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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의 연대기’, 생리는 선택 아닌 자연현상
- 영화 포스터가 밝고 환하다. 언뜻 알록달록 꽃들인 줄 알았는데, 예쁜 면 생리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리컵이라는 낯선 물건들도 함께 놓여 있었다.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포스터부터 대놓고 영화의 주제가 ‘생리’임을 드러내는 영화 ‘피의 연대기’.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의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에 대한 내용이다. 50플러스서부캠퍼스에서 영화 상영과 함께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 덕분에 영화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어 매력적이라 느꼈다. 그렇다면 ‘피의 연대기’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영화의 출연과 연출을 맡은 김보람 감독은 “여자들이 생리를 처리해 온 역사뿐만 아니라 내 몸에서 일어난 개인이 겪은 생리의 역사, 그리고 생리를 하고 있는 여자들의 연대 모두를 의미한다”라며 야무진 답변을 들려줬다. 우리 사회 담론에서 밀려나 있던 여자들의 은밀한 이야기 ‘생리’. 저소득층 여학생의 깔창 생리대 문제가 사회에 툭 튀어나오고부터 정치권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며, 이제는 완경을 맞은 나의 생리 역사도 떠올랐다. 초경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와 언니가 있었지만 딱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쑥스럽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생리 주기는 정확한 편이었고, 생리통도 심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더운 여름에 생리를 하면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생리통으로 하얗게 얼굴이 변하며 고생하던 친구들도 떠오른다. 영화는 이러한 내용을 무겁지 않게 톡톡 건드리며 쉽고 자연스레 몰입하게 만든다. 여자들 몸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 놓고 보니 또 자연스럽다. 처음 사용법을 알게 된 생리컵이라는 이상한 물건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에 대해 남자들도 관심을 가져야 “남자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면 좋겠어요. 어떤가요?” 감독과의 시간에 내가 던진 질문이다. 이에 김보람 감독은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게다가 주제는 생리, 남자들이 싫어할 만한 3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간혹 여자친구 손에 끌려오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남성 관객이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라며 웃으며 답한다. 여자마다 다양한 생리 증후군이 있다. 나는 여자들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을 남자들이 좀 알았으면 한다. 여성은 그들의 친구, 동료, 애인, 아내, 이웃이 아니던가? 이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이해하고 함께 생활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첫걸음은 없으리라. 여성들도 남자들이 저절로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도움과 이해를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 나는 생리 직전 우울감과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이런 호르몬의 장난을 알고 있던 남편은 긴 연애와 결혼 생활 동안 매달 유난히 까칠해지는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었다. 생리대는 필수품, 뉴욕시 공짜 생리대 법안 통과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영화에도 나오듯 2016년 뉴욕시는 공립학교·교도소·노숙자 보호소 등 공공화장실에 생리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영화 제작진은 이 장면을 직접 촬영했다. “모든 여성의 존엄과 보건을 위한 중대한 한 걸음”이라는 뉴욕시의 슬로건이 뭉클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건강이 좋지 않으면 몸의 주기성이 깨져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리의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지리라. 우리나라도 저소득층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를 지급하는 지자체가 많아지고 있어 반갑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각의 변화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재직할 때 일이다. 보건 선생님은 생리대를 준비해오지 못해 쑥스러워하는 여자친구의 손을 끌고 보건실에 온 남학생들이 가끔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OO을 건드리지 마! 오늘이 그날이래~”하는 남학생도 있었다. 장난처럼 오가는 말에 친구를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자연스런 몸의 현상 중 하나로 이야기되는 일이 좋아 보였다. ‘피의 연대기’ 같은 여자의 몸, 생리에 대한 다큐 영화가 제작되고, 함께 토론해보는 것도 진전의 신호이다. 여혐, 남혐 사회를 뛰어넘어 남녀가 살아가는 동반자로 서로의 특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평화로운 삶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나저나, 영화가 적자라 고민이 많다던 감독의 말이 머리에 맴돈다···.
- 2018-08-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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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사명이 귀촌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조연환 前 산림청장’
- 처음에는 귀촌 목적이 아니었다. 꽃향기, 흙냄새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텃밭 하나 장만할 생각이었다. 부부는 사랑에 빠지듯 덜컥 첫눈에 반해버린 땅과 마주했다. 부부는 신이 나서 매일 밤낮없이 찾아가 땅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응답이라도 하듯 땅은 씨앗을 감싸 안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온몸으로 품었다. 텃밭은 꽤 큰 대지가 됐고, 이후 정자와 살 만한 집도 마련됐다. 나무와 숲을 가꾸는 것이 평생 직업이던 조연환 前 산림청장의 귀촌 인생은 그렇게 준비됐다. 13년 차 귀촌인 조연환 전 산림청장 이야기 충남 금산군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귀촌 하우스에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와 압력밥솥으로 갓 지은 밥 냄새가 진동했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살짝 출출했던 탓에 당장 밥상 앞에 앉아 한 숟가락 뜨고 싶었다. 밥상 위는 말 그대로 시골밥상. 비름나물 무침, 엄나무 장아찌. 깻잎볶음, 호박 무침, 김치, 전날에 담갔다는 오이소박이, 굴비 구이가 상 한가득이었다. 완두콩을 넣어 지은 밥과 반찬으로 식사를 뚝딱 끝내고 숭늉을 마신 뒤, 조 전 청장이 손수 탄 봉지커피까지 들이키면 점심코스가 마무리된다. 녹우정(조 전 청장 집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정자 이름. 나무와 숲을 가꾸는 사람들의 우정이 깃든 정자라는 뜻이다) 정식이라 불러도 될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진 찍기를 부부에게 권했다. 귀촌생활에 있어 텃밭은 기본 아닌가. 텃밭이라기에 따라 내려간 곳은 그냥 큰 밭이었다. 고구마, 팥, 깻잎 없는 거 없이 다 있었다. 이 큰 밭의 고랑을 만들고 구획을 나눠 정리 정돈하는 일은 이 집 머슴인 조 전 청장의 몫이다. 총 관리감독은 마님인 정점순 여사가 한다. 텃밭이 아니라 농번기 농사꾼 부부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귀촌 13년 차란 말에는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지 13년 됐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금산에 땅을 장만하고 귀촌을 준비한 것은 18년 전이다. 산림청이 발족된 1967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최말단 9급 산림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조 전 청장. 2004년 제25대 산림청장으로 취임해 파란만장한 1년 6개월을 보내고 2006년 자리에서 물러나 귀촌했다. 산림청장직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농협경제연구소장과 생명의숲국민운동 상임공동대표, 천리포수목원장 등을 잇달아 역임하며 산림 전문가로서 끊임없이 일해왔다. 2011년부터는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을 맡아 귀·산촌 희망자에게 실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모색하며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퇴임을 언제 했나 싶을 정도로 늘 바쁜 현역 산림 운동가가 바로 조 전 청장이다. “처음에 이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싶었는데 90명 정원에 120명이 몰렸습니다. 프로그램을 10기까지 진행했는데 졸업생을 980명이나 배출했습니다. 500명은 임업인이고 나머지는 아카데미에 와서 산을 알게 된 사람들이죠. 정확하게 통계를 낸 건 아니지만 제가 알기로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귀촌했습니다. 굉장히 성공한 것이죠.” 올해 6월 출간한 ‘산림청장의 귀촌일기’도 조 전 청장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요구에 부합해 서두르게 됐다. 책에는 조 전 청장이 SNS에 꼼꼼하게 적어 올렸던 개인 경험과 함께 똑똑한 귀촌 설계, 귀·산촌 사례자 이야기 등을 실었다.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다. “아내 나이가 칠십이 넘으면서 무릎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더 이상 농사 못 짓고 서울로 가면 책을 못 낼 것 같더라고요.(웃음) 우리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동안 책이 나오면 좋잖아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산림청 공무원이었던 조 전 정창은 어리다고 무시당할까봐 나이를 두 살 높여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괜찮은 동갑내기(?) 처자가 있다면서 소개시켜준 이가 바로 정점순 여사다. 첫눈에 반해 연애하다 1년 반 만에 결혼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연상 연하 커플이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일하지 말라고 의사가 말합니다. 이 사람을 살살 꾀어 2년 전인가 여길 팔자고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 사람한테 우울증 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밭일 못한다고 포기할 때까지 그냥 살려고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조 전 청장이 산림 전문가로 알려졌지만 알고 보면 정점순 여사도 고수 중에 고수다. 조 전 청장이 천리포수목원장을 할 때 숲해설가로 활약할 만큼 식물 생태에 관심이 많다. 남들 못 키워내는 나무며 화초며 정 여사 손에 들어오면 죽어가던 것들도 되살아났다. 너른 텃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고왔던 손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만 나면 밭에 앉아 풀 뽑고, 복숭아 봉지를 싸고 식물을 바라보고 보살피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조 전 청장이 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이 되기까지 정 여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조가 한몫했다는 것을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농촌에 은퇴자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귀농이 아닙니다. 귀산이나 귀농은 아카데미 교육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조금 생기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골이 좋다고 하시는 분은 대환영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한국산림아카데미 최고경영자과정을 듣기 위해 모이는 대부분이 도시에서 성공한 시니어 혹은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조 전 청장은 산에 관심을 갖고 터를 잡고 들어가 길을 내고 가꾸기에 관심을 갖는 인구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을 가꾸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야 합니다. 상추 심어봤더니 또 싹이 나고 그거 뜯어서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 나눠도 줘보고 말이죠. 골프장 가는 거보다 훨씬 재밌다며 골프 끊은 분도 주위에 있습니다. 산을 알아가는 삶이 생긴 것이죠.” 조 전 청장이 정말 퇴임한 산림청장이 맞나 싶을 정도다. 여전히 사회 전반에서 이뤄지는 일에 관여를 하며 쉬지 않고 귀·산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산림청장’이라는 문구를 치면 유독 조 전 청장의 행보가 눈에 띈다. 1년 6개월 짧고 굵었던 임기와 퇴임 후 여섯 번 바뀐 산림청장 자리이지만 여전히 조 전 청장이 회자된다. 그는 끝까지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퇴직한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촌의 인적 네트워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2005년 8월 21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 부부와 조연환 전 산림청장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 입성 이후 딱히 산책할 곳이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이 산길 정비가 되지 않은 북악산을 자주 오르내렸다. 이후 산림청에 기별이 와서 청와대 뒤 숲을 가꾸고 꽃을 심었다고. 그것이 고마워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부른 것이다. “‘청장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 제가 뒷산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다음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도, 그다음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도 농촌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들에게 내가 멱 감고 고기 잡고 놀던 시냇물을 복원해주고 싶다, 나는 퇴임하면 시골로 내려가겠다’며 계속 그 말씀을 하셨어요.” 도시에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농촌에 사람이 없으니 도시에서 성공한 은퇴자들이 자리를 잡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미래 그림이 될 것이라고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다. 그리고 퇴임 후 시골로 내려가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조 전 청장에게 길고 긴 시간을 들여 했던 말들을 이행하고자 대통령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했다. “책에도 썼지만 대통령이 나한테 지시를 한 거잖아요. 내가 시골에 내려와 살아야 하는 이유, 가장 큰 명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어 귀촌을 택했던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을 역임하시고도 봉하마을에 내려가 주민들과 밤새 토론하고 행정 관계자를 설득해가며 마을을 가꾸셨는데, 저는 산림청장을 했다고 해서 귀촌해 편하게 살고 있는 거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함께 만나러 갔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퇴임 후 부여로 내려가 휴휴정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지었다. 조 전 청장이 금산에 갈 때 같이 입주했을지도 모를 좋은 친구 중 하나가 유홍준 전 청장이다. 하지만 각자 맡은 바 소임이 달라 한 명은 산이 가까운 금산에, 한 명은 역사가 가까운 부여에 둥지를 틀었다. “유 전 청장도 부여에 땅을 잘 마련했습니다. 저도 한 번 가봤는데 잘 꾸며놓았더라고요.” 이 두 사람은 재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제안해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를 150년 후 문화재용으로 쓰자고 협약했다. 살면서 봤던 아름다운 협약으로 두고두고 기억돼 뜬금없지만 적어본다. 나무건 문화재건 한 세기는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 미래 세대를 위한 든든한 보험(?)을 어른들이 들어준 것 아닌가. 공직자 퇴임 이후 정계에 입문해 지금까지 쌓아온 명망을 순식간에 까먹는 이도 있고,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을 보이는 이도 종종 보곤 했다. 푸른 산새에서 만난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의미 있는 사명과 서슴없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가 귀감이 됐다.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마음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점점 더 푸르러지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2018-08-1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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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가 중요해요”
- 50여 년 전 가족을 따라 우연히 전라도 나주에 왔다가 한국 학자로 살게 된 베르너 사세(Werner Sasse·78) 전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월인천강지곡, 농가월령가, 동국세시기 등은 그의 이름에 따라붙는 한국 고대 언어 연구를 위한 목록들이다.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아예 한국으로 들어와 전라도에 둥지를 틀었다. 2010년에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와 황혼 재혼을 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 운명에 이끌리듯 일어난 일들이다.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는데 현생에 독일로 유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전생의 육체가 기억해놓은 장면들이 있다면 현생에서 이끌림으로 다가왔으리라. 한옥과 한복을 좋아하고 남도의 홍어와 젓갈의 깊은 맛까지 알아버린 푸른 눈의 남자. 이렇게라도 주석을 달아야, 독일에 있을 때도 매일 아침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6년. 독일의 원조로 전남 나주에 비료공장이 만들어졌을 때다. 당시 독일 기술자였던 장인이 “한국에 기술학교를 지으려고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들어왔다가 이 나라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25세였던 독일 청년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일 열심히 하고, 정 넘치고, 잘 놀고, 흥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4년간 전라도와 서울에서 살다가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은 나라가 여전히 궁금했다. 결국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30세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들어가 서독인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보훔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퇴직 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로 지냈다. 50여 년 한국 문화를 연구하며 보낸 그는, 이제 자신의 고향은 독일이 아니라 전라도라고 말한다. 다시 찾은 사랑, 그리고 황혼 재혼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던 날, 그가 사는 전남 담양으로 출발했다. 비가 사납게 몰아치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0여 킬로미터쯤 더 가서야 그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에 젖은 나리꽃이 마중하듯 반갑게 피어 있었지만 80이 가까운 두 사람이 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산속이었다. 갑자기 몸이라도 아프면 어쩌려고 이렇게 깊은 곳에서 사시느냐 했다. 그러자 홍안의 미소년 같은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그런 걸 왜 미리 걱정해요? 시니어의 관심은 오로지 건강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는 친구랑 산에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이고 나 힘들어 죽겠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봐. 온몸이 다 아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바보야, 나도 아파. 그런데 그건 나이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연습 없이 산에 올라가서 아픈 거야. 젊은 사람도 연습 없이 산에 오르면 힘들어’ 하고 말해줬어요. 제가 보기엔 나이가 아니라 엄살이 문제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이 산속에서 어떻게 하냐고요? 일주일만 버텨보셔요. 저절로 치유됩니다.” 그는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으면서 생겨난 불안감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내린다. 자신은 ‘지금, 여기’ 일만 생각해도 하루가 너무 바쁘다 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요약해보니 그렇다. 누가 뭐라 하든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낯선 나라에 매료돼 고려방언이니 가사문학이니 한국인들도 쉽지 않은 공부에 골몰하더니, 70세에는 뒤늦은 재혼으로 지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남들은 졸혼이니, 휴혼이니 하면서 무거운 결혼생활 끝내고 혼자 한번 살아보리라 희망할 때 그는 한 여자와 새살림을 차린 것이다. 배우자는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을 추며 살아온 전위무용가 홍신자 씨. 그래서 그의 결혼은 더욱 화제가 됐다.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지인 전시회 때 처음 보고 몇 차례 우연히 더 만나게 됐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렸습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보자 했지요.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니, 그 나이에 결혼을?’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을 테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데 정년이 있나요? 그런 생각에 얽매여 주저할 시간에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홍 선생과 같이 산 지 벌써 8년이나 됐네요. 그녀와 저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충돌하는 일이 없어요. 각자 하는 일도 있어 존중해주고 도와줄 일 있으면 힘을 보태면서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젊을 때 결혼했다면 이런저런 욕심이 생겨 이거 하면 안 되고 저거 하라며 상대에게 잔소릴 해댔겠죠. 나이가 드니 상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하게 되더군요. 집안일도 남녀 구별 안 해요. 누구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자유롭게요.” 사람들은 더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관심과 간섭 속에 상대를 가두곤 한다. 삶의 상상력을 펼쳐야 할 때는 이런 욕구들에 맥없이 멱살 잡혀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베르너 사세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점들은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움, 즉 영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 들어 결혼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해학’이라 덧붙인다. 깊은 산속 빗소리와 함께 들은 최고의 문장이었다. 민낯이 예쁜 나라, 한국 “가끔 한국의 어떤 음식이 맛있냐, 한국의 무엇에 매력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답이 하나일 수 없어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술을 예로 들면, 한국 음식과 곁들일 때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좋지요. 육체노동을 할 때도 물론 막걸리가 어울리고요. 그러나 목이 마를 때는 맥주가 맛있고, 특별히 분위기를 내야 하는 날은 와인이 낫지요. 한국 음식, 한국의 매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랑 먹고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그 맛과 매력이 다 다르지 않겠어요?” 그는 전통 문화란 힘들게 보존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고 즐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것을 시대에 맞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는 데서 진정한 전통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제가 개량한복 입고 독일 가면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디자인이 예쁜 옷 샀냐고 묻습니다. 저는 양복보다 한복이 훨씬 편해서 즐겨 입어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정작 한복을 잘 입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외국에 나가서는 아름다운 옷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건 앞뒤가 좀 안 맞는 행동으로 보여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는데 설득력도 없어 보이고요. 그렇다면 늘 입고 다니는 양복은 과연 편해서 입는 걸까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도 그는 한국인의 역사관을 냉정한 시각으로 언급했다. “한국 사람들은 ‘오천년 역사’,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오천년이면 신석기시대입니다. 한국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이죠. 외국인들에게 이런 역사관 공감될까요? 저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봐요.” 가차 없는 논리의 학자다운 지적이다. 고유 문화에만 집착해 사실을 회피하는 자세는 건강한 역사의식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보기에는 화장하지 않은 민낯의 한국이 더 아름답다. 그걸 봐버린 죄(?)로 한국인 못지않은 긍지로 이 땅의 문화를 연구하며 반평생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그는 요즘 수묵화에 빠져 있다. 한국을 소개할 책 번역도 틈틈이 하고 있지만 붓을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얼마 전에는 광주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서울에서의 전시도 준비 중이다. “수묵화는 20년 전부터 그렸어요. 한지를 알게 된 뒤부터죠. 서양화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지만 동양화는 달라요. 내 의지가 아닌, 붓이 그리는 대로 따라가게 돼요. 동양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붓과, 나와, 한지의 대화예요.” 이제 풍류의 멋까지 섭렵해보겠다는 태세다. 전력을 다해, 더러는 문득 생각난 듯 ‘지금, 여기’의 삶을 살며.
- 2018-08-10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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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계치
- 111년 만에 서울이 낮 온도 39.6℃를 찍어 온통 난리가 났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심리적 마지노선인 임계점을 뚫은 탓이다. 시내는 한낮 태양열에 아스팔트가 달아오르고 습도와 어울려 숨을 턱턱 막고 있었다. 110세 된 사람이 없으니 모두가 처음 겪는 더위임이 틀림없다. 샤워로 몸을 식히려 해도 미지근한 물로 바뀌어 돌아서면 다시 더웠다. 누진제 때문에 에어컨이 있어도 계속 틀어놓을 수도 없고 적당적당히 틀며 버티고 있었다. 간밤엔 열대야로 밤에 두 번씩이나 깨는 바람에 잠도 설쳤다. 선풍기에 부채까지 동원해 찜통더위와 씨름을 하고 있지만, 일기예보에 의하면 당분간 비 소식은 없는 채 이 더위가 며칠간 계속될 거란 소식이다. 숨을 몰아쉬고 더위와 싸우고 있는 그 찰나에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 뜬 것을 보니 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P란 친구의 전화였다. 내가 불러 식사 한번 한 이후 최근 몇 년 동안 통 연락도 없던 친구였다. 궁금하기도 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별일은 없고?” 오랜만에 잠시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 그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큰일 하나 해결해서 시원하다”면서, 사실 그 친구와 나는 맏이로 동갑내기 딸을 하나씩 갖고 있다. 서른네 살로 적지 않은 나이라 부모로서는 큰 걱정거리였다. 그 집 딸은 해외에서 좋은데 취직하여 직장을 잡고 있고, 우리 딸은 국내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에 다녀 결혼하지 않은 것 말고는 나무랄 데 없는 처지였다. 그런 딸애가 약혼했고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축하할 일이다. 그래서 “정말 축하한다. 잘 되었다”고 덕담을 건넸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윗감이 하버드대학교를 나왔는데 그 부모가 둘 다 하버드대학교 교수고, 몇 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며 자신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된다"는 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몇 개 국어를 하는가 보다”라며 그칠 줄을 모른다. 3월에 선을 봤고 양부모들이 왔는데 그렇게 키가 크고 자신들과는 키 차이가 나고 8월에 약혼식을 하고 결혼은 내년에 하기로 했다는 둥, 냉면을 한 그릇 해야 하는 데 언제 냉면 한 그릇 먹자는 둥. 오랜만에 전화해 냉면 한 그릇 하고 싶은데 오늘이 어떤지 아니면 언제가 좋은지 날짜를 잡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확실한 공약만 남발하고 있었다. 모처럼 연락이 와 오늘 냉면 한 그릇 먹자고 하면 열 일 제쳐놓고 나갈 준비가 되었는데 한 그릇 먹자는 얘기는 없고 공수표만 남발할 뿐이다. 마치 주체할 수 없는 자랑과 과시를 지금까지 용케 참았다가 임자를 만났다는 듯. 마침 다른 곳에서 전화가 걸려와 잠시 전화를 받는 사이에도 전화기 저쪽 일방적인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친구야 잠시 내가 전화 좀 받고, 아니 다음에 다시 통화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양해를 구하고야 겨우 통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괜히 그런 전화는 안 받은 이만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전화했으면 차나 한잔 하자라던 지, 아니면 간단히 소식을 전하고 상대편의 안부를 묻던지. 그것도 아니면 “미안하다. 친구야 우리 애가 먼저 결혼하게 돼서. 네 딸은 훌륭하니 조금 있으면 아마 좋은 소식 있을 거야” 하면서 말이라도 한마디 하던지. 아주 쉬운 건데 이렇게 어렵게 풀고 있다. 아무리 좋아 죽겠는 일이라도 잠시만 처지 바꿔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오는 일이다. 소통이란 건 특별한 게 아니다. 한 번 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밖은 더욱 콘크리트 열기로 타오르고 이날 내가 느끼는 체감온도는 111년 만에 최고라는 39.6℃를 훌쩍 뛰어넘은 것 같았다.
- 2018-08-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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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대 납부자 급증’ 국민연금 더 받는 4가지 방법
- 50~60대에 국민연금에 다시 가입해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소득 상위층이 집중된 수도권을 중심으로 국민연금 재테크 바람이 불고 있다. A(58·여) 씨는 최근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조회해보고 전략을 새롭게 짰다. 젊은 시절 직장생활 10여 년 동안 부은 국민연금의 노령연금 예상액은 월 50만 원 남짓했다. 마흔 무렵 퇴직 후 20년 가까이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연금 ‘납부 예외’를 신청해 보험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국민연금 수령자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해 실버취업 후 그동안 내지 못했던 예외기간의 보험료 약 2000만 원을 추후납부했다. 그는 “젊어서는 국민연금보험료 납부가 세금처럼 느껴져 피하고 싶었는데, 막상 연금 수령시기가 다가오니 진작 내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만 62세가 되면 받게 될 예상 연금액이 월 90만 원 수준으로 2배 가까이 올랐다. 국민연금은 금융회사에 가입하는 개인연금과 달리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연금액을 올려주기 때문에 실질 수익률이 높다. 2017년 기준 국민연금 평균 수익비는 최저 1.6에서 최고 2.9로 나타났다. 가입자가 낸 보험료에 비해 적어도 1.6배 이상 더 많은 연금으로 돌려받는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은 보험료가 같더라도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액이 많아지기 때문에 추납·임의계속 가입 등으로 가입기간을 늘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국민연금 ‘더’ 받는 4가지 제도 활용법을 살펴본다. 1. 소득 없던 기간 → 추납 국민연금 추후납부(이하 추납)는 국민연금에 가입한 후 실직이나 폐업, 가정주부로 경력단절 등의 사유로 국민연금 가입이 제외된 기간 동안 납부하지 않았던 국민연금 보험료를 추후에 납부하는 것을 이른다. 지난해 추납 신청자 연령을 살펴보면, 60세 이상은 7만1234명(51.5%)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대 5만386명(36.4%) 순이었다. 반면 30대(3%)와 40대(8.6%)는 현저히 비율이 낮았다. 추납이 연금받을 시기가 가까워진 50~60대를 중심으로 노후준비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역별로는 서울(24.6%), 경기(24%), 부산(7.5%) 등 수도권에 신청자가 집중됐으며, 특히 서울 강남구, 송파구 등 부유층 거주 지역의 신청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추납 건수는 2013년 2만9984건에서 2017년 13만8424건으로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올해는 지난 5월 말까지 이미 5만2568명이 신청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추납 보험료는 일시에 전액을 납부하거나 금액이 큰 경우 최대 60개월까지 분납이 가능하다. 2. 찾아갔던 일시금 → 반납 전업주부 B(57) 씨는 1988년 1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1년 후 반환일시금을 받았다. 이후 결혼해 전업주부로 지내다 2015년 2월에 회사에 다시 취업했다. 2017년 10월에 예전에 찾아간 반환일시금을 반납, 만 63세에 월 26만8000원의 연금 수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B 씨는 이후 추납을 신청해 연금액을 더 늘렸다. 1999년 이전에는 가입자 자격상실 후 1년이 경과하면 반환일시금 청구가 가능했다. 반환일시금 반납은 과거 반환일시금을 받은 자가 다시 취업 등으로 국민연금 가입자가 된 경우 신청이 가능하다. 당시 수령했던 반환일시금에 이자를 더해 반납하면 가입기간이 복원돼 연금액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반납금은 전액을 일시에 납부하거나 금액이 클 경우 최대 24회까지 나눠 낼 수 있다. 3. 납부 예외자·만 60세 이후 → 임의가입·임의계속가입 40대 전업주부 C 씨는 예전에 7년간 국민연금보험료를 납부한 뒤 결혼 후 경력단절로 국민연금을 중단했다. 그러던 중 국민연금 의무가입자가 아닌 전업주부도 국민연금을 납부할 수 있는 제도를 알게 됐다. C 씨는 현재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 가입기간(10년)이 부족해 노후에 일시금 수령만 가능하지만, 임의가입 신청을 통해 약 월 9만 원 정도를 납부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 만 60세까지 292개월에 총 2800만 원을 납부하면, 만 65세부터 월 예상연금액 약 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 기대수명인 85세까지 연금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납부한 보험료 대비 4배가 넘는 총 1억2000만 원을 연금으로 돌려받는 셈이다. 임의가입은 18세 이상 60세 미만 국민 중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이 아닌 전업주부나 학생 등이 본인의 선택에 따라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제도다. 소위 ‘강남 아줌마’로 불리는 고소득층이 노후준비 수단으로 선호하는 방식이다. 임의가입자 수는 지난 2012년 말 20만7890명에서 2017년 말 32만7723명으로 크게 늘었다. 만 60세 이후라면 임의계속가입을 선택할 수 있다. 임의가입제도와 마찬가지로 가입기간이 부족해 노령연금을 받을 수 없을 때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임의계속가입자 수는 지난 3월 말 기준 38만 명을 넘어섰다. 4. 연금 수령시기인데 소득 많다면 → 연기연금 내년부터 국민연금을 받게 될 D 씨는 아직 소득이 있어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늦출 생각이다. 연기연금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연기할 경우 연금액을 높여주는 제도다. 1개월마다 연금액이 0.6%(1년 7.2%)씩 늘어나고, 최대 5년까지 늦추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최대 5년늦추면 노령연금을 36%나 더 받을 수 있게 된다. 특히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많은 경우라면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늦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에 대해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노령연금 수급자가 소득이 많은 경우 5년간 ‘감액’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연기연금 제도를 활용해 노령연금 수급시기를 뒤로 늦춰 감액을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 더욱이 연기가산율(36%)과 물가상승률만큼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노령연금은 연금 수령자가 사망할 때까지 지급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노령연금 수급시기를 늦췄는데 일찍 사망할 경우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도 있다.
- 2018-08-0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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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두 사랑
- 자두는 대부분의 과일이 그렇듯이 비타민 C가 많고 특히 비타민 A가 많아 눈 건강에도 좋다. 그 외에도 변비 해소, 갈증 해소, 항산화 물질도 많다. 자두의 빨간 껍질에 하얀 분가루 같은 것이 가리고 있으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육즙이 많아 한 입 베어 물면 단물이 흠뻑 나온다. 자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일단 가장 흔한 자두는 6월 중순에 나오는 ‘대석’이다. 처음에는 알이 작은 것부터 출하되는데 며칠 단위로 크기가 점점 더 커진다. 대석 다음으로는 ‘후무사’가 나온다. 7월 중순에 나오며 대석보다 알이 2배 정도 크다. 값도 비싸다. 육질이 대석보다 단단하지만, 맛도 좋다. 그 외에 ‘피자두’, ‘수박 자두’, ‘추희’ 등 여러 종류의 품종이 있다. 크기도 다르고 출하 시기도 다르다. 당연히 맛도 다르다. 요즘은 저장 기술이 발달하여서 한 여름 내내 자두를 맛볼 수 있다. 필자가 갓 결혼하고 직장에서 전세 버스로 만리포로 첫 여름 여행을 갈 때의 일이다. 용산우체국 앞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고 필자는 다른 준비로 바빴다. 아내에게 시장에서 과일을 좀 사 오라고 했더니 참외만 사 온 것이다. 참외는 먹기도 나쁘고 맛도 별로라서 자두를 사와야겠다며 용산시장으로 가서 자두를 있는 대로 모두 샀다. 당시만 해도 냉장 시설이 시원치 않았고 자두도 끝물이라 신선도가 신통치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집결 장소에 와보니 버스가 이미 떠난 것이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어 연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감했다. 일단 택시가 더 빠를 거라며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달려갔으나 허탕이었다. 버스도 논스톱이라 이미 지나간 모양이었다. 톨게이트에는 대중교통을 탈 수도 없어 부랴부랴 남의 차를 얻어 타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만리포까지 가는 고속버스가 없어 만리포와 가장 가까운 홍성까지 갔다. 홍성에서는 에어컨도 없는 시외버스를 타고 만리포까지 가야 했다. 만원 버스라서 앉지도 못하고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한 손에는 자두 봉지를 들고 차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니 자두가 다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버릴 수는 없었다. 만리포에서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자두를 꺼내보니 이리저리 부대끼다가 껍질이 다 까진 상태로 죽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자두 철이 되면 동네 자두 가게 자두를 싹쓸이한다. 그리고 자두의 새콤달콤한 맛을 즐긴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 맛본 중국 자두는 맛이 없었다. 가이드도 자두를 무슨 맛으로 먹으려 하느냐며 말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과일이 당도도 높고 품질이 우수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 2018-08-0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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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마지막 성장의 기회 ‘죽음’
- 10여 년 전, ‘한국죽음학회’를 설립하고 ‘웰다잉’과 관련해 선구자 역할을 해온 최준식(崔俊植·63)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당시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그는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정도를 넘어 성장의 계기로 적극 활용하자고 말한다.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등의 질문들을 평소에는 외면해도, 죽음을 목전에 둔 임종기에는 대면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에, 죽음을 ‘인생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 일컫는다.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이하 ‘임종학 강의’)가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책이 있었다. 2014년 최준식 교수가 펴낸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이하 ‘죽음학 강의’)다. 그는 “두 책은 자매 도서”라며 “함께 읽었을 때 죽음에 대한 공부가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임종학 강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 어려운 말기 질환 상태에 들어갔을 때부터 죽음까지를 이야기합니다. ‘죽음학 강의’는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사후세계나 환생 등에 대해 다뤘지요. 일부분 겹치긴 하지만 관장하는 부분이 달라요. 특히 ‘임종학 강의’는 최근 5년 사이에 제 부모와 처의 부모까지 네 분을 모두 여의면서 현실적으로 깨닫게 된 실질적인 문제들까지 담았습니다.” 그가 부모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알게 된 이론과 실제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장례문화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론으로는 대개 이상적인 방법들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실제 상황에 부딪히면 사실상 이론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요. 경황도 없지만, 자식들 간에 의견 통합이 문제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셋째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관여를 안 했어요. 제가 한국죽음학회 회장이라 한들, 한국 장례절차는 장남 위주로 흘러가니 간섭하기 어렵지요. 연명치료하면 안 된다, 화장해야 한다 등의 이야기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설득하기 힘듭니다.” 장례식도 결혼식처럼 직접 디자인하자 ‘임종학 강의’에서 다루는 ‘임종 단계’는 대체로 환자가 말기 질환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환자가 임종을 맞이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유족들이 할 일이 많아진다. 그렇게 장례까지 마쳐야 한 인간의 죽음과 관계된 일이 모두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위 행하는 ‘장례식’에 대해 최 교수는 “장례식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우리나라 장례는 ‘문상 절차’만 있지, 정작 ‘장례식’은 없어요. 결혼식처럼 특정한 날과 장소에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행하는 의례가 없잖아요.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장례식만 떠올려도 곧바로 알 수 있어요. 그들은 어느 한 날을 정해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의례를 치르죠. 그러면서 고인을 충분히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족에게는 형식적으로 간단히 인사하고 문상객들끼리 잡담하다 오는 게 전부잖아요. 이런 장례 문화는 겉치레만 있을 뿐이지, 내용이 없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전통사회에서는 마을의 훈장이나 노인 등이 장례 절차를 담당하곤 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 상조회사에 의존해 그들이 하는 절차를 지켜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이처럼 보내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직접 장례를 치르는 방법에 대해 미리 고민해보길 권한다는 최 교수다. “예비부부가 자신들의 결혼식을 디자인하듯 장례식도 당사자의 뜻에 따라 절차와 방식을 정해볼 수 있어요. 물론 상조회사의 절차를 따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죠. 그렇지 않다면 직접 장례 계획을 짜보세요. 먼저 초청할 사람들을 정해요. 이때 나중에 자식들이 초대할 수 있도록 연락처를 함께 적어야죠. 그다음에는 식순을 짜고, 각 순서를 누가 맡을지 정하거나 조가는 어떤 곡을 틀지 써놓으면 좋아요. 그 외에도 각자 원하는 것에 따라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꾸며보는 거죠.” 장례를 직접 디자인하려는 이들에게 최 교수가 제안하는 것이 있다. 바로‘마지막 인사 남기기’다. 임종을 맞이하기 전, 몸과 정신이 성성할 때 직접 마지막 인사를 녹음 또는 녹화해두는 것이다. “자신이 한평생 어떤 마음으로 살았고, 주위로부터 어떤 은덕을 입었는지, 그동안 신세 진 분들에 대한 감사인사 등을 전하면 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영상을 보면 하객들이 주인공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축하하는 마음도 더 커지잖아요. 그런 의미로 만들어보자는 거죠. 장례식 당일에 이 마지막 인사를 들려주면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도 깊어지고, 유족들도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어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죽음을 주제로 인터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죽는다’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이에 최 교수는 ‘죽는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보다는 ‘몸을 벗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단지 몸을 벗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몸’, 즉 ‘육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화장을 꺼리거나 무덤 터를 살피는 것 등이 그 이유죠. 성묘 가면 무덤 앞에서 자식들이 그러잖아요. ‘아무개야, 여기 할아버지께 인사드려. 아버지 손주 아무개 왔어요.’ 도대체 거기 뭐가 있다는 거죠? 제사 지낼 때도 봐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먹는다고 산 사람 음식을 차리나요. 고인의 넋을 기리려면 향을 피우거나 기도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현세 중심적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민족보다 더 터부시하는 거예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추모곡을 예로 들었다. 일본 곡을 번안해 임형주가 부른 노래인데, 원곡의 첫 소절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라는 가사가, 번안곡에서는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로 바뀌었다. “아마 죽음, 무덤 이런 것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가사를 그렇게 바꾼 모양인데 그러면 그 곡이 지니는 의미가 사라져요. 그 뒤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가을에는 곡식들을 비추는 빛이 되고, 겨울에는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이런 식이에요. 해석하면 나는 무덤에 잠들어 있지 않고, 내 영혼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날고 있으니 그곳에서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몸만 머물러 있는 무덤은 의미가 없다는 건데, 그게 사진으로 바뀌니 본뜻이 사라진 셈이죠.” ‘몸을 벗었다’는 그의 표현대로, 일생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고달팠던 육신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 여기면 죽음이 꼭 괴로운 것은 아닐 터. 최 교수는 죽음을 공부하고, 성찰하며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지녔을 때 이승을 떠나는 순간이 두렵지 않을 것이라 조언했다. “죽음은 지상에서의 삶을 잘 마치고 가는 것이니 일종의 인생 졸업식이지요.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제약으로 작용했던 육체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 아닐까요. 죽음을 ‘삶의 적’으로 두지 말고, ‘삶과 함께’하며 잘 준비해두시길 바랍니다.”
- 2018-07-2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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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한 행복
- 같이 밥 먹으며 정든다. 맛있는 음식을 서로 나눌 때 기분이 좋아진다. 이때 함께 나누는 대화에는 가시가 돋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하거나 무료할 때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요리할 거리를 찾는다. 식재료를 내놓고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칼과 도마를 챙기고 냄비를 꺼내면 요리사처럼 기분이 들뜬다. 그 시간은 내게 치유의 시간이며 잡념이 사라지는 행복한 시간이다. 음식이 많다 싶으면 주변의 지인들을 불러 모은다. 반찬이 많아도 좋고 좀 적어도 입담을 대신 섞어 맛있게 먹는다. 얼마 전, 식자재마트 세일 행사 전단이 신문에 끼어져 왔다. 사고 싶은 것을 형광펜 그어가며 표시하고 배달을 시켰다. 취나물 한 박스 5000원. 보통 봉지로 사던 나물 값밖에 안 했다. 두부 한 판 6000원. 만두 만들 때 사던 한 판을 두 모 정도의 값으로 팔고 있었다. 곱슬이콩나물 한 박스 3900원. 이 가격은 보통 한 봉지 값이었다. 그리고 과일 서너 가지. 물건이 도착한 후 이웃을 불러 모았다. 오기 전에 봉지에 하나하나 담아 4등분으로 준비해두고 남는 재료들은 데치고 무쳤다. 너무 싱싱해서 다시 밭으로 갈 것 같았다. 이웃 친구들이 도착한 후 내가 요리해놓은 나물들을 시식시켰다. 약간 심심해서 밥 없이도 집어 먹을 수 있었다. 이웃 친구들은 조리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기꺼이 가르쳐줬다. 다 된 음식을 식탁에 차리며 사람들을 기다리는 기쁨이 좋다. 돌아가는 이웃에게 취나물과 콩나물을 넉넉하게 담은 봉투를 안기며 두부도 함께 넣어줬다. 주는 나도 즐겁고 받는 이웃도 행복해했다. 집으로 돌아간 이웃들은 취나물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가족들 반응이 어땠는지 수다를 떨었다. 카톡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편과 아이들 반응이 다르고, 결혼한 자식에게도 싸다 줬다는 이야기까지…. 나물 몇 가지로 행복한 대화를 나눴다. 이런 게 사는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지인이 집에서 딴 살구로 엑기스를 만들어왔다. 너무 달아서 그냥 먹기는 힘들어 요리에 넣고 있다. 살구의 상큼한 향을 더하니 나물 맛이 오묘하다. 때로는 풋사과 분말을 넣기도 한다. 이제까지 먹어본 여러 가지 음식의 다양성이 응용력을 발휘하게 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망치기도 한다, 버섯이 한창 날 때 넉넉하게 사왔는데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어 버섯장아찌를 만들었다. 그러곤 레몬차를 만들어 남은 꼬투리를 몇 개 넣어봤다. 상큼한 맛을 기대했는데 웬걸, 맛을 보니 마치 음식이 쉰 것 같은 맛이 났다. 다 버려야 했다. 며칠 전에는 옥수수 한 자루를 사서 들통을 두 개 꺼내 쪘다. 자주색으로 잘 여문 옥수수였다. 찐 옥수수를 카톡방에 올렸다. “옥수수 원하는 사람, 아파트 9블럭 놀이터 벤치로 밤 9시.” 얼마 전, 난 마늘을 받았다. 어떤 날은 오이지가 맛있게 익었다며, 텃밭의 상추와 오이, 가지를 나눠준 사람도 있다. 어느 날은 부추 한 줌, 묵 한 덩어리, 파전 한쪽. 서로를 기억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렇게 힘 솟는 일인 줄 몰랐다. 마음에 걸림 없이 두려움 없이 사는 소박한 행복이다.
- 2018-07-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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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부스 안이 어울리는 남자, 윤종국 동년기자
- 이제야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삐걱대던 시절을 지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대했더니 희망이 찾아들었다. 나이 먹고 퇴역 군인처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이 사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유? 일이 더 하고 싶어서란다. 멋진 목소리의 DJ, 활기찬 시니어 기자 소리 듣는 게 좋다는 윤종국 동년기자를 만났다. 화창했던 어느 화요일 낮. 라디오 방송 대본을 들고 마주 앉았다. “어젯밤에 대본 연습을 거의 새벽 2시까지 했어요. 녹음기를 놓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서울노인복지센터(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탑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종국 동년기자는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매주 화요일 30분씩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라는 센터 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이날은 입이 타들어 가는지 물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포FM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노인복지센터 방송국으로 스카우트(?)돼 온 지 3개월이라고 했다. 익숙할 만도 한데 무슨 일일까? “제 인생에 인터뷰 기회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권 기자님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니 제가 잘해야죠.” 인터뷰 전에 제안을 하나 했다. 윤종국 동년기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함께 동년기자단에 대해 복지센터에 모인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대신 라디오 방송 대본을 제대로 써드렸다. 두 번 정도 대본을 맞춰보고 진행된 생방송은 주거니 받거니 뚝딱 하고 흘러갔다. 방송을 마치자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 안도 섞인 웃음이 윤종국 동년기자 얼굴에 번진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혼자 앉아 콘솔 조절하고, 얘기하고, 음악 트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윤종국 동년기자는 작년 2기로 동년기자단에 합류했다. 첫인상부터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 마포구 지역 방송인 마포FM에서 DJ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는 한국 시니어 블로그 협회 회원입니다. ‘내 고장 마포’라고 마포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객원기자로 일한 지도 10년이고요. ‘우리마포복지관’ 산하 ‘우리복지신문’에서 봉사기자단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우리마포시니어클럽 커뮤니티 맵핑(지도제작)팀에서 매퍼(지도 만드는 사람)로서 장벽 없는 동네지도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 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작다고 하니 어린이 도서관으로 생각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이 라디오 DJ는 재능봉사입니다. 힐링되고 마음부자가 되는 것 같아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시니어 세대를 위한 정보라면 뭐든 관심 있게 보던 차에 동년기자단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47년생, 빡빡머리, 돼지띠 윤종국 동년기자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를 준비하고 성장해나가는 청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친구들은 벌써 은퇴해서 퇴직 연금으로 생활한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이 의식해 뒷선으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저에게 기회를 준 탑 방송국과 다른 매체에 다 고마워요. 늦게나마 인정받는 게 참 좋습니다. 뭔가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용기도 나고 말이죠. 요즘 나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술로 버텼던 시간을 지워가다 “젊었을 때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방송 관련 직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울진에서 살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 교내 방송도 하고, 대학교 때는 학보사에도 몸담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좀 복잡하게 꼬이더군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국가가 제동을 걸었다.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줄줄이 부정당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연좌제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 처음 느꼈습니다. 학군단(ROTC) 신청 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사 성우 시험, 국가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실 나이가 드니까 이 말 꺼내는 게 싫고 쑥스러워요. 변명처럼 느껴지고 내 자신을 모독하는 것 같고 말이죠. 얘기 안 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냥 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안 된 거겠죠. 가령 ‘키가 남보다 작아서 학군단 입단이 안 됐다’라든지 말이죠.(웃음)” 지금은 웃으며 옛일을 말하지만 그때는 매번 닥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폭음으로 이어졌다.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갔다. 젊은 시절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고집 피워 결혼해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오랜 시절 아끼던 친구들이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통 때문에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좋아서, 억지로, 서러워서, 분노를 참지 못해서요. 거리, 안주, 주량 불문하고 술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오면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혼자 저를 키우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까지 제 걱정을 하셨다더군요. 아내는 이종사촌 동생 친구로 만나 6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안 되는데 술까지 마셔서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급기야 몸에 이상 신호가 오고 말았다. 6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장 파열이었다.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응급수술을 받았다. 의사에게 각서까지 쓰고 휠체어에 몸을 실어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작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 동년기자 페이지에 게재됐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음속부터 몸 끝까지 전부 다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제2 또는 제3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머리부터 밀었습니다. 술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마시던 그 술을 말이죠. 끊고 한 3년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극복했죠.” 가끔 딸아이가 빡빡 밀어버린 머리를 쓱 만지고 가면서 “우리 아빠 사람 됐네”, “복권 당첨 확률보다 아빠 술 끊는 게 더 어려웠잖아” 라며 아버지 자리로 돌아온 윤종국 동년기자에게 칭찬 섞인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과는 손주가 둘쯤 생기고 나서야 부자지간이라는 게 뭔지를 좀 알게 됐다. 특히나 고마운 것은 자신이 못다 이룬 방송인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뤘다는 점이다. 아들은 모 방송사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한번은 아들이 저한테 게스트로 방송에 좀 나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어요. 내가 뭘 그런 걸 하냐며 안 한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빠의 모습으로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아들이 표현해준 것이죠. 정말 아빠로서,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국가의 일원으로서 내 위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싶은 술을 6년 동안 입에도 안 댔습니다. 제사 지내고 음복은 입에만 댔고요. 제가 왜 이걸 강조하냐면 저도 제 자신이 굉장히 예뻐 죽겠으니까요.(웃음)” ‘이야기가 있는 풍경’ DJ 윤종국입니다 술을 끊으니 얼굴색도 표정도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니 보이는 것도 많았다. 마포FM을 통해 시작한 DJ 활동도 술을 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신문에 쓴 제 글을 보고 마포FM 대표가 연락을 했더라고요. ‘나의 삶, 나의 길’ 라디오 초대 손님으로 말이죠. 그때 출연하고 나서 목소리가 좋은 거 같다며 DJ 제안을 받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방송이 있더라고요. 제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덥석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마포FM 라디오 스튜디오 안을 누볐다. 화요일 녹음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마포구 내 집과 상점 등으로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좀 오래하고 싶었는데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엇박자가 나는 듯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몇 안 됐어요. 적응할 만하면 스태프가 바뀌고 말이죠.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다른 데가 없겠나 싶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이 네이버 밴드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DJ 자리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한번 검토해보라고요.” 서울노인복지센터 탑 방송국은 윤종국 동년기자의 친구이자 동년기자 1기 출신인 장혜섭 씨가 적극 추천했다. “담당 직원이 DJ 의사를 물어보며 전화 연락을 해왔을 때 제가 건 계약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한 달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방송에 지장이 되니까 나가달라’고 미련 없이 말하라고 했어요. 서운해하거나 오해하지 않겠다면서요. 아직 제가 미약한데도 존중을 많이 해줍니다. 전파 방송과 구내 방송이라는 방송 도달 거리 차가 있지만 라디오라는 성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좋은 점이라면 청취자들의 취향이나 피드백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 평균 2000명은 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나쁜 소리는 안 들었으니 잘하고 있다는 거겠죠?” 라디오 DJ 활동을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면 손자와는 태어나기 전부터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일까? “손자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태명 ‘둥이’라는 카카오톡 계정을 만들어 소통했습니다. 물론 실제 대화 상대는 며느리였지만 손자인 척 며느리가 대답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DIY 제작소에서 버린 자투리 나무토막으로 도미노 게임을 해주면 손자가 아주 좋아해요. 제 인생을 정리해서 말해드리자면, 젊었을 때는 말 그대로 ‘고난’이었어요.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살았어요. 답답해서 이민 생각도 해봤지만 스물일곱에 혼자되신 어머니를 두고 해서는 안 될 불효라 포기했습니다. 술에 빠져 살아보니 이러다가는 내가 가족도 잃고 남는 게 없겠다, 반성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손글씨로 스스로를 치유하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치유의 한 방법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하는 라디오를 앞두고 컴퓨터로 작업해서 보내드린 대본도 굳이 손글씨로 써서 볼 정도이니 손글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때가 있고, 때로는 그냥 악에 받쳐 쓸 때도 있고 말이죠. 서술적으로 쓰다가도 누가 싫으면 최대한 아주 싫다는 걸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일기장이 너무 많아서 아내는 좀 정리하라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딸아이는 아빠의 유물(?)을 인정해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역시나 손글씨 이야기가 나온다. “시니어만을 위한 옛 추억을 담은 손편지가 오고 가게 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동아리도 만들고 싶어요. 정착이 되면 이메일이 아닌 손편지로 마음이 오고 가는 운동도 하고 싶고 말이죠.”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지만 시니어의 감성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세상이기를 윤종국 씨는 바라기 때문이다. “글씨를 좀 삐뚤삐뚤 쓰면 어때요. 잘못 쓰면 어떠냐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손주나 며느리나 딸한테 편지를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멋집니까. 50대 이상 모든 시니어 세대를 버무려서 손편지를 주고받는 세상을 한 번 만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편지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요. 쓴 편지는 우체통에 넣으면 좋고요. 누군가는 편지를 기다리는 맛도 있겠죠?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 감성이 제대로 살아날까 생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윤종국 동년기자의 도전은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이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 2018-07-0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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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려한 문장 없이 유연하게 말하는 법
- 커뮤니케이션 학자 앨버트 메라비언(Albert Mehrabian)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말을 잘한다고 느끼는 데 영향을 주는 요소는 목소리(38%), 표정(35%), 태도(20%), 논리(7%) 순이다. 즉 말주변이 없어 고민하는 이들도 목소리와 표정, 제스처 등을 신경 쓴다면 충분히 말 잘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 임유정 라온제나 스피치 대표에게 자가 목소리 진단과 개선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들어봤다. 도움말 임유정 라온제나 스피치 대표 일러스트 원앤원북스 제공 참고 도서 ‘성공을 부르는 목소리 코칭’(임유정 저) STEP 1 내 목소리도 문제가 있을까? 임유정 대표는 “중장년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동안의 삶이 녹아 있다”며 “목소리가 따뜻하고 여유 있는 이가 있는 반면, 톤이 높고 빠르며 독단적인 말투를 지닌 이도 있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수록 오랜 세월 자기 목소리와 표정에 익숙해져 문제점이 있더라도 잘 모르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임 대표가 코치한 한 기업의 대표 A 씨는 평소 사람들에게 무섭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A 씨 자신은 왜 그런 인상을 주는지 몰랐다는 것. 이에 임 대표는 몰래 그가 대화하는 모습을 찍어 보여주었는데, 그제야 사람들의 반응에 수긍했다고.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와 표정, 제스처가 다른 이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점을 인식하고 개선 의지를 갖는 것이 좋은 목소리를 향한 첫걸음이다. STEP 2 ‘자기 경청’을 통한 목소리 자가진단 A 씨처럼 우연히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 “내 목소리가 원래 이런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목소리나 표정, 제스처를 점검해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말하는 모습을 직접 동영상으로 찍거나 대화를 녹음해 살펴 듣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자기 경청을 통해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노력하다 보면 발음과 발성이 좋아지고, 대화의 호흡을 맞추는 방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자기 경청 SLRF 법칙: S-말하기(speaking), L-듣기(listening), R-인정하기(recognition), F-강화하기(finding) STEP 3 몸의 언어를 향상하는 방법들 나에게 맞는 키톤 찾기 내게 맞는 자연스러운 키톤으로 말했을 때, 듣는 사람도 편하게 들을 수 있다. 먼저 편안하게 선 자세를 취한다. 어깨를 내려 몸의 긴장을 풀자. 몸이 너무 긴장되어 있으면 내 몸을 울려 소리를 낼 수 없다. 팔을 아래로 툭툭 털고, 명치라고 불리는 공명점(맨 아래 갈비뼈 중간 지점)을 누른다. 이 상태로 “아~” 하고 소리를 낼 때 나오는 편안하고 안정된 음이 자기 몸에 맞는 키톤이다. 1) 말투와 제스처는 동그랗게 발성학자들이 꼽는 가장 좋은 목소리는 ‘동그란 목소리’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 중 말을 할 때 자신감 있으면서도 겸손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면, ‘동그란 목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말과 제스처는 짝꿍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투가 아닌 부드럽고 교양 있는 동그란 목소리와 제스처에 익숙해지자. 2) ‘고현정 표정 100종 세트’ 따라 하기 표정이 좋아지는 방법은 딱 하나다. 말하는 내용에 맞게 표정이 잘 따라가주면 그만. 희로애락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는 훈련이 중요하다. 평소 얼굴 근육을 스트레칭을 해둬야 다채로운 표정을 자연스럽게 지을 수 있다.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고현정 표정 100종 세트’를 쳐보자. 검색한 이미지를 보고 따라 하면 도움이 된다. STEP 4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의 기술 1) 어휘보다는 에피소드를 늘리자 한 분야에만 종사해온 이의 경우 자기 일에 관한 이야기는 술술 털어놓는 반면, 그 외의 대화에는 자신 없어 하곤 한다. 말은 소재, 즉 에피소드가 많아야 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수록 에피소드는 더욱 다양해지기 마련. 특별한 소재가 없다면 공감과 질문 기법을 활용하자. 상대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요? 대단한데요”라고 공감하거나 “참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질문하다 보면 한결 여유롭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2)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뉘앙스도 중요 자기 경청을 통해 단순히 목소리나 발음만 듣는 것이 아닌 말의 뉘앙스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임 대표는 “스피치란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며 “가령 배우자에게 ‘당신 참 대단해’라는 말도 진정성 있게 하는 것과 비아냥거리듯 표현하는 것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조언한다. 아무리 발성, 발음, 톤이 완벽했더라도 이러한 뉘앙스로 인해 상대가 불쾌해하거나 말뜻을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상황별 목소리&제스처 코칭 #1 취임식 스피치를 할 때 취임식에서는 “이런 중책을 맡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하겠다”라는 감사함과 열정의 목소리를 가득 표현해야 한다. 첫인사를 할 때는 부드러운 목소리, 중·후반부에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원고를 미리 준비했다면, 보고 읽는다고 해서 리듬이 너무 빠르면 안 된다. 오히려 천천히 하나하나 또렷이 읽어야 책임감이 강한 목소리로 들린다. 또 중간중간 쉼을 줘야 한다. 특히 문장 끝머리에는 고개를 들어 청중을 바라본다. #2 건배사를 할 때 신년회, 송년회, 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가면 으레 건배사를 한다. 자신감 없는 건배사로 흥을 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열정 가득한 건배사로 흥을 돋운다. 알다시피 건배사를 할 때는 목소리가 일반 말하기 볼륨보다 커야 한다. 그러나 천천히 말하는 것이 관건이다. 빠르게 말하면 너무 준비한 티가 나기 때문이다. 여유롭게 말하되, 끝에 건배 제의를 할 때는 더 큰 목소리로 카리스마 있게 외쳐야 한다. #3 결혼식 주례사를 할 때 주례사를 할 때는 어떻게 주례를 맡게 됐는지 그 사연을 오프닝에 넣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랑·신부에 대한 애정, 양가 부모를 향한 존경심을 가득 담아 말하되, 자기 자랑이나 ‘이렇게 살라’는 훈계는 절대 사절이다. 내용은 “첫째, 서로 대화를 많이 하자. 둘째 ~ 셋째~” 이런 식으로 크게 3가지로 압축해서 말하는 것이 좋다. 하객과 함께할 수 있는 퍼포먼스도 넣어보자. 박수를 유도하거나 말을 따라 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4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 자기소개가 너무 길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소개를 할 때 ‘난 뭐라고 이야기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축 처지는 일정한 톤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리듬감을 넣어서 말한다. 자기소개 목소리는 무조건 ‘반갑다’는 친근감이 들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자. >>임유정 라온제나스피치 대표 CEO스피치코칭(삼성, LG, 현대, SK외 대기업 다수 코칭), 스피치 스타일, 보이스 스타일, 소통 대화법, 프레젠테이션, 미디어 트레이닝 등 다방면에서 강의를 펼치는 스피치코칭 전문가. 저서로는 '스피치 트레이닝 60일의 기적', '트겹ㄹ한 순간, 리더의 한 말씀', '성공을 부르는 스피치 코칭', '성공을 부르는 목소리 코칭' 등이 있다.
- 2018-06-29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