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귀촌이라 하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는 과정을 떠올린다. 제2인생을 위한 새 출발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령화 사회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최근 다거점생활(多拠点生活) 혹은 다거점라이프(多拠点ライフ)가 새로운 귀촌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생활의 거점을 여러 곳 만든다는 의미다.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을 만든다는 면에서,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쉬는 것이 주목적인 별장의 개념과는 다르다. 이 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속사정과 특유의 합리성이 돋보인다.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거점생활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귀촌이란 개념에 디지털 유목민, 즉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사고가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니 굳이 생활의 터전으로 도쿄와 같은 거대 도시를 고집할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다거점생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살고 있던 거주지 외 농촌 등지에 또 다른 집(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집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거점에서 생산활동이나 인간적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개념이 더해지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2011년 3월, 일본을 뒤흔들어놓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지진 공포가 가져온 대피처의 필요성
평생을 한곳에서 살아온 지역 주민들은 대지진 후 삶의 터전을 잃고 가설 마을에서 어렵게 생활하거나 타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정착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도 재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신속하게 몸을 옮길 수 있는 피난처의 필요성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거점생활 추천’의 저자이자 일본에서 다거점생활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언론인 사사키 토시나오(佐々木俊尚)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거점생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생활의 또 다른 거점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운전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루이자와(軽井沢)를 선택하게 됐다”며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을 피해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었다. 도시민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사사키 토시나오는 후쿠이(福井) 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해 세 곳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동시에 두 가지 삶, 인생에 활력 줘
‘언아더(another) 거점을 만드는 방법’을 출간한 Think Future의 편집장 사토 하야오(佐藤 駿)는 SNS를 통해 “기존 일본의 이주(귀촌)는 도쿄 생활에 지쳐 지방으로 돌아가는 현역 이후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하고, “재해 대국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또 다른 생활거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동시에 여러 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삶은 어떨까. 사사키 토시나오는 다거점생활이 다양한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도시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시생활을 겸하는 삶이기 때문에 일이나 사업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꼽는다. 농촌에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평소 만나기 쉽지 않았던 농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과도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 짜여진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장점이다. 거점마다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게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동시간은 심기일전의 계기가 된다. 그는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많은 짐이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 경제적 부담이 따르고,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니 세간을 마련하는 데 초기 비용이 든다. 또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
또 다른 다거점생활자들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있음을 장점으로 꼽는다. 주말마다 농촌 사람으로 변신해 지역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로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다거점생활의 보람 중 하나다. 또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또 다른 지점을 개설하듯, 일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해볼 수 있다. 기존의 삶과 터전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거점을 개척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지자체에선 외지인 유치 방안으로 활용
지난 7월 21일과 22일, 일본 야마나시(山梨) 현 고슈(甲州) 시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다거점라이프 필드워크 프로그램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행사다. 이 행사는 지역 단체가 다거점생활에 관심 있는 도시민을 초대해 시골생활의 매력과 생활 수단으로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수공예품의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기 위해 진행됐다.
이런 행사는 고슈 시뿐만 아니라 일본 내 여러 지자체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개최되고 있는데, 다거점생활을 활용해 도시민의 유입을 유치하기 위한 지방 정부의 속내가 엿보인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지자체들이 도시민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방문을 꾀하는 것이다.
도시민의 이주를 유치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는 국내의 귀촌 정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도시민 유치를 거주인구 증가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생활인구 증가에 집중할지 양국 간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조건 이주만을 강요하는 국내의 도시민 농촌유치 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은 궁극적으로 목숨을 빼앗는 게임이다. 이런 섬뜩한 전쟁이 농촌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한 없는 농부와 야생동물과의 서로 살기 위한 생존의 경쟁이다. 예전의 평화스러운 농촌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들판 곳곳에서 야생동물을 쫓아내는 공포탄 소리가 진동한다. 예전의 농촌에는 새들을 쫓으려고 허수아비나 반짝이는 은박지 정도만 나풀거렸는데 이제는 고라니 때의 출입을 막으려고 그물로 벽을 쌓고, 전기울타리까지 사용한다.
왜 이렇게 과거와 달리 야생동물의 출연이 잦고 많아진 것일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먼저 사람이 먹이사슬이라는 것과 약육강식이라는 자연 생존의 법칙을 헝클어 버렸다. 산돼지 300마리면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호랑이를 제거했다. 독수리 매 부엉이 같은 야생조류의 천적이 사람의 손에 의거 멸종에 가깝도록 사라져가고 있다. 둘째로 동물보호라는 이름으로 산짐승 사냥이 엄격하게 통제를 받는다. 예전에 엽총을 갖고 사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냥이 스포츠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총이 가까이 있으니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총기 소지가 허가제로 되고 총은 경찰서에 보관해야 하는 등 관리가 엄격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냥이라는 취미를 갖고 있던 사람이 줄어들었다. 셋째로는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 변화다. 야생동물을 함부로 잡지 못하도록 감시의 눈초리가 많아졌다. 넷째로 산림녹화덕분으로 울창한 숲을 가지면서 야생동물이 숨기 좋고 살아가기 좋아지니 개체수가 늘어났다. 다섯째로 야생동물의 먹이인 도토리 같은 열매를 사람들이 빼앗아버리니 야생동물 입장에서는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도시사람들은 야생동물과 더불어 살기위해 수확량이 좀 줄면 어떠냐고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 야생동물의 피해가 수확량이 줄어드는 정도를 넘어 아예 황폐화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농사란 제철이 있는데 올라오는 새싹을 새들이 쪼아 먹으면 다시 씨앗을 심어도 제철을 놓쳐버려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논에도 활착되지 않은 어린 모에 황새 같은 큰 새가 모를 밟아버리면 모가 들떠서 죽어버린다. 참외나 수박은 순이 뻗어가며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고라니나 멧돼지들이 밭을 짓밟아버리면 어린 순들이 다 망가져 버리고 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고구마 감자처럼 땅속 식물도 멧돼지들이 땅을 들쑤셔버리면 농작물이 말라 죽는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농사가 생존수단이다. 고생하며 짓는 농작물의 보호를 위해서 야생동물을 자신의 논과 밭에서 쫓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은 싸우는 병사들에게 맡겨 놓고 국민들이 어느 쪽이 이기느냐고 평화롭게 관전할 수는 없다. 후방의 사람들도 군수물자를 지원해야 하고 부상병을 후방으로 이송하여 치료하는 등 온 나라가 전쟁에 매달려야 한다. 외교적으로도 하루바삐 전쟁이 종식되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인다. 전쟁 기간은 짧아야 피해를 줄일 수가 있다.
농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농부와 야생동물의 생존전쟁이 그들만의 문제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때가 아니다. 개체 수가 늘어난 야생동물이 먹이를 찾아 서울의 도심까지 출연했다는 방송에도 흥미롭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야생동물과 사람이 공존하며 평화롭게 각자 자기 나라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데 정부나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나는 매일 쌀밥을 먹으며 조상의 은덕과 농부의 수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쌀에 영혼이 있다는 도령(稻靈)께 무언의 기도를 올리며, 쌀밥을 맛있게 먹고 소중한 쌀 한 톨도 버리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려 한다.
이렇듯 소중한 쌀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는 매일 쌀밥을 먹고 성장하였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쌀’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 의미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쌀은 벼의 열매껍질을 벗긴 알맹이다. 쌀겨는 쌀을 씻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이며, 쌀을 씻은 뜨물이 쌀뜨물인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도시 학생들에게 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쌀을 얻는 농작물로 익은 열매를 '벼'라 하고 그것을 찧은 것을 '쌀'이라고 해야 알게 된다. 쌀나무(?)라고 일러줘야 할까? 벼를 재배하여 거두는 일을 벼농사라 하는데,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곡식을 익힌 음식을 끼니때마다 먹는다. 하루에도 세끼씩 꼬박꼬박 먹으며 생활하지 아니하는가? 아침밥을 시작으로 음식을 차려 놓은 소반인 밥상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세계 3대 곡물은 무엇일까? 바로 쌀, 밀, 옥수수다. 세계 5대 주에서 쌀을 재배하여 식용으로 쓴다. 쌀이 서양에 전해진 것은 실크로드의 아랍인에 의해서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쌀은 의식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쌀의 기원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았다.
학명은 '오리자(oryza)'로 라틴어이고 'riso'는 이탈리아에서 쓴다. 영국에서는 'rys'에서 'rice'로 됐다. 고대 인도어 'sari'가 곧 우리말의 '쌀'의 어원이다. 즉 살[肉]에서 왔으며, 식물의 살(쌀)과 동물의 살(고기)을 먹고 사는 게 '살암'(사람)이란 속설도 있다. 이러한 뜻을 알면 참 흥미롭다.
쌀미(米)자는 농부가 팔십팔(八十八)번 손이 닿아야 할 만큼 수고해야만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일 밥을 먹으며 건강을 지키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며, 쌀처럼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미수(米壽)인 88세까지 잘 살아야겠다.
어딜 가도 꽃잔치가 한창이다. 희거나 붉거나 노란 꽃송이들 우르르 일으켜 세우는 봄의 힘. 그걸 청춘이라 부른다. 자연의 청춘은 연거푸 돌아온다. 인간의 청춘은 한 번 가면 끝이다. 조물주의 디자인이 애초에 그렇다. 청춘은 전생처럼 이미 아득하게 저물었다. 바야흐로 생애의 가을에 접어든 사람에겐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절정으로 가늠하는 사람에겐 여전한 봄. 싱싱한 태도와 관점이 청춘의 사촌인 회춘(回春)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흥미진진한 극장!
신을 발견했다. 새파랗던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어느새 어중간한 중늙은이로 변해버린 게 아닌가. 흉포한 세월의 간계에 부질없는 삿대질을 해대는 대신,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투로 태연히 응하기로 했다. 과학교사였던 그에겐 매사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버릇이 있다지. 어차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엔 대번에 순응하자는 게 그의 과학적 인생관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인색한 조물주가 주입한 숙명에 짓눌리지 않는 길이라는 지론 또한 그의 과학이렷다. 윤 씨는 교장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모종의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모종의 일이란 반전 평화운동이나 조국의 통일운동 같은 웅장한 사업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내밀한 영혼과 관련됐을 수도 있을 그 모종의 일이란 귀촌이었다. 귀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더란다. 사실 그건 오크통에 숙성시킨 와인처럼 그가 오랫동안 무르익힌 숙원이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시골에 들어가 살겠다는 포부. 귀촌으로 인생 가을을 회춘의 계절로 누리겠노라는 열망. 그는 포부와 열망 자체가 믿을 만한 길잡이인 걸 알아차리고 귀촌을 단행했다. 미련도 불안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치 담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음성에 이끌려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스윽 도시를 벗어났다. “남들이 뜯어말리더라고요. 그 어중간한 나이에 시골 가서 무슨 재미를 보겠느냐, 웬 생고생을 자청하느냐, 그런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나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왔던 저에겐 귀촌이 움직일 수 없는 답이자 길이었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귀촌에 매력을 느끼고 모색해왔으니까. 다만 타이밍을 기다렸을 뿐인데,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이제 때가 왔다, 더 미룰 수 없다, 그런 판단을 했죠.” “평생 생활고에 쫓기다 옥살이까지 했던 세르반테스. 그가 ‘돈키호테’를 써 성공한 게 예순 무렵이었죠.” “저의 꿈은 소박해요. 일테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다, 그런 거….” “선생께서 미리 간파한 귀촌의 매력 요소란 어떤 것들이죠?” “일단은 제 취향과 잘 맞을 거라 봤어요. 딱히 도시에 환멸 같은 걸 느끼진 않았지만, 마음은 자주 시골로 흘러갔어요.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기르고, 앞산 뒷산을 산책하고, 그런 한적한 생활에 대한 선망이 많았어요.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호감을 느꼈어요. 시골의 싼 땅값도 매력 요소라 봤고요. 이래저래 귀촌으로 은퇴 이후 노년의 삶을 한결 생동감 넘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요.” “살터를 잡는 일부터 착수했겠죠?” “광주 인근 나주나 담양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많이 돌아다녔지만 마땅치 않았어요. 우연히 이곳 이 마을을 발견한 건 행운입니다. 땅값도 쌌어요. 광주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땅 사고 집짓고, 그럭저럭 충분하리라는 예상대로,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죠.”
원주민보다 귀촌 가구가 더 많은 마을
귀촌을 작심한 이후 불과 반년 안짝 만에 집짓기까지 마치고 이사를 했다. 윤태홍 씨의 아내 이숙연(57) 씨가 동지애를 발휘해 한껏 조력한 성과였다지. 이 씨 역시 교사 출신이다. 영어를 가르쳤었다. 부부 교사였으니 연금을 합산하면 쏠쏠하리라. 부부가 보유한 나름의 물적 토대는 귀촌의 돛을 미는 순풍 역할을 했을 테다. 500여 평 부지를 사 번듯한 2층집을 짓는 데엔 처음의 예상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갔단다. 이후 집 뒤편 산자락에 있는 묵정밭을 추가로 사들였다. 날 보러 와요, 라고 어여삐 노래한다. 윤 씨네 집 둘레에 피어난 봄꽃들이 말이다. 봄 아니고 꽃 아니더라도 헌칠한 마을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어깨를 겯고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바탕 춤을 추어대는 그 복판에, 혹은 꽃잎들 환하게 벌어진 그 안통 화심(花心) 부위에 마을이 들어앉았다. 저 아래 초록빛 호수 위로는 아지랑이 아롱거린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감쪽같이 무사할 듯 외진 맛이 있는 반면, 볕 바른 양달 일색이라 으슥한 구석 없이 포근하다. 대를 이은 농투성이로 살았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로 흩어져 나갔다. 바야흐로 귀촌·귀농 전성시대라 해야 하나. 지금 이 마을을 이룬 24가구 중 70%가 도시에서 유입된 귀촌 가구들이라는 게 아닌가. 어떤 이들이지? “저와 같은 퇴직자들, 자영업을 하다 들어온 사람, 예술인, 광주로 출퇴근하는 건설업자 등 다양합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아 텃세, 그런 건 없어요. 원주민들 자체가 순후하지만, 다들 편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이사 뒤 가장 먼저 공들여 한 일은 무엇이었죠?” “제가 소나무를 무척 좋아합니다. 광주 아파트에 살 때도 화분에 소나무를 길렀어요. 소나무를 바라보면 왜 즐거움이 샘솟을까, 그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그놈들을 애호했어요. 정원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가꾸고 싶다는 염원은 사실 귀촌 동기에 속합니다. 해서, 공들여 소나무부터 심기 시작했어요.” “소나무로 뜰을 둘렀으니 솔향이 은은할 테고, 달빛이 솔가지를 타고 흐를 테고, 수시로 운치를 즐기시겠다.” “소나무뿐일까. 모든 자연 환경이 아름답죠. 그러나 제가 풍경을 즐기는 일에 능하진 못합니다. 낭만적인 성향의 인물은 전혀 아니라서.(웃음)” “그럼 어떤 성향?” “흠. 원만한 성품이랄까? 눈앞에 주어진 일에 단순하게 매달리는 기질이고요, 부지런히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성격이기도 하죠. 딱히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찾아 열심히 매달리곤 했어요. 귀촌 이후 아로니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죠.” 윤 씨는 800평 규모의 아로니아 농사를 짓는다. 이왕에 사들인 널따란 묵정밭을 그냥 놀리기란 대지의 여신에게 결례되는 일이거니와, 시골의 적막 속에 찻물이나 마시며 도 닦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눌러앉아 지내기란 고문처럼 고역스러워서였겠지. “농원을 보여주실래요?”라고 부탁하자 나른하던 그의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맘껏 즐기는 일상
4월의 아로니아나무들은 미처 깨어나지 못해 둔하다. 윤 씨 홀로 살뜰한 눈매로 나무의 싹눈을 이리 쳐다보고 저리 들여다보고, 마치 현미경으로 박테리아균의 신비한 동향을 살피듯 진지하다. 귀촌 1년 만에 농부로 변신한 그는 3년여가 더 흐른 현재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텃밭농사도 그렇고 농사라는 거 진짜 재미있습디다. 아로니아 농사에 관한 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더라고요. 워낙 강한 작물이라서요. 병충해에 강하거든요. 극단적으로 농약 살포를 자제하더라도 농사를 망치진 않아요.” “수익성은?” “하향세가 뚜렷해요. 재배 농가가 급증해서죠. 재작년엔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지만 작년엔 반 토막 났어요. 작물 전환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체리나 굵은 대추로 바꿀까 해요.” “선생은 과학을 전공했어요. 농사에도 과학을 적용하시나?” “농사도 응용과학이지 않겠어요? 그 점에서 제겐 농사가 유리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고집스럽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없는 처신, 그리고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경계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따른 주도면밀함과 준비성으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게 몸에 밴 과학적 실천은 있다고 봅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다탁에 마주앉는다.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다과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원래의 자리였던 저편 의자에 다시 앉는다. 말수가 드물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거동. 묵언수행을 하는 도류처럼, 식물처럼, 시종을 일관해서 고요하다. 말보다 내밀한 침묵의 웅변이란 게 있겠지. 세상에서 할 말을 이미 다해버렸거나, 말이 아닌 은근한 눈빛으로 부부애를 나누기에 숙달됐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부부간에 언쟁이라도 있었나? 흔하디흔한 게 부부싸움이지 않던가. 그러나 윤 씨 말하길, “우리에겐 그 흔한 부부싸움이 아예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이 되질 않아요. 왜냐? 집사람이 전혀 대꾸를 안 하거든요.(웃음)” “저런! 남편을 숫제 포기하셨을까?”
“대꾸를 하거나 제동을 걸어봤자 먹히지 않아서겠죠. 때로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섭섭한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천성이 그래요. 소리 없이 남편을 도와주고 믿어주고 챙겨주고, 숨 쉬는 공기처럼 제겐 고마운 존재죠. 제가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닙니다.(웃음)” “귀촌이라는 급격히 바뀐 환경에 남편은 빠르게 적응하는 반면, 아내는 적응이 더딘 경우가 드물지 않죠.” “배려가 필요하겠죠. 상대의 성향을 존중하는 자세 말이죠. 저는 제법 활달한 편입니다. 외부 활동이 잦아요. 반면 아내는 이웃의 단짝 친구와 어울리거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머무는 걸 즐겨요. 그런 아내를 위해 도서관엘 자주 들러 소설책들을 빌려다 줍니다.” 배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메마른 공유지를 적시는 단비. 윤 씨의 성정은 담백함이 넘쳐 무색무취에 가깝다. 그러나 아내에게 쓰는 마음은 나긋하거나 촉촉하겠지. 부부가 불화하고서도, 아내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시골생활을 무사히 누릴 묘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귀촌 4년 차. 윤 씨는 더 바빠졌다.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다. 그는 이걸 생동하는 삶의 징표로 본다. “제가 일찌감치 서예와 사진에 열을 냈어요. 이젠 꽤 조예가 생기고 동호인 모임들에도 빠지질 않아요. 귀촌 공부도 여전합니다. 이미 예전에 집짓기 학교나 각종 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섭렵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찾아다녀요. 한문 고전 강독 모임에도 참여해요. 때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에요. 귀촌에 만족합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비로소 맘껏 즐기며 사니까. 이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을꼬.” 귀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얘기다. 상처가 없는 지평, 자유를.
봄이 왔다. 농부들이 바빠지는 농사철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 도시텃밭에서 상자를 이용한 농사다. 대부분 건물의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 같은 곳에서 관상용으로 취미 삼아 농사를 짓는다. 아파트 건축 후 남은 자투리 텃밭도 있다. 텃밭을 개인이 관리하고 농사짓는 것은 정서면에서도 좋다. 다만 지자체에서 ‘도시농부’ 또는 ‘자투리 텃밭’이라는 이름을 달고 개발하여 지역주민에게 한 평이나 두 평정도의 아주 작은 농토를 분양하고 관리를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자체 도시텃밭은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아 경쟁이 심하다. 도시민들이 여가를 이용해 직접 농사를 지어보게 함으로써 여가선용도 되고 건강도 도모하면서 가족끼리 농사짓는 기쁨도 맛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자투리땅이라도 농사는 농사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낭만에 젖어 아무나 덤벼들기는 어렵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토는 기본이고 씨앗이나 모종이 있어야 한다.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위해 퇴비도 듬뿍 넣어야 하고 비료도 필요하다. 친환경 농사를 위해 농약을 치지 않으려면 수시로 손으로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야 한다. 삽이나 괭이, 호미, 등 농기구도 필요하다. 가물 때는 물도 줘야 하고 장마 때는 배수로에도 신경 써야 한다. 잡초도 없애주고 농작물이 넘어지지 않게 버팀목도 세워줘야 한다. 또, 농사는 시기가 있으니 영농일지를 써가면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때문에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어렵다. 농군학교에 다녔어도 농사 전문가로부터 지도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행이도 이런 관리와 지원, 지도를 지자체에서 해주고 있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어느 지자체에서 자투리 텃밭 분양공고를 봤는데, 6㎥에 2만 원을 받고 씨앗과 퇴비를 주겠다고 한다. 삽이나 괭이 등 농기구도 빌려준다. 단 호미는 각자 사라고 한다. 지자체에서 농토를 갈아엎어서 구획을 정리해주고 각종 지원을 해준다. 담당 부서가 있고 이 일을 맡아서 하는 담당 공무원이 있다. 겨우 2만 원을 받으며 이런 지원을 해주는 것은 손해 장사다. 지자체의 손해에는 다른 사람이 낸 세금이 들어가서 형평을 맞춘다.
귀농하는 농부들의 첫 번째 애로사항이 농사를 지어도 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시골의 일가친척으로부터 농산물을 사 달라는 전화를 받아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팔지 못해 애타하는데 도시농부를 만든다는 낭만으로 지자체가 세금을 쏟아 붓는 도시텃밭은 재고해야 마땅하다.
대기업이 참기름 들기름까지 짜서 파니까 재래시장 상인들이 해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큰 동네마다 수동식 국수 기계를 갖춘 국수 공장이 있었고 아이스케이크 공장, 정미소도 있었다. 이제는 산업화와 경영 효율화에 밀려 다 없어졌다. 시골의 면 소재지에 가 봐도 지역민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겨우 미장원, 이발소나 일용잡화를 파는 구멍가게만 있을 뿐이다.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지역의 축제장이었지만 대형마트에 밀려 거의 사라졌다. 농촌에도 피와 같이 돈이 돌게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농촌의 농산물을 도시에서 소비해 주지 않으면 팔 곳이 없다. 지자체에서 관리해주고 그저 세금만 잡아먹는 도시텃밭이라면 그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고추, 상추, 가지는 시장에 가서 1000~2000원만 주면 한보따리 살 수 있다.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다. 농촌이 죽으면 도시도 죽는다. 지자체에서 도시 텃밭자리에 꽃동산을 만들고 도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을 가꾸게 하면 좋겠다. 대형마트를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경제 논리에 반해서 하루정도 문을 닫는 날을 만든 것이 본보기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