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요즘 감성도 아니고 ‘갬성’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감성의 신조어로 ‘감성+추억’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아날로그적 향수가 그립다면 나주여행을 떠나보자.
나주는 천년 고도인 도시다. 고샅길(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나주 시내를 걸으며 갬성 나주와 마주할 수 있다.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붓는 토렴이라는 과정을 거쳐 75℃의 먹기에 알맞은 온도로 나오는 나주곰탕과 입천장이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톡 쏘는 영산포 홍어는 나주여행의 특미다.
나주여행의 요즘 테마는 쉼이다. 특별한 잠의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한옥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을 추천한다. 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한 카페이자 갤러리, 게스트하우스인 ‘39-17마중’에서 한옥의 창호가 자연과의 소통임을 느끼며 잠을 잔다. 두 겹의 미닫이 문 너머에 금목서, 은목서, 느티나무, 회화나무 잎이 흔들리고 대숲을 지나는 시원한 바람소리가 밤새 소곤거린다.
난파고택으로 불렸던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을 막아낸 공로로 해남군수에 제수된 정석진의 큰 아들 정우찬이 살았던 집터다. 정우찬의 손자인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다시 집을 지어 드리며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전남의 유일한 건축가였던 박영만이 설계하고 대목 김영창이 시공하였다.
한·일·양 건축의 좋은 점을 취합한 목서원은 내부 창호, 온돌은 한식, 붙박이 수납장과 집안을 지탱하는 뼈대와 구조는 일본식, 여기에 서양의 방갈로 느낌까지 가미하였다. 목서원은 건물 앞과 옆에 100년이 넘은 금목서, 은목서 두 그루가 자라고 있어서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머니가 쓰실 공간에 대한 편리성과 가옥의 멋을 함께 추구하고 있어 이채롭다.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는 방에는 사용하던 소품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일본식 수납장을 열면 천연염색 소재를 사용한 이불이 정갈하게 개켜있다.
언덕 위에 아담한 한옥 난파정도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다. 난파(蘭坡)는 정석진의 호로 ‘난이 가득 피어있는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난파정은 본래 제당으로 지어졌다. 정우찬이 아버지 정석진을 추모하기 위해 1915년에 지은 건물을 복원하고 재단장 하였다. 나주천이 내려다보이는 볕 좋은 남향에 위치한 난파정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멋스러우나 금성산을 끊어내듯이 광주, 목포간 고속화 도로가 지나고 있음이 옥에 티다.
예전 쌀 창고자리였던 곳을 개조한 카페 바로 옆에는 나주향교가 있다. 카페에 앉아있으나 감각적으로는 옛 나주의 한가운데에 홀연히 떨어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마당 곳곳에는 야외 테이블이 놓여있다. 금목서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앞에 두고 바람을 느낀다.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마음은 한껏 여유롭다.
옛것을 최대한 살려서 복원한 목서원, 난파정과 나주향교, 석류꽃 가득 핀 작은 골목길들을 걸으며 만나는 금성관, 서성문까지... ‘갬성 나주’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 앞바다 관광 유람선에 올라 파도가 이는 바다를 바라보니 작고한 서영춘 코미디언이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 고뿌(컵) 없으면 못 마셔요!”라며 웃음을 주던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좋은 풍광도 카메라 없이는 남겨둘 수 없다.
유람선 실내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흥에 겨운 승객들이 춤사위로 요란스러웠다. 갑판 위에 올라 드넓은 바다를 바라본다. 웅장한 인천대교가 위용을 드러내고 유람선 꽁무니를 따라 날고 있는 갈매기 떼는 승객들이 갑판 위 난간에 기대어 던져주는 새우깡을 먹으려 달려든다. 순식간에 먹잇감을 포획해가는 갈매기 모습이 신기한 듯 사람들은 감탄을 한다. 과자를 하나라도 더 먹으려는 갈매기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람선을 쫓아온다.
그래, 먹이를 낚아채는 순간을 사진에 담아보자. 찰나의 장면이라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셔터 속도를 단축할 수 있는 고급 기종의 카메라가 부러워진다.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승객 중 한 분이 먹이 던져주는 역할을 자청한다. 고마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분에게 새우깡을 주는 손의 위치를 미리 정해준 뒤 초점을 수동으로 맞추고 먹이를 채어갈 갈매기를 기다렸다.
주변을 흐리게 하기 위해 최단 거리로 좁히며 다가섰다. 갈매기의 깃털과 눈의 선명도를 높이려 렌즈 조리개는 8로 정했다. 렌즈 구경을 더 좁혀도 되지만 갈매기의 순간 동작을 정지화면으로 만들려면 셔터 속도를 허용 범위 안에서 높여야 했다. 그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능청을 떨며 거듭 부탁을 했다. 고맙게도 한참을 응해줬다. 삼각형, 대각선 구도를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연속 촬영을 해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순간 포착‘이라는 제목도 붙었다.
사진 촬영에 도움을 준 분은 전남 목포에서 관광 온 단체의 일행이었다. 자기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속셈을 직감으로 알았으나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난 후 일행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보내줬다. 너무 감사하다는 답신이 왔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소청도를 출발한 ‘코리아킹’은 불과 10여분 남짓 달려 대청도 선진포항의 선착장에 닿았다. 멀리서 봐도 아담하고 각양각색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여행사에서 버스 한 대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아직은 저녁 먹을 시간이 어중간하여 일단 해안을 돌면서 일몰구경하기로 했다. 대청도 선진포항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부터 중국 상선의 이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중국 선원들은 항해하다가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이곳이 정박하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여장을 풀곤 했다. 또한 선진포항은 일제 강점기 포경회사의 기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18년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고래잡이는 1944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농여해변
대청도는 주민들의 90%이상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섬 일주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해변과 절경들이 이어져 있는 곳이 대청이다. 버스를 타고 얼마를 지나 해안선에 도착했다. 썰물이 시작되었는지 바다가운데 모래언덕이 드러나 있었다. 썰물에 드러난 모래언덕을 ‘풀등’이라고 했다. 드러난 풀등을 구경하면서 농여해변을 걸었다. d이곳은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고운모래가 사각사각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기이한 모양의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진 형상을 하였는데, 고목바위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결은 보통 가로무늬 결인데, 이 바위에는 유독 세로로 결이 나 있었다. 지구의 나이를 46억년 정도로 친다면 고목바위의 나이가 20억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수십억 년 전에 바닷 속에 퇴적물들이 쌓였다가 지진이나 융기현상에 의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고목바위가 서 있는 곳도 깊은 바다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결무늬는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현상으로 생긴 ‘연흔’이다. 바위에 있는 ‘연흔’을 ‘화석연흔’이라고 하고 바닥에 있는 가로연흔을 현재 생존하는 ‘현생연흔’이라고 하여 지질학적 가치가 큰 해변으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고목바위 앞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농여해변을 지나 미아동 해변까지 걷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몰이 가장 예쁘다는 ‘농여해변’이었지만 해무로 인해 일몰을 볼 수는 없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절경이 이어진 해변을 구경하다보니 배도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음식점에서는 이미 근사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싱싱한 홍어회와 소라, 그리고 갑오징어 요리가 한상 가득 채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고래잡이는 1930년대 이후 쇠퇴하고, 지금은 홍어, 우럭, 광어, 농어 등이 대청앞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그중에서도 홍어가 많이 잡히는데, 홍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흑산도와 목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홍어의 70%가량이 대청도에서 잡힌다고 했다. 여기서 잡힌 홍어는 흑산도와 목포 쪽으로 내려가 가공되어 팔린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삭힌 홍어가 아닌 싱싱한 홍어를 회로 썰어냈다.
사실 삭힌 홍어에 길들여진 입맛이었기에 처음에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다보니 입안에 착착 감기는 맛이 별미였다. 특히 마지막에 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여낸 홍어애탕은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한층 입맛을 돋우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잘 먹고 숙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 후배 동문 간에 정겨운 얘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2년 후에 닥칠 개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논의 되었다. 요즘 북핵폐기와 관련하여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핫이슈인 서해5도는 백령도를 포함하여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대연평도, 소연평도) 그리고 강화도 위쪽으로 우도라는 섬을 일컫는다. 서해5도는 1953년도 정전협정 당시 육상의 DMZ는 합의 설정이 되었지만 해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6.25전쟁당시 치열한 전투 끝에 확보한 서해5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UN사령부에서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 NLL이다. 한반도의 화약고처럼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이지역인 셈이다. 근래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바로 이지역에서 일어났다.
경이로운 모래사막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다시 투어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옥죽동 해안사구로 향했다.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옥죽동 해안사구는 오랜세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면서 거대한 모래산을 이루었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계절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활동성 해안 사구이다. 푹푹 빠지면서 모래산을 오르다 보면 실물크기의 낙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사막은 없지만 고비사막이나 사하라 사막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관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하여 모래울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울 해변의 풍경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송군락과 더불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청도에는 삼서 트레킹이 있다. ‘삼각산’으로부터 ‘서풍받이’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라 앞 글자를 따서 ‘삼서’ 트레킹이라고 부른다. 대청도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은 높이 343m로 인천광역시에 가장 높은 계양산(354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삼각산-기름항아리-마당바위-서풍받이-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총 길이는 약 7km 정도이며 소요시간은 대략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삼각산 트레킹은 생략하고 서풍받이 트레킹만 하기로 결정했다. 서풍받이 트레킹이 시작되는 광난두정자각에서 단체로 인증 샷을 남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대청도는 작은 섬치고는 지형이 꽤나 울퉁불퉁하고 높은 편이다. 하늘전망대까지의 여정은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힘들게 헉헉거리며 하늘전망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 준다. 전망대 앞바다에는 대갑죽도가 있다. 모양은 사람이 입을 벌린 옆모습과 흡사하다. 하늘을 향해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모습인
대갑죽도는 주민의 90%가 어민인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섬이라고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짧은 트레킹 코스의 반환점이자 대청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는 조각바위언덕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서풍받이, 왼쪽엔 조각바위 언덕의 정상, 뒤로는 넓은 갈대밭과 둑바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길이 있다. 잠시 땀을 닦고 숨을 골랐다. 어제 저녁에 못 다먹은 홍어회와 소주로 정상주를 한 잔씩 돌렸다. 시원한 해풍에 정상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더구나 최고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먹는 싱싱한 홍어회는 우리 모두를 황홀감에 물들게 했다. 시간을 보니 ‘코리아킹’이 일행을 태우러 올 시간이 불과 1시간여밖에 남지를 않았다. 부지런히 하산을 했다. 선진포항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성게 칼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나니 몸은 노곤하고 늘어졌지만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항구로 내려왔다. 어느덧, 1박2일의 트레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으로 소청도와 대청도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보고 간다. 이 멋진 풍경들이 당분간은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이 가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원망스러운 여름이었다. 강이 바닥을 드러내고 호수가 말라 땅이 갈라졌다. 한국에 일하러 온 아프리카 사람들 사이에 한국 날씨가 더워서 못 살겠다는 유머가 돌 정도였다. 온열 병 환자 중에 사망자도 많이 발생했다. 농작물은 타들어 가고 가축들도 집단 폐사했다. 기온은 매일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식수공급이 중단된 지역도 생겼다. 급기야 태풍만이 이 비상사태를 잠재울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매스컴에서는 북태평양에서 매번 태풍이 발생할 때마다 한반도 상륙 가능성을 보도했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방향을 틀 때는 모두 안타까워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아무튼,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더위도 잠재우고 비도 가져올 수 있는 태풍 솔릭이 한반도로 향했다. 문제는 솔릭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고 제주도를 비켜 가면서 보여준 위력은 한반도를 덮치면 그 위력이 어마어마할 수 있겠다는 불안을 키웠다. 서남 해상에서 그 속도를 4㎞까지 줄이며 폭우와 강풍을 휘몰아칠 때는 더 큰 공포가 밀려왔다. 한반도의 허리인 수도권을 가로 지르면서 어마어마한 바람과 폭우를 쏟아부으면 가공할 만한 피해가 우려된다고 연일 매스컴에서 떠들어댔다. 강풍에 대비하려면 창문을 엑스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는 것보다 사방 창틀에 단단하게 테이프를 붙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그림까지 보여주면서 공포를 조장했다. 과거 사라호 태풍부터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준 대형 태풍의 피해 영상 자료들도 총출동했다. 태풍이 상륙하는 지점이 태안반도, 군산, 평택 등으로 수시로 바뀌면서 상륙 지점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전국의 학교는 휴교령이 발령됐다. 모 방송국에서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태풍의 진로를 따라가면서 그 생생한 피해 현장을 보도하겠다는 야심 찬 태풍 실시간 중계 계획을 발표했다.
그 모든 예측과 달리 태풍 솔릭은 방향을 급선회해서 목포 인근으로 상륙했다. 상륙하기 전에 이미 많이 약화되어 한반도를 지날 동안 예상보다 적은 피해를 남겼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수도권에 피해를 주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수도권에만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 방송맨트를 듣고 있자니 영 불편했다. 농작물 피해는 피해가 아닌지도 묻고 싶다. 농작물 피해는 곧 농민들의 피해로 직결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도 기다렸던 태풍 솔릭이 가뭄 해소에는 역부족이라고 아쉬워들 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비가 오지 않아 해갈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방송에서 여과 없이 내보내는 것도 듣기 불편했다. 원하고 원해서 태풍 솔릭을 보내줬는데도 우리는 불평불만을 그치지 않았다. 인간사도 그렇지 않은가. 도움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도움을 줬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충분한 도움이 안 되었다고 불평불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번 늦여름 물 폭탄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의 응징 같다. 그리도 원하던 태풍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얼마나 물을 더 줘야 만족하는지 보자’하는 자연의 응징 말이다.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다. 매년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용하게도 매년 장마가 오고 태풍이 와 주어서 가뭄이 어느 정도 해소되곤 했다. 물관리를 잘 한 게 아니고 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올해처럼 장마가 짧고 더운 날씨가 길어지면 식수도 부족한 지경이 된다. 농민들은 여름 내내 작물에 물 대느라 고생한다. 그러나 이번처럼 곡식이 익어갈 때 내리는 늦여름 물 폭탄은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린다. 질병관리본부의 올바른 손 씻기 홍보영상을 보면 무려 6단계의 방법으로 30초 이상 손을 씻으라고 권장하고 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30초 동안 받아보니 세면기 하나가 가득 차 넘치는 정도의 양이다. 매번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쓰면서 손을 씻어야 질병으로부터 안전한지는 모르겠지만, 부처마다 물관리에 대한 개념도 엇박자라는 생각이 든다. 올여름처럼 식수도 고갈되는 가뭄은 앞으로도 빈번히 일어날 것이다.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바뀌어 가는 징조는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머잖아 국토의 사막화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유럽 여러 마을을 여행하다 보면 빗물을 저장하고 활용하는 시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물 부족 국가에 사는 우리는 빗물 활용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특히 도심지의 양호한 도로포장 상태는 빗물이 잠시라도 머물 수 없는 구조다. 작게는 개별 건물에서부터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빗물관리 계획이 시급하다.
청중은 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서 박수쳤고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제2인생을 준비하는 은퇴자를 비롯해 교사, 시인, 사진작가 등 모인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도 참 다양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들 앞에 선 강연자는 이동순(李東洵·68)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라는데 옛 대중가요에 심취해 살다 보니 ‘대중음악 연구가’라는 이름표도 늘 따라다닌다.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로맨스그레이 이동순 대표는 강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노래를 직접 들려주며 이해를 돕는다.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일깨우며 살고 있는 이동순 대표의 이야기를 동년기자가 직접 들어봤다.
6월 말 만난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로 풀어보는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야기경영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미래유산과 서울시가 후원한 이 강좌는 서울미래유산(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현재 문화재 등록이 안 된 서울의 근현대 유·무형 유산) 중 하나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이어 역사를 이해하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가수의 인생 스토리는 물론이고 서울의 옛 거리도 슬라이드 사진으로 더해졌다. 이동순 대표가 맛깔나는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청중도 따라 부르면서 시간여행을 하듯 추억 속으로 함께 잠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대중가요 사랑과 전파에 쏟는 열정은 국보급이다. 이동순 대표는 대구 계명문화대학교 평생교육원의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며 힐링하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센터 이름을 지었다. 주 활동무대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지만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대중가요 연구가이기에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모시기 바쁘다. 지금까지 공연을 겸한 강연을 500회 넘게 한 것 같다고.
대중가요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동순 대표는 대학 졸업 무렵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를 쓰는 문인이자 학자로서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를 엮어 ‘백석시전집’(1987)을 발간했으며 ‘백석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인의 삶 외에 특이한 이력 하나가 바로 ‘대중가요 연구가’라는 타이틀이다. 대중가요에 심취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동순 대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산달을 얼마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답니다. 피란도 못 가고 경북 김천 선산 가까이에 있는 초가에서 저를 낳으시곤 10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딸자식 둘은 계모 설움 안 받게 해 달라, 포대에 싸여 윗목에 누워 있는 어린 핏덩이는 곧 나를 따라올 테니 걱정 안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유년 시절이 되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유난히 설움과 눈물이 많았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수성 또한 섬세하고 예민했다. 이 시절의 성격이 시인이 되는 데 일조한 것 같다고 이동순 대표는 회고했다.
“전매청 창고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놓고 ‘정오의 희망음악’이라는 방송을 듣곤 하셨어요. 이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그리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같은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어요.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도 저런 목소리였을 거야’라며 상상하곤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빈 종이와 연필을 찾아 미친 듯이 가사를 옮겨 쓰기도 했다. 가사를 적으면 노래가 외워지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이 그를 대중가요에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반 가득한 친구 집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등하교를 같이하던 길목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 방에는 탐나는 예쁜 전축과 함께 음반이 가득했다. 혼자 몸으로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구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전축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 음반이 가득 꽂힌 방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 온종일 노래를 들으며 대학노트 두 권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 가사를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친구 집에서 기록했던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한 480곡쯤 될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 대중가요 연구의 밑천이 되었어요. 가요 평론가로 가요 해설가로 또 노래를 부를 때도 당시 기억을 다 써먹고 있습니다.(웃음)”
학창 시절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잘 부르기까지 하니 섭외 1순위가 당연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등 어디서든 칭찬받는 것이 좋아 능청스럽게 무대에 선 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치 남자 기생이 된 거 같았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임이 노래 부르게 하고 술 한 잔씩 따라주곤 했거든요. 그야말로 노래 사역을 한 셈이었어요.”
꿈을 포기하고 대중가요에 빠져들다
이동순 대표의 젊은 날 꿈은 방송인이었다. 대학 시절 방송반 활동을 쭉 했기에 당연히 기자나 라디오 PD쯤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시험 신원조회에서 친척의 부역 기록이 발견됐다. 연좌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방송인의 꿈은 펼치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누구보다 빨리 국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고서와 음반도 사 모을 수 있었다. 천직처럼 느꼈던 대중가요 연구는 1980년대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살펴보니 일제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이 대부분 가사를 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사가 굉장히 품위가 있고 훌륭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중가요를 ‘뽕짝’ 혹은 ‘딴따라’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모멸적이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딴따라는 두드리고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요.”
당시 대중음악가들이 자해의식, 피해의식 등 상처가 많았다고 이동순 대표는 진단한다.
“대중음악가가 술집에서 서양음악을 하는 작곡가나 성악가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서양음악 가들은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음악계에 반상계급 의식이 존재했는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중가요 연구에 심취하다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를 ‘문화적 번지를 잃어버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음악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양음악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가요’야말로 민족 예술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도구인데 ‘왜 이렇게 천대를 받나!’ 하는 생각에 1981년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요에 대한 에세이, 신문 칼럼, 논문을 수시로 썼다. 2001년 월간조선에 1년여 기고했던 옛 가요 관련 에세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요 연구가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갈 즈음, 대구MBC에서 연락이 왔다. 옛 가요를 중심으로 한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원래 방송인이 꿈이었으니까요.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행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방송을 함께할 작가를 구해주기로 했으나 옛 노래에 대해 잘 아는 작가가 없었다. 결국 원고 준비에서부터 내레이션, 노래 선곡까지 이동순 대표 혼자 도맡아야 했다. 1인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주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방송을 했어요. 나들이 갔다가 길이 막힐 때 라디오를 트는 황금시간대였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죠.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송 진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잖아요.”
자부심도 대단했다. 5년 동안 이어온 방송 진행으로 가요 연구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은 전국에서 강연 초청이 물밀듯이 들어와 정신없다고. 청중에게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아코디언도 배웠다.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생겨나 색소폰, 장구는 물론 판소리할 때 쓰는 소리북과 거문고 등도 익혔다.
“삶이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질 수 있는 악기가 늘어나니까 아주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걸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강연 반, 공연 반 이렇게 합니다.(웃음)”
악기를 배우고 보니 재능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산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아가 치매 노인들에게 옛 노래를 들려주곤 한다고.
“요양원 직원들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치매 노인들을 미리 홀에 모아 앉혀놓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목석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노인들을 위해 연주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10분, 20분이 지나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의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낄 때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떠돌이 유랑가수로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다
노래방 가사책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노래방 가사책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생일대의 결투가 있다. 바로 김지하 시인과의 대중가요 부르기 대결이다. 김지하 시인은 가왕(歌王) 조용필도 꺾은 문단계 노래 지존으로 불렸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댔다. 보다 못한 김지하의 후배가 “청주 시골뜨기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놀리자, 김지하는 “그런 놈은 우리가 꺾어야지” 하면서 대결을 신청했다. 배심원도 배석할 정도로 큰 대결이었다.
“같은 노래도 안 되고 상대방이 부른 노래도 부를 수 없고 별별 규칙을 다 만들어 노래 대결을 했습니다. 밤 9시에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도 안 끝났어요. 김지하 씨가 ‘아이고,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처음 보네.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시는 안 할란다!’ 하면서 항복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인 김성동 소설가가 이 일화를 이동순 대표가 1987년에 출간한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발문에 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대결은 이동순 대표가 대중음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이동순 대표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고 잘 부르지만 특히 고운봉의 ‘명동 부르스’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부른다. 자신의 음색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는 역시 이화자의 ‘어머님 전상서’, 백련설의 ‘어머님 사랑’, 현인의 ‘비나리는 고모령’ 등이다. 어머니와 관련한 노래나 글자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학자의 길을 걷지 않고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함경도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악사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옛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떠돌이 유랑 가수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 옛 노래를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대중가요 연구가. 이동순 대표의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모습 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중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이 숨겨져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왠만한 걱정거리나 별별 소리를 들어도 귓전에 바람소리처럼 흘러들을지 알았다. 아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겨야 할 일도 마음에 맺혀지고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예전에도 나쁜 일은 어른들 모르게 쉬쉬했다. 아시면 괜히 마음고생 하신다면서 철저히 숨겼다. 내가 겪어보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헌혈과 관계되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지금까지 헌혈을 66회 했는데 이제 와서 헌혈 부적격자로 딱 걸렸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쁜 매독항체 검사에서 판정보류를 받은 것이다. 양성 반응이면 양성반응이고 음성반응이면 음성 반응이지 판정보류가 뭔가! 잘 모르겠다는 말이 아닌가! 혈액에 대한 모든 검사는 혈액검사소에서 하기 때문에 헌혈을 직접 하는 ‘헌혈의집’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줄 전문가가 없다. 발만 동동 굴리며 걱정을 한다.
매독은 성병의 일종이다. 필자는 결단코 여기에 연루될 지저분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뭔가 혈액검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혈액검사를 다시 해 달라고 팔을 걷어붙이고 요구를 했다. 검사결과는 변함없는 딱 넉자 ‘판정보류’를 재차 받았다. 필자는 당뇨약이나 고혈압 약 같은 모든 약을 먹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헌혈을 하는 것이다. 가끔씩 비타민C를 먹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가을에 아들이 한의사 이경제씨가 직접 조제해서 만들었다는 ‘황제 천용단’을 먹은 적은 있다. 홈쇼핑에서도 대대적인 선전을 한 건강 보조제다. 이것의 내용물이 이런 검사 반응을 불러왔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별별 의심도 다했다. 병원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하면서 피를 뽑아 혈액검사를 했지만 아무런 이상통보를 받지 못했다. 다시 헌혈의 집을 찾아 혈액검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똑 같은 ‘판정보류’다.
헌혈100회를 달성하여 헌혈명예의 전당에 오르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2016년 4월12일 헌혈 50회를 달성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부터 금장을 받았다. 이만하면 목표도 이루었고 나이도 있으니 이제 헌혈을 그만 하겠다고 헌혈의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한참을 지나 적십자사 홍보요원으로부터 전화한통을 받았는데 계속 헌혈을 해 달라는 헌혈독려 전화였다. 잊고 지내던 헌혈 욕구가 되살아났다. 다음 목표를 세운다면 헌혈 100회를 달성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일이다. 100회라면 앞으로 50회를 더 해야 한다. 까마득한 목표에 과연 달성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 해보기로 했다.
이런 헌혈 목포와 순조로운 진행이 난데없는 복병을 만나 중지 되는 것도 억울하지만 진짜 내 혈액 속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앉으나 서나 낮이나 밤이나 늘상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을 믿으면서도 의심은 걱정을 낳는다. 어렵게 적십자사 혈액 전문상담사와 통화를 했다. 몇 달 쉬었다가 다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너무 걱정이 되면 종합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했다. 아무리 종합병원에서 이상이 없다는 증명을 받아도 헌혈은 혈액검사소의 자체 검사를 통과해야 받아준다. 이런 기능은 정말 잘 하는 시스템이다.
자신을 믿기 때문에 검사방법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늘 찜찜해 했다. 두 달이 지났다. 다시 헌혈의 집에 가서 혈액검사를 신청했다. 간호사가 몇 달 더 있다가 해보라는 것을 불안해서 그러니 해 달라고 했다. 이틀 뒤 검사결과를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지극히 정상이다. 합격이 된 것이다. 허망했다.
자신을 믿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불안했는데 해외여행이나 매춘에 관계되었다면 자살할 만큼의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나이든 사람의 소심함을 이해하고 더욱 신경을 써줘야 한다.
올해로 구순이 되는 노모를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남도 나들이를 다녀왔다. 잔치 대신 해외여행을 추천해 드리니 지난 추억이 있는 그곳을 돌아보고 싶으시단다. 우여곡절 끝에 일정을 맟춘 네 자녀들과 함께 변산-개심사-내소사-목포-신의동리-광주-담양을 4박 5일 동행했다. 모두가 귀한 기억을 하나씩 더 안고 온 흡족한 추억 여행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헌것 주면 싫어해요.”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 방문에 앞서 일가친척에게 보낸다며 온갖 것을 정리하신다. 한 달 전부터 방 한쪽에 놓인 가방에는 눈에 익은 낡은 옷가지에서부터 모자, 가방, 스카프, 냄비, 스테인 그릇, 전자제품, 갖가지 건강기구까지 한 살림이다. 나들이용으로 당신 카디건을 장만하면서 동서 블라우스, 시동생 티셔츠, 사촌조카 치마까지 거침없는 노모의 구매가 조금은 낯설었다. 바리바리 싸놓은 보따리가 한 짐이다. 급기야는 겉옷까지 주고 오셨지만 더 못 준 것이 아쉽다 하신다.
묵은 추억을 찾아가는 마음은 기존 여행과는 사뭇 다르다. ‘기억 찾기 퍼즐놀이라고나 할까?’ 제각각의 추억을 지닌 관계로 감흥 역시 다르다. 기억의 파편들은 저마다 다른 프리즘으로 떠오르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몇 편의 이야기로 아스라하게 남겨지나보다. 내 어린 추억은 이렇다. 할아버지 댁 입구를 지키던 우람한 구슬나무, 넓게만 보였던 앞마당, 높이 올려보았던 감나무, 소와 닭이 잠자던 외양간, 흙바닥의 낮은 부엌, 아궁이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무쇠 솥에서 나는 보리밥 냄새, 땔감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재미난 불 때기.
‘시골집이 있기는 하나?’
좁은 농로는 2차선 도로가 되어버렸고, 실 같던 흙길은 시멘트에 덮여 낯설었다. 그 길에 서서 마을 주민에게 옛집을 물으니 손끝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반색하며 맞이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다. 서로 주름진 얼굴을 마주 보며 흐린 기억을 더듬으며 애써 끈을 찾는다. 선친께 술을 부으며 절을 올리고 나니 아직 남은 지인 몇 분이 찾아오고, 묵고 묵은 긴 이야기는 밤까지 이어진다.
바다 위로 섬을 잇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7월 준공이라는 말에 모터 나룻배로 섬을 이동하니 그쪽 역시 공원 조성으로 중장비 소리가 시끌하다. 하루 네 번 다니는 마을버스를 눈 빠지게 기다리다 물으니, 기사 양반이 친척 결혼식으로 뭍에 갔다가 오후에나 온단다. 시골답다. 덕분에 맥없이 길가에 한 줄로 앉아 구순 노모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전래 동화처럼 듣는다. 그 이야기 속에 철쭉, 벚꽃,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할미꽃, 수국 등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봄꽃이 참 곱다.”
따스한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벚꽃 사이를 걸으며 노모가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네 인생도 꽃을 닮았다는 말에 완전 동의하며 살아 있는 人花, 사람꽃끼리 한 번 더 쳐다본다. 동행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엄마와 같이할 수 있는 봄이 몇 해나 남았을까?’
소녀들이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는 이른바 걸그룹.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겼다 사라지는 이들에게도 조상은 있다. 바로 ‘김시스터즈’다. 한국전쟁 전후 미군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세 자매. 가수 싸이보다 훨씬 오래전 한국을 넘어 미국 전역을 흥분시킨 주인공들이다. 노래뿐만 아니라 춤, 악기에도 뛰어났던 한국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다큐멘터리 영화 이 그들의 파란만장 이야기를 담았다.
미국 무대! 무한 가능성, 겁 없는 도전!
숙자, 애자, 민자 세 명으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1953년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배고픈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란 눈의 병사 앞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 대가로 위스키 같은 현물을 받았다고. 이를 팔아 가족의 허기를 달랬으며 또 미래를 꿈꿨다. 노래뿐만 아니라 춤이면 춤, 악기면 악기 뭐든 주어지면 완벽한 하모니로 무대를 장악했다. 미8군에서 그들의 무대를 본 다수의 이방인은 김시스터즈라면 미국 무대에서도 통할 것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무한한 가능성에 모험을 걸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건너가 한 호텔의 전속 가수로 이름을 알리다 1959년 미국의 인기 TV 쇼 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는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만 서는 꿈의 무대. 상상불가이지만 김시스터즈는 에 비틀스보다 더 많은, 20회 이상의 출연 회수를 기록했다. 또 시카고 팔머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는 등 1960년대 미국 전역에서 화제의 동양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원조 K-POP 스타를 이야기하다
은 아시아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걸그룹, 원조 K-POP 스타인 김시스터즈의 음악 여정을 담아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뜯기고 찢긴 세월 속에서 탄생한 김시스터즈.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적 증거이고 폐허 속에서도 화려하게 꽃을 피운 자랑스러운 ‘우리’였다. 무엇보다 그들의 성공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과 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 김시스터즈 막내였던 민자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음식과 언어 소통 문제로 힘들었던 시간, 고된 연습 과정 등 화려한 이면 뒤에 가려진 ‘김시스터즈’ 각자의 인생 이야기도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우월 유전자에 노력이 더해진 국내 최초 걸그룹
대한민국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온몸에는 전설적인 천재 음악가 집안의 우월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시작점에 있는 김시스터즈의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족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김시스터즈 멤버 숙자와 애자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과 천재 작곡가 김해송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룹의 막내인 민자는 이난영의 오빠이자 작곡가인 이봉룡의 딸. 언니들과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재능을 지녔다. 그들은 우월 유전자를 과신하지 않고 진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난영은 김시스터즈 성공의 일등공신이다. 그룹을 결성한 뒤 노래와 춤, 악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훈련을 도맡았던 프로듀서가 바로 가왕 이난영이다. 아버지 김해송은 재즈, 만요(漫謠), 오페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던 작곡가이며 ‘오빠는 풍각쟁이야’, ‘연락선은 떠난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민자의 아버지 이봉룡도 ‘연락선은 떠난다’, ‘낙화유수’ 등 명곡을 작곡한 당대 유명 작곡가다.
은 ‘김시스터즈’의 성공 이야기와 그들의 가족 이야기 더 나아야 한국 대중음악의 시초를 찾아가는 역사 여행이기도 하다.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의 아내 오정심과 ‘노란 샤쓰의 사나이’ 작곡가인 손석우가 등장해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려준다.
음악에 무게중심을 두다
은 음악 다큐멘터리다. 김시스터즈가 활약했던 영상을 토대로 ‘김치 깍두기’, ‘아리랑’,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 ‘마이클 노를 저어라(Michael Row the Boat Ashore)’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찰리 브라운’은 김시스터즈가 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노래. 미국 보컬그룹 코스터스(The Coasters)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특히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낸 ‘김치 깍두기’는 음악을 넘어 시대와 가슴 아픈 추억을 담아냈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을 울리는,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명곡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은 열정 가득한 공연 장면들이 그 어떤 대규모 콘서트보다 더 흥겨운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영화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김시스터즈와 이난영이 함께한 공연이다. 한복을 곱게 입은 이난영이 구성진 목소리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은 익히 있지만 무릎까지 오는 플레어스커트에 세련된 화장과 머리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 없다. 그녀를 중심으로 율동을 하고 화음을 맞추는 김시스터즈의 모습은 온몸에 전율과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정보
감독 김대현
출연 김민자, 김숙자, 김애자, 이난영 등
러닝타임 70분
전업주부 사이구사 하쓰코의 열렬 한국 사랑 “아직 배울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한국 사극 보고 역사책 읽고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 없는 일본의 멋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하고 싶어요.”
똘망똘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지닌 사이구사 하쓰코(三枝初子, 1956년생)는 유홍준 교수의 일본편을 꺼내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 번역판이 아닌 한국에서 구입한 우리말 책으로, 아스카(飛鳥)문화와 교토(京都)유적에 대한 유 교수의 구수한 이야기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빠트리지 않고 덧붙였다.
“고대 도래인(渡來人)이 가져온 문화가 일본 각지에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일본적인 것이 싹트고 자라온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갈수록 관심이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 하쓰코가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흔히 말하는 한류 드라마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2009년께부터 봤다는 과 같은 사극이었다. 드라마의 재미에서 시작된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역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게 되었고, 그러다가 한국어가 일본어와 어순이 비슷해 공부해 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라 그리고 즐겨라
한글을 외우고 싶어서, 아니 혼자 배우는 독학의 재미보다는 다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서 그녀는 2011년 12월 동아리를 만들었다.
2012년 첫 한국 여행으로 제주도를 선택한 하쓰코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 사랑으로 바뀐 자신을 발견했다. 서슴없이 “도와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걸어오는 한국인,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아줌마가 “어디 가세요?”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는 등 일본에서는 사라진 인정(人情), 그 따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말 신기했죠. 일본인들이 잊고 살았던, 정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 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 사람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어요.”
그 뒤로 한국어 공부 동아리 사람들과 2012년 가을 서울 인사동, 한국 민속촌, 경기도 수원 화성 등을 돌았으며, 2013년에는 경북 경주, 안동 화회 마을, 부산에서 역사와 문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혼자서 4박 5일 동안 중부내륙 순환열차를 이용해 강원도를 비롯해 지방을 여행하고 판문점도 찾아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2015년에는 친정 아버님의 병환과 별세로 한국에 가지 못했고, 2016년 4월에는 3박 4일의 일정으로 전남 진도와 목포를 돌며 남도의 예술 향기와 맛깔스러운 음식에 흠뻑 취했다.
그녀는 여행 후에 일정과 정보, 유적 설명,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꼼꼼하게 정리해 파일로 남겼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전업 주부, 결코 평범하지 않다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 생가에 가고 싶어요”라고 밝히는 하쓰코는 두 아들의 엄마, 직장인 남편의 아내인 평범한 전업 주부다.
지금 사는 아파트가 1층이라 앞에 건물이 보여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산책과 트레킹, 특히 경관이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15년 전 사진 찍기를 시작해 DSLR 카메라와 300㎜ 렌즈를 배낭에 넣고 한적한 산에 올라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는 온갖 꽃들을 담고 있다.
물론 등산에 필요한 체력은 스포츠센터를 다니며 단련했지만, 역시 경치가 없어서 금방 질려 버린다며 신선한 공기와 푸른 자연이 있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생각이라고.
전업 주부인 그녀가 길지는 않지만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해 캠퍼스 생활을 누릴 때, 늦깎이로 컴퓨터와 제작 실무를 배워 후지쓰(富士通)와 가와사키(川崎)시의 재단법인에 각각 2년쯤 근무하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그 경험은 한국어 공부와 한국 여행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6월 제195회째 공부 모임을 마친 요코하마(橫浜) 한국어동화 독서회를 꾸려가며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과 라인 등 SNS를 이용해 모임 소식과 정보 공유, 그리고 회원들의 감상문 제출 등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후는 나를 위한 욕심쟁이로
액티브 실버, 한마디로 파워 넘치고 활기 찬 인상의 사이구사 하쓰코에게 꿈을 물어 봤다.
“꿈이 아니다. 희망이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서 그 풍부한 표현이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계속 공부해 유홍준 교수의 문화답사에도 꼭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2020년 도쿄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해 한국어 안내를 맡을 생각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말을 통해 마음이 서로 이어지고,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그 자리에 나 자신이 함께하고 있고, 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흥분된다.”
아울러 하쓰코는 3년 뒤 남편이 정년 퇴직을 하면, 첫 부임지로 가족이 함께 살았던 센다이(仙台)를 잊을 수 없어서 다시 그곳에서 당시의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며 지내고 싶다는 소망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정말 애쓰고 열심히 살아온 남편이랑 크루즈 세계여행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 줬다.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도전이야말로 다이나믹한 노후를 보내는 그녀의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에 활력을 심어 준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도 더욱 깊어지고 뜨거워질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는 너무 멋져요. 아름다워요. 파이팅 하쓰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