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해방은 독립투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온 가족과 전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큰 공적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명예나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온가족과 모든 재산을 바쳐 독립투쟁
6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교동 소재 ‘우당기념관’을 찾아 그의 공적을 살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867년 이조판서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6형제와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투쟁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으며,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적극적인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격렬한 항일운동을 하였다.
항일투쟁 현지 지도 차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여순 감옥으로 이송하였다.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62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쟁에 일생을 다한 경우도 많지만, 가족과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경우는 드물다.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조국에 모두를 바쳤다.
위대한 독립투사요 사상가, 혁명가
우당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명문세가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와 행동으로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독립투사이자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였다.
이회영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대 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겼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명예나 지위를 탐하지 않다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어떤 단체․모임에서도 장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은 동생 시영의 그늘에 가려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벤트성 행사나 치르고 공을 과대 포장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더라도 노력하다가 죽었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라는 선생의 말씀이 되새겨진다.
가족들은 사회에 공헌하는 귀감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아우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렸다. 손자들은 정·관계에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월요일 오후 우당기념관은 한적하기만 했다. 선각자의 공적을 기리고 교훈으로 삼는 후대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바쁜 중에도 친절하게 안내해 준 황원섭(75 서초동) 상임이사와 담당 직원에 감사한다.
조국의 역사가 안겨다 준 수많은 비극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 투사와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와 그 여인이 옥중에서 쓴 수기 내용을 우선 써 내려가본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 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 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 그는 1902년부터 1974년의 생애로 마감을 한 독립투사로 본명은 박준식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조선 최초 아나키즘 사상단체를 만들어 일본제국 왕을 폭탄으로 제거하려는 등 온몸으로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20년 1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박 열은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 해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박 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박 열은 젊은 청년시절 22년 2개월간의 기나긴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아키다 감옥에서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군대 축소 및 국제 중립국화 등에 노력을 기울였고 1974년 서거하여 그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 능에 묻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1926년 박 열과 옥중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여인이다.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불우하게 살아왔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으로 23살의 짧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약7년 동안 조선 부강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1919년 에는 부강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 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 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후 체포되었고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 부부가 된1926년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결국 감옥에서 목을 메어 자살인지 타살인지 미스테리한 의문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일본 내에 그녀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박 열의 형은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남편의 고향인 문경, 박 열 의사 기념관의 옆에 안장시켜 놓았다고 했다.
우리 조국의 사랑뿐만 아니라 투철했던 한 독립투사와 일본인 가네코의 끈질긴 사랑이 잔잔하게 가슴에 울려온다. 서로가 원수의 국적이었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함께한 굳은 의지가 죽음도 불사했다. 한 독립투사는 조국을 위해서 앞장섰지만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두었던 것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었을까? 무서운 권력 앞에 처절히 죽어가며 한 남성을 사랑하는 어느 여인의 절규가 애절하기만 하다. 박 열의 업적과 가네코의 항일운동의 업적은 현재 남 북한 양쪽뿐만이 아니라 고향인 문경에서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두 남녀의 시신은 남과 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어 더욱 깊은 아픔 으로 남는다. 필자에게는 지금도 의사 박 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도 구입해 봐야 할 것만 같다.
[출처] “한 독립투사의 사랑이야기”|작성자 로즈와이
매화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려온다. 겨울에 피는 꽃이라 하여 ‘설중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색빛 도시, 겨울옷이 무겁게만 느껴질 때 오아시스처럼 섬진강변에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긴 겨울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매화꽃을 찾아 장거리 여행 채비를 서두른다. 타 지역은 아직도 썰렁한 산하지만 섬진강 주변으로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청매실 농원엔 눈이 내린 듯 흐드러지게 매화꽃이 만발하고
일기에 따라 조금 차이는 나겠지만 3월 중순쯤 섬진강가의 온 마을에는 매화꽃이 만발한다. 길거리에도, 집 뒤뜰에도, 그리고 강변 옆으로도 꽃 천지다. 허허로운 산야에 핀 흰 꽃은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야 제멋이 난다. 꽃잎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쁘지만 꽃이 작고 나무줄기가 있어서 한 그루만 모여 있으면 제빛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화마을로 알려진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삼벅재 골짜기로도 부르는 이 마을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모두 매화나무를 심었다. 봄이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리고 하얀 꽃구름이 골짜기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룬다.
꽃이 만개하면 으레 매화 축제가 열린다. 매화꽃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청매실 농원이 가장 유명하다. 수십년 묵은 매화나무 아래, 청보리가 바람을 타는 농원 중턱에 서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 너머 하동 쪽 마을이 동양화처럼 내려다보인다. 매화꽃 군락을 감상하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지만 해마다 몰려드는 인파 탓에 교통체증과 사람들에게 치인다. 초보 여행객들이 아니라면 이 북적거림을 피해 섬진강 하류를 기점으로 강변 드라이브 길로 나설 것이다. 그곳 또한 아름다운 여정의 풍광을 보여준다. 진월에서 신아리, 신구리, 월길리 등 낯선 이름의 마을을 지나친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이 도로 옆을 화사하게 장식해 인적 드문 산간지역에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어냈다.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에 여념 없고 산등성이에도 무심하게 하얗게 봄꽃을 피워내고 있다. 잠시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 진하면서도 달콤한 매화향이 코끝을 감싸온다.
윤동주 시인의 애련한 흔적이 남은 망덕포구엔 벚굴이 한창
이어 발길을 멈추는 곳은 섬진강 물줄기가 바닷물과 조우하는 망덕포구다. 배알도라는 자그마한 섬 앞으로 띄엄띄엄 배들이 정박해 있고 횟집이 길게 이어진다. 섬진강 끝자락에 남은 포구라는 것 빼고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곳엔 윤동주(1917~1945)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포구는 매력적이다. 그저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싸하다. 측은지심에 가슴이 저려 온다.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일제강점기에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시인의 인생을 어찌 몇 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리디시린 삶의 자그마한 흔적이 이 망덕포구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보관했던 낡은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1925년 건립)과 시비가 있다. 횟집 즐비한 포구 앞에, 인기척 없는 가옥 한 채가 썰렁하게 있다. 굳게 닫힌 유리창 너머로 윤동주 시인과 친구의 학창 시절 얼굴이 해맑게 미소 지으며 반긴다. 마루 한쪽이 열려 있고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라는 안내 글자가 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숨겨져 있었을까? 시인이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었다. 1부는 자신이, 1부씩은 은사 이양하 교수와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겼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의 어머니에게 원고를 맡긴다. 어머니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왔다.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1948년 유고시집 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주옥 같은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이렇게 알려지게 된 데 큰 기여를 한 집인 게다.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정병욱 작은 기념관, 도서관, 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소공원을 만들 계획이다. 또 윤동주 백일장, 문학상을 추진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제2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이다.
또 이 봄, 망덕포구를 찾아볼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벚굴이다. 1~4월이 제철인 벚굴은 이곳이 아니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벚굴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짜지 않고 굴의 비릿한 맛이 적다. 거기에 일반 굴에 비해 보통 10배 정도나 크다. 서너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옥룡사지에서 즐기는 봄날의 오수
광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계산(505m) 자락의 옥룡사지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도로 옆, 길목(해발 403m)에는 대규모(약 2100평) 동백군락지(도지정 기념물 12호)가 있다. 온 산을 동백나무가 에둘러 감싸고 있다. 신라 경문왕 4년(864),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꾸몄으며, 제자들의 심신수련을 위해 차밭을 일궜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동백군락지는 ‘아름다운 숲’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찾는 이 많지 않은 그곳에 피어난 동백꽃은 따사로운 봄날과 잘도 어울린다. 동백숲길에 폭 빠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금 오르면 옥룡사지(사적 제407호)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9마리의 용이 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에 도선국사가 용을 몰아냈는데 유독 백룡만이 말을 듣지 않자, 지팡이로 용의 눈을 멀게 하고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쫓아낸 뒤 숯으로 절터를 닦아 세웠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이 옥룡사에서 30여년 동안 홀로 앉아 말을 잊고[宴坐忘言] 지내다 입적했다. 조선 후기에 화재로 타 버려 폐사된 후 긴 세월 절터만 남아 있다. 대신 우측 언덕을 넘으면 도선국사비와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에 비석이 유실되었으나 2003년 본래 자리에 복원되었다. 또 이곳에서 산 길로 거슬러 오르면 동양 최대의 청동약사여래불이 서 있는 운암사를 만나게 된다.
도선국사와 고로쇠 이야기
도선국사(827~898) 하면 고로쇠 수액의 전설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참선하다 몸을 일으키려던 도선국사. 무릎이 금세 펴질 리 만무하다. 도선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는데 나무가 부러졌고, 부러진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나왔다. 그 물을 마신 도선의 다리가 펴져 ‘뼈에 이로운 물’이라 하여 ‘골리수(骨利水)’로 불렀는데, 나중에 고로쇠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해마다 경칩이면 백운산에서 고로쇠 약수제(3월 5일)와 축제를 연다. 어쨌든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 녹차나무가 남아 옛터를 지키고 있다. 또 옥룡사지 가는 길목에서 중흥사(061-763-6655)를 찾아도 좋다. 중흥산성 3층석탑(보물 112호)과 중흥사 석조지장보살반가상(전남도 유형문화재 142호)이 있다. 근처 도선국사마을(061-762-6716, dosun.go2vil.org)도 재미가 있다. 다도, 도자기, 염색, 전통 손두부 만들기 등 계절별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농촌테마마을. 특히 물 맛이 좋아 원님 전용 식수로 애용되었다는 사또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를 이용해 만든 손두부를 농가에서 판다.
Travel Tip!
가는 길 서울 출발 → 호남고속도로 → 익산JC → 완주JC에서 순천 광양 방향 간 고속도로 이용 → 광양IC → 광양읍에서 매천 유적지를 보고 10여분 가면 옥룡면 소재지다. 옥룡면에서 광양읍내로 다시 나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월IC로 나오면 망덕포구를 만나기 쉽다. 그리고 하동 쪽으로 가면 섬진강변을 만나고 근처에 청매실 농원이 있다. 청매실 농원부터 여행을 하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구례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 편하다.
숙박정보 백운산 자연휴양림(061-763-8615, www.gwangyang.go.kr)은 울창하고 소나무 숲이 가히 장관이다. 특히 휴양림의 황톳길은 흙에 들어 있는 원적외선이 뿜어져 나와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에 큰 도움이 된다. 읍내 덕계리(순천, 보성 가는 방면)는 모텔촌이다.
주변 연계 여행지 광양 시내에는 매천생가와 유적공원, 장도박물관(061-762-4853, www.jangdo.org)이 있다. 어치계곡, 동곡계곡, 금천계곡, 성불계곡 등은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한다.
별미집 광양읍내엔 불고기 특화거리가 있다. 매실한우(061-762-9178), 3대광양불고기(061-762-9250), 조선옥숯불갈비(061-792-8559), 금목서(061-761-3300) 등을 꼽는다. 봉강면의 지곡산장(061-761-3335, 닭숯불구이)이 아주 괜찮다. 고로쇠 수액이 나오는 철에는 미리 예약하면 음용이 가능하다. 그 외 이 계절에는 광양의 계곡 주변 민가 식당에서 고로쇠와 함께 닭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손자 자랑은 돈 내고 해야 한다는데…. 허허허허! 이제 그만합시다. 줄 돈도 없는데!”
윤경로(尹慶老·68) 전 한성대 총장은 인터뷰 내내 웃음기 담은 답변을 내놨다.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수십 년간 역사학자로 활동해온 그는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던 문창극 총리후보 지명 당시 “잘못된 역사에 하나님을 망령되게 불러내고 있다”며 날을 세웠을 정도로 ‘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은 손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영락없는 (외)손자바보 할아버지였다. 더없이 따스하게 들려준 우리 시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법.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조부모들이 ‘손주 바보’가 된다고 하는데 왜그럴까요?
“우리 세대만 해도 세상 살기가 바쁘고 어려워 자식사랑의 여유가 별반 없었지요. 우리 앞세대는 대가족시대였으니 또 그랬고. 아무튼 요사이 조부모들이 ‘손주 바보’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정신없이 살다보니 자식 사랑할 여유가 없었는데 손자녀를 보니 얼마나 반갑고 좋겠어요. 더욱이 요즘은 자녀들의 결혼이 늦어지고 자녀도 한둘만 낳는 세상이니 손자녀를 더욱 기다리게 되고 그래서 손자녀가 생기면 자녀보다 더 사랑스럽고 기쁜 것이지요. 내 주위에도 40이 다 된 자녀를 아직 결혼시키지 못한 친구들도 적지 않은데, 자녀들이 결혼도 해주고 손자, 손녀를 낳아주면 고맙고 반가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자연 ‘손주 바보’가 되는 거지요. 손자녀들을 돌볼 때 더 친근하고 현명해져 이해심이 풍부해지더군요. 그래서인지 자식보다 손주들에게 특별한 믿음을 끌어낼 수 있고 보다 더 의미있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시대의 조부모의 역할은 뭐라고 보시나요?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잘 자라려면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할아버지의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시중에 회자되고 있어요. 그만큼 요사이 젊은 부모 세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자연 손자녀를 키우는 데 조부모의 역할이 옛날보다 중요해진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보면 저는 할아버지로서 능력도 자격도 별반 없는 축에 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재력적으로 손자, 손녀를 지원해줄 형편이 못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조부모의 역할이 꼭 물질적 지원과 후원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재정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더라도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해줄 역할은 많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도 ‘마음의 멘토’라고나 할까. 저는 제 손자녀들이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한 ‘따뜻한 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으면 해요.”
조부모로서 특별한 마음가짐이 있나요?
“과거에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뽑으면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역정을 내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손자녀 사랑은 낳은 부모보다도 조부모의 사랑이 더 크고 넓지요. 요사이 손자녀 가운데 조부모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아이들이 있을까요? 어릴 때 안아주고 키워주고 커지면 용돈도 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엄마 아빠한테 야단맞을 때는 역성 들어주고 그러다보니 버릇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손자녀에 대한 조부모의 사랑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손자녀에 대한 마음가짐은 너무 과하지 않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이….”
손자녀를 키우는 자녀의 교육방식이나 양육방법에 못마땅한 것은 없나요?
“요사이 젊은 부부는 아이들을 하나나 둘 정도 낳아 키우잖아요. 내 마음 같아서는 낳을 수 있는 대로 많이 낳아서 키웠으면 좋겠는데, 옛날과 달리 아이들 키우기가 워낙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으니 많이 낳으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지요. 이렇게 한둘만 키우다 보니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말문만 열리면 유아원 등 여러 곳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는 세상이 되었는데 참 안타깝지요. 이건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니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어린나이 때부터 경쟁사회로 내몰리는 것이 참 안쓰럽습니다. 저는 2녀 1남을 다 시집 장가보내 외손자 둘, 외손녀 하나를 보았는데 친손자는 아직 보지를 못했지요. 옛 어르신들은 외손자 친손자를 구별했다고 하는데 요사이는 그런 것 없지요. 옛날에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으나 지금은 그런 의식이 별반 없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두 딸은 손자녀를 잘 키우는 것 같아 걱정이나 불만 같은 것은 없어요. 오히려 고맙다고나 할까. 매우 만족합니다.”
교육자로서 남다른 손자녀 교육철학은?
“글쎄요. 평생을 교육현장에서 보냈지만 손자녀에 대한 교육철학을 따로 구상한 적은 없어요. 굳이 한마디 한다면 우리 옛말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실제로 아이들의 지능과 성품과 품성은 만 3세 안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고요.
그리고 아이들은 ‘본대로 따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아기일 때 어떻게 키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방법은 역시 사랑이지요. 부모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커서 남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다고 해요. 저는 우리 손자녀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 그 받은 사랑을 이웃과 더 크게 나누며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 사랑과 배려다’라는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실천하는 손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손주 자랑 좀 해주신다면
“저는 손자녀들을 보면 말하기보다 껴안고 뽀뽀하기를 좋아해요. 허허허!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하지요. 애들이 싫어하는 것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만 한다고 핀잔을 자주 받곤 해요. 그러나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그저 몸과 마음으로 손자녀들을 사랑한다는 뜻을 표할 뿐이죠. 이제 아이들이 좀 더 커지면 내가 평생 공부한 역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어요. 마침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 손자(김도윤·대도초등학교)가 역사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세계역사 책과 도 다 읽어서 나보다도 아는 게 더 많아요. 지금 마음 같아서는 훌륭한 역사학자가 됐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두고 봐야겠지요.”
금쪽같은 손자녀를 보며 걱정과 염려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우리 손자녀 대에는 우리나라가 더 안전해지고 행복지수가 지금보다 더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걱정이에요. 우리 사회가 전보다 물질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지만 정신적인 면과 사회안전망 면에서 허점이 너무 많아요. 세금을 좀 더 내더라도 안정되고 편안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남북 문제도 어서 속히 풀리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사회안전망이 구축되었으면 합니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경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사학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한성대학교 총장
제9회 독립기념관 학술상 수상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현)한성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
현)도산학회 회장
현)‘3·1혁명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
서울노인복지센터는 6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 있는 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2014 노인 일자리’ 발대식을 개최했다.
이번 발대식은 주관하는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 희유스님, 김영종 종로구청장을 비롯하여 미술관해설사, 탑골독립영화관 순회상영단 등 총 15개의 노인일자리 사업단에 참여하는 306명의 어르신이 한자리에 모여 활동선서식과 일자리 사업 취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월 20일부터 서울에 거주하는 만 60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306명이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작년보다 100명 가량 늘어난 수치다. 일자리도 9개 사업단에서 15개 사업단으로 증가했다.
특히 전문성을 갖는 노인이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자신의 경륜과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세대 간 문화전승의 효과를 살리는 교육형으로는 미술관 해설사(도슨트), 종로문화해설사, 사서 및 독서도우미, 환경지킴이, 탑골독립영화관 순회상영단, 라디오실버스타, 탑골훈장과 동년배 상담가인 민생상담가, 성인권상담가, 자살예방상담가, 노인취업도우미, 또래지킴이로 12개 사업단의 180명의 어르신이 참여한다.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인 희유 스님은 “센터는 지난 2004년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을 통해 어르신의 능력과 경제적 활동을 접목할 수 있는 일자리 창출에 노력하고 있다”며 “어르신의 경제적인 욕구와 자기 발전적인 욕구를 결합하여 더욱 활기차고 안정적이고 노후생활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노인복지센터는 2001년 개관 이후 △2002년 전국 최초 노인취업박람회 개최 △2004년 첫 고령자 인재양성과 일자리창출을 위한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 △2006년 대학생 사회복지프로그램 공모전 개최 △2008년 서울노인영화제를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