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미술평론가 37인에게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를 물었다. 1위는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인 김환기(1913~1974)가 차지했다. 2위는 백남준, 3위는 박수근이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화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한 집중력과 놀라운 다산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김환기, 그는 창작 에너지를 이미 과도하게 소비하고도 허기로 괴로워 여분의 에너지까지 또 소모하기 위해 광분한(?) 화가이지 않았을까.
김환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김환기의 모든 일상과 모든 생각, 모든 시공간이 예술이었다는 얘기?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은, 우리가 눈먼 지지를 보내도 무방할 게 틀림없는 김환기의 작품을 숱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유화, 드로잉, 구아슈, 오브제 등 2000여 점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속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명망에 걸맞은 걸작들, 그리고 유품들에 서린 일상의 흔적과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값진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겹으로 품을 벌려 사람들을 보듬는 곳. 봄이면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어여쁜 꽃순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달려올 듯 반색하는 산동네. 자연 풍치로 낙원을 꾸려 서울에서 드문 이색 지대인 부암동이다. 환기미술관이 이 부암동에 있어 찾아가는 발길이 가뿐하다. 짙푸른 산자락 갈피에 그림엽서처럼 곱상하게 꽂힌 작은 집들과, 저 너머가 문득 궁금해지는 언덕길, 그리고 골목골목에 감도는 의외의 적막감이라니. 이렇게 슬슬 걷기에 좋은 길의 안통, 주택가 고즈넉한 곳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흙내가 훅 끼치려나. 서울에서 토속적인 시골 마당을 보게 되다니. 요란한 이방에서 구수한 고향 원주민을 만난 듯 반갑다. 김환기의 정신을 담은 미술관의 마당답게 자연스런 서정이 깃들어 정겹다.
부정형(不定形)의 경사진 터에 들어앉은 건물은 석 동이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달관이 저마다 상이한 형상을 가지고 공간을 분할한다. 넓지 않은 터전에 건물 셋이 있으니 여백이 부족해 옹색할 만도 하지만 층계로 유도되는 동선의 다변성으로 활달하다. 나무 정원의 푸름이 주는 생동감으로 헌칠하다. 건물들의 외양은 언뜻 보면 상자처럼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기능성을 극대화한 건실한 풍모이며 섬세한 미학이 입혀져 당당하다. 본관의 구성과 디자인은 특히나 옹골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색이다.
환기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건 김환기의 아내 고 김향안 여사. 돌아보면 모든 게 사랑이자 백년동맹이었나?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김향안은 사별의 허탈한 심경을 그렇게 토로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생애 중에 해야 할 오직 유일한 일은 남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에 있다는 양 집념과 뚝심을 다해 미술관을 건립, 1992년에 개관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김향안은 소장하고 있던 남편의 모든 작품을 유럽의 이름난 미술관에 줄 계획이었단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한국에다 아예 미술관을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 ‘환기재단’을 만들어 일을 추진했다. 이렇다 할 독지가 하나 없는 상황에서 틈틈이 김환기의 작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 콜롬비아대학 유학생 시절부터 김환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겼던 인물로 김환기의 일기에도 나온다. 과연 어떤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것인가. 김향안은 숙고했으리라. 김환기의 분신에 해당할 미술관이니 무엇보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기술의 집적이면서 예술까지 발현되는 건축물, 김환기의 작품과 혈연처럼 상통하는 미술관. 김향안이 지향하고 우규승이 추구한 건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이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다.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건축의 품새, 내부 전시공간의 변화감과 탁월한 전시기능 등을 높이 평가받았던 거다.
김환기는 어떤 화가였나.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엔 온통 그림과 맞붙어 산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술 작업으로 삶을 실감하는 감관의 소유자? 주로 작업실에 붙박이 장롱처럼 붙어살았으니 창작의 충일감이 그의 붓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했으리라. 열정, 또는 탐욕스러울 지경의 창작 욕구 자체가 그의 재능이었을지도. 인간사의 모든 경향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예술가는 남다른 노력으로 고귀한 종(種)의 반열에 오르며, 고귀한 영혼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히지 않아 진취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혜안과 용기. 이것이 김환기라는 예술이 보유한 특별 자산이지 않을까.
르네상스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면밀한 성찰과 민감한 촉으로 자신을 읽고 미술을 해부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도를 읽어 가야 할 좌표를 스스로 찍었으니 그를 일러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한다.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가 섭렵한 구상과 반추상의 여정 역시 탁발한 것이었다. 초기의 구상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이어서 빼어났다. 이후 달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의 민족 정조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작풍을 시도했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그린, 이른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순수추상의 극점에 도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형적 변신을 관습으로, 신세계적 회화 언어의 개발을 본분으로 삼아 거둔 결과물이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해석에서 관조로, 김환기는 그런 관점 이동을 통해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고자 했나보다. 순수추상으로의 질주 경위를 알게 하는 그의 진술이 여기에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환기미술관은 해마다 두 차례 김환기 기획전을 펼친다. 올 하반기 타이틀은 ‘수화시학’(樹話詩學)전이다. ‘수화’는 김환기의 호. 영리한 애호가들이여, 시에도 조예가 깊어 시적 상상력으로도 그림을 그렸을 김환기의 기재(奇才)와 문재(文才)를 그림에서 명민하게 찾아보시라! 미술관의 기획 취지는 그런 것일 게다. 사실 김환기는 상당한 분량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시로써 먼지와 소음에 미만한 세상을 관조했고, 시어의 유희와 조탁으로 예술정신을 표출했다. 그는 “미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김환기의 글쓰기와 시학은, 자신의 그림에 최루성(催淚性) 감흥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주입할 것인가에 관한 모색의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김환기의 눈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장착된 눈? 그는 세심하게 멀리, 혹은 깊숙이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전차 내부 풍경을 쓴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유심한 관찰엔 허비가 없고, 그의 회화정신은 일상에서 무르익은 내공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차를 탄 승객들이)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線)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혹은 휘어지고,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 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를 알았고, 회화정신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겉볼안이라고, 겉만 보고도 속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환기미술관 본관의 속은 겉보다 웅숭깊다. 군더더기 없이 명증한 구조로 아름답다. 모든 구성이 김환기를 향한 일종의 헌화인가? 설계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에다 건축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진땀깨나 쏟았겠다. 이번 기획전엔 대형 전면점화 10여 점을 비롯해 모두 200여 점을 내걸었다. 김환기 작품의 심원한 숲에선 새가 날고 달이 뜬다. 자연의 숨결이 스멀거리고, 안도할 만한 적막감이 선(禪)처럼 광활한 뉘앙스를 풍긴다. 불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를 보라. 강력한 자장을 발산한다. 화가는 점점이 찍은 무수한 점으로 삶과 사랑을, 자연과 순리를, 해탈과 우주를 이야기했나? 어떻게 보든 무방할 테다. 점 하나하나를 세포 입자로, 그리움을 기록한 엽서로, 도통한 나한(羅漢)의 눈알로, 혹은 우리가 끝내 돌아갈 저 밤하늘의 별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보더라도 답일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거대한 질서가 응축된 하나의 소우주로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한국 근대미술이 한 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2시간마다 해설도 있다.
전시회 이름은 이태준의 소설 ‘꽃나무는 심어 놓고’에서 차용해 왔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0명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좋은 기회다. 김환기, 김기창, 권옥연, 박수근, 이대원, 이중섭, 장욱진, 천경자 등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몇 작품을 소개한다.
이중섭의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는 1953~54년 종이에 유화로 그린 그림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그림이다.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 작품이다. 2018년 홍콩 경매에서 ‘붉은 점화’는 85억원으로 한국 경매 사상 최고가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김환기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천경자 화백의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이다. 힘들었던 22세 때를 회상하며 1977년에 그린 작가의 자화상이다. 천경자의 데뷔작 ‘생태’도 전시되어 있다.
박수근의 ‘두 여인’은 1960년대 한국전쟁 이후 가난했던 시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노상에 나와 좌판을 벌이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 등 서민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미술관으로 가족과 함께 나들이로 가볼만한 곳이다.
-전시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실 2, 프로젝트 갤러리 2
가시는 길 : 지하철 7호선 중계역 3번 출구 도로 5분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1238. 02-2124-5201
-전시일정
2019년 7월 2일(화)-9월 15일(일)
-관람시간
평일 10:00-20:00
토.일.공휴일 10:00-19:00
-전시기간 중 관람료 : 무료
2018년 케이옥션의 경매가 위클리 온라인경매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6번의 정기경매와 59번의 온라인 경매, 총 65회 경매로 717억7617만 원의 낙찰총액을 기록했다. 2018년 경매에서 최고가 '30억 원'에 낙찰된 작품은 김환기의 '22-X-73 #325'였다. 김환기의 '달과 매화와 새' 역시 23억 원에 낙찰되어 2위를 차지했다.
미술품 경매 시장은 2018년에도 '김환기 열풍'이 불었다. 김환기의 작품은 정기 경매에 37점이 출품되어 그 중 31점이 낙찰됐고, 전체 낙찰총액에서 17%를 차지했다. 천경자의 '초원 II'가 20억 원, 유영국의 'Work'가 6억 원에 낙찰되며 각각 작가 최고가를 경신했다. 해외 작가 중에서는 야요이 쿠사마의 'Infinity Nets (Opreta)'가 10억에 낙찰되어 해외 작가 중 최고가에 거래됐다.
고미술 부문에서는 송석 이택균의 '책가도'가 5억6000만 원에 낙찰되며 고미술 최고가를 기록했다. '월인석보 권20'과 '목우자수심결(언해)'같은 보물이 거래돼 고미술 시장의 격을 높였다는 후문이다. 더불어 효종대왕의 '효종어필첩'같이 희소한 고미술 작품도 시장에 열기를 더했다.
2018년엔 온라인경매의 활약이 돋보였다. 온라인경매의 낙찰총액이 2017년 대비 20%정도 증가했고, 온라인경매를 통한 신규 수집가의 유입이 지속됐다. 케이옥션은 "수십 만 원에서 수백 만 원대의 작품이 출품되는 위클리 온라인경매가 고가의 작품만 거래된다는 미술품 경매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려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자선경매에는 기업과 문화예술단체의 협업으로 미술품 외에도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여 미술품 경매의 대중화를 꾀했다.
케이옥션은 2019년에도 경매 시장이 김환기와 추상미술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장욱진, 천경자 등 대가를 비롯해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으로 미술시장을 이끈 김창열, 김종학, 전광영, 이강소 그리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의 활약도 기대한다고 밝혔다. 특히 올해 하반기 전세계 회고전을 앞둔 미디어 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재평가 작업이 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도 케이옥션은 "고미술 시장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고미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와 육성에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포부를 말했다.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많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고려청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근래 들어 대중적으로 사랑받으며 우리 곁에서 존재감이 부각되는 문화재가 있다. 바로 ‘달항아리[白瓷大壺]’다.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대 역시 백자 달항아리 형상이었던 것을 보면 달항아리에 대한 전 국민의 사랑이 얼마나 넓게 자리 잡고 있는지가 짐작된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주해: 1. 대호: 큰 항아리. 높이가 40cm, 폭이 40cm 이상이어야 한다. 2. 백자를 白瓷 또는 白磁로 표기한다. 白磁는 일본식 표기이며, 도자기가 중국에서 유래된 점을 감안해 白瓷로 표기한다)
공식 학명(學名)이라고 할 수 있는 백자대호(白瓷大壺)에 처음으로 ‘달항아리’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인 분은 그 유명한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이다. 달을 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달항아리를 글과 그림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끌어안은 대표적인 인물은 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선생이다.
수화 선생은 그 어렵던 1950년대 시절, 달항아리를 고미술상에서 구입하고 돌아오는 귀갓길에 흥겨워하던 모습을 글로 남겼다. 선생의 작품에 달항아리 모티브가 여러 차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달항아리를 무척 사랑한 것 같다. 그의 안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최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약 24억6000만 원에 낙찰된 달항아리는 18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태에서 푸근함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비대칭에 살짝 기울어진 모습에 광채가 없는, 즉 무광무색(無光無色)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1964년, 우리의 백자 달항아리를 미술사학자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1922~1993) 선생이 드라마틱하게 논한 시구(詩句)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백자대호(白磁大壺)_김원룡
조선백자(朝鮮白磁)의 미(美)는/ 이론(理論)을 초월(超越)한 백의(白衣)의 미(美)/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圓)은 둥글지 않고/ 면(面)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 않을 게 아니오/ 조선백자(朝鮮白磁)에는 허식(虛飾)이 없고/ 산수(山水)와 같은 자연(自然)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白衣)의 민(民)의 생활(生活)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古今未有)의 한국(韓國)의 미(美)/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理論)을 캐고/ 미(美)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달항아리를 보면 무심(無心)의 예찬이 저절로 나온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근래 탄생 100년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줄지어 열리고 있다. 미술 애호가들은 우리나라 현대미술 거장들이 걸어온 길을 작품을 통해 가깝게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생겨 행복하기만 하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유영국(劉永國, 1916~2002),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장욱진(張旭鎭, 1917~1990) 그리고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등이 그들이다.
그중 가장 최근에 열린 고 박고석 화가의 뜻깊은 전시회를 찾아 나섰다. ‘산(山)의 화가’로 잘 알려진 박고석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다. 격정의 한 시대를 살아온 거장이 당시의 시대상을 캔버스에 어떻게 옮겼을까 자못 궁금했다.
박고석 화백의 그림은 무엇보다 힘이 넘치는 굵은 터치가 특징이다. 아울러 흰 구름과 푸른 하늘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검은 산의 풍광에서 작가만의 특별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를 ‘산의 화가’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그림 1]
그의 힘 있는 필치에 익숙한 애호가들이 보기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작품도 눈에 띄었다. 1951년 피란 시절 부산 범일동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 작품이다. 그 시대의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 여과 없이 필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반추상적 터치로 그려낸 등장인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다. 참으로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그림이다.[그림 2]
전시장을 나오는데 문득 같은 시기 역시 부산에서 작품활동을 한 김환기 화백의 1952년 작품 가 떠올랐다.[그림 3]
김환기 화백은 박고석 화백의 에 비하면 아주 다른 세상을 화폭에 담았다. 캔버스에 등장하는 꽃수레 주인이나, 근처에서 무엇인가를 팔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서 기다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화폭 중앙에 자리 잡은 꽃수레는 화사하고 다양한 꽃들로 가득하다. 주변의 인물상과 달리 수레 안의 꽃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려하고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듯하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피란생활’ 와중에도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또 누군가는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꽃을 사서 선물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아련한 마음과 함께 화가 김환기의 시심(詩心)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폭에 담긴 과거의 시대상에서 삶의 깊이와 폭을 다시금 느낀다. 특히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꽃의 아름다운 언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소설을 읽다 사랑에 빠져버린 첫 작품이 바로 다. 푸르른 무밭하며 실개천 돌다리길,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소나기처럼 온몸에 녹아들었다. 애잔하지만 환상적인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설 . 의 작가 황순원의 따뜻함을 간직한 그곳에 찾아갔다.
황순원 문학관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의 2009년 개관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기도 양평군에 조성된 황순원 문학촌은 소설 를 소재로 문학 테마 공원으로 꾸며졌다. 황순원의 장편소설 을 주제로 한 ‘해와 달의 숲’과 단편소설 의 분위기를 빌린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소나기 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개관 이후 우리나라 문학관 중 유료입장객이 가장 많은 문학관으로도 꼽힐 만큼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윤초시네가 이사 간 곳에 황순원 문학관
그렇다면 왜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 문학관이 생긴 것일까? 소설가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평양과 오산에서 짧게 보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경희대학교 국문과에서 23년 6개월 동안 교수생활을 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양평에 적을 둔 적이 없다. 양평이 황순원 문학관의 최적지가 된 이유는 바로 소설 때문이다. 2000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나 고향도 연고도 없이 병천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한 황순원. 경희대학교 제자들은 황순원 문학관을 짓기 위해 뜻을 모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내용과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만난 징검다리 등 소설의 배경과 닮은 곳이 바로 양평이었기에 문학관 자리로 낙점됐다.
황순원 부부, 문학촌 안에서 잠들다
문학관 개관과 함께 황순원의 유골은 이장돼왔다. 2014년 한국 나이 100세로 숨진 동갑내기 부인 양정길씨도 이곳에 함께 안장됐다. 두 사람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로 만나 결혼했다. 평양에 살 때부터 교제한 사이로 알려졌는데 황순원은 숭의중학교, 부인 양정길씨는 숭의여중에서 문예반장을 했단다. 1935년 둘은 일본 유학 중에 결혼해 1938년 장남 황동규를 낳았다. 이후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를 차례로 얻어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남인 황동규는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황순원 문단 데뷔는 소설이 아닌 시
황순원이 쓴 작품은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이다. 놀랍게 시도 104편이나 된다. 사실 황순원은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17세 때 문학잡지 에 ‘나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17세 소년의 꿈을 잘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독자가 그를 소설가로만 기억하지만 70세 이후로는 그는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순수와 서정미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황순원. 깔끔하고 잡문을 일절 쓰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등단 초기 시작(詩作)의 영향이 역작에 그대로 배인 것이다.
황순원은 한국 근대소설의 대가다. 사람들은 그가 일필휘지하듯 글을 썼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공책을 열 권, 스무 권, 백 권 가까이 쓰면서 교정을 보고 글을 고쳐 완성했다. 교정도 절대 제자들한테 맡기지 않았다. 문학관에 전시돼 있는 그의 초고 공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을 엄격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순원은 라는 수상집을 제외하고는 시와 소설만 썼다. 신문 기고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순원의 작품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4·19, 5·16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작품 하나하나에 녹여낸 결과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제작돼 다양한 계층의 공감을 샀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황순원의 작품 , , 의 책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가 표지 그림을 그려준 작가는 황순원이 유일하다.
소박한 일상이 엿보이는 황순원의 서재
황순원이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던 서재를 문학관에 옮겨놓았다. 책상 뒤 병풍은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8)이 황순원 선생의 작품 제목을 써서 만들었다. 황순원의 문학전집 4권의 글씨도 그가 썼다. 황순원 선생의 제자 황재국(76)이 쓴 미도거진(味道居真)이라는 서예 작품도 눈에 띈다. 이 글에는 ‘도를 맛보게 하고 진실되게 가르쳐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란 뜻이 담겨 있는데 스승에게 고희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다. 경희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러 갈 때마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입고 다녔던 트렌치코트와 베레모가 서재 왼편에 전시돼 있다. 살아생전에 쓰던 낡은 시계와 면도기 등도 전시돼 있는데 특히 면도기는 1934년부터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절제의 미학은 바로 군더더기 없는 그의 소박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이 느껴진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11월~2월), 오전 9시 30분~오후 6시(3월~10월)
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군경 1500원. 유치원생 무료 주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산 74(소나기마을길 24)
※가능한 한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함.
이재준(아호 송유재)
“작가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되기 위해서 달려갈 수도 없는 곳임을 안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어쩌면 자기 자신을 처절하게 바쳐서 작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구름의 바다 위로 동이 튼다. 나는 지금 2002년 11월, 나의 열아홉 번째 개인전을 하러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속에 있다. 매일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매일 해가 새롭게 뜬다. 지금 구름의 바다 위에 무지개 빛깔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구름바다는 내가 작년에 많이 썼던 King′s Blue이다.”
추상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는 홍정희(1945~ ) 화가가 2002년 12월호 에 쓴 글의 일부이다. 한 가정의 주부로, 같은 미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딸의 어머니로 오십 여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화혼(畵魂)의 세계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학창 시절의 작품을 모두 불사른 그 결연함이 그만의 세계를 열어왔다.
‘특정 사조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채 50년 간 꾸준히 색채 탐구와 부단한 모색과 실험, 자신만의 색면(色面) 회화의 세계를 구축,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특징’을 평론가들은 예찬한다. 1996년 현대화랑에서 펼친 전람회는 1000호(5.3mx2.9m) 크기의 초대작을 비롯해 100호(1.6mx1.3m) 40여 점으로 화랑을 가득 채운 장쾌한 눈부심에 숙연할 따름이었다. ‘아(我)’ 주제에서 ‘탈아(脫我)’ ‘passion’ ‘nano’로 이어져 온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깊은 사유(思惟)의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아래 그림은 ‘탈아(脫我)’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인사동 어느 모퉁이 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추상화 작품들로 벽면을 장식하던 첫날에 떼어 온 것이다. 화랑 주인은 구상(具象)의 다른 그림을 권했지만 황토 빛깔의 ‘아(我)’ 타이틀의 이 작가 그림과 나란히 걸고 싶어서 선택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담소를 하던 중에 얼핏 시선이 간 그의 손은 영락없는 험한 노동자의 것이기에, 빤빤한 내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춘 적이 있었다. 치열한 생산에 기여한 그 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추상화는 어떤 정형이 없기에 눈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갈등과 혼란을 일으킨다. 점, 선의 연결부터 색상의 다양함이 도대체 이성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화면을 흩뿌리는 무작위의 물감과 불규칙적인 붓질이 보는 이의 의식에 강하게 저항한다. 이런 작품들과 친해지려면 긴 시간의 눈 맞춤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화면의 구도와 색상의 대비와 어울림이 나름대로 거슬리지 않고 보는 이의 의식을 출렁인다. 마음의 분화구로 사유가 흘러넘쳐 용암처럼 흐른다. 내가 나를 벗어나면 나는 없다. 다만 그 길 위에는 그 무엇이 남는 걸까. 간단치 않은 화두이다.
미술사는 현대 추상화가 1910년대 러시아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네덜란드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유영국(1916~2002), 이규상(1918~1967) 화가들이 처음 시도한 이래, 현재 많은 예술인들이 그 주제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요즈음 세계 유수한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우리나라 원로 화가들의 모노크롬(단색 추상화) 그림들이 높은 가격에 낙찰되고 있다.
김태호(1948~ ) 화가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탄탄한 자기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그리드(grid, 모눈형의 사각)의 입체를 벌집을 짓듯 쌓아 올린 아크릭 물감의 여러 색상과 선들이 오묘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캔버스에 격자의 선을 긋고 물감을 바르고 마르면 칼로 물감을 깎아내어 그리드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깎아내고 하기를 스무 번쯤 반복한 후에야 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그 물리적 노고와 끈기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100호 정도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3개월이 걸리는 이 작업을 작가는 왜 반복하는 것일까? 비록 색상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 힘든 작업에서 작가는 어떤 성취감을 느낀단 말인가? 작품 ‘내재율(內在律) 200801’은 화랑에서 전시회 첫날 작가가 직접 작품 설명도 하는 자리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구입한 것이고 아내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작가는 “타이틀이 왜 내재율이냐?”는 질의에 “광부가 채광해서 귀금속을 발견하듯 표면의 물질을 깎아내 찬란한 재료를 얻음으로써 마음의 진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며 웃을 뿐이었다. 서로 다른 색이 날줄과 씨줄로 천을 짜듯 하나하나의 그리드를 만들고 그들이 화폭 가득히 펼쳐진다. 바둑판 모양의 요철(凹凸) 공간이 수직과 수평의 입체감을 형성한다. 물감이 두께를 더하면서 그리드가 혹은 무너지고 혹은 일그러져 자연스레 화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이 작가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색화로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층층이 다른 색들도 나타나면서 “하나하나의 작은 방에서 생명을 뿜어내는 우주를 본다”는 작가의 변(辨)이 이해된다.
한때는 이들 두 작가의 그림을 오디오 룸에 걸고 진종일 음악을 듣다가 목침을 베고 낮잠을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탈아의 화두는 풀리지 않을 뿐이고, 잠재된 의식의 흐름을 운율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사양(斜陽) 무렵, 서해안 작은 언덕에 올라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순간의 풍경과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 화가가 되고 싶던 열망이 그림 수집으로 대리만족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치 한 수레를 사봐야 진품 한두 점을 만날 수 있다”거나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해야 비로소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 트인다”는 격언이 통용되고 있다. 섭치란 ‘여러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못하고 너절한 것’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뛰어난 감식안으로 객관적으로도 가치 높은 미술품을 구입할 수는 없다. 더구나 미술품의 가치 평가는 주관적이므로 언필칭 경제의 잣대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여러 기법으로 표출하는 비의(秘儀)를 풀어가는 여정만으로도 예술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녘으로 스러지는 한 줌 햇살이 깊은 고요에 침잠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새 빛이 잉태되지 않던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이재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 1963~ )의 바이올린 독주회 맨 앞자리에 김영태 시인과 나란히 앉아,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k.304를 들었다. 41개 바이올린 소나타 중 유일한 단조의 선율은, 봄밤을 깊은 심연의 사색에 잠기게 하였다.
연주가 끝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잠시 하늘을 보았다. 아련한 산사나무 꽃향기 사이로 멜로디의 여운이 눈물 되어 흘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차도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전 부군을 사별한 안네의 망부곡 같았어요. 검은 의상은 상복일 테지요.”
스스로를 ‘풀먼지 같은 존재, 어눌한 말주변’에 빗대어 초개눌인(草芥訥人)이라 자호(自號)한 분이 김영태(1936~2007) 시인이다. 비교적 작은 키에 작은 손으로 평생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김환기 화백(1913~1974)의 훈도를 받았고, 재학 중 박남수 시인(1918~1994)의 추천을 거쳐 ‘사상계’잡지에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7권의 시집을 비롯하여 소묘집, 시론집, 산문집, 무용평론집 등 70여 권의 저작물은 가히 초인적인 문화 활동이란 말 이외에 더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일찍이 독일문화원에서의 첫 전시를 비롯해 7~8회 회화전도 열었으나 그림 수집의 인연은 아주 늦게 찾아왔다. 그의 화풍은 독특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프랑스산 판화지에 철필과 몽당붓을 짙은 먹이나 검은빛 잉크에 찍어 윤곽의 선을 구획하고, 유화용 까칠한 붓으로 면을 마감하는데, 서예의 갈필(渴筆)같이 선묘(線描)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림의 기초 단계인 스케치 실력이 상당하지 않고서는 강철 같은 선(線)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07년 이른 봄 초개 선생 댁에서 ‘토슈즈 끈을 매고 있는 헤르미아’를 만났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멘델스존이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으로 작곡했고, 이를 무용으로 공연한 발레리나의 포즈를 형상화한 빼어난 작품이다. 물 흐르듯 먹의 농담이 한 송이 꽃으로 살아 있다.
드로잉(drawing)을 선인들은 화골(畵骨)이라 일컬었다. 그리기의 단단한 뼈대가 곧 선긋기에 있음을 강조함이다. 유화나 짙은 수채화 등은 물감을 덧칠하여 잘못 그린 선들을 감출 수 있으나, 연필, 목탄, 먹, 파스텔은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는 게 매력이다. 초개 선생의 그림 속에는 일절 꾸밈이 없다. 색칠의 남용도 없다. 탄탄한 구성과 간결한 선들의 얽힘이 화면 가득 흐른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2)의 피아노곡을 즐겨 듣고, 모차르트 음반을 많이 소장하였다.
2007년 7월 운명하기 전까지 화랑가를 산책하고 음악회, 무용 공연장을 찾았다. 생전에 그가 즐겨 앉았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가열 123번 좌석은 그를 추모하는 예인들에 의해 ‘초개눌인 석’으로 명명 헌정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詩人選) 시리즈로 시집을 475권째 발간해 오고 있는데,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을 컷으로 표현하는 게 특징이 다. 이 컷은 2007년 김영태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김영태, 이제하 두 분이 그렸으나 이후는 이제하 선생이 혼자 그리고 있다. 컷을 그리기 전에 시집의 원고를 읽고, 시인들이 제공한 얼굴 사진을 보고 컷을 그리는데, 선이 잘 풀려 나올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안 풀릴 때는 수주일이 걸린다는 말을 두 분에게서 들었다.
이제하(1937~ )는 시인,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의 그 어느 장르에서도 건필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자작곡의 노래에 기타반주로 음반도 취입한 바 있다. 홍익대 조소과에서 미술공부를 하였으나 중도에 독창적인 창작의 길로 전환하였다. 경남 마산에서 고교시절인 1956년 ‘새벗’잡지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학도의 선망이 되었고,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교 시절에는 김상옥(1920~2004), 김춘수(1922~2004), 김남조(1927~ ) 같은 시인들에게 국어수업을 받았음을 자부하기도 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광화사’등의 소설로 이상문학상등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작된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에서 따온 마리안느 카페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평창동에서 시작된 카페가, 대학로로 옮겨와 시인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음악과 커피 와인 향 속에서 예술을 토론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성악가, 대중가수, 국악인들은 주저 없이 절창을 부르고 있다. 그의 문체는 회화적이고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평가 받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시혼(詩魂)의 알레고리가 녹아 있다.
마리안느를 드나들며 몇 점의 그림을 수집하던 중, 2008년 인사동 전시회에서 ‘말과 소년’ 드로잉을 구입하였다. 파스텔로 단숨에 그린 원숙한 드로잉이다. 늠름한 말이 실내 어느 공간에 들어와 있고, 소년이 말을 다독이고 있다. 한 여인이 옆에 앉아 있다.
이제하는 ‘도시에서 태어나야 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긴장하는 접점으로 말[馬]을 실내로 끌어들인 야생의 한 이미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하 그림 속의 말은 자연과 야성의 모티브가 된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으나 쉽게 동화되지도 못하는 인간들의 고뇌와 갈등을 오묘한 색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1998년에는 김영태, 이제하 2인 드로잉전이 열려 한자리에서 개성 강한 두 예술인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는 당나라 대시인 왕유의 시를 보고 시중유화(詩中有畵)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였다. 김영태, 이제하 두 예술인의 문장 속에는 격조 높은 그림이 보이고, 그림 속에서는 시와 음악이 흐른다. 이들의 고양(高揚)된 예술세계는 우리의 혼탁한 일상을 정화시킨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