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분출(奔出)한다 온 몸의 열정을
당신의 열기는 대지를 데우고
만물을 생장시키나니
어머니 가운데 참 어머님이시어라
찌는 듯한 더위는 구름을 타며
바람을 짊어지고 넘나드나니
푸르른 앞산 청포도가 익어갈 즈음
땀에 밴 농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절로 이네
내리쬐는 햇살 아래 파아란 바다와 흰 파도
끝이 없어 보이는 저 수평선
하늘과 바다가 만나 땅을 잉태케 하고
그 땅위에 한 줌 숨결로 석류같이 붉은 입술을 마주하나니
오
세상은 온통 붉게 물든 정열의 도시
바로 그 곳, 50+중부캠퍼스에서
인생학교 1기, 당신과 나
뜨거운 사랑의 불꽃을 피우리라.
흔히 100세, 120세대 인생이라 회자되는 요즈음, 2017년 전반기 50+인생학교를 수료하면서
"제 인생은 어디까지 와 있을까?" 를 되뇌이면서 1월은 10세, 11월은 110세라고 가정한다면
제 인생의 황금기라 여길 수 있는 7월(70~80대)의 아름답고 정열적인 모습을 연상하면서 조촐한 시로 표현하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인생학교는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가 1기생으로 올 9월에 2기생을 모집할 계획입니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제대로 되겠어?” 하는 의심부터 한다. 그것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흙 한 번 밟기 힘든 서울 한복판에서 농사 얘기를 꺼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실제로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밥상에서 곁들일 채소 몇 가지 정도 심는 그런 텃밭이 아니다. 제대로 수익도 올리고 양봉까지 한다. 행촌마을 사람들 이야기다. 서울시 종로구 행촌권 성곽마을 도시농업 마을공동체 김동수(金東秀·66) 주민 대표를 만나 도시농사꾼들 얘기를 들어봤다.
아차 싶었다. 날짜를 잘못 잡았다. 하필 과음한 다음 날 성곽마을에 올 약속을 하다니. ‘산성’ 주변의 마을이라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완연한 봄의 기운이 가득한 날, 땀인지 술인지 모를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다리가 풀릴까 걱정될 지경이다.
등산에 가까운 성곽마을까지의 여정은 다소 기묘했다. 산성이 위치한 인왕산 자락은 높은 아파트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대단지의 경계를 따라 난 굽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자 성곽마을이 나타난다. 화려한 장식에 가려진 무대 뒤 같은 모습이다. 마을 어귀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니 다시 아파트가 벽이 되어 시선을 가로막는다. 낭만적인 전망은 사치이겠구나 싶다. 예전엔 같은 동네였을 텐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집에서 높아져가는 아파트를 어떤 기분으로 바라봤을까?
도시화와 재개발 사업에서 비껴간 마을
“불만이 왜 없었겠어요.”
김동수 대표의 말에는 억울함이나 분노보다는 일종의 초연함이 묻어 있었다. 행촌동 성곽마을 일대는 도시화와 재개발의 열풍 속에서 그 위치 때문에 빠르게 일어나는 변화를 바라만 봐야 했다. 서울시의 재개발 구역에서도 돈의문 뉴타운 계획에서도 성곽마을은 빠져 있었다.
“군사보호시설구역과 같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개발 제한을 받아왔죠. 주변에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어요.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했던 것이죠. 그래도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면서 집수리 비용의 절반을 되돌려주는 등 예산지원이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불편하지 않게 고쳐가며 살고 있죠.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스트레스가 많지만 워낙에 행촌동 사람들이 양반들이라 과격한 의사표현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대부분 오래 사신 어른들이라 동네에 대한 애정도 많고. 실제로 종로구 내 17개 동 중에서 어르신이 제일 많이 살고 계셔요. 그래서 그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으신 것 같아요.”
김동수 대표 역시 행촌동 토박이 중 한 명이다. 여덟 살에 수원에서 이사와 58년을 행촌동에서 살았다. 김 대표는 1960년대의 동네 모습도 상세하게 기억했다.
“당시 이 동네는 판자촌뿐이었어요. 한국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몰려와 살았던 동네 중 한 곳이에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였죠.”
김 대표는 의약품, 식품, 음료 유통 회사에 다니다 맥주 대리점을 내면서 독립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슈퍼마켓을 차려 30년을 ‘슈퍼 아저씨’로 살았다. 지금은 세월의 변화에 맞춰 슈퍼마켓이 있던 자리를 편의점에게 내줬다.
“이 집 저 집 배달을 다녔으니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죠. 언덕길을 수만 번은 왕복했을 거예요. 그러다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은 성남 등 시 외곽으로 단체로 이주하면서 동네가 많이 달라졌어요.”
2014년 서울시에서 발간한 자료 를 살펴보면 1971년 서울인구의 10%에 가까운 규모의 신도시인 ‘광주대단지’ 계획이 수립돼 실제로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이주했다. 이외에도 토지구획정리사업이나 도시정화사업 등의 이름으로 판자촌 철거민들은 계속 외곽으로 밀려났다.
참여 주민 대부분이 ‘초보농부’
난개발됐던 지역이 정비되면서 아파트에 둘러싸이게 된 과정이 대충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런 동네에서 도시농업이라니 의아한 일이다. 왜 농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까.
사실 이 지역의 도시농업 도입은 지역 주민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거대 재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이 지역의 주민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서울시에서 내놓은 기획에서 출발했다. 서울시는 2014년 7월, 어떤 관리 계획에도 속해 있지 않던 이 지역을 ‘성곽마을 재생계획’ 수립 과정에 포함시키고 주민 의견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행촌동뿐만 아니라 한양도성 9개 권역 22개 성곽마을을 대상으로 계획이 수립됐다.
행촌권 사업은 크게 지역 주민을 위한 마을회관 격인 ‘행촌共터’ 세 곳을 조성하고, 옥상경작소와 텃밭 등 도시농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육묘장이나 양봉장 설립을 통해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도시농업 사업을 발굴한 뒤,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도시농업 공동체의 전문성을 강화해나간다는 것이 이 사업의 요지다.
“통장연합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자의 반 타의 반 성곽마을 추진위원장 자리를 맡게 됐죠. 무작정 농사부터 지은 건 아니에요. 서울시 도시재생센터에서 하는 도시재생대학을 통해 도시농업에 대한 지식을 익혔죠. 이 동네에서 오래 사신 직능단체장을 중심으로 15명이 참여했어요. 그리고 지난해 2월 도시농업공동체를 발족하고 이어 육묘장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했어요.”
지역 주민들의 성과는 조금씩 나타났다. 육묘장을 통해 성장한 모종 중 2만 봉이 종로구청에 납품됐고 옥상과 노지, 텃밭용으로 4만 봉이 공급됐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였다. 6kg이 넘는 커다란 수박도 초보농부에게는 값진 수확이었다. 가지와 토마토, 참외도 얻었다. 양봉도 시작했다. 전문가를 초청해 별도의 양봉 강의를 받았고, 전문 멘토 네 명이 달라붙어 이들을 도왔다. 그 결과 첫해 수확으로는 큰 꿀 800L를 얻었다.
“그래도 계속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에요. 지난겨울에는 관리를 잘못해 일부 벌들이 죽어버렸어요. 벌에 쏘여 응급실로 달려간 적도 여러 번이고요. 꿀이 한창 채집되던 무렵에는 여왕벌 하나가 분봉해 인근 아파트 벽에 난 구멍에 벌집을 차려 난리가 났었죠. 어쩔 수 없이 양봉 위치를 옮겨야 했어요. 올해에는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농사의 ‘ㄴ자’도 모르던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나 행촌 살아” 자부심 높아진 주민들
이런 변화를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되레 일말의 재개발 가능성마저 없애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주민들 입장에선 확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몇몇은 마뜩찮아 했던 것이 사실일 거예요. 괜히 세금만 들이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고. 큰 시설을 세우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많지 않은 사업이니까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도시농업 사업은 주민들의 삶을 많이 바꿔놓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농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고, 만들어진 농산물을 좋은 일에 쓸 수도 있고 말이죠.”
실제로 이들은 지난해 텃밭에서 수확한 배추 700포기로 김장을 담가 지역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도 마을의 달라지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주목받으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느껴요. 전국에 도시재생, 도시농업의 성공사례로 알려지면서 방방곡곡에서 저희에게 배우기 위해 찾아와요.”
이들의 노력 덕분에 종로구는 도시농업 우수자치구로 선정됐고, 서울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는 ‘도시농업 최고 텃밭상’도 탔다. 2016 전국 공동체 한마당에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 대표는 향후에 각종 도시농업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 협동조합을 설립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찾을 계획이라고 했다. 단순히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수확한 농산물을 가공해 2차, 3차 산업 형태로 확대해나간다는 것이다. 채취된 꿀은 차나 가공식품 형태로 부가가치를 높이고, 허브나 약초도 음료 형태의 제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마을 주민 중 일부는 바리스타 교육을 정식으로 받았고, 1호 행촌共터에는 커피추출기도 갖춰졌다. 또 푸드뱅크를 설립해 지역 저소득 노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올해는 스마트폰을 활용해 하우스의 습도와 온도, 수분 공급 등을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팜’도 도입할 계획에 있다. 도시농업의 특성상 작은 면적에서 높은 효율의 수확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부가가치가 높은 더덕, 감초, 어성초 등을 심은 약초밭도 만들었다.
주민 행복에 보탬이 된 도시 농사
물론 지역의 변화만큼이나 김 대표 개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런 변화가 싫지 않다고 했다.
“제가 살아온 인생에서 최근 2년의 삶이 가장 행복해요. 이제 2년 된 초보농부이지만 길가의 작목만 봐도 다듬고 만져줄 정도로 달라졌어요. 산성을 따라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는 텃밭들을 가꾸느라 체중은 5kg 넘게 줄었죠. 새벽같이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밭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지금은 안 쓰던 일기까지 쓰고 있어요. 매일매일 농사에 대한 기록을 하는 것이죠. 파종과 같은 육묘장 운용이나 농사일에 관한 일정을 기록해서 다음 해에 늦어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어요.”
그의 아내는 김 대표의 이런 모습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집에서 도통 남편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작물 걱정으로 뒤척이는 통에 덩달아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걱정되면 나가보라며 새벽에 남편을 내보낸 일도 적지 않았다.
김 대표의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산책 삼아 텃밭에 함께 나왔던 아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작물을 다듬는 남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지켜보던 아내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날부터 잔소리를 줄였다.
서울시가 성곽마을 재생을 위한 마중물로 행촌동에 투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노력이 행촌동 지역 주민을 위한 도시농업이 자리 잡는 마중물로 쓰이길 희망했다.
“개인적인 욕심이 있을 리 없죠. 자식 셋도 모두 결혼했고 바랄 것이 더 있겠어요. 척박한 이 마을에서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잘살고,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에요. 지역 주민들이 도시농업으로 좀 더 즐거움과 여유를 찾았으면 해요. 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서울이라는 ‘황야’를 누벼 먹이를 물어 나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새벽 침상에서 와다닥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실려 가는 출근길부터가 고역이다. 직장에선 너구리 같은 상사와 노새처럼 영악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종일토록 끙끙댄다. 퇴근길에 주점을 들러 소주병 두어 개를 쓰러뜨리며 피로를 씻어보지만, 쓰린 속을 움켜쥐고 깨어난 이튿날 새벽이면, 황급히 넥타이를 목에 동여매고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이 치열하고도 고단한 양상은 일과처럼 반복되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도둑은 사람의 청춘은 물론, 꿈과 희망, 체력과 정력까지를 앗아가고, 급기야 생의 강 하류에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정년(停年)이라는 일종의 날벼락이 도래하는 건 이즈음이다. 올해로 13년째 시골생활을 하는 차기설(62)씨의 귀농 계기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의 고민에서 주어졌다.
“쉰 살에 가까워질 때였어요. 정년 뒤엔 뭘 할까? 뭘 해서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노년의 안정을 구가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파트 경비원을 하기는 그렇고, 날마다 기름내에 절어 살아야 하는 통닭집을 하기도 싫고, 대체 무얼 하면 좋을지 궁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 농사? 옳지, 농사가 괜찮지 않을까? 그건 정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착상을 하게 됐어요.”
“세상에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 과히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농사 경험조차 전무했다죠?”
“섬세하게 재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일단 농사에 필이 꽂히자 자못 매력적인 직업일 거라는, 가망성 있을 거라는 결론에 곧장 닿았어요. 일테면, 상당히 무모하게 귀농한 것이죠. 그러나 무작정 귀농을 하면 실패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준비랄까, 공부랄까, 그런 건 미리 좀 해뒀죠.”
“흔히 아내들은 귀농을 꺼려합니다. 고생길이 뻔히 보여서. 부인께선 아마도 반대했겠죠? 당신 혼자 잘해보소서! 그러며….”
“어, 잘 아시네? 제 아내(정현숙·56) 역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처음 딱 한 번 내려와 보고 나서는 발걸음을 끊어버립디다. 3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합류를 했죠. 농사를 한답시고 혼자 먹고 자는 저의 몰골이 형편없어서였죠(웃음).”
차기설씨는 건축 관련 잡지사 편집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검게 그은 피부, 소탈한 매무새, 거칠어진 손…. 농사꾼으로 변신한 지 오래인 그의 외형은 날렵한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 억실억실 전신에 무르녹은 농부다운 풍색을 통해 그가 이미 머리 대신 몸을 쓰는 근로와 근면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과거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관점과 사유도 새로운 지평을 굽이치고 있을 법한 일. 여하튼, 유한한 인생에 흥미와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반전과 반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기설씨는 귀농으로써 방향타를 휘익 돌려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연꽃에 심은 꿈
차기설씨의 농장엔 ‘우리 맘 연애(蓮愛) 이야기’라는 달달한 이름이 붙어 있다. 연꽃을 테마로 한 농원이다. 연(蓮)을 길러 거두어 연잎밥, 연잎차, 연근차, 연근환 같은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요새는 전국 도처에 연꽃농원이 산재하지만, 그가 연 농사에 뛰어들었던 당시엔 미답의 영역이었다지. 어떤 내력으로 연 농사를 시작했지?
“귀농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건 작목 선택이라는 문제였어요. 저의 성향과 실력에 부합하는 작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흠.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보니, 쌈채류는 돈은 되는 대신 매우 부지런해야 하는 작목입디다. 날마다 꼬박꼬박 상품을 출하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 적합하지 않다 봤어요. 과수는 어떤가? 이건 노련한 전지(剪枝) 등 갖가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벼농사의 경우는 장비 구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힌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해야 할 작목들이었죠. 그럼 뭘 하나? 별다른 장비 없이 최소의 농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목, 1차 농업이 아닌 가공 농업, 그게 뭘까, 오래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문득 연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연이다, 연꽃에 꿈을 심자, 그런 작심에 이르렀던 겁니다.”
“시인의 영감처럼, 별안간 연꽃 농사를 발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40대 중반 즈음, 공주 시골에 사는 친척 형님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형님을 찾아 내려갔는데 아, 글쎄 1만 평에 달하는 연밭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양반의 요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연 농사가 유망할 것이다, 연을 활용한 각종 가공식품이 각광받을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심드렁히,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말았죠. 당시엔 귀농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골살이에 동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그 형님의 연 농사 권장에 썩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됐어요.”
은인을 만난 셈이다.
“초기 한동안은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거든요. 온통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연 재배나 가공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비용도 생각보다는 많이 들었죠. 연 방죽에 드디어 연꽃이 만개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뭐 변변히 팔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만 잔뜩 쌓이더라고.”
“부인의 불평불만도 쌓였고?”
“남편으로서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었죠. 당시에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련뿐이었어요. 그래 간간이 수련을 팔며 활로를 모색했는데, 사람들이 요구하길 수련을 아예 자배기에 심어달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에 자배기를 들여오고, 덩달아 갖가지 항아리며 질그릇을 왕창 떼다가 전시 판매하게 됐어요. 뜻밖에도 그게 먹혀들었어요. 연꽃 농원이지만 그릇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게 정착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후, 연 가공식품의 생산과 판매에 탄력이 붙었죠.”
차기설씨의 농원은 목 좋은 곳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 휴일이면 나들이 인파가 바글거리는 궁평항이나 제부도를 지척에 둔 곳이다.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구매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입지인 셈. 애당초 나들이객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더란다.
몸을 주로 쓰는 게 농사라지만, 머리라는 건 녹슬도록 마냥 놀려 먹이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차기설씨는 농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완전한 자연산 고품질 연 가공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우는 한편, 홍보에 주력했다. 연꽃축제를 매년 거하게 개최해 사람들을 유인했으며,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원을 열심히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평온과 안락에 두었지만, 차기설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지당한 실사구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야흐로, 그의 농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삶
“무슨 일이건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는 5년 만에 흑자를 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어요. 그러나 통장을 보면 지금도 마이너스예요. 왜냐, 재투자가 계속되기 때문이죠.”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뭐죠?”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일 겁니다. 교류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일단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도시의 아파트식 사고를 빨리 버려야 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와, 거의 완전히 오픈된 시골의 풍습은 매우 다르니까. 가령, 시골 노인네들은 이웃 사람이 외출을 할 때 꼬치꼬치 물어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이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녜요. 노인네들은 이웃이 언제 돌아올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 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건 동네잔치를 가끔 하는 거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녜요. 국수를 삶아 함께 나눠 먹으면 되니까.”
“농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단연, 매우 게으른 성향의 소유자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 내려오는 게 정답이에요.”
“다소 게으른 건 미덕일 수도 있죠. 노력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테면 유유한 태도 같은 거, 매사에 너무 악착 떨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거….”
“그걸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되겠죠. 제가 원래 매우 성미 급한 사람이었어요.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많이 변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태도랄까.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죠. 농작물만이 아니라 시골의 묵묵한 자연 순환이나 풍경들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의 삶이 초침(秒針) 단위로 돌아간다면, 시골에선 분침도 아닌 시침(時針) 단위로 돌아간다고 비유하고 싶어요.”
“연꽃의 매력은 뭐라 보시는지?”
“연꽃만이 아니라, 모든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막말로 성격 나쁜 사람도 꽃 앞에선 꽤나 순해지지 않던가? 저처럼 말이죠(웃음).”
시골의 산천 안에 살다 보면 유심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슬쩍 열린다. 가만히 소소한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중에 굳었던 감관이 깨어난다. 이윽고 사는 일의 본연에 생각이 닿게 마련이다. 귀농으로 한결 느긋해지고 순해졌다는 차기설씨의 토설에 솔깃해진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아름다운 섬 제주. 최근 이곳은 플리마켓(Flea Market), 즉 벼룩시장의 성지가 된 듯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장(場)이 ‘섰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그런데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비누, 방향제, 액세서리 등을 파는 곳이 대부분이다. 는 10월호에 이어 농산물과 사람들의 웃음이 함께하는 도시장터를 제주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투박해 보이지만 주민들의 정이 물씬 넘치는, ‘플리마켓’보다는 ‘도시장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지꺼진장’에서 지꺼지게(?) 놀아봤다.
제주시 아라동 휴게 음식점인 아라올레 앞마당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제주 지역 농산물과 특산품, 착한 먹거리가 함께하는 ‘지꺼진장’이 선다. 지꺼진장은 제주 방언으로 즐겁다는 의미의 ‘지꺼지다’와 시장의 ‘장(場)’을 조합해 만든 ‘즐거운 시장’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다. 작년 5월부터 문을 연 지꺼진장은 최근 인기에 힘입어 금요일 저녁에만 운영하던 것을 토요일까지 연장 운영하고 있다. ‘지꺼진장’은 10월호에 소개한 마르쉐@의 생각을 빌려와 만든 장터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매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는 것과 제주 농민들이 주축이 돼 지역 농산물 직거래 장터의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물론 다른 플리마켓에서도 만나볼 수 있는 수·공예품과 아기자기한 수제품 등도 구색을 갖추고 손님들을 맞이한다.
취재차 방문했던 9월 말의 지꺼진장은 예년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다. 만 1년 넘은 지꺼진장, 그 사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목 좋은 곳에 플리마켓이 연이어 생겼다. 게다가 제주시가 지꺼진장을 비롯한 플리마켓의 식·음료 판매 금지조치를 내렸다. 먹거리가 중심이던 지꺼진장이 한산해진 결정적인 이유다. 문근식(文根植·49) 아라올레 지꺼진장 공동대표는 제주시의 결정을 존중하면서 숨고르기 중이라고.
“규모가 커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지꺼진장은 지금 일종의 과도기입니다. 마르쉐@의 경우 올해로 4년차 되는 도시장터잖아요. 물론 처음에는 이벤트도 하면서 총력을 기울이는 게 맞아요. 작년에 그랬죠. 이제는 이벤트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장으로 인식이 되는 시기를 거쳐야 합니다. 마라톤을 100미터 달리기하듯 뛸 수는 없죠. 훗날 다 남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주시의 결정에 대해서도 문 대표는 비관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시장이 꾸준해지기 위해서는 법 테두리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조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상황을 감성적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기다리고 잘 진행해야죠.”
제주 농민들이 중심인 시장
대부분 이런 시장은 유기농이라든지 친환경 농산물을 내세운다. 지꺼진장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것이면 된다.
“화학비료를 써서 농사지은 농산물이 가치가 없을까요? 친환경으로만 축소시키면 편향되기 마련입니다. 친환경 농민들만 가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관행으로 농사짓는 농부도 소비자들을 만나면서 점차 친환경 쪽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설명하는 것보다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숨고르기라지만 매주 금요일, 토요일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제주의 정기를 듬뿍 담은 지꺼진장이 열린다. 갓 담고, 갓 따온 제주의 농산물과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꼭 찾아가 보시라.
지꺼진장에서 만난 볍씨학교 졸업생 박진희·권소정 양
볍씨학교는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와 활동 속에서 공부하고 느끼는 대안학교다. 지꺼진장에 갔을 때 아이들 열댓 명이 모여 피자를 만드는 모습이 생소했지만 지금은 이 아이들이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지꺼진장 진행 전반에서 이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관여하고 참여한다. 작년부터 제주에서 생활한 박진희(16), 권소정(16) 양과 여러 명의 졸업생들이 제주를 떠나지 않고 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궁금할 독자들을 위해 잠시 얘기를 나눠봤다.
Q. 볍씨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박진희 대안학교입니다. 볍씨학교는 자율이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선생님이 같이 배우고 서로 알려주기도 해요. 지금은 학교라는 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고 또 좋다고 생각해요. 제주 오기 전까지는 잘 몰랐어요.
권소정 이 학교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곳이에요. 이 세상 보통학교의 아이들은 부모님, 선생님 손에서 곱게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딱! 하고 사회로 나가잖아요. 저희는 그게 아니고 그전부터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사회에 나가는 연습을 해요.
Q. 다른 제도권 아이들처럼 보호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박진희 그런데 언젠가는 보호를 안 받고 살아가야 하잖아요. 언제까지 우리가 어린애일 수는 없어요. 그리고 언제까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건지 그것도 의문이에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뭔가가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어느 선에서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주도에 와서 살면서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왜 지금부터 그렇게 사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사실은 많아요. 어차피 또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저는 말해요. 힘들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좋아요. 그리고 이곳에서는 내가 볍씨학교 학생이 아니라 나 박진희로서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도 해요. 사람들이 잘한다, 예쁘다 하니까 힘들어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도 있더라고요.
권소정 결국 또 다른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도 언젠가는 이 사회의 구조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벽을 깨고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미리 깨보면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거 같아요.
Q. 굳이 빨리 성숙해질 필요가 있을까요?
권소정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저희 학교에서는 ‘세상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가르쳐요.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관심을 가져야 하죠. 또 세상을 바라보는 성숙한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 노력하면서 사는 거 같아요.
Q.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박진희지금까지는 생각이 없어요. 대학에 가서 또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지금도 볍씨학교도 안 다니고 제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어요. 다양한 것을 배우고 싶어요. 지금은 액세서리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7학년 때 현장 탐방을 해서 인턴십으로 배워봤는데 재밌더라고요. 학부모님 중에도 가르치는 분이 있고요. 그리고 여행을 하고 싶어요. 마을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더 배우고 싶어요. 요즘 많이 생기는 마을 공동체에 찾아가보고 싶어요. 아직은 스스로 제 생활을 꾸려나가기에는 부족해요.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해 보여요.
대형 마트의 범람. 깨끗한 포장용기에 담긴 식재료, 말끔한 동선, 넓은 주차장에 포인트 적립까지 모든 것이 고객에게 맞춰져 있는 곳이 차고 넘치고 있다. 이는 재래시장의 규모를 줄이거나 사라지게 만들었고 찾아가는 서비스마냥 골목으로, 집 앞으로 다가왔다. 편해지긴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 바로 사람 냄새, 그리고 다양함을 선택할 권리다. 는 불필요하게 쉽고 간편해진 장보기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장터 두 곳을 2회에 걸쳐 둘러보기로 한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9월 11일, 추석 명절을 앞둔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아침부터 북적북적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뜨거웠던 여름, 잠시 쉬어가던 도시형 농부 시장 ‘마르쉐@(엣)’이 다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맞아 알 굵고 맛도 좋은 유기농, 친환경 사과와 귤이 산지에서 농부와 함께 상경했다. 다양한 농법으로 기른 착한 먹거리가 마르쉐@ 안을 가득 채워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 보였다. 수·공예품, 도자기 등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기자기한 물건들도 이곳에서는 한눈에 차고 넘쳤다. 사람들의 웃음이 넘쳐나고 시끌시끌 친구와의 인사도 길어진다. 사는 사람은 생산자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이 때문에 마르쉐@ 이용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중. 누구든지 기꺼이 좋은 마음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 도시 장터의 대표선수 마르쉐@이다.
마르쉐@은 4년 전인 2012년 10월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한 달에 두 번(두 번째 일요일, 네 번째 토요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중구 명동의 ‘명동성당 1898 광장’ 등지에서 장이 선다. 마르쉐@은 현재 마르쉐 친구들을 이끌고 있는 이보은(李保垠·48)씨가 옥상 텃밭을 일구던 중 자연주의 식당 수카라를 운영하는 김수향씨, 다양한 농부와 요리사, 예술가와 함께 만들었다. 마르쉐@의 모든 먹거리에는 슬로푸드 정신이 담겨 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시마무라 나쓰가 에서 ‘슬로푸드란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을 통해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천천히 되묻는 작업이다’라고 한말과 마르쉐@의 생각은 많이 닿아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 직접 거래하는 시장, 그래서 소비자의 질문도 생산자의 대답도 사뭇 진지하다. “살 거면 사지 말이 많냐”는 식의 말다툼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르쉐@의 매력이다.
매회 평균 참가하는 생산자(혹은 판매자)는 60명 정도다. 이중 농부집단은 30개 정도이고 전국 농부 200여 명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서울 경기권의 도시 농부와 전국의 귀농 귀촌인들이 활동 중이다. 건강하고 맑은 마음이 모여 마르쉐@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귤이랑 사과랑 싣고 마르쉐@으로 고고~
경북 영주에서 유기농 사과를 재배하는 윤건(尹健·52)씨. 20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6년 전 귀농해 지금은 서울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서울에서도 10년 정도 도시 농업을 했고 생활협동조합 활동을 꾸준히 했다고. 유기농 사과 재배를 위해 영주에서도 산꼭대기에 자리 잡아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마르쉐@에는 사과를 팔러 오는 것 외에도 가족과 친구들 만나는 재미에 빠지지 않고 온다.
윤순자(尹順子·53)씨는 제주에서 갓 나온 친환경 하우스 감귤과 한라봉잼을 가지고 서울을 찾아왔다. 추석을 맞아 제주에서 올라온 알알이 큰 하우스 감귤. 얇은 초록색 귤껍질을 까면 달콤한 과즙이 시원하게 터진다. 거의 매회 마르쉐@에 참여하는 윤순자씨. 10월에는 달콤함이 예술인 레드키위를 들고 올 예정이다.
홍대 도시텃밭 자란다는 4년 전에 마르쉐@서울역으로 시범운영했을 때부터 참여했다. 이곳에서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꾸준히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홍대입구 카톨릭회관 옥상과 합정동, 상암동 비빌기지 상자 텃밭도 운영하고 있다. 도시 텃밭에서 자란 농작물을 이용해 페스토 등 가공품을 만들어 마르쉐@에서 판매한다. 10월에는 생강을 수확해 시럽을 만들 계획이다.
※마르쉐@ 어떻게 읽죠? 마르쉐(marche)는 프랑스어로 장터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에서’를 의미하는 영어 전치사 @(at)을 사용한 것이죠. ‘마르쉐@대학로’는 ‘대학로에서 열리는 장터’라는 뜻이고, ‘마르쉐 엣 대학로’라고 읽으면 됩니다.
※마르쉐@ 어디서 열리나요? 상황에 따라 장 서는 곳이 달라집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비롯해, 명동성당 지하 ‘1898 광장’, 어린이 대공원, 양재 시민의 숲, 상암동 석유비출기지(일명 비빌기지)에서 장이 열립니다. 마르쉐@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서 장소를 확인하면 됩니다.
마르쉐@ 홈페이지 marcheat.net
마르쉐@ 페이스북(facebook.com) 검색창에서
마르쉐at 혹은 마르쉐@을 검색하세요.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크로아티아 흐바르(Hvar)는 유명 여행전문잡지에 ‘세계에서 아름다운 섬’으로 자주 손꼽힐 이유가 충분하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가 자주 찾았던 곳이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과 일반인의 여행 시각이 뭐가 다를까? 그저 살아생전 찾아가봐야 할 섬이 흐바르다.
이 섬의 아름다움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표현해 낼 수 없다.
진한 라벤더 향기 머금은 스타리 그라드의 골목길
스플리트에서 배를 타고 2시간 거리. 여객선은 200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섬으로 다가선다.
한눈에도 볼 수 있는 작은 섬이 눈 앞으로 스르르 다가선다. 선착장에 멈춘 거대한 배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하선한 관광객과 다시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가려는 인파로 복잡한 선착장 주변에 라벤더 향기를 가득 담은 난전 두어 개가 펼쳐져 있다. 라벤더의 강한 향기가 코 끝을 ‘훅’ 자극한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 파는 곳으로 다가간다. 햇살 좋은 섬에서 자란 과일 주스는 맛이 참 좋다. 피자 한쪽을 사서 미처 먹지 못한 ‘아점’도 먹는다. 그러는 사이 북적대던 사람들은 섬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돌아갈 배편을 미리 구입하고 천천히 섬 안으로 발을 옮긴다.
해안 길(riva)을 피해 일부러 민가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선다. 해묵은 느낌이 가득한 골목길엔 치즈 빛 담 벽과 반질반질한 돌이 이어진다. 골목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좁은 골목길에서 앙증맞은 숍, 여행사, 호스텔 등의 간판들을 만난다.
강한 향내를 풍기며 유혹하는 라벤더 가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게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금발 생머리의 날씬한 판매원을 닮은 듯 예쁘고 현혹적이다. 라벤더 오일, 건제품들은 예뻐서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흐바르에 라벤더 가게가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섬은 ‘라벤더 섬’으로 불릴 만큼 라벤더 재배가 성행한다. 5월이면 온 섬은 라벤더 꽃과 향이 코끝을 간지를 것이다.
수녀가 만드는 알로에 레이스와 하니발 루치치 동상
골목길에서 11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원(Benedictine Monastery)을 만난다. 그저 유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수도원이다.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수도원은 ‘알로에 레이스(Aloe Lacemaking Skill)’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알로에 화분 하나가 놓여 있고 건물에는 레이스 그림을 새긴 팻말이 있다. 유럽 마을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 공예지만 흐바르는 색다르다.
크로아티아에는 3가지 서로 다른 레이스 공예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파그(Pag) 마을에서 전하는 ‘니들포인트 레이스 공예(Needle Point Lacemaking Skill)’, 크로아티아 북부의 레포글라바(Lepoglava)에 전하는 ‘보빈 레이스 공예(Bobbin Lacemaking Skill)’, 그리고 달마티아(Dalamatia) 연안의 흐바르 섬에서 전승되는 ‘알로에 레이스 공예(Aloe Lacemaking Skill)’다.
‘알로에 레이스’는 흐바르에 거주하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수녀들만 만든다. 생 알로에 잎의 심에서 나오는 얇은 흰색 실을 이용해 보드지 뒤에서 망이나 다른 패턴을 짠다. 이렇게 완성된 레이스 작품은 흐바르 지방을 상징한다.
이 수도원 앞에는 르네상스기의 위대한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Hanibal Lucic)의 동상이 있다. 15~16세기 크로아티아의 대표적 작가인 하니발 루치치(1485~1553)는 ‘로비냐’ 라는 서사시를 썼다.
멀지 않은 곳에 르네상스의 시인 페타르 헤크토로비치(Petar Hektorovi?, 1487~1572)의 요새와 트브르달리(Tvrdalj) 성의 안내 팻말이 붙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나고 죽었다. 그는 어부의 노래를 수집했고, 기행담 등을 친구와 서신으로 대화를 즐겼다. 그가 기록한 해상 및 동물원 용어들은 크로아티아어 표준 언어에 통합되었다. 요새와 성은 직접 설계했는데 현재는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
스타리 그라드 랜드마크 스테판 광장엔 그리스 흔적이
골목을 비껴나면 흐바르 타운의 중심지인 넓은 스테판 광장이 얼굴을 내민다. ‘U’자 모양의 항구가 있는 이 광장에는 성 스테판(St. Stephen's) 대성당이 있고 1612년에 지어진 유럽 최초의 시민극장 등 유적지가 몰려 있다. 한눈에 봐도 스타리 그라드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에선 어김없이 레스토랑, 와인바 등이 성업 중이다. 이 광장은 흐바르에 그리스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으로 아드리아 해안 달마티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스타리 그라드에 처음 사람이 정착한 때는 그리스 시대다. 그리스가 아드리아해까지 영역을 확장한 시기는 고대 시칠리아 시라쿠사(Siracusa)의 독재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세(재위 BC 405~BC 367)때부터다. 그는 384년, 일리리아인의 도움으로 비스(Vis) 섬을 정복해 첫 번째 식민지를 세웠다. 10년 뒤, 디오니시우스와 동맹을 맺은 에게해의 파로스 섬 거주민들이 섬을 정복해 식민 도시를 건설했다. 현재 남은 요새, 고대 석담, 건물 골조, 돌로 만든 작은 대피소 등이 그리스 시대의 흔적들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토지 구획 체계인 ‘코라(chora)’는 24세기 동안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BC 4세기 중반, 시라쿠사 제국이 몰락했고 BC 5~BC 6세기 경 일리리아인의 독립 공국이 되었다. 일리리아인들은 요새를 재사용하고, 여기에 새로운 요새를 구축하면서 번성했다.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왕이 되어 통치하면서 권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에 의해 식민지화한다. 그때 파리아(Pharia, Faria)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 통치 기간에는 자치도시(municipium)의 지위를 획득했다. 몇몇 로마식 무덤이 만들어지고, 물탱크가 축조되기도 했다. 파리아는 그리스 시대보다는 좀 더 작은 경계로 다시 요새화했다. 이후 12세기에는 기독교 주교의 관할권 아래 있었고, 13세기 중반부터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당해 1797년까지 정치적인 통제를 당했다. 베네치아 왕국 시대(14~16세기) 때 교통, 군사상 요지로서 번영했다. 15세기부터 교역 중심지 항구로서의 부흥기를 맞이했는데, 당시의 지역명은 캄포 산 스테파니(Campo San Stephani)였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말,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만드는 필록세라(phylloxera) 병이 돌면서 이 섬의 경제는 흔들거렸다. 많은 농부들이 농지를 포기했고 20세기에는 이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도를 경작하던 남부 마을들은 부분적으로 사라지고, 토지와 도로 대장 체계도 관리 부족으로 명맥만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에는 새로운 위협에 맞닥뜨렸다. 집단농장과 농업의 기계화가 그 원인. 그래도 지금은 다시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떠난 농부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흐바르 요새는 천국의 자리
흐바르 스타리 그라드의 백미는 흐바르 요새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스페인 요새, 베네치아 요새(Spanjola Fortica, Spanol Fortress)라고 불린다. 스테판 광장에서 북쪽의 산 언덕으로 오르면 된다. 오르는 길목의 모습은 타운과 엇비슷한 골목이다. 돌길을 따라 이어진 주변 화단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이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10여분 걸음 끝에 만나는 요새는 중세 때, 오스만 투르크 족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새 안 박물관에는 부서진 유적들이 있지만 딱히 볼만한 것은 없다. 대신 앞이 환하게 트인 성벽에서 바라보는 발밑 풍경에 넋이 빠진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치를 누군들 반하지 않겠는가? 흐바르 타운과 쪽빛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조망하면서 위치를 가늠해 본다. 흐바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라치(Bra?)섬과, 비스(Vis) 해협을 사이에 두고 비스와, 코르출라(Kor?ul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르출라와, 네레트바(Neretva) 해협을 사이에 두고 펠제샤츠(Pelje?ac)섬과 마주 보고 있다. 풍광만으로 흐바르 사랑이 가슴 속 깊숙히 채워지는 곳. 더 이상 말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를 때 무겁던 발걸음은 몇십 배 가벼워져 하산한다. 다시 선착장을 기점으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물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쪽빛 바다에는 물놀이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생선 굽는 냄새에 코끝을 킁킁대며 굴 전문 식당, 와인숍을 한가하게 기웃거리다가 만난 프란체스코(Franciscan) 수도원. 15세기에 코르출라 출신의 유명 석공 가문이 건설했다고 한다. 바다를 정원 삼은 작은 수도원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포인트를 주고 있다. 수도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는데, 특히 마테오 이그놀리의 ‘최후의 만찬’ 등이 눈여겨 볼 그림들이다. 겨우 하루였지만 흐바르의 눈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과 코끝을 파고드는 라벤더 향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선연하게 박혀 있다.
TRAVEL TIP!
항공편 크로아티아로 바로 가는 직항 편은 없다. 일단 유럽의 주요 도시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헝가리 부다페스트, 슬로베니아 루블라냐,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등의 국제선을 이용해 자그레브 공항으로 갈 수 있다. 근교 도시에서는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슬로베니아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배편 스플리트에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페리는 스플리트 항구, 타운 버스 터미널 맞은편에서 일반 페리가 매일 3회 출발한다. 쾌속선은 1시간 5분 정도 소요되지만 보편적으로 2시간 정도 예상하면 된다. 단 시기에 따라서 페리 스케줄이 다를 수 있다. 정확한 스케줄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날씨에 따라 출발이 결정되므로 여유있게 여행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여행시기 라벤더가 피어나는 5월과 6월 가장 아름답고 한가롭다. 여름 피서철에는 사람이 많아져서 배편, 숙박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와인 크로아티아의 2대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남쪽은 적포도주, 스타리 그라드와 젤사 사이 중앙 평원은 백포도주 산지다.
먹거리 해물 스파게티와 신선한 새우요리, 그릴에 구운 생선구이 등 바닷가라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 바닷가 옆이나 스테판 광장 쪽에 식당이 많으며 아시안 음식점도 있다. 또 골목 속에 박혀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나 선술집(konoer)들도 많다.
특산물 흐바르는 라벤더의 섬이다. 난전은 물론 골목에 가게들이 있다.
화폐 쿠나(HRK) 전압 220V, 50Hz(공통)
크로아티아 추천 여행 코스 수도 자그레브를 시작해서 플리트비체-시베니크-자다르-트로기르-스플리트-흐바르-두브로브니크 순으로 여행을 즐기면 된다.
여행 유의점 크로아티아는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란다.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일부에서는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짐 값은 당연히 받고 택시기사의 바가지 상흔도 아주 흔하다. 국내 여행사 상품이 여러 군데 나와 있으니 패키지를 이용해도 좋을 듯하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집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그나마 있던 매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런 틈새를 노려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전원마을’에 ‘도심형’이 붙어 멀리 가지 않아도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하면 뭐하겠는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가봤다. 도심형 전원마을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살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도심형 전원마을 두 곳을 소개한다.
단독주택, 꼭 넒어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라
하우개마을
하우개 마을은 파주 황룡산 앞에 세워진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하우개 마을은 작은 땅에 효율적인 집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지하에 차 2대가 들어갈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차고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2층과 다락방을 올려 이용 공간을 넓혔다.
다락방 천창으로 바라다보이는 하늘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까지 준다. 4년 전만 해도 전원주택은 330m²(100평) 이상 큰 평수대로 지어져왔다. 지금은 젊은 30~40대나 은퇴를 앞둔 50~60대가 살 수 있는 99.2~132m²(30~40평) 형대의 전원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집값이 안 오를 바에는 넓고 편한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남의현(南議鉉·61)씨와 김경주(金庚珠·60)씨는 하우개 마을 첫 입주자로 2014년 9월 문패를 달았다. 점심시간 조금 넘어 방문했을 때는 바깥주인인 남의현씨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말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장애인 봉사를 하며 은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우선 공기가 좋다는 게 마을의 최고 매력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마다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남씨는 마을에서 최고 연장자고 오랫동안 산 사람이지만 동생 격인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현재 남씨 부부를 제외하고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 입주가 시작되고 친해지다 보니까 매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자주 못 만나는데 날씨 좋을 때는 정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 정말 좋습니다. 맛이 달라요.”
부인 김경주씨는 홀트일산복지타운 원장이다. 사무실이 근처라 주위 아파트를 찾아보다 하우개마을을 알게 됐다.
“그때는 벌건 흙밖에 없었어요. 간이 크다고 하겠지만 조감도만 보고 집을 계약했어요. 누가 여기 들어오나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입주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도우미를 자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결정을 못하고 그럴 때 우리 집을 보여줬어요. 아마 여기 입주민은 우리집 한 번쯤 왔을 겁니다.”
집은 지상 2층에 다락까지 공간이 꽤 되는데 연료비나 전기료 부담이 없다.
“도시가스비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14만원이었어요. 전기료도 두 식구밖에 안 되니까 얼마 안 나와요. 아파트에선 관리비를 30만원씩 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창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쓴 히노키 나무가 마음에 듭니다. 나무집은 습기가 차면 나무가 팽창해서 습기 들어오는 걸 막고 더울 때는 마르면서 통풍이 된다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올 때면 나무 냄새 등자연의 향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새소리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다.
전원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와도 가깝고 또 공기까지 좋아서 도심형 전원주택으로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대지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다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파주 운정 신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이하 도시농부) 1, 2차 단지다. 오솔길처럼 낸 길을 따라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곳곳에 도시농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텃밭도 보였다. 현재 5단지까지 분양 완료 됐는데 가격은 3억원 대로 알려져 있다.
도시농부의 특이점은 빌라형이면서 독채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시 대부분이 평면을 넓혀 단층(1층)을 높이 쌓아서 집을 지었다면 도시농부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집을 잘라 구분했다. 박닥은 좁은데 천장이 높고 2층에 다락방까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도시 주택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6년 전 지어진 도시농부 1, 2차 단지의 경우, 설계를 담당한 도시농부 최용덕(崔龍德·57) 대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노린 듯 층마다 텃밭이 있다. 면적은 좁지만 그안에 층을 만들어 공간 활용을 했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런 실험이 사실상 실패라고 말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위해 준실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렇게 보완해 설계한 것이 최근 지어진 도시농부 미니멀하우스다. 이 집도 역시 세로로 집을 구분한 독채 빌라형이다. 1,2차 단지에 비해 옆으로도 꽤 넓고, 높다. 여러 군데 창이 있어 내부가 도시 집에 비해 상당히 밝은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조인관(趙寅官·71)씨는 딸의 권유로 당산동에서 파주 도시농부로 이사 왔다. 최근 간 이식수술을 한 부인이 공기 맑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가격에 비해 집안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씨의 집은 1층 응접실과 주방, 2층 부부의 방, 3층을 손님들이 묵고 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층 공간을 조금 나눠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드레스룸 안, 높은 천장 위를 가로로 분리해 창고로 만들었다. 2층은 통째로 부부의 방으로 꾸몄다.
“부부 단 둘이 살기 때문에 공간을 쪼개서 방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대신 계단 옆에 뭐든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보니까 적응돼 괜찮습니다.”
인테리어는 조씨가 직접 했다. 조씨가 집안 내부를 인테리어에 직접 개입한 것은 ‘마이너스 옵션제’로 분양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옵션제란 익스테리어(건물외관, 창호, 전기, 보일러, 정원)는 회사측이,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고 도시농부와 하우개마을도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하고 있다.
조씨는 집 앞 마당 가꾸는 것이 취미다. 봄을 맞아 마당 주위에 꽃도 심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시골 생활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김 현 (전 KBS 연구실장, 여행연출가)
12년간 출연했던 KBS-TV 여행 프로그램 를 비롯해 여러 라디오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 매스컴의 인정을 받게 되어,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제1호’라는 별칭까지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와 나는 늘 우리 부부에게 따라 붙는 이 별칭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해 왔다. 일단 여행지가 정해지면 주마간산에 그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하고 체계적으로 여행일정을 짰다. 이번에 소개하는 2016년 추천 여행지인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본 규슈 기차여행」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일주」 「미국 서부 LA~샌프란시스코」 「캐나다 중부 그레이하운드 여행」도 여행 기간의 10배에 해당하는 준비기간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아내와 내가 역할을 분담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물론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유익한 여행이 될 수 있으나, 남들과는 조금 차별화된 여행을 가고 싶다면 한 가지 테마를 정해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은 코스 제목부터 시작하여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기획한 코스로서,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유일한 코스인 동시에 이곳만 둘러봐도 중국을 알 수 있게끔 핵심만 뽑아놓았기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김현·조동현 부부의 '특별한 부부여행 코스' 첫 번째 -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
일반적으로 ‘서양’ 하면 유럽과 미국이 떠오르고, ‘동양’ 하면 역시 중국이 떠오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있긴 해도 크기나 역사·문화·풍광 등으로 보아 중국이 동양의 대표주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은 1년을 여행해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광대한 영토와 뿌리 깊은 역사, 볼거리가 많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중국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여행하느냐가 중요한데, 아내와 나는 늘 중국 여행을 좀 더 알차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중국과 미국의 수교가 이루어졌고, 1998년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중국 정부가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여줄 중국을 대표 도시 5개를 선정했다. 이것이 바로 북경 - 서안 - 계림 - 소주 - 상해였다.
우리 부부도 1999년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아서 가보았다. 중국의 역사·문화·환경을 통틀어 핵심만 여행할 수 있는 코스여서 무척 만족했다. 그래서 내가 클린턴의 이름을 따 ‘클린턴 코스 중국여행’이라 명칭을 붙였다. 현재까지 시중에서 상품화된 적이 없는 코스이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 북경이나 상해 등을 비롯해 중국에 여러 번 다녀왔다. 90년 초에는 한국 여행관계자들이 중국의 33번째 성(우리나라로 치면 도)이 된 해남도에 초청받았을 때, 취재 겸 한국 단장 자격으로 5번이나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늘 중국을 다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목말라 있었는데, 이 클린턴 코스로 인해 그 갈증이 말끔히 가신 것이다.
클린턴 코스의 첫 번째 도시는 북경이다. 엄청난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볼거리 또한 굉장하다.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부터 시작하여 1420년~1911년 까지 중국 황제가 거주하던 자금성, 북경의 최대 번화가이자 중국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부정 거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서커스, 그리고 그 유명한 만리장성과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까지.
두 번째 도시 서안은 중국의 한가운데 위치한 3000년 고도이자, 대표적 중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그 발전성과가 눈부시다. 한 농부가 발견한 병마용갱(진시황이 말년에 황릉과 함께 건설한 지하궁전의 일부로 지금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음)을 비롯하여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비림, 서안의 인사동으로 불리는 문서거리,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로맨스 장소로 유명한 화청지, 중국의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인 진시황릉,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상 가무쇼, 서안의 30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섬서 역사박물관, 아시아에서 제일 큰 음악분수 쇼를 볼 수 있는 대안탑, 소수민족 회족의 전통양식을 볼 수 있는 회족거리, 서안의 명동이라 불리는 종고루 광장 등은 꼭 보아야 할 것들이다.
세 번째 도시인 계림은 중국을 대표하는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카르스트 지형에 속하는 계림은 지각변동에 의해서 바다가 솟아오른 것인데, 마치 물속에 산이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 꿈속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중국 각 민족의 생활풍습과 수공예를 볼 수 있는 세외도화원, 중국과 서양이 만난 이국적인 서가 재래시장, 계림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장예모 감독의 연출작 공연 계림시내 전경을 볼 수 있는 북파산, 계림 산수갑 천하제일인 이강 유람(관암~양재), 각양각색의 기이한 종유석의 세계인 관암동굴 등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네 번째 도시인 소주는 또 다른 역사의 도시이다. 수양제에 의해 건설된 대운하가 개통되면서 항주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운하가 무척 아름답고 옛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다. 중국의 4대 정원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졸정원부터 동양의 피사의 탑이라 불리는 호구탑, 그리고 동양의 베니스인 소주운하에서 배를 타고 유유히 소주만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빠질 수 없는 ‘클린턴 코스’만의 매력이다.
마지막 도시인 상해. 상해는 최근 들어 놀라운 번영을 하고 있는 중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정치의 중심이자 가장 역사적이고 남성적인 북방의 도시라고 한다면, 상해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강남의 풍치와 함께 여성스런 남방의 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북경 사람은 상해 사람을 촌놈이라 하고, 상해 사람은 자기들이 최고라고 각각 주장한다고. 원래 늪지대였던 상해는 운하로 연결된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게는 뜻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경제 중심 도시답게 상해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의 상징인 동방명주 타워가 유명하고, 프랑스 조계지였던 신천지, 예원 등의 옛 거리, 그리고 1919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다.
새싹
씨앗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낸 새싹들이
싱그러운 녹색을 뽐내며 인사합니다.
겨우내 웅크린 몸을 기지개 피며,
파릇파릇한 손을 흔들며 인사합니다.
새 봄, 새 출발을 환영하면서…
상추
상추는 가꾸기도 쉽고, 땅도 거의 가리지 않기에 처음 도전하는 도시농부들이 집에서도 가볍게 키울 수 있고 수확도 가능하다.
파종시기
노지에서는
3월 말에서 4월 중순까지
아파트에서는
충분한 햇빛과 일정 온도(15℃이상 30℃이하) 유지가능할 때는 언제든 키울 수 있다.
※ 햇빛이 약한 아파트에서 기르는 경우 적상추와 청상추의 구분이 되지 않으며, 적상추의 색깔은 햇빛을 잘 받아야 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