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은 쪽팔림의 연속이에요. 서로가 서로한테 쪽팔려요. 쪽팔려도 가장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거라는 그러한 믿음 하에 쪽팔림을 그냥 겪고, 또 그걸 겪으면서 감당해나가는 겁니다.”
6월 6일 방송된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MBC)에서 5년째 문자로만 소통하고 신체적·정서적 접촉이 전혀 없는 부부에게 내린 솔루션 말미에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쪽팔림의 역사
실제로 부부의 삶이란,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부모가 자식한테, 자식이 부모한테 끊임없이 쪽팔려 하는 시트콤 같습니다. 품위와 체면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비단 결혼 생활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비슷합니다. 불편한 진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비난하는 것도 아닌데 본인은 굴욕감을 심하게 느낍니다. 관계도 어색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그랬듯이요. 내 치부와 허물을 붙잡고 죽음으로 몰고 가기보다 때로는 당당하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쪽팔릴 준비 되셨습니까? 마음 미장공 열 번째 이야기는 쪽팔릴 줄 아는 용기를 북돋우면서 시작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
어느 아름다운 저녁, 행복에 겨워 오페라에 심취해 있던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바코프. 갑자기 재채기를 한 그는 앞자리에 앉은 상급 관리 브리잘로프 장군의 민머리와 목덜미에 침이 튀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다음 날 접견실까지 찾아가 또 사과를 합니다. 일방적이고 계속되는 사과에 병적으로 집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당사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일 아니니 괜찮다고 지나간 것을 기어이 들쑤시고 후벼 파서 상대와 자신을 괴롭히는 어리석은 짓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해왔을까요. 섣부른 판단과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일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사랑은 쪽팔림의 결정판
지난 추석 연휴에 케이블방송에서 영화 ‘접속’(1997)을 봤습니다. 아직 개인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PC통신 대화방의 상대인 줄 모르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 앉아 있던 두 주인공(한석규, 전도연 분) 사이에 한 청년이 손잡이를 잡고 섭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왜소한 체격의 그 남자는 물건을 팔 거라는 승객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말이 유독 서툴고 어눌하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말버릇을 고쳐보려 용기를 낸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쪽팔림을 기꺼이 감수하게 하는 마법이 아닐까요.
쪽팔려서 좋은 것들
버스에 안내원이 있던 시절 “여기서 내려요!” 이 말을 못 해서 내려야 할 곳을 몇 정거장 지나쳤던 적이 있습니까? 기어드는 목소리로 부들부들 떨지라도 쪽팔림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첫 발표를 했던 순간을 떠올려봅시다. 윗사람한테 신랄한 평가를 받았을 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려면 역시 쪽팔림을 이겨내야 합니다. 쪽팔림을 장벽으로 여겨서 주저앉을지, 징검다리로 생각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자문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랑도 일도 일단 저질러볼까요. 이럴 때 ‘아니면 말고’와 ‘싫으면 말고’ 정신이 도움이 됩니다.
쪽팔릴 줄 아는 것도 용기입니다
‘아니 젊을 때야 뭔 짓을 못 해.’ ‘내가 그 나이만 됐어도 그 정도는 껌이지.’ 이런 말로 주저하고 쭈뼛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쪽팔릴 줄 아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다면 쪽팔리는 상황은 어떤 때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는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할 때, 무슨 말을 꺼내려 할 때, 그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쪽팔릴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를 걸림돌로 의식하지 않고 일을 도모하는 당신은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모양 빠지지 않고 근사하게 쪽팔리는 비법은 없을까요?
근사하게 쪽팔리는 방법
•내가 실수한 것은 화끈하게 인정합니다.
•약속에 늦었을 때는 반드시 사과합니다.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묻습니다.
•사랑과 감사 표현도, 친구랑 만남도 내가 먼저 제안합니다.
•조언이나 의견을 먼저 구합니다.
•‘그 나이에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고, 질문하고, 고백하고, 고맙다 하고, 제안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해야 할 때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야말로 훨씬 쪽팔리고, 면이 안 서는 짓입니다. 나이를 빌미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말리거나 막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뭘 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존심 살리고 자존감도 높이는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을 해서 확인해도 됩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내비게이션대로 운전해도 헤매고 있을 때 아직도 주유소에서나 주변 사람한테 묻지 않습니까? 예에 통달한 공자도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고 합니다. 풍습과 관례를 최대한 존중하면서요. 그러니 묻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서로 체면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근자감’에 희망을 준 사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줄인 말이 ‘근자감’입니다. 지난 50년 가까이 수학계 난제로 남아 있던 리드 추측(Read's Conjecture)을 대수기하학의 한 갈래인 호지(Hodge) 이론을 통해 증명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꼽히는 필즈상을 거머쥔 허준이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학교 후배 학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한 말입니다. 그동안은 과대망상이다, 허세다, 만용이다 하며 비웃음을 사거나 조롱감이 되었던 신조어가 바로 근자감입니다. 그런데 근거 있는 자신감도 줄이면 근자감이 될 텐데 왜 줄여서 부르지 않는지, 허 교수 얘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적이나 입상 경력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불운한 일이 겹쳐서 힘든 과정을 만나고 그 근거를 잃게 될 경우 쉽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힘든 과정에 놓일 때도 유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변경합니다. 근자감은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근자감이야말로 쪽팔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바탕이자 에너지가 아닐까요. 이것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더라도 나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간절해집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얼굴이 예뻐서, 내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고 방황을 해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부모 마음도 근자감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쪽팔림을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틈과 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
부서진 조각을 모은다 해도 온전히 합칠 순 없다
(중략)
완벽한 것은 없다
어디에든 틈은 있기 마련
빛은 그곳으로 들어오리니
우리에게 ‘I’m your man’이란 노래로 알려진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입니다. 그가 1992년 발표한 ‘송가’(Anthem)의 이 노랫말은 임상심리학 박사이자 불교 명상 지도자로 유명한 잭 콘필드(Jack Kornfield)의 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은 허술하게 쌓은 것 같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커다란 현무암 사이에 생긴 틈이 바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돌 사이 빈틈이 담장을 살리고 금이 간 틈새로 빛이 들어오듯, 사람 사이의 틈과 거리가 관계를 숨 쉬게 하고 살리게 하는 묘책이 아닐까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있는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합니다. 그 구슬을 ‘영혼의 구슬’(Soul Bead)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하네요.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최고급 카펫을 짤 때 아주 작은 흠 하나를 굳이 짜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영혼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으며 불완전한 존재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빈틈이나 흠결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지 맙시다.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완벽한 잣대를 내려놓은 채 ‘근자감’을 등에 업고 ‘쪽팔릴 줄 아는 용기’로 무장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저와 당신이 지닌 틈과 흠에서 아름다운 빛이 나올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서울시가 중장년 및 어르신 등 대상자 맞춤형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시는 급격한 사회변화로 고독사와 우울증 환자가 증가하는 상황 속 치유의 필요성이 커졌다며, 치유농업을 통해 시민들의 정신적 치유와 건강 회복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방침이다.
‘치유농업’이란 농업자원을 활용해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회복하는 모든 농업 활동을 이른다. 지난해 3월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시는 치유농업의 안정적 정착과 확산을 위해 전국 최초 치유농업 거점인 ‘서울치유농업센터’를 개소하고, 치유대상 특성을 반영한 치유농장을 서울 전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강동구에 6500㎡ 규모로 조성되는 센터는 도시환경에 적용 가능한 치유농장 모델을 공유한다. 센터에 방문하면 도심에 조성하기 적합한 농장형, 시설형, 미래농업형 치유농장을 체험하고 상담 받을 수 있다. ‘시설형 치유농장’의 경우 사회복지시설이나 병원 등의 옥상과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는 형태로, 어르신 등 신체적·정신적 약자도 각종 식물을 키우면 정서적 치유가 가능하다.
아울러 치유농업프로그램 운영 및 은퇴자 등을 위한 관련 일자리 창출 등 종합적인 지원을 펼친다. 특히 대상자별로 구성된 치유농업프로그램은 어르신,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자존감과 책임감을 길러주고, 아이들에겐 가족과 친구에 대한 유대감과 안정감을 높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시는 현재 시내 8곳에 치유농장을 보급, 시범 운영 중이다. 8월부터 11월까지 운영하며, 주 1회 이상 전문가가 직접 농장을 찾아 시미대상 치유농업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심리 진단 통 통해 치유 과정을 살핀다. 은평구 소재의 ‘S&Y 도농나눔공동체’의 경의 텃밭 채소 기르기와 농장 산책, 정원 명상 등을 통해 중장년 우울감 완화를 돕는다.
치유농업 활성화를 위한 일자리 창출도 힘쓴다. 시 농업기술센터는 2021년 전국 최초 치유농업사양성기관으로 선정된 데 이어 같은 해 34명, 올해 40명 수료생을 배출했고 이 중 16명은 현재 치유농업 프로그램 강사로 활동 중이다. 시는 농업분야 종사자, 은퇴를 앞둔 중장년 등 다양한 시민들이 함께하는 치유농장의 확대 및 일자리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조상태 서울시농업기술센터 소장은 “최근 농업을 통한 몸과 마음의 치유 효과가 국내외 연구에서 검증되고 있다. 사회적약자는 물론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는 시민들에게 활력을 주고 정서적 회복을 도울 수 있도록 치유농업 사업을 적극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O₂, 산소, 원자 번호 8, 화학 산소족에 속하는 비금속 원소, 공기의 주성분이면서 맛과 빛깔과 냄새가 없는 물질. 호흡과 동식물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기체라는 사전적 의미의 산소. 강원도 홍천에 산소길이 있다. O₂길. 마스크 때문에 마음껏 숨 쉴 수 없어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수타사 산소길이 떠올랐다.‘그래 이번에는 산소길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홍천의 수타사 산소길은 1~4코스로 총 4개 코스가 있다. 수타사 산소길을 걷는다고 하면 대부분 1코스를 말하는데, 수타사 주차장에 주차하면서부터 걷기가 시작된다. 인근에 오토캠핑장까지 있어 주말 여행지로도 손색없다. 공작산 생태숲 산소길 코스는 3.8km로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수타사-공작산 생태숲-귀소(출렁다리)-용담- 공작산 생태숲 교육관’이다. 걷기에 따라 1~2시간 정도 걸리지만, 수타사 경내를 천천히 돌아보고 숲길을 걷다가 쉬다가 느긋하게 숲멍도 한다면 3시간도 금방이다. 참 여유롭게 돌아보는 산소길 트레킹이다.
눈을 들어보니 해발 887m의 공작산이 날개를 펼친 듯 에워쌌다. 깊은 골짜기 위로 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은 모습이 공작새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공작산은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하나다. 그 산 아래 수타사 가는 길이 반기듯 쭉 뻗어 있다. 산소길 초입에 천년 고찰 수타사의 품격을 거친다는 것, 시작부터 차분히 숨 고르기를 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우적산 일월사(日月寺)였다가 공작산으로 옮기면서 수타사(水墮寺)로, 다시 새 한자인 수타사(壽陀寺)로 바뀌었다. 수타사 옆의 용담에 매년 승려들이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잦아 목숨 ‘수’(壽)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스러움이 물씬 전해지는 절의 분위기가 꾸밈없이 단아하다. 옛 모습을 품고 있는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에서도 위엄을 보여준다. 한나절 푹 퍼질러 앉아 목탁 소리 들으며 쉬면 좋을 깊은 산속 절이다.
수타사를 나오면 바로 공작산 생태숲이다. 생태숲 자리는 예전 수타사에서 경작하던 논이었는데, 이제는 동식물의 서식 환경을 보호하고 다양한 생태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태연못 탐방로로 온통 연잎으로 뒤덮인 연밭이다. 그 사이로 놓인 부드러운 곡선의 데크 위를 걷는 이들의 풍경이 그림 같다.
산소길은 대부분 흙길이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깊은 숲속이다. 오래된 홍우당 부도가 숲길 옆으로 자연스럽게 나란하다. 부도는 부처나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이다. 그 길을 지나면 정말 빽빽한 숲속이다. 폭도 좁아서 나란히 걷기보다는 홀로 걷기 좋으니 숲을 자연스럽게 즐기면 된다. 막상 숲에 들어서면 마치 밀림에 온 듯 오래된 숲속 풍경에 놀란다. 얼기설기 나무줄기가 양쪽으로 서로 얽혀 고개를 숙여 지나가야 하고, 빼곡한 나무 사이로 하늘이 빼꼼히 보이는 것 또한 깊은 산중에 파묻혔음이 느껴진다. 걷기 좋은 완만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새와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자연 속에 내가 있다. 짙은 풀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 비로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초록이 가장 초록다운 숲이다. 싱그러움이 가슴속 가득 찬다. 역시 산소길이다.
수타사의 산소길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홍천 읍내로 장 보러 가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다가 쉬어 가라고 쉼터가 있지만 힘들 것 없으니 그냥 계속 천천히 걷게 된다. 신봉마을을 반환점 삼아 돌며 시골 마을의 평온함도 얻는다. 수타사 계곡이 흐르는 출렁다리 소 구간에서 물소리 들으며 멍하니 쉬면 된다. ‘’은 소나 말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여물통인 구유를 뜻하는 강원도 방언이다. 계곡이 마치 구유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 불린다.
나무가 바람에 사사삭 흔들리는 나즈막한 소리,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숲 내음, 흙 내음, 초록의 색감만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다. 한참을 걸었어도 가뿐하다. 후텁지근하고 끈적이던 더위도 잊었다. 숲이 깊어 햇빛도 저만치에 있다. 산소길에선 다만 마음껏 숨 쉬고 청량한 산속의 운치를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초록을 실컷 눈에 담았다. 천천히 한숨 돌리며 용담에 다다르니 계곡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줄을 이어놓았다. 바위와 물의 깊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용이 승천했다는 용담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메워져 평범한 소(沼)의 모습이다.
운동화를 툭툭 털며 산소길을 내려가다 옆길로 고개를 돌려보니 산림치유쉼터의 숲속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그야말로 신선놀음 중이시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 숲속에 쉼터와 명상 공간이 마련되어 시원하고 건강하게 여름을 나는 모습이다. 어딜 보아도 산소 뿜뿜. 보는 사람 마음도 시원하다.
홍천의 자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홍천을 다녀보면 무궁화 꽃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마을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무궁화공원, 무궁화테마파크, 무궁화수목원, 체험관 등 온통 무궁화 꽃 도시다. 이는 홍천군이 우리나라 무궁화 메카로 선정되어 무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자 조성됐기 때문이다. 무궁화 명소인 홍천의 무궁화수목원을 찾았을 때는 꽃이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무궁화수목원은 국내 최초로 무궁화를 테마로 조성한 공립수목원으로, 독립운동가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각 테마별로 남궁억 광장, 무궁화 조형물, 품종원, 미로원과 16개의 주재원을 비롯한 숲속 산책로, 숲속 도서관 등 즐길거리가 마련돼 있다. 특히 무궁화가 한창 피어나는 8월에는 ‘나라꽃 무궁화 홍천 축제’가 열려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수목원 입구에 길게 이어지는 280m 산책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궁화(Rose of Sharon)의 집이 연출하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Rose of Sharon. 서양 사람들은 무궁화를 이렇게 부른다. 샤론의 장미는 성스럽고 선택받은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라꽃이 우리 민족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의 집을 둘러싼 푸른 들판엔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무궁화와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난 들판의 풍경은 홍천의 핫플레이스 예약이다. 현재 야간 경관 조명으로 은하수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연출되어, 데이트 커플들이 찾아오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는 곳이다.
홍총떡과 올챙이국수
홍천의 맛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저렴하면서 맛도 좋은 서민 음식 홍천메밀총떡(홍총떡)은 시장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홍천의 메밀로 만든 반죽을 얇게 부쳐서 준비한 소를 넣고 드르르 만 홍총떡은 홍천의 대표 향토음식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김치나 무채 양념의 순한맛과 매운맛, 강원도 제철 나물이나 시래기를 넣은 나물맛으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홍천중앙시장에 가면 총대를 닮아 총떡이라는 홍총떡과 메밀전, 올챙이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또 한 군데, 전직 청와대 셰프가 운영한다는 음식점에서 명태회막국수와 낙지만두도 먹어볼 만하다.
홍천 여행
수타사 산소길 : 강원도 홍천군 영귀미면 덕치리 5-3
교통 : 수도권 기준 자동차로 약 두 시간. 대중교통-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홍천종합버스터미널까지 약 한 시간 반 소요
홍총떡 : 홍천중앙시장 및 홍천 각 관광단지에서 판매. 홍천 오일장 1, 6일. 장날 아니어도 홍총떡은 영업 중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강화도 바다가 보인다. 썰물에 쓸린 오후의 싯누런 바다가 개펄 너머에서 굼실거린다. 쏟아지는 가랑비가 따가운 양 잔등을 실룩이며 수평선엔 오선지에 매달린 음표처럼 즐거운, 점점이 흩어진 작은 섬들. 섬에 왔으니 해안도로를 달려 해변 풍경부터 눈길에 쓸어 담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목적지는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해든뮤지움이지만 한동안 해변에서 해찰한다. 바다도 보고, 미술관도 보고. 흥취가 겹일 테니 애초 그러려 했다. 다시 말하자면 해든뮤지움은 바다를 덤으로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미술관이다.
해든뮤지움은 야트막한 야산 자락에 있다. 숲 가장자리에 있다. 그래 나무들이 내뿜는 초록이 사위에서 범람한다. 푸르기는 미술관도 마찬가지다. 너른 야외 정원 역시 초록을 흩뿌리고 있으니. 미술관 건물은 외견상 주역이 아니다. 절반 이상 지하로 스며든 건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상의 풍경은 다소 휑한 맛을 풍긴다. 그래서 좀 고즈넉하나, 사실은 군더더기 없이 시원해 첫눈에 수려하다.
이와 같은 풍광은 그저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면밀한 구상과 지향을 오롯이 구현한 결과물이니까. 설계 콘셉트 자체가 모든 구조물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스러운 지형을 뭉개거나 변형하는 걸 최대한 자제했다. 해든뮤지움을 보며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지중미술관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다. 지하에 미술관 건물을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지상으로 불쑥 솟은 건축을 할 경우 주변 풍경을 망칠 수밖에 없다. 과격한 인위로는 자연을 제압하는 결례를 범하기 마련이다. 해든뮤지움은 차라리 겸손하게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군사용 벙커도 아닌 것이, 은밀한 마약 제조 공장도 아닌 것이 마냥 땅속에 폭 파묻힌다면 어떻게 흥미를 주겠는가? 이 미술관은 지형을 기술적으로 활용해 통유리창을 벽면 일부에 설치함으로써 숨통을 틔웠다. 유리창을 통해 빛을 끌어들여 전시장에 공급한다. 투명한 유리벽으로 외부의 숲 경관을 끌어들인다. 모르긴 몰라도 난이도 높은 건축 기법이 적용되었을 테다. 개관한 해인 2013년, 이 미술관은 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한 ‘올해의 건축 베스트 7’에 뽑혔다. 설계자는 건축가 배대용. 자연환경을 고려해달라는 설립자의 주문을 고스란히 반영한 설계로 예술품에 맞먹을 미술관을 귀결한 그의 변은 이렇다. “미술관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자연 파괴 없이 주변 환경에 순응하는 건물 설계에 중점을 두었다.”
경사로를 따라 지하 1층에 있는 미술관 입구로 내려간다. 출입문 앞에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가 있다. ‘H’, ‘O’, ‘P’, ‘E’ 4개의 알파벳을 사각형 격자 모양으로 구성한 설치 작품이다. 딱히 뜯어볼 것도 없이 밋밋해 보인다. 단순한 알파벳 조형이다. 그나마 특징이 있다면 ‘O’자를 살짝 기울여 따분함을 다소 누그러뜨렸다는 점일 뿐이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이와 유사한 작품 ‘LOVE’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앤디 워홀과 함께 미국 팝아트의 거장으로 부상했다.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걸 하라! 평범한 걸 비틀어 비범해 보이게 하라! 이건 팝아트의 본령이다. 인디애나는 누구나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으로,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았던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영예가 온전하지는 못했다. 상업주의 작가라는 꼬리표가 세상 떠날 때까지 붙어 다녔으니까.
거울로 산야를 끌어들여
6개로 이루어진 전시장 전관에서는 ‘메타·화양연화전 :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김창겸, 이이남, 장 샤오타오 등 6인의 미디어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한 기획전이다. 이 시대 한국의 미디어 아트가 매우 전위적인 행진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전시회이기도. 미술관 중정엔 베르나르 브네의 ‘두 개의 불확실한 선’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9년 전 개관한 이래 해든뮤지움은 일반 관람객은 물론 미술 전문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기획전을 다수 펼쳤다. 개관전인 ‘현대미술의 거장’전은 설립자 박춘순 관장의 컬렉션을 내건 전시회였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돼 호응을 끌어냈다. 2018년에 치른 ‘샤갈’전 역시 대형 전시회였다. 몽환적인 색채와 비현실적 공간 구성으로 샤갈의 진품 다수를 전시해 커다란 반향을 야기했다.
이제 미술관을 나와 정원을 거닌다. 탁 트인 정원이라 저만치의 숲도, 저 위의 하늘도, 구름도, 새소리도 사뭇 가깝게 다가온다. 이 충만한 자연은 모든 진리의 압축 파일이다. 상처투성이 마음을, 초라한 생각을 어루만져주는 자비의 손길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치유의 정원? 이름이 붙어 있다. ‘미러가든’이다. 이는 해든뮤지움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다. 미감을 살려 배치한 초대형 거울 여러 점이 단박에 관람객의 발길을 붙들어 맨다. 여느 미술관에서 볼 수 없는 이색이다. ‘거울 셀카’의 촬영 명소다.
맑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자 누군가 거울 속에서 멈칫거린다. 바로 나 자신이다. 별것이라 생각했던 내가 별것 아닌 몰골로 거울 속에 있다. 나의 이미지를 객관화하고, 심지어 속내까지 투명하게 까발리는 거울의 불심검문에 켕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성찰 능력은 거울이 만들어지면서 한결 발육했을지도 모른다. 해든뮤지움은 거울 벽이 끌어들이는 자연 풍경을 보라고, 자연의 일부인 나를 보라고 거울을 조성했지만, 사람들은 대개 반짝이는 거울 앞에서 사진 찍기를 즐긴다. 행복은 그런 여흥의 언저리에 감도는 법이다.
거울 벽 앞에는 브론즈 조각 한 점이 놓여 있다. 머리와 두 팔이 잘려나간 상반신을 조형한 데다, 비스듬히 기운 품새라 처연해 보이지만 웅장한 맛을 풍긴다. 빨아들이듯 눈길을 당기는 작품이다.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의 ‘이카루스의 토르소’다.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으나 밀랍이 녹아내려 지상으로 추락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이다. 해서 ‘이카루스의 날개’는 흔히 광활한 자유를 갈구하지만 결국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빗댄 은유로 쓰인다.
미토라이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작업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삶의 드라마를 친숙한 형상으로 빚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카루스의 토르소’는 비루한 삶에 휘둘리면서도 날아보고 싶은 열망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재미있는 건, 등짝에 조형해 붙인 메두사의 머리 위에 이카루스의 날개가 자그맣게 달려 있다는 점. 메두사로부터 이렇게 페가수스가 태어난다. 페가수스는 이제 곧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를 것 같고. 숨은 그림처럼 실린 드라마가 한둘이 아니다. 해든뮤지움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조심스레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연 긴장했다. 간호사가 진료 기록부를 가져다놓을 때까지도 설마 했다. 차트에 쓰인 이름을 보고 동명이인이려니 하면서도 흠칫했고, 생년월일을 흘끗 보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목청을 가다듬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겠지, 설마. 그때가 언젠데….’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심 피어오르는 일말의 기대감은 또 뭔가.
내 음성을 듣고도 잠시 머뭇거리는 듯한 문밖 환자의 기척. 주춤주춤 문고리를 돌리는 손길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할수록 긴장감은 더했다. 빼꼼 문이 열리며 고개를 반쯤 숙이고 들어서는 50대 초반의 여성, 어깨 길이 생머리에 무릎 길이 파스텔 톤의 민트색 원피스 아래 드러난 매끈한 종아리와 잘 정돈된 맑은 피부, 이지적인 분위기의 이목구비로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데다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 짧은 순간 환자의 외모와 표정이며 옷차림까지 스캔할 정도면 환자에 대해, 특별히 호감 가는 여성 환자에 대해 습관적으로 호기심을 갖는 불순한 의사라는 오해를 받을 법하다.
7년 만에 나타난 그녀
오해를 받든 이해를 받든 아, 어찌 잊으랴 그녀를! 진료 기록부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실체를 드러냈다.
“앉으시지요. 오랜만입니다.”
“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지요?”
무덤덤함을 가장하려고 애쓸수록 이미 일기 시작한 가슴속의 잔물결은 파고를 높여가고 있었다. 긴장을 감추려다 보니 머리가 다 어찔어찔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오늘 또 이렇게 진료실을 찾아왔단 말인가. 정신과 의사로서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환자 자격으로 나를 만나러 오는 그 누구에게든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지금 그녀는 그런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일 테고.
“어떤 불편함 때문에 오셨는지요?”
평정심을 찾으며 평소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어쨌거나 환자로서 날 만나러 온 것이니.
“선생님, 저 이혼했어요.”
미리 연습한 듯 나직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 한마디에 가슴속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온몸으로 번져가려는데, 이어지는 그녀의 눈물 앞에 나의 방어벽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책상 한편에 놓여 있던 사각 티슈 상자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었지만, 그녀는 티슈를 뽑는 대신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찍어내듯이 눈가를 조심스레 눌러 닦았다.
7년 전 내 진료실을 떠나갔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3년을 나와 함께하는 동안 남편의 유흥업소 출입을 막을 뾰족한 방안도, 그녀의 뻥 뚫린 가슴에 적절한 치유도 해주지 못했던 무능한 내 앞에.
의사와 환자, 사랑에 빠지다
10년 전 나는 환자와 사랑에 빠졌다. 나와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지금 눈앞의 그녀와. 남편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불면증과 불안 증세로 내원했던 당시 마흔 살의 그녀. 첫 대면부터 한 마리 작은 새처럼 애처롭고 가련해 보였다. 의사 대 환자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보호해주고 싶었다. 의사로서 환자를 보호해주고 싶었다면 무슨 문제일까만,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품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거미줄을 거두듯 힘닿는 데까지 그녀의 불행을 거둬주고 싶었다.
사랑스러웠다. 20년 내 결혼생활의 권태와 무덤덤함을 일시에 씻어줄 것 같은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성적 매력은 있었지만 남녀 관계로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내면에 장착된 직업윤리라는 엄격한 경계경보가 늘 깜빡이고 있었기에.
결혼한 지 10년 이상 된 중년 부부 갈등이야 특별할 것도 없지 않나. 당사자들이야 그보다 더한 위기가 없을 것같이 굴지만, 들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란 건 경험상 이골나게 겪었기에 그녀라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단아한 외모에 끌렸다면 의사로서 자격 미달이니 딱 거기까지인 걸로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를 다잡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 함께 살까요?
의사 이전에 나도 남자니 여성 환자에게 호감 간 일이 실상 처음도 아닌 데다, 첫인상에 가슴이 다소 설렌다고 해도 상담이 오가다 보면 결국 인간적 호의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정신과 의사 생활 20년 짬밥이 말해주지 않았던가. 다른 과와 달리 정신과는 내밀한 사생활과 내면적 속살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에 환자와의 라포 형성 과정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하지만 곧 정상 궤도로 진입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와는 그러지 못했냐고? 선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냐고? 고백하자면 그렇다. 둘이 어디까지 갔냐면, 각자 배우자와 이혼하고 함께 살자고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러자고 했고 그녀는 마다했다. 가정을 깨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안달이 나서 함께 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즈음 우린 면담을 빌미로 진료실에서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맹세코 밖에서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3년 동안 진료실에서 마주한 것이 전부였고, 따로 만나 밥은 물론 차 한잔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직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면담 시간 50분 동안만 우리는 서로를 정신적으로 탐했다.
나와 동갑인 그녀의 남편은 금융업계 종사자로 업무적으로는 유능했지만 결혼 초부터 끊임없이 유흥업소를 드나들면서 아내의 신경을 긁었다. 처음 몇 번은 셔츠 깃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변명하고 건성으로 미안해하거나 시늉으로 용서를 빌곤 하더니, 나중에는 그조차 무감각해져서 아내가 추궁할 때면 남자가 바깥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되레 짜증을 내거나 언성을 높이며 적반하장으로 굴었다.
“이혼을 하셨다고요…?”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의외의 감정이 담긴 내 말꼬리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 그녀. 손에 쥔 손수건 끝단을 하릴없이 돌돌 말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다.
“이혼은 안 하겠다고 하더니 그간 심경이 변하셨나 봅니다. 그래, 언제?”
“1년 전에요. 우울증을 앓던 아들이 3년 전 자살을 했어요. 그래서 이혼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어요. 결혼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애썼지만 원래도 금이 가 있던 부부 관계가 아이를 잃고 좋아질 리가 없잖아요. 좁히려고 애쓸수록 사이가 더 벌어지면서 결국 파경을 맞았어요. 남편은 아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에 대해 그간 가정을 등한시했던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늦게라도 부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비록 헤어졌어도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 따위는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제가 의미를 못 찾겠더라고요. 아들을 잃은 마당에 가뜩이나 정 없던 부부가 새삼 노력해서 같이 살 가치가 있을까 싶었어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후 소식 한 자 없더니 지난 7년간 아들을 잃고,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앉은 그녀.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죽을 것 같은 방황 다시 시작되고
성적으로 문란한 남편 때문에 시작된 치료였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쪽에서 곪아 불거졌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불화를 보고 자라온 외아들이 아동기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실상 그녀의 정신과 내원 동기도 아들로 인해서였다. 물론 처음부터 아들 이야기를 꺼냈던 건 아니다. 이유는 내가 아들을 보자고 할까봐 겁이 나서였다고 했다. 점차 내게 연애 감정을 느끼면서 모종의 수치심으로 아들 상태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던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은 그녀의 오판이자 어리석음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소아정신과로 보내졌을 테니 내게 치부가 드러날 염려 따위는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랬는데 지금 그 아들이 죽었다지 않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치료를 받게 했더라면 그렇게 어이없이 아들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닥쳐올 크나큰 불행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채 별 가망도 없는 남편 바람기 잡기에 대해서만 계속 떠들어대고 있었으니, 이 무슨 낭패인가 말이다.
“그랬군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그럼 요즘 혼자 지내나요?”
“이혼 후 친정에 들어가 지냈는데 친정어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점입가경이라더니, 불행이 불행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로 위로가 되랴. 내 기억으로 그녀는 외동딸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셨으니 이제 그녀가 의지할 피붙이는 없다는 뜻이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뭐죠?”
“그냥요, 그냥 선생님이 보고 싶었어요.”
얼마나 듣고 싶고 기다렸던 말인가. 7년 전 일방적으로 그녀 쪽에서 발길을 끊은 후 나는 적잖이 방황했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로 인해 아내와는 더 권태롭고 더 지루해져서 그 참에 아내와 헤어져버릴 생각까지 했다. 그랬던 나를 가까스로 추스른 게 불과 2, 3년 전. 그런데 그녀가 내 앞에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났으니. 아, 나의 죽을 것 같은 방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층간소음을 대하는 자세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마음을 좀 바꿔보았거든요. 윗집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에 짜증만 낼 게 아니라 차라리 그 시간에 도서관 가서 시원한 바람 쐬며 밀린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퇴근하고 나서 집에서 좀 쉴라치면 매번 위층 아이들 콩콩콩 쿵쿵쿵 뛰어다니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는 청취자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분노가 폭발해 인터폰을 누르고 쳐들어갈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답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놨던 독서 목록도 챙기고 이참에 은퇴 이후 설계도 할 겸 주택관리사와 노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마음을 탁 달리 먹었더니 퇴근하는 발걸음이 전처럼 무겁지 않고 한결 가벼워졌다고 고백합니다.
화살의 방향과 성격 유형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나 고통을 당할 때 이웃집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눈앞에 닥친 불행과 갈등을 오로지 자신을 탓하며 자책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살의 방향을 외부로 겨눌수록 점점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에너지가 자신을 둘러싸고 사방팔방으로 퍼집니다. 비난과 원망과 책임 전가라는 독화살을 누구에게 쏠지 그 궁리로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온통 뾰족한 가시를 두른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까요. 그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향할 때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입니다. 화살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해보면서 나는 어떤 유형인지 살펴볼까요.
‘남 탓 형’과 ‘내 탓 형’ 인간
자신에게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남 탓을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은 그 사람 탓이야’, ‘내가 마마보이가 된 것은 순전히 우리 엄마 탓이지’ 이런 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자식은 부모를 탓합니다. 탓할 사람이 없으면 친구를 탓하거나, 직장 상사를 탓하거나, 아니면 길에서 부딪혔거나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조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식, 배우자 등 가까운 사람부터 탓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경우를 ‘남 탓 형’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매사에 남 탓을 하는 사람은 정작 자기는 멀쩡합니다.
“나 걔랑 헤어졌어. 내가 찼지. 애가 좀 사이코야. 베풀 줄도 모르고. 수십 번 만나도 밥은커녕 커피 한잔을 안 사더라고, 인색하기 그지없어. 아 시원하다.”
연애가 깨졌어도 상대방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을 내립니다. 자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굳게 믿는 탓에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기분이지 남 사정이나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인간이 방어기제로 흔히 사용하는 ‘투사’(Projection)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기 외부에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매사 남 탓을 하면 불안과 죄책감에서 잠시나마 피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가 ‘내 탓 형’입니다. 어떤 일이 터질 때마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겁니다. 모든 일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는 ‘내재화’(Introjection)라는 방어기제도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화살의 방향을 떠올리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착하고 겸손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떤 사건이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자신을 꾸짖고 벌주고 심판하고 자책하고 자학하는 유형입니다. 분노나 불안을 억눌러놓아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겁’과 ‘오만’ 사이
남 탓을 하는 경우는 한마디로 비겁한 병에 걸린 분들입니다. 자기는 쏙 빼고 다른 사람을 들들 볶는 사람이니까요. 거꾸로 내 탓 형은 오만한 병에 걸린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달달 볶는 사람입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때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 되는데’, ‘거기서는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이러면서 자꾸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책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유형입니다. 두 유형 모두 부족하고 실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자신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어떤 선택이나 판단에서 책임을 자신이 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어떤 유형이 더 위험할까요?
내 탓 형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자신을 완벽하고 빈틈없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오판이 시작되고 ‘오만(傲慢) 병’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높은 기대치에 도달했던 몇몇 순간의 모습만 자기 본모습이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착각과 불행이 쌍두마차로 자신을 끌고 가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두 가지 유형 모두 상처를 입고 불행한 상황에 놓이는데, 더 심각한 것은 남 탓을 하는 것보다 내 탓을 하는 경우입니다.
남 탓도 종종 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 탓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때가 의외로 참 많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원인이 아닌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인과가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대안을 찾아 자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 문제까지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처방전처럼 헛짓거리를 하게 됩니다. 최소한 남 탓이라도 하면 삶을 놓아버리는 극단적 선택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럽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남 탓은 필수라고요. 남 탓을 열심히 해야 자신이 정신적으로 안정된다고 말입니다. 고칠 수 없는 문제에 자기 탓을 하면 자존감은 추락하고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져 불안과 우울을 달고 살 수 있으니까요.
남 탓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탓은 위험합니다. 자신을 탓하는 병에 걸리면 그 오만함이 어떻게 펼쳐지냐면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 허물에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고 다 품고 배려하는 척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으로는 무시하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운 높은 기대 수준을 타인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오만함은 위험천만한 부분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십니까?
탓탓탓 말고 타타타!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요? 이 노래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그런 거지 음음음 어 허허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후략)
‘꽃순이를 아시나요’, ‘은하철도 999’ 주제가를 불렀던 김국환이 1992년 세상에 선보인 노래, ‘타타타’. 마지막에 ‘어허허허허허!’ 웃음소리가 백미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타’는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뜻합니다.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진리라고도 하며,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이라고 합니다.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서 일평생을 살아가는 게 우리입니다. 이 세상을 ‘탓탓탓’ 하지 말고 ‘타타타’ 하면서 살아 볼까요. 편 가르고 고집과 만용을 부리며 대립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삶으로 남은 인생 아름답게 수놓아볼까요. 그럴 때 ‘탓 병’이 치유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더위와 습기 탓하지 말고 허허허 웃으며 몸도 맘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마음 미장공 여덟 번째 이야기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딸아, 되는 대로 살아. 걱정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그만하면 됐니라.” 아침 안부 전화 끝에 여든 중반을 넘긴 아버지, 툭 한마디 던지십니다.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져 휴대전화 바탕화면이 부옇게 번집니다. 우리는 가끔, 어쩌면 자주 마음이 바닥을 치고 속절없이 주눅 들 때가 있습니다. 보잘것없이 초라해진 자신에게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살아보니 별것 없다고 끌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누군가 곁에 계십니까? 이런 물음으로 마음 미장공 일곱 번째 이야기 열어봅니다.
왜 ‘추앙’ ‘추앙’ 하는 걸까요?
5월 29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화제와 열풍 속에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jtbc). 4년 남짓 공들여 이 드라마를 준비했다는 박해영 작가가 이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내세운 것이 ‘추앙’입니다. 텔레비전 뉴스 자막은 물론이고 프로야구 경기장 응원 구호에도 ‘추앙’이 등장하고, 광고 문구에서도 ‘추앙’이 빠지면 섭섭할 만큼 대세 중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추앙(推仰),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는 것을 뜻합니다. ‘새가 앞으로 날 수 있도록 손으로 밀어준다’는 추(推)와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표현한 앙(仰)자가 합쳐진 것입니다.
다른 삶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날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주 네 병씩 마시는 남자 구 씨(손석구 분). 공장일도 밭일도 없는 날은 아침부터 마신 술로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얼굴이 깨진 채 피를 흘리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띈 순간. 나도 딱 그런 상황임이 분명합니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빚까지 떠안아 신용불량자가 되기 일보 직전인 데다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일하며 폭언과 모욕을 일삼는 팀장에게 영혼마저 빼앗길 지경인 여자 염미정(김지원 분).
“날 추앙해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절벽 밑바닥으로 추락한, 텅 비어버린 자신을 ‘추앙’으로 채워달라고, 자기 밑바닥까지 보여준 남자에게 명령합니다. 그것은 아마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고 선언이며 다짐에 진배없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눈길이 갔으니까요. 원래 나와 당신은 하나니까요.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요. 인간(人間)이란 말처럼 우리는 사이에서 존재를 발견하니까요.
예전과 달라진 나를 경험하는 방법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확실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인생 종점에 도착한 것마냥 지리멸렬한 두 남녀가 그렇게 서로 ‘추앙’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법이 시작됩니다. 자책과 자학이 일상이던 자신이 어느 순간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러다가 상대방도 예뻐 보입니다.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이런 보복은 안 해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당신 톡이 들어오면 통장에 돈 꽂힌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아무리 지랄 맞은 성미도, 문자 메시지를 읽고 씹든 안 읽고 씹든 그냥 웃으며 받아들입니다. 그 사람이 내뱉는 말에 휘둘리거나 끌려다니지 않고 행간을 읽을 줄 알게 됩니다. 말 자체,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괄호 안에 숨어 있는 속뜻을 보물찾기처럼 찾아내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드라마 속 구 씨와 미정은 달라집니다. 화려한 겉모습이나 남 부러워하는 직업, 유창한 말솜씨 같은 포장지 따위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 나와 남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참사랑, 추앙이 싹트니까요.
‘추앙’ 그리고 나마스테
아인슈타인은 어느 날 TV 뉴스를 통해 인도 거리에서 두 손 모아 인사하는 맨발의 간디를 봅니다. 카스트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에게도 합장하며 절을 하던 간디. 그가 뭐라고 인사하는지 궁금해진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보내고, 간디는 이렇게 답장을 합니다.
“나는 온 우주가 거하는 당신 내면의 장소에 절합니다. 빛과 사랑, 진리와 평화, 그리고 지혜가 깃든 당신 내면의 장소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것이 ‘나마스테’의 뜻입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문안드립니다. 인도와 네팔에서 흔히 주고받는 인사말로, 만났을 때나 작별할 때도 사용합니다. 다신교인 힌두교 문화권에서는 수많은 신이 각자의 몸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상대방을 신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은 물론 상대가 숭배하는 신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 이 인사에 깔려 있습니다. 유일무이한 우주적 가치를 지닌 당신에게 온 마음으로 경배를 드린다는 뜻의 ‘나마스테’. 상대의 존재 가치에 가장 높은 존경을 나타내는 말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간디의 답장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충격에 휩싸입니다. 우주의 신비를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찾아 헤맨 답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마스테’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있습니다. “반갑습니다!”와 “고맙습니다!”가 그렇습니다. ‘반’이나 ‘고마’는 우리 고대 선조들이 신(神)을 뜻하는 인칭대명사로 썼다고 합니다. ‘당신은 반(신)과 같습니다’, ‘당신은 신과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최상의 인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반’은 ‘환하다’, ‘하늘의’라는 뜻으로 넓어져 지금까지도 우리 일상생활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품이 바를 때 우리는 ‘반듯하다’고 하고, 신의 뜻이나 약속처럼 꼭 이루어지는 것을 ‘반드시’라고 말합니다. ‘반짝반짝’, ‘반딧불’처럼 밝고 온전한 신의 속성을 표현한 말에도 ‘반’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깊고 아름다운 뜻이 우리말에 들어 있는 줄 저 역시 잘 몰랐습니다. 내 마음 밭에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릴 게 아니라 나와 상대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말씨를 심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지닌 참뜻을 새기면서 승강기에서 마주친 새로 이사 온 이웃께 먼저 인사를 건네볼까요. 반갑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 미장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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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하는 마음을 꼭 닮은 노래
내 마음속 성역에 누가 있습니까? 섣불리 충고나 조언하지 않고 원치 않는 평가나 판단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있는 그대로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 사람 인생에 개입해서 간섭하지 않고 있습니까? 원망 한 톨 없이, 미움 한 줄기 없이 그저 아낌없이 사랑만 줄 수 있다면, 나도 당신도 그 누구라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나도 살고 그 사람도 살아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이고 쌓인 증오를 딱 멈추고, 눈 뜨자마자 달려드는 내 생애 침입자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웃으며 환대할 때 진정한 사랑, 추앙이 완성되지 않을까요. 1981년 당시 라트비아 가요 콘테스트 우승곡 ‘마라가 준 인생’()에 1997년 심수봉이 직접 가사를 붙여 새롭게 부른 ‘백만 송이 장미’. ‘추앙’도 ‘나마스테’도 ‘반갑습니다’도 절묘하게 담겨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중략)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린 인연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된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두 개의 선이 서로 의지하며 맞닿은 형태의 사람 인(人)은 책과 또 다른 책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모양새다. 오병훈 식물 연구가는 전국의 명산과 절해고도를 다니며 희귀식물을 발견해 세상에 소개한다. 인간과 자연을 서로 연결하는 일이 그의 역할이다. 그는 이번 북人북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식물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여름날. 짧은 시간 함께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는 내내 풀과 꽃,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짧고 담백한 어투에서 식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도로 주변으로 즐비한 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고 참 예쁘다며 살풋 웃다가도, 관리가 소홀했던 탓에 말라버린 풀 몇 포기를 바라보곤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는다. 한국수생식물연구소 대표, 한국수생식물연구회 회장, 한국식물연구회 명예회장 등 많은 식물 관련 직함을 갖고 있다지만 이토록 식물 사랑이 지극할 줄은 몰랐다.
살아 숨 쉬는 ‘식물 돋보기’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식물과 함께 자랐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식물에 더욱 빠삭해졌다. 미세하게 다른 생김새의 잡초까지 한눈에 구별할 정도였다. 대학 전공은 서양화, 젊은 시절엔 기자로 일했다. 그러다 1984년, 식물을 향한 그의 올곧은 마음을 끄집어낼 기회가 찾아왔다. 원로 식물학자 고(故) 이창복 서울대 교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의 과학자를 소개하는 연재 기사를 위해 취재를 다니던 때였다.
“자생식물연구회에 참가해 같이 전국을 탐사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처음 간 곳은 발왕산이었습니다. 이제껏 몰랐던 식물을 직접 보면서 공부해보니 너무 재밌고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 한 달에 두 차례씩 산과 들을 누볐어요. 식물의 매력에 푹 빠졌죠. 이후에는 북방 수종을 찾으러 중국, 몽골, 러시아, 알래스카 등 해외도 다녀왔어요.”
그는 40여 년간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희귀식물을 찾아내 지켜왔다. 풀 한 포기를 위해 1박 2일간 산을 활보하다 간첩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1980년대 중반 태백산 정상에서 흰노랑무늬붓꽃을, 1993년 북한산에서 산개나리 자생지를 찾아냈다. 버들잎진달래, 노랑유홍초, 좁은잎새팟, 긴말채나무 등은 이름을 직접 붙였다. 2013년에는 기록만 있고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나비국수나무를 70여 년 만에 세상에 알렸다.
나비국수나무는 이창복 박사가 1926년 수락산에서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으나, 1939년 이후에는 자생지에서 사라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울대학교에 보관했던 표본마저 한국전쟁 와중에 분실됐다. “1990년대 초 산림청에서 희귀·멸종위기 식물 도록을 펴낼 때도 이창복 박사가 갖고 있던 잎사귀 3장의 사진만 겨우 수록했을 만큼 자료가 부족했어요. 처음엔 한국에 없다고 생각했죠. 전국을 누비다 결국 치악산에서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나비국수나무는 기존의 국수나무와는 달리 잎 끝이 동그랗고 가로가 세로보다 더 넓거나 같아요. 좌우 대칭인 잎의 모양이 날개를 펼친 나비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한 장의 필요
희귀식물은 자생지에 다시 옮겨 심기 위해 종자를 발아시키거나 삽목(가지, 뿌리, 잎 등의 일부를 잘라 땅에 꽂은 후 뿌리를 내리게 하는 방법)으로 번식 작업을 한다. 서식지가 극히 제한된 경우가 많아 특별한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다시 멸종위기에 처할 수 있어서다.
환경 복원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서식지가 훼손되거나 식물을 무분별하게 채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송추 사패산 터널 공사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자생 산개나리를 생각하면 여전히 안타깝다. 해마다 우수, 경칩이면 몸에 좋다며 찾는 사람들에 의해 수난을 당하는 고로쇠나무는 또 어떻고 말이다.
“식물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원과 먹을거리가 되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약을 선물해줘요. 필요 없는 풀은 하나도 없습니다. 잡초도 작물을 가꾸는 인간의 입장에서나 해롭다고 여길 뿐, 사실 모든 식물은 지구에서 매우 생산적인 존재예요. 육상에서는 나무가, 물에서는 수초가 산소를 내뿜고 동물을 호흡할 수 있게 해요. 인간이 아닌 식물이 생산자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식물에 의존해 삶을 영위해나갈 수밖에 없지요. 아름다운 자연이 빠른 속도로 눈앞에서 허물어져갈 때 허망함을 느낍니다.”
담쟁이와 같은 마음으로
식물은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서 때로는 경쟁하고, 서로 도우며 지낸다. 이는 어쩌면 우리 삶과 닮아 중요한 교훈을 주기도 한다. 그는 사색거리를 던져주는 많은 식물 중 담쟁이와 새삼을 예로 들었다. 담쟁이는 절벽이나 돌담, 옆의 거목에게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에 초라한 기생식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나무의 진을 빨아먹는다는 오해도 받는다. 하지만 담쟁이는 햇빛을 가릴 만큼 위로 자라지는 않아 의지한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싸 안은 이파리로 나무 기둥의 습도를 유지해줘 도움을 준다.
그러나 새삼은 다르다. 잎도 뿌리도 없어 남을 위해서는 물론 스스로를 위해 단 한 방울의 양분조차 만들지 못한다. 땅에서 자라면서 가느다란 줄기를 이리저리 휘저어 양분을 빼앗을 만한 기주식물에 달라붙은 뒤 흡혈귀처럼 수액을 빤다. 그러다 스스로 뿌리 쪽 줄기를 자른 후에는 또 다른 나무로 옮아가며 주위의 식물까지 죽인다.
“담쟁이는 제 분수를 알고 은혜를 갚으려 는 태도를 보입니다. 다른 존재와 사이좋게 공생하는 셈이죠. 반면 새삼은 사람으로 따지면 얌체 같은 족속이라 말할 수도 있겠네요. 자신의 가엾은 과거를 숨기고 거드름을 피우며, 타인의 몫을 빼앗는 이와 다를 바 없어요. 담쟁이와 새삼의 모습을 보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새삼도 열매를 피우고 약재로 쓰이니 너무 미워하진 말자고요!”
‘자연’스러운 사고의 힘을 기르는 책
by 오병훈
식물 연구를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학문의 기본 바탕은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과 철학을 알아야 사고하는 힘이 생기고, 자연의 너그러움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몇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조선문화사 서설 (모리스 쿠랑 저)
“‘조선문화사 서설’은 1894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펴낸 전 3권 중 서론 부분만 1946년 서울에서 김수경이 번역본으로 출간했죠. 저자 모리스 쿠랑은 프랑스공사관 서기로 2년간 경성에 체류하면서 직접 본 풍물과 서지학적 내용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19세기 말까지도 조선은 독자적인 문화가 없고, 말과 글이 중국에 종속돼 있다고 믿던 서양인들의 고정관념을 깼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사론 (신채호 저)
“‘조선사론’은 ‘조선사연구초’와 함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대표적 명저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사를 일본인의 시각으로 기술하고, 조선 역사를 날조·왜곡한 부분이 많았어요. 보다 못한 단재는 역사를 보는 눈이 진실해야 한다고 판단해 역사론을 펼쳤습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 기존 ‘조선상고사’의 잘못은 무엇인지 지적했습니다. 철저한 민족사학적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분석했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선생과 같은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장자 (장주 저)
“‘장자’는 장주의 별호이며 책 이름이기도 합니다. 노자와 함께 중국 고대 철학자이자 사상가죠. 도를 천지 만물의 근본 원리로 삼아 대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이루려 하지도 않으며,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만이 진정 행복할 수 있다고 했죠. 이 책은 현대인의 욕망과 정신적 고민을 치유하는 큰 힘이 될 겁니다.”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 (로저 디킨 저)
“저자는 영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숲 여행가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나무와 꽃, 새들과 함께 지내면서 얻은 지식과 자연의 신비를 영화처럼 자세히 보여주고 있죠. 작은 식물부터 큰 나무까지 저자의 시선을 따라 세심하게 관찰해볼 수 있습니다.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도 담았어요. 자연 예찬과 문명 비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자연과 인간은 공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28일 오후 2시 포스코타워 역삼 이벤트홀에서 ‘신한은행과 함께하는 BRAVO! 2022 헬스콘서트’(이하 헬스콘서트)가 열렸다.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사회공헌 행사로 올해 6회째를 맞는 헬스콘서트는 이투데이피엔씨와 신한은행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진행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중장년이 알아야 할 위험신호’라는 대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행사는 1부 건강 관리 및 재무 설계 강연에 이어 2부 성악 공연까지 다채롭게 마련됐다.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김상철 이투데이 미디어그룹 대표는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독자와 소통하는 대표적인 행사 중 하나다”라며 “세계적 위기였던 코로나19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 여러분을 오랜만에 마주할 기회가 되어 기쁘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아울러 “이번 행사의 주제 역시 코로나 펜데믹 과정에서 입었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내용들로 준비했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이영종 신한은행 그룹장은 “힘든 코로나 시기를 보내온 중장년층의 활력을 되찾을 기회를 제공하고자 금번 행사를 준비했다”며 “그동안 움츠렀던 몸과 마음을 헬스콘서트와 함께 마음껏 펼쳐보시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더불어 “향후 지속적으로 중장년 은퇴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고 최선을 다하는 신한은행이 되겠다”고 밝혔다.
윤이다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된 1부의 첫 번째 강연은 서울아산변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의 ‘거리두기가 만든 근육 빨간불 극복하기’로 펼쳐졌다. 정 교수는 “면역 노회 현상으로, 코로나 19 감염 이후 염증의 정상화가 더뎌진다”며 “이 기간에 식욕저하, 우울감, 근 손실, 자율신경계 이상, 인지기능 저하 등을 겪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근력 운동과 단백질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두 번째 강연은 인천성모병원 소화기내과 권정현 교수가 ‘홈술, 혼술이 만든 간 건강 빨간불 이겨내기’를 주제로 이어갔다. 권 교수는 간 질환의 원인과 건강검진 등에 대해 강연하며 “간 수치가 정상이라고 간이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니다. 알콜·비알콜 지방간 질환은 생활습관 조절이 우선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어 “적당한 운동과 양질의 고기와 야채 섭취가 중요하다. 검증되지 않은 건강식품과 민간요법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마지막 연사로 나선 이관석 신한은행 은퇴솔루션 컨설턴트는 ‘100세 시대 5대 장수리스크를 이겨라’를 통해 중장년의 재무설계에 대해 들려줬다. 이 컨설턴트는 급변하는 자산관리 환경에 대해 ‘고령화, 저출산, 저성장, 저금리, 고변동’을 키워드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울러 “풍족한 노후 생활에는 연금이 정답”이라 조언하며 “3층 연금제도, 공적 연금, 퇴직연금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후 자산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강연을 마친 뒤 질의응답 시간에는 관객들이 직접 질문을 하며 궁금증을 해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1부의 열기를 이어 2부에는 ‘코로나 극복! 활력 콘서트’로 성악 그룹 ‘더 텐테너스’가 무대에 올랐다. ‘향수’, ‘오솔레미오’ 등 성악 명곡들을 감동의 하모니로 선보였다. 준비된 공연을 마친 뒤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앙코르 곡 ‘오 해피 데이’까지 선사하며 모든 행사가 마무리됐다.
성황리에 펼쳐진 헬스콘서트는 오는 9월 새로운 주제와 무대로 다시 찾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