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산 사이 도로를 줄기차게 달려도 산 첩첩. 깊고 후미진 산간이다. 도로를 버리고 접어든 비좁은 산길 끝자락 산 중턱, 후련하게 탁 트인 거기에 나무선(57) 씨의 거처가 있다. 풍경의 절반은 산, 절반은 하늘. 또는 절반은 청풍, 절반은 구름. 절집 자리처럼 개활하니 명당이렷다.
나무선 씨는 서점을 운영한다. 외진 산골짝 서점을 누가 찾아들까 싶지만 드나드는 발길이 허다하단다. 해서, 그는 느긋하다. 살뜰히 정붙이고 산다. 여기가 낙원이거니, 그리 자족한다. 서점 이름은 ‘터득골 북샵’이다. ‘자연주의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다.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그리다 마침내 이루었다. 이 산중으로 귀촌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나무들 울창한 숲속에 차린 서점이란 필시 이색이다. 게다가 장사가 된다 하니 거의 이변이다. 책 또는 독서는 긴 세월 동안 매력적인 향을 뿜었다. 지식 축적과 소통의 유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인터넷, 휴대폰, SNS 등속의 강력한 적들에 밀려 변방으로 밀려났다. 출판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온라인 서점의 파죽지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나가떨어졌다. 정황이 이러하지만 나무선 씨의 숲속 서점은 순항 중. 귀촌생활 방식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중.
귀촌 이전, 그는 서울에서 출판업자로 뛰었다. 말하자면 책을 만드는 사람에서 책을 파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쯤 전에 ‘터득골 북샵’을 오픈했다. 나는 언젠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던 사람 하나가 시골에 내려가 1인 출판사를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출간한다 했다. 당시 퇴고를 마친 원고의 출간을 위해 출판사를 물색 중이었던 나는 그 산골 출판사 사장에게 구미가 동해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두세 차례 전화통화만으로 상황 끝. 당시 그 사장은 재정난을 내세우며, 더 유능한 출판사를 찾으소서! 라는 요지의 기별을 해왔었다. 전화기에서 울려온 그의 언사가 어찌나 정중하고 수굿하던지 스타일 구기고 사기 저하됐던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그 산골 출판사 사장이 바로 나무선 씨다.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창업, 이후 3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책들을 냈어요. 1년에 한두 권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죠. 그러나 출판이라는 게 남의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 아닌가, 내 마음은 늘 시골로 향하는데 어쩌자고 서울에 눌러 사는가, 그런 회의가 밀려들더라고요. 그게 귀촌의 단초였어요.”
“황대권 작 ‘야생초 편지’도 기획하셨죠? 몇 부나 찍었죠?”
“100만 부 정도 나갔습니다. 그 밀리언셀러의 파장으로 야생초 바람이 일었죠. 저 개인에게도 큰 행운이었어요. 덕분에 수입을 올려 이곳 산중턱에 너른 터를 장만하고 이주할 수 있었으니까. 출판을 해서 땅을 산다는 게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빈번한 헛발질 뒤에 용케 운이 따랐던 거죠.”
“아까 마음은 늘 시골로 향했다 했어요.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은둔자 성향, 제겐 그런 게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철학이나 자연, 명상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어요. 니어링 부부가 실현한 ‘조화로운 삶’에, 존재지향적인 사유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죠. 그들의 삶이 부러웠고 그리웠고 꿈꾸었어요. 그렇다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당연하다 봤어요.”
“사는 일의 희로애락은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마찬가지 아녜요?”
“필생의 프로젝트로 귀촌을 했으나 막상 실현은 어려웠어요. 터를 잡아 집을 짓는 일에서부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 등등 상처받기 쉬운 난항이 많았어요. 한동안 너무도 힘들었죠. 먹고살아야지, 무아(無我)도 해야지, 벅찼어요.”
“무아? 자아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죠? 불로 태우고 도끼로 찍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자아라 하고.”
“자칫 제멋에 취해 가족이나 생활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기에 그치기 쉬운 게 무아 공부죠. 저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지 모르지만, 산중에 살며, 야생의 자연을 경험하며, 리얼하게 몸으로 생태와 부닥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어요.”
나무선이라는 이름에 그의 지향이 이미 완연하다. 고요한 ‘나무[木]’를 닮은 ‘선(禪)’으로 날뛰는 마음을 단속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단다.
호랑이를 봤다!
마음을 돌보면 눈도 밝아지는가. 나무선 씨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본 눈이다. 호랑이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귀촌 직후, 계곡 물가에서였단다.
“폭우가 쏟아진 이튿날 아침이었어요. 천둥처럼 요란한 물소리 들리는 계곡 저편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떠억 앉아 있더라고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척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햐! 들고양이를 호랑이로 오인한 거 아녜요? 국내의 야생 호랑이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졌어요.”
“남들은 영양 부실로 헛것을 본 거 아니냐고들 하지만 분명히 호랑이였어요. 황소처럼 커다란 호랑이. 냅다 달아났지만 반갑더라고요. 야생 호랑이가 생존하는 생태계에 외경을 느꼈어요.”
“토속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간주되죠. 귀촌 환영 사절단으로 신령이 납시었군요.(웃음)”
“나의 삶은 이제 모험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저는 그렇게 호랑이 출몰의 의미를 해석했어요.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라는 통첩으로 여겼어요.”
호랑이라는 전설과의 기묘한 해후를, 그는 삶을 일깨우는 자연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 같다. 호랑이뿐일까. 들풀에 얹힌 아침 이슬도, 말매미의 그악스런 사이렌도, 듣고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상의 선물이자 위안이자 기적일 수 있다. 나무선 씨는 한때 ‘조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내 이효담 씨와 동행, 미국의 인디언 촌락이나 인도의 오르빌 같은 생태마을을 답사하기도 했다. 공동체 운동의 비전을 탐색하기 위해.
“국내외의 공동체를 나름 둘러본 뒤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장단점을 고루 확인하고서였죠. 특히나 저 같은 인물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교만이거나 무익한 도전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어요. 제가 보기보다는 엄청나게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마음공부라는 걸 해왔지만 때로 문제가 불거져요. 공동체를 꾸렸다가는 자칫 생태근본주의에 매몰된 독불장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해서, 새로운 걸 만드는 대신, 기존 우리네 마을에 서린 미덕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는 게 더 소중하다고 봤어요. 마을 노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서린 내공을 배우는 건 더욱 소중한 학습이라 봤고요.”
“쇠약한 노인들을 무시하는 게 현실이죠. 과거 전통사회에선 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하기조차 했어요. 오늘날에도 노인에 대한 푸대접은 비일비재해요. 이는 어쩌면 인간사의 숙명일지도. 노화란 쓸쓸해요.”
“비록 고달픈 인생을 살았더라도 시골 노인들의 기본 태도는 매우 정중합니다. 상대의 성정까지를 헤아려 존중해줘요. 이게 엄청난 내공이죠.”
“마을과 관련해선 어떤 일들을 했죠?”
“예컨대, 이곳 산간 지구 일대에 산재하는 100여 가구 주민들이 동참하는 마을신문을 만들었어요. 계간 신문을 8년째 발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며 저 자신부터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귀촌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유대도 강화됐어요.”
여한 없는 삶이란?
초여름 산야의 풍광이 싱그럽다. 바람에 설레어 부푸는 숲, 나무 우듬지를 비집고 은빛 비늘처럼 쏟아지는 햇살, 저마다 가창력을 뽐내는 새들의 노래…. ‘터득골 북샵’의 명품은 어쩌면 자연 풍경이다. 나무선 씨 부부가 10년 이상을 공들여 가꾼 집과 정원과 텃밭 역시 빼어나기는 마찬가지. 이 근사한 공간에 무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 수시로 공연과 이벤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무선 씨가 이 산골에 들어와 첫 번째로 한 일은 집짓기였다. 8평짜리 흙집을 손수 지었던 것. 이후 증축을 통해 맵시 있게 규모를 늘렸다. 부부 살림채로 쓰이는 이 집엔 ‘다명헌(多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쓴 글,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빛이 밝아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뜻)에서 빌려 쓴 이름이다. 예순 살을 코앞에 두었으니 부질없는 욕망이 잦아들 시절이다. 삶을 한층 진솔하고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이이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나무선 씨는 귀촌으로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그가 추구하는 무아와 무욕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일구고 있으니.
“흙집을 지을 때 다산 초당을 염두에 뒀었죠. 삼간 초막이면 산중 살림에 족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이젠 살림 규모가 크게 늘었어요. 소박한 귀촌생활을 작정했으면서도 서점을 차린 건 어쩌면 모순이죠. 색다른 방향으로 삶이 풀려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궁리해왔던 지역문화의 거점 하나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보람과 만족이 커요.”
“산골에서 돈도 벌고, 지역문화에도 이바지하고, 일거양득의 신선한 모델이에요. 극히 내성적이고 조심성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선생에겐 복주머니나 꾀주머니가 장기처럼 붙어 있는 건 아녜요?(웃음)”
“어떤 이들은 가급적 일판을 벌이지 말고 조용히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도 하지만,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일 없이 사노라면 괴팍해지고 피곤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할 게 빤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삶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 좋아하는 곳에서 적당한 수입이 가능한 일을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것, 그게 여한 없을 삶이라 봅니다.”
일로부터의 은퇴란 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해방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감옥이다. 귀촌을 하더라도 공을 쏟을 일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한다! 나무선 씨의 생각은 그렇다.
나무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에 대한 피상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자. ❷ 귀촌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버킷리스트를 준비하자. ❸ 수입 창출을 위한 일을 갖고자 한다면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하자. 가령 산골 북샵도 유망하다. 500평 정도의 부지에 크지 않은 집을 지어도 무방하다. 서책 구입과 가구 장만에 소요될 비용 조달 여력은 필수다. 책에 관한 안목을 기르고, 도서 유통 구조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객들은 책만을 사기 위해 산골 북샵을 찾지 않는다. 주변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❹ 귀촌 현장과 귀촌인들을 사전에 충분히 접하라.
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고 다산 문화 관, 다산 기념관등이 있다. 참다운 지식인을 대표로 하는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로 거듭난다.
다산 정약용, 한국학의 바다라 일컫는 조선후기 최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도 한다. 19세기초 실학파의 철학적인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다산 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완성한다. 또한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적인 인물 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민중의 편에 섰던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으며 법학 가였다. 시인이면서 음악학자 또한 조선의 차 문화에 활력을 일으킨 조선 차의 연구자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지 꿈꾸는 자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결국 오랜 세월 속에서 각고의 노력과 탐색으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다산 문화 관에는 그에 대한 많은 저서들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직접 체험 가능한 체험학습도 있다. 다산 기념관에는 수원 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 초당의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외진 곳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신세한탄이나 절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로움에 기 죽지 않으며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산수를 벗삼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펼쳐낸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국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하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동안의 혹독한 유배생활뿐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는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술해본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