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은 들국화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서 ‘모든 풀의 왕초’란 닉네임을 달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식물이지만 좀처럼 자신을 앞세우지도 않고 빈터나 길가 논두렁 밭두렁 산속 아무데서나 낮은 키로 ‘쑥쑥’ 자라나 사람에게 제 몸을 보시한다. ‘쑥’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쑥도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종으로 진화해 산쑥, 들쑥, 덤불쑥, 참쑥, 물쑥 등 40여종이 한반도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특히 강화 개똥쑥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하여 몸값도 제법이다.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내 남편도 치료 중 그 쑥을 달여 마시곤했다.
쑥은 한국전쟁 전후 구황식품 중 으뜸이었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면 겨우내 웅크렸던 뿌리들이 솜털 보송보송한 쑥잎을 쑥쑥 밀어올린다. 아득한 보릿고개를 넘어야할 때 기다렸다는 듯 언니 엄마들은 논두렁 밭두렁에 파릇파릇 자라난 쑥을 뜯어다가 보릿겨, 밀기울 등과 반죽하여 아무렇게나 반데기를 만들어 쪄서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연명하던 기억이 내 해마에 ‘보릿고개’란 압축 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떡이 쑥개떡이다. 쑥개떡도 못 먹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보릿고개를 유령처럼 떠돌기도 해서 그 유령을 만날까봐 안채와 떨어져 있던 화장실에 갈 때도 밤이면 어른들을 동행하곤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처럼 먹거리가 풍성한 세상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마치 단군설화 속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쯤으로 여길듯하다.
시간이 흘러 쑥개떡이 각광 받는 웰빙 식품이 되었다. 맵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데다 데쳐서 말려 빻은 쑥을 섞고 달작지근하게 익반죽해서 강낭콩을 켜켜이 박아 쪄 놓으면 쫄깃하고 향이 좋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쑥의 따뜻한 성분과 풍부한 섬유질 때문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 특히 부인과 병인 만성 허리 어깨 결림, 냉, 대하증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쑥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구정무렵이면 올케언니가 볶은 콩가루와 찹쌀로 만든 쑥떡을 한 넙데기씩 보내 주시곤했다. 출출할 때면 한번 먹을 만큼 렌지에 돌려서 콩가루 묻혀 먹는 맛이란 일품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올케언니가 연로하셔서 그러한 노동이 불가능한 탓에 그 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약한 허리 핑계로 엎드린 일을 회피하던 내가 2년 전 여름 한철 보양식을 마련하겠다는 기대감으로 지인들을 따라 쑥을 캐러 갔다. 시누이가 주말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 강화도 외포리 뚝방에 해풍 먹고 자란 쑥들이 순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농약이 닿지 않아 쑥 체취의 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으리라. 북녘땅이 가까운탓에 들려오는 총소리를 삭히느라 그랬는지 고개가 비틀어진 놈도 있어 바로 세워 놓고, 뚝방의 해면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칠년 묵은 병에서 삼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맹자의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경사를 오르락내리락 쑥을 뜯었다. 지인들이 한 웅큼씩 보태주기도 해서 배낭의 배가 불룩해졌다. 어릴 적 동네 언니들 따라 쑥을 캐 본 후로 처음인지라 자뭇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쑥개떡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쌀을 불리고 쑥을 씻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조언을 받아 생 쑥과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갔더니 쑥 빠는 삯이 두 배가 들어갔다. 생 쑥을 빠러 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방앗간 주인장으로부터 핀잔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생 쑥은 쓴맛이 그대로 남아있어 쑥개떡을 해도 써서 먹기가 거북하단다. 생 쑥만이 떡을 파랗게 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나의 첫 작품을 망치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쌀가루와 빻은 생 쑥을 익반죽해서 손바닥만 하게 넙데기를 만들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 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개씩 찜기에 쪄서 먹은 나만의 점심 먹거리, 내 60조의 세포막을 뚫고 쑥쑥 일어서는 쌉쌀한 향기에 당시 개보다 더 잔인하게 한반도를 짓밟던 메르스도 비켜갔다.
*송시월 시인은…
1945년 전남 고흥출생. 1997년 월간 등단.
시집으로 (2015년 문광부 추천 세종 우수도서 선정)이 있다.
제 1회 푸른시학상 수상 계간 편집위원.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양치질을 하고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깨끗한 환경 속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고나면 하루의 시작이 상쾌해 진다.
밖으로 나와 작은 공원에서 아침 운동을 시작하면 나의 소소한 행복도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맑은 하늘, 시원한 아침공기, 주변의 장미꽃 단지, 푸른 녹음 이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맞아준다. 순간 나는 천국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소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나에게 내린 큰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에 종류가 있을 수 없겠지만 나는 그렇게 분류하고 싶다. 결혼해서 아내를 맞는 것은 큰 행복을 맞는 것이고, 아이들을 맞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고,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시키는 즐거움 또한 어마어마한 행복이니 어찌 행복의 종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어제 둘째 아들이 태어나 결혼해서 처음으로 임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행복함을 느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약 3억에 가까운 보증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계약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대뜸 저질으라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과감하게 잡아야 하니 포기하지 말고 추진하라고 했다. 비록 많이 가진 것은 없지만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고 싶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들을 돕지 않는다면 누구를 돕겠는가?
아내가 아침에 따뜻한 밥을 지어 식탁을 즐겁게 해준다. 이 또한 즐겁고 행복하지 않는가?
중국 전국시대 철인 맹자는 진심 편에서 군자삼락이라 했지만 나는 이런 소소한 행복의 즐거움을 보태 군자사락이라 말하고 싶다.
군자유삼락은 아래와 같다.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양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이락야)]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득천하영재 이교육지 삼락야)].”
나에게는 신이 내린 직업이 있다. 그래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일거리가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출근하여 내가 보람이 있는 일을 하고 일찍 퇴근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 내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봉사한다고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니 전문직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직업 같다. 오랫동안 해외 계약업무를 하다 보니 국제계약분야에서 상당한 노우하우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계약, 협상, 클레임처리 분야 등에서 기업가들을 위해 힘이 되어 주고 난관에 처해 있을 때 해결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런 도움이 필요한 많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생활이니 나 또한 즐거운 것 같다. 이웃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관계를 통한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가끔 실감한다.
비록 변호사처럼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지만 남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봉사하는 계약관리사의 일이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소소한 행복인 것 같다.
행복은 어떻게 얻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전 나의 장남 결혼식에서 혼주로서 신혼부부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 해준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WHERES’에 있다. 열심히 일(Works) 하면서 건강(Health)하고, 경제( Economy)적 문제없이 살면서 좋은 관계 (Relation)을 유지하며 항상 학습 (Study) 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행복의 세계에서 산다고 할 수 있다고 했었다.
그해 봄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10시, 목동 파리공원에서 우리들은 작은 모임을 가졌다. 연령도 20대에서 60대요, 직업도 틀리지만 쇠귀 신영복(牛耳 申榮福, 1941~2016) 선생의 책과 신문 칼럼 이야기를 듣고,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기탄없는 자유토론의 시간이 즐거웠다.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토론이 격해지면 인근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분위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신 선생은 잘 알려졌다시피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경제학을 강의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고, 1988년 8월 15일 만기 출소했다. 한동안 몸을 추스르더니 11월 말엽,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 건물 지하 ‘세실레스토랑’에서 40여 점의 서예 작품으로 첫 서예전을 열었다. 옥중에서 20년을 정진한 그 서예 작품들을 보고, 신선한 충격과 큰 감동이 가시지 않았다. 연말에는 이라는 옥중 서신들을 책으로 출간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 1889년 1월에는 결혼을 해 서울 목동에서 가정을 이루고, 성공회대학교에서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가히 생활인으로서 새 출발을 했다. 1993년에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엽서들을 모아 를 출간했고, 1995년 11월부터는 중앙일보에 를 기고했다.
1995년 3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인사동 학고재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당시 학고재 사장의 소개로 처음 선생을 상면하고, 50여 점의 서예에 대한 소회를 직접 들었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선생을 돕고자 하는 여러 지성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마음에 정해둔 작품이 금방 팔려 기회를 잃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다가 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은근히 휘호를 받고자 하는 속내도 있었다.
그의 부드럽고 자상한 성품은 누구의 청(請)도 거절 못했다. 필흥(筆興)이 솟아 경오(庚午, 1990)년 황화(黃華, 가을)에 써두었던, 편의 한 구절인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에서 취한 ‘夜深星輝’와 임신(壬申, 1992)년 성하(盛夏, 한여름)에 시필(試筆)한 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있는 관어해자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에서 뽑은 ‘觀海難水’의 예서체(隸書體) 두 작품을 받아 소장하게 되었다. 소위 ‘신영복체’, ‘어깨동무체’라는 한글 휘호도 받고 싶었으나 너무 무례한 것 같아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해 섣달그믐께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그토록 소망하던 ‘어깨동무체’의 를 말아서 들고 계셨다. 펼치니 먹 향이 그윽하고 관지(款識)의 인주 빛이 선명했다. 이후 선생은 대학 강의와 신문 기고가 늘어나며 일정이 바빠져, 주 1회 모임에서나 잠깐씩 상면했다. 나도 바쁜 일이 생기면 서너 주 거르기가 일쑤였다. 아내를 비롯해 친구들이 선생의 전력(前歷)을 들어 모임 참여를 말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의미의 ‘야심성유휘’는 선생이 아주 즐겨 썼는데, 남다른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어온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맹자(孟子, BC 372~BC 289 추정)가 공자(孔子, BC 551~BC 479)를 언급한,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의 ‘관어해자난위수’는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깊은 함의(含意)가 있는 들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선생만의 독특한 서체다. 두 줄의 굵고 납작한 글자들은 서로 부딪치고 얼싸안으며 힘찬 기운을 발한다. 옥중에서 받았던 노모의 한글 글씨체에서 골격을 찾아 변용했다고 말하지만, 한글 서체의 미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목원대학교 미술대 교수인 김태호(1967~) 조각가가 이탈리아 카라라(Carara) 국립미술학교로 유학 떠나기 전에 부인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1996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데, 식사를 대접하려고 불고기집으로 안내했으나 한사코 냉면만 먹겠다고 하여 조촐한 송별이 되고 말았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의 깊은 속내가 대견했다. 부인이 종교음악을 전공했기에 바흐의 음반을 건네는 게 고작이었다.
김태호의 조각작품과의 인연은 1993년으로 되돌아간다. 인사동 어느 화랑에 놓여 있던,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을 눈 깊게 만났다. 까까머리의 동자가 무릎을 두 팔로 감싸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작품이었는데, 기교 없는 순수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화랑의 큐레이터도 ‘동자상’에 반해 매일 한두 번씩 쓰다듬는다며 화랑의 ‘지킴이’라 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막 군대를 다녀온 풋풋한 조각가의 작품이었기에, 몇 주 동안 드나들며 “누구에게 팔지 말라”고 이르고 관찰만 했다. 화랑 주인은 ‘중진 조각가의 작품과 견줄 만한 수작(秀作)이라서 값싸게 팔 수 없고, 상당한 가격에 구입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화랑에서 소장한다’며 애를 태웠다. 아내와 상의해 통장을 비워, 기어이 혼자 들기 버거운 을 택시에 싣고 와 온 식구가 쓰다듬으며 한 가족으로 삼았다. 조각작품 수집의 시작이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는 ‘따뜻한 인간애’다. 지치고 고달픈 현대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예술혼은 얼음처럼 차가운 대리석을 헤집고 인애(仁愛)의 형상을 쪼아낸다. 샐러리맨의 고독과 실직자의 아픔도 용해해 젊은이들에게 힘찬 형상을 선사하기도 한다. 은 2010년 벽두에 서울 서촌의 ‘갤러리 자인제노’ 전시회에서 만난 작품이다. 좌대까지 하나의 대리석으로 깎아낸 수작이다. 어린 남매를 배 위에 얹고 있는 따뜻한 모정이, 작품의 안정감과 리듬감을 균형 있게 전달한다. 세파(世波)에도 흔들림 없는 굳건한 ‘가족사랑’이 위대한 성(城)을 구축하고 있다. 한낱 돌덩이에 맥이 돌고,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된다. 누구나 성(城)에 안주하려 들지만, 그 성을 쌓아가는 고뇌의 노정(路程)을 잊지 말진저.
>>이재준(李載俊)
1960년 경기 화성에 태어났고 아호 송유재(松由齋)로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중이다. 중학교 3학년 ,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 천여 점을 수집해왔다.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는 ‘하이쿠(俳句)의 시성’으로 유명한 일본의 시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17자(5·7·5)로 세상과 인간을 노래하는 하이쿠를 바쇼는 언어유희에서 예술 차원으로 끌어올려 완성했습니다.
그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자신의 길에서 죽는 것은 사는 것이고, 타인의 길에서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하이쿠라는 시는 사계절의 변화를 벗으로 삼는 것이다. 보이는 것 모두 꽃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 달 아닌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소나무에 대해 배우려면 소나무에게 가고, 대나무에 대해 배우려면 대나무에게 가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가 사는 방법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一所不在]는 방랑이었고, 그리 길지 않았던 삶은 스스로 선택한 개별자 단독자의 고독으로 점철돼 있었습니다. 그가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듯 인간은 모두 단독자이면서 개별자입니다. 신 앞에서 단독자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개별자입니다. 개별자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독립체로, 보편자와는 정반대인 개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 죽음 이후를 모르는 채 혼자 죽어갑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덜기 위해 남들과 어울리고 공동체를 만들고 부부의 인연을 맺어 함께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그 부부로부터 집안이 만들어지고 가족과 자녀가 형성돼 인간세상이 인멸되지 않고 전승돼온 게 아니겠습니까?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틀과 얼개를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평균적이고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자 개별자의 삶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남들과 맺어온 관계를 스스로 또는 어쩔 수 없이 단절한 채 혼자만의 삶을 이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상하고 묵은 관계의 지층 위에 새로운 관계를 쌓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말의 ‘홀’과 ‘홑’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아주 다른 말입니다. 홀의 반대는 짝이고, 홑의 반대는 겹입니다. 홀은 홀가분하다, 홀로서기처럼 여유롭고 당당한 뜻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홀아비 홀어미, 홀알(무정란), 홀앗이(모든 살림살이를 혼자서 맡아 처리하는 처지)처럼 외롭고 쓸쓸한 개념이 먼저입니다. 홀아비 홀어미는 홑힘(남의 도움이 없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홀아비 홀어미의 반대말은 핫아비 핫어미랍니다. 핫바지 핫저고리처럼 솜을 두어 만든 것이라는 뜻과 함께 배우자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결혼에 실패하거나 사별해서 홀아비 홀어미가 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른바 싱글이나 돌싱족이 점차 늘어나고 1인가구가 이미 500만 가구를 넘었습니다. 혼자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관심, 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혼자 사는 자유로움과 홀가분함을 누리는 사람들보다는 고통과 고독 속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 데는 남녀간의 차이가 큽니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다”라는 우리 속담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늙어서 아내 잃은 남편은 어찌 살아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친구도 없고 새로운 사람을 잘 사귀지도 못합니다. 이와 달리 여자들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으면 더욱더 편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홀아비, 늙어서 남편이 없는 과부, 부모가 없는 고아,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해서는 일찍이 맹자가 말한 대로 나라와 정치지도자가 특별히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짝 없는 남자가 없는’ 이른바 내무원녀 외무광부(內無怨女 外無曠夫)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제왕과 통치자의 할 일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보복지 증대, 사회안전망 구축의 정치이겠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나라가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혼자 사는 삶을 잘 꾸려가도록 각 개인이 노력하고, 지역이나 사회공동체가 서로 돌봐야 합니다. 그 대상은 앞에서 이야기한 환과고독이 제일 먼저일 것입니다.
사람은 왜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일까? 성경의 예전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창세기 2장 18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짝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독처(獨處)는 독거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왜 독처하면 좋지 않은 것일까? 짝 없이 혼자 사는 게 생리적 신체적 생활적으로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일이든 합심협력을 할 사람이 있어 함께 삶을 꾸려가는 것과, 북한 말로 혼자씨름(자기 혼자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재어 보는 일)을 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형영상조(形影相弔) 형영상련(形影相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몸과 그림자가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척영(隻影)도 짝이 없는 오직 혼자인 사람을 일컫습니다. 의지할 데 없어 혼자 매우 외로운 사람은 그림자도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헨릭 입센은 희곡 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 속에서 홀로 선 인간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런 그럴듯한 문학적 수사와 철학적 사유와 달리 현실은 냉엄하고 각박합니다. “외로움이란/내가 그대에게/그대가 나에게/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시인 이형기(1933~2005)의 ‘그대’라는 시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마쓰오 바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마쓰오 바쇼로 글을 맺겠습니다. 병으로 쓰러진 그가 마지막으로 일어나 앉아서 쓴 하이쿠는 최고의 명편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가을 깊은데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이걸 일본 발음으로 읽어봅니다. 아키후카키 토나리와 나니오스루 히토조. 쓸쓸한 가을의 정서가 입을 거쳐 몸 안으로 들어오는 듯합니다.
가을은 겨울로 가는 계절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는 것은 침잠과 저장 동면의 시기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온기가 그립고 이웃의 관심과 정이 절실해지는 계절이지요. 바쇼는 생이 이우는 마지막 가을에 이렇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하고 떠났습니다.
이웃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무도 그렇게 주장한 바 없지만 이웃의 ‘이’에는 이승이라는 말처럼 지금 여기, 이곳이라는 뜻이 있는 것이라고 우겨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반대인 저웃도 있나? 그런 말은 있지 않습니다. 이웃이라는 글자 ‘隣(린)’은 가엾게 여긴다는 ‘憐(련)’과 사촌간입니다. 혼자 사는 삶과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한동안 TV 드라마 가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더니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여전히 그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몇 년 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2002년 방영된 드라마 의 인기가 여전히 높은 데 놀랐다. 드라마가 끝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일본 여인들의 감성을 적시고 있다는 것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상향은 무엇일까?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떠나 더 유명해지고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점점 다양화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용도로 사용하던 온라인 서비스가 이제는 자신을 알리면서 스스로를 세상에 과감하게 노출시켜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의 장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로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하면 그들은 ‘유명인’이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아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이 천지허공을 가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해 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우리의 행복을 가늠하는 가치 기준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 적이 있다. 우리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으로 잠을 설친 기억도 있다. 인상학자로 살면서 ‘사람 개개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근본은 무엇이며 변화하는 삶과는 어떤 연관 관계를 맺고 있나?’는 평생을 풀어야 할 숙제로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 성인들은 가장 높은 것이 하늘이고 모든 생명은 천지에 근원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몸은 형체(形體)와 기질(氣質)이 결합된 음양오행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형체는 몸을 이야기하며 몸 안에 기질이 흐르면서 우리는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천지가 없다면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순자(荀子)는 “하늘이 사람에게 형체를 부여하면 그에 따라 정신이 생겨나니 이것이 하늘의 신기한 능력이다. 하늘은 사람을 낳음과 동시에 본성을 부여한다. 나면서부터 그러한 것이 본성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부여해 준 생명과 함께 본래 갖추고 있는 우리 고유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욕구는 우리의 본연의 모습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되어 있다. 눈을 뜨면서부터 느끼기 시작하는 배고픔은 먹고 싶은 욕구를 만들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을 충족하고 싶은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학습하였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 내어보자. 맹자(孟子)는 인간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순자는 인간은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고 시험지 답을 적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화두 역시 “인간의 근본은 과연 착한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 필자는 “근본은 착하다 그러나 태어남과 동시에 이기심을 만나서 그 이기심과 타협하는 과정을 겪으며 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 한다.
그 이유인즉 탄생하는 순간의 아기의 얼굴을 보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고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순수하고 맑고 투명하여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순수의 세계로 몰아간다. 한순간 자신의 마음에 담겨 있는 순수한 본성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세상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려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탄생 순간의 얼굴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이라 할 수 있고. 지금의 모습은 시간이 만들어 준 후천적인 얼굴, 즉 운명을 만들고 다듬어서 가꾸어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선설’을 신봉하고 따른 사람의 얼굴은 편안하고 여유로우며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바라는 삶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구가 있다. 욕구하는 것을 얻으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지려 하고 구함에 법도와 분수가 없으면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본성을 ‘예의’라는 것을 만들어 교육하고 익히게 하여 욕망을 누르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순자의 생각이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반영된 얼굴이 사람에게 호감을 주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며, 그의 언사가 상대를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게 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얼굴을 만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습관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잘생기고 호감 가는 얼굴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자신 있게 마주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얼굴을 가져야 하고 그 얼굴이 사람과 소통하면서 상대와 여유롭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모습을 만드는 작업을 하여 보려고 한다. 삶이 여유롭고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본다.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중략)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하략)“
신경림(80)의 시 ‘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충북 충주 태생인 그는 이 시에서 아무리 옮겨 살아도 어릴 적의 이 그림이 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라는 것입니다. 시는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로 끝납니다.
사람은 살면서 집을 얼마나 옮기는 것일까? 알고 보면 순전히 자의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집을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경림처럼 자신이 살았던 집의 주소를 이렇게 줄줄이 댈 수 있는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삶의 고비마다,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개인의 기호와 지향에 맞춰 집을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요. 더욱이 노년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스스로 집을 짓거나 고쳐서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집은 개인과 그 가족에게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주는 집 宇, 집 宙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뜻은 같다 해도 宇는 상하사방이라는 공간, 宙는 고금왕래라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집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은 시간 속에도 집을 짓습니다. 대장부 사해위가(大丈夫 四海爲家), 대장부는 천하를 자기 집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간 속의 집에 관한 말입니다. 맹자가 대장부를 논하는 글의 맨 앞에 나오는 “천하의 넓은 집에 살고”[居天下之廣居]라는 말도 공간 속의 집을 말합니다. 정정당당하고 구차스러움이 없는 인격을 천하의 넓은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학문과 기예 등에서 일가(一家)를 이룬다는 것은 시간 속의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주 뛰어나 본받을 만한 사람을 뜻하는 대방가(大方家)나 전문가라는 말에도 시간 속의 집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 천지자연과 시간 속에서 하나의 나그네입니다. ‘하이쿠의 성인[俳聖]’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시에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라는 게 있습니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세월은 영원한 나그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라는 이백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와 아주 흡사합니다.
바쇼에게는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인간은 나그네였습니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며 집이란 그 방랑의 편의와 일정한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었습니다. 바쇼는 방랑 속에서 만난 사물과 사람들로부터 삶의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불후의 시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바쇼처럼 살 수 있는 자유인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안락하고 편한 집을 정처(定處)로 마련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방위와 향을 보고,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이른바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를 고르려고 애를 씁니다. 산남수북을 양(陽)이라 하고 그 반대인 산북수남을 음(陰)이라고 구분하면서 길지를 찾곤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물자리부터 보라”거나 “집이 망하면 지관 탓만 한다”거나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를 감옥에 맡기는 자다”라는 각국의 속담과 격언은 다 입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 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을 찾는 것은 집을 지을 때나 묘 자리를 고를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지형과 지세를 살펴 땅을 골랐습니다.
집을 짓거나 살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선택기준은 이웃입니다.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百萬買宅 千萬買隣]는 말이 있습니다. 의 권학편에는 “군자는 사는 곳은 반드시 좋은 환경을 고르고 교유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덕이 있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居必擇鄕 遊必就士]는 말이 나옵니다. 둘 다 이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요즘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집을 짓고 모여 사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아동문학가 강지인의 시 ‘집’이 그런 집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 막아주는 지붕,/지붕을 받치고 있는 네 벽,/네 벽을 잡아주는 땅,/그렇게 모여서 집이 됩니다.//따로 떨어지지 않고/서로 마주 보고 감싸 안아/한 집이 됩니다./아늑한 집이 됩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큰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의염치와 청빈을 중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큰 집은 죽음을 부르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고 합니다. 큰 집을 뜻하는 옥(屋)은 尸(주검 시)와 至(이를 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은 집을 뜻하는 사(舍)는 人(사람 인)과 吉(길할 길)로 구성돼 있으니 단순한 말장난이나 문자 풀이 같지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선비 김정국(金正國)이 이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시인 조지훈의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고루거각이든 용슬소옥이든 본디 일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요, 떠메고 다닐 수 없는 것이매 집 이름도 특칭 고유명사가 아닐 수 없으나 나의 방우산장은 일정한 장소, 건물 하나에만 명명한 것이 아니고 보니 내 몸을 담아 그 안에서 잠자고 일하며 먹고 생각하는 터전은 다 방우산장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용슬소옥(容膝小屋)이란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작은 집을 말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데, 모든 사물은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면 시간 속에 오래 남습니다.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집이 크거나 작은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글 ‘집’을 인용합니다. “집이란 크다고만 좋은 것도 아니고 작다고만 불편한 것도 아니다. 집에는 질서가 깃들여야 한다. (중략) 집이란 지나치게 빈틈없이 꾸며졌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키 어려운 것, 설령 제한된 비좁은 공간일망정 터진 곳이 있어야 하며 또한 막힌 곳이 있어야 한다. 집이란 패각(貝殼)과도 같아 완벽해야 하나 그 속에서는 생명이 울려야 한다. 마치 그 속에 바다의 물소리가 울리듯이.”
이제 다시 꽃 피는 봄입니다. 계절의 어김없는 순환을 보며 집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합니다. 꽃이 가득한 집이 그립고, 시간 속에 오래가는 자신만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최근 어느 책을 읽다가 체코의 속담에 마주쳐 한방 맞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던 일이 있습니다. 그 속담은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였습니다. 이렇게 속담의 추궁을 받다 보니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속담이라기보다 하나의 잠언, 격언으로 보이는 말을 음미하면서, 한 해의 마무리와 지난여름의 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영화가 있었지만, 지난여름에 나는 무슨 일을 했던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모르는데, 남들이 오히려 더 아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여름은 활동하는 계절, 뜨거운 감정 소비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어느덧 다 보내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가을도 배웅하고, 모든 것이 침잠하고 스스로 감추어 웅크리는 차가운 계절을 맞았습니다. 갈수록 가을은 짧아지고, 봄도 오는 듯 바로 돌아서서 가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이제 여름과 겨울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려서 배운 계몽편(啓蒙篇)은 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봄이 되면 만물이 처음 생겨나고 여름에는 만물이 성장하고 자라나며 가을에는 만물이 성숙하고 겨울에는 만물이 감추어진다. 그런즉 만물이 생겨나서 자라나며 거두어지고 감추어지는 것이 사시의 공이 아닌 것이 없다.”[春則萬物始生 夏則萬物長養 秋則萬物成熟??冬則萬物閉藏? 然則萬物之所以生長收藏 無非四時之功也]
사계절의 일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장수장(生長收藏)입니다. 이 겨울을 맞아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닫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저장할까.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장시 ‘황무지’에서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Summer surprised us)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었지/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마른 뿌리로 작은 생명을 길러주었어’(Winter kept us warm,/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라고 합니다.
겨울은 그러니까 모든 게 죽는 계절이 아니라 되살리기 위해서 따뜻하게 묻어두고 그 생명을 잘 기르기 위해 감추는 시기입니다. 동양의 사유나 철학에서는 자연의 운행질서는 조물주의 신공(神功)이며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응하고 조화를 지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이 지나지 않고 봄이 오랴?”라는 게 있습니다. 세상일에는 일정한 순서와 법칙이 있는 법입니다.
겨울은 달력으로 입동부터 입춘 전까지,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부터 춘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삼동세한(三冬歲寒)을 건강하고 보람 있게 보내야만 그 이듬해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바깥세상이 폐쇄되면 내부의 세계가 넓어진다. 겨울은 내면의 계절이다.” 일찍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또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라는 글에서 “겨울은 ‘나는 것’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망 속에 희망을 잉태한 거대한 역설의 구근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엇의 시를 연상시키는 문장입니다.
청마 유치환도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글에 “온갖 생물을 시들리고, 움츠려뜨리기 마련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그 서글프고 가혹한 추동(秋冬)이라는 계절이 실상은 온갖 생물의 생명들이 다시 움트고 소생함에는 없지 못할,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나는 겨울을 ‘벗과 책의 계절’이라고 말하려 합니다. 옛 선비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을 즐겼습니다. 벗들을 불러 모아 화로에 솥뚜껑을 올려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난로회 또는 철립위(鐵笠圍)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관서 땅은 시월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이면/겹겹의 휘장에 푹신한 담요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삿갓 모양 솥뚜껑에 노루고기를 구워/가지 꺾어 냉면에다 파란 배추김치 먹는다네.” 흥겹고 정겨운 술자리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에는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더디 시드는 걸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는 논어의 말이 씌어 있습니다. 추사는 중국 연경에서 경세문편(經世文編)을 구해 유배지에 가져다준 제자 이상적에게 이런 말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림에 ‘오래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찍었습니다. 빈궁하고 어려워지면 벗과 우정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도연명의 ‘의고(擬古)’라는 시에는 의복이 언제나 남루하고, 한 달에 아홉 끼니를 먹을 만큼 가난하고, 10년을 관(冠) 하나로 지내지만 언제나 얼굴빛이 좋은 동방의 선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을 보려고 새벽에 강나루를 건너가니 거문고를 끌어당겨 나를 위해 연주를 합니다. 도연명의 시는 “바라건대 그대 곁에 머무르면서 지금부터 한겨울을 지냈으면”[願留就君住 從今至歲寒]으로 끝납니다. 맑은 인격의 만남이 참 아름답고 부럽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독서를 하기 좋은 때인 삼여(三餘)는 농사일이 없는 겨울과 밤, 일을 못 하는 비 오는 날을 말합니다. 농사만을 짓고 살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지만 오늘날의 생활에 맞게 개념을 확대해 적용하면 책 읽을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책을 읽어야 좋은가. 독서에도 그에 맞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보다 아름다운 수필’을 쓴 사람으로 평가받는 중국 청(淸)초의 무명 문인 장조(張潮·1650~1703?)는 “경서(經書)를 읽는 데는 겨울이 알맞고, 역사서를 읽는 데는 여름이 알맞고, 제자백가서를 읽는 데는 가을이 알맞고, 여러 사람의 문집을 읽는 데는 봄이 알맞다”고 했습니다.
계절별로 다 이유가 있지만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와 같은 경서는 방 안에 앉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겨울에 읽어야 좋다는 뜻입니다. 여름에 역사서를 읽는 것은 낮이 길기 때문인데, 지금도 여름 휴가철에 대하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벗과 사귀고 어울리며 속으로는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음으로써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1년을 맞는 힘을 갈무리하고 비축하고자 합니다. 2015년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지만, 제야와 송년처럼 가는 것과 보내는 것의 아쉬움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체코의 속담을 바꾸어 말하면 “여름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겨울에 무엇을 했느냐고”라는 질문과 추궁 앞에 의연하게 마주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천년 제국 고구려를 되살리고 있는 작가 김진명의 ‘필생의 역작’인 대하소설 와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충돌의 그림자에 드리운 한반도의 운명을 그린 에 이은 2015년 또 하나의 대작 .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서 한국 소설이 사라져가는 요즘,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해온 그의 이번 작품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침체된 한국 문단의 현실 속에서 빛을 내고 있는 작가 김진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ay.co.kr
을 쓰게 된 계기와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중국대륙에 처음 세워진 나라는 은나라인데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은나라가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나라라고 결론내리고 있습니다. 동이족은 요하문명을 일군 주역으로 한족보다 오히려 일찍 북중국과 발해만 한반도 등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랜 역사가 흐르며 동이족은 모두 한족으로 흡수되고 우리 한민족만이 유일한 후예로 남았습니다. 글자전쟁은 한민족의 나라인 은나라와 은나라의 글자인 한자를 다시 생각하자는 뜻에서 썼습니다.
소설 속 소설이라는 구조가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구조와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두 다른 시대를 같이 보여줌으로써 주제의 시간적 영속성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즉 이 글자전쟁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민하는 소설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문화, 역사, 가치관 등을 멀리하고 오로지 돈과 속도에만 빠져 사는데 이러면 결국 내면의 피폐함과 의미의 결핍에 빠져 결국 중국에 종속될 뿐이지요.
소설 속 소설가 전준우는 ‘문단에서는 그를 허구라는 장치를 사용하지만 드러난 사실보다 더 깊은 수면 아래의 진실을 캐낸다’는 뜻의 ‘팩트 서처’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입니다. 어찌 보면 이는 김진명 작가와 닮은 것 같은데요. 혹, 전준우라는 인물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아닐는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책을 읽고 실제로 ‘弔’와 ‘吊’이라는 한자에 대해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려 했으나 간단치 않았습니다. 실제 글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문헌상의 모든 기록은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이 뒤를 채운 왜곡이며 조작입니다. 공자 한 사람이 자신이 살던 시대로부터 천 년이나 전에 존재했다 멸망한 은나라를 객관적으로 기술했다고 볼 수 없어요. 그래서 맹자는 공자가 쓴 역사책인 서경을 믿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지경이니 문헌을 믿을 수는 없고 과거를 보는 과학인 고고학과 그들의 전횡을 꿰뚫는 집중적 사색이 필요하죠.
책의 띠지에 보면 ‘유일하게 남은 한 글자, 답(畓)을 지켜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책에서 ‘畓’이라는 글자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유일하게 남은 한 글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모든 한자가 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출판사의 홍보문구인데 표현이 지극히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국내소설이 주춤하고 있는 요즘 은 아주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는 한편 6권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많을 텐데요.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고구려는 저의 필생 역작이라 함부로 써지지가 않습니다. 저의 기준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삼국지보다 반드시 나아야 한다’이기 때문에 그간 반만 완성하고 지금 나머지 반을 깊이 구상하고 있습니다. 최근 좋은 플롯을 완성해 기쁩니다.
△ 김진명 작가
대표작 , , , , , 등
2500년 전 공자의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유는 뭘까? “그거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으니까 그렇지.” 오종남(吳鍾南·63)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세상에서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을 권한다. 왜냐, 기원전에 살았던 공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인생이 고달픈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이 책이 언제 그의 손에 들렸는지는 모른다. 그건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최근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그의 마음에 드는 책이다. 논어, 맹자, 대학 등 다양한 고전을 읽어봤지만 이토록 쉽고 명쾌하게 고전을 요약해놓은 책은 없었다.
“책의 저자가 나보다 한 10년쯤은 젊은 사람인데, ‘이야, 참 멋있는 책을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도 여러 번 읽고 주변에도 많이 선물해줬죠. 제가 IMF 상임이사 시절에 IMF 총재가 제주에서 열리는 연차총회에 가는 길에 잠시 서울을 들른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을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산을 모시고 올라갔죠. 서울의 역사와 한강의 기적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니까요. 이 책도 그런 책이에요. 논어, 맹자, 손자병법, 도덕경, 중용, 대학이 한 권에, 그것도 쉽게 읽어볼 수 있게 돼 있잖아요. 고전을 읽어본 사람이든 아니든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이죠.”
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成器), 인불학 부지도(人不學 不知道)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길을 모른다’는 뜻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오 고문은 이 말을 곱씹어 본다.
“대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요. 사람들이 지식이 많은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죠. 배운다[學]는 것도 지식을 학습하라는 게 아녜요. 지식은 요즘 스마트폰에 다 있잖아요. 그렇다고 운전면허 따듯 기술을 배우라는 뜻도 아니죠.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道)]을 깨치라는 거예요. 사람이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몰라요. 나는 그런 의미로 ‘인불학 부지도’를 해석하고 있어요.”
성공하는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는 중년이 되고 나서 성공이라는 게 참 간단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령 장사를 하더라도 손님이 다시 찾아와야 성공하는 것이고, 잡지를 보고도 다음 달에 또 보고 싶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아주 간단해요. 예를 들어,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이 오는 친구를 A라 하고, 내가 필요할 때 전화를 걸어 수다 떨고 싶은 친구를 B라 합시다. 본인 입장에서 어떤 친구가 더 좋겠어요? 당연히 B겠죠.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B가 되는 거죠. 자기가 B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거예요.”
그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적자생존(赤字生存)’이다. 적자를 보는 게 성공하는 사람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타임 스팬(time span), 즉 기간을 얼마로 보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친구들은 주로 더치페이를 하죠. 만약 친구와 밥을 먹는데 오늘 내가 밥을 샀어요. 당장 오늘은 마이너스겠죠. 그럼 그 다음번에 그 친구가 ‘저번에는 네가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마’라고 할 거 아녜요. 그게 인간의 염치라는 거니까요. 그러면 다시 플러스가 돼서 결국 0이 되겠죠. 돈은 똑같이 들겠지만 더치페이를 할 때는 없던 정이라는 것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오늘 적자라 해서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나 멀리 내다보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래도 염치없는 인간을 만나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면 안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럴 때는 그냥 손해 보는 거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긍정적 사고라고 착각해요. 되긴 뭐가 되겠어요.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 뭐가 안 되더라도 ‘그래 그런 거지 뭐’ 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가짐, 그게 긍정적인 거예요. 그러니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그거에 집착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유니세프 사무총장 오종남의 2년 급여 ‘1원’
2013년 2월부터 2015년 3월까지 2년 여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직을 수행한 그가 받은 총 급여는 단돈 1원이다. 그는 보람으로 일구어낸 1원을 급여통장이 아닌 1원이 박혀 있는 기념패로 대신 받았다.
“내 본업은 김앤장 고문이에요. 그 외의 일들도 많이 겸하고 있지만 본업 외에는 원칙적으로 다 봉사라고 생각해요. 근데 규정상 유니세프 사무총장은 보수를 받게 돼 있다지 뭐예요? 나는 받고 싶지 않았는데 꼭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럼 나 1원만 줘라’ 그런 거죠.”
연봉 1억원을 받는 사람은 수없이 많겠지만, 그처럼 연봉 1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까? 1원을 받고도 이토록 행복한 사람은 또 있을까? 그는 급여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보람되고 행복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커다란 드럼통에 옥수수 전분 같은 것을 잔뜩 넣고 죽처럼 끓여 먹곤 했거든요.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때 그 죽이며, 공책, 연필 등이 다 유니세프에서 온 것이더라고요. 그 죽을 먹고 자란 내가 사무총장이 돼서 아프리카나 라오스에 있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돕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돕는다는 것은 말이죠, 도움을 받는 사람 이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행복해야 해요. 다들 그런 감정을 느끼며 행복을 나누고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