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라고 하며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방식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캐나다,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허용하는 국가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포르투갈 의회에서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조력 존엄사와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난 2002년 엄격한 조건을 만족했을 때 의사가 삶을 끝낼 수 있는 약물을 투여하거나 환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생명을 끝낼 수 있도록 해 안락사와 의사 조력 존엄사를 합법화한 최초의 국가다.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평균 약 6000명이 안락사로 삶을 마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이 5년 새 1.5배 정도 늘었다.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50만 명을 넘어갈 것으로 예상한다. 노화를 겪으며 다양한 질병에 노출되는 노인에게 연명 치료, 안락사 등은 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은, 살겠습니까?
“태어날 때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을 때는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광고가 TV에서 흘러나온다. 광고 속 노인은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어 만족한다’며 웃는다. 담당 공무원이 공원에 앉아있는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유한다. 국가에서는 안락사를 선택한 노인에게 10만 엔을 주고 장례를 치러준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가가 선택한 정책 제도 ‘플랜75’다. 여행사에서는 위로금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여행을 기획한 온천 여행 상품이 인기를 끌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콜센터도 생겼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다. 위 내용은 하야카와 치에(早川千絵) 감독 데뷔작 ‘플랜75’의 줄거리다.
이 일본 영화 속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3년 후인 2025년을 떠올리게 된다. 일본에서 다가올 2025년은 ‘문제’라고 불리고 있다. 2025년, 약 800만 명에 이르는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의 절반 이상이 75세가 된다. 일본 국민의 20%가 ‘후기 고령자’(75세 이상)가 된다는 뜻이다. 2025년부터 의료비와 사회보장비용 부담이 커질 거라는 우려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2025년 문제’라고 부른다.
감독은 이 영화로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카메라 도르’라는 특별 언급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75세 이상 노인을 ‘후기 고령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이 영화를 기획했다. “‘후기’라는 단어는 곧 너의 인생이 끝난다는 식”이라며 “나라가 나이로 인간을 구분하는 것에도 위화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주인공을 통해 ‘사람이 사는 것을 긍정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전했다. 영화는 질문을 던지며 끝난다. “당신은, 살겠습니까?”라고.
존엄한 죽음 준비 ‘광의의 웰다잉’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해 많은 국가가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금지하고 있지만, 영화 ‘플랜75’는 우리에게 기시감을 준다.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물 투입을 하는 것(적극적 안락사), 연명 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것(소극적 안락사), 약물 처방으로 환자가 스스로 약물 주입을 하도록 하는 것(조력 존엄사)으로 나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팀이 2021년 진행한 ‘안락사 혹은 조력 존엄사에 대한 태도’ 설문 조사 결과 응답자의 76.3%가 입법화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지난 2016년 진행했던 같은 설문 조사 응답률과 비교하면 6년 새 찬성 비율이 1.5배 정도 증가했다. 찬성 이유로는 △남은 삶의 무의미(30.8%) △좋은(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26.0%) △고통의 경감(20.6%) △가족 고통과 부담(14.8%) 등이 꼽혔다. 반대 이유로는 △생명존중(44.4%) △자기결정권 침해(15.6%) 등이 있었다.
안락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를 선택하고 싶다는 응답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지만,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연명 의료 등을 결정하는 ‘협의의 웰다잉’을 두고 찬반을 논의할 게 아니라 ‘광의의 웰다잉’으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광의의 웰다잉이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호스피스·연명 의료 결정 확대와 함께 독거노인 공동 부양, 성년 후견인, 장기 기증, 유산 기부, 인생 노트 작성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앞선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85.9%는 '광의의 웰다잉'을 위한 체계적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찬성했다. 또한 약 85.3%가 광의의 웰다잉이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사회적으로 호스피스나 웰다잉 관련 제도들이 잘 마련되면, 개인이 호스피스를 이용할지 연명 의료를 할지 조력 존엄사를 할지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질환의 말기 환자로 제한되어 있다.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없고, 연명 의료를 선택하자니 비용이 많이 들면 결국 조력 존엄사 외에는 선택권이 없는 구조라는 비판도 있다. 광의의 웰다잉을 논의하며 사회적 환경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안락사나 조력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기 이전에 광의의 웰다잉을 논의하고 사회적으로 충분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이런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2018년 고령사회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10년도 채 되지 않은 2025년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중 20%인 사회)에 진입한다. 2045년에는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37%를 차지해, 세계 최고의 노인 국가가 될 전망이다. 2060년에는 43.9%로 사실상 인구 절반이 노인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화 ‘플랜75’ 말미에는 뉴스에서 “정부는 ‘플랜75’가 호조를 보임에 따라 ‘플랜65’도 검토하고 있습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죽음을 선택하기에 앞서 사회적으로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초고령화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30대, 40대, 50대의 나이와 관계없이 ‘어른 아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키덜트라 불리는 집단이 그 예다. 한국 사회 속 ‘어른’의 전형적인 틀을 깨고, 그저 좋아하는 놀이를 소비하고 즐기며 삶의 활력을 찾는다. 과거에는 철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이제 어느 분야에 푹 빠진 ‘덕혈구’ 흐르는 덕후들의 세상이 됐다.
서울시 서초구 국제전자상가(국전) 9층은 여러 개의 가게가 구역을 나누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드래곤볼, 짱구, 포켓몬 등 온갖 캐릭터 모형(피규어)부터 게임기, 프라모델, 가챠(캡슐 뽑기), 코스프레 의상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하다. 9층의 한 매장을 운영하는 상인 A 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캐릭터 상품은 인기가 많지만,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취향으로 치부됐던 것 같다”며 “자녀 혹은 손주에게 선물한다는 핑계를 대거나, 아내 몰래 조금씩 피규어를 모으고 있다고 이실직고하는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그래도 비교적 개인의 취향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라며 “내가 50대 키덜트라 그런지 취향이 비슷한 동년배 고객을 만나면 더욱 반갑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국 방방곡곡 ‘키덜트 명소’로 통하는 곳들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붐빈다. 서울 용산구의 레고(조립 블록) 매장에서 만난 47세 직장인 B 씨는 “퇴근길에 매장을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건졌을 땐 조립하기 전부터 기분이 좋아진다”며 “회사 업무 부담이 커져 스트레스가 쌓이고,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애매한 위치가 돼 씁쓸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블록을 조립하면서 머리를 비운다”고 말했다.
중년, 키덜트가 되다
키덜트는 추억 속 동심의 세계를 성인이 된 후에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소설, 패션, 장난감 등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뚜렷한 소비 성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이 키덜트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1990년대 추억의 만화 ‘포켓몬스터’를 좋아했던 아이가 자라 키덜트가 됐다고 하자. 어엿한 사회인이 된 후 경제활동을 하면서 포켓몬빵, 피카츄 열쇠고리 등 관련 상품들을 사 모으거나 직접 경험해보며 취미로 발전시켰을 테다. 성인이 된 후 아들과 놀아주기 위해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를 구입했다가 얼떨결에 본인이 즐기는 경우도 있다.
50세 주부 C씨는 “딸이 포켓몬 빵에 들어 있는 스티커에 빠져서 구해달라고 하도 조르기에 시간 날 때마다 편의점을 돌아다닌다”며 “처음엔 스티커에 왜 그렇게 다들 진심일까 싶었는데, 계속 모으다 보니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말했다. 이어 “어른이 돼 살다 보면 주변 사람과 조건에 머무르고, 갖고 있던 꿈도 타협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며 “값싼 스티커에 즐거움을 느끼고 움직이는 나를 보면 ‘어릴 적 마음과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걸 느낀다”고 덧붙였다.
비대면 사회의 반작용
일부 전문가들은 ‘어린 시절 마음껏 못 해본 게 한이 돼서’ 장난감이나 게임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고 주장하지만, 심리학적 근거는 아직 부족하다.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유튜브 채널 ‘사피엔스 스튜디오’ 영상에서 키덜트가 늘어나는 이유로 ‘비대면 시대에 따른 촉각의 불충족’을 꼽았다. 영화 ‘퍼펙트 센스’를 예로 들어보자. ‘퍼펙트 센스’는 어느 날 전 세계 곳곳에서 원인도 모른 채 감각이 하나씩 마비되는 이상 현상으로 고통을 겪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후각, 미각, 청각, 시각을 순서대로 잃게 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감각을 잃는 순서의 의미다. 네 가지 감각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화는 끝을 맺지만, 김 교수는 “인간에게서 사라졌을 때 가장 괴로운 감각이자 원초적으로 가장 중요한 감각은 촉각”이라 말한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로 전환되면서 촉각은 가장 충족하기 어려운 감각이 됐다. 스마트폰이 발달한 덕에 콘서트에 가지 않아도 좋아하는 가수의 얼굴을 보고 아름다운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보고 듣는 간접경험의 창구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직접 만지며 체험할 기회는 현저히 줄었다. 때문에 즉각적으로 만지며 놀 수 있는 상품이 주목받게 됐다는 설명이다.
두둑한 지갑과 함께 돌아온 X세대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중년이 된 X세대가 키덜트 문화 확산의 기폭제라고 말했다. X세대는 베이비붐 세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로, 현재 40대 전후 세대를 말한다. X세대 안에는 ‘영포티(Young Forty)’도 포함된다. 영포티는 나이에 비해 젊은 삶을 사는 40대를 지칭한다.
199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당시 국민의 3분의 2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의식했을 정도다. X세대는 경제·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특별히 없는 상태에서 성인이 됐기 때문에 에너지가 자기 내면으로 향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 교수는 “결혼하고 아기를 안 낳아도 덜 이상하고, 이혼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게 지금 40대”라면서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희생하던 이전 40대와는 달리 트렌드에 밝고 자신을 위한 소비가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영포티를 중심으로 키덜트 시장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치해 보이지만 꼭 필요해
여전히 키덜트가 ‘나이에 맞지 않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는 편견이 남아 있다.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 김경일 교수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추상적인 나를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적인 물건을 원한다”며 “나이가 들수록 생산적이지 않은 물건을 소비하고 놀이를 즐기며 일상생활의 돌파구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상 깊은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사거나, 비슷한 디자인임에도 유명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옷을 더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생산적인 취미처럼 보이더라도, 즐기는 과정 자체가 생산적인 자기계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핀란드 투르쿠대 인문학부가 브라이스 인형(머리 스타일과 화장, 홍채 색, 의복 등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사람 형태 인형)을 갖고 노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자들은 인형 놀이를 매개로 새로운 취미 생활에 입문하거나 이전에 없던 능력을 기르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기도 했다. 인형에게 입힐 옷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이라는 새 취미를 갖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타인과 사회적 교류를 하는 셈이다.
이은희 교수는 대한민국 사회의 ‘고정관념’이 취미 활동에 제약이 됐다고 꼬집었다. ‘40대면 직장에서는 부장 정도일 테고, 아이는 둘 정도 있어야지’, ‘60대면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살되, 점잖은 행동으로 젊은 세대의 본보기가 돼야 해’ 등의 잣대 말이다. 그는 키덜트 산업이 발달한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의 키덜트 시장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을 ‘사회·문화적 차이’로 봤다. “사회적 나이를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내 눈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타인의 즐길 권리를 무시할 수 없는 데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골프·여행·등산과 다를 바 없는 분야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2023년 키덜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키덜트(Kidult)는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로 아이와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한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년의 키덜트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주류로 떠오른 중년 키덜트의 파급력과 그 이유를 짚어봤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네버랜드 신드롬’을 언급했다. 네버랜드는 피터팬과 친구들이 늙지 않고 영원히 아이의 모습으로 사는 곳이다.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네버랜드 신드롬’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네버랜드 신드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리턴(Return) 유형이다. 배우 한소희가 착용해 3000원짜리 공주 세트가 돌풍을 일으킨 것, 포켓몬 빵 품절 대란 등을 이 유형의 예로 들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키덜트는 리턴 유형에 속한다.
네버랜드 신드롬의 두 번째 유형은 스테이(Stay)로, 나이 듦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유형의 사람은 동안 외모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승진을 마다하면서까지 현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세 번째로는 아이들처럼 쉽고 재밌고 명랑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플레이(Play) 유형이 있다.
고령화 시대와 키덜트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 시장 규모는 2014년 5000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1조 6000억 원으로 확대됐다. 향후 최대 11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덜트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주름잡은 주력 세력이다.
키덜트가 급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근본적인 이유는 전 세계가 빠르게 늙어간다는 데 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회가 유년화되고 있다. ‘이 나이 때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나이 개념이 흐려지고 있다.
키덜트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추억의 장난감, 만화책, 만화영화 등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소비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런 키덜트를 향한 시선은 몇 년 전만 해도 부정적이었다. 유치한 취향을 가진 철없는 어른으로 봤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피터팬 증후군’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키덜트를 향한 시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른은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의 장막이 걷히자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시대가 됐다. 이로 인해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키덜트가 늘어났고, 소비 시장 또한 커졌다. 자녀와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기는 키덜트 부모도 많아졌다. 드론, 무선조종 자동차, 레고 등을 가족이 함께 즐기며 유대감을 쌓는다.
키덜트가 급증한 두 번째 원인으로 미래 불안감이 거론된다. 키덜트는 불안한 미래와 힘든 현실로 인해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에 젖으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실내 활동이 증가하면서 장난감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유명한 장난감 회사 해즈브로는 2019년 47억 2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64억 2000만 달러로 순수입이 증가했다. 동기간 바비 인형 회사 마텔의 순매출은 45억 달러에서 54억 6000만 달러로 늘었다.
문화 발전과 중장년 키덜트의 성장
현재 시장을 주름잡는 키덜트의 중심에는 중장년층이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스타워즈, 포켓몬 등을 보유한 장난감 회사 재즈웨어스의 제러미 파다워 최고브랜드책임자는 CNBC에서 “1970~80년대에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장난감이 크게 유행하면서 이 시기에 팬덤을 경험한 세대가 현재 30~40대에 접어들었다. 이 사람들이 키덜트의 시작이 됐다”라고 말했다.
현재 상영 중인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가 흥행하는 것을 봐도 중장년층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2주 만에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새해 첫 100만 영화다. 1990년대 만화 ‘슬램덩크’를 즐겨 본 중장년층이 오래 간직한 팬심을 드러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유튜브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를 운영 중인 라이너는 게임에 주목해 말했다. 그는 “중장년층을 1980년대생이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생은 게임에 익숙한 세대다. 게임을 하기 위한 용도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였다”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게임을 취미로 이어가는 것이다. 중장년층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종합하면, 세상은 나이 들어가는데 사람들은 젊어지고 있다. 나이보다 젊게 사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다. 앞으로 키덜트는 더욱 많아질 것이며, 개인과 사회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것이다. 개인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로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가 된다. 시장 및 사회는 키덜트로 인해 활기와 역동성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덕사’ 교장 선생님, 라이너
“중장년 키덜트여,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영화평론가로 유명한 유튜버 라이너는 채널 ‘오덕사’(오리엔탈 덕후 사관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을 맡고 있다. 오덕사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을 심도 있게 분석해 소개하는 채널이다. 채널의 주요 연령층은 30·40대다.
“10·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오덕사 구독자분들의 연령층은 다양합니다. 그중 30·40대가 제일 많은데요. 중장년층은 아무래도 추억의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기생수’, ‘에반게리온’을 소개했을 때 반응이 특히 뜨거웠죠.”
스스로 키덜트라고 말하는 라이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채널이 바로 오덕사다. 라이너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다. 만화방, 비디오방을 전전하는 것을 넘어 해적판 비디오를 구하러 용산을 찾아가곤 했다고. “친구들은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었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게임도 좋아했고, 영화와 소설도 굉장히 많이 봤어요.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죠. 김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문화의 힘이 되게 중요하다고 믿거든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문화와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문화생활은 라이너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 중 그의 인생작은 무엇일까. 라이너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를 꼽았다. 마크로스는 거대한 우주선인데, 지구가 멸망하면서 마크로스에 탄 사람들이 마지막 인류가 된다. 그들은 외계인 젠크라디와 싸움을 벌인다.
“외계인 젠크라디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어요. 바로 문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류는 머리를 쓰죠. 마크로스 안에 당대의 아이돌 가수 린 민메이가 있었는데, 우주 콘서트를 펼치죠. 음악을 듣고 젠크라디들은 붕괴됩니다. 거기서 ‘컬처 쇼크’(문화 충격)라는 말이 처음 나왔어요. 제 영화 유튜브 채널 이름도 ‘라이너의 컬쳐 쇼크’죠. 1980년대에 그런 스토리가 나왔다니,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덕사에서 다루는 콘텐츠 중 게임의 비중은 적지만, 라이너는 여전히 게임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렸을 때는 수중에 돈이 없어서 게임을 즐기지 못했는데, 현재는 시간이 없어서 게임을 못 한다고. “게임을 하고 싶은 마음은 커서 게임 패키지를 삽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니 상상으로만 게임을 하고 진열장에 넣어두죠. 그렇게 쌓인 게임이 한가득이에요.”
라이너는 키덜트인 자신의 취미 활동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았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특별한 장비 없이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취미 활동이다. 또 누구를 상처 입히거나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취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키덜트로 살 것이라는 라이너는 동년배 중장년층에게 자신처럼 ‘덕후’가 될 것을 추천했다.
“중장년층에게 애니메이션을 즐겨 본다고 해서,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나 하던 유치한 것을 즐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숨은 명작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취미 활동을 당당하게 즐기면서 ‘원더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서울시가 8년 만에 지하철과 버스 요금을 인상할 예정이다. 이번 요금 인상은 지방자치제(이하 지자체)의 교통약자 지하철 무임수송 제도와 연관 깊다. 노인과 장애인 등 노약자는 지하철을 무임승차 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지자체는 정부의 예산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적자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노인 인구가 늘어나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만큼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서울시, 대중교통 요금 인상되나
지난달 24일 서울시는 “시는 지하철·버스 요금을 올해 4월 올리는 것을 목표로 다음 달 중 공청회, 시의회 의견 청취, 물가대책심의위원회 심의 등 관련 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라고 밝혔다.
시는 300원과 400원 인상안을 각각 제시한다. 현재 서울 대중교통 일반 요금은 카드 기준으로 지하철이 1250원, 시내버스는 1200원이다. 이번에 요금이 인상되면 2015년 6월 이후 약 8년 만이다.
이번 요금 인상은 올해 정부 예산안에서 지방자치단체 도시철도 PSO(공익서비스에 따른 손실 보전 지원) 예산이 제외된 데 따른 것이다. PSO 예산은 노인과 장애인 등 노약자 무임수송에 따른 비용을 보전해주기 위해 책정된다.
정부는 그간 철도산업발전 기본법 제32조에 근거해 코레일에만 PSO 예산을 지원했다. 서울교통공사 등 각 지자체에서는 예산 지원을 줄곧 주장했으나, 지난해 정부는 코레일에만 3979억 원을 지원하는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11월 24일 지방자치단체 도시철도 손실 보전분 3585억 원을 추가로 반영해 총 7564억 원의 수정안을 의결했다. 이는 본회의에서 다시 뒤집혔다. 교통위의 수정안이 아닌, 코레일 손실 보전만 반영한 정부의 원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오세훈 서울시장은 “정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요금 인상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지자체가 적자를 겪고 있는 가운데, 무임수송제도를 이용하는 교통약자의 80%는 노인이다. 더욱이 올해부터 1958년생이 만 65세가 되고 노인이 많아짐에 따라 더 이상의 요금 유지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13개 광역·기초 지자체로 구성된 전국도시철도운영 지자체협의회에 따르면 전체 지하철 공기업들의 2017~2021년 연평균 당기순손실은 1조 3509억 원이다. 이 가운데 무임수송 손실은 5504억 원으로 40%를 차지한다.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교통공사의 같은 기간 연평균 당기순손실은 7458억 원, 무임수송 손실은 43%인 3236억 원이다. 설상가상 코로나19로 승객이 줄면서 적자가 심해졌다. 2019년 5865억 원에서 2020년 1조 1137억 원, 2021년 9644억 원을 기록했다. 2021년 적자에서 무임수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29%(2784억 원)다.
“절충안 마련되어야” 목소리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지자체의 고민은 깊다. 노인 지하철 무임수송은 강행규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자체에서 중단할 수 있다. 그러나 40년간 중앙정부 주도로 시행한 일종의 복지 제도를 지자체가 일방적으로 중단하거나 제도를 변경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노인 지하철 무임수송은 19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도입됐다. 이후 국가유공자, 장애인, 독립유공자 등으로 확대됐다. 도입 당시만 해도 전국의 노인 인구 비율은 5.9%에 불과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노인의 비율은 18%에 이른다.
노인 지하철 무임수송은 임의규정이다. 노인복지법 제26조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65세 이상인 자에 대해 공공시설을 무료 또는 할인해 이용하게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반면 장애인 지하철 무임수송은 강행규정으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자체가 노인 무임수송을 중단을 도입하기에는 현실적인 부담이 크다. 무엇보다 노인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2018년 보건복지부가 전국 만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지하철 무임승차에 대해 67.6%(매우 동의 11.7%, 동의 55.9%)가 ‘유지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또한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통연구원은 2015년 발표한 자료를 통해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는 노인 활동을 증가시켜 자살 및 우울증 감소, 교통사고 감소, 의료비 절감 등 총 3361억 원의 편익을 발생시킨다”고 분석했다.
즉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의 예산 지원이 힘들다면, 정부 차원에서 절충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령화 사회인 만큼 무임승차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노인의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로 상향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2021년 서울연구원은 “노인 연령을 기존 만 65세에서 만 70세로 상향할 경우 무임손실을 최대 34%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밖에 노인의 무임승차 이용을 복잡한 출퇴근 시간 이외에 가능하도록 지정하거나, 한 달에 일정 시간만 이용 가능할 수 있도록 한도제를 적용하자는 의견도 제시된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확산되면서 셀프 계산대가 늘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키오스크뿐 아니라 마트처럼 물건을 사는 곳에서도 스스로 바코드를 찍고 계산하는 ‘셀프 계산대’가 많아진 것. 운영 측면에서는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이용법을 모르는 고령자에게는 무척 곤란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최근 일본에서는 셀프 계산대의 ‘빠름’과 반대로 ‘느림’을 강조하는 ‘슬로레지’(スローレジ)가 퍼지고 있다.
천천히 계산하는 ‘느린 계산대’
최근 일본에서는 ‘슬로 레지’(느린 계산대)가 주목받고 있다. 영어로 ‘느린’을 뜻하는 slow와 일본어로 ‘계산대’를 뜻하는 レジ의 합성어다. 슈퍼마다 부르는 이름과 운영 방법 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고령자나 장애인을 위해 ‘천천히 계산해도 되는’ 계산대를 따로 만들었다. 빠른 계산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셀프 계산대와는 반대되는 행보다.
느린 계산대는 2019년 이와테현 타키자와시 슈퍼마켓에서 처음 시작됐다. 치매가 있는 고객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계산을 도와주면서 ‘슬로우 쇼핑’이라는 개념이 소개됐다. 이후 후쿠오카 현(福岡県) 유쿠하시 시(行橋市)의 유메타운 미나미유쿠하시(南行橋) 지점에서 2020년 7월부터 시범적으로 ‘슬로 레지’라는 고령자 전용 라인을 설치해 운영했다. 이 지점 쇼핑객의 약 40%가 60대 이상인 것을 반영한 조치였다. 처음에는 월 2회 오후 2시간만 운영했는데, 이용자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2021년 1월부터는 상설 가동하고 있다.
느린 계산대에 있는 직원들은 ‘천천히 말하고, 고객의 이야기를 잘 들으며,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줄 것’을 교육받는다. 더 특별한 점은 이 계산대를 치매가 있는 고령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직원 중 40여 명이 ‘치매 서포터 양성 강좌’를 수료한 뒤 현장에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점원들의 배려가 입소문이 나면서 점포를 이용하는 사람이 더욱 늘었다. 유메타운은 해당 지점 외에 약 64개의 점포에도 느린 계산대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후쿠이(福井)현의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식품매장 허츠(Hearts)는 2022년 ‘느긋하게 레인’(ゆっくりレーン)을 시범 운영했다가 반응이 좋아 4월부터 전 점포에 도입했다. 처음에는 주 1회로 운영했지만 11월부터는 매일 운영한다. 느긋하게 레인에는 ‘바쁘신 고객들은 별도의 계산대를 이용해 주세요’라는 안내 배너를 설치해 고령자가 초조해하지 않고 계산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한 고령자 전용 계산대에 있는 직원들에게는 전용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한다. ‘큰 소리로 또박또박 발음할 것, 무거운 바구니는 옮겨줄 것, 영수증은 별도로 전달할 것’ 등을 특별히 강조한다. 지역 인구의 절반이 고령자가 되어가는 일본에서 고령화 시대에 발맞춰 느린 계산대의 도입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바코드는 직원이, 계산은 고객이 ‘세미셀프 계산대’
느린 계산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대중화된 건 아니다. 일본의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계산대는 보통 세 가지다. 바코드로 물건을 찍는 것부터 계산까지 모두 직원이 해주는 ‘일반 계산대’, 바코드는 직원이 찍어주지만 정산은 본인이 하는 ‘세미셀프 계산대’,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하는 ‘셀프 계산대’다.
일본의 ‘2021년 슈퍼마켓 연차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279개 기업 중 셀프 레지(셀프 계산대)를 설치한 기업의 비율은 23.5%에 달한다. 51개 점포 이상을 보유한 대기업의 경우 70.6%의 설치율을 보였다. 그만큼 셀프 레지 이용자도 늘었다. 야후 뉴스와 IT미디어 비즈니스가 공동으로 진행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7.8%가 셀프 계산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거나 ‘가끔 사용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셀프 레지라고 해서 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항상 근처에 직원이 있어서 사용법을 알려주거나, 오류가 나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세미셀프 레지’(세미셀프 계산대) 설치율이 더 높다.
‘2021년 슈퍼마켓 연차통계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기업 중 세미셀프 계산대 설치율은 72.2%에 달한다. 대기업(51개 점포 이상 보유) 설치율은 94.1%로 대부분이며, 지역밀착형(4~10개 점포 보유) 슈퍼도 71.8% 설치율을 보였다. 1~3개 점포를 운영하는 지역 슈퍼에서도 58%에 달하는 곳이 세미셀프 계산대를 운영한다. 반면 지역밀착형이나 지역 슈퍼는 셀프 계산대 설치율(각 39.3%, 12.8%)이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도 코로나 이후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 셀프 계산대 도입이 크게 늘었다. 특히 편의점의 경우 주간에는 직원이 상주하고 야간에는 무인으로 운영하는 ‘하이브리드 점포’가 늘었다. 일본의 세미셀프 계산대는 무인점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계산 방법에 있어서 직원의 개입이 얼마나 되느냐는 정도의 차이일 뿐 항상 직원이 있기 때문이다. 셀프 레지조차 근처에 1~4명의 직원이 대기하며 고객의 불편함을 주시하고 도와준다.
지역으로 갈수록 셀프 레지 설치율이 낮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형 슈퍼야 직원이 많기에 셀프 레지에 도움을 줄 직원을 둘 수 있지만, 인원이 적은 슈퍼일수록 오히려 셀프 레지가 할 일이 더 많아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고독 줄여주는 ‘커뮤니케이션 계산대’
느린 계산대는 일본 이전에 유럽에서부터 시작했다.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슬로우 쇼핑’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으로 퍼졌다.
유럽의 느린 계산대는 ‘대화를 한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네덜란드의 슈퍼마켓 윰보(Jumbo)는 2021년 ‘수다 전용 계산대’를 설치했다. 전체 점포의 약 30%에 해당하는 200개 점포에 도입했다. 이는 네덜란드의 75세 이상 고령자의 33%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조사에서 시작됐다. 외로움은 건강에 영향을 주기 때문. 혼자 살며 고독한 노인들이 계산할 때만이라도 누군가와 대화하며 외로움을 해소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시작됐다.
프랑스의 까르푸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슈퍼에는 코로나19 유행으로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수다 전용 계산대’를 만들었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늘 들르는 슈퍼에서 잠시 계산원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다는 취지다. 2022년 1월에 시작된 ‘수다 계산대’는 한 달 만에 150대로 늘었다. 뜻밖에 10대부터 고령층까지 매우 다양한 연령층이 이용한다고.
이미 세계에서 고령화율이 가장 높고, 2025년 단카이 세대(1947~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가 노인이 되는 시점에서는 고령 친화적인 장치들이 더욱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이미 녹색 신호등 점등 시간을 늘리거나,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 속도를 느리게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시간을 연장하는 등 고령자가 편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본의 주요 언론은 고령 친화 사회의 맥락에서 느린 계산대나 세미셀프 계산대의 장점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꼽는다. 뒷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계산대라는 점도 물론 좋지만, 이 과정에서 계산원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 또한 치매 노인이 스스로 물건을 구매하고 갈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치매 전문의 칸노 토시아키(紺野敏昭)는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치매가 있는 사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어한다”면서 “쇼핑을 스스로 하면서 주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와 접점도 생긴다”고 느린 계산대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다.
고령화 속도 세계 1위. OECD 노인 빈곤율 1위. 하지만 아무도 노인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활동적인 시니어가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를 이뤄가고 있는 스타트업 ‘내이루리’의 탄생 배경이다.
‘내이루리’는 60세 이상 시니어 배송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해 물류 정기배송을 대행하는 서비스 ‘옹고잉’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이다. 물류 시장이 앞으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본 정현강 내이루리 대표는 시니어에게 적합한 배송 서비스를 고민했다. 처음에는 ‘실버라이닝’이라는 회사로 시니어가 살아온 동네에서 도보로 배달하는 ‘할배달’ 서비스를 론칭했다. 하지만 불규칙한 배송 주문과 길 찾기의 어려움으로 일을 지속하는 시니어가 많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시니어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의미를 담아 ‘내이루리’로 사명을 변경하고 ‘옹고잉’이라는 정기배송 및 수거 대행 서비스를 론칭했다.
근속률 90% 실버 배송원
옹고잉 서비스는 2021년 11월 29일 차 한 대로 시작했다. 2022년 10월 기준 옹고잉의 배송원과 보유 차량은 45명과 45대가 됐다. 월 발생 정기배송 물량은 11만 3000인분. 배송 지연율은 0.3%에 불과하다. 내이루리 매출은 2022년 6억 원으로 1300% 성장했으며, 누적 13억 3000만 원을 투자받았다. 정규직 고용률은 90%, 근속률도 90%에 이른다. 정현강 내이루리 대표는 “자신이 일을 해보고 주변 지인에게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제안한다는 건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는 것 아닐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단순 일자리 제공뿐 아니라 시니어 배송원을 ‘프로’라고 부르며 그들의 자존감과 성취감도 높여주고 있다.
정 대표는 실버라이닝에서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정기배송 시장을 공략했다. 같은 업체에 고정 배차를 통해 주기적인 배송을 하는 것으로, 시니어가 예측 가능한 시각에 원하는 시간만큼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옹고잉 배달원 근무 시간은 3시간, 6시간 중 고를 수 있으며, 하루 4.5시간 근무 기준 월평균 임금은 125만 원 수준이다.
또한 길 찾기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시니어에 특화된 UX, UI를 반영해 배송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배송 스케줄, 배송 시간 예측, 물품 오배송 방지 등 정기배송 맞춤 기능을 스마트폰으로 전화나 문자 이용만 가능하다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내이루리의 최적 배송 경로 생성 기술 및 머신러닝 기반 알고리즘 개발 역량을 인정해, 지난해 9월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 ‘팁스’를 통해 2년간 총 5억 원의 개발·연구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 대표는 “학력이나 소득 수준과 별개로 시니어의 상황 판단 능력과 인지 능력은 아무래도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특정 색깔의 버튼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각인시켜드리고 과정을 단순하게 해 시니어에게 적합한 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전국을 넘어 세계로
옹고잉은 정규 배송원을 각 사에 전담 배치해 배송이 안정적으로 이뤄진다. 또한 배송 외에 음식 용기 수거 서비스나 고객사 요청에 맞춘 케이터링 서비스도 진행한다. 이에 고객사 만족도도 높다. 처음에는 전체 물량의 5%만 주었던 한 고객사는 이제 60%의 물량을 옹고잉에 맡긴다. 업계에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먼저 찾아오는 고객사도 생겼다. 시니어 배송원 고용을 늘리면서 그만큼 일자리를 더 만들기 위해 고객사를 확장할 계획이다. 또한 앞으로는 다회용기, 세탁물, 폐기물 등 정기 수거·회수 시장으로 서비스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정기배송을 넘어 마지막에는 시니어 인력 매칭 플랫폼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다. 시니어가 배우기에 쉬우면서, 하루에 짧은 시간 일할 수 있되, 생활임금 이상 보장될 수 있는 일자리를 계속해서 발굴할 계획이다. 배송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기업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자리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다. 또한 서비스 지역 역시 전국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중국 등 고령화가 심각한 동아시아 시장 진출까지 생각하고 있다. 정 대표는 “한 기업이 낼 수 있는 임팩트 크기의 끝까지 가보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정현강 대표
“가치있는 일자리를 향해”
“저희의 목표는 ‘부모님께 권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면접을 하면서 많은 시니어분들을 만나보았는데, 단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소비하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하다가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외딴 바다에 혼자 떠 있는 섬 같다고도 표현하셨습니다.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을 할 수도 있지만, 일정한 루틴을 원하셨어요. 그만큼 소속감을 가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간담회에서 감사하게도 ‘우리 회사가 오래가야 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배송 시장에서 수백만 개의 시니어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만큼, 성장을 이어가며 시니어분들이 일을 통해 활력을 얻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되겠습니다.”
옹고잉 배송원이 되고 싶다면?
▶ 옹고잉은 2023년 정규 배송원을 50명에서 15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배송원 신청은 △서울시50플러스재단 △서울 강남구 시니어클럽 △대한노인회 강남구지회 △옹고잉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 옹고잉에서 배송원으로 일하려면 기본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해 전화와 문자가 가능하면 된다. 또한 운전은 필수다. 배송 서비스 태도가 좋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지원하면 내이루리에서 3일간 동승 교육을 진행하므로 부담 없이 신청해보자.
무인 매장 창업
최근 편의점, 카페, 문구점, 반찬가게 등 다양한 분야의 무인(無人) 매장이 늘고 있다. 노동력, 수익성 등을 프랜차이즈 창업과 비교해 살펴보길 권한다.
1인 지식 창업
중장년의 경험과 경력을 살릴 수 있는 분야다. 개인의 꿈, 비전, 가치관, 전문성, 재능 등을 브랜드화 하는 ‘퍼스널 브랜딩’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술 창업
독거노인용 반려로봇 개발 및 빅데이터 기반 노인 안부 확인 사업 등 고령화시대 기술 창업이 유망하다. 청년과의 세대융합형 기술 창업도 가능하다.
온라인 창업
노후 자금을 과하게 투자해 실패로 인한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보다는 소자본 또는 무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온라인 창업이 주목받고 있다.
창업 지원 기관 및 프로그램
창업진흥원 창업에듀, 예비창업패키지, 혁신창업스쿨 진행
중장년기술창업센터 멘토링 및 사업화 연계 지원
신사업창업사관학교 꿈이룸, 드림스퀘어 운영
[전문가 20人 리스트]
▲강소랑 서울시50플러스재단 정책연구팀 박사
▲김갑용 이타창업연구소 소장
▲김경환 성균관대 글로벌창업대학원 원장
▲김숙응 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교수
▲김중진 한국고용정보원 미래직업연구팀 연구위원
▲김찬흥 국민은행 경력컨설팅센터 센터장
▲권정훈 ‘장사 권프로’ 채널 유튜버
▲문성식 창직교육협회 이사장
▲박영란 강남대 실버산업학과 교수
▲박지혁 초고령사회 뉴노멀라이프스타일연구소 소장
▲변영조 한밭대 중장년기술창업센터 센터장
▲신철호 상상우리 대표
▲심우정 한양대 실버산업학과 교수
▲유연성 언더독스 본부장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
▲이진서 인생다모작연구소 소장
▲전혜진 이지태스크 대표
▲조연미 리봄 시니어플래너 대표
▲한희윤 신한은행 은퇴사업부 수석
▲희유스님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 센터장
2060년에는 유럽 인구의 1/3이 65세 이상일 것이라는 전망치가 쏟아진다. 유럽 각국은 고령화 사태를 주시하며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 중 독일은 통상적인 ‘선진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 문제에 대면한 국가다. 1932년에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1972년에 고령사회, 2008년에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가 되었기 때문.
[노인돌봄, 지역사회가 열쇠다]에서 두 번째로 소개할 국가는 독일이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고령화 문제를 떠안은 독일의 지역사회에서는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등받이 설치‧공중화장실 개방으로 고령자 챙긴다
독일연방노인문제연구소(Deutsches Zentrum für Altersfragen)는 고령화 관련 조사와 연구, 정책 컨설팅, 정보 제공 활동을 펼치는 연구 기관이다. 차수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한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하며, 1993년 1차 보고서 이후 3~5년 간격으로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발간하는 노년보고서(Der Altenbericht) 작성을 담당하는 명예전문위원회는 이 연구소에서 운영되고 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발간한 ‘50+해외동향리포트’에 따르면, 독일 정부가 2016년 발간한 노년보고서는 ‘공동체 내에서의 돌봄과 책임’을 주제로 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집과 사는 동네 위주로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사는 동네에 대한 애착과 안정감이 커져 지역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WHO는 ‘고령친화도시’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우수한 고령친화도시의 정책 사례들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라데보름발트시의 외부 시설이 소개됐다. 이는 201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고령친화도시 프로젝트’ 팀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도시 인구의 22%가 60세 이상인 라데보름발트시 역시 WHO의 8가지 요건을 근거로 고령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우선 고령자협의회의 주도로 도시의 모든 벤치에 등받이를 새로 설치해 노인들이 쉽게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길을 지날 때에는 불편하지 않도록 연석(도로경계석)의 높이를 낮췄다. 도로에 특수 포장 돌을 깔고, 독일 행정부가 설치한 특수 흰색 자갈을 이용한 횡단보도로 시력이 저하된 노인이나 시각 장애인의 접근성‧안전성을 높였다.
WHO가 ‘외부 환경 및 시설’ 영역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고령친화적 항목 중 하나는 ‘충분한 공중화장실’이다. 이에 라데보름발트시는 정부가 조성한 ‘Hürxthal 시민센터’(원문 Meeting House of Hürxthal)에 배리어프리 화장실을 추가로 설치했다. 대부분의 공중화장실에서 사용료를 내야 하는 독일이지만, 라데보름발트시의 모든 식당에서는 고령친화 환경 조성의 일환으로 화장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도심 내 동측 거리의 공중 화장실 개조 공사가 이뤄졌다. 이외에도 라데보름발트시에서는 고령층이 바깥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 장애물이 되는 요소를 찾아내기 위한 노인협의회의 정기점검이 이뤄지고 있다.
사회참여 위해서 정부‧지역사회‧민간 삼박자 맞아야
삶의 질을 보장하려면 거주 환경 뿐 아니라 사회적 참여 및 소통의 기회가 충분해야 한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이슈리포트에 실린 ‘독일 중‧고령자의 고용 및 사회참여’ 연구에 따르면, 독일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자원봉사제도를 운영하며, 민간의 자원봉사 활동에 대해서도 세제 혜택을 지원하고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봉사제도에는 나이 제한이 없어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 모두가 참여 가능하고, 참여자는 활동기간 동안 용돈과 활동비를 지급받는다. 이외에도 독일의 고령자들은 ‘무보수 명예직’(Ehrenamt) 제도나 노인자체결성조직인 ‘노인사무국’(Altenbuero)을 이용해 자원봉사에 나선다.
‘시니어사무소’(Seniorenbüros) 역시 고령자의 사회참여를 돕는 기관 중 하나다. 50세 이상 시민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봉사활동, 기업 연계 프로젝트 등 다양한 활동을 지원한다. 독일 내 약 450개의 노인 사무소가 있으며, 각 사무소는 동네에 거주하는 50세 이상 중장년을 위해 자원봉사활동이나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소개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50+ 해외동향리포트 2018’에서는 시니어사무소의 우수 사례로 베를린의 ‘시니어컴퓨터클럽 베를린 미테’를 소개했다. 이곳은 전문적인 시니어 컴퓨터 기관으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숙박이나 항공권을 인터넷으로 예약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초보자를 위한 일반 컴퓨터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컴퓨터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60세 이상 세대들이 참여하는 컴퓨터 게임 개발 프로젝트까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폭이 넓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스타트업 회사와의 연계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이용하는 시니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세대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고령자가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독일 연방가족부(BMFSFJ)가 실시하는 ‘독일자원봉사조사’(Deutscher Freiwilligensurvey)에 의하면 65세 이상 연령대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2019년 31.2%에 달했다. 이들 중 22.2%는 주당 6시간 이상을, 25.8%는 주당 3~5시간을 자원봉사활동에 사용하고 있어 다른 연령대에 비해 많은 시간을 자원봉사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중‧고령자의 고용 및 사회참여’ 연구의 저자는 “독일의 사례를 고려할 때, 고령자의 사회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25년 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층의 기초체력 유지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기초체력 유지는 중장년 건강과 삶의 질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일반 성인은 체력 증진 또는 만성 질환의 예방이 ‘건강한 삶’의 주목적인 경우가 많다. 반면 일과 중 대부분을 실내에서 활동하는 노인들의 경우 타인이나 보조기구에 의지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해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생활에 필요한 근력·근지구력·유연성·보행 능력 등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체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국민의 체력 및 건강증진을 돕고자 ‘국민체력100’을 운영하고 있다. 국민체력100은 국민 체력 수준 저하 및 비만 인구 증가, 국가의 대국민 체력관리서비스 제공 필요성 증가, 초단기 고령사회 진입 및 국민 평균수명 연장 사회간접비용 증가 등의 이유로 시행하게 됐다.
전국 약 75개소의 국민체력인증센터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연령별 무료 체력 측정 서비스를 제공한다. 체력 검사는 유소년기(만 11세~12세), 청소년기(만 13세~18세), 성인기(만 19세~64세), 어르신(만 65세 이상) 등 연령별로 각 검사 항목을 다르게 구분해 진행한다.
65세 이상 어르신은 일반 성인과 건강 체력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측정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악력 측정,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 의자에 앉아 3m 표적 돌아오기, 앉아 윗몸 앞으로 굽히기, 6분 걷기, 2분 제자리 걷기, 8자 보행 등의 항목이 있다.
측정 이후에는 체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개인별 맞춤형 운동을 처방하고, 체력 수준에 따라 국가 공인 인증서를 발급한다. 체력 인증 단계는 성별, 연령별 각 검사 항목의 백분위와 해외의 체력 인증 단계를 참고해 △최소한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체력 수준(3등급) △활발한 신체활동 참여에 필요한 체력 수준(2등급)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해 활력적이고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체력 수준(1등급)으로 나뉜다.
체력인증센터에서 검사받아보고 싶다면, 국민체력100 공식 홈페이지 회원가입 후 체력측정신청서를 작성하면 된다. 혹은 홈페이지에서 ‘내 주변 체력인증센터’를 확인하고, 해당 센터에 방문·전화 접수도 가능하다.
한편 국민체육진흥공단은 2023년, 민간협업을 통해 국민체력100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고 밝혔다. 디지털 기반 체력측정 신규 모델을 개발하고, 국민체력인증의 간편 버전인 헬스업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스포츠시설을 현행 10개소에서 100개소까지 확대한다. 아울러 체력인증센터와 공공스포츠클럽에서 운동하는 국민이 이용할 수 있는 ‘스포츠 마일리지 서비스’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노화를 겪는 몸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둔, 노인의 나라에서 돌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돌봄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OECD는 2040년 우리나라가 2040년에 세계에서 요양 서비스 인력이 가장 부족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치를 냈다.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빨라 벌어진 일인데, OECD는 2040년까지 노인돌봄인력을 140% 이상 충원해야 한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게다가 노인 스스로가 대표적인 노인돌봄시설인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등의 장기요양기관 입소를 원치 않는다. 노인 스스로가 지역 사회를 떠나기 싫어하는 것은 다양한 통계자료로 검증된 사실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의 83.8%가 건강할 때 현재 집에서 거주하기를 원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은 거동이 불편해져도 재가 서비스를 받으며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다. 살던 집에서 노후를 보내고, 그간 맺어 온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서 정서적 안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지역사회’에 주목한다. 서울연구원의 도시사회연구실 연구위원들은 책 ‘노인을 위한 동네-고령친화 지역사회 만들기’에서 고령화 시대에 적합한, ‘고령친화사회’의 열쇠가 노인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동네에 있다고 말한다. 지역사회 안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노인에게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
그러나 저자들이 책에서 짚었듯, “하나의 정책만으로 오랜 시간 고성장 산업화에 맞춰 형성되어 온 우리 도시와 동네가 금세 노인도 행복한 삶터로 바뀔 수 없다.” 노인이 집을 떠나 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삶의 직접적 공간이 되는 지역사회가 ‘노인이 살기 좋은 동네’로 재편돼야 한다는 것.
이에 미국, 독일, 영국 등 선진국은 취약계층인 고령층을 위해 어떤 지역사회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차례는 미국이다.
WHO 기준 맞춰 운용, 뉴욕‧포틀랜드 참고해야
세계보건기구(WHO)는 노인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표한 바 있다. WHO는 2006년부터 ‘고령친화도시’ 프로젝트를 시행해오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세계적 문제로 대두된 고령화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도시에서 거주하는 노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교통, 주거, 사회참여 등 8개 영역, 84개 세부항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이에 부합하는 지역에 고령친화도시 인증을 부여한다. 지난해 말 기준 51개국, 1445개 도시가 가입해 상호 교류 중이며, 국내에는 서울 도봉구, 영등포구, 마포구, 전라북도 완주군 등 40개 지자체가 가입 완료된 상태다.
지난 2007년 ‘고령친화 뉴욕’ 정책을 발표한 뉴욕시는 201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령친화도시에 가입했다. 이에 걸맞게 뉴욕은 고령자에게 친절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정책들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고령친화 안전도로조성사업을 통해 버스정류장의 휴식시설을 늘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택시 바우처를 개발하는 식이다. 또한 고령자 커뮤니티 지원 사업을 통해, 고령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고령친화지구’로 지정하고 교통 편의나 사회적 교류 활동 등을 지원한다.
포틀랜드의 사례도 눈여겨 봄직하다. 2006년 미국에서 최초로 WHO 글로벌 고령친화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일한 도시로, 현재까지도 주택, 교통, 디자인 등 물리적 환경에 중점을 두고 보다 고령 친화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시 정책을 펴고 있다. 지역사회 내 50세 이상 중장년이 어린이를 가르치는 튜터링 자원봉사 프로그램 역시 성과를 내고 있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중장년 튜터 97%가 학생의 학업 성취도에 만족한다고 답변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 중 57%가 읽기 쓰기 능력이 향상되는 결과를 얻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주택 수리비 지원하고 대중교통 시설 정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국제사회보장리뷰’ 2022 가을호에 실린 ‘미국의 고령친화 지역사회 정책’ 연구에 따르면, 미국 연방정부도 WHO의 기준에 근거해 고령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는 노인이 거주하는 집 안의 위험 요소를 줄이고, 주택의 안전 및 기능을 향상함과 동시에 주택을 소유한 저소득층 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연 3천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한다. 프로그램은 화장실의 미끄럼을 방지하고 단차를 제거하거나, 안전바‧손잡이를 설치하고, 보조의자나 가정용 리프트를 두는 식으로 진행된다.
집을 수리할 금액을 마련하기 어려운 노인들을 위한 금전적인 지원도 있다. 농무부는 △거주지 중위소득 50% 미만이며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실거주자이고 △62세 이상 노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대출금 상환이 어려운 자는 최대 1만 달러, 대출 받을 자격이 인정된 노인은 대출금 4만 달러를 합쳐 최대 5만 달러를 지원받을 수 있다.
미국 연방정부의 노인 대상 교통 지원 프로그램은 ‘미국노인법’(Older Americans Act)에 기초한다. 고령자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에 의한 노인 교통 지원 프로그램은 노인과 장애인의 이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교통수단이 부족한 지역의 비영리기관에 예산을 지원한다. 예산은 교통수단의 유지‧보수, 휠체어 관련 장비 구매, 대중교통 운행 시간표와 같은 정보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분야에 쓰인다.
이러한 교통 지원 프로그램은 노인을 돌보는 가족 요양인도 이용할 수 있다. 미국노인법의 ‘가족 요양인지지 프로그램’ 중 하나로, 이외에도 가족 요양인에게 상담이나 자조모임, 요양자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60세 이상 노인이나 알츠하이머‧치매 환자를 돌보는 18세 이상의 가족 요양인 혹은 55세 이상의 친척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당연해진 사회, 인터넷 요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대면 사회 교류를 돕는 곳도 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2021년 ‘EBB’(Emergency Broadband Benefit) 프로그램을 통해 저소득 노인에게 매달 최대 50달러의 인터넷 요금 할인을 제공했다. 프로그램의 자격 요건을 충족한 이용자들은 노트북이나 컴퓨터를 구매할 때 최대 100달러의 할인까지 받을 수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고령자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미국이지만 한계는 있다. ‘미국의 고령친화 지역사회 정책’ 연구의 저자는 “동‧서부의 큰 도시에만 정책이 몰려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작 시골에 사는 노인들은 지원 프로그램이나 혜택에서 빗겨나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를 대비해야 할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