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3월에 한 학년씩 올라가거나 상급학교에 입학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9월학기제를 도입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봄의 들머리인 3월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열리고 교원을 비롯한 직장인들이 정년퇴직하는 2월을 보낸 다음에 맞는 달 아닙니까?
학년은 1년간의 학습과정 단위이며 수업하는 과목의 정도에 따라 1년을 단위로 구분한 학교교육의 단계입니다. 학년은 이렇게 단계의 개념인데, 학업을 쌓아온 햇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학력(學歷)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노년에게 재산이란 인생에서 겪은 체험의 양”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살면서 배운 양, 공부한 양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학생들이 매년 한 학년 올라가듯 인생이라는 교실에서도 그렇게 차근차근 학년이 올라가 성취가 쌓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데, 학교에서와 달리 인생이라는 교실엔 낙제나 유급은 있지만 추월과 월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큰 어려움입니다. 수직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돌고 돌면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 차장일 때 부장이 될 공부, 부사장일 때 사장이 될 공부, 교감일 때는 교장이 될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학교 공부든 직장 공부든 인생 공부든 공부는 한결같고 근면하게 해야 합니다.
공부는 배우는 일과 생각하는 일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배우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배우는 과정이 적절한 순환구조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망과 태는 늘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 걸까?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터득하기 위해서, 자연과 우주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이를 통해 인격을 도야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일 테지요. 그래서 교과서로 배우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각고면려(刻苦勉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공부에는 의지하고 기댈 만한 교과서가 없고 늘 잘못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선생님도 없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공부입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 시인의 작품 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사물이 나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글을 많이 읽고 모든 사물로부터 배우다 보면 지난 일에 대한 아쉬움과 뉘우침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삶이란 어쩌면 후회투성이인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시인·작가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는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인생을 되풀이할 수 있다면/ 열여섯 살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입니다.
케스트너는 열여섯 살에 뭘 했던가? 그 시에 의하면 예쁜 꽃을 따서 책갈피에 끼워 말렸고, 학교로 가는 도중 빨강대문 파랑대문 앞에서 친구를 불렀고, 밤의 창가에 서서 별들을 헤아려봤고, 거짓말을 하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토라져서 닷새 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고, 밤늦은 공원에서 키스하고 싶어 할 때 얼굴을 돌리는 볼이 빨간 소녀와 산책을 했고, 문을 닫으려는 상점에 들어가 소녀와 나를 위해 2마르크 50페니히로 똑같은 가락지 두 개를 샀고, 곡마단 구경이 하고 싶어 엄마를 졸랐고, 처음 만져본 여자의 가슴이 너무 부드러워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게 오로지 케스트너만의 기억일까요? 정도 차는 있지만 우리 모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에리히 케스트너는 이라는 시에서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고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문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고통과 나치의 혹심한 탄압을 겪었으니 그렇게 말할 만합니다. 고통이 없었던 열여섯 살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삶에는 월반과 추월이 없는 것처럼 음악의 도돌이표나 윷놀이 판의 ‘백(back)도’와 같은 과거 회귀 타임머신이 없습니다. 제자리에 머물거나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신문사의 편집국장과 주필까지 거친 분이 언젠가 술자리에서 “내가 지금 사회부장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모르던 것, 안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밝게 보이고 사려와 분별도 나아져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석했던 다른 후배들은 ‘언제까지 혼자 다 해먹으려고?’ 하는 식의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선배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지요. 후배들에게 교과서나 교복을 물려줄 때처럼 깨끗하고 깔끔하게 쓰고 넘겨주어야 좋습니다.
제대로 올바른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충실하게 전수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 ‘박학이상설지(博學而詳說之) 장이반설약야(將以反說約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가 널리 배워서 상세하게 풀이하는 것은 (학식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장차 되돌아가 요점을 알아듣게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중국 속담에 “사독서 독사서 독서사(死讀書 讀死書 讀書死)”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단 세 글자로 만들어 낸 이 속담의 뜻은 “맹목적으로 공부하면서 쓸모없는 책을 읽으면 그런 공부 하나마나”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공부를 하랬더니 개잡이를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학년 몇 반입니까? 63세는 6학년 3반, 75세는 7학년 5반이라고 부릅니다. 학교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졸업과 새로운 출발로 이어지지만 인생의 학년은 올라갈수록 생의 마감과 작별로 귀결되니 나이가 드는 것은 반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아질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후배들이 본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선배입니다. 어떻게, 유급 없이 한 학년 올라갈 준비가 끝났나요?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화무(花無)는 십일홍(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花爛春盛) 만화방창(萬化方暢) 아니 놀지는 못 하리라. 차차차~ 차차차~”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노래가락 차차차’ 의 1절이다. 시들지 않는 꽃이 없는 것처럼 달은 보름이 되자마자 기울기 시작한다. 꽃피는 봄날, 만물이 소생하는 젊은 지금 마음껏 놀지 않으면 언제 놀겠느냐? 놀자, 놀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놀자. 참 맞는 말이 아닌가?
한 대학 동창회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갔더니 평균 연령이 70세가 넘어 보였다. 최연장자로 소개받은 103세 되신 분도 앞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계셨다. 그래서 초반에 냅다 ‘노래가락 차차차’를 다 같이 부르자고 청했다. 처음엔 “야~ 인마, 너나 젊었지. 우린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하는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여러 선배님들이나 저나 오늘이 가장 젊습니다.”하면서 어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하는 일이지 다리 떨릴 때 하는 일이 아니다.” 청취자가 보내준 메시지라면서 MC가 읽어주는데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어가다가 끝내기 전에 다시 한 번 ‘노래가락 차차차’를 부르기로 했다. 이번엔 박수를 크게 치면서 목청껏 불러보자고 했다. 여럿이서 부르기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락 차차차’가 아닌가? 결과가 어땠을까? 마지막 후렴구인 ‘차차차~’가 끝도 없이 이어질 정도로 흥겨운 자리가 되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박수를 치면서 신명나는 노래를 불렀다면서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강의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냐는 칭찬을 수도 없이 받았다.
필자가 자화자찬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니, 그런데 우리가 놀아봤어야 놀지. 평생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아이들 치우고 손주 봐 주다 보니까 이 나이가 된 거예요. 소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연세가 좀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은퇴교육을 하고 나서도 “아니, 그래 이 좋은 강의를 은퇴하기 전에 들었어야 하는 건데, 우리 때는 은퇴교육이란 말도 없었어요.”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여기서 질문 하나. 동양의 5현(賢) 또는 5자(子)라고 할 수 있는 공자·맹자·순자·노자·장자의 영원한 스승은? 이분도 자 자(字) 돌림이다. 정답은 ‘놀자’이다. 필자는 나이 든 사람, 가진 사람, 윗사람들이 존경과 대우를 받으려면 먼저 3가지 자, 3자를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놀자, 쓰자, 주자(베풀자)’이다. 잘 놀고 잘 쓰고 잘 베푸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가족과 사회는 없다. 여기에다 잘 웃고 잘 걷는 사람이 되면 공자(孔子)를 포함한 동양의 5자도 부러워할 5자, 즉 ‘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가 되는 것이다. 잘 놀고 잘 쓰고 잘 주고(베풀고) 잘 웃고 잘 걷는 사람을 누가 싫어하고 욕하겠는가?
그중에서도 잘 놀거나 아니면 잘 놀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머지 4자(쓰자, 주자, 웃자, 걷자)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잘 놀기 위해서는 잘 써야 하고 잘 베풀어야 하고 잘 웃어야 하고 잘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 쓰지도 베풀지도 웃지도 걷지도 못하는 사람과 누가 놀려고 하겠는가? 더욱이 노는 것은 혼자 놀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어울려 노는 재미가 훨씬 더 크다. 배우자를 포함한 가족과 친척, 친구들과 놀아야 잘 놀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잘 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일만 하느라고 수십 년 동안 놀아보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시간과 돈이 있다고 잘 놀 수 있을까? 오죽하면 ‘놀아본 놈이 잘 논다’는 말이 나왔을까? 사실 좀 놀아본 놈은 잘 노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왜냐고? 그간 잘 놀기 위해서 시간과 돈, 에너지를 엄청 퍼부었기 때문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고, 노는 놈 위에 즐기는 놈 있다’는 말도 그냥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주 없으면 안 되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더욱이 나이 들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뭔가 해야겠다고 무리하면 스트레스만 쌓일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If you can't avoid it, you might as well try and enjoy it.)”라는 말이 있다. 은퇴와 노후 또한 피할 수 없으므로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은퇴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retire’는 뒤로 물러나 숨는 것[隱退]이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우는 것(re-tire), 즉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은퇴라는 새로운 시작을 우리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누가 즐기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은퇴 또는 노후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나 염려는 접어두는 대신 놀고 쓰고 베풀고 웃고 걷는 연습을 해 보자. 돈이 많아 흥청망청 놀고 쓰고 베푸는 게 아니라면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만이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장기적으로 좋은 연습은 좋은 성적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우리의 인생도 은퇴도 노후도 모두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 연습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두 번째 질문. 인생에 필요한 세 가지 금은? ‘황금, 소금, 지금’이다. 이 셋 중에서도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은퇴 후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부터 놀고 쓰고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웃고 걸어야 5자도 부러워할 5자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지금 잘 놀고 잘 쓰고 잘 베풀고 잘 웃고 잘 걸어야 지금은 물론 은퇴 후도 즐거울 수 있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런 연습 한번 해 보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조촐한 식사를 하면서 술 한 잔 앞에 놓고 서로를 향해 외치자. “소취하 당취평!” 소주에 취하니 하루가 즐겁고, 당신에 취하니 평생이 즐겁다. 그게 소주든 막걸리든 와인이든 무슨 상관이랴? 온 가족의 웃음과 박수 속에 하루 저녁이 즐거울 것이다.
즐거운 오늘 하루가 즐거운 내일과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즐거워야 인생이다!
한국은행,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현)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겸 은퇴연구소장
현)고려대 국제대학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필 자가 근무하는 연지동 주변에 창덕궁이 있다. 점심식사 후 가끔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궁(宮)을 죽 걸어 들어가노라면, 규장각(奎章閣)과 그 앞의 부용지(芙蓉池)라는 연못을 만난다. 이 연못 남쪽에는 열십자 모양으로 생긴 부용정(芙蓉亭)이라고 하는, 아름답고도 독특한 형태의 정자가 눈길을 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 즉, 정조임금께서 지금과 같은 톡특한 형태로 건물을 개축(改築)하였다는 말인데, 총명하기로는 조선 역대 임금 중 손꼽히는 그가 왜 이와 같은 독특한 형태의 건물을 지었을까? 여하튼, 정조임금께서는 이 건물을 짓고 난 뒤에, 꽤나 이를 사랑하셨던 것 같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여기서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오니 말이다.
한문에는 ‘전고(典故)’라는 것이 있다. ‘용전(用典)’이라고도 하는데, 과거의 유명한 사건이나 문장 등을 짧은 성어(成語)에 담아내어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부용정도 또한 건축물로서 표현한 하나의 전고라고 볼 수 있다. 왜 그런가?일단, 이 건물의 생김새를 보면 열십자형으로 되어 있다. 즉, 위에서 조감(鳥瞰)하면 ‘아(亞)’란 글자의 형태가 된다. 그러면, 이 ‘아(亞)’란 글자로 무엇을 나타내려 하는가? 유교의 세계에서 ‘아(亞)’란 곧 ‘아성(亞聖)’, 즉 ‘맹자(孟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인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조선은 유교를 이상향으로 삼은 국가였다. 유교(儒敎)의 세계에서 ‘성인(聖人)’이란 단어는 오직 한 분, 즉 공자(孔子)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였으니, ‘아성(亞聖)’ 즉 ‘성인(聖人)에 준하는 사람’이란 단어는 공자 다음으로 존경받는 맹자(孟子)에 대한 존칭이었던 것이다.
그다음, 이 건물을 보면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 정자(亭子)의 받침대 중 두 개가 연못 속에 들어가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마치 두 발을 물속에 담그고 있는 형국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淸斯濯纓(청사탁영)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濁斯濯足矣(탁사탁족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이니,
自取之也(자취지야)
모두 다 자기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
즉, 백성들이 물에 발을 씻는가, 갓끈을 씻는가는 물이 흐린가 맑은가에 달려 있듯이, 나라가 잘되는가 잘못되는가 또한 임금인 나 자신, 또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신들,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는 자경(自警)의 의미가 곧 이 아름다운 정자(亭子)속에 녹아 있는 ‘전고(典故)’의 의미라 하겠다. 정조께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불러 여기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하니, 여기에 불려온 사람들은 정조임금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는 순간 엄숙한 가운데 한 번 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해에는 이 아름답고도 의미가 깊은 부용정(芙蓉亭)을 한번 돌아보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하태형(河泰亨)
뉴욕주립대(빙햄턴) 경제학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
학원장 등 역임
현재 현대경제연구원장
명로진(明魯鎭·49). 그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배우 명로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명로진의 인생에 있어 그는 배우이기 전에 작가의 길을 먼저 걸어왔다. 지난 15년간 펴낸 책만 40여 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저자 명로진’으로 남고자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에게도 오래도록 남게 될 책 한 권이 있으니, 바로 ‘장자’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장자, 그리고 깨달음
5년 전, ‘홍대학당’이라는 고전읽기 교실을 개설하며 ‘장자’를 만났다. 논어, 맹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다양한 고전을 접했지만 ‘장자’는 그에게 남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책 쓰기 교실을 하다 보니 인문 고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장자를 접하게 됐는데, 굉장히 재밌고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전은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한 번 읽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분명 똑같은 문장이고 똑같은 내용인데도, 그때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빈 배’가 되어라
깊은 관계일수록 기대가 커지고, 기대가 큰 만큼 갈등이 생겼을 때 받는 상처 또한 크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빈 배’가 되고자 한다.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날 때면 장자의 ‘빈 배’를 떠올리곤 해요.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다른 배하고 쾅 부딪친 거예요. 돌아보니 빈 배였죠. 그러니 화를 낼 수가 없잖아요. 그러고 다시 가는데 또 뒤에서 오는 배하고 쾅하고 부딪쳤어요. 이번엔 사람이 타고 있었죠. 좀 전과 똑같이 부딪쳤는데도 사람이 있으니,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 결국 욕설까지 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거기서 깨달은 것이, 그러면 우리 자신이 빈 배가 되어 살아간다면 어떨까라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나를 보고 소리를 치지도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고, 다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속세의 번뇌를 씻어주는 장자
그는 마음이 번잡할 때 북한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고 했다.
“장자는 제게 북한산 같은 책이죠. 북한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보고 있으면 ‘아, 내가 왜 저 밑에서 그렇게 아옹다옹 살았나’싶어요. 장자도 마찬가지예요. 읽고 나면 그런 위안이 되죠. 장자가 죽을 때, ‘내 시체를 길바닥에 놔둬라’라고 했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럼 개미와 벌레가 스승님의 시신을 먹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장자는 ‘밤하늘이 관 뚜껑이고, 흙이 나의 관 밑바닥이고, 온 우주와 별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할 텐데 뭐가 아쉽겠느냐. 또, 내가 길바닥의 시체로 썩지 않으면 개미와 땅강아지들은 뭘 먹고 살겠느냐’라고 했다는 거죠. 그런 구절을 읽으면 ‘그래 사는 거 뭐 있어. 너무 욕심낼 것도 없고 너무 집착할 것도 없고 그렇게 물 흐르는 대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스트셀러보다는 스테디셀러
장자가 씌어진 지도 어언 2400년이 흘렀다. 장자는 이 세상에 없지만, 장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읽는다는 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힘을 얻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죠. 논어나 맹자에 비해 장자는 굉장히 이야기가 많아요. 저 역시 이야기를 통해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을 통해 힘을 얻고 위안이 될 수 있는 책이요.”
진정한 성공의 의미, 장자에서 찾다
청년은 성공하는 삶에 의미를 두지만, 중년은 성공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 그는 그 의미를 ‘장자’를 통해 찾길 권했다.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진짜 성공인가?’라는 의문을 던져요. 장자는 중년 이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요. 나이가 들어 많은 것을 이뤘을 때, 그 이룸의 의미가 뭔가라는 깨달음을 주거든요. 살다 보면 그 이룸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거죠. 장자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 인간의 존재나 행복에 있어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힌트를 발견하게 되죠.”
명로진의 인생 이모작
다양한 이력만큼이나 다채로운 인생2막을 꾸며가고 있을 법했던 그에게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물었다.
“저는 달리고 있지 않아요. 슬슬 걸어가고 있어요. 제 두 번째 삶은 단순화시키는 게 목표예요. 읽고, 쓰고, 놀고. 그게 남은 인생의 3대 프로젝트예요. 책도 슬슬 읽고 여행 다니고 바람처럼 살아요. 얽매일 게 없잖아요. 정년을 다한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조직이나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까요. 마음이 젊으면 젊은 거예요. 뭐든 할 수 있죠.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잘하고 싶어 하는지가 문제다’라는 책 제목처럼, 잘하고 싶으면 되는 거예요. 성과를 낼 필요는 없어요. 잘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자체로도 보상되거든요. 못하면 또 어때요. 그냥 재밌게 하면 되는 거죠. 성과는 인생 전반기에 다 냈고, 지금까지 했는데 성과 안 났으면 이제는 그냥 그만큼인 거에요. 그럼 그거에 만족하고 이제부터라도 재밌게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