다. 증상을 발견하자마자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는 얘기 또한 들어보지 못했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젊어서 암세포가 빨리 퍼진 건가? 간호사 출신 양호 선생님, 두 딸아이 엄마의 죽음에 할 말을 잃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못 느꼈다니 말이다.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인생 아닌가 싶다.
- 2018-06-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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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아이는 성장해 엄마의 미싱 소리에 반응했다-연희데코2050
- 도희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미싱을 돌렸다고 말했다. 엄마와 할머니의 심장 소리에 맞춰 미싱은 잘도 돌아갔고, 도희의 심장도 함께 박자를 맞췄을 것이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 도희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함께 미싱 페달을 밟는다. 할머니 대에서부터 시작한 수예점 가업은 50년이 돼간다. 가업을 잇는 것만으로 계승할 수 있을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특별한 계승 유전자를 바탕으로 가업을 이어받았다면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딸, 가업을 엮어가다 각자 다른 듯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행복한 가업 승계를 하는 수예 전문업체 연희데코2050(이하 연희데코)의 모녀 대표 고백연(57), 김도희(24) 씨를 만났다.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연희데코의 작업실은 재래시장 현대화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성남중앙시장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연희데코는 원래 재래시장 가업 승계의 바른 사례로 성남중앙시장을 대표하는 업체이기도 하다. 재개발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가을까지 지금의 작업실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임시 거처라지만 방문객을 고려한 상품 진열은 물론 가업 승계의 향수를 느낄 만한 전시물을 마련해 놨다. 고백연 씨의 어머니가 사용했다던 50년 된 가위와 자, 미싱 그리고 가족의 모습을 그린 캐리커처와 사진들이 작업실 입구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 정신에 창의력을 더한 엄마 고백연 씨 “옛날 재래시장 좌판에다 원단 놓고 이불 팔던 것이 시작이었어요.” 1970년 무렵 초등학교 2, 3학년이던 고백연 씨는 인천에서 성남으로 이사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 김순남(85) 씨가 성남중앙시장 좌판에서 이불 장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뭐든 꿰매고 기워 쓰던 시절, 이불만 팔아치우면 될 법도 한데 어머니는 좌판 한쪽에 미싱을 들여놓았다. 베개며 이불이며 떨어진 것을 수선해주는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그 모습을 보던 고백연 씨는 그것뿐만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새롭게 만들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임신하고 난 뒤 엄마가 계신 중앙시장으로 들어왔어요. 5평 남짓 가게에 들어와 미싱 앞에 앉았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남들의 시선이 좀 의식됐다. 없는 살림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분에 고백연 씨는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경희대학교 간호학과를 나와 간호사 생활도 10년 정도 했다. 산부인과 간호사 생활을 하고 나니 힘도 들고 미래가 없어 보였다. 고백연 씨 머리에 첫 번째로 스친 것이 원단 제작이었다. “신생아를 받는 조산원에서 일했어요. 힘들기도 하고 제2직업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했는데 딱 첫 번째로 생각났어요. 저는 그때 10년, 20년이 지나면 직접 만든 제품에 대한 수요가 반드시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한 분, 한 분 일을 해드리고 나면 손님이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우리 엄마보다 제 장사가 더 잘됐어요. 원단을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일할 때도 있었고요. 도희가 저랑 일한 게 7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장사한 거예요. 손님들이 이 아이 친구죠. 이렇게 오랜 시간 일했지만 저는 지금도 원단을 보면 설레요. 제품을 보면 죽은 애들 같아요. 창작한다는 거는 뭔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가업 승계에 대한 인식이 바뀐 딸 김도희 씨 엄마와 딸 ‘덜그럭’, ‘드르륵’ 하는 미싱 소리의 이끌림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애초에 두 사람 다 엄마가 가는 길을 따라갈 거란 생각은 없었다. 고백연 씨는 간호학과에, 딸 김도희 씨는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니 말이다. 원단 사업은 꿈에도 없었다. “남들 다 똑같이 하는 거처럼 인서울을 목표로 수능점수 맞춰서 대학에 갔는데 학교가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자퇴는 자신이 없어서 1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엄마 가게에 매일 나갔어요. 그때 상인회 회장님이 중소기업청에서 전통시장 살리기 프로젝트로 상인들을 교육하는 대학을 만들었는데 엄마 대신 저더러 한번 가보라고 권하셨어요.” 한 달 코스로 진행된 그곳에서 김도희 씨는 생각에도 없었던 일에 눈을 뜨게 됐다. 가업 승계였다. “전통시장의 역사를 이어나가려면 가업 승계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엄마와 함께 일을 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교육을 통해 인식이 바뀌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 어머니와 할머니요. 이건 정말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차별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까지 별다른 꿈이 없었는데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교육이 끝나자마자 수예점을 홍보하고 판매까지 연결할 수 있는 인터넷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해 겨울에는 온라인 판매를 위해 독자적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내 어엿한 업체 대표가 됐다. 영문학과에서 경영학과로 전과해 사업가로서의 수업도 병행 중이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 사업에 적용하면서 공부하니 학교 성적도 좋아졌다. 엄마와 딸이 따로 또 같이 성장해가다 “어머니는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면서도 어린 저를 독립적인 주체로 대해주셨어요. 대개는 자식이 부모 밑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잖아요. 어머니는 처음부터 제가 버는 것과 당신이 버는 것을 구분하셨어요.” 충분히 펼치고 성취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식이 성장한다는 것을 고백연 씨는 알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 김순남 씨가 그랬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저희 엄마랑 일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 있잖아요. 다른 집들을 봐도 가족이 같이 사업을 해서 좋은 게 있는 반면에 의견 차이도 심해요. 엄마의 기존 틀이 있다면 딸이 생각하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 엄마 고마운 것이 뭐냐면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어요. 잘하든 못하든 간에 하라고 하셨어요.” 할머니로부터 이어지는 모녀의 가업 승계 개념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조상이 물려준다는 의미보다는 하나의 독립체로 성장하다가 어떤 시점에서 엮이듯 오묘하게 닮아간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제 스타일과 딸의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개성과 장점이 다르니 서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꾸준히 각자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조화롭게 멋진 모습으로 어울리게 되는 겁니다. 원색보다는 섞여서 나오는 창조적인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 색깔을 지키고 찾아가는 것, 그게 가업 승계라고 봐요.” 지금의 연희데코 작업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백연 씨가 우리 집 셋째 ‘도순’이라고 부르는 연희데코 전시실이 있다. 오래된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1층은 작업실과 구제 및 원단 전시실, 2층에는 손님맞이 테이블과 전시실이 있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이 아니기에 문의를 해오는 고객에게만 개방하고 있다. 이 또한 미래를 내다본 고백연 씨 모녀의 장기 프로젝트 중 하나다. “제 꿈은 도순이 집을 중심으로 연희거리를 만드는 거예요. ‘한국에 성남이라는 곳에 가면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거리가 있다’라고요. 외국 사람들도 방문하는 거리를 꿈꿉니다. 이곳이 활성화되면 수선하는 사람, 원단 파는 사람, 커피 파는 사람 등이 모이게 될 거고, 간단하게 음식도 만들어서 팔고요. 여기라고 북촌마을처럼 되지 말라는 법 있어요?”
- 2018-05-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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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기부 "지식이 아닌 마음을 나누세요"
-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1위를 차지한 ’재능기부‘. 아직 망설이고 있다면, 사례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실천의 한 걸음을 내디뎌보자. ◇ 가죽공예 재능기부 전도사 윤난희 씨 결혼 후 30대부터 문화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서 가죽공예 강의를 해온 윤난희(63) 씨. 지난해부터 오산시 5070청춘드림팀 재능기부단에 참여하며 나눔의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다. 이전에는 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죽공예를 가르쳤는데, 최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해 재능을 나누는 그녀다. “어르신들께 가죽공예는 생소한 분야잖아요.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와는 수업 매뉴얼을 바꾸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재능기부 대상에 따라 강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윤 씨. 수강생의 세대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접근했을 때는 호응을 얻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이처럼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재능기부는 나눔이 아닌 자기 능력 뽐내기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강사야, 선생이야’ 이런 걸 내세우기보단 최대한 그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가가야 해요. 제 경우에는 상담 봉사도 종종 하는데, 아이들에게 가죽공예를 가르치면서 이런저런 질문도 하면서 그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해요. 내가 가죽 수업 하러 갔다고 그것만 하고 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다른 재능이 있다면 더 나눠주려 노력하고 있어요.” 윤 씨는 나눔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잘 알기에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고 싶다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여러 기관에서 재능기부 요청이 와요. 수업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결국 재료비 때문에 진행을 못 하는 경우가 많죠. 기관마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가죽공예가 다른 수업에 비해 저렴한 편은 아니니까요. 기부자도, 기관도, 수강생도 재료비에 부담 없이 가죽을 즐길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라 기관이나 재단 등에서 진행하는 수업도 좋지만, 먼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살펴보세요. 저도 성당에서 먼저 시작했답니다. 동네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등 둘러보면 재능을 나눌 곳이 얼마든지 있어요. ❷ 하나의 재능만 나누려 하지 마라 수업의 특정 주제에만 얽매이기보다는 내가 가진 또 다른 능력을 끌어와 접목해보세요.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수업에 활력이 생기고 더 많이 나누고 얻을 수 있어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❸ 대화를 많이 나눠라 수업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나 고민도 함께 이야기해보세요. 친밀도도 올라가고 더 가슴 뜨거운 재능기부가 될 거예요. ◇ 서예 재능기부 17년 차 서병규 씨 오산시에서 재능기부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눔 베테랑이 있다. 농촌진흥청 공무원 은퇴 후 17년째 오산시에서 서예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정산(靜山) 서병규 선생이다. 동네를 거닐다 보면 아이, 주부 할 것 없이 ‘선생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다양한 세대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어 노후가 즐겁다는 서 씨다. 알고 보니 그는 ‘서예’를 전공하거나,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선비였던 아버지께 어깨너머로 글 쓰는 법을 익혔고, 그때부터 죽 지필묵을 달고 지냈을 만큼 오랜 취미로 삼았던 것이 서예였다. “서예 재능기부를 하려고 전문 자격증이나 학위를 준비해본 적은 없어요. 스스로 터득한 재능을 나눠주고 있는 셈이죠. 내가 하는 일을 요즘엔 재능기부라 칭하지만, 맨 처음 서예 공부방을 열었을 때는 그런 말도 없었어요. 사실 나는 기부니 봉사니 그런 말이 부끄러워요. 수업을 하다 보면 결코 내 것만 나누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간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고, 배움을 얻는 거지요.” 서 씨가 처음 재능을 나눈 곳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오산시에 이사 온 기념으로 아파트에 글 한 폭을 써서 기증했는데, 이를 본 주민들이 서예를 가르쳐 달라 요청한 것. 그렇게 30명 남짓으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경로당과 어린이 교실까지 진행하게 됐다. 서예 수업이라 해서 붓만 슥 휘두르고 온다 생각하면 오산. 수강생들이 보고 베껴 쓸 체본을 만드는 데만 시간이 제법 걸린다. 한 장을 써서 종이를 복사하면 간편하겠지만, 하나하나 다른 문장을 직접 화선지에 써서 준비하며 공을 들인다. “수강생들을 위한 배려이지만, 자기 수양까지 겸하는 과정이죠. 나도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수업을 하면서 내 글씨도 더 좋아졌고, 공부가 많이 됐어요. 함께 성장하는 거죠.”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취미도 나눌 수 있다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갑자기 없던 능력을 키우거나 자격증 따기에 매진하지 마세요. 평범한 재능, 오래된 취미 등도 충분히 나눌 수 있으니까요. 꼭 큰 것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녜요. 작은 것도 나누면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❷ 머리 아닌 마음으로 나눠라 재능기부가 뜻깊은 시간이 되려면 머릿속 지식만 공유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도 함께 나누세요.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예요. ❸ 나눔 외에 욕심 부리지 마라 재능기부를 통해 돈, 명예, 지위 등을 얻으려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선행은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학문은 공명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제 좌우명을 나눠봅니다.
- 2018-05-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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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민해경의 평범한 매력
- 지금은 흔히 쓰이는 말인 ‘섹시 디바’. 그 말에 어울리는 가수로 민해경(본명 백미경·56)을 꼽으면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사랑은 이제 그만’, ‘미니스커트’ 등의 히트곡은 민해경 특유의 이국적인 인상과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계의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독보적인 섹시함과 고혹적인 보이스, 시원한 가창력 등은 한국 가요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탤런트였다. 최근 소극장에서 열린 ‘대학로 릴레이 콘서트’를 통해 관객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한 그녀를 만났다. 민해경이라는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인상들이 있다. 열정, 섹시한 눈빛, 파격,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 등등…. 그 인상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해경은 쎄다’. 그런데 과연 무대 뒤의 그녀 또한 정말로 그토록 ‘쎈’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사람마다 사람을 보는 시선은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떤 연예인이든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순 없으니 느끼는 대로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사람의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 민해경 올해가 데뷔 40주년. 민해경은 지난 시간을 ‘만만치 않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메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나 추억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과거가 있어 자신이 있는 것이 맞지만 현재에 더 많이 집중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미래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사는 삶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미 그런 삶을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게 마음의 평화잖아요. 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노래를 하든 안 하든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평화로워요. 돈이 없어도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듯이. 생계 때문에 노래를 해야 했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견뎌온 삶이잖아요.”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과거와 미래는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철저한 현재형 인간이다. 남편과 딸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해경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녀가 실제로는 현재형 인간이라는 데서 깨져버린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차가운 도시 여자 같고 자유로울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정작 그녀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잠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의 삶을 철저하게 즐기는 소위 ‘집순이’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할 일이 그렇게 많냐고. “많죠. 일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하루 동안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요. TV는 거의 안 보고 대신 영화를 많이 보죠. 이런 패턴이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며 가족만을 기다리는 생활. 외롭지 않을까? “전 외로움을 잘 못 느껴요. 혼자 있어도 집안일 하느라 너무 바빠요. 완전 잘 놀아요.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면 이상하다고 하는데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집에 들어올 사람만 잘 들어오면 되고요. 바로 남편이랑 딸이죠.(웃음) 그 외에는 제가 사람에게 원래 관심이 없어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사모님처럼 자기에 관한 일 빼고 모든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내가 관심 가진다고 그 사람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바쁘고.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얘기나 뒷담화를 싫어해요. 좀 무심하죠.” 집에서 혼자 놀기를 즐기는 원조 디바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색하거나 꾸며진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은근한 매력이었다. ‘독함’이 아닌 ‘일관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녀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민해경 같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충실히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스스로를 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 자신은 과거와 똑같은데 과거에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가 사람들과 좀 더 소통을 하고 있고 그런 저를 사람들이 알아주게 된 거라고 봐요.” 그동안 사람들은 민해경에 대해 단절된 모습만 보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가족은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쎄고 건방지고 교류 없고…. 제가 많이 들은 얘기들이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여자, 지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이 제 내면에 있긴 하겠죠.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고요.” 진정 하고 싶은 꿈은 뒤로 하고 내키지 않는 노래로 가정을 지켜야 했던 삶. 그러면서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는 연예계에서 정상에 올라 10여 년 동안 거듭 그 자리를 지켜냈다. 언뜻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은 일, 그게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독함’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받는 오해들은 그 독함을 위한 일관성에서 비롯된 바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개의치 않아요. 제 욕을 해도 제게 들리지만 않게 하면 돼요.(웃음)” 노래는 곧 나 자신 지난 3월 민해경은 새로운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치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서 쉽지는 않았던 공연 준비였다. 그러나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되는 상황을 빨리 접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거의 하루 만에 제가 연출을 다 했죠. 아무래도 대중가수가 히트곡만 들려주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관객들은 민해경이란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멋이나 맛,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어린 시절까지 아우르는 자신의 인생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것이었다. 가수는 무대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저는 그대로 꾸밈없이 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다는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울고 감동받았다고 말씀을 주셨어요. 저 여자가 쎄 보여도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구나 느끼신 거겠죠. 무대에서는 그게 다 보인대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좋아해서 고마웠어요.” 다소 빤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지점에서 그녀에게 노래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많이 들은 질문이에요. 돈이다, 생명이다 얘기 많이 하잖아요. 얼마 전에 생각해봤는데, ‘노래는 나와 같구나. 그래서 그 노래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는 곧 저예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숙성된 느낌으로 부르게 돼요. 한 번 부를 때보다는 열 번, 열 번 부를 때보다는 백 번 부를 때가 점점 나와 같아지는 느낌이죠.”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점점 자신과 노래가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민해경이 지금 가수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궁금했다. “저는 본분이 가수여서 계속 머릿속에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것을 해야지, 그걸 해야지’ 하지는 않아요. 그런 시기는 지났으니까요.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주어졌을 때 그걸 잃지 않고 잘 유지하고 싶은 거죠. 그게 베테랑이라고 봐요.” 그녀는 최근 신곡 ‘We Love You’를 발표했다. ‘바람 바람 바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후 녹색지대의 앨범을 제작한, 성공한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김범룡이 작곡한 노래다. “처음 노래는 원래 작곡가 본인이 부르려고 했던 남자 노래였어요. 그런데 제가 받아서 잘 풀어나가게 됐죠. 순수하게 제가 선택해서 가사를 만든 노래인데, 제 마음이 이 노래의 가사와 같아요. 비유법도 은유법도 없는 순수한 가사로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노래로 만들고 싶었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여느 평범한 여자처럼 그녀도 남편을 만난 것을 정말 잘한 일로 꼽았고 딸을 낳아 키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은 항상 마지막 관문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너무 감사해요. 지금 결혼한 지 22년이 됐는데, 그 전에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뒤돌아볼 수 없었던 것을 결혼 후에 조금씩 알게 됐어요.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일 또한 돈을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죠.” 열정, 화려함, 사랑… 장미 같은 그녀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사람. 민해경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족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수로서의 삶이다. 수십 년을 최고의 가수로 살았던 사람이 가수가 어렵다는 말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무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무대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고 하는데, 안 돼요. 그래서 힘든 거죠. 무대는 서면 설수록 어려워요. 지금 더 많이 느껴요. 옛날엔 못 느꼈죠. 완벽한 무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안 그래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즐기지 못하는 거 같아요. 물론 막상 무대에 서면 괜찮지만 서기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그것은 그녀가 가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무대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그녀가 더욱 진화하는 모습을 좀 더 오래도록 확인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무대를 즐기게 된 가수로서의 민해경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 모습은 장미’, 민해경의 노래처럼 역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 모습은 장미 같았다.
- 2018-05-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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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브로 숙성하는 와인, 바야흐로 꽃피는 가족愛
- 충북 영동 심천면. 물이 깊다[深川] 하여 이름 붙은 이곳에 뿌리 깊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 150년이 넘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위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새 둥지. 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은은히 퍼지는 술 익는 내음. 이 고즈넉한 풍경과 꼭 닮은 ‘시나브로 와이너리’ 소믈리에 가족을 만나봤다. “아가, 와인 한 모금 마셔볼래?” 이른 아침, 시아버지 이근용(60) 씨가 며느리 박영광(28) 씨에게 와인을 건넨다. 그러곤 와인의 향과 풍미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숭늉이라면 또 모를까. 아침부터 와인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구부간(舅婦間) 모습에 시어머니 이성옥(58) 씨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평범하지 않은 시부모와 며느리의 일상은 이들 모두가 소믈리에이기에 가능한 풍경이다. 여기에 한 명 더, 아들 이병욱(33) 씨 역시 소믈리에다. 국내에서는 첫 번째로 가족 모두가 소믈리에 자격을 갖고 있다는 이들의 와인사랑은 2007년, 이근용 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부터 숙성되기 시작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남편이 귀농을 하겠다며 덜컥 회사를 그만뒀어요. 어느 날 영동에 땅을 사더니 이름도 ‘불휘농장’이라 지었더라고요. 불휘가 ‘뿌리’의 고어인데, 자기 이름에 ‘근(根)’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지었다나.(웃음) 그렇게 한동안은 대전 집과 영동을 오가면서 농사를 하다가 2009년에 지금 집터에 정착했어요. 그때 뒷마당에 있는 느티나무가 참 마음에 들었죠. 이웃 어르신 권유로 포도를 재배했는데, 수확물은 품질이 괜찮았어요. 근데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죠. 그러던 차에 영동군에서 와인산업 특구 조성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는지 이번엔 남편이 와인 양조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레드 와인에 심혈을 기울였던 반면, 청포도로 화이트와인을 선보인 것이 차별화가 됐던 것. 천천히 음미하고, 서서히 와인에 빠져든다는 의미로 ‘시나브로’라는 브랜드네임을 달았다. 또 보금자리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의 모습을 본따 와인 레이블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불휘농장표 시나브로 와인은 각종 와인 품평회에서 대상, 금상의 영예를 안으며 토종 와인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시나브로 새댁, 토종 와인 전도사 되다 한창 와인 사업에 물이 오를 무렵, 아들 병욱 씨는 당시 여자 친구였던 영광 씨를 와이너리에 초대했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근용 씨 내외와 영광 씨는 그 이듬해 가족이 됐다. ‘시나브로’라는 와인 콘셉트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속전속결 이뤄진 셈. 결혼과 더불어 아들 내외는 부모님의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하겠다는 결심도 들려줬다. 와인과는 동떨어진 일을 해왔던 두 사람, 특히 서울 토박이였던 영광 씨가 귀농을 결심한 까닭이 궁금했다. “서울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당시에 한창 사업이 바빴는데 시부모님 두 분이 감당하시기에 버거우실 것 같더라고요. 가업도 돕고 전원생활의 여유를 경험해보고 싶어 귀농을 결심하게 됐죠.” 가업에 뛰어들며 영광 씨와 남편 병욱 씨는 소믈리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아버지 근용 씨, 2016년 어머니 성옥 씨에 이어 2017년 아들 내외까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 이로써 소믈리에 패밀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재는 온 가족이 영동 유원대학교 와인발효·식음료서비스학과에 입학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가업과 학업을 위해 서울과 영동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탓에 신혼인데도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아들 부부. 인터뷰를 당일에도 가능한 한 네 사람이 모이길 바랐으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아쉽게도 아들 병욱 씨가 함께하지 못했다. 가업이니 늘 가족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느라 이 또한 쉽지 않은 상황. 포도 농사부터 와인 판매까지 일련의 과정을 단 네 사람이 해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은 어떻게 나뉘어 있을까? “아버님은 포도 재배와 양조, 어머님은 체험 프로그램 운영과 판매, 저와 남편은 와이너리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요. 그런데 가족끼리 하는 사업이다 보니 선 긋듯 일하기보다는 모두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전에 직장에 다닐 때와 가장 다른 점은, 일을 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웃음)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여서 그런 것 같아요.” 가족 모두가 임원, 회의는 식사시간에 가족이 사업을 함께하면 공과 사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 장점이 크지만 자칫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며 차츰차츰 균형을 잡아나갈 계획이라고. 서로 일적으로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바로 호칭 아닐까? 각자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남편이 대표, 아들은 실장, 며느리는 이사예요. 저는 작년까지 홍보 팀장이었는데 애들이 오고 나서 홍보이사로 승진했어요.(웃음) 기업으로 따지면 가족 모두가 임원인 셈이죠.” 일과 관련한 회의는 따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주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는 편. 부모 자식 간 일상 대화에서도 마찰이 있기 마련인데, 사업을 함께하는 네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지사. 일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서운한 마음이 생긴다는 근용 씨다. “나랑 아내는 그동안 해온 것이 있으니 뭔가 변화를 주더라도 천천히 했으면 하는데, 애들은 또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신들이 연구하고 판단한 거를 과감하게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런 점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해요. 멀리서 보면 별일 아닌데도, 가족이니까 더 가감 없이 얘기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서로 서운한 말을 할 때도 있고요. 다 잘해보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갈등이죠. 그래도 역시 가족이다 보니 금세 마음 풀고 웃게 돼요.” 새로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음은 필수. 가족 구성원이 60대, 50대, 30대, 20대인 덕분에 각자 세대의 대표주자가 되어 의견을 나누고 대중적인 와인 맛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근용 씨가 영광 씨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와인 맛을 조절한 덕분에 이전보다 젊은 여성 고객의 주문도 늘어났다고. 일 때문에 와인을 달고 살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평소 와인을 즐기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된다는 이들이다. 글로리아 와인, 그 이후 인터뷰 당시, 시나브로 와인들 좀 자랑해주시라 했더니 근용 씨 내외는 너 나 할 거 없이 ‘글로리아’ 와인을 꺼내 들었다. 사랑스러운 핑크빛이 도는 레드 와인인데, 캠벨과 아로니아로 맛을 냈다. 그런데 시나브로 특유의 느티나무 레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와인 잔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시어머니 성옥 씨는 와인 자랑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며느리 자랑으로 넘어갔다. “가장 최근에 탄생시킨 와인이에요. 우리 며느리 이름(영광)을 따서 ‘글로리아’라고 지었어요. 이 로고 디자인은 며늘아기가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창가에 있는 보자기 상자들 보이죠? 다 며느리가 배워서 꾸며놓은 것들이에요. 참 예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창가마다 줄줄이 전통 보자기로 감싼 상자들이 진열돼 있었다. 토종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인 만큼 제품 포장도 한국식으로 시도하는 중이란다. 아직 해외 와인에 비해 국내 와인이 저평가받는 것이 안타깝다며 적극 토종 와인 홍보에 나서겠다는 영광 씨. 열정적인 며느리의 모습에 반한 근용 씨 내외는 장차 시나브로 와이너리를 아들 부부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막중한 임무라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 패기 넘치는 새댁은 글로리아 와인처럼 핑크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개척 단계에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도, 변화시킬 것도 많죠. 뭔가를 시도해보고, 좋든 나쁘든 결과를 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는 중입니다. 멀리 보고 하나하나 시나브로 정착해나가야죠. 아마 저와 남편이 시부모님 나이가 됐을 때쯤엔 시나브로 와인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시나브로 브랜드 와인 중 가족 이름을 담은 와인은 ‘글로리아’가 처음이다. 앞으로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시며 후손들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하자, 맞장구를 치며 웃음꽃이 피는 세 사람. ‘소원 나무’라 별칭을 붙인 정원의 느티나무처럼, 오랜 세월 사랑받는 장수기업으로 이름 남길 소망한다.
- 2018-05-0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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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전·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21
- 노후의 삶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장수리스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준비 없이 맞이하는 긴 노년은 괴로움만 더할 뿐이다. 따라서 나이에 맞는 ‘생애자산관리’가 뒤따라야 하며, 은퇴 직전인 50대뿐만 아니라 30~40대부터 노후필요자산에 대한 적정성 점검과 자산 극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은퇴 이후에는 노후 기간을 세분화하여 자산의 적정한 인출과 소득의 보완에 신경 써야 한다. 금융업계 전문가들이 꼽은 시니어가 알아야 할 재무 설계 키워드를 은퇴 전·후로 나눠 정리해봤다. 도움말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PART1. 은퇴 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5565'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 5년부터 퇴직한 뒤 5년에 해당하는 55세부터 65세 사이의 시기를 말한다. 직장생활을 잘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로 매우 분주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인간관계 중심이 회사에서 가정으로 바뀌므로 회사형 인간에서 가정형 인간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울러 노후자금 관리도 돈을 모으는 ‘적립’에서 ‘인출’ 중심으로 변화한다. #2 임금피크 ≠ 인생피크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서 55세 전후로 임금피크를 실시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근무연한이 늘어나면 임금도 상승하는 연공서열방식 임금제도와 달리,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특정 연령부터 임금이 줄어든다. 임금이 줄어들면 덩달아 퇴직급여도 줄기 때문에 대응을 잘해야 한다. 기업에 따라 임금피크에 해당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사전은퇴 교육을 시행하는 곳도 있으니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노후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임금피크 전후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인생 후반전이 달라진다. 자칫 이 시기를 무의미하게 보내면 임금피크가 인생피크가 될 수도 있다. #3 이중부양 은퇴를 앞둔 50대는 자녀부양과 부모봉양이라는 두 가지 짐을 짊어진 경우가 많다. 그나마 현재 50대는 경제가 고도성장할 때 직장에 다니며 부를 축적하고 노후준비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부모 세대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노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고도성장의 열기가 식으면서 그들의 자녀 세대 또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를 꾸려가기 힘든 상황이다. 부모봉양과 자녀부양이라는 이중의 짐이 50대 어깨 위에 얹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노후준비까지 하려면 연금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공적연금과 퇴직연금을 통해 기초생활비를 만들고, 여기에 개인연금과 주택연금을 더해 기본 생활비를 마련하자.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퇴직금을 지켜라 우리나라 남성 근로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6.7년으로 OECD 주요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평균 근속연수가 짧으면 이직 때마다 노후자금의 주요 축인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찾아 다른 용도로 활용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후자금 축적에 큰 위협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이직 시 IRP(개인형 퇴직연금, 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계좌에 이관된 퇴직금은 절대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55세 이후 5년 이상 연금으로 받는 것이 좋다. 이 경우, 퇴직금을 노후자금의 목적대로 보존할 수 있으며 퇴직소득세 감면 효과(30%)까지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자. #5 자녀 리스크 회피 자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부모 세대는 오랜 기간 자녀 리스크에 노출된다. 사교육비부터 결혼자금 지원까지, 생애 지출의 상당 부분이 자녀를 위해 쓰인다. 즉 소중한 자녀가 노후준비의 걸림돌이 되는 것. 2016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5년 내 자녀를 출가시킨 부모의 3분의 1은 결혼자금 지원을 위해 노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산(부채, 퇴직금, 개인연금 등)을 활용했다.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지원보다는 자녀에게 부담 주지 않는 독립적인 노후를 보내는 것이 결국 자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임을 명심하자. #6 연금라이프 점검 평균수명 증가로 은퇴기가 길어지면서 필요한 노후생활 자금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소득이 사라지는 은퇴기에도 삶의 질 하락 없이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생활비’를 확보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필수생활비는 살아있는 한 꾸준한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으로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적인 국민연금 이외에 종신연금처럼 죽을 때까지 소득흐름을 보장하는 연금상품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지 확인해, 필수생활비를 연금으로 충당하는 연금라이프를 누릴 수 있을지 점검해보자.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집, 소유 말고 사용하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산을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선진국의 경우 가계의 부동산 비중이 약 50%이지만, 우리나라는 70%가 넘는다. 집은 소유하는 개념이 아닌 사용하는 개념으로 바꿔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집을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면 무리하게 투자해 집을 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억짜리 집을 사기 위해 3억을 대출받는 것보다, 5억짜리 집에 살면서 2억을 연금보장형 상품 등으로 넣어두는 편이 낫다. 10억짜리 집을 사면 이자를 내야 하지만, 5억짜리 집에 살면 이자를 받는 셈인데, 이는 매우 큰 차이다. 여기서 나오는 이자를 노후자산에 톡톡히 활용할 수 있다. #8 자산관리 분배 원칙 '5533' 5: 총자산의 50%를 금융자산으로! 가계의 총자산 내에서 26% 수준에 불과한 금융자산의 비중을 큰 폭으로 늘리자. 노후에 필요한 것은 정기적인 현금흐름이고, 이를 만들어내는 금융자산을 최소 50%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이 좋다. 5: 금융자산의 50%를 투자형 자산으로! 저금리 시대를 맞아 금리연동형의 안전형 상품으로는 자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 40%를 훌쩍 넘는 예금자산을 줄이고, 20% 수준에 불과한 투자형 자산의 비중을 늘려보자. 3: 투자형 자산의 30% 이상은 해외자산으로! 투자형 자산에 투자할 때는 해외자산의 비중을 늘려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증시는 전 세계 주식시장의 2%도 안 된다. 국내 종목에만 집중투자하기보다는 글로벌 분산투자의 개념에서 해외 종목을 30% 이상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 3: 연금자산은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100세 시대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자산은 결국 연금자산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야 8% 수준에 불과한 연금자산을 최소 총자산의 30%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장기보장자산 마련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한 재무 설계는, 늘어난 노년기에 경제적으로 독립된 노후생활을 고려하는 상황에서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장기보장자산 마련을 위해서는 일정 소득을 제공하는 노후자금기본형성 계획과 인플레이션을 따라가면서 ‘인플레이션+α’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자산 확대 계획이 필요하다. 노후자금기본형성을 위해 개인형 IRP, 연금보험 등에 대한 이슈가 중요하며, 노후자금자산 확대를 위해 일정 부분 위험을 감수하는 자산관리 전략의 혼용이 필요하다. *경제활동기 이후 노후생활기 증가: 1985년 13.4년, 2016년 26.8세. 단순히 ‘노후자산관리’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엔 은퇴 이후, 즉 #10 '1세대가구형' 생존전략 가구에 대한 개념 변화와 기대수명의 연장, 부모에 대한 부양의식의 약화, 에이징인플레이스(Aging in Place)의 개념 등으로 은퇴 후 1인가구나 부부가구 증가가 예상된다. 전통적 방식의 2세대 이상 가구 유형(부모-자녀 세대)은 감소할 것이다. 특히 재무 설계의 목적을 설정할 때 1인 또는 부부가구 중심의 노후자금준비 목적이 이뤄지도록 반영해야 한다. 이는 1세대가구 생존을 위한 노후자금준비 목표에 대한 재점검과 자산관리 재조정으로 이어진다. * 부양의식의 변화: 부모부양 부담에 대해 가족의 책임 2002년 70.7%, 2016년 30.6%. * Aging in Place: 연령, 소득, 능력 수준에 관계없이 자신이 살던 집과 공동체에서 안전하고 자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구. PART2. 은퇴 후 시니어 재무 설계 키워드 ◇ By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김동엽 상무·은퇴교육센터장 #1 일병식재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수명이 늘어났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일본은 75세 이상 고령자 중 30% 이상이 와병 상태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나이가 들면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늘어난 수명을 병상에서 보내지 않으려면 건강관리에 매진해야 한다. 보통은 아무런 질병이 없을 때 건강을 돌본다는 의미로 ‘무병식재(無病息災)’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때는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별다른 준비를 안 하고 무리하게 된다. 건강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는 은퇴하고 나서 체력이 떨어지고 가벼운 질병을 하나 정도 갖게 됐을 때다. 이때부터라도 건강관리에 힘쓰면 장수할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일병식재(一病息災)’라 한다. #2 평생월급 은퇴 후 삶의 시기를 크게 3단계로 나눠 정년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평생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야 한다. 1단계는 정년퇴직 이후부터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을 수령할 때까지다. 월급이 끊긴 뒤 공적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소득공백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퇴직금과 모아둔 금융자산으로 매달 얼마의 소득을 낼 수 있는지 점검해본다. 2단계는 공적연금수령 기간이다. 부부가 받는 공적연금으로 기본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부족하다면 주택연금을 받는 방법도 고려한다. 3단계는 독거생활 기간이다. 본인이 먼저 사망했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 소득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본다. 이런 점검을 통해 퇴직 후 부부가 사망할 때까지 소득이 얼마나 확보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며 평생소득을 만들어가야 한다. #3 딴 지붕 한 가족 자녀들도 나이 든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부모도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방금 끓인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떨어져 살면서, 프라이버시는 지키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부모·자식 관계가 일상화되고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지붕 아래 살면서 보고 싶을 때만 보는 ‘딴 지붕 한 가족’이 보편화되고 있다. ◇ By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조명기 수석연구원 #4 '100세' 보장 민간 건강보험으로 탄탄한 의료비 보장을 해놓은 이가 많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연장돼 100세 시대가 눈앞에 다가오며 과거에 해둔 보장이 불충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비 보장이 80세까지만 되어 있는 경우다. 특히 고령화 후기로 접어들면 간병비도 늘어난다. 이에 100세까지 보장받을 수 있는 의료비와 간병비 마련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5 '4% 인출' 법칙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그동안 저축한 은퇴자산에서 자금을 찾아 써야 하는 은퇴자가 많아지고 있다. 은퇴자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한정된 은퇴자산에서 매년 생활비로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을 알려주는 법칙이 있다. 일명 ‘4% 법칙’이라고 하는데, 은퇴 직전 자산의 4%를 기준으로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액을 더해 인출하면 평생토록 소득이 고갈될 우려가 없다는 법칙이다. 인출하고 남은 은퇴자산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소 달라지겠지만 은퇴자의 생활비 인출 범위를 대략적으로 가늠하는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다. #6 버킷 전략 시니어도 젊은 시절에는 자산운용에 할애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퇴 이후엔 투자 실패 시 만회할 시간이 부족해 적극적 자산관리를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자산관리를 소홀히 했다가는 보유한 자산이 생전에 고갈되는 장수 리스크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은퇴자산을 인출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 달리 관리하는 이른바 ‘버킷 전략’을 활용할 수 있다. 올해 당장 써야 할 자금은 현금성 자산으로, 앞으로 10년 이내에 꺼내 쓸 자금은 각각의 인출 시기까지 운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유한다. 나머지 자산은 향후 10년 이상 운용 가능하게 되어 더 적극적인 투자관리를 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버킷 전략이라 하는데 최근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 By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박 진 소장 #7 장수리스크, ‘일’로 대비하자 오래 살게 되는 상황에 대한 리스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반드시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관계와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일’은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전 세계 1위이고, 이 중 47%, 즉 둘 중 한 명은 절대빈곤을 겪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재능기부 등의 일이라도 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가계에 도움이 된다면 금상첨화다. #8 발품을 팔아야 한다 대부분 금융기관에서는 매월 시장의 동향과 좋은 투자 상품 등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한다. 퇴직 후 시간이 여유로운 시니어는 이런 프로그램을 직접 찾아다니며 들어보고, 자신이 거래하고 있는 금융기관의 담당 직원에게 관심을 가져볼 만한 상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고 정보를 얻어 활용해야 한다. 이때 투자 결정을 할 때는 한 사람에게 들은 정보만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정보를 같은 기관의 다른 직원이나 타 기관 직원에게 반드시 크로스체크하자.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투자 종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담당 직원에게 “왜 올랐나요?”, “왜 떨어졌죠?” 등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음에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By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골든라이프연구센터 황원경 센터장 #9 합리적 인출전략 기대수명 연장으로 늘어난 노후생활기, 에이징인플레이스의 확산 등에 따른 새로운 영역의 필요노후자금 등이 발생하면서 합리적 노후자금 인출전략 수립이 중요해졌다. 새로운 자산 증가나 소득 창출이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보유한 자산으로 여생을 살아가기 위한 인출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인출전략 수립에 앞서 보유자산 진단, 예상되는 자산 유출 진단, 노후 라이프스타일 결정 등의 과제가 선행되어야 인출전략 수립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10 은퇴 후 기간 세분화 100세 시대라 할 정도로 기대수명이 증가하고, 노후생활기도 늘어나고 있다. 시니어 재무 설계에 대한 접근이 바뀌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지금까지는 은퇴 후 기간을 하나의 통으로 보고 재무 설계를 추진해왔으나, 이제는 개인의 자산 현황, 활동성 정도, 인생계획 등이 반영된 기간 세분화가 필요하다. 재무 설계는 이러한 분석 아래 시도해야 하며, 아울러 노후자금 인출전략을 세울 때도 주요 자료로 참고해야 한다. #11 현금 가능한 고정수입 유동화 은퇴는 고정수입 창출에 큰 변화를 발생시킨다. 근로자의 경우 근로소득이, 사업자의 경우 사업소득이 발생하다가, 은퇴 후에는 초기 연금이나 금융자산의 이자소득 등으로 수입이 창출된다. 이후에는 금융자산, 부동산자산 순으로 유동화하여 수입을 창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가구주 연령 60세 이상 가구에서 부동산자산 비중은 80%에 이른다(2016년 3월 통계청 기준). 이를 노후자금으로 유동화하는 과정은 대부분의 가구가 거치게 될 것이다. 자산 감소와 유동화 시기 점검으로 재무 설계 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 2018-03-1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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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주의와 부조리 연극의 이상야릇한 만남, 동양레퍼토리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
- 연극이나 문학을 조금만 공부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이름, 안톤 체호프(Анто́н Па́влович Че́хов, 1860∼1904)와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이들은 사실주의극과 부조리극의 대가이다. 생몰연도를 보아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데 산책을 하다니. 연극 제목이 희한하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가 배역으로 등장하는 창작극? 각자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작가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연극의 제목이 궁금해 공연장 문을 두드렸다. 물과 기름 같은 연극, 해설로 만나다 한국 연극의 메카 대학로. 매일 밤 150여 개의 극장에서는 뮤지컬을 비롯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그 화려한 틈새에서 연극 ‘체홉과 이오네스코의 산책’이 공연됐다. 체호프와 이오네스코라니. 고리타분한 교과서 속 인물을 누가 소환했을까. 원로 배우 권성덕이 고문으로 있는 동양레퍼토리다. 신구세대 연극인이 조화를 이룬 극단으로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와 ‘두 영웅’ 등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는 묵직한 연극으로 관객을 만나왔다.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해설을 통해 고전 연극을 만나보자는 취지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했다. 체호프의 각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해설자가 무대에 나와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이다. ‘청혼’과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중견 연극인의 해설을 곁들여 무대에 올렸다. 고전의 딱딱함과 무게를 살짝 걷어내고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연극으로 말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이 연극을 관객들은 보고 웃어댄다. 관객의 마음으로 풀어준 해설이 친밀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청혼’, 고집불통 노처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안톤 체호프의 연극은 매년 크고 작은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4대 장막인 ‘갈매기’나 ‘벚꽃동산’, ‘세자매’와 ‘바냐아저씨’는 풍월로라도 듣지 않았을까?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안톤 체호프. 그의 직업은 사실 의사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의과대학 시절 문학잡지에 단편과 수필을 기고해 돈을 벌어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신인작가로 이미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장막을 쓰기 전 체호프는 단편 희극을 쓰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청혼’(1889)이다. ‘청혼’은 지병이 있는 데다 뚱뚱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젊은 지주 로모프가 이웃의 지주 추푸코프의 노처녀 딸인 나탈리아에게 청혼을 하러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추푸코프는 로모프가 혹시나 돈을 꾸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경계하지만 딸에게 청혼을 하러 왔다는 말에 기뻐한다. 나탈리아 또한 결혼할 생각에 기뻐서 로모프를 만나지만 토지사유권 주장을 하면서 언쟁을 한다. 이 와중에 지병이 있던 로모프는 쓰러졌다 극적으로 되살아나지만 또 다른 언쟁에 부딪히며 해피엔딩인지 아닌지 모를 결말로 끝을 맺는다. ‘청혼’은 동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젊은 배우들과 중견 연극배우의 조합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려줬다. 특히 25세 노처녀를 연기한 60대 연기자 장연익의 소녀 같은 연기가 압권. 영화나 드라마가 해결할 수 없는 연극 최고의 판타지는 ‘배역’은 있어도 배우 나이의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말대잔치 흠뻑 즐겨라 ‘대머리 여가수’ 안톤 체호프의 연극이 사실적인 상황과 이야기 전개로 이어졌다면, 뒤이어 공연된 이오네스코의 초기작 ‘대머리 여가수’(1950)는 배우의 등장부터 파격적이다. 남녀 배역 모두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 여자 배역의 남자 배우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붙이고 진하게 화장을 했다. 남자 배역은 수염 없이 깔끔하게 등장해 소극적인 자세로 사건에 개입한다. ‘대머리 여가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 전개와 인물 구성, 역할 파괴로 왜 이런 연극을 만들었나 하는 의문을 갖도록 한다. ‘대머리 여가수’를 번역한 순천향대학교의 오세곤 교수는 극의 이해를 도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오네스코가 처음 극작을 하면서 집착했던 문제는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합리적이라 믿고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는 달랐다.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 부조리극의 태동과 의미를 알면 쉽게 이해된다. 부조리극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공연된 극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겪은 이들이 표출해낸 예술이다. 전쟁 이후 세상은 부조리 그 자체. 극 속에서도 이야기는 물처럼 흐르지 않고 아무 말이 튀어나와도 이해가 강요된다. 논리의 허무 속에서 부조리극이라는 결과물을 얻어낸 것. 부조리극의 대표작인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또한 여전히 매력적인 희곡으로 손꼽히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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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쨍한 사이다 맛 동치미
- 추운 겨울 아침 며느리가 전화했다. 친정엄마가 동치미를 보내셨는데 어머님께도 갖다 드리라며 한 통을 더 주셨다 한다. 말만 들어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사부인의 김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어서 맛보게 될 동치미에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졌다. 사돈댁이 사는 곳은 충청도인데 마당에서 익힌 동치미라 했다. 며느리가 들고 온 동치미에는 탱글탱글한 무가 알차게 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국자 떠 국물을 마셔보았다. 달콤 시원하며 쨍한 맛이 났다. 이 맛은 예전 정릉의 마당 넓은 집에 살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정릉의 집은 파란 잔디가 깔린 마당이 꽤 넓었다. 잔디밭 주위로는 해마다 새빨간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곤 했다. 한쪽으론 커다란 라일락나무가 있어 향기에 취했고 안방 창문 앞 등나무엔 은방울처럼 예쁜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보기에 좋았다. 마당이 넓었던 정릉 집은 꽃이 필 때도 아름다웠지만, 눈 내리는 한겨울 풍경도 못지않게 좋았다.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마당 한쪽에 구덩이를 파고 서너 개의 큰 장독을 묻던 일도 즐거운 추억 중 하나다. 한겨울이면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집에 찾아오신 소사 아저씨와 함께 커다란 장독을 땅에 묻었다. 장독을 묻은 후엔 솜씨 좋은 소사 아저씨가 지푸라기를 꼬아 멋진 장독 덮개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소사 아저씨는 잔디밭 주변의 장미나무에도 겨울옷을 입혔다. 칭칭 새끼줄로 꼰 짚옷을 두른 장미나무는 이듬해까지 따뜻하게 겨울을 견뎠다. 예전에는 김장을 하면 한 접 두 접씩 했다. 한 접이 배추 100포기이니 4등분 한 배추 400개가 산처럼 쌓였다. 요즘에는 4~5포기 정도만 하지만 그땐 다들 찬거리가 부족할 때라 겨울 반양식으로 김장을 했다. 물론 딸들도 돕기는 했지만 대부분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왁자지껄 웃음보따리를 풀어놓으며 김장을 도와주셨다. 엄마는 김장보다 아주머니들께 대접할 음식 준비로 바쁘셨다. 따끈한 쇠고기뭇국과 김칫소와 함께 먹을 돼지고기를 삶아냈다. 뽀얗게 김이 서린 주방에서 아주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어울려 먹던 밥상은 늘 즐겁고 풍성했다. 그렇게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땅에 묻은 장독으로 차곡차곡 들어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있게 익었다. 어느 눈 내린 추운 겨울날, 바가지를 들고 나가 짚 덮개를 벗기고 장독 뚜껑을 열어 떠낸, 살얼음이 사르르 뜬 동치미는 쨍한 사이다 맛이 났다. 어쩌면 그렇게 달고 시원한지… 땅속에서 서서히 익힌 게 아니면 어떤 김치도 그런 맛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마당 넓은 집에서 사는 동안은 매년 겨울 맛있는 김치와 동치미 맛을 볼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살기 편한 아파트로 이사하신 후부터는 한 번도 그 맛을 본 적이 없어 아쉽다. 오늘 며느리의 친정에서 보내온 동치미가 옛 맛을 떠오르게 했다. 아삭한 무와 국물을 맛보며 옛 추억을 떠올려봤다. 사부인께 감사 전화를 드려야겠다.
- 2018-03-08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