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내 재산을 후대에 잘 이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이번에는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어놓은 세계 부호들이 준비하는 인생 마무리에 대해 풀어볼까 한다. 세상 돈 많기로 소문난 부자들 미담 대부분 역시 돈. 똑똑하게 굴려놓은 재산을 내 자손뿐만 아니라 사회 모두가 쓸 수 있도록 물려주는 부자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보자.
죽기 얼마 전 유언장 다시 쓴 리처드 커즌스 회장
작년 12월 31일. 호주 시드니 근교에서 관광용 수상 비행기가 추락해 조종사 포함 6명이 전원 사망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이들은 세계 최대 식음료 출장 서비스 업체 영국 컴퍼스 그룹의 리처드 커즌스(58) 회장 일가족이었다. 두 아들은 물론 커즌스의 약혼녀, 약혼녀의 딸까지 한날한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기업 회생 전문가였던 커즌스. 그는 생전 기울어가는 회사들을 살리고 고용 안정을 이끌어내던 탁월한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아왔다. 사고 후 잊히는가 싶었던 커즌스 회장의 이야기가 8월 말 해외토픽을 타고 날아들었다. 그가 남긴 유산 4100만 파운드(약 600억 원)가 영국에 근거지를 둔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에 기부됐다는 소식이었다. 당초 커즌스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죽기 1년 전 혹시 두 아들과 자신이 모두 죽게 될 경우 재산 대부분을 옥스팜에 기부하겠다는 ‘공동비극조항’을 유언장에 삽입했던 것. 사고만 없었더라면 훗날 두 아들이 받을 유산이었다. 그렇다면 왜 커즌스는 옥스팜을 굳이 지목했을까? 한국에도 지부가 있는 옥스팜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국제구호기구다. 그러나 2011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구호 현장에서 벌어진 옥스팜 활동가의 성 매수 파문으로 도덕적 치명타는 물론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이로써 7000여 명의 정기후원자가 집단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고인의 유언 덕에 기적적으로 구호 중단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유언에 따른 커즌스 회장의 기부 소식과 함께 옥스팜 이름이 거론되면서 스캔들 때문에 잠시 잊었던 구호의 중요성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재산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작년 7월 미국 CNBC의 에미 마틴 기자가 CNBC 인터넷 판에 쓴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기로 한 7명의 억만장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녀의 68%가 상속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부모는 40%만이 자식에게 유산 상속 용의가 있다고 했던 것.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 왕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선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우려섞인 말을 했다. 게이츠는 “부모가 남긴 돈을 자식들이 온전하게 지킬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의 인생을 제대로 걸을 수 없게 한다”고 했다. 버핏 또한 1986년 경제전문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충분한 돈을 남기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의 유산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게이츠 부부는 2011년 영국 ‘데일리메일’을 통해 “재산 810억 달러 중 자녀 3명에게 각각 소량의 돈을 상속할 것”이라고 했다. 버핏 또한 3명의 자녀에게 각각 20억 달러만 남겨줄 계획이라고.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의 개인 재산은 올해 기준 840억 달러다. 게이츠 부부는 2000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해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이후 버핏도 막대한 재산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과 죽은 부인의 이름을 딴 ‘수잔톰슨버핏재단’ 등 5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올해 기부액만도 34억 달러다.
유산을 자식에게 남기지 않겠다는 또 다른 이가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크다. 2015년 첫딸 맥스가 태어났을 때, 그와 아내 프리실라 저커버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딸이 살아갈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기를 원하기에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말이다. 딸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모든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 이 젊은 부호 부부의 생각이었다.
영국의 인기 셰프 고든 램지 또한 순순히 남매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4남매는 각자 일을 해서 교통비와 전화사용료를 낸다고. 단, 남매들이 각자 자립할 때 아파트 보증금의 25%는 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자녀들이 밥 먹는 일도 흔하지 않은 일이고 여행할 때 일등석에 태우는 일도 결코 없다고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린 바 있다. 이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캐츠’의 유명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 또한 2008년 영국 일간지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그가 벌어들인 돈을 극장에 투자하고 음악가를 돕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영국 가수 스팅 또한 상속 대신 기부를 선택한 인물로 꼽힌다.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 회장의 은퇴 계획
중국 IT업계 거물이자 세계적인 유통 사이트 ‘알리바바’ 창업주인 마윈(馬雲·54) 회장이 내년 9월 10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윈의 쉰다섯 살 생일이자 친구 17명과 함께 중국 항저우의 작은 아파트에서 알리바바를 창업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연매출 41조 원, 지난해만 3300명이 훨씬 넘는 일자리를 창출해낸 마윈은 종종 은퇴에 관한 얘기를 해왔다. 구체적인 날짜와 시기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은퇴와 맞물려 그가 꺼낸 카드는 교육을 기반으로 한 자선사업이다. 최근 알리바바가 공식 웨이보에 공개한 마윈의 새 명함에는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그 자리에 ‘교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 사나이’라는 문구와 함께 ‘알리바바 탈빈곤펀드 주석’, ‘마윈 공익펀드 창업자’, ‘농촌교사대변인’ 등 자선사업 관련 약력이 눈에 띈다. 마윈은 이미 2014년도부터 마윈재단을 설립해 농촌의 교육 환경 개선과 자선사업에 불을 지피고 있다. 평소 롤모델을 빌 게이츠라고 말해왔던 마윈이기에 자선사업과 관련한 은퇴 계획에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다. 2017년 기준 ‘포브스’가 집계한 마윈의 재산은 43조 원에 달한다.
한국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상속이 기부로 이어지는 사례 혹은 은퇴 후 재단을 설립해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사례는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18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상속과 승계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사회 환원에 대한 고민이 전년에 비해 높아졌다고 한다. 상속과 관련해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견은 지난해 1.5%에서 8.7%로 7.2%포인트 증가했다. 금융자산 50억 원 이상 보유자는 사회 환원 의향이 17.4%에 달했다. 자식이 아닌 사회를 위한 기부에 자산가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부금액은 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23위다. 자산가들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한국에서도 기부왕이 나왔으면 한다.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어머니들, 여성들의 출중한 운동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었던 ‘여권통문’이다. 늦었지만 이 순간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시는 분들은 참 다행이다.
120년 전인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설시통문(女學校設始通文)’ 이른바 ‘여권통문(女權通文)’, 즉 여성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발표했다. 당시 뜻을 같이한 여성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은 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 선언으로 근대적 여권운동의 시작이며,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선 역사적 사건이다.
필자는 2012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권통문을 접한 그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 후 훌륭하신 선각자 여성 선배님들께 감사와 존경심을 지니게 됐고 여성사에 대한 깊은 관심 아래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여성 박물관들이 부러웠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번듯한 여성사 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부끄러웠다.
웅녀의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의 발전 역사는 5000년 세월,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훌륭한 어머니들과 언니, 누이들인 대단한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여성사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 남녀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다.
‘여권통문(女權通文)’. 이 여성인권선언문은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치참여권(참정권, 정치권), 노동권(경제활동 참여권, 직업권), 교육권 등 크게 3가지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남녀평등권으로서 교육권을 강조한다.
남녀동등권의 관점에서 여성 억압과 성 역할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부부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통제받지 않고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이다.
세 가지 권리 중에서도 교육받을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직업권, 정치권은 교육으로 많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종에게 관립 여학교 설치를 상소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처음 주장은 북촌의 양반 부인들이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도 참여했고, 남성들도 가담했다. 그 결실이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였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 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시작하며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순성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교장은 여권통문 발표 시 김소사인 김양현당이다. 순성여학교는 초등과정 학교로서 서울의 느릿골(지금의 연지동으로 추정)에서 30명 정원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이 사망한 후 재정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안타깝게도 소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권통문 발표에서 시작된 여권운동의 맥은 면면히 이어지며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때로는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 등은 여성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실천해온 여권운동 결과다.
1970년대만 해도 여성은 남자 형제의 대학 공부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업전선에서 일해 학비를 보태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과연 120년 이후의 우리들, 2018년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은 현재 어떤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일까? 여러 중요 척도 중 ‘여권통문’과 관련 있는 교육, 노동, 정치 참여 3가지만 살펴보려 한다. ‘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자료를 주로 참고하고 다른 필요한 통계자료도 인용한다.
첫째, 교육 척도
2005년 여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은 남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을 0.4%포인트 추월했다. 놀라운 약진이다. 2017년에는 여학생 대학교 진학률이 72.7%로 남학생(65.3%)보다 7.4%포인트 높다.
이런 현상이 14년간 계속되었으니 분명 33세 미만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고등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이전에는 남녀 모두 비슷한 대학교 진학률을 보였고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역전 상황이 14년을 지속했으므로 이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고학력 현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이자 사실이 지금의 사회현상과 앞으로 전개될 사회 변화에 미칠 영향은 지대하다.
여성에 대한 고려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 현실을 모두 직시하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 직업전선에서의 여성들이 받는 대우는 민주주의 사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둘째, 경제 분야
여성 고용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생애주기별, 즉 나이별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고용현장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2017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90.2%인데 실제 여성 고용률은 50.8%다.
남성 고용률 71.2%에 비하면 그 차이가 20.4%포인트나 된다.
여성 월평균 임금도 남성 임금의 67.2% 수준이다. 남녀 동일임금은 요원하다는 의미다. 국제사회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고용상황은 하위에서 맴돈다.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냉담하다.
셋째, 정치 참여
점점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여성 투표율(76.4%)이 남성(74.8%)보다 높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남녀 투표율이 57.2%로 같았으나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자 55.7%에 비해 여성은 53.1%였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여성 투표율(77.3%)이 남성(76.2%)보다 높았다.
2018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0.2%였다. 아직 성별 집계는 발표되지 않았다. 여성 선거참여율의 추이는 물론 우리 사회 여성의 동향을 잘 분석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 예측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성관리자 비율이 미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선거 참여는 높으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의정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회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아직 30%에도 못 미치고 남녀 동수로 가는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7년 행정부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여성 법조인은 26.1%, 의료 분야의 여성 비율(의사 25.4%, 치과의사 27.0%, 한의사 21.0%, 약사 64.0%)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아직 먼 여정이지만 여성들은 분명 약진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여성 권리 획득이 그냥 어느 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선각자들의 각성과 희생적 노력 덕분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 등 120년 전의 역사적 사건들과 여성들의 선구자적 운동의 힘이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다. ‘국립여성사박물관추진협의회’,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가 2012년 발족한 이래로 여성사학회,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을 기려왔다. 여성계를 넘어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올해 신용현 의원 대표발의로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고 여권통문의 날부터 1주간을 ‘여성인권주간’으로 정해 기념함으로써 여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려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 발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권통문’을 선언한 지 120주년 되는 2018년, 놀랍게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올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성평등, 양성평등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 바란다.
베트남이나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들이 세계여성의 날(3월 8일)과 각국 고유의 여성의 날을 모두 기념한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러운 우리 여성인권선언일을 기념하면 좋겠다.
9월 1일 국회에서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여권통문에 대한 연구 세미나도 함께한다. 더욱이 여성교육 수혜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여류 미술작가 120인들이 여권통문 120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민국에도 자랑스러운 ‘국립여성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촉구하는 전시회를 10월 내내 국회에서 연다. 우리 모두 축하하고 ‘여권통문’을 영원히 기렸으면 한다.
오래전부터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워야 했지만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어머니들, 여성들의 출중한 운동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었던 ‘여권통문’이다. 늦었지만 이 순간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시는 분들은 참 다행이다.
120년 전, 1898년 9월 1일, 북촌의 양반 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 통문(女學校設始通文)’ 이른바 ‘여권통문(女權通文)’, 즉 여성권리를 명시한 문서를 발표했다. 당시 뜻을 같이한 여성들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황성신문, 독립신문, 제국신문은 전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 선언으로 근대적 여권운동의 시작이며 세계여성의 날이 촉발된 1908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10년이나 앞선 역사적 사건이다. 필자는 2012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여권통문을 접한 그날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 후 훌륭하신 선각자 여성 선배님들께 감사와 존경심을 지니게 됐고 여성사에 대한 깊은 관심 아래 국립여성사박물관 건립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여성 박물관들이 부러웠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번듯한 여성사 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부끄러웠다. 웅녀의 단군신화 이래 우리나라의 발전 역사는 5,000년 세월, 헌신과 희생으로 점철된 훌륭한 어머니들과 언니, 누이들인 대단한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립여성사 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이 시대 남녀 모두의 역사적 사명이다.
‘여권통문(女權通文)’, 이 여성인권선언문은 ‘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치참여권(참정권, 정치권), 노동권(경제활동 참여권, 직업권), 교육권 등 크게 3가지 권리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남녀평등권으로서 교육권을 강조한다. 남녀동등권의 관점에서 여성 억압과 성 역할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워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참여하며, 부부 사이에도 여성이 남성에게 통제받지 않고 존중받을 것을 주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권리선언이다. 세 가지 권리 중에서도 교육받을 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다른 직업권, 정치권도 교육으로 많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종에게 관립여학교 설치를 상소도 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처음 주장은 북촌의 양반 부인들이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서민층 부녀와 기생들도 참여했고, 남성들도 가담했다. 그 결실이 1899년 한국인 최초의 사립 여학교인 ‘순성여학교’였다. 또한 여권통문 발표 이후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의 여성 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한국이 근대화를 시작하며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 단순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여학교(순성여학교)를 설치한 그 실천력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교장은 여권통문 발표 시 김소사인 김양현당이다. 순성여학교는 초등 과정 학교로서 서울의 느릿골(지금의 연지동으로 추정)에서 30명 정원으로 개교했다. 그러나 1903년 김양현당이 사망한 후 재정 등 여러 가지 제약으로 안타깝게도 소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권통문 발표에서 시작된 여권운동의 맥은 면면히 이어지며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때로는 여성교육운동, 농촌운동,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 여성투표권, 평등교육권 등은 여성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실천해온 여권운동 결과다. 1970년대만 해도 여성은 남자 형제의 대학 공부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이나 직업전선에서 일해 학비를 보태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었다.
과연 120년 이후의 우리들, 2018년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은 현재 어떤 삶의 한가운데 있는 것일까? 여러 중요 척도 중 ‘여권통문’과 관련 있는 교육, 노동, 정치 참여 3가지만 살펴본다. ‘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자료를 주로 참고하고 다른 필요한 통계자료도 인용한다.
첫째 교육 척도. 2005년 여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은 남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을 0.4%p 추월했다. 놀라운 약진이다. 2017년에는 여학생 대학교 진학률이 72.7%로 남학생(65.3%)보다 7.4%p 높다. 이런 현상이 14년간 계속되었으니 분명 33세 미만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고등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5년 이전에는 남녀 모두 비슷한 대학교 진학률을 보였고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역전 상황이 14년을 지속했으므로 이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고학력 현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상이자 사실이 지금의 사회현상과 앞으로 전개될 사회 변화에 미칠 영향은 지대하다. 여성에 대한 고려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 현실을 모두 직시하시면 좋겠다. 그러나 현재, 직업전선에서의 여성들이 받는 대우는 민주주의 사회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둘째 경제 분야. 여성 고용률이 조금씩 증가하고 생애주기별, 즉 나이별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고용현장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2017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90.2%인데 실제 여성 고용률은 50.8%다. 남성 고용률 71.2%에 비하면 그 차이가 20.4%p나 된다. 여성 월평균 임금도 남성 임금의 67.2% 수준이다. 남녀 동일임금은 요원하다는 의미다. 국제사회와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 여성의 경제·고용상황은 하위에서 맴돈다. 통계가 말해주듯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냉담하다.
셋째, 정치 참여에 관한 부분이다. 점점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여성 투표율(76.4%)이 남성(74.8%)보다 높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남녀 투표율이 57.2%로 같았으나.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자 55.7%에 비해 여성은 53.1%였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여성 투표율(77.3%)이 남성(76.2%)보다 높았다. 2018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0.2%였다. 아직 성별 집계는 발표되지 않았다. 여성 선거참여율의 추이는 물론 우리 사회 여성의 동향을 잘 분석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으며 미래 예측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여성관리자 비율이 미미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선거 참여는 높으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의정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회 및 지방의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아직 30%에도 못 미치고 남녀 동수로 가는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17년 행정부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여성 법조인은 26.1%, 의료 분야의 여성 비율(의사 25.4%, 치과의사 27.0%, 한의사 21.0%, 약사 64.0%)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아직 먼 여정이지만 여성들은 분명 약진하고 있다. 이렇게 이루어진 여성 권리 획득이 그냥 어느 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선각자들의 각성과 희생적 노력 덕분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여성인권선언인 ‘여권통문’ 등 120년 전의 역사적 사건들과 여성들의 선구자적 운동의 힘이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여성인권선언서다. ‘국립여성사박물관추진협의회’, (사)역사·여성·미래가 2012년 민간에서 발족한 이래로 여성사학회, 여성 단체를 중심으로 여권통문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 여권통문이 발표된 날을 기려왔고, 여성계를 넘어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제정하자는 움직임도 있어왔다. 올해 신용현 의원 대표발의로 매년 9월 1일을 ‘여권통문의 날’로 기념하고 여권통문의 날부터 1주간을 ‘여성인권주간’으로 정해 기념함으로써 여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려는 양성평등기본법 개정안 발의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권통문’을 선언한 지 120주년 되는 2018년, 놀랍게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올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성평등, 양성평등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 바란다.
베트남이나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들이 세계여성의 날(3월 8일)과 각국 고유의 여성의 날을 모두 기념한다. 우리나라도 자랑스러운 우리 여성인권선언일을 기념하면 좋겠다. 9월 1일 국회에서 ‘여권통문’ 선언 12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여권통문에 대한 연구 세미나도 함께한다. 더욱이 여성교육 수혜의 결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여류 미술작가 120인들이 여권통문 120주년을 기념하고, 대한민국에도 자랑스러운 ‘국립여성사박물관’이 건립되기를 촉구하는 전시회를 10월 내내 국회에서 연다. 우리 모두 축하하고 ‘여권통문’을 영원히 기렸으면 한다.
법무부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일반 교도소에서 출소한 6만 2624명 중 3년 이내에 24.7%가 재복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법무부 교정본부 통계에 따르면 출소 후 창업, 취업에 성공한 출소자 1670명의 재범률은 일반 출소자와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대부분 출소자들이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생계 문제를 꼽는 만큼 출소자의 취업이 재범을 방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 맞춰 일반 비영리법인 사회적기업에서 출소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일반기업으로는 최초로 법무부 인가를 받은 한울배터리 사회적협동조합 이명원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출소자들에게 취업은 사회와 출소자를 잇는 가장 효과적인 가교(架橋) 역할이 되고 있다. 이 업체는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취약계층 채용에 중점을 두고 사회 공익을 실천하는 비영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이며 예비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이명원 대표는 “전문기술 습득을 위한 직업훈련이 출소자 취업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재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배터리를 판매하거나 출장 교체 서비스 및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을 고용해 기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며 “갱생보호대상자 및 사회 취약계층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정본부의 구인·구직 만남의 행사에 참여하고, 직업 훈련을 통한 창업을 지원하고, 매출 수익금을 갱생보호대상자와 사회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사회 진출과 복귀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명원 대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체를 운영하던 중에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빚을 갚지 못해 결국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 절실함에 절망을 딛고 교육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였고,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었다. 출소 후 유통 분야 10여 년, 배터리 분야 9년 등 20여 년에 걸친 사업 경험을 토대로 서울시에서 3000만 원을 지원받고 무담보대출은행에서 1000만 원을 빌려 그 당시 받은 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전파하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업자 20여 명을 모아 힘을 합쳤다. 이로 인해 배터리업체를 열어 전국 30여 곳에 지점을 내면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이명원 대표는 “나 자신이 전과자였기에 재소자 내면에 엄습하는 현실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재소자들의 성공적인 사회 복귀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일을 하게 된 동기는 갱생보호대상자들은 출소 후에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다시 방황하며 결국 재범을 하게 되는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고, 당장 먹고살 걱정 때문에, 사회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수감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는 재소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과 더불어 자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으로 재범을 줄여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취약계층과 출소자들의 주요사업 특징과 그중 배터리사업을 대표사업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 출소자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창출, 창업지원, 기술교육 등은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것이 중요하기에 그 일환으로 자동차정비 기술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운영 리스크가 적고, 기술습득이 용이한 차량 및 배터리 사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요 사업 분야는 차량용 배터리, 산업용 배터리, 정류기반 배터리, UPS 배터리 설치 및 유지보수로, 조합원 모두가 다년간의 차량 및 배터리 분야의 사업 노하우를 지닌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차량에 관한 모든 상담과 업무가 가능하다. 한울배터리 서울 본점을 비롯해 전국 30여 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조합원 모두 개인사업자를 갖고 있어 분류상 사업자 협동조합인 것이 특징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사회복지사업에 환원되고, 갱생보호대상자 및 취약계층 결손가정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고용 인원 증대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배터리사업을 위주로 하는 시스템분야에서 2017년에 법무부 고용 실적 1위를 기록했다. 또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법무부, 교정본부,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과 연대하여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교정본부와 법무보호복지공단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많은 공공단체들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다. 법무부 사회적협동조합의 인가를 최초로 받은 취지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대한민국 인물대상(사회공헌부문)’ ‘2018 이노베이션 기업 &브랜드대상’ ‘2018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인물대상’ 등을 수상했다.
이명원 대표는 “회사 운영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 하는 것은 업무 시 직원들의 안전”이라며 “안전한 작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회적 적응 능력 배양과 더불어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나 개인적인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고민하고 들어주며 소통의 시간을 갖는 직장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전한다.
한울배터리사회적협동조합은 향후 출소자들 모두가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올해부터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갱생보호대상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설립하여 편안한 환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정비소 개설, 여성 출소자를 위한 크리닝사업부 신설 등을 계획하고 있고, 조합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해 출소자들의 경제 자립 프로세스 마련을 위한 방안도 꾸준히 마련할 계획이다. 향후 갱생보호대상자들에게 문턱이 높은 일자리, 기업 외면의 본질적 문제점을 분석·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술교육을 병행·고용을 확대함으로써 일자리 창출에서 나아가 창업을 위한 단계적인 서비스를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경사이신(敬事而信)의 마음으로 ‘함께 나눔, 함께 행복, 함께 발전’을 위한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노력하는 이명원 대표는 “갱생보호대상자의 창업교육과 기술교육, 각 구치소 및 교도소 교정본부 산하기관의 구인·구직 만남의 날 행사에 지속적으로 적극 노력할 예정”이라 밝혔다.
망망대해에 고깃배 한 척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떠 있다. 주변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바다에 튕겨 하늘로 솟아오르는 빛의 잔치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배를 때리는 파도소리만이 심해와 같은 적막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바다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온 고깃배가 자동항법장치와 통신장비의 고장으로 항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닻을 내리고 구조되는 행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도 있지만 연료가 소진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님을 선원들은 잘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실린 음식물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가입자들도 좌표를 잃으면 망망대해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의 선원들처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린 퇴직연금 적립금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년 말보다 16.3% 늘어난 147조원이다. 이 중 약 131조원, 즉 전체 적립금의 89%가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려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되어 있는 적립금은 10조원 정도로 전체 적립금의 6.8%에 불과하다. 나머지 4.2%는 운용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성 자금이다. 대기성 자금은 운용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원리금보장 상품에 보관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5.8%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경우 사실상 자산배분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산배분은 위험과 수익구조가 상이한 상품에 분산투자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개의 원리금보장 상품에 적립금을 나누는 것은 자산배분이라 할 수 없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집중된 결과 2016년 총비용 차감 후 퇴직연금 적립금 수익률은 1.58%에 머물러 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수익률인 셈이다.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은 1.72%,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은 -0.13%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안전지향적 적립금 운용 형태는 적어도 2016년만 보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장기수익률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6년 기준으로 5년 연환산 수익률과 8년 연환산 수익률은 2.83%와 3.68%로 1년 수익률보다 각각 1.25%p와 2.10%p 높다. 이는 과거의 원리금보장 상품 금리가 지금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8년 수익률만 놓고 보면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5.61%)이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3.05%)보다 2.56%p나 높다. 수익은 위험의 대가라는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역사적 저금리 기조와 길어진 수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제고된 그간의 상황을 감안하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도되어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행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닻을 내리고 구조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고깃배 선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원인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퇴직연금시장의 적립금 운용 관련 행태와 인간의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뇌 구조라는 양 측면에서 살펴보자.
목표가 없는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먼저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가입자의 적립금 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는 사용자가 납부한 부담금을 어떤 방식으로 굴릴지 결정을 해야 한다. 이를 운용 지시라고 부른다. 앞에서 살펴본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이 바로 운용 지시의 결과물이다. 감독기관의 통계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집계해 발표되지만 원리금보장 상품에도, 실적배당형 상품에도 수많은 상품들이 존재한다. 개별 가입 근로자가 수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 자신에게 적합한 상품을 고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운용관리기관이라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선별해 제시하도록 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상품을 제시할 때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을 함께 제공한다. 이를 상품 라인업이라고 하는데, 가입 근로자는 라인업된 상품 중에서 자신의 적립금을 굴릴 상품을 선택한다. 모든 사업자는 두 부류의 상품을 함께 제시하며 자산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배분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자산배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적립금의 일부라도 배정하면 자산배분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자산배분은 목표수익률을 정하고 가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위험수준 내에서 목표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립금을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산배분의 핵심은 목표수익률을 정하는 것인데, 희망하는 목표수익률을 묻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의 현주소다.
정확한 목표수익률을 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별로 노후 준비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몫을 계산하고 현재의 퇴직연금 부담금 규모와 앞으로의 전망치, 예상되는 가입기간, 금융시장 상황 등을 종합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로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인 퇴직연금사업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연금사업자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하며 “저금리 시대엔 실적배당형 상품을 편입해야 합니다! 중위험·중수익 투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쉬운 방법을 동원한다. 이 정도 방법과 노력으로 ‘퇴직금은 손해보면 안 된다!’는 강고한 유산을 깨트릴 수 없음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극도로 치우쳐 있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근로자별로 목표수익률을 쉽게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발 및 운영 인력 등 투자가 필요하다.
동물적 특징에 지배당하고 자극하는 현실
인간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있다. 또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선택도 있다. 어쨌든 수많은 선택들은 인간의 뇌에서 이뤄지는 신경학적 반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서 선택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전두엽(frontal lobe)과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다. 전두엽은 대뇌반구 앞에 있는 부분으로 이마엽이라고도 한다. 전두엽은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5만 년 전에 발달한 뇌의 한 부분으로서 합리적 판단과 장기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뇌변연계는 대뇌반구 내측 벽의 대뇌피질 아래에 고리처럼 감겨 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적·본능적 반응을 담당한다. 대뇌변연계는 작은 위험신호라도 감지되면 즉각적인 36계를 종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담당해온 중요한 부분이다. 즉 전두엽은 우리에게 장기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뇌변연계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요구한다. 퇴직연금처럼 장기간 운용해야 하는 자금은 전두엽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지만 대뇌변연계가 자꾸 훼방을 놓는다.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은 이란 책에서 “인간은 주로 대뇌변연계에 따라 움직이며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 험악하고 야만스럽고 짧은 경우에는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기대여명이 길어지고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합리적인 전두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퇴직연금은 장기자산이니 자산배분을 통해 적절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하는 게 맞다고 전두엽은 말하지만, 대뇌변연계는 퇴직연금은 안전하게 굴러야 하니 원리금보장 상품에 넣어두라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은연중에 대뇌변연계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개미투자자들의 실패한 투자 경험도 한몫한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이런 성향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금리가 1bp(0.01%)라도 높은 원리금보장 상품을 제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직연금 가입자의 속성과 영업실적에 대한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퇴직연금사업자의 속성이 맞물려 나온 결과가 원리금보장 상품 일변도의 적립금 운용행태인 셈이다.
퇴직연금 잘 굴리려면?
‘100세 인생’이 약방의 감초처럼 일상 대화에 등장하는 요즘 퇴직연금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 수명연장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후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공적연금 확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조노력 연금시대도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노후의 재정적 안정은 퇴직연금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뻔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 좋은 고과를 얻기 위해, 승진을 위해 내가 맡은 일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듯 금융과 연금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금융 지식이 해박한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도 연간 수익률이 1.3%p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주 큰 차이다. 만약 10만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할 경우 금융 지식이 많은 투자자들은 1만6000달러를 더 번다. 2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4만2000달러를 더 벌고, 3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14만5000달러를 더 번다는 결과가 나온다.
문제는 금융 지식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에 금융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의 수수료율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수수료율이 높다고 그 상품이 좋은 상품이고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금융 회사들이 제시하는 표면적인 금리수준이나 기대수익률 또는 과거의 성과만을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수수료율을 체크포인트의 하나로 꼭 첨가하자. 개별 금융상품의 수수료 관련 정보는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은 금융 지식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는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고 실천하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을 법정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은 법적으로 보장된 가입자의 권리다. 이 권리를 내팽개치지 말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금융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고 자산배분에 도전해보자. 자산배분을 했다면 그것에 안주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산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리밸런싱을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자산배분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거나 원리금보장 상품에 묻어놓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잘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가입자들이 목표수익률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리밸런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상생의 길이다.
낮잠. 어린이집에 간 손자, 손녀만 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낮잠 자는 시대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곳, 잘 곳을 찾아 나서고 있는 세상. 노곤하고 피곤한 삶을 보듬고 치유하고자 낮 시간 잠시라도 누울 자리를 찾고 또 내어주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낮잠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수면시간은 적고 스트레스는 높고 “낮잠을 팝니다.”
‘낮잠 카페’ 혹은 ‘힐링카페’가 도시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체인점화된 업체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업장까지, ‘잠’, ‘피로’, ‘힐링’이 산업의 아이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 책상에 누워 잠깐 쉬면 될 것이 사업이 됐다. 낮잠 카페 등 소위 ‘힐링 사업’이 늘어난 것은 한국인의 잠 부족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2014년 OECD 18개국의 평균 수면시간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7시간 49분으로 꼴찌. 1위 프랑스와 1시간 차이가 났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6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서 한국 노동자의 은퇴 시기는 2014년 기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동자 은퇴 나이가 남성 64.6세, 여성 63.2세인 것에 비해 7~8년은 더 오래 일하는 셈.
이렇게 잠 덜자고 일은 많이 하니 자연스레 낮잠, 피로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이OECD 34개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낮잠 이색 공간 ‘여의도 CGV 씨에스타’
현재는 여의도CGV에서만 운영하는데 이용객 추이를 살펴 점차 다른 지점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낮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은 바로 프리미엄관. 대체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잠들기 좋은 어두운 조명에 아로마 향과 뉴에이지풍 음악을 방안 가득 채운다. 좌석마다 촛불형태의 수면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한 허브티에 담요 등을 놓아 정말 낮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CGV 프리미엄관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이기에 그 어떤 관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왼쪽 팔걸이 안쪽의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쫙 펴지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다. 좌석은 좌우로 남성, 여성석, 중간 좌석은 커플석으로 배치했다. 이용자 양옆으로는 티켓을 판매하지 않아 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힐링 카페처럼 안마의자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안락한 의자에서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씨에스타에는 이용객을 살피는 ‘미소지기’가 상주해 잠을 깨워주는 등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여의도 유일한 낮잠 공간을 꼭 한 번 이용해 보시길.
이용 요금 1만원(음료, 담요, 안대, 실내화 등 제공)
낮잠 카페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낮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힐링 카페 두 곳을 찾아갔다. 고른 연령대가 이용한다는 체인형 힐링 카페인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명동점을 찾았다. 두 곳 모두 기본은 전신 마사지기를 이용한 서비스로 개인 부스와 커플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덧신과 손 세정제를 제공하는 것과 서비스 후 음료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이용해야 한다.
미스터힐링 (명동 인터내셔널점)의 장점은 음료를 마시는 공간(1,2층)과 휴식 공간(지하1층)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전신 마사지기 위에서 쉬는 동안 외부 소음이 적어 쉽게 숙면할 수 있었다. 실내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향과 낮은 조명, 음악, 부스마다 설치된 그림들이 휴식에 도움을 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심신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것이 이용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이용 요금은 30분 코스 9000원(20회/15만원)이고 50분 코스는 1만3000원(10회이용권/9만원)이다.
‘퍼스트클래스’ 는 공항을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 때문일까? 여행가방 하나쯤 들고 티켓 부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피로를 푸는 방 또한 항공기 1등석처럼 꾸며 놓아 재미를 더했다. 퍼스트클래스는 음료 카페와 마사지 부스가 같은 층에 있다. 대신 마사지를 하면서 눈 안마기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조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퍼스트클래스 마사지 코스는 총 6개로 활력, 쾌적, 수면, 목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 공기 마사지로 구성돼 이 중 원하는 두 종류를 고르면 된다. 객실마다 개별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 이용 요금은 7000원에서 1만 3000원가지 다양하며 소셜커머스에서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의 '공간 휴'
‘공간 휴’를 말하기에 앞서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서울혁신파크가 있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자리다. 오래전부터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미래청 건물 안에 바로 ‘공간 휴’가 있다. 창문 카페와 서고 사이, 천장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쉬는 곳이 바로 ‘공간 휴’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좀 자고 싶으면 누구든지 누워 잘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베개와 이불도 준비돼 있다.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조명이 있어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엄연히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곳. 10분이고 1시간이고 잘 수 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이용료가 없는 대신 자기가 쓴 물건만 잘 정리하면 된다. 멋지고 화려한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쉼’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살면서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현상이 미국에서도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캥거루족, 키덜트(Kidult), 어덜테슨트(Adultescent) 같은 신조어에도 익숙해졌다. 제 앞가림을 못하는 자녀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속앓이가 심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애지중지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언론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전문가들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AARP(미국은퇴자협회)가 5월호에 게재한 ‘끔찍한 22세들(The Terrible 22s)’이란 제목의 특집 내용을 소개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시각 :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요즘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애지중지 키웠더니 제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건 한쪽에 치우친 말이다. 정말 문제는 부모인 베이비붐 세대다. 원인을 제공했고 날개까지 달아줬다. 줄리 리스코트-하임스 스탠포드대학 교수는 그의 저서 에서 “많은 부모가 자녀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간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힘든 경험을 해보지 않은 밀레니얼 세대는 온실의 난처럼 현실 적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일 때는 해외여행이나 연수를 가도 부모가 일정을 세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엽서나 편지 한 장 보내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당시 부모는 자녀가 20세가 되면 성인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첫 봉급을 받을 때까지 생필품과 방값을 지원해 주면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여겼다.
이런 경험을 한 베이비붐 세대가 자신들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성인이 된 자녀를 여전히 품안에 끼고 있다. 자녀와 함께 지내면서 내밀한 생활까지 공유하려는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현대기술 덕분에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이용해 자녀의 일상생활과 고민을 낱낱이 파악하고 간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녀의 연예나 결혼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청년과 몇 년째 교제를 하고 있는 딸에게 시간 낭비니 단교하라고 종용하는가 하면 중매 사이트에 자녀의 세세한 이력과 취향까지 올려 배필을 물색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자녀의 직장 생활에까지 발 벗고 나서는 부모도 적지 않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취업인터뷰 절차를 알아보는 것은 기본이고 연봉 계약과 승진 문제로 직장 상사와 직접 상담을 하고, 자녀의 업무 성과까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자녀가 어린이일 때보다 부모의 역할이 더 커진 셈이다.
미국 부모의 과보호 현상은 지난 1979년, 당시 여섯 살이던 에단 파츠가 학교버스를 타러 가다가 행방불명되면서 미국 전체가 공포에 빠진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1980년대 초 미국 어린이의 학력이 세계 수준에 못 미쳐 국가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내용의 대통령 보고서가 발간되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6명 중 1명이 불안증세로 진단을 받았거나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정신력이 약해졌다.
부모가 병원 예약에서부터 선물 구입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일을 대신해주니 자녀는 성인이 되어도 사소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는 아들딸이 도움 없이도 잘 지내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는 늙은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한 분위기다.
네브래스카의 임상심리학자 제인 워렌은 “좋은 가정에서 곱게 자란 자녀들의 자립심이 더 낮은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니 독립할 이유가 없어진다. 부모들도 고분고분 잘 따라주는 자녀와 함께 살고 싶으니 독립이 반가울 리 없다. 맨해튼의 심리치료사 제리 애게이트는 “자녀가 독립하면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우선 들지만 자녀로부터 소외된 느낌도 들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리건주립대학 리처드 세터스턴 교수와 작가인 바바라 레이는 공동 저서 에서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을 뿐 아니라 동료애와 위안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덕분에 세대 차이가 많이 좁혀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와는 달리 자녀의 생각이 부모와 닮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생활을 접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할 때 이제는 자녀들이 21세기에 직면할 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 하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자녀인 밀레니얼 세대의 시각 : 부모님은 몰라요
베이비붐 세대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생활을 꾸려갈 준비도 안 됐다고 낙담하고 있는 것 같다. 공포와 수치심이 뒤섞인 숨 막힐듯한 태도로 자녀를 대하는 느낌마저 준다. 밀레니얼 세대를 평가절하하는 근거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돈다.
입사 면접에까지 부모와 함께 간다는 소문이 단적인 예다. 이 이야기는 2013년 9월 월스트리트저널에 ‘면접장까지 부모와 함께 가야 하나?’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됐다. 인력관리회사인 아데코가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응답자의 8%가 입사 면접에 부모와 함께 갔고 3%는 자리를 같이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을 제대로 파악해 보면 황당해진다. 차가 없는 자녀를 면접장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면접장 주위에 앉아 기다린 부모의 비율을 집계한 통계를 왜곡해 큰 제목으로 기사화한 것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미국에서는 부모가 어디든 차로 데려다 주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왜곡된 점이 없지 않다. 2013년, 25~34세인 남성의 수입은 1980년 그 또래의 남성에 비해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18.5%나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기간 젊은 여성의 수입은 40.5%나 증가해 전체적으로 보면 그 전 세대와 수입 차이가 별로 없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하위 60%는 부모세대 때보다 재정상태가 훨씬 열악하다. 1989년, 18~34세의 젊은 성인들은 평균 3300달러의 순자산을 보유했으나 2013년의 그 또래는 7700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학자금 융자가 빚 증가의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가 과거 부모세대에 비해 더 많이 파산했냐 하면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대학을 졸업한 경우 베이비붐 세대보다 형편이 더 낫고 고등학교 이하 학력의 경우는 부모세대 때보다 수입이 훨씬 떨어지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이런 자녀를 위해 옹호자, 친구, 상담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녀와 좀 더 가까워지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녀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모가 자신만의 소셜미디어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하고 있다. 부모 집에 같이 사는 것도 밀레니얼 세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1911~1924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세대 때는 대공항의 여파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모와 함께 지낸 캥거루족이 더 많았다. 고용여건이 악화되고 임대료 부담이 가중되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요즘 직장 상사들은 “밀레니얼 세대들이 문자를 주고받느라 근무를 태만히 하지만 일일이 나무랄 수 없어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무 태만은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징계를 하거나 해고를 하면 될 일을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아직 젊다. 앞으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미흡한 생활능력을 키우고 재산도 모으며 자녀도 낳아 기를 것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면 밀레니얼 세대도 다른 세대와 별 차이가 없다. 더 예민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
‘인생 90년’의 시대를 맞이한 장수사회 일본, 10월 13일 간행된 경제시사지 [프레지던트(President)](통권 884호)는 특집 ‘부자 노후 빈곤 노후, 당신은 어느 쪽?’을 기획해 정년 후 꿈의 라이프를 위협하는 6가지 강적을 정리하면서 그 퇴치법을 소개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후의 불안감을 없애는 전문가의 조언을 포함해 그 해소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연금 감액
수입 대비 연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는 일본의 소득대체율은 일본 정부가 설정한 표준세대의 경우 평균 수입 월 34만8000엔 가운데 62.7%를 차지한다. 연급 지급은 21만8000엔이다.
이것이 전문가가 추정한 재정 검증의 결과, 최악의 경우 2015년에는 50% 수준인 약 17만 엔으로, 나아가 2072년 35% 수준인 약 12만 엔으로 축소될 것으로 예상됐다.
닛세기초연구소의 주임연구원 나카시마 쿠니오(中嶋邦夫)씨는 “연금 감액에 대응하는 법은 ①절약하기 ②계속 일하기 ③돈 모으기의 세 가지 선택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절약은 어렵고 저축이 없으면 일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일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30년 후에는 인구의 약 40%가 65세 이상이 된다. 국민의 40%가 일하지 않으면 나라가 꾸려지지 않기에 고령자라도 일하는 게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고 밝혔다.
잡지는 최악의 경우로 연금 삭감률을 후생연급 22%, 기초연급(국민연금) 60%로 내다보면서 기초연금만 수령하는 자영업자와 후생연금 및 기업연금을 수령하는 회사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겨나 ‘세대간 격차’만이 아닌 ‘세대대 격차’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연금감액을 전제로 한 충분한 저축액은 얼마일까? 파이낸셜플래너 고야 요이치(小屋洋一)씨는 “3000만 엔 정도는 준비해 뒀으면 한다”고 조언하면서 “연금생활자는 평균 매년 70만 엔 정도 지출 초과로 퇴직 후 25년을 지낸다고 가정한다면 합계 1750만 엔이 필요하며, 연금지급액이 20% 줄어들 것을 가정한다면 1000만 엔이 더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경단련(경제인단체연합) 소속의 대기업은 평균 2000만 엔의 퇴직금이 나오지만, 중소기업은 평균 1000만 엔 정도로 그중에는 지급하지 않는 기업도 있기에 집이 없고 개호를 받는 경우 더 추가 비용이 발생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민간의 연금상품과 저축으로 미리 노후에 대한 만전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둘째, 팔리지 않는 집
일본 총무성의 2013년 주택 및 토지통계조사에 따르면 국내 총주택수 6063만호 가운데 13.5%가 빈집이라고 한다.
부동산 컨설턴트 나가시마 오사무(長嶋修)씨는 “고령자가 돌아가시면 빈집으로 방치되고, 젊은 사람들은 신축 맨션에 살려는 구도이다. 게다가 현재 일본의 주택소유율은 약 60%이지만, 집 구입 의향이 저하돼 앞으로 더욱 떨어질 거로 예상된다”고 밝히면서 “확실하게 가격 상승이 예측되는 부동산과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경우는 제외하고 팔린다면 지금 당장 파는 게 좋다.
향후 20년 일본의 주택가격은 매년 2%씩 하락된다는 계산도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올해 8월부터 실행된 ‘개정 도시재생 특별조치법’의 이른바 ‘콤팩트시티정책’에 따른 우대조치를 받을 수 있는 지역의 물건을 노려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콤팩트시티란 시가지의 공동화 현상을 해소해 범위를 작게 유지하면서 걸어다닐 수 있는 범위의 생활권에 커뮤니티를 재생해 살기 편안한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
또한 현재 지은 지 20~25년이 넘으면 가치가 제로로 평가받고 있지만, 내년부터 바뀌는 중고주택에 대한 건물평가법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건축 햇수는 같아도 건물의 질과 노화 정도 등에 따라 자산 가치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산 가치가 평가받는 시대가 온다고 밝혔다.
셋째, 의료비 부담 증가
올 4월부터 70~74세 고령자의 의료비 자기 부담률이 10%에서 20%로 올랐는데, 현재 국민이 병 치료를 위해 의료기관에 지불한 의료비(국민의료비)는 연간 약 40조 엔으로 그 가운데 반 이상이 65세 이상의 고령자 의료비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자료에 따르면 20세에서 59세까지는 자기부담과 보험료 합계가 의료비보다 적어 흑자이지만, 60세부터는 의료비가 늘어나 적자이다.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증가는 국내총생산(GDP)이 성장률을 앞질러 공적비용 부담은 2025년에 현재보다 10조 엔 이상 늘어나 25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
이는 현역 세대의 세금이 고령자 의료비를 대신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건강보험제도의 상황도 심각해 국민건강보험은 2012년도 3000억 엔 남짓 적자를 냈다. 건강보험조합 연합회에 따르면 일반 기업의 회사원이 가입한 건강보험조합도 1419개 중 67%가 지난해 적자를 기록했다.
파이낸셜 플래너 나이토 마유미(內藤眞弓)씨는 “민간의료보험은 의료비 부담이 아무리 무거워져도 입원 등의 계약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의 공적 의료보험 보장이 잘돼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의료비만으로 사용될 돈이 150만 엔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 보험에 납입할 돈을 저축으로 돌려 노후를 준비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조언했다.
일본에서는 국민개보험제도 가운데 ‘고액요양비제도’가 있어 보험 내라면 아무리 고도의 의료를 이용해도 의료비 10만 엔 정도를 지불하면 되기에 의료비가 수백 만엔에 달하는 경우는 없다.
넷째, 간병 비용 증가
일본의 간병보험제도는 2015년에 개정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베이비붐세대가 후기 고령자가 되는 2025년을 목표연도로 한다.
현재의 정책 방향성인 ‘의료에서 간병으로(자립지원)’와 ‘시설에서 주택으로’가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간병 초점은 ‘어떠한 간병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거기에 얼마나 비용이 들까’로 옮겨지고 있느냐다.
공적시설의 특별 양호노인홈에 입주할 경우 매달 9만6000 엔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시설도 부족하고 희망자도 많아 대기해야 한다.
민간시설의 경우는 도쿄를 예로 월 14만8000 엔에 식사비 등 비용을 포함하면 매달 부담액은 20만 엔 정도. 재택 간병의 경우에도 6만 5000 엔의 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는데, 금전적 비용만이 아니라 간병 때문에 가족이 구속되는 비용도 상당하다.
간병시설 이용자가 보통 입주 후 평균 7년 정도 산다고 보는데, 따라서 재택 간병의 경우도 같은 정도의 기간을 상정하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가는 자신의 힘으로 배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휠체어에서 혼자 일어나 변기에 이동하는 정도의 근력은 재활 운동을 하면 되돌아온다며 고령자가 퇴원하면 가족들이 밥상 옆에서 식사를 돌보려고 하는데 과보호로 인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돼 갈수록 쇠약해진다고 덧붙였다.
각종 간병시설에서도 재활운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며 같은 비용이 든다면 1일 서비스라도 재활운동을 중시하는 시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다섯째, 무직 자식
일본에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그만두고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는 히키코모리, 전혀 일하려는 의사가 없는 니트족(NEET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자식을 둔 가족이 늘고 있다.
니트의 고령화에 따른 가계의 경제적 부담도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2014년도 학교 기본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부등교’를 이유로 30일 이상 장기 결석한 초등·중학생은 약 12만 명으로 전년도보다 약7000 명이나 증가했다.
학교를 가지 않는 학생들이 그대로 은둔형 외톨이로 이어지고,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프리타(아르바이트로 평생 생계를 이어가려는 사람을 일컬음)와 파견노동자, 그리고 가사돕기도 잠재적 무직이라고 하겠다.
전문가는 부모가 자신의 사망 후 구체적인 자식의 생존 계획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 자식 나이 40세가 포인트라고 지적한다. 자식이 젊을수록 계획이 장기에 걸쳐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 금액도 커지고 현실감도 점점 옅어지는데, 향 후 자식이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연금만큼은 체납하지 않고 꼬박꼬박 내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다만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사망할 경우 연금수입이 줄어들기에 1명분의 생활비가 높아지고 적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아울러 부모 사망 후 자식이 혼자 생활하기쉬운 주택 확보를 강조했는데, 넓은 집은 광열비와 유지비, 세금 등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24시간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작은 중고 맨션을 고르되 단독주택이라면 건평수를 줄이고 남은 토지를 팔거나 주차장으로 빌려준다든지 월세용 주택으로 재건축해 수입원을 확보할 것을 제안했다.
여섯째, 정년연장 및 재고용
일본에서는 2013년 4월 ‘개정고령자고용안정법’이 실시돼 기업에 대해 희망하는 사원 전원을 65세까지 고용을 의무화시켰다. 이 법률은 노령연금의 지급 개시 연령에 맞춰 고용 연령의 상한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인정한 조치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약14만 개 회사 가운데 65세 이상 일할 수 있는 기업은 66.5%로 종업원 301명 이상의 대기업은 48.9%에 머물렀다. 나아가 정년 폐지를 선택한 기업은 2.6%, 70세 이상 일할 수 있는 기업도 전체의 18.2%에 지나지 않았다.
법률 내 ‘계속고용제도의 도입’의 실상을 보더라도 주3일 근무, 두 사람이 한 명분의 업무를 담당 등의 근무형태를 합리적인 재량 범위로 적법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어 정년 후 일의 내용이 크게 변화될 우려가 있다.
실제로 후생노동성의 조사에서도 정년 후 22.3%는 계속고용을 희망하지 않았고, 1.2%는 희망했지만 조건이 안 맞아 계속 고용되지 않았다.
경영인사 컨설턴트 에노모토 마사카즈(榎本雅一) 씨는 재고용은 보너스도 없고 연수입도 40%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라며, 정년의 연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재고용으로 연수입이 큰 대기업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삭감액이 커서 60% 정도 줄어드는 회사도 드물지 않다고 밝혔다.
급료의 변화뿐만 아니라 많은 부하를 거느렸던 관리직이 위탁 형태로 재고용돼 계약직으로 신입사원과 같은 마찬가지로 대우받으며 상사가 된 아랫사람의 꼼꼼한 지시를 받아야 한다며 꾹 참고 버틸 것인지 때려치우고 그만 둘 것인지의 문제도 있다.
또 인간관계와 든든한 파벌로 출세해 온 ‘회사 인간’보다는 업무를 통해 전문성을 익혀온 ‘일하는 인간’이 회사 내외에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기에 기술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환영받는다며 명확하게 정년 후 플랜이 있는 사람을 빼고 가능하면 회사에 꽉 달라붙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이밖에도 정년 연장, 재고용 이외에도 독립해 현역시대의 전문성을 확대시킨 인사, 회계, 영업, 판로 개척, 경영 조언 등을 대행하거나 하청받는 ‘확대고용’의 형태도 제안했다.
끝으로 “경험이 없는 곳에 도전해도 성공은 어렵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할 수 있는 것, 정년을 경험 리셋이 아닌 일하는 방법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확대고용’을 생각해 봐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2011년 DBM과 Lee Hecht Harrison이 글로벌 합병한 결과, 세계 최대의 전직지원서비스 기업인 LHH/DBM이 탄생했다. 그 한국 지사인 LHH/DBM 코리아는 점차 미래 산업이 되어가고 있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 분야에 있어 다양한 글로벌 사례와 독보적 노하우를 갖고 국내에 아웃플레이스먼트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LHH/DBM 코리아의 수장을 맡고 있는 유홍열 사장을 만나 국내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의 현황과 미래를 짚어봤다.
유홍열 LHH/DBM 코리아 사장은 국내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의 규모를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을 합쳐서 약 300억 원 정도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기업과 퇴직자 모두가 필요로 하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가 유독 국내에서 확장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문화적 차원의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전직지원서비스 시장이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에 비해서 성장이 더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외면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시장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국계 기업들은 서비스의 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꾸준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 기업의 경우에는 여전히 퇴직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퇴직자에 대한 배려나 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추가비용을 지급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기업이 많이 있는 편입니다.”
전직지원서비스의 성과에 대한 조급함 경계해야
유 사장은 한국 기업들이 전직지원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유를 이해한다고 밝혔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전직지원서비스를 통해서 퇴직자들이 서비스 기간 내 성공하기를 기대하나 서비스 종료 시점에서 보면 기업이 기대할 만한 결과를 내기가 어려운 점도 한 몫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물론 전직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소요기간이 2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은 한국고용정보원의 객관적 통계를 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국내의 통상적인 서비스 의뢰 기간은 3개월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나 일본은 6~12개월이 대부분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전직에 성공하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재취업은 6개월, 창업의 경우는 12개월 정도 소요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국내에선 지금의 서비스 의뢰 기간 내에 만족할 만한 성공률을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아웃플레이스먼트 시장 규모에 비해 후발 기업들의 과다 진출이 시장에서의 서비스 가격을 지나치게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저가 수주에 따른 간소화된 서비스 제공이 서비스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민간 부문은 공공 부문에 노하우 뺏겼다는 피해의식 있어
고용노동부 및 정부 기관 등에서 수행하는 재취업 프로그램이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LHH/DBM 코리아는 공공 부문에 대한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 회사다. 오로지 기업만을 위한 아웃플레이스먼트를 담당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재취업 지원 기관들의 문제점은 ‘인력’이었다.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전직지원서비스가 고객 개개인에 대한 맞춤형 컨설팅이 가능하도록 준비된 인력으로 하여금 적정한 인원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과다한 인원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서비스가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결과적으로 좋은 효과가 안 나타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들의 경우에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그 불신도 커지게 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전직지원서비스의 본질이 취업 알선 서비스 정도로 잘못 인식되게 하는데 공공부문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 사장이 제시하는 공공 부문 기관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민관 협력 방식이었다.
“공공 부문이 주도적으로 전직지원서비스를 담당하기 보다는 최소한의 공공부문의 인력과 전직지원 업체의 전문인력 간의 공조 체제로 센터를 운영하거나 일선에서의 서비스를 민간 부문이 담당하도록 공공부문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판단됩니다. 또한 상호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 부문 간의 긴밀한 대화와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그러한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2005년 노사공동전직지원센터가 시작할 때 공공 부문은 초기 3년 정도를 민간 부문에게 위탁 운영을 맡겼다가 현재는 직접 운영하면서 공격적으로 26개 무료 서비스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민간 부문은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제공했다가 시장을 빼앗겼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모토로라 아웃플레이스먼트 성공 사례의 교훈
LHH DBM코리아는 자사에서 수행한 국내 기업의 아웃플레이스먼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하는 기업으로 한국 모토로라를 꼽았다.
“모토로라는 작년에 한국에서 사업 완전 철수를 하면서 저희 회사가 사후관리 포함 총 9개월 동안 아웃플레이스먼트를 수행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유수의 대기업에 90%에 육박하는 전직성공률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유 사장은 모토로라 아웃플레이스먼트의 성공에는 고객사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 하에 전직지원센터 제공과 친밀한 파트너십이 형성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서비스 시작에 앞서 사전 단계 컨설팅 제공(Pre-Outplacement)으로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높인 게 주효했다고 밝혔다.
“IT 산업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많은 역량 있는 컨설턴트를 통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여 초기 성공 사례 다수 발생했고, 그 덕분에 소극적 고객에도 동기부여가 가능했습니다. 국내외 IT 및 연관 기업에 대한 적극적인 네트워크 활동을 통한 폭 넓은 히든잡을 발굴한 것과 사후관리 서비스를 통해 미성공자에 대한 추가적인 밀착 지원을 추진한 것도 성공의 이유입니다.”
아웃플레이스먼트를 하고 있는 기업들 전반의 질적 향상 노력 필요
유 사장은 향후 아웃플레이스먼트가 활성화되기 위한 개선책으로 업체들 전체의 지속적인 질적 향상 노력을 주문했다.
“아웃플레이스먼트 서비스를 단순한 취업 알선 서비스로 인식해서 성공률 중심으로 요구하거나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식해서 서비스의 본질을 왜곡하는 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전직하는 고객에 대한 심리상담, 심경변화 인식, 경력 목표 설정, 필요 시 경력 개발, 시설 제공, 정보 제공 등 종합적인 전직지원서비스로서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변화관리 서비스라는 인식을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하게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