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귀촌 목적이 아니었다. 꽃향기, 흙냄새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텃밭 하나 장만할 생각이었다. 부부는 사랑에 빠지듯 덜컥 첫눈에 반해버린 땅과 마주했다. 부부는 신이 나서 매일 밤낮없이 찾아가 땅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응답이라도 하듯 땅은 씨앗을 감싸 안았고, 뿌리 깊은 나무는 온몸으로 품었다. 텃밭은 꽤 큰 대지가 됐고, 이후 정자와 살 만한 집도 마련됐다. 나무와 숲을 가꾸는 것이 평생 직업이던 조연환 前 산림청장의 귀촌 인생은 그렇게 준비됐다.
13년 차 귀촌인 조연환 전 산림청장 이야기
충남 금산군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귀촌 하우스에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와 압력밥솥으로 갓 지은 밥 냄새가 진동했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살짝 출출했던 탓에 당장 밥상 앞에 앉아 한 숟가락 뜨고 싶었다. 밥상 위는 말 그대로 시골밥상. 비름나물 무침, 엄나무 장아찌. 깻잎볶음, 호박 무침, 김치, 전날에 담갔다는 오이소박이, 굴비 구이가 상 한가득이었다. 완두콩을 넣어 지은 밥과 반찬으로 식사를 뚝딱 끝내고 숭늉을 마신 뒤, 조 전 청장이 손수 탄 봉지커피까지 들이키면 점심코스가 마무리된다. 녹우정(조 전 청장 집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정자 이름. 나무와 숲을 가꾸는 사람들의 우정이 깃든 정자라는 뜻이다) 정식이라 불러도 될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진 찍기를 부부에게 권했다. 귀촌생활에 있어 텃밭은 기본 아닌가. 텃밭이라기에 따라 내려간 곳은 그냥 큰 밭이었다. 고구마, 팥, 깻잎 없는 거 없이 다 있었다. 이 큰 밭의 고랑을 만들고 구획을 나눠 정리 정돈하는 일은 이 집 머슴인 조 전 청장의 몫이다. 총 관리감독은 마님인 정점순 여사가 한다. 텃밭이 아니라 농번기 농사꾼 부부를 제대로 만난 느낌이었다.
귀촌 13년 차란 말에는 조연환 전 산림청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지 13년 됐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금산에 땅을 장만하고 귀촌을 준비한 것은 18년 전이다. 산림청이 발족된 1967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최말단 9급 산림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조 전 청장. 2004년 제25대 산림청장으로 취임해 파란만장한 1년 6개월을 보내고 2006년 자리에서 물러나 귀촌했다. 산림청장직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농협경제연구소장과 생명의숲국민운동 상임공동대표, 천리포수목원장 등을 잇달아 역임하며 산림 전문가로서 끊임없이 일해왔다. 2011년부터는 한국산림아카데미 이사장을 맡아 귀·산촌 희망자에게 실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모색하며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퇴임을 언제 했나 싶을 정도로 늘 바쁜 현역 산림 운동가가 바로 조 전 청장이다.
“처음에 이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과연 사람들이 관심이나 있을까 싶었는데 90명 정원에 120명이 몰렸습니다. 프로그램을 10기까지 진행했는데 졸업생을 980명이나 배출했습니다. 500명은 임업인이고 나머지는 아카데미에 와서 산을 알게 된 사람들이죠. 정확하게 통계를 낸 건 아니지만 제가 알기로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귀촌했습니다. 굉장히 성공한 것이죠.”
올해 6월 출간한 ‘산림청장의 귀촌일기’도 조 전 청장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의 요구에 부합해 서두르게 됐다. 책에는 조 전 청장이 SNS에 꼼꼼하게 적어 올렸던 개인 경험과 함께 똑똑한 귀촌 설계, 귀·산촌 사례자 이야기 등을 실었다. 책을 내야겠다고 결심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다.
“아내 나이가 칠십이 넘으면서 무릎이 점점 안 좋아졌어요. 더 이상 농사 못 짓고 서울로 가면 책을 못 낼 것 같더라고요.(웃음) 우리가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동안 책이 나오면 좋잖아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산림청 공무원이었던 조 전 정창은 어리다고 무시당할까봐 나이를 두 살 높여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가 괜찮은 동갑내기(?) 처자가 있다면서 소개시켜준 이가 바로 정점순 여사다. 첫눈에 반해 연애하다 1년 반 만에 결혼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연상 연하 커플이다.
“지금도 병원에 가면 일하지 말라고 의사가 말합니다. 이 사람을 살살 꾀어 2년 전인가 여길 팔자고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 사람한테 우울증 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밭일 못한다고 포기할 때까지 그냥 살려고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조 전 청장이 산림 전문가로 알려졌지만 알고 보면 정점순 여사도 고수 중에 고수다. 조 전 청장이 천리포수목원장을 할 때 숲해설가로 활약할 만큼 식물 생태에 관심이 많다. 남들 못 키워내는 나무며 화초며 정 여사 손에 들어오면 죽어가던 것들도 되살아났다. 너른 텃밭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고왔던 손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만 나면 밭에 앉아 풀 뽑고, 복숭아 봉지를 싸고 식물을 바라보고 보살피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조 전 청장이 말단 공무원에서 산림청장이 되기까지 정 여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조가 한몫했다는 것을 주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농촌에 은퇴자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귀농이 아닙니다. 귀산이나 귀농은 아카데미 교육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조금 생기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골이 좋다고 하시는 분은 대환영입니다.”
현재 운영 중인 한국산림아카데미 최고경영자과정을 듣기 위해 모이는 대부분이 도시에서 성공한 시니어 혹은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조 전 청장은 산에 관심을 갖고 터를 잡고 들어가 길을 내고 가꾸기에 관심을 갖는 인구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을 가꾸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야 합니다. 상추 심어봤더니 또 싹이 나고 그거 뜯어서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 나눠도 줘보고 말이죠. 골프장 가는 거보다 훨씬 재밌다며 골프 끊은 분도 주위에 있습니다. 산을 알아가는 삶이 생긴 것이죠.”
조 전 청장이 정말 퇴임한 산림청장이 맞나 싶을 정도다. 여전히 사회 전반에서 이뤄지는 일에 관여를 하며 쉬지 않고 귀·산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 ‘산림청장’이라는 문구를 치면 유독 조 전 청장의 행보가 눈에 띈다. 1년 6개월 짧고 굵었던 임기와 퇴임 후 여섯 번 바뀐 산림청장 자리이지만 여전히 조 전 청장이 회자된다. 그는 끝까지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퇴직한 사람들이 시골에 내려가서 농촌의 인적 네트워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2005년 8월 21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 부부와 조연환 전 산림청장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 입성 이후 딱히 산책할 곳이 없었던 노 전 대통령이 산길 정비가 되지 않은 북악산을 자주 오르내렸다. 이후 산림청에 기별이 와서 청와대 뒤 숲을 가꾸고 꽃을 심었다고. 그것이 고마워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부른 것이다.
“‘청장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 제가 뒷산을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시길, ‘다음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도, 그다음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도 농촌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들에게 내가 멱 감고 고기 잡고 놀던 시냇물을 복원해주고 싶다, 나는 퇴임하면 시골로 내려가겠다’며 계속 그 말씀을 하셨어요.”
도시에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농촌에 사람이 없으니 도시에서 성공한 은퇴자들이 자리를 잡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미래 그림이 될 것이라고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다. 그리고 퇴임 후 시골로 내려가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조 전 청장에게 길고 긴 시간을 들여 했던 말들을 이행하고자 대통령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했다.
“책에도 썼지만 대통령이 나한테 지시를 한 거잖아요. 내가 시골에 내려와 살아야 하는 이유, 가장 큰 명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어 귀촌을 택했던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대통령’을 역임하시고도 봉하마을에 내려가 주민들과 밤새 토론하고 행정 관계자를 설득해가며 마을을 가꾸셨는데, 저는 산림청장을 했다고 해서 귀촌해 편하게 살고 있는 거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노 전 대통령을 함께 만나러 갔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퇴임 후 부여로 내려가 휴휴정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지었다. 조 전 청장이 금산에 갈 때 같이 입주했을지도 모를 좋은 친구 중 하나가 유홍준 전 청장이다. 하지만 각자 맡은 바 소임이 달라 한 명은 산이 가까운 금산에, 한 명은 역사가 가까운 부여에 둥지를 틀었다.
“유 전 청장도 부여에 땅을 잘 마련했습니다. 저도 한 번 가봤는데 잘 꾸며놓았더라고요.”
이 두 사람은 재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제안해 울진 소광리 금강소나무를 150년 후 문화재용으로 쓰자고 협약했다. 살면서 봤던 아름다운 협약으로 두고두고 기억돼 뜬금없지만 적어본다. 나무건 문화재건 한 세기는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 미래 세대를 위한 든든한 보험(?)을 어른들이 들어준 것 아닌가.
공직자 퇴임 이후 정계에 입문해 지금까지 쌓아온 명망을 순식간에 까먹는 이도 있고,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을 보이는 이도 종종 보곤 했다. 푸른 산새에서 만난 조연환 전 산림청장의 의미 있는 사명과 서슴없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가 귀감이 됐다. 미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의 마음에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점점 더 푸르러지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에 연재되는 김형석 교수님의 ‘100세 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사건이나 흥미로운 주제는 찾아볼 수 없고 문체도 특유의 잔잔한 흐름이지만 읽고 나면 늘 묵직한 여운을 가슴에 남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의 하루하루 삶 자체가 우리가 못 가본 미지의 세계가 아닌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미지의 시간 속에서 경험한 특별한 사건일 수밖에 없다.
이번 주 게재된 글의 소재는 사제간에 일어난 일화였다. 상대는 유독 김 선생님을 따랐던 중앙학교 시절의 제자이다. 만난 시점은 김 선생이 28세이고 제자가 18살 시절이다. 열 살 차이의 사제간은 그 후 70여 년 동안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제자도 충북대 교수를 지내고 은퇴한 지 오래였지만 늘 연락하고 지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그 제자의 귀가 어두워져 전화도 어려워졌다.
마침 충주에 문상을 가야 한다는 제자의 따님과 동행하여 오랜만에 상봉키로 했다. 제자는 무척 반가워하며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상경할 시간이 되어 따님 차가 도착하고 작별하려는데 그 제자는 운전석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더란다. 딸도 몰라본 그 제자는 몇 달 후 별세했다는 연락을 딸로부터 받았단다. 무심코 읽어가다 그 제자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90세가 아닌가. 90세 먹은 제자라!
이 글이 주는 충격은 글의 내용에서라기보다 늘 제자는 어리고 싱그러운 존재라는 이미지의 고정관념이 깨진 데서 왔다. 흔히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나이를 먹어도 항상 어린애로 보는 것처럼 필자도 오랜 교사 생활 동안 만났던 제자들을 지금도 보면 피차 같이 늙어감에도 불구하고 늘 애로 보였다. 그런데 90살 먹은 제자라니. 이미지에 혼란이 오는 것이 당연했다. 김 선생에겐 90살 먹은 제자도 어려 보였겠지?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며 과거에 없던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삶의 공식들이 무참히 깨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환갑잔치가 없어진 지 오래고 주변에 자식에게 기대 살아가는 노인을 찾아볼 수 없다. 새파란 청년 같은 외모인데 정년으로 퇴임했다는 사람도 주위에 많다. 사실 어쩌면 일차 직장생활보다 더 긴 시간을 새로운 일과 함께 보낼지도 모른다.
필자도 교사생활을 접은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동네 복지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 70대부터 80대 초반의 분들이다. 아직 90세 넘은 분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제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려 보인다는 것이다. 80세 되신 할머니 학생이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 없다. 요즈음 영어를 잘하는 손주들과 한마디라도 섞어보려는 야무진 요량으로 오늘도 어려운 발음을 열심히 따라 하신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의 제자가 90세가 넘었다는데 놀라움과 이미지의 혼란을 느꼈는데 나의 80세 제자는 귀엽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사제지간이라는 특별한 관계의 오묘한 특성일 것이다. 남에게 어려 보이고 싶다면 무조건 그에게 배우려 들면 될 듯도 하다. 조선 시대부터 영정 신위에 쓰는 최고의 헌사가 ‘학생’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주름진 예쁜 우리 학생들이 빨리 보고 싶다.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모처럼 스케줄이 비어 근처에 사는 동생과 형수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송파에 3가구 형제들이 살고 있어 그렇게 종종 모이곤 했다. 형제들은 너무 자주 봐도 문제이고 너무 안 봐도 문제인 것 같다. 서로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 얘기 등이 직격탄으로 날아올 때가 있다. 사회에서 어울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때문에 만나도 좋은 얘기만 나누는데 형제들 간의 대화는 그렇지 않다.
15년 전, 필자가 주관이 되어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산인 상가 건물을 상속 처리하면서 형제간의 합의를 받아냈다. 상가를 매각한 뒤에는 공평하게 배분했다. 일생일대의 대타협이었고 그 후 그로 인한 분란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화 중에 배분받은 돈의 용처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다른 형제들은 그 돈을 받아 땅도 사고 집도 하나 더 샀단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그 재산들이 꽤 불어났다. 그런데 필자는 그 돈으로 영국으로 댄스 유학을 가고, 유럽 여행을 하는 등 흥청망청 다 써서 남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번 저녁식사 자리에서 필자가 비난받을 만하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필자는 나름대로 알아서 쓰는 것이지, 반드시 용처가 같아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고 반박했다. 필자도 형제들처럼 투자를 해서 돈을 불려놓았으면 좋았겠지만,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즐겁게 잘 썼으면 된 것이라고 했다. 로또에 당첨되어 목돈이 생겨도 필자 생각은 같다. 남들은 그 돈으로 땅도 사고 집도 사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필자는 투자보다는 소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형제들이 염려하는 것은 필자가 혼자 살면서 돈도 없으니까 잘못 될까봐 하는 걱정이다. 큰 병이라도 생기거나 집 문제 등 사고가 생기면 못 본 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하자, 고집불통이라며 낙인을 찍어버렸다.
돈 생기면 여행 다니고,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사고 싶은 것 살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 돈을 아껴가면서 불리고 싶지는 않다. 좋은 직장 잘 다니다가 포기하고 세계 여행을 떠난 사람들,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형제들은 남들이 그런 삶을 사는 건 봐줄 만한지만 필자가 그렇게 사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였다.
형제들은 필자에게 기대가 컸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잘나가서 큰 성공을 하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필자 형제들은 필자가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밥 안 굶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인생이면 되는 것이다. 돈도 그렇다. 잘 쓰고 가자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선진국, 스웨덴! 그들의 삶에 뭔가 특별한 것은 없을까? 바로 ‘독립’이다. 어린아이,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적 삶을 추구한다. 스웨덴 고등학생의 대학진학률은 50%가 채 안 된다. 많은 청소년이 드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배낭여행을 떠난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는 노인들도 자녀에게 기대지 않는다. 고독이 삶을 힘들게 해도 죽을 때까지 스스로 살아간다. 자식을 위해 평생 고생하거나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없는 살림을 쪼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나 몰라라 하는 비정한 사회일까?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행복할까? 영국 신경제재단(NEF)에서는 매년 세계 140개국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해 발표한다. 2016년 스웨덴의 행복지수는 7.6으로 4위,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6.0으로 40위다. 그 비결은 뭘까? 역시 스웨덴인의 독립적 삶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독립은 서로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간섭을 하지 않으니 갈등의 요소가 사라진다.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대한민국 액티브 시니어들이 간절히 원하는 삶도 바로 스웨덴식 독립 인생 아닐까! 자녀 부양하느라 나이 들어서까지 허리 휘지 않아도 되고, 자녀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데 걱정이 없는 노후! 스웨덴 사람들이 이런 노후를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연금을 필두로 한 사회보장제도가 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이 탄탄해야 함을 뜻한다. 사회보장제도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독립적이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자조노력 연금을 중심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연금생활플랜(Pension Life Plan, PLP)을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액티브 시니어란?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니어는 연장자를 의미하니 결국 관건은 액티브에 달렸다. 단어의 구체적 의미가 애매모호하거나 헷갈릴 때는 어원을 살펴보면 된다. 온라인 어원사전(Online Etymology Dictionary)에 따르면 액티브의 어원은 라틴어 액티부스(activus)다. 액티부스는 액투스(actus)의 형용사형이니 액투스의 의미를 살펴보면 액티브의 용례를 알 수 있다. 액투스는 행위(a doing), 운전(a driving), 자극(impulse), 활기참(a setting in motion), 역할(a part in a play)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고대에 요즘 같은 자동차는 없었을 테니 운전이 의미하는 바는 말을 타거나 마차를 모는 행위를 뜻할 것이다. 자극은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도록 어떤 작용을 가하는 것을, 역할은 연극에서 어떤 배역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원으로부터 알 수 있는 액티브 시니어의 뜻은 우선 행위, 즉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소파에 기대거나 누워 TV를 친구삼아 시간을 축내는 정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인 야외활동은 물론 타인과의 교류를 즐기는 동적 삶이어야 한다. 나이 들어 말을 타거나 마차를 몰려면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육체적 건강은 액티브 시니어의 필수조건이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동적 삶을 추구할 수 있고, 나아가 병원비 등 의료비를 대폭 아낄 수 있다. 자극은 정신적 건강함이 필요함을 뜻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쇠약하면 마력이 뛰어난 고급 승용차를 주차장에 파킹해놓고 자랑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할 때 활기찬 삶이 따라올 뿐 아니라, 자연스레 사회적 역할도 주어지기 마련이다. 무대 위의 주연배우는 아닐지라도 극의 재미를 더하는 감초역할 정도는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액티브 시니어란 육체적·정신적 건강함을 기반으로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연장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동안 고생한 인생에 보답하는 데 초점을 맞춘 나 혼자 즐기는 삶은 그것이 아무리 동적이고 활기찬 삶이라 할지라도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삶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필자는 이를 소극적 액티브 시니어라 부르고자 한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자산을 사장시키지 않고 살려가며 어떤 형태로든 사회와 교감을 나누며 의미를 찾는 삶이야말로 전형적인 액티브 시니어의 삶이다. 필자는 이를 적극적 액티브 시니어라 부르고 싶다. 그냥 즐기는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즐기는 사람이 진정한 액티브 시니어다.
세 명의 벽돌공이 일을 하고 있다. 길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잠시 쉬면서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가까이 있던 벽돌공이 말한다. “네,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벽돌공은 이렇게 말한다. “네, 저는 벽돌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멀찍이서 일을 하던 벽돌공이 땀을 훔치며 말한다. “저는 지금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동일한 작업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의 답이 이렇게 다르다. 나그네가 세 사람의 말을 음미하며 속으로 읊조린다. ‘음, 벽돌을 쌓고 있는 벽돌공은 지금 생업에 종사하고 있음이며, 집을 짓고 있는 벽돌공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음이며, 하느님의 성전을 짓고 있는 벽돌공은 천직에 종사하고 있음이로구나!’ 그렇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가치를 낳는다. 같은 시니어라도 여전히 생업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직을 찾아 의미 있는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미 생업에서 물러나 액티브 시니어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니어라면 천직에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경제적 기반부터 챙기자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 중국 춘추시대에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든 관중의 말이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야 예절을 차리고 영광스러움과 욕됨을 안다는 뜻이다. “내 코가 석자”라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 의미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받쳐주지 않으면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액티브 시니어의 삶은 요원하지 않을까. 테레사 수녀 같은 삶을 일반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일반 서민에게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은 액티브 시니어의 전제조건이나 다름없다.
액티브 시니어가 은퇴 후 천직을 찾아 의미 있는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호구지책에 연연하지 않는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 스웨덴의 시니어들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든든한 사회보장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는 스웨덴처럼 든든하지 못하다. 게다가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엔 어느 정도 돈을 모았다 하더라도 과거처럼 이자로 생활하는 금리생활자(rentier)가 될 수 없다. 사회보장과 사적 보장을 상황에 맞게 조합한 연금생활자(pensioner)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금리생활자의 해는 저물고, 연금생활자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은퇴 후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요소는 수입 상실, 예상치 못한 지출, 질병 리스크 등이다([그림1] 참조). 은퇴 후에도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해주는 수입은 필수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지출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생활은 일그러지고 액티브 시니어의 삶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질병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질병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질병에 따른 지출도 경계해야 한다. 질병은 우리 몸만 갉아먹는 게 아니라 생활비도 갉아먹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런 위협 요인까지 이겨낼 수 있도록 경제적 기반을 단단하게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은퇴 후 맞닥뜨리게 되는 경제적 문제를 연금 중심으로 대처하고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꾸준히 이어가게 해주는 체계적 계획을 연금생활플랜, 이 계획을 실천할 수 있도록 잘 짜는 것을 ‘PLP(Pension Life Plan) 디자인’이라 부르고자 한다.
‘연금생활플랜’ 어떻게 디자인할까?
‘연금생활플랜’ 디자인의 핵심은 [표1]과 같은 현금흐름표를 만드는 것이다. 먼저 본인과 배우자, 자녀의 나이를 입력하고, 각 연도의 지출항목을 입력한다. 지출은 기본생활비·주거비·교육비·보험료·기타 지출·일시적 지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생활비는 각자가 생각하는 적정 생활비를, 교육비는 자녀 및 본인과 배우자의 교육비를, 보험료는 건강보험료 및 민영보험료 등을, 일시적 지출은 자녀 결혼비용 등을, 기타 지출은 경조사 비용 등을 입력하면 된다. 자녀가 독립했는데 무슨 교육비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액티브 시니어 정의에서 강조한 바 있는 정신적 성장과 삶의 자극을 위해서는 평생교육이 필요하다. 평생교육을 받다 사귀는 새로운 친구는 삶의 소중한 보너스다.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자산을 리뉴얼해야 한다. 은퇴 후 평생교육에 들어가는 돈은 비용이라기보다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출항목을 입력했으면 이제 수입을 계산해 입력할 차례다. 이 부분은 좀 복잡하다. 우선 각자가 가입해 있는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으로부터 얼마의 수입이 발생할지 계산해야 한다. 이는 금융감독원의 ‘연금포털’을 이용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여기에다 기초연금을 더하면 기본적인 연금소득은 파악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많은 사람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공사 연금소득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추가적인 근로소득을 만들어내는 것과 주택을 활용해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액티브 시니어들은 이 정도만 하면 생활비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지 않을까. 기타 수입에는 만기된 적금액이나 곗돈, 경조사 수입 등을 기록하면 된다.
연금 외의 금융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라면 이 금융자산을 활용해 현금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일시납즉시연금이나 월지급식펀드, 월지급식예금 등 연금성 상품을 활용하면 일시금에서 매월 현금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상품은 구조가 복잡하므로 전문가에게 자문해서 도움을 받는게 좋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세제상 불이익을 받거나 경제적으로 원하지 않는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세목별 내용은 [표2]의 수입상황표에 기록하면 된다.
현금흐름을 만들 때는 두 가지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망할 때까지 일정한 현금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각자 라이프스타일이 다르고 추구하는 삶의 행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은퇴생활 초기에 보다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균일한 삶을 원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은퇴 후 삶의 비전을 생각하면서 생애 현금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본인 사망 후 배우자의 여생까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우스갯소리로 배우자에 대한 마지막 복수로 본인의 사망과 동시에 현금흐름을 단절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말이 있다. 역으로 말하면 이는 배우자의 여생에도 현금흐름이 쭉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손성동(孫盛東)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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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한국연금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미국사회 한 번 믿어보자 안 믿고 살려니 안전불안증 생기겠다 ” 마음먹으니 사회란 한 구석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는 거로 이해가 되었다, 그 후로는 격주로 전화하면서도 서로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지난 이야기를 써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기억과 씨름을 해보니 필자가 기억하는 시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필자의 첫 기억을 떠올려봤더니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언니. 고모. 이모 그들이 모두 함께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의 담임 선생님도 기억할 수 있고 3. 4. 5. 6 학년의 선생님들도 기억 속에 있다. 그러나 2학년 때 선생님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속에 없다. 딱히 기억되는 동무도 없다. 왜 유독 건너뛰는지 인간의 기억이 재미있다. 언젠가 기억이 자기 혼자 스스로 살아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지. 이것이 치매 초기증상은 설마 아니겠지?
손이 귀한 집이었으나 모두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은 필자의 남동생 하나밖에 없고 딸이 다섯이나 되었다. 맏딸과 바로 밑 남동생이 있었으니 둘째 딸 필자는 아무도 모르는 나름대로 출생 서열의 서러움이 종종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성격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음을 혼자 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경쟁력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을 믿는 성격이 필자에게 있다면 이 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짐작해 보기도 한다.
온종일 엄마는 시집살이에 너무 바쁘고 아버지는 정말 공평해서 저녁이면 남동생 빼놓고 언니와 필자만 양쪽 팔로 베게를 만들어 눕히고 우리와 함께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합창하였던 유년기 기억이 있다.
필자가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가수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 레코드판을 사오셨다. 정작 듣는 건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전축이라는 기계 위에 한번 잠깐 올려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그걸 사오신 것도 필자는 의아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그냥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유행가 음악이나 감성이 아버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엄마 아버지 그들은 스스로 삶의 도구가 되어서 희로애락을 떠나서 그냥 사는 것처럼 어린 필자의 눈에 비쳤다.
지금의 필자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정서 한 가닥이 지금 필자의 정서 한가닥이 되어있음을 이제는 안다. 어머니, 아버지 그들은 제3의 성에 속해 있는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된 필자가 아버지를 돌이켜보면 켭켭 시집살이 속에 있던 엄마에게 아버지는 200% 따뜻한 남편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다. 실제로 필자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모두 주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버지 사후 10년 동안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사셨던 행복한 여자였었다.
1960년대 초반 지방 도시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나름 일찍 서울에 터전을 잡은 편이라 사춘기 시절 종로구에 있던 필자의 집은 취직 등의 이유로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 없이 밥상에 앉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모들도 시집을 다 갔지만 육 남매를 비롯한 우리 식구 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늘 손님까지 있던 집을 필자는 정상인 줄 알았고 거기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었다.
전학을 와서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입학한 필자는 함께 등교하자고 약속한 친구의 집으로 좀 일찍 갔을 때 필자는 소리 없이 놀랐다. 친구의 집은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식구가 어머니, 아버지, 동생과 친구 이렇게 네 사람이었고 그들은 식빵과 우유를 아침으로 먹고 있었다, 더구나 집에는 식탁이 있었고(필자는 이게 최고 부러웠다) 식탁 위 전등은 형광등이었다. 필자는 당시 형광등은 정말 부잣집에만 있는 것 인줄 알고 친구네 집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부잣집인 줄 알았다. 속으로 미국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이 집은 미국 같은 집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친구의 집이 한없이 부러웠고 필자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우리 집에 사람들 좀 못 오게 해. 우리도 식탁 사고 형광등도 달아. 그리고 아침을 양식으로 먹어.’ 이런 주문을 마구 하면서 날마다 졸랐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계시고 식구가 많아서 아침을 그런 거로 먹을 수 없다고만 대답했다. 필자는 ‘그렇게 간단한 딸의 부탁을 엄마는 왜 못 들어주나’ 라고 생각하고 사춘기 심통을 마구 부렸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에서 오던 친척들이 점점 수가 줄면서 집을 수리하게 되자 동생과 필자가 함께 쓰는 방에 꼭 형광등도 달아 달라고 주문했는데 아버지는 집 전체 전등을 형광등으로 교체하고 어머니는 식탁도 샀다. 또 가끔은 양식(?)으로 아침도 차려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가족이라는 게 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특별히 인성교육을 강조해서 받은 기억은 없지만 여러 연령층이 함께하는 가족 집단에서 권리와 의무의 한계 같은 게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많은 사람에게 당연한 일로 여기며 따뜻한 밥을 해 먹였던 어머니나 대식구를 거느렸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들 삶 자체가 존경의 대상이다.
집에는 빈약한 크기의 냉장고가 있긴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대식구의 냉장고의 역할을 하기나 했을까 싶다. 더운 여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참외와 토마토르 먹었는데 그들은 항상 그늘진 곳 빨간 고무 대야 수돗물에 동동 떠 있었다. 승용차나 대중교통 노선이 자유로웠던 시절도 아니고 배달이라는 것도 없었을 텐데 필자가 먹었던 그 많은 과일은 누구의 손에 들려서 집에까지 왔는지.
또 있다. 여름 방학이면 식구 단체로 만리포해수욕장에 가곤 했다. 필자는 해바라기 비슷한 정체 모를 꽃이 마구 달린 비닐 수영 모자까지 갖추고 갔다. 딸이 필자 하나도 아니었을 텐데 식구 전체가 해수욕을 가기 위해 혼자 걸어서 동대문시장을 왔다 갔다 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만리포 숙소로 가기 위해 식구들은 지난한 투쟁을 감수해야 했다. 우선 새벽같이 단체로 시외버스에 올라 인천까지 간 뒤 인천에서 만리포로 가는 여객선을 4시간 이상을 타야 했다. 이뿐 아니다. 여객선이 바다에서 육지가 가까워져 올 때쯤 다시 나룻배를 갈아타고 해변에 내려서 직사광선 아래 모래밭을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그놈의 숙소를 만날 수 있다. 와중에 누군가 심지어 석유풍로라는 것까지 들고 갔던 것 같다. 도착하는 즉시 엄마는 석유풍로에 불을 피워 닭백숙 같은 걸 마구 끓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피서였는지, 피난이었는지 구분 안 되는 행렬이었지만 정말 오랫동안 이 풍경을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 돌아가고 지금의 필자 나이쯤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와서 서울이 낯설고 친구도 없는 할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는 야사로 된 ‘야담전집’을 사드렸다. 할머니가 요새 살아있었으면 아마 박사가 되시지 않았을까? 이런 전집류는 표지가 거의 딱딱한 하드보드로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할머니는 들기도 쉽지 않은 이런 책을 밤낮없이 읽었다. 덕분에 필자는 할머니로부터 영창대군과 단종,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어린 영창과 단종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어린 필자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눈물 쏟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한 단계 더욱 수준을 높여 삼국지까지 읽어서 유비, 장비, 관우, 조자룡과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또한 외울 때까지 들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집안에서 최대로 할머니와 멀리 있을 수 있을까가 필자의 최대 고민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에게 정말 많이 고마워하고 오래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셨다면 그리스 신화도 읽으시지 않았을까? 참고로 필자의 할머니는 1900년 이전에 태어나신 무학의 19세기이었고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셨다고 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옛날 대구 삼덕동 재판소에 근무하셨던 당시의 법조인이라고 하셨다.
종로구 정든 집에서 15년 정도를 살다가 필자의 집은 강남이 시작될 즘에 아버지가 논현동에 주택을 지으시고 식구를 모두 데리고 이사를 하셨다. 말이 논현동이지 1974년도 필자의 집이 이사할 즈음 대중교통은 남산 순환도로를 돌고 돌아 제3한강교 (현 한남대교)를 건너서 신사동으로 진입하는 좌석버스와 서초동 칠성사이다 앞으로 오는 말죽거리행 시내버스가 전부였다. 사대문 안이 서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양재동은 참으로 머나먼 곳이었다. 버스가 한남대교를 지나 신사동으로 들어서면 아무 건물도,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없어서 해가 지면 사방이 어두워서 잘못 내리면 집 찾아가기도 어려웠다. 특히 방심해서 내릴 정류장을 놓쳐 말죽거리까지 가서 남동생이 말죽거리까지 데리러 나온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집에서 얼마 살지 않고 결혼을 해서 그 동네를 탈출하여 미국에 갔었지만 그때 그 동네 풍경은 지금의 강남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몇 년 만에 그리운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밤하늘 번쩍였던 신사동 후지필름 네온사인 불빛을 보고 ‘여기가 라스베이거스인가’ 라고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꿈에 부풀어 이사하였던 그 당시 한 벌판에 서 있던 양옥집이라는 곳은 때맞춰 시작된 유류파동으로 방 하나에 보일러를 켜고 모든 식구가 모여 있어야 하고 화장실은 샤워는커녕 세수하기에도 추웠다. 유류파동이 아니더라도 하루가 멀다고 고장 나는 당시의 보일러는 집과 마음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이 집은 필자 상상 속에 존재했던 양옥집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은 종로에 있었던 개조한 한옥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꾸어 왔던 따뜻한 평화를 깨트릴 수도 있는 집이었다.
다만 1대뿐인 TV와 전화기 등의 문화기기가 집결되어 있었던 안방은 재미있었다. 식구 모두의 모든 문화생활이 한곳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전화 대화는 자동으로 누군가에게 검열을 받아야 하는 씨스템이였으며 그 검열에 대해서 아무 불만이 없었고 가질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써늘한 이층집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은 미국에 사는 60세가 갓 된 재미있는 여동생의 이야기. 당시 최헌 가수의 ‘당신은 몰라’라는 노래가 있었다. 가라오케 노래방도 없었던 시절에 동생은 모나미 볼펜을 마이크 삼아 이 층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자기 흥에 이 노래를 매일 불렀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저래?’ 하다가 나중에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썰렁했던 집에서 썰렁하기만 했던 필자보다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며 가족의 몫을 해 줬다.
이렇게 함께 살아왔던 필자의 형제들은 지금 다 제각기 바쁘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 같은 환경에서 육 남매가 살아왔는데 지금은 각자의 환경도 다르고 생각도 달라서 타인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안타까운 건 바로 밑 남동생은 간경화로 투병 중이어서 일 년에 두세 번씩 입원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이 중요했던 집에서 그래도 아들만 둘을 두어서 엄마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자기 몫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100세 시대’를 동생이 누렸으면 좋겠다. 필자는 필자의 자식들이 더 독립체가 될 때쯤에 기회가 되면 그들과의 생활로 이런 에피소드를 엮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겠다
피부로 느끼는 여행의 설렘은 비행기 바퀴가 이륙하는 그 순간부터다. 요행히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에 차지한 비상구 자리는 이코노믹 증후군에 안전한 편이었다. 하긴 5시간 10분 정도면 비행기 여행치고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어쩌다 까다로운 티케팅 직원을 만나면 필자 같은 쉰 세대에게 그 자리는 어림도 없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승객 대피에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2편과 식사 1번으로 가볍게 도착한 방콕이 딴 나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은 여권 검사자의 느려터진 동작에서부터다. 외국인에게도 허락된다면 인천공항처럼 자동 검색기에 등록하고 싶을 지경이다. 참으로 느긋하다. 이 또한 느림의 미학이라 해야 할지. 그들은 말씨마저 ‘~카아’ 하며 친절하게 쭈욱 뽑아대니 영화 의 나무늘보가 생각날 지경이다.
그런데 방콕에서 신기하게도 빠른 것이 있다. 물론 사람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아 신이 나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온 우리는 적응이 안 된다. 이렇게 빠르면 고령자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느린 사람들이 씽씽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멀쩡하게 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느린 그들은 인내심도 대단하다. 서울을 능가하는 방콕의 교통 체증에도 모든 차는 조용히 기다린다. 도심 골목골목도 다 차들로 가득한데 불행히도 주차된 차가 아니고 시동 걸린 차다. 필자가 볼 때 그들은 거의 득도의 경지다. 일 년 내내 더위를 견디다 보니 그런 인내심이 생긴 건지 불교 신앙의 탓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도심 곳곳은 물론 심지어 쇼핑센터 앞에도 불상, 향 피우는 곳과 간단한 제물들이 놓여 있으니 종교 덕분도 있는 듯하다.
방콕에서 여행자가 이용하기 손쉬운 교통수단은 택시와 지하철이다.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합법적인 ‘우버 택시’가 좋다. 우선 우버 앱을 스마트폰에 깔고 서울에서 카카오택시 부르듯이 전화만 하면 된다. 택시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 차가 진행하는 것이 휴대전화 지도상에 뜬다. 요금도 정확히 찍혀 나오니 흥정하거나 싸울 일도 없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은 우버 택시를 처음 이용할 때에는 약 9천 원 정도를 깎아준다. 두 사람이 가면 두 번을 아주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도 공항을 오갈 때 사용해 택시비를 한 번에 3천 원 정도로 해결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지하철의 시설은 우리나라보다 못하지만, 요금은 더 합리적인 편이다. 정거장 수에 따라 대여섯 가지로 차등을 두었다. 정기권이 아닌 경우 매표기에서 사야 하는데 반드시 동전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불편했다. 지폐밖에 없을 때는 일일이 창구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자니 번거로웠다. 왜 지폐도 되는 매표기를 놓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정류장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같은 곳에 선다는 점이다. ‘~행’이라고 쓴 것이 우리나라처럼 조금 더 가거나 덜 가는 거려니 하고 무심코 탔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마냥 갈 수도 있다. 외국어라 발음이 낯설어 언젠가는 방송이 나오려니 하다가는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여행자가 많은 방콕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다 모이지만, 중국 사람은 매번 싸우듯이 떠드니 어디서나 튀어 실제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매일 한국말이 어디선가 들린다. 요즘은 대개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거나 채근하는 소리다. 그것도 주로 빨리하라는 얘기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뭐든 빨리 못해 애가 탄다.
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접하여 망령이라 / 어이 아니 한심하랴 청천백일(靑天白日) 빨리 가니 / 일거월석 지날수록 늙을 밖에 할 일 없다 …
◇운동선수, 은퇴시기가 빠른 직업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희대의 명창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소설가 김유정이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라는 명문을 바쳤으며 정부까지 나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가창을 멈춰야 했다. 1979년 6월,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도 여지없이 식장에서는 같은 노래가 은은히 흘렀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가진 것을 놓아야 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
스포츠 선수에게 은퇴는 특히 더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언제 필드를 떠나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남은 세월 동안의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언제가 그때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멈추는 것일 터.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를 은퇴 시기로 꼽는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해야 할 종목에서 동체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생각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야말로 은퇴 시기라고 말하는 선수도 많다. 눈은 필드를 향해 있지만 종종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젊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면 은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은퇴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을 법한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프로스포츠인 야구. 이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은 여간해서 은퇴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스타 선수들도 나이가 들고 성적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구단으로부터 방출 선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범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양새가 가장 안쓰러웠던 경우. 그는 불세출의 스타였다. 부채꼴 그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정의 활약을 펼쳤다. 아쉽다면 일본 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뒤의 성적이 부상 탓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하는 이유
다행히 국내로 유턴해서는 다시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3년에는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을 옮긴 타이거즈에서 ‘20-20클럽’ 가입 선수가 되었다. 홈런 스무 개 이상, 도루 스무 개 이상의 다양한 활약을 서른셋의 나이로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고령 기록이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 WBC 클래식 국제야구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WBC 클래식 이후. 2006년 시즌 2할4푼2리, 2007년 1할7푼2리를 기록하며 “이종범도 끝났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두 시즌 모두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100게임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움은 더 컸다.
놀랍게도 이종범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2008년과 2009년 시즌에 100경기 이상 출장해 3할에 근접한 성적을 남긴 것이다. 소속팀은 2009년 시즌 대망의 포스트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에 이종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모르는 야구팬은 많지 않았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구단의 행보.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뛰며 미증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공공연히 은퇴 압력을 행사했다. 2011년 시즌 이종범의 성적은 97경기 출장, 타율 2할7푼7리, 출루율 3할3푼7리였다. 그 정도면 어떤 팀에서든 2번이나 6, 7번 정도 타순의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지표. 따라서 구단의 은퇴 압박을 단지 성적 문제로만 보기는 쉽지 않았다.
2012년, 끝내 이종범은 유니폼을 벗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결정”임을 강조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국을 떠나며 말한 것처럼 ‘자의 반 타의 반’의 등 떠밀린 듯한 은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종범의 은퇴를 바라보는 뒷맛은 더할 수 없이 씁쓸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베테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그아웃에 이종범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이 ‘예전에도 이런 위기 많이 이겨내봤다’는 눈치로 떡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젊은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칼자루 쥔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연봉 축내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할 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좀 다르다. 프로야구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리그인 만큼 이종범과 비교될 만한 에피소드가 종종 벌어진다. 올해에도 여지없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선수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은 올해 마흔 한 살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와 내년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치로는 2016년 시즌을 보장받았고, 2017년 시즌에 계약하지 않으면 50만 달러(약 5억8000만 원)를 추가로 지급받게 된다.
다음 시즌 이치로의 연봉은 200만 달러(23억2300만 원). 여기에 각종 조건이 달려 있다. 250타석과 300타석에 도달하면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씩 추가 지불, 이후 50타석 추가 시마다 40만 달러(4억6000만 원)가 더 지급된다. 최대 600타석인 옵션을 모두 채우면 연봉은 300만 달러(약 34억8000만 원)까지 치솟는다.
이치로가 올해 거둔 성적을 놓고 보면 말린스 구단의 이런 계약은, 우리나라 구단들의 시각에서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타율 2할2푼9리에 출루율 또한 3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자동 아웃’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적으로 이종범의 은퇴 무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린스 구단의 데이비드 샘슨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치로는 팀의 소중한 전력”이라고. 그러므로 “팀이 제대로 구성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그와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음악으로 치면 “비틀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는 베테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떠한 팀 구성이 바람직한지 잘 알고 있다.
영화 에는 일흔 살의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 자도 모르면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저 “삶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싶다”던 한 노인이 첨단 업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나아가 회사 전체를 바꾼다는 설정.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베테랑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발휘되는 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구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지난 8월 6일.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41)이 19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업 포수로서 1,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법했지만 진갑용은 단호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결정에 구단의 압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결정이다.
오히려 구단에서는 아쉬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강팀인 만큼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게 분명하고, 그처럼 큰 경기에서 진갑용 같은 베테랑은 요긴한 힘이 될 테니까. 이후 진갑용은 전력 분석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야구 지도자로 성장하겠다고 꿈을 밝혔다.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준비한 만큼 선수 경력 못지않게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반면 역시 삼성 소속인 이승엽은 “은퇴 시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뜻이다. 성적도 놀라울 만큼 빼어나다. 마흔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400홈런 기록은 그 부산물.
구단에서도 “은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의 판단에 맡겨두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승엽 선수가 올해 성적이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삼성 구단이 그동안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볼 때 ‘그럼에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지금의 삼성 라이온즈는 이종범 시절의 기아 타이거즈보다 한 수 위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13일. 33세인 이탈리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플라비아 페네타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같은 나라의 로베르타 빈치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프로 전향 16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마흔아홉 번째 메이저대회 출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정상이었다. 페네타는 우승 확정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꿈꿔왔다. 매우 행복하다.”
모든 선수가 페네타처럼 은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최선의 상황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베테랑들은 해가 갈수록 성적 지표가 떨어지며 알게 모르게 은퇴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네타나 이승엽 같은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 이치로처럼 부진에 시달리는 베테랑 선수일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가 품고 있는 전력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무관심해왔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제 사회의 눈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진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지금보다 더 멀리 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갖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길이 좀 더 정확해지기를, 좀 더 두루두루 살피기를, 나이를 먹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