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오늘, 1972년 8월 30일은 평양 대동강문화회관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제1차 본회의가 열린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분단 이후 첫 공식적인 남북대화가 이뤄지자 많은 사람이 감격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북적십자회담은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주선하기 위해 남과 북의 적십자 간에 열린 회담이다.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의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 제의로 성립됐다.
1945년 국토 분단으로 한반도에는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7월 휴전 이후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했으나 북한과의 직접 교섭에 실패했다.
남북적십자는 이산가족의 확인, 상봉, 재결합 등을 의제로 삼아 서울과 평양에서 교대로 회담을 개최했다. 그러나 회담은 북한적십자회(북적)의 정치문제 제기로 실질적으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수많은 회담 중단사태만 거듭해오고 있었다.
이에 1954년부터 적십자사 국제위원회의 중개를 통해 ‘남북자 송환교섭’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 교섭에서도 납북자 일부의 생존을 확인하는 대답만 들은 채 귀향 희망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이던 이산가족상봉은 1970년대부터 물꼬를 튼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했다. 통칭 ‘8‧15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남북간 군사 대결을 지양하고, 인도적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8‧15선언’ 후 1년 만인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최 총재는 “남북이산가족들의 비극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며 “남북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뤄지기 어려운 현실에서 적어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소식을 전해 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찾기운동이라도 우선 전개할 것”을 북한에게 제의했다.
남측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에 북측은 그 해 8월 14일, 평양방송으로 이를 수락하고 “가족만이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포함해 그들의 자유 왕래를 실현하자”고 역제의했다. 이에 따라 그 해 8월 20일부터 9월 16일까지 판문점에서 다섯 차례 파견원 접촉이 이뤄지고,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여는 데 합의했다.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예비회담은 1971년 9월 20일부터 1972년 8월 11일까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남북적십자에서 각각 5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총 25회 열렸다.
예비회담에서는 본회담 장소, 일시, 의제, 대표단 구성 등을 논의했다.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정치적 문제가 불거져 교착 상태에 빠졌다. 북측이 이산‘가족’을 찾아주기도 전에 ‘친우의 자유 왕래’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훈련된 공작원을 대량으로 남파해 남한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서 국제 적십자활동의 기본 원칙인 ‘정치적 중립’ 위반이었다.
이에 남북적십자사는 비공개 실무회의를 통해 적십자회담과는 다른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하는 데 동의했다. 그 결과 남측에서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측에서는 박성철 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정부 간 관계가 부드러워지자 적십자 예비회담도 급진전돼 1972년 8월 11일 예비회담을 모두 마무리했다.
국토분단 27년 만에 처음 이뤄진 남북대화라는 기대 속에 본회담이 진행됐다. 본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7차례 개최됐다. 1차 본회담은 평양에서, 2차 본회담은 서울에서 개최됐다. 분단 후 첫 남북대화라는 감격에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나 차츰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남북 간 인식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남측은 정치성을 배제한 다음 ‘가족찾기사업’을 전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북측은 가족찾기사업의 선결조건으로 반공법‧국가보안법 철폐, 반공교육과 반공정책 중지 등 적십자사 권한 밖인 정치적 요구들을 내세웠다. 결국 돌파구를 찾지 못한 본회담은 1973년 8월 28일 북한의 전면 대화 중단 선언과 함께 단절됐다. 이후 남측이 몇 차례 회담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교섭이 반복해서 결렬됐다.
최근에는 이산가족 당사자들이 가족을 직접 찾아 나서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이산가족찾기운동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적십자를 통한 방법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는 민간단체를 통하거나 개별적으로 가족을 찾는 방법만 통용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8년 8월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개최됐으나, 이를 마지막으로 당국 차원의 교류는 전면 중단됐다. 현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당분간은 이산가족 상봉 성사 가능성이 낮은 상황이다.
생각의 관성(慣性)
직장 문을 나선 지 꼭 2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안식년을 포함해서 만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평소 바람대로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볓을 쬐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림 같은 경치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으며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 달 동안의 기숙사 생활 같은 것도 체험해봤다.
그런데 그동안 겪은 이런저런 경험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었다. 예를 들면, 출근 시간에 회사 방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다 중간에 옆길로 빠져 체육관을 향한다거나 회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등이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심을 향해 질주하는 차량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정신없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도 들었고, 아침 운동을 위해 체육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길로 들어서면 갑자기 세상에서 밀려난 듯한 묘한 상실감이 일던 기억도 난다. 내가 지나는 길에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도심과 반대 방향으로 달릴 때 역시, “이제야 내 시간을 찾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슬며시 끼어든, 마치 다른 세상에 편입된 것 같은 기분은 한동안 어쩔 수 없었다. 눈 뜨면 밥 먹고 회사 가는 일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면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慣性)의 법칙이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한 채로 있으려고 하며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해서 등속, 직선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방향으로 내달리다 보니 방향만으로도 낯선 환경이 실감났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방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이번에는 속도가 문제였다. 어느 날 오전,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가 이 시간에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안 하면 뭔가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나를 허둥대게 만든 것이다. 평소 누려 보지 못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고마워하긴 커녕 불안감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백팩 메고 공부도 하러 다니고 배움길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와 함께 생전 해보지도 않던 일 등도 하다 보니 언제 3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만 3년의 세월이 지나자 이제야 겨우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속도의 관성이 서서히 약해지자 비로소 그간의 내 행동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 시간이면 일어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는 것도 별로 없이 하루해가 금방 가던 실망스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멍 때리는 하루가 있어도 그날에 연연하지 않는다.
익숙한 생각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으니 생각의 관성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퇴직 후 삶의 기준을 전반기와 같이 할 수는 없으니 시간이나 생각과 마찬가지로 행동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 경우는 우선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과거에는 나쁜 일이 발생하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생각에만 집착해 불쾌해하고 짜증을 냈다면 지금은 ‘새옹지마(塞翁之馬)’로 흘려버리는 일이 실제 많이 늘어났다. 운전을 하다가도 전방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 있으면 초록색 불이 켜 있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이끌려 하고, 연속해서 초록색 불이 켜 있으면 오늘의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감사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한다.
물론 약속 시간에 늦었을 경우는 거리의 신호등을 모두 내 차에 맞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럴 일은 이제 별로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으니 조금만 일찍 출발해 세상 구경하면서 걸으면 운동도 되고 기분도 좋아진다. 좋은 생각의 관성은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이끈다. 결국 생각의 관성을 잘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요즘 뜻하지 않은 계기로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배우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폰트와 달리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캘리그라피는 글자의 의미 외에 그 자체로 제작물의 내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 방송의 타이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방송국에서도 이것만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글씨를 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기존의 문화센터 수업이 끊겼다가 새롭게 개강을 하게 되자 당시 여러 가지 조건이 캘리그라피와 맞아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캘리그라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자 그림에도 곁눈질이 간다. 이전에 봤던 판화가 이철수 님이 그린 촌철살인의 문장과 글씨체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그림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림을 배우면 나도 흉내를 낼 수 있을까?
그림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에 파스텔을 도배하다시피 그린 것으로 가작(佳作)을 받은 게 최고의 결과였다. 과연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단지, 반(班)에서 나보다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래서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지레 포기했을 뿐인 것이다.
내가 지금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에 출품할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못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꾸준히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느긋하게 마음 먹으니 전에 없던 용기도 생긴다. 혹시라도 아나? 내가 이쪽에 소질이 있다면 나는 생각지도 않던 작가가 되는 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 몸도 마음도 덩달아 상쾌해진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이래서 포기하고 저래서 포기하면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지금이, 지난 세월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자족하는 지금이 생각을 바꾸기 위한 적기(適期)라고 생각한다.
좋은 생각과 좋은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것이고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갈 것이다.
생각은 나를 점점 강하게도 만들고 약하게도 만든다.
바로 관성(慣性)의 힘이다.
•수상소감 - 우수상 산문 김영창
“우리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이지, 우리의 인생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퇴직 이후에 시작한 것인데 첫 공모전 출품에 상까지 받게 되니 용기백배입니다. 코 로나19가 진정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축하 파티를 해야 하거든요.
정보를 얻기 위해 몇 가지 뉴스레터를 구독하는데 거기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이 올라와 있더군요. 제가 우리 인생학교 카톡 동기방에도 소식을 퍼 날랐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카톡에서만 글을 주고 받는데 혹시라도 동기 중 누가 당선이라도 되면 단톡방이 왁작거리지 않겠어요? 제가 지금 동기회장이라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야 하거든요. 덕분에 목적을 100% 달성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발췌를 해가면서 읽었어요. 다 읽고 나면 핵심이 되는 문장을 인용한 후 거기에 제 생각을 엮어서 독후감을 마무리 하곤 했지요. 다 쓰고 보니까 뭔가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용한 문장은 거의 대부분 빼어난 문체이거나 깊이가 있는 글이거든요. 이렇게 요약한 글은 외부에서 강의를 할 때도 자주 인용을 한답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교육 프로그램 중 ‘1인 창직과정’이 있었어요. 그때 맥아더스쿨의 정은상 교장 선생님이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올리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요약만 했지요. 그러다가 “이러지 말고 조금 더 다듬은 문장을 만들어 보자”하고 시작한 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빈 공간을 채울 콘텐츠도 필요하고 해서 산문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걸 읽어 본 창직 동기들이 용기를 주더라고요. 당신 글에 공감 가는 게 많다고요. 제가 칭찬에 특히 약한 팔랑귀라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한 때거든요. 언제 까지고 다닐 것 같은 회사를 나왔지, 마땅한 일도 없지, 늙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는 않고. 퇴직 후 인생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어요. 글을 통해 솔직히 토로도 하고 용기와 격려를 주고받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신 정은상 선생님과 창직 동기들 그리고 우리 인생학교 중부2기 동기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제가 퇴직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 제 삶에 용기와 격려를 많이 해 주신 분들이거든요. 아! 또 한 분 있네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후’의 저자, 헤닝 쉐르프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hibition
◇요시고 사진전
일정 12월 5일까지 장소 그라운드시소 서촌
코발트빛 바다와 그 위를 헤엄치는 관광객, 알록달록한 파라솔.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잊고 있던 어느 여름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휴양지의 찬란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낸 요시고의 전시가 국내 관객을 찾았다. 요시고는 스페인 출신 포토그래퍼 겸 디자이너로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다. 유명 IT 매거진 ‘와이어드’와 베네통 매거진 ‘컬러스’로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킨포크’, ‘비트라’ 등 글로벌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중해부터 마이애미, 두바이, 부다페스트 등 세계 여러 여행지를 기록한 350여 점의 사진을 선보인다. 대칭적 구도와 기하학적 기법 등 작가만의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 ‘건축’ 섹션을 시작으로 미국, 아랍에미리트 등 사막의 풍광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섹션을 거쳐 해변과 바다, 관광객의 모습을 담은 ‘풍경’ 섹션으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작품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해, 세계 곳곳의 여행지를 함께 거니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방문객이 많고 대기 시간이 길어, 여유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
일정 9월 26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개념미술의 선구자 윌리엄 웨그만의 전시가 호주, 뉴질랜드, 스위스, 네덜란드를 거쳐 한국에 상륙했다. 윌리엄 웨그만은 화가의 그림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1970년대 미국 사진계의 보수적인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며 사진 예술을 주류로 끌어내는 데 이바지한 예술가다. 특히 그는 자신의 반려견 ‘만 레이’를 의인화해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내러티브를 시각화하는 사진 작업을 발표했다. 촬영 즉시 인화되는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활용해 후보정 없이 반려견과의 교감만으로 즉석에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대표작 ‘캐주얼’, ‘키’를 비롯해 희소성 높은 대형 폴라로이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점의 작품을 망라한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 외에 50점 이상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며, 디올, 입생로랑, 마크제이콥스 등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작도 선보인다. 반려견을 모델로 삼아 독특한 작업 세계를 구축한 윌리엄 웨그만의 이번 전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지친 현대인에게 웃음을, 반려동물 가구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 Book
◇나는 치매 의사입니다 (하세가와 가즈오 외 공저·라이팅하우스)
평소와 달리 기억이 흐릿할 때 떠올려보는 질문이 있다. ‘100에서 7을 빼보세요.’ ‘하세가와 척도’의 문항 중 하나로, 치매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인지 기능 검사법이다. 이 척도를 만든 하세가와 박사는 평생 수천 명의 치매 환자를 돌본 치매 의료계 1인자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치매에 걸렸다. 그의 나이 88세의 일이다.
신뢰받던 의사에서 치료받는 환자가 된 그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공개해 치매 연구에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표하고, NHK 방송국과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이 책은 그 기록의 결과물이다.
50년 넘게 치매를 연구했지만, 그는 환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치매에 걸렸다고 24시간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기억력은 흐릿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렇기에 주변인이 치매 환자를 삶에서 배제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대신 “나는 치매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남긴 2년간의 투병 기록은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병이기에 겁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불안은 줄어들고 희망은 커진다. 치매를 절망적인 질환으로 여기는 사회 속에서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단단한 태도 덕분이다. 의사와 환자의 기로에 선 그의 이야기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은 물론, 치매를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억을 잃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단서와 희망을 보여준다.
◇빨리 은퇴하라 (최승영 저·이은북)
은퇴를 앞둔 이들을 위한 진로탐색서.
단순히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점점 단단해지는 중입니다 (김영미 저·혜윰터)
노화로 우울감을 느끼던 저자가 환갑의 나이에 자전거 라이더가 된 이야기를 담았다. 어릴 적 사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전국 자전거길을 섭렵한 저자의 도전이 짜릿한 설렘을 선사한다.
◇빅토르 위고와 함께하는 여름 (로라 엘 마키 외 공저·뮤진트리)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인생 철학을 그가 남긴 희대의 명작들로 살펴본다. 평생 민중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정의를 향해 나아갔던 위고의 삶이 시대를 초월한 울림을 전한다.
● Stage
◇엑스칼리버
일정 8월 17일~11월 7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권은아
출연 김준수, 이지훈, 신영숙, 민영기, 최서연, 이상준 등
EMK뮤지컬컴퍼니의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2년 만에 재연을 올린다. ‘엑스칼리버’는 혼란스러운 고대 영국을 지켜낸 영웅 서사 ‘아더왕의 전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시골 청년 ‘아더’가 성검 엑스칼리버를 뽑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사들의 틈에 끼지도 못했던 평범한 인물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이 벅찬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서양 신화 속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국내 관객의 정서를 반영해 초연 당시 서사를 대폭 수정했으며, 아더의 내면적 갈등에 초점을 맞춰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번 공연 또한 초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을 거쳐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물, 불, 연기를 비롯한 특수 효과와 샤머니즘적인 퍼포먼스, 신비로운 영상 등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로 마법과 마술이 공존하던 시대의 배경을 극대화해 몰입감을 더할 예정이다.
◇분장실
일정 8월 7일~9월 12일
장소 대학로 자유극장
연출 신경수
출연 배종옥, 서이숙, 정재은, 황영희 등
일본 현대 연극의 거장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으로, 연극 ‘갈매기’가 공연 중인 어느 극장의 무대 뒤편 분장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서로 다른 사연을 지닌 네 여배우가 ‘맥베스’, ‘세 자매’ 등 고전의 명장면을 연기하며 무대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회한을 풀어낸다. 배종옥, 서이숙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표현하는 진짜 ‘배우 연기’가 완성도를 더한다.
◇광화문연가
일정 ~9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윤도현, 엄기준, 강필석, 차지연, 김호영, 김성규 등
이지나 연출, 고선웅 작가, 김성수 음악감독 등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해 2017년 처음 선보인 창작 뮤지컬로, 죽음을 눈앞에 둔 ‘명우’가 미스터리한 시간여행 안내자 ‘월하’와 함께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주옥같은 명곡을 토대로 해 ‘붉은 노을’, ‘옛사랑’, ‘소녀’ 등 1980~90년대를 장악한 음악이 옛 시절의 추억을 깨운다.
눅눅한 한여름 더위가 기승이다. 습하고 더운 날씨가 몸을 지치게 하고,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쉽지가 않은 요즘, 브라보가 서울 사는 ‘1970년생 영숙’ 씨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산림휴양지 3곳을 꼽아봤다.
서울시 중구 기준으로 1시간 내외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초여름 숲의 싱그러운 경치까지 즐길 수 있어 일석이조다. 잠시 여유를 찾아 역병과 무더위에 지친 마음을 달래줄 ‘산캉스(산+바캉스)’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성인처럼 삼성(三聖)산에서 누리는 푸른빛 힐링, 삼성산산림욕장
삼성산은 안양시 명칭이 유래한 곳이다. 고려가 세워지기 전의 일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지금의 시흥)와 과주(지금의 과천)를 점령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다 산꼭대기에서 피어오르는 오색구름을 목격했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능정이라는 승려가 “이곳에 절을 짓고 안양사라 칭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말했고, 이에 왕건이 절을 세워 안양사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이때의 안양사는 폐사되고 없다. 하지만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뜻하는 ‘안양’이 지명으로 남아있다. 현재의 안양사는 1950년대 후반 유명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재창건한 사찰이다.
삼성산의 ‘삼성’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윤필대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해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삼성산산림욕장에서는 성인이 된 듯 삼성산 일대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안양예술공원에서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삼성산산림욕장은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부터 안양사와 제1·2전망대를 지나는 5km 구간이다. 관악산과 함께 다녀오기 좋은 삼성산은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인근의 마애정 옆 작은 샛길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등산을 즐기는 시니어라면 1전망대나 2전망대를 거쳐 삼막사까지, ‘등린이’ 시니어라면 1전망대까지만 오르기를 추천한다. 이번 주말에는 성인처럼 녹음 속에서 마음 수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하철 타고 떠나는 치유와 힐링의 숲, 계양산산림욕장
계양산산림욕장은 연간 500만 명 이상이 찾는 인천 명소다. 봄에는 튤립꽃 전시를,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즐길 수 있어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어 수도권 등산객들도 많이 찾는 계양산의 명소는 둘레길과 장미원이다. 이 외에도 계양산성과 문화회관, 어린이공원, 어린이과학관 같은 다양한 즐길거리가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산림욕장 내에는 계양산 능선을 따라 ‘치유의 숲길’, ‘측백나무길’ ‘하늘길’ ‘우리꽃길’ ‘해맞이길’ 등 계양산 둘레길로 향하는 다양한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다. 이 중에서 무장애데크길이나 계양산성 탐방로는 걷기가 편하고 난이도가 높지 않아, 연로한 어르신이나 어린 아이들도 함께 이용하기 좋다. 특히 무장애데크길 옆에는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 면역력을 강화해 주는 피톤치드를 내뿜는 편백나무가 곳곳에 있어 매력적이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시니어에게 무장애데크길을 추천한다.
계양산 둘레길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발표한 ‘언택트 여행지 100곳’에 선정된 바 있다. 야외 관광지이면서, 자체 입장객 수를 제한해 거리두기 여행이 가능한 관광지로 인정받았으니 마음 놓고 다녀와도 좋겠다.
한 마리 학처럼 자유로와 한강, 북한까지 관망하는 심학산산림공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심학산은 조선시대 왕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나왔는데, 이 곳에서 찾았다고 해서 ‘학을 찾은 산’, 심학(尋鶴)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학이 좁은 궁궐에서 벗어나 심학산에서 탁 트인 전망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부를 정도로 심학산은 멋진 전망으로 유명하다. 산 정상에 올라 감상할 수 있는 서해의 낙조가 일품이다. 이 외에도 파주출판단지와 자유로, 한강 하구, 김포, 관산반도를 바라보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점도 심학산만의 매력이다.
심학산은 다른 산에 비해 높지 않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어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심학산 둘레길 역시 난이도가 높지 않아 무릎이 좋지 않은 시니어도 운동 삼아 걷기에 적당하다. 우거진 숲이 햇빛을 가려주니 무더위를 피하기도 좋다. 심학초교에서 약천사,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정상전망대가 있다. 날이 좋다면 저 멀리로 북한까지 볼 수 있다. 또 전망이 가장 좋은 낙조전망대도 있다. 멀리 나서지 않고도 빨갛게 저무는 노을을 보며 기분을 전환하고 싶다면 심학산 둘레길을 걸어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애지중지 키운 자녀는 엊그제만 해도 아장아장 걸어 다녔던 것 같은데, 벌써 결혼을 한다고 법석을 피운다. 학자금까지가 마지노선이라 생각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물가도 오르고, 집값도 오르고, 자녀의 저축만으론 감당할 수가 없다. 자녀 결혼 전 예물, 혼수, 신혼집 마련 시 알아두면 좋은 것을 소개한다.
시쳇말로 ‘부모은행’이란 말이 있다. 자녀의 취업과 결혼을 통한 자립이 쉽지 않은 시대인 만큼 자녀의 경제적 지원을 뒷받침하는 부모를 일컫는 말이다.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50·60세대 10가구 중 7가구는 현재 성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으며, 이 세대의 80%는 자녀에게 생활비와 목돈을 지원했다. 미혼의 경우는 65.6%가 부모에게 학자금 등의 목돈을 지원받았고, 기혼 자녀도 10명 중 4명은 결혼자금 등의 목돈을 지원받았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2021 결혼실태보고서에 따르면 신혼부부의 평균 결혼 비용은 2억3618만 원이었다. 항목별로 살펴보면 ▲주택 1억9271만 원 ▲혼수 1309만 원 ▲예식장 896만 원 ▲예단 729만 원 ▲예물 619만 원 ▲신혼여행 437만 원 ▲웨딩 패키지(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278만 원 ▲이바지 79만 원으로 구성됐다. 주택 비용과 예식장 및 예단 비용이 결혼자금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모의 지원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결혼 비용을 소비하고 있을까?
보복 소비와 샤테크
코로나19 이후 보복 소비가 생겨나고 있다.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성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코로나 보복 소비’에 대해 조사한 결과 38.3%가 보복 소비를 한 경험이 있거나,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보복 소비를 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20대(46.3%)는 절반 가까이 보복 소비를 하고 있었고, 30대(42.2%), 40대(31.4%), 50대(18%) 순으로 나타났다. 신혼부부도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최근 젊은 신혼부부 사이에서 신혼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고가의 다이아몬드나 혼수를 통해 보복 소비를 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신혼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고가의 예물에 투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많이 구매했다.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에 따르면 2020년 국내 주얼리 시장 규모는 약 5조 원으로 추산된다. 2020년 예물 시장 규모는 약 1조 원에 달하는데 2018년과 비교해 9.4% 줄어든 수치다. 반면 2020년 기준 다이아몬드 구매율은 60.4%에 달했으며, 2018년과 비교해 3.4%P 늘어난 수치다. 예물업계 관계자는 “젊은 세대는 가치 있는 물건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고가의 예물인 다이아몬드를 구매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가치투자다. 아울러 금전적 여유가 있는 상류층의 경우 골드바를 혼주 선물용으로 구매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신혼부부는 백화점 명품 매출을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21년 4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에 따르면 백화점 매출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34.5% 증가했다. 특히 해외 유명 브랜드는 57.5%나 상승했다. 가정용품을 제외한 백화점 전 분야의 매출이 감소했음에도 명품 매출은 2020년 5월부터 20~80%의 성장률을 보였다. 온라인 명품 플랫폼 트렌비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대표 예물 브랜드로 꼽히는 샤넬과 루이비통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2%, 89% 증가했다. 디올도 1586% 급증하며 판매량이 크게 늘었고,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도 약 378% 상승했다.
이른바 샤테크(샤넬+재테크의 합성어)라 하여 샤넬 백을 사는 수요도 대폭 늘었다. 명품 브랜드 제품의 가격이 줄줄이 상승하자, 오늘이 제일 싸다는 자조 섞인 한탄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4월 각종 커뮤니티에 샤넬 가격 상승 소식이 떠돌면서 샤넬을 사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백화점 앞에 개장 전부터 긴 줄을 형성했다. 실제로 금융정보 분석업체 ‘밸류챔피언’의 자료에 따르면, 15개 국가의 샤넬 주요 상품 가격 인상 폭을 비교한 결과 평균 가격 인상률은 17%로 나타났다. 한국은 23%를 기록하며 샤넬 가격 인상 폭이 여섯 번째로 높은 나라였다. 이 교수는 “젊은 세대는 고가의 예물을 통해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차별성을 드러낸다. 샤테크는 남들과 다르다는 걸 표현하는 스눕 효과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혼수의 트렌드는 프리미엄과 집콕
신혼부부는 코로나19로 인해 결혼식 비용을 절감한 덕분에 금전적 여유가 생겼다. 더불어 집콕 문화의 심화로 인해 혼수 가전에 관심이 높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0년 12월 기준 유통업체의 상품군별 매출을 살펴봤을 때 소형 가전 중심의 가전·문화(25.6%), 생활·가정(16.2%) 등 실내용 상품이 성장세를 보였다. 백화점의 가정용품 매출은 지난해 5월부터 20% 내외의 상승세를 꾸준히 유지했다.
혼수의 트렌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프리미엄’과 ‘집콕’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자연스레 가사노동을 줄일 수 있는 혼수를 고르는 신혼부부가 많아졌다. 이전보다 더 좋은 가전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여는 경우가 늘었다. G마켓의 자료에 따르면 혼수 중 가전의 구매 단가가 많이 상승했다. 대표적으로 TV 객단가는 47% 증가했다. 지난해 100만 원짜리 TV를 구매했다면, 올해는 147만 원 상당의 TV를 구매했다는 의미다. 드럼세탁기(34%), 냉장고(15%) 등도 모두 증가세를 보였다.
실제로 가사 부담을 줄이는 가전이 인기가 있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기반인 패밀리허브 기능을 갖춘 비스포크 냉장고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고도화된 식품 자동 인식 기술로 보관 중인 다양한 식재료를 스스로 파악하며, 인식된 재료는 ‘푸드 리스트’에 추가해 관리한다. 푸드 리스트 내 식재료나 가족 구성원 음식 취향을 바탕으로 최적 식단과 레시피를 제안하는 기능도 있다. 아직 요리가 서툰 신혼부부에게 알맞은 가전이다.
프리미엄 식기도 유행이다. SGC솔루션의 ‘보에나 드 모네’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의 걸작 ‘수련’에서 영감을 받은 제품으로 다양한 조명에 반응해 독특한 빛의 색상을 극대화한 식기다. 유리 고유의 투명함과 투과된 빛의 아름다움으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국내 유리 테이블웨어 최초로 파손된 제품을 2년간 무상으로 교환해주는 ‘파손보증제도’를 운영하며 제품력과 서비스를 한층 강화했다. 세련된 디자인을 더한 프리미엄 글라스 테이블웨어로, 신혼부부의 혼수 제품으로 유용하다.
증여로 보금자리 마련
혼수가 준비되면 들어갈 ‘보금자리’도 필요하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자료에 따르면 결혼에 드는 주택 비용은 전체 결혼 비용 중 81.6%를 차지했다. 신부보다 신랑의 부담이 더 컸다. 신랑 신부 결혼 비용 부담률은 각각 61%, 39%이고, 주택 비용 부담률은 각각 67%, 33%로 나타났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결혼 비용은 신랑 1억4421만 원, 신부 9197만 원으로 추정된다.
신혼부부가 이 모든 금액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상속·증여세제가 부의 축적과 소비에 미치는 영향’ 조사에 따르면, 순자산 5억 원 이상인 55세 이상의 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평균 1억6200만 원을 지원했다. 이 중 약 79%가 주택자금과 결혼자금에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부동산 구매나 전·월세 보증금으로 9200만 원, 결혼자금으로 3500만 원을 지원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다면 전세자금을 증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부모가 자식에게 증여할 경우 10년간 합산하여 5000만 원(미성년자는 2000만 원)의 증여재산 공제가 적용된다. 5000만 원을 초과하는 주택 취득자금 또는 전세자금의 증여는 증여세 신고 및 납부를 해야 한다. 1억 원을 증여했다면 5000만 원에 대해서는 증여세를 내야 한다.
다만 비과세거나 증여에서 배제되는 경우도 있다. 통상적으로 혼수는 비과세다. 하지만 혼수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사용품에 한정된다. 고급 차나 주택, 전세자금은 증여세를 매긴다. 국세청 상속세 및 증여세 사무처리규정 제38조에 따르면, 세대주를 기준으로 30세 이상인 경우 주택 취득 금액 1억5000만 원, 40세 이상은 주택 취득 금액 3억 원까지는 자력으로 재산 취득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해 증여로 보지 않도록 하고 있다. NH투자증권관계자는 “사무처리규정에서 정한 조건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무조건 증여세에서 배제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자녀 주택 마련 시 절세 꿀팁
양가로부터 증여 ▶세법상 5000만 원까지는 증여세가 면제된다. 신랑 측이 3억 원을 증여했을 경우 2억5000만 원에 대해 20%의 증여세(5000만 원)가 부과된다. 반면 신랑 신부 각각 양가에서 1억5000만 원씩 나눠 증여받으면 각각 1억에 대해 10%의 증여세로 2000만 원만 내면 된다.
임대 ▶ 아파트를 자녀에게 증여하지 않고 임대하는 것이 세금 부담이 적다. 5년간 부동산 무상 사용이익이 1억 원 이상인 경우만 증여세를 매긴다. 세법상 정한 적정 임대료를 기준으로 세금을 낸다. 예를 들어 시가 14억 원의 주택을 무상으로 빌려주면 약 561만 원을 과세한다.
동거 주택 ▶ 부모와 10년 이상 같이 산 경우 상속 주택 가액의 6억 원 한도 내에서 상속세 과세 재산에서 빼준다. 동거 주택 상속공제를 받으려면 10년 이상 1세대 1주택으로 부모와 10년 이상 같이 산 주택을 자녀가 상속받아야 한다. 공제는 가능하지만 장기간이므로 선택 시 신중해야 한다.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文發洞). ‘글이 피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동네는 예부터 문인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유명했다. 이후 출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현재는 명실상부 한국 출판산업의 뿌리로 거듭났다. 파주출판도시를 기획하고, 반세기 동안 열화당의 대표이자 출판편집인으로 살아온 이기웅(82) 대표를 만나 지난 여정과 더불어 기획자로서의 철학과 책의 가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21세기의 여명을 앞둔 1989년 젊은 출판인들은 새로운 시대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출판도시’란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로부터 어언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끝내 그들은 꿈을 이뤄냈으며, 그 터전에서 새로운 세대는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최근엔 출판도시 기획자인 이 대표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도시의 과정을 담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제 삶과 경험을 토대로 출판단지의 과정을 쓰겠다고 했을 때 저도 흔쾌히 동의했죠. 책은 기록의 유산으로 가치가 있잖아요. 다만 책 표지에 제 사진을 쓴다기에 정중히 재고를 부탁드렸죠. 결국 출판사의 뜻에 따라 지금의 표지로 책이 출간됐지만요. 저자와 출판사의 뜻은 충분히 존중하지만, 제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좀 민망해요. 출판도시는 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죠. 단지 제가 한 일은 이사장으로서 순서상 맨 앞에 선 것일 뿐이죠. 가장 먼저 서 있다고 해서 같이 이룬 것을 제가 소유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책을 편집하던 편집자가 왜 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이고, 어쩌다 맨 앞에 서게 된 것일까?
“말하자면 ‘공동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죠.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함께 실현해보자, 그런 의기투합이 이뤄졌어요. 당시 출판산업의 체계가 엉망이었어요. 편집, 인쇄, 디자인, 유통 등 출판의 프로세스를 한곳에서 효율적으로 운영해서 더 큰 시너지를 얻기 위함이었죠. 산업의 체계를 조정하고 선순환을 만들면 만들수록 더 양질의 책을 만들 수 있다고 봤어요. 그런 차원에서 출판도시를 기획했고, 당시 주위 사람들이 공동성이란 큰 달구지를 우직하게 이끌고 가는 공공의 심부름꾼이란 소임을 제게 맡겨주셨어요. 첨엔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이니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어요.”
편집은 나의 힘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파주에서 첫 삽을 뜨는 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원래 부지는 파주가 아니라 일산이었다. 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일산출판단지가 됐을지도.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가 땅값으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일산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계획을 접고 지금의 문발리로 왔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고 아찔해요. 근데 운명적이라고 할까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문발의 뜻처럼 책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어요. 이 일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열화당 직원들이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이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완수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어요. 그때 우리 직원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못해서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제일 커요. 한편으론 말없이 묵묵히 따라주었던 이들이 고맙기도 하고요.”
그림자의 뒷면에는 빛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출판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꼽은 것은 처음으로 들어선 건물인 ‘인포룸’이었다.
“출판단지 내 첫 건물이 인포메이션 센터로 지은 ‘인포룸’이에요. 독일의 포츠담광장에 있던 빨간 컨테이너 박스 형태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가에게 부탁했어요. 그 건물보다 더 멋있는 건물로 만들어달라고. 완공된 건물을 본 그날을 잊지 못해요. 의리 있는 소 얘기가 있어요. 자신을 호랑이로부터 지켜준 주인이 죽자 따라 죽었다는 소의 얘기예요. 소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의리를 드러낸 것이지요. 남들에게는 많은 건물 중 하나겠지만, 제게는 남달랐어요. 출판도시를 만들면서 겪었던 곡절의 세월에 대한 보답이자, 저를 믿고 맡겨주고 도와준 모든 이에 대한 신의와 고마움이 그 건물에 담겨 있어요. 의리의 인포룸이라고 할까요?”
출판기획과 도시기획. 기획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과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일로 보였다.
“전혀 다르지 않아요. 출판편집자 경력이 오히려 가장 큰 힘이 됐어요. 책은 문자의 도시예요. 정교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죠. 기획부터 시작해 감리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어요. 책을 만드는 데 오탈자는 물론이고, 종이의 재질이나 크기, 색감의 상태 등 여러 가지로 고려할 것이 많아요. 편집자라면 시집은 시집답게, 학술서적은 학술서적답게 그 맥락과 목적에 맞게 편집할 줄 알아야 해요. 이 모든 것이 도시를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무엇보다 책과 건축, 모두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죠. 담는 물만 달라질 뿐 그릇은 변하지 않는 법이에요. 그래서 건축가들과 상의할 때 ‘편집회의 하러 가자’고 그랬어요.(웃음)”
물려받은 DNA와 정직한 삶
그는 어쩌다 출판편집자가 된 것일까? “얼결에 됐지만, 그 결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그 결은 선교장에서 체득한 것이죠. 선교장은 우리 조상이 대대로 터전을 잡은 곳인데, 사랑채인 열화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사립도서관 같은 곳이에요. 잊을 수 없는 게 ‘만권의 서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책이 많았어요. 거기서 저는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죠. 고등학교 때는 서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장님은 ‘사지도 않을 거면 뒤적거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죠. 뜨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보다가 나오곤 했죠. 책을 사는 날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들어갔고요.(웃음) 친구들은 무섭다고 안 가는데 전 무서워도 갔어요. 제게 책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고, 편집자는 자연스레 제가 해야 할 일이 됐죠.”
1960년대 중반부터 편집자로 일했고, 1971년에 출판사 열화당의 대표가 된다. 그에게 출판사 열화당은 운명과도 같았다.
“선교장은 언어와 미술의 학교였어요. 열화당(悅話堂)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열화는 가까운 이와 정다운 얘기를 나눈다는 뜻이죠. 실제로 어른들은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대화를 나누셨어요. 저도 그런 걸 본받고 싶었고요. 선교장 건물은 미학적으로도 정말 아름다워요. 하나의 작품처럼. 정교하게 건물을 만들었고, 문틀 하나 허투루 짜지 않으셨죠. 편집자로서 출판사 열화당을 통해 이런 정신을 이어가고 싶었어요. 미를 지향하되, 아름다운 언어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는 일. 그게 열화당 대표로서의 소임이자 어른들이 물려준 DNA라고 생각했죠.”
책 ‘산의 기억’에 얽힌 일화를 통해 편집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편집자로서 정직한 삶의 얘기를 좋아해요. 아름다움은 진실할 때 비로소 더 가치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 김근원 사진가는 산악 사진으로 일생을 바친 분이에요. 산이란 게 얼마나 정직해요. 날씨란 변수에 그대로 영향을 받잖아요.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안개가 끼면 안개가 끼는 대로 고스란히 나타나죠.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곳도 있고요. 정직한 산을 정직한 사람이 렌즈를 통해서 바라본 모습. 사진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그 순수한 열정과 그가 겪었을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군요. 생전에 열화당과 작업하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지 못해서 참 미안한 맘이 컸어요. 그때 제가 좀 덜 바쁘고, 그가 계속 졸랐다면 했을지도 모를 텐데. 지금이라도 아드님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을 수 있어서 참 기뻐요.”
‘어떻게’를 위하여
정직한 삶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바로 안중근이다. 열화당 근처 다리의 이름을 응칠교로 지었으며, 준비 중인 영혼도서관의 명칭은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다. 그에게 안중근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에서 출판된 안중근 관련 기록을 번역해 엮으면서 장군의 내면세계에 감탄했어요. 부정한 것은 용납하지 않는 시대정신으로 일본 법정에서 제국주의 일본과 법정 투쟁을 벌이죠. 동양 평화를 꿈꾸던 뜻을 옥중에서 계속 집필함으로써 제국주의를 향한 ‘말’과 ‘글’의 투쟁을 홀로 하셨어요. 이상을 이론으로 남기지 않는 자세. 끝내 실천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그것이 제게 큰 울림을 줬죠.”
안중근 정신의 핵심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물어봤다.
“종이책 시장의 위기라고 하는데,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책을 만날 기회인 거죠.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는 건 빨리 전환하고, 정말로 가치 있는 책을 신중하게 기획해서 종이책으로 남겨야 한다고 봐요. 팔리는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남기는 예술이 필요해요. 가치란 말이 공허한데 개인적으로 삶의 진실한 기록을 담은 책이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준비 중인 안중근기념 영혼도서관이 가치 있는 책에 깃든 저자의 진심을 모실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공적으로는 열화당이 이제껏 단단히 지켜온 가치를 오랫동안 유지했으면 좋겠어요. ‘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를 고민하고 싶어요. 물론 시대에 역행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깨졌다는 이유로 주춧돌을 버리는 게 아니라, 주춧돌이 깨져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보존할지 우선 고민을 해보는 거죠. ‘좋음’이라는 가치에 머물지 않고, 그 가치를 위해 ‘어떻게’ 실현할지 고민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삶의 기록을 열심히 정리하는 작업 중이에요. 쓰려고 30분만 앉아 있어도 몸이 피곤해서 힘들지만, 글로 정리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고 싶어요.”
그가 열화당을 운영하면서 아름다웠던 장면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바로 콧수염 사장님과의 재회였다. 열화당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서점에서 책을 읽던 소년이 어엿한 출판사의 사장이 되는 시간 동안 젊었던 사장님은 백발의 노인이 됐다. 운영하던 서점을 정리하던 차에 그의 소식을 듣고 먼 강릉에서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는 이 만남을 “데미안을 다시 만난 싱클레어”의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서점을 지키던 사장님처럼, 그가 책의 가치를 오랫동안 지키면서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이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열화당은 선교장의 사랑채이자, 그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의 근간이었다. 선교장의 어른들은 말의 가치를 중요시했고,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을 근본으로 여겼다. 만권의 책에 둘러싸인 곳에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다. 그로부터 배운 정신을 토대로 그는 ‘열화당’을 반세기 동안 운영해왔다. 열화(悅話)의 뜻처럼 정다운 이와 얘기하듯 책을 통해 저자와 독자가 소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채를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젊은 시절에 매료되었던 정읍의 고택이 다 쓰러져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고택을 출판단지 내의 부지로 옮겼다. 깨지고 닳은 주춧돌부터 시작해 기왓장 한 장 버리지 않고 그대로 문발리로 옮겨왔다. 깨진 기왓장을 버릴 수도 있지만, 그는 문화의 보존이란 이유로 절대 버리지 못하게 했다. 문틀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정교하게 틀을 짰던 선교장의 어른들처럼. 이제껏 그가 실천해온 삶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적(美術的)인 출판을 지향하며 오랫동안 정직한 삶의 언어를 발견하고, 이를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끝내는 모두가 함께 누리는 하나의 정신문화가 될 수 있도록 하나의 도시를 계획하고 완성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흔히 한옥의 미학을 일컫는 말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문자의 ‘주춧돌’ 위에서 그가 지은 책이란 ‘사랑채’는 검소했으나 누추하지 않았고, 아름다웠으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흔히 그를 책마을 연출가라 부르지만 그와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을 바탕으로 보건대, 그는 문자의 주춧돌 위에 美의 사랑채를 짓는 건축가였다. 그의 사랑채가 오랫동안 독자들과 열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마친다.
영화 ‘아이언맨’의 주연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버지인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다.
다우니 주니어는 8일 인스타그램을 통해 “5년 넘게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뉴욕 자택에서 별세했다”면서 “어젯밤 잠결에 평화롭게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알렸다.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는 미국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불리는 감독이었다. 1960~70년대 반체제적이고, 급진적인 시각을 담아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다수 제작했다.
미국 뉴욕의 광고업계에서 근무하는 흑인의 삶을 그려낸 코미디 영화 ‘퍼트니 스워프’(1969)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생애를 서부극으로 풀어낸 ‘그리서스 팰리스’(1972) 같은 작품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퍼트니 스워프’는 2016년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문화적, 역사적, 미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미국 국립 영화 등록부에 선정됐다.
그는 아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영화 ‘파운드’를 통해 5살 때 아역배우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우니 주니어는 영화 제작을 집안일처럼 가족과 함께한 아버지 다우니 시니어 덕분에 아버지가 만든 영화 8편에 출연했다.
다우니 주니어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아버지가 “진정한 매버릭(maverick) 영화 제작자”였다는 헌사를 바쳤다. ‘매버릭’은 미국에서 개성이 강하고 신념이 뚜렷한 스타일의 인물을 묘사할 때 쓰이는 말이다.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의 별세 소식에 그의 아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동료 배우들이 애도를 표했다. 클라크 그렉과 기네스 팰트로, 제레미 레너 같은 다수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출연 배우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댓글을 남겼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팬들도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명대사 ‘I love you 3000’(3000만큼 사랑해)를 변형해 “아버지도 3000만큼 사랑 받으셨을 것”이라는 댓글을 남기며 추모했다.
● Exhibition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
일정 8월 8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환경보호가 전 세계의 과제로 당면한 가운데,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는 전시가 열렸다. 모든 생태계의 집인 지구, 인간이 거주하는 건축물, 새와 곤충의 서식지 등 세 개의 집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해 그 안에서 벌어진 참혹한 환경오염을 이야기한다. 이상 기후로 집단 고사한 침엽수, 아사한 동물, 남·북극의 해빙 등 죽어가는 지구의 모습을 실제 고사목과 박제 동물, 영상 등으로 선보이며, 아파트를 짓고 부수는 과정에서 생산 및 폐기되는 사물을 작품으로 재해석한다. 전시실뿐 아니라 마당, 로비, 건물 외벽 등 여러 곳을 전시 장소로 활용해 미술관 전체를 인간을 둘러싼 환경처럼 보이도록 했으며, 특히 옥상에는 서식지를 잃은 새와 곤충의 보금자리를 설치해 전시 일정과 무관하게 올가을까지 남겨둔다. 기후위기에 대한 전시지만 그 자체가 탄소 배출 행위라는 모순을 고려해, 전시 준비 과정에서도 폐기물과 에너지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재사용과 재활용을 생활화했다. 배우 박진희가 국문 오디오 가이드 녹음에 참여해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인류가 직면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나무 인형의 비밀 - 체코 마리오네트
일정 8월 29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지구 반대편 국가 체코의 전통문화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체코의 흐루딤인형극박물관과 협력해 마련된 이번 전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체코 인형극을 중심으로 156점의 인형과 무대 배경, 실황 영상 등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18세기 유랑극단에서 출발한 체코 인형극은 라디오나 TV가 없던 시절 도시 간 소식을 전달하며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시는 이 같은 기원을 시작으로 인형극 부흥기를 맞은 20세기 초중반, 다양한 인형극장이 탄생한 20세기 후반까지 인형극의 발전을 연대기적 구성으로 살펴본다. 또한 단순히 역사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체험존을 마련해 전시장을 찾은 어린이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체코에서 직접 공수해온 마리오네트 인형과 손가락 인형, 음향 장비 등을 통해 인형극을 재현해볼 수 있으며, 유랑극단이 타고 다니던 마차에 들어가 가까이 감상할 수 있다. 가족 단위로 방문하기 좋아 여름방학이 시작된 손주와 함께 방문하면 더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다.
● Book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 (박경이 저·도트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용감하게 오르는 이들이 있다. 바로 고산 등반가다. 이들은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자르고,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 모습을 보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산을 오르는 이유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왜 산을 오르는가?’ 어쩌면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산악인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 여성 산악가 박경이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의 삶으로 대신한다.
에세이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는 고산 등반가의 삶과 철학을 저자가 ‘죽음의 지대’ 히말라야 고산에 직접 오르며 만난 이들의 이야기로 현장감 넘치게 풀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사유하고, 자신을 포함해 편견과 차별이란 또 다른 산을 넘어야 했던 세계 여러 여성 산악인의 고충을 담담히 반추한다.
책은 단순히 감상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산 등반을 떠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흥미롭게 알려준다. 셰르파와 루트 개척, 베이스캠프 생활 등 기본 상식부터 트레킹 준비물, 고산병 극복 방법 등 실전에 필요한 정보까지 한데 담아 등반 의욕을 고취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죽으러 산에 가지는 않지만 죽을 걸 알면서도 산을 오른다”는 많은 고산 등반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관중도 심판도 없지만 반칙하지 않고 정직하게 산을 오르는 이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다 보면 서문에서 던졌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풀린다. 등산의 진정한 묘미는 정상이란 결과보다 자신을 믿으며 한 발씩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인생이란 산을 탈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 (나태주 엮·앤드)
‘풀꽃시인’ 나태주가 한국 시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역작을 갈무리해 엮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국민 시 ‘엄마야 누나야’부터 조지훈의 희귀 시 ‘병에게’까지 총 125편이 담겼다.
◇킵 샤프 (산제이 굽타 저·니들북)
나이가 들어도 인지 기능을 총명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한다. 뇌에 관한 오해와 진실, 구체적인 12주 프로그램을 통해 막연하게 느껴지는 뇌 건강 영역을 실용적으로 접근한다.
◇바람이 내 등을 떠미네 (한기봉 저·디오네)
평생 세상을 뾰족하게 바라보았던 언론인 출신 저자가 평범한 중년으로 돌아와 세상살이의 단상을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짧지만 강렬한 60여 개의 글이 또래 독자에게 위로를 전한다.
● Stage
◇마리 앙투아네트
일정 7월 13일~10월 3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로버트 요한슨
출연 김소현, 김소향, 김연지, 정유지, 민우혁, 이석훈, 이창섭, 도영 등
18세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뮤지컬로 다시 돌아온다. 올 7월 막을 올리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때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각종 오명 속에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의 삶을 통해 진실과 정의의 의미를 조명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혁명을 선도했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는 오리지널 버전과 달리, 한국 버전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에 비중을 실어 두 여인의 삶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특히 당대 부의 상징이었던 파리 베르사유 궁전과 빈민가 마레지구를 무대 위에 재현해 계급 간 갈등 구조를 명확히 그려낸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귀부인 드레스와 다채로운 가발도 재미를 높이는 포인트. 목걸이 사건, 바렌 도주 사건, 단두대 처형 등 대중에게 친숙한 사건을 위주로 재해석해 공감대를 더한다.
◇렁스
일정 9월 5일까지 장소 아트원씨어터 2관 연출 박소영
출연 이동하, 성두섭, 오의식, 이진희, 류현경, 정인지 등
매 순간 선한 의도로 행동하기 위해 고민하는 한 연인이 사랑, 환경, 출산 등의 주제로 치열하게 토론하며 ‘좋은 사람’의 정의를 찾아나가는 이야기다. 환경을 위해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여자와 아이를 낳아 좋은 부모가 돼야 한다는 남자의 정답 없는 갈등이 진정한 ‘선’(善)의 의미를 묻는다. 특별한 장치 없이 두 배우의 대화로만 이어지는 전개가 몰입도를 높인다.
◇비틀쥬스
일정 8월 7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알렉스 팀버스
출연 유준상, 정성화, 홍나현, 장민제, 김지우, 유리아 등
팀 버튼 감독의 영화를 뮤지컬화한 작품으로, 2019년 현지 초연 이후 세계 최초로 선보이는 라이선스 공연이다. 황당한 사고로 유령이 된 부부가 자신의 신혼집에 이사 온 한 가족을 쫓아내기 위해 장난꾸러기 유령 ‘비틀쥬스’와 합세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공중부양을 하는 캐릭터와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 등 마술 같은 연출이 놀이공원에 온 듯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산을 애호하는 건 산에 사는 나무나 다람쥐만이 아니다. 사람도 산을 좋아한다. 특히나 한국인은 등산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이다. 등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냐고, 다투어 천명하는 이들이 많다. 등산에 거의 미친 사람도 숱하다. 손에 쥐면 쥘수록 번뇌의 개수도 많아지는 게 인생이다.
작가 조세희의 말마따나 ‘정신만 빼고 모든 게 다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욕망과 물신의 사주로 뭐든 배가 터지도록 탐닉하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지구라는 행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때로 갈피 없이 흔들린다. 모래밭에 세운 부실한 가건물처럼 자주 휘청거린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산을 찾아간다. 몸 건강을 생각해 산을 ‘야외 헬스장’처럼 애용하는 이들도 많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초록으로 반짝이는 별이 지구라지. 뭔가 고차원의 다른 별에서 바라보면 지지고 볶는 인간들로 바글거리는 지구가 영락없는 지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딱히 그러기만 하랴. 희로애락의 요지경으로 점철되는 게 지구 위의 풍정이지만, 한 번 태어나 근사한 인생을 실현하고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몸을 벗기에 좋은 게 지구별에서의 삶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 등산의 효시
이렇게 골치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 행성에서 최초로 산에 오른 이는 누구였을까? 등산의 효시를 또렷하게 짚어내기는 어렵다. 창으로 먹이를 꿰기 위해 산야를 누빈 선사시대의 호모사피엔스를 등산의 시조로 봐야 할까? 저 높은 산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으로 산에 오르거나, 하늘의 별과 달, 또는 신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보려고 산정에 오른 자를, 혹은 산 너머 부족들의 동향을 영특하게 탐지하기 위해 은밀히 고산에 올라간 자를 최초의 등산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여하튼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행위는 아득한 과거부터 계속 이어졌다. 우리의 선조들도 일찍부터 산에 올라가 다양한 용무를 봤다. 고대부터 숭산(崇山)을 신앙으로 삼은 민족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그리고 대체로 산이 나지막하고 아기자기해 오르기도 쉽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도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이런 유순한 산세는 오늘날까지 한국에 산행이 성행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다.
역사서를 보면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에서도 등산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산행이 더욱 활발했다. 학술적·군사전략적·유람적 성격의 산행이 잦았다. 암벽을 오르느라 용을 쓰는 모습이 드러나는 민화까지 보여 흥미롭다. 무엇보다 확연한 건 문인 사대부들이 즐긴 유람 성격의 산행 역사다. 자연에서, 즉 산수의 본질에서 삶의 유토피아와 학문의 지향점을 찾은 게 성리학자들이지 않은가. 사대부들은 산처럼 물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는데, 그들은 산행 뒤에 흔히 ‘유산기’(遊山記)를 기록해 남겼다.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등산은 1900년대 중반, 서구의 알피니즘(Alpinism)을 통해 유입됐다. 정상 정복의 성취 욕구를 중심에 둔 등산의 이념과 기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급적 더 높은 산을, 가급적 더 단시간에 후다닥 오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등산이 대중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조선 선비들이 산을 즐긴 전통적 방식은 이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대략 세 가지 코드로 산을 즐겼다. 가만히 앉아서 산을 관조하는 ‘관산’(觀山)과 흐뭇한 경치를 즐기는 ‘요산’(樂山), 산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유산’(遊山)이 그것이다.
이 셋 가운데 ‘유산’의 방식으로 산행을 했던 이들이 남긴 기행산문이 바로 유산기다. 유산기 안에는 물론 ‘관산’과 ‘요산’의 정신과 감성 역시 화학적 합성처럼 결부돼 있다. 조선이 남긴 진귀한 문화유산인 유산기는 총 560여 편에 달한다. 한가락 한 선비들이라면 다들 유산기를 남긴 것 같다.
자못 거창했던 선비들의 유산(遊山) 대열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의 산행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였다. 접근 경로도 열악하고 맹수가 들끓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산을 우주의 축약으로 본 거시적 자연관을 지닌 선비들에겐 산이야말로 생생한 체험을 해볼 만한 수신(修身)의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나여! 너는 누구냐?’ 그런 자문자답을 습으로 삼았던 선비들은 산행을 또한 자성(自省)의 찬스로 삼았다.
아무도 뜯어말릴 길이 없도록 지독한 유산의 버릇을 가진 걸로 유명한 이는 남명 조식(1501∼1572)이다. 그는 지리산의 ‘황소갈비 같은 산마루’를 무려 열일곱 번이나 주파했으며, ‘유두류록’(流頭流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차라리 지리산의 넋이 되고 싶었나? 기행문을 보면 “(지리산 탐승을 하다가) 초가지붕에 걸린 박처럼 죽은 송장이 되고 싶었다”고 썼으니 말이다.
남명은 평생을 일관해 경(敬)과 의(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새벽처럼 명증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고자 진력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늘 허리춤에 차고 살았던 건 정신의 해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에게 지리산은 도심(道心)을 기르는 수련장이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오르막을 오르는 것을 ‘선(善)을 좇는 것’이라 했고, 내리막에서 힘쓰는 것 없이 저절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악(惡)을 좇는 일과 같다’고 빗댔다.
선을 행하긴 어렵고 악에 편승하긴 쉽다는 것을 얘기한 셈이다. 산의 운치를 맛보고, 풍경의 미태를 반기며, 벼랑을 움켜쥐고 버티는 노송의 고고한 기품을 감상하는 데에서 나아가, 인간됨의 도리를 산을 통해 새삼 깨닫는 것에도 큰 의미를 두었던 거다.
그런데 조선 선비들이 고리타분한 공부벌레에 그친 건 아니었다. 풍류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살았으니까. 공부는 공부대로 열나게 하고, 짬짬이 놀 때는 또한 열나게 놀았다. 해서, 유산 목적의 산행은 풍류를 즐기는 여정이기도 했다. 주로 명산을 골라 탐승했던 그들의 유산 행차는 자못 거창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 빙벽을 오르는 알피니스트들이 셰르파를 고용하고 원정대를 조직하는 정도는 저리 가라는 듯 화려하게 팀을 짜고 산에 올랐다.
지리산을 오를 때 남명이 거느린 무리의 면면은 실로 다양했다. 선두 대열엔 예인이나 기생들을 배치해 허리에 찬 북을 치거나 피리를 불게 했으며, 남명과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뒤를 따르며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음식 꾸러미나 술통을 짊어진 짐꾼들은 후미 대열을 형성했고, 길 안내는 지리산의 물정을 잘 아는 승려가 맡았다.
유산기의 귀감으로 꼽히는 ‘청량산 유록’을 남긴 주세붕(1495~1554)이 청량산을 오르며 대동한 유흥 그룹의 구색도 장관이었다. 당대 풍류계의 선수였던 주세붕 역시 인근의 공무원과 선비, 기생과 가수, 연주하는 재인, 여종 등을 두루 대동했으니, 마치 물고기들을 꼬챙이에 꿴 두름처럼 기다란 행렬이 산길을 따라 주르륵 이어졌다.
선비들의 유산에 술과 가무가 있는 유흥은 아마도 유행 품목이었던 것 같다. 요즘의 등산객들도 일쑤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나 하산 뒤에 기념으로 한잔 걸치곤 하는데, 조선 선비들의 풍성한 유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음마야, 선비들이 엄청 요상하게 놀았네?” 이렇게 의아해하며 눈에 쌍심지를 켤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왕지사 노닐 거라면 제대로 노니는 게 사리에 맞겠다.
게다가 조선 선비들이 유산 중에 즐긴 풍류는 어디까지나 청유(淸遊)였다. 거칠거나 혼탁한 구석이 없었다. 산중 유숙의 달밤에 한잔 마시며 주거니 받거니 음풍영월의 시를 지어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분수와 염치를 중히 여겨 처신을 맑게 하길 본분으로 삼은 게 선비 정신이지 않겠는가. 두 눈으로 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긴 하지만, 산에 올라 엉덩이에 뿔난 짓을 한 삐딱이 선비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이제 퇴계 이황(1501~1570)이 산을 사랑한 방식을 살펴볼까? 퇴계는 산을 연인처럼 평생 애지중지했다. 고도로 발육한 합리적 이성과 세련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산은 족집게 레슨 교사처럼 믿을 만한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도학(道學)의 번성을 평생 과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거경궁리(居敬窮理, 경건한 마음으로 이치를 추구함)로 일관한 석학이었다. 그리고 그 위업에 부합하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퇴계 본인은 자신을 매우 혹평했다.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다”고 탄식했다. 어이 하나? 그는 산에서 배우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자 했다. 그에게 산은 ‘보는’ 게 아니고 ‘읽는’ 대상이었다.
“사람들 말하길 글 읽기가 산 유람과 같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함이 글 읽기와 같구나.” 그는 시를 통해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흔히 산의 외물(外物)에 경도된다. 그러나 퇴계는 근원적인 묘리를 내장하고 있는 게 산이라 보았다. 글을 읽어 진리를 길어 올리듯, 산 또한 근본 이치를 깨칠 수 있는 학당이니 산을 유람하는 일이란 결국 인생 공부라 판단했던 거다.
퇴계도 유산기를 남겼다. 소백산을 탐승한 뒤 ‘유소백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 유산 일정은 3박 4일. 당시의 직분은 풍기군수. 건강 상태는 매우 불량해 대동한 승려들이 의논을 하더니 견여(肩輿, 좁은 길을 오를 때 잠시 쓰는 간단한 가마)를 타고 오르라고 권유했고, 퇴계는 응했다. 이렇게 해서 때로는 두 다리로, 때로는 말을 타고, 비탈길에선 견여를 이동 장비 삼아 유산을 했다.
이런! 견여를 탄 퇴계야 편했겠지만, 가마꾼들은 그 무슨 고생이람.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꼴불견이겠으나 만족스러웠던 퇴계는 “빼어난 경치를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마”라는 논평을 적어두었다. 사람의 도리를 평생 궁구한 천하의 도학자였지만 내 몸 편하고자 남의 몸에 얹혀가는 결례엔 마음이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윗분’이 따로 있고, ‘아랫것’이 별도로 있었던 계급사회에서의 일이었으니, 퇴계보다는 시대가 자아낸 소극(笑劇)이라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퇴계는 말했다. “나는 산야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DNA 자체가 산에 심취하게 구성됐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그의 호 ‘퇴계’(退溪)의 뜻이 선연해진다. 그는 항상 뒤로 물러서 계곡으로,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산을 체험하고 궁구하며 얻은 특유의 지론도 많았다.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도산잡영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예로부터 산림을 즐겼던 사람엔 두 종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섬기며 즐기는 사람이 있었고, 도의(道義)를 기쁘게 여기고 심성을 기르면서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를 따르자면 윤리를 어지럽힐까 두렵고, 후자의 경우는 성현이 남긴 글 찌꺼기를 탐하는 데에 그칠까 두렵다.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해 힘쓸지언정 앞의 것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진 않으리라.”
지금까지 조선조에 성행한 유산기와 선비들의 산에 관한 생각을 대략 살펴봤지만 편린에 불과할 따름이다. 고릿적 선비들의 유산과 오늘날의 등산이 서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요량해볼 만한 대목도 없진 않을 게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잴 것도 없다. 풍속이란 어차피 시대를 따라 변전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산을 탐스럽게 주유한 건 옛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풍류는 오졌고, 심성은 산에다 조율했으니까. 특히 퇴계의 지론은 청명해 구미가 동한다. 그를 통째 청산이라 일러도 실언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