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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퇴계 이황의 유별했던 매화 사랑을 소개한다.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난리법석이다. 자발적 격리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의 매너가 되어버린 이 봄, 아직 상춘(賞春)할 여력은 없지만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렸다는 만화방창 소식에 자꾸 엉덩이가 들썩인다. 더욱이 매화 암향으로 가득해질 계절 아닌가. 예로부터 매화를 사랑한 이는 많았다. 추운 겨울에도 매화 소식이 들려오면 술을 꿰차고 길을 나섰다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과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다)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매화를 좋아했던 송나라 시인 임포(林逋, 967∼1028)가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무릇 선비라면 매화의 맑은 자태를 감상하고 붓과 벼루와 술을 준비해 시 한 편씩 짓기를 원했으니,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기개와 품격을 너도나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를 ‘兄’이라 불렀다 우리의 옛 선조들도 이 도도한 꽃에 빠져 지낸 이가 한둘이 아니다. 강희맹,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그랬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목이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매화의 포로가 됐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라는 말을 남겼다니 그의 매화 사랑은 거의 순애보 지경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퇴계연보’에는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아침 (선생은) 눈을 감은 채 말씀하시기를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했다. 오후 5시 무렵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 하셨다. 부축해서 일으키니 앉은 채로 조용하게 떠나셨다.” 한번은 고향 안동에 사는 지인이 매화를 보여주겠다며 퇴계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임금의 소명이 내려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매화를 보지 못한 아쉬운 회포를 네 편의 시로 읊어 지인에게 보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한다. 매화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가 매화를 저버렸으니 그윽한 회포를 서로 펼 길 멀어졌네 멋스런 풍치가 도산 절우사에 없었다면 심사가 여러 해 전부터 또한 다 무너졌으리 梅不欺余余負梅 幽懷多少阻相開 風流不有陶山社 心事年來也盡頹 평소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 부르며 ‘혹애’(酷愛,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는 요즘 말로 매화 마니아, 매화 덕후였다. 61세 봄에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라는 화단을 조성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매화를 애지중지했던 퇴계는 어느 날 시를 쓰다가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아꼈다는 도연명을 언급하면서 “매화 형은 어찌하여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까(梅兄胡奈不同參)”라고 묻기도 했다. 그가 30여 년간 쓴 매화 시는 모두 107수. 이 중 91편은 매화시첩으로 엮어 남겼다. 두향과의 로맨스는 출처 불분명 그가 단양 군수로 지내던 시기(1548), 관기였던 두향과 매화를 주고받으며 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두 사람이 만난 기간은 9개월 남짓. 이황이 얼마 뒤 풍기 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이후 두향은 그리움 속에서 지내다가 이황의 임종 소식을 듣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데, 그녀의 묘를 이황의 제자 후손과 지역민들이 관리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은 이 러브 스토리의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의 문헌 어디에도 두향이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없을 뿐더러, 과연 그녀가 이황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인지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정비석(1911~1991) 소설가가 발표한 작품 ‘명기열전’에 소개된 이야기를 출처 확인도 없이 사람들이 사실로 믿게 된 것이라 보는 이도 있다. 실제로 단양 지방과 이황 후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야사를 근거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소설가의 고백도 있었다. 당시 이황이 처한 입장은 을사사화, 정미사화 등이 연이어 발생한 정치적 난국 속에서 한가롭게 기생과 정담이나 주고받을 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도피하듯 외직을 청했고 겨우 얻은 자리가 단양 군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아내와 아들과 형을 잃는 불행한 일들이 그즈음 있었다. 퇴계는 임금에게 신망 높은 인물이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많았다. 자연에 파묻혀 지내는 걸 좋아했던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50대에 조기퇴직(?)을 했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 쓰고 꽃나무 심는 일을 즐거워했다. 풀 한 포기에도 이름을 지어주며 의미 부여를 했다. 또 늙어 병이 들자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매화분을 옮기라 할 정도로 사물에게도 예의를 차렸다. 생이 다할 때까지 격물(格物)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도산서원에는 올봄에도 매화 향이 한가득 퍼질 것이다. 그러나 이황이 도산서당 주변에 직접 심고 키웠다는 고매(古梅)는 죽어버려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서운하다.
- 2020-03-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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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잘하는 남자 김기수, 남자분들! 차라리 대놓고 예뻐지세요!
- 여자들보다 많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입을 쫙! 하고 벌렸다. 집 안방을 빼곡하게 차지한 아이들(?)의 정체. 스튜디오 사무실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때깔 요망진 것들! 바로 형형색색 다양한 모습의 화장품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여자? 아니 남자다. ‘댄서킴’으로 불리던 개그맨 김기수가 웃음보따리가 아닌 화장 도구를 들고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들어는 봤는가?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 어둠 속에서 ‘예뻐지고 싶다!’를 외치던 남자들이여,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김기수와 함께 꽃단장 한번 제대로 해보자. 화장하는 남자의 편견을 깨다 웃기는 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섰던 김기수. 그가 2016년 11월 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나와 자신을 뷰티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뷰티크리에이터란 소위 화장을 통해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는 현재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와 포털사이트의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꾸미고 가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전파한다. 개인 채널과 SBS 모비딕의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진행 중.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뷰 돌파!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그의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뜻이다. 이 여세를 몰아 작년 말 SBS 연애대상에서 모바일 아이콘 상과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주는 메이크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 초 화장법 노하우를 담은 책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출간했고 3월 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 제품도 출시한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의 한 방송에서도 김기수를 찾아왔을 정도이니 인기는 상상 그 이상. 대세 중에서도 대세가 바로 맨즈(남자)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다. 불모지를 앞서 걷는 펭귄의 길을 택하다 개그맨이 아닌 뷰티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하고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그 과정이 어찌 보면 홧김(?)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기수는 무대 화장을 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고. 특히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클럽 DJ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트렌스젠더가 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어요. 트랜스젠더가 됐네, 돌려 깎기를 했네, 성괴(성형괴물)네. 일주일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제 이름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김기수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자신의 발언으로 성 소수자들이 눈총받을까 말을 아꼈단다. “나는 그저 내 화장 실력으로 얼굴을 가꾸어서 무대에 올라간 건데 왜 중국 성괴 같다고 그러지? 제가 당시 칩거하고 힘들어하니까 지인과 팬들이 ‘오빠 화장하는 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유튜버(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남성분들의 젠더리스 메이크업(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화장)을 많이 눈여겨봤었어요. 그럼 나도 저렇게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에 영상 편집을 배워나갔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영상을 올렸다. 첫 영상을 올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댓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정도의 화장 실력이라면 자랑할 만하네?’ 했고,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팬으로 돌아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김기수는 자신이 뷰티 채널을 시작하고 1년 사이 사회적으로 맨즈 뷰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맨즈 뷰티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화섹남(화장하는 섹시한 남자),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이라는 신조어도 김기수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남성이 당당하게 멋져지고 예뻐지는 시대를 김기수가 열었다고 해도 실로 과언은 아니다. 그는 대열 앞에 서서 걸어가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저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 하면 지금 제 일을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루머가 또 돌지 않는다면 나는 이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이 있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물론 처음에는 분했어요. 활동을 접을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남자분들도 용기를 내서 화장법에 대해 묻고요.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이죠.” 분장실 옆 아역 탤런트, 화장에 눈뜨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언제부터 화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왜? 남자 개그맨이? 그리고 근육 팍팍 보이면서 클럽 DJ를 하는 남자가 언제부터 화장에 심취했을까? “중학교 때부터 아역 탤런트를 했는데 그때 화장에 관심이 생겼어요. 야외 촬영 현장에서 평범한 중년의 엑스트라 두 분이 트레일러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아름다운 사람이 돼서 나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웠어요. 쇼킹했어요. 그곳이 마치 마법 상자처럼 보였어요. 불꽃이 막 파파팍! 튀는 느낌?(웃음)”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분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분장사 누나가 저에게 선크림하고 크림을 주더라고요. 써보라면서요. 다음 날 그걸 바르고 현장에 나갔는데 감독님이 ‘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사 한마디 더 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선크림에 맞는 수분크림과 립스틱을 찾고 또 뭔가 발견하고. 코덕(화장품과 덕후의 합성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화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극명했다. “지금도 남성이 화장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죠.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요. 저 어렸을 때는 크림 바르고 밖에 나가는 남자가 몇 안 됐어요. 저 혼자 그냥 다락방에서 뭐든 발라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숨어서 했는지 나도 참 기특해.(웃음) 그렇게 30년 동안을 해왔고,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여! 당당히 화장대 앞에 서라! 김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시니어 남성분들 등산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세요?” 바로 BB크림이랑 틴트란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꽤 된다는 말.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BB크림과 틴트를 바른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뷰티크리에이터로 일하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너무나 잘 들려온다 했다. 김기수의 채널 구독자 중 BB크림 바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50대 중반의 남성도 있었다. 올리브영 맨즈뷰티 코너를 서성이는 시니어 남성에게 제품을 권해드리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이 그루밍하는 것에 편견이 있으면서도 관심들은 다 가지고 계세요. 제가 예약하려던 눈썹 문신 전문점은 3개월 이후나 돼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80%가 남성 손님이고요. 성형외과 전문의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 리프팅 하러 오시는 중년 남성들이 꽤 많다고 해요. 그렇게들 몰래몰래 자기 관리하면서 화장을 하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관심은 있으면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거뿐이잖아요.” 요즘 김기수의 개인 채널에는 남성들을 위한 화장법을 모아 따로 분류해놓았다. “3년 동안 취직 안 됐던 남성분이 제가 알려드린 화장을 한 뒤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붙었다고 하잖아요. 요즘은 자기관리 잘하는 남자가 칭송받는 시대예요. 깨끗한 인상 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좀 꾸미고 멋져지고 싶은 남자들이 숨지 말고 나와서 당당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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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커피 명인, 여종훈
- “맛이 서로 싸우는 걸 알아야 해요.” 명인의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았다. 20여 년간 커피와 함께한 삶. 육화된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엄살도 없고 과장도 없다. 오로지 그 세월과 맞짱 뜨듯 결투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절창이다. 국내에 커피 로스터가 열두 대밖에 없던 시절, 일본에서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가 문을 연 청담동 ‘커피미학’에는 각지에서 맛을 보러 온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여종훈 커피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소문에도 아랑곳없었다. 20대 때부터 커피를 달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서커피에서 나온 무늬만 커피인 믹스커피를 마실 때 그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커피를 사다 마시곤 했다. 드립 커피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에 퍼컬레이터로 원두커피를 추출해 하루 열 잔 이상씩 마셨다니 요즘식으로 말하면 커피 덕후였다. “당시 원두커피를 파는 다방들은 많지 않았어요. 신촌의 몇몇 다방은 양키시장에서 깡통커피 MJB, MJC를 사다가 썼죠. 그때는 바리스타를 ‘주방장’이라고 불렀어요. 지금 그러면 기겁할 일이지만 커피 전문 주방장들이 원두커피 맛을 높이기 위해 담배꽁초나 칡뿌리 등을 몰래 넣기도 했어요.” 아직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여종훈(呂鐘勳·64) 명인의 커피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원예 사업을 해보려고 20대 중반에 시골로 들어갔던 그는 6년 만에 다시 도시로 나오고 말았다. 지금처럼 성능 좋은 농기계가 없던 때라 삽으로 직접 흙을 파야 했는데 허리가 견뎌내질 못했다. 젊은 패기에 농사일을 너무 우습게 봤던 것이다. 원예 사업을 접은 뒤에는 몇 번 직업을 바꿨다. “손에 딱 잡히는 일이 없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였어요. 어느 날 일본에 살던 친구가 사업 구상차 한국에 왔는데 드립 세트랑 원두커피를 트렁크에 넣어왔어요. 마셔보니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어디서 가져온 커피냐 물었더니 일본에서 ‘커피미학(珈琲美学)’이라는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장인이 볶은 콩이라고 하더군요. 국내 커피랑은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향과 맛의 품격이 느껴졌어요. 반해버렸죠.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긴 했나봐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한국에서 계속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커피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일본에서 온 친구는 그와 함께 청담동에서 커피미학을 운영한 재일교포 나가시마 요시코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가 오하라 히로시(小原博 )를 만났다. 명성대로 꼬장꼬장했다. 그에게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커피미학’이라는 브랜드를 가져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1년간 공부했어요. 고달팠죠. 커피 맛을 보기 위해 매일 30~40잔의 커피를 마시고 혈변을 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최고의 맛을 찾고야 말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련했어요. 한 모금 입에 넣고 맛만 보고 뱉어버려도 되는데 다 마시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말이에요.” 그는 해외유학파 1세대로서 일본 커피 명장의 인정을 받는다. 대학교 때 커피숍에서 일하다 마신 원두커피 한 잔이 인연이 되어 장인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 오하라 히로시는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여종훈 명인을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친 범주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종훈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쳐보고 나서야 선생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됐다.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배우는 사람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왜 안 돼?’ 하면서 의심해보지 않는다는 거죠. 오하라 선생은 그런 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로스팅을 10년 해본 사람과 20년 해본 사람은 감별 능력이 다릅니다. 20년간 로스팅을 해온 저도 헤맬 때가 있어요. 맛에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 연구는 끝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커피 맛을 스펙트럼에 비유해 설명한다. 맛의 정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콩도 있고 넓게 형성되어 있는 콩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두 종류에 따라 반응하는 온도가 다른데 로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약배전으로 해줘야 맛이 제대로 나는 콩이 있어요. 그럴 때는 약배전으로 끝내야 해요. 더 볶으면 제 맛을 잃어요. 또 어떤 콩은 강배전일 때 최고의 맛이 나죠. 이런 콩을 약배전으로 볶으면 맛이 망가집니다. 이런 감별 능력은 경험치에서 나와요. 끊임없이 테스트를 해본 사람만이 섬세한 맛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 거지요. 이런저런 방법 다 써봐야 맛의 정점에 가까운 로스팅 방법이 구해집니다. 제가 오하라 선생을 만나러 일본에 갔을 때 매장에 내놓은 커피가 70여 종이나 되었는데 참 대단한 분이에요. 커피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 많은 콩의 맛을 감별해내기 힘들거든요.” 청담동 ‘커피미학’에서 ‘커피쌤’의 시대로 일본에서 돌아와 청담동에 커피미학을 열고 그는 40여 종의 커피를 메뉴판에 올렸다. 맛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직접 로스팅하고 핸드드립으로 정성껏 추출한 커피를 내놓자 난리가 났다. 당시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이 무려 1만 원이나 했는데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매장 안은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쌌어요. 그래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들락거렸지요. 우스갯소리로 커피미학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청담동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연예인, 스포츠인들도 자주 왔는데 손님들 중 3분의 1은 연예인이었어요. 손숙, 윤석화, 임예진, 최민식, 송강호, 차인표, 김선아 등이 그때 단골이었죠.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끝나면 기자들 데리고 와서 인터뷰도 하고 금융권에서는 특별한 날 아예 하루 빌려 행사를 치르기도 했어요.” 다양한 문화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커피미학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와 넓은 정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지하에 쿠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지의 나라에서 수입한 생두를 로스팅하는 공장까지 세팅해놓아 마니아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종훈 명인의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한창 입소문을 탈 때는 신문과 잡지, TV 등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커피미학에서 로스팅한 콩을 가져다 쓰는 커피 전문점도 점점 늘어났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지금은 원두를 팔기 위해 영업을 하지만 그때는 아무데나 안 주고 커피 맛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지 심사를 한 뒤 콩을 줬죠. 그래도 간혹 커피를 재탕해서 쓰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커피미학은 2010년 문을 닫는다. 1998년 청담동 본점을 시작으로 인사동,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안성 등지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후 재정상황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 매해 급상승하는 월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현재 여종훈 명인은 경기도 용인민속촌 근방에서 ‘커피쌤’이라는 브랜드로 공방과 매장 운영을 하고 있다. 갓 로스팅한 그의 커피를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온라인에서도 여종훈 커피 맛에 중독되어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 판매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위력에 놀랐다고 한다. 이참에 브랜드에 명인 이름을 좀 더 부각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맛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방송에 나가고, 광고하고, 해외 산지 돌아다니다 보면 로스팅 연구는 뒷전이에요. 연구 안 하면 맛의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는 거고요. 그런 커피 내놓기 싫습니다.”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그는 최근 지나치게 낮은 가격의 커피가 유통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립 에스프레소는 식어도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좋은 원두를 써야 하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파는 원두 가격을 보면 놀라워요. 제대로 된 콩이라면 생산지에서 절대 그 가격에 사올 수 없습니다. 저가 커피는 품질을 의심해봐야 해요. 한때 유통업자들이 유통기한 지난 커피를 봉지갈이해서 팔았던 적도 있어요. 한두 가지 생두를 사다가 배전도에 따라 커피 이름을 마음대로 붙이기도 했죠. 커피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던 때였어요. 지금은 마니아가 워낙 많아 맛을 속이면 금방 들통이 납니다.” 요즘도 그는 새 로스팅 기계가 나오면 도전한단다. 기존의 로스터로 최고의 맛을 찾았을 텐데 뭐하러 새 기계를 들여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새 기계는 자동차로 비유하면 벤츠예요.(웃음)” 솔직히 호기심도 있고, 새로운 룰을 만들면서 긴장하는 시간이 즐겁단다. 커피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요즘도 어디 커피가 맛있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가서 마셔보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맛이 싸우는 걸 몰라요. 커피를 다루려면 커피 마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맛이 다투는 걸 먼저 느껴보고 로스팅은 그다음이에요. 세미나 할 때 하는 질문들을 들어보면 빤해요. 저는 이미 다 고민해본 것들이거든요. 어느 날 블렌딩 비율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조금 무겁네요, 요걸 한번 빼보세요’라고 말해줬더니 무릎을 탁 치더군요. 돌아가서 조언해준 대로 해보고는 전화를 했어요.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그 내밀한 다툼의 맛을 봐버린 그는 자신을 더 경계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생두를 볶을 때마다 첫 마음,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내공이리라.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로스팅은 생두에 열을 추가해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원재료가 형편없어도 로스팅 기술로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밥 짓는 솜씨가 좋다고 정부미로 아끼바리 밥맛을 낼 수는 없잖아요.” 농부와 조물주의 공을 먼저 챙기는 명인. 그에게도 얼마 전 직업병이 온 모양이다. “로스팅하면서 연기를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2년 전부터 폐가 안 좋아졌어요. 아파보니 ‘잘못되는 게 순간이구나’, ‘생과 사의 경계선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욕심이 사라졌어요. 예전에는 인간들 비리만 보이고 그랬는데 요즘엔 좋은 모습들만 생각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일도 좀 줄이고 제자도 키워볼 생각입니다.” 참 감사하다는 말이 오래 귓전에 머문다. 잘 숙성된 커피처럼 향이 깊다. 맛을 섬겨왔듯 이제는 그의 몸을 받들어 모실 때다.
- 2018-01-2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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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다방, 진화하다” 8월의 핫플레이스, LA 스타벅스 리저브
- “언제 LA에 오면 스타벅스 리저브에 꼭 한번 들러봐!” 은퇴 후 목말랐던 문화생활을 원없이 즐기고 있는 한 선배가 커피 맛 좋다며 야단스럽게 추천하던 곳이었다. 안 그래도 비싼 커피를 ‘리저브’라는 이름을 붙여 더 비싸게 팔아먹는다며 삐딱선을 탔었지만, 사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손에 쥐고 하루를 시작하는 처지라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날이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5번 고속도로의 교통 체증을 뚫고 2시간 여 만에 LA에 입성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선배의 권유대로 스타벅스 리저브에 들러보기로 했다. 또 언제 올지 모를 일이었고 지친 심신을 달래는 데는 에스프레소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타벅스 리저브(Starbucks Reserve)는 2014년 시애틀 1호점을 시작으로 선을 보인 스타벅스 프리미엄 브랜드다. 이곳에서는 단일 원산지에서 극소량만 재배되는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는데 한정된 양이다 보니 일반 스타벅스 매장에는 공급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리저브 매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커피다. 현재 미 전역에 21개의 매장이 있고 그중 캘리포니아에는 LA를 비롯해 세 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는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60여 개나 된다고 하니, 오히려 본토에서 리저브 커피 마시기가 어려운 셈이다. 코리아 타운을 벗어나 라 브레아 길에 들어서자 위풍당당 LA 스타벅스 리저브가 한눈에 들어온다. 별 모양과 함께 그려진 이니셜 ‘R’은 초록색 인어 아가씨보다는 확실히 고급스럽다. 스타벅스 리저브는 클래식하면서도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유명한데 LA점 역시 소문대로였다. 문을 열자마자 직사각형의 매장이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웅장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뿜어내고 진한 오크나무와 구리가 조화를 이룬 벽면은 멋스럽기가 그지 없다. LA 메트로 지역에는 이미 900여 개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지만 리저브 매장은 남가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다. 한국의 ‘스벅덕후’(스타벅스 마니아)들은 미국을 여행할 때 시애틀과 LA 리저브에는 꼭 들려 인증샷을 남긴다고 한다. 한국에 더 많은 리저브 매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성지순례와 같다고나 할까. 사실 스타벅스 리저브를 이야기하는 데 시애틀이 빠질 수는 없다. 1971년 수산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탄생한 스타벅스 1호점과 함께, 2014년 탄생한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 테이스팅 룸(Starbucks Reserve Roastery and Tasting Room)’은 시애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약 1400㎡ 규모의 시애틀 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매장이다. 이 매장은 CEO 하워드 슐츠가 구상하는 데만 10년, 공사비용으로 약 220만 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슐츠 회장은 “스타벅스 리저브가 스타벅스의 미래”라고 선언한 바 있다. 시애틀처럼 으리으리한 규모는 아니지만 LA에서도 리저브의 맛과 멋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타벅스 리저브의 매력은 희귀한 스페셜티 원두와 리저브만의 독특한 추출 방법이다. 원두는 그때그때 확보하는 양과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날 LA 매장에서는 ‘르완다 아바쿤다카와’, ‘페루 산이그나치오’, ‘말라위 사블 팜’, ‘파푸아뉴기니 루트 넘버원’ 등의 원두를 선보였다. 원두뿐 아니라 추출 방식도 선택할 수 있는데, 스타벅스 리저브에서만 사용하는 클로버 압착기(진공압착)를 비롯해 사이폰(진공여과), 케멕스(여과지추출) 등이 있다. 비주얼 면에서는 단연 사이폰이 돋보인다. 실험실 비커 모양의 진공관에 커피를 담아 끓여내는 모습은 마치 바리스타의 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맛은 클로버와 케멕스가 좋다는 평이다. 고민 끝에 원두는 블랙티의 향을 느낄 수 있다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아바쿤다카와로 결정하고 클로버 머신으로 뽑아낸 더블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원두를 선택하면 담당 바리스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바리스타는 고객이 주문한 커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고 고객은 원두를 갈아 추출하는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뒤로 물러나 커피를 기다려도 무방하지만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이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하다. 매장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동안 주문한 커피가 완성됐다. 일회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근사한 컵 또한 만족스럽다. 진한 더블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평소보다 무려 3배의 값을 치렀기 때문일까. 과연 목을 타고 넘어가는 깊은 에스프레소 향은 특별했다. 35℃를 육박하는 날씨와 교통 체증에 지친 심신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온전히 커피만을 즐기기 위해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영화배우처럼 생긴 백인 노신사가 다가와 테이블을 나눠 써도 되겠냐고 정중하게 묻는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할리우드가 지척이고 LA에서 가장 물 좋다는 베벌리힐스가 가까이 있는 곳, 운 좋으면 유명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휴대용 컴퓨터를 펴놓고 열공 중인 젊은이들 틈에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도 있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니어들도 제법 많았다. 미국에 살면서 참으로 익숙해진 것 중 하나가 인종 불문, 남녀노소 모두가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곳 리저브에서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밖은 폭염의 날씨에 차가 막혀 짜증이 나든 말든, 이곳은 뮤지컬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과정, 추출하는 과정, 마시는 과정 모두를 즐기고 있다. 앞에 앉은 노신사도 휴대용 컴퓨터에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다. 스타벅스 리저브를 강추하던 선배도 아마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함을 즐기면서 말이다. 마시고 있는 커피 사진과 함께 선배에게 좋은 곳을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카톡을 보냈다. 곧 답이 날아왔다. “10달러로 즐기는 최고의 사치… 마음껏 즐기시오. 곧 다시 퇴근길의 고속도로를 타야 할 테니….”
- 2017-07-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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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단카이 세대의 취미
-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정년퇴직 이후의 삶,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의욕과 체력이 따라주는 젊은 시절부터 ‘취미의 씨’를 뿌려두는 게 중요하다. 취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면 “젊었을 때 했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꽤 된다. 그러나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걸 방해하는 건 의욕도 체력도 아니고 ‘오래 계속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일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이자 타이밍’이니 남은 삶에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재미’와 ‘보람’을 선물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의 ‘애호가’일 것이다. 일본 시니어들의 취미 일본에서는 고령자가 계속할 수 있는 취미로 주식, 등산, 워킹, 낚시, 독서, 자수, 골프, 볼링, 시쓰기, 체스, 데생, 원예, 역사, 장기, 분재, 서예, 유화, 과자만들기, 수묵화, 시계수집, 게이트볼, 꽃꽂이 등을 꼽는다. 크게 몸을 움직이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손동작이 필요한 취미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이러한 취미는 운동 부족을 해소해주고, 치매 예방에도 좋다. 또한 같은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넓혀주고 쓸쓸한 노후의 고독도 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60대 남녀의 인기 취미 순위 350개 이상의 취미를 소개하는 일본의 ‘취미찾기닷컴’이 조사한 인기 순위를 잠깐 살펴보자. 먼저 60대 남성은 혼자 하는 여행, 사이클링, 오토바이, 재택근무, 사진, 전자공작(PIC), 절과 신사 순례, 주식, 워킹 순으로 조사됐다. 60대 여성의 경우는 혼자 하는 여행, 재택근무, 온천 순례, 절과 신사 순례, 워킹, 자수, 양궁, 등산, 심리학 순으로 인기가 있었다. 참고로 50대 남성의 취미로 사격, 50대 여성의 취미로 소설쓰기, 기타, 퍼즐 맞추기 등이 눈에 띄었다. 내 꿈을 찾아라~ 인생은 60부터 일본의 주쿄(中京) TV는 매주 일요일 아침 5시 45분부터 을 방송하고 있다. ‘아라칸’은 Around Kanreki의 줄임말로 칸레키는 우리말로 환갑을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은 환갑 전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꿈에 도전해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힌트를 제안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소개된 이색 취미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2015년 12월 6일 방송에서는 빙상 위의 컬링(curling)이 아닌 날씨와 관계없이 체육관에서 즐길 수 있는 ‘커롤링(curolling)’이 소개됐다. 20여 년 전 나고야에서 시작된 이래 경기 인구 40만 명을 자랑하는 인기 스포츠로 체력보다는 두뇌게임이라는 점에서 ‘마루 위의 체스’라고도 불린다. 2016년 1월 10일에는 미술 취미로 ‘어탁(魚拓)’이 소개됐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든 즐길 수 있는 ‘어탁’은 기존의 수묵(水墨) 중심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등을 바꿔가며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꼭 물고기가 아니어도 되며 모든 사물의 본을 떠서 작품으로 만드는 ‘탁화(拓畵)’라는 장르가 새롭게 소개됐다. 그다음 주인 1월 17일에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차려입고 컨트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컨트리 댄스가, 3월 13일에는 1960~1970년대에 붐이 일어나 일렉트릭 기타에 빠졌던 세대들이 밴드를 결성해 제2의 청춘을 만끽하는 모습이, 4월 17일에는 실제 동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리얼 양털 퀼트 아트가, 8월 7일에는 다양한 무늬가 특징인 넥타이를 재활용해 가방과 인형 등을 만드는 리폼이 소개됐다. 이 밖에 9월 4일에는 경이로운 종이접기의 세계, 9월 11일에는 걸리버 여행기를 방불케 하는 미니어처의 세계, 10월 9일에는 종이를 오려내 그림을 만드는 ‘키리에(切り絵)’, 10월 23일에는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철도 모형 등이 소개됐다. 2017년에 들어와서는 우쿨렐레와 돌하우스(미니어처 장난감 집), 천사의 소리 핸드벨 음악, 볼펜 그림의 세계 등이 전파를 탔다. 이색(異色) 취미보다는 다양한 취미 인구가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계속 늘어나면서 취미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과거 이색적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끌던 취미들은 최근 덕후(마니아, 광)들이 등장하며 주류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취미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셈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 역시 새로운 취미에 도전해 개척하는 자세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령자들에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치매 예방 차원에서 손가락과 뇌를 자주 사용할 수 있는 주산, 바둑, 장기, 손글씨, 그림, 색칠하기, 민요, 노래방, 꽃꽂이 등을 권한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 것도 좋다. 몸 푸는 기분으로 이런 취미는 어떨까? 사단법인 일본 화살불기 레크레이션협회는 폐활량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로 화살불기를 권한다. 실제로 전국의 화살불기 교실에는 60~70대 회원들이 많은데 90세가 넘은 고령자도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집이 취미인 사람들은 모으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수집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취미활동을 확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예를 들어 도자기 수집을 하는 사람이 도예 교실을 다니며 직접 만들어보거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어떨까? 또 인물과 동물, 자연 풍경 등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은 독거노인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등 자신의 취미와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기부 나눔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좀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들이 많다. 먼저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보고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취미를 선택해보자. 슬슬 발동을 걸어보자 지난 2014년 5월에 구성된 댄스 그룹 ‘TGK48’은 일본 기후 현 다지미 시의 고령자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룹명은 일본의 인기 여성 아이돌 그룹 AKB48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다지미, 겐키(건강), 고레샤(고령자)’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를 기치로 내걸고 2016년 8월 60대 42명, 70대 21명, 80대 1명 등 총 64명(남성은 5명)으로 구성된 ‘TGK48’은 힙합도 소화하는 본격 댄스 그룹으로 공공시설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가량 연습을 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최근 춤을 잘 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와 스포츠 대회에 출연,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 강사 레슨비 등 연간 100만엔가량의 운영비는 다지미 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고령자의 의료비와 개호비 등의 삭감과 관련해 길게 내다본 다지미 시의 획기적인 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16년 3월 1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TGK48’ 멤버 35명의 체력을 측정한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동세대의 일반인들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깜빡이는 빛을 보고 도약하는 데 걸리는 ‘전신 반응속도’는 무려 0.3초대로 20대 수준으로 나타났다. 5초간 빠르게 스텝을 밟는 ‘서서 스텝핑’의 평균 횟수도 60대 멤버가 40.1회, 70대 멤버가 37.7회를 기록해 젊은이 못지않은 결과를 보여줬다. 이들의 체력을 측정한 기후대학교 교육학부의 가스가 히카루 교수는 “힙합은 빠른 템포의 음악에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춤으로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2017-04-1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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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김성철 교수
-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 2016-09-28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