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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
- ‘네덜란드-벨기에로 열흘간 여행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볼 게 많아?” 하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미술 작품 순례만으로도 볼 것이 차고 넘쳐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누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또 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해줄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라고. 고흐, 렘브란트, 루벤스, 페르메이르, 마그리트 등 스탕달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감흥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육체적 이상 반응)까진 아니어도 명작을 코앞에서 감상하면서 작가들의 삶의 편린도 함께 접할 수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표 작가 Big3와 미술관을 소개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작품을 포함, 15~19세기 네덜란드 유명 화가 작품 5000점, 조각품 3000여 점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반 고흐의 자화상, 얀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보여주는 가구 미니어처 ‘인형의 집’도 볼 만하다. ‘인형의 집’은 ‘집과 가구 모형을 실제와 똑같이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다.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당대에는 서민 주택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야경’ 뭐니 뭐니 해도 이 미술관의 대표작은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이다. 이곳에서 일부러 이 그림을 찾지 않아도 관람객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따라가면 ‘야경’ 앞에 이른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2층 명예의 전당 전면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렘브란트의 인생처럼 팔자가 센 작품이다. 전시 중 황산 세례와 칼로 그어지는 등 두 차례 수난을 당했다. ‘야경’을 완성한 해에는 첫 번째 부인 사스키아와 사별을 했고, 이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당하는 등 사회적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산 등 경제적 문제도 몰아닥친다. 또 고객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사면서 화가로서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다. ‘렘브란트의 모든 것’ 올해는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6월까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7월부터 연말까지는 대표작 ‘야경’의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갔을 때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22개의 작품, 60점의 드로잉, 300점의 판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도 40여 점 그렸는데 연대별로 주요 자화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었다. 자부심을 넘어 야망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청년기 모습, 기름기와 욕망이 적당히 반죽된 중년기의 모습, 특히 쓸쓸한 눈빛을 한 노년기의 자화상에서는 ‘나 아직 살아 있어’ 하고 외치는 듯한 내면의 모습이 느껴졌다. 렘브란트 하우스 인간 렘브란트를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 성공의 상징이자 몰락의 원인이 된 호화저택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인 요덴브레이스트라트에 위치한다. 1639년부터 20년간 살면서 작업을 했던 지역이다. 그 시절의 살림, 미술 도구, 호사스런 수집품들(코뿔소 뼈 등)이 층별로 전시돼 있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수집가, 사업가, 거장으로서의 면목도 감상할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 본관 상설전시관과 신관 기획전시관 건물이 유리 현관으로 연결돼 있다. 유화 200여 점, 소묘 500여 점, 편지 700여 통과 함께 고흐가 수집한 우키요에(일본 판화)와 회화를 포함한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규모는 세계 최대. ‘꽃피는 아몬드 나무’,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자화상’, ‘노란 집’ 등 전시 작품들이 다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이라이트 중심의 감상보다는 전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천천히 작품을 느끼는 게 좋다. “열흘 내내 딱딱한 빵 조각을 유일한 음식으로 삼았지만, 이 그림 앞에 앉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10년은 행복할 것이다.” 고흐가 렘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를 보고 외친 말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옆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전용 미술관이 세계 명소가 된 것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크뢸러 뮐러 미술관 고흐 미술관이 도심 속 미술관이라면, 이곳은 공원 속 미술관이다. 한적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뮐러의 부인 헬레나가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받은 네덜란드 정부가 작품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1938년 개관했다. 고흐의 유화 작품 90여 점, 드로잉 170점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규모는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밤의 카페테라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중략)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 머무르던 시절, 이 작품을 그리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밤하늘에 별을 하나씩 찍어가며 열정에 차 작업하는 고흐의 모습, 이 시절을 함께한 우체부 조제프 룰랭, 의사 가셰, 카페 마담 지누, 화가 고갱 등이 함께 어우러져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미술관이 위치한 호게 벨뤼베 공원은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 서울 여의도의 7배 면적인 70만 평 규모. 매표소에서 미술관까지는 2.4km나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도 30여 분이나 걸린다. 매표소 입구에는 무료로 대여해주는 자전거가 진열돼 있다. 숲길의 나무와 반짝이는 나뭇잎 등이 고흐의 작품 ‘사이프러스 나무’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얀 페르메이르와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마우리츠호이스라는 이름은 이 집의 첫 번째 소유주였던 요한 마우리츠에서 따왔다. ‘마우리츠의 집’이란 의미를 갖는다. 네덜란드의 16~17세기 작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 화가로 만들어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파울루스 포테르의 ‘어린 황소’ 등이 하이라이트. 색깔이 다른 벽지로 전시장을 구분하고 창가엔 커튼도 달려 있어 얼핏 보면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창 너머로는 호프페이베르 연못이 보인다. 백조들이 떼 지어 떠다니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창가엔 의자도 있어 중간중간 쉴 수도 있다. 창밖의 호수 풍경, 전시장의 작품 중 어느 것부터 볼지는 관람객 마음에 달려 있다. 편안하고 폭 감겨오는 미술관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을 꼽고 싶다. 우리는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직행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을 감상했지만 이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원화를 보자마자 모두에게서 터져 나온 말은 “생각보다 작네?!”였다. 그림 크기는 44.5×39cm. 이러한 사이즈는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일반 시민의 미술품 수요가 컸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붙였다 떼었다 하기 편한 그림이 판매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링’ 베이커리와 페르메이르 페르메이르의 흔적은 헤이그 인근의 델프트 시에 많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이 지역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델프트 시에는 ‘다이아몬드 링’이라는 빵집이 있다. 1796년부터 운영해온 유서 깊은 점포다. 프랑스인 발타자르 드 몽코니가 일기에 기록해놓았다는, 빵집과 페르메이르의 인연 한 토막이 특별하게 들려온다. 몽코니가 명성을 듣고 페르메이르의 집을 방문했는데 작품이 한 점도 없었더란다. 근처 빵집 주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니 600길드를 주고 산 작품이 있었다. 또 페르메이르가 빚을 갚기 위해 담보로 제빵업자에게 그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니 우유병 앞에 놓인 바구니 속 푸짐한 빵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링’에서 팔던 빵들과 닮아 있다. 시 광장 주변에서는 네덜란드의 전통 나막신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델프트 거리에는 앤티크 숍이 많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유명해진 푸른색 터번, 델프트 블루 타일, 클래식풍 스탠드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다양하다. 심지어 한국 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 2019-08-3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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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떠날 수 있는 곳, 청주
- 때로 심란한 일상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조용히 혼자 떠나거나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가볍게 길을 나선다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소소한 당일 여행으로 알맞은 도시 청주가 있다. 넓은 도시가 아니어서 발길 닿는 대로 하루를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다. 강남고속터미널을 출발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핫플레이스 성안길 청주 도심에 성안길이 있다. 청주의 명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입구부터 시네마 거리다. 영사기 조형물과 영화 ‘박하사탕’의 철길, ‘국가대표’, ‘타이타닉’, ‘007’의 제임스 본드 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워진 조형물들이 있다. 배우들의 핸드프린팅과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과 레드카펫도 마련돼 있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한 ‘짝패’를 비롯해 ‘베테랑’, ‘닥터스’ 등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세 군데나 있다.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삼겹살 거리도 있다. 전국 유일의 삼겹살 특화거리인데 3월 3일 삼겹살 데이를 전후해 삼겹살 축제도 연다. 중앙공원 성안길 중간 지점쯤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앙공원이 있다. 9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임진왜란 당시의 전적비, 유형문화재 망선루, 척화비, 독립기념비 등이 가득하다.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장소다. 시민들의 쉼터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공원으로 청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름의 신록이나 가을의 단풍철엔 계절의 색감을 충분히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도심의 국보와 맛집 공원 골목에는 50여 년 전통의 가락국수집 공원당이 있다. 6000원짜리 가락국수를 비롯해 판모밀, 돈가스가 유명하다. 청주의 명물인 쫄쫄호떡 하나 사 먹으며 거리를 걷는 재미도 있다. 골목을 벗어나면 도심에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으니 빠뜨릴 수 없다. 고려시대 때 용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국보 41호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전국에 철로 만들어진 당간은 공주 갑사의 철당간, 칠장사의 철당간, 그리고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세 군데뿐이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전국 최대의 육거리 시장 성안길을 따라 끝까지 쭉 가다 보면 우리나라 전통시장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육거리 시장이 있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친다. 지나가면서 한 가지씩 사 먹기도 하고 신기한 물건을 보고 물어보면 구수한 말투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품질도 좋고 인심도 후하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이다. 옛 연초제조창의 화려한 변신, 청주 문화산업단지 아주 오래전 청주에는 연초제조창이 있었다. 청주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온, 청주를 대표하는 산업체였다. 1946년 11월 1일 건립된 옛 청주 연초제조창은 3000여 명이 넘는 근로자가 근무하던 곳이었다. 이곳이 창고의 원형을 유지한 채 새로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되어 많은 이의 관심 속에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입구부터 켜켜이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아련하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담뱃잎을 보관하던 연초제조창이 지금은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부창고로 변신한 것이다. 매해, 매월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는데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그 주제들이 새롭고 따뜻하다. 현재 37동, 38동, 6동, 8동, 36동, 35동, 34동으로 되어 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이다.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말 개관한 청주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덕수궁, 서울에 이은 네 번째 분관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한 첫 지방 분관이다. 개방 수장고와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고 미술품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5층 기획전시실에서는 6월 16일까지 개관 특별전인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열리고 있다. 수암골 수암골 마을은 10년 전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지로 이름을 알렸다. '영광의 재인', ‘카인과 아벨' 등 유명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이어지며 명소가 되었다. 원래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달동네다. 또한 과거 청주 제일의 인쇄골목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인데, 지역 예술가들이 ‘추억의 골목길 여행’이라는 주제로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벽화를 그려 애환과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동네로 재탄생됐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팔봉빵집 주변의 찻집이나 카페에서 다리를 쉬며 청주를 조망하면서 차 한 잔 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운 도시, 청주 발길 닿는 대로 아늑한 청주 도심을 걷다 보면 저절로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택시기사의 순박한 이야기, 육거리 시장통 아주머니의 정감 어린 인심, 새롭게 만난 문화 예술의 면면들, 추억을 소환하는 골목길의 벽화, 소박한 맛집의 편안함, 조용한 찻집에 푹 파묻혀 일상을 이야기하고 세월을 이야기하던 시간들이 가슴을 훈훈하게 할 것이다. 청주는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는 도시다.
- 2019-02-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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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기 열풍' … 2019년에도 계속
- 2018년 케이옥션의 경매가 위클리 온라인경매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6번의 정기경매와 59번의 온라인 경매, 총 65회 경매로 717억7617만 원의 낙찰총액을 기록했다. 2018년 경매에서 최고가 '30억 원'에 낙찰된 작품은 김환기의 '22-X-73 #325'였다. 김환기의 '달과 매화와 새' 역시 23억 원에 낙찰되어 2위를 차지했다. 미술품 경매 시장은 2018년에도 '김환기 열풍'이 불었다. 김환기의 작품은 정기 경매에 37점이 출품되어 그 중 31점이 낙찰됐고, 전체 낙찰총액에서 17%를 차지했다. 천경자의 '초원 II'가 20억 원, 유영국의 'Work'가 6억 원에 낙찰되며 각각 작가 최고가를 경신했다. 해외 작가 중에서는 야요이 쿠사마의 'Infinity Nets (Opreta)'가 10억에 낙찰되어 해외 작가 중 최고가에 거래됐다. 고미술 부문에서는 송석 이택균의 '책가도'가 5억6000만 원에 낙찰되며 고미술 최고가를 기록했다. '월인석보 권20'과 '목우자수심결(언해)'같은 보물이 거래돼 고미술 시장의 격을 높였다는 후문이다. 더불어 효종대왕의 '효종어필첩'같이 희소한 고미술 작품도 시장에 열기를 더했다. 2018년엔 온라인경매의 활약이 돋보였다. 온라인경매의 낙찰총액이 2017년 대비 20%정도 증가했고, 온라인경매를 통한 신규 수집가의 유입이 지속됐다. 케이옥션은 "수십 만 원에서 수백 만 원대의 작품이 출품되는 위클리 온라인경매가 고가의 작품만 거래된다는 미술품 경매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려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자선경매에는 기업과 문화예술단체의 협업으로 미술품 외에도 다양한 아이템을 선보여 미술품 경매의 대중화를 꾀했다. 케이옥션은 2019년에도 경매 시장이 김환기와 추상미술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장욱진, 천경자 등 대가를 비롯해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으로 미술시장을 이끈 김창열, 김종학, 전광영, 이강소 그리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의 활약도 기대한다고 밝혔다. 특히 올해 하반기 전세계 회고전을 앞둔 미디어 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재평가 작업이 시장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도 케이옥션은 "고미술 시장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고미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와 육성에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포부를 말했다.
- 2019-01-0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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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 눈 똑바로 뜨고 보라! 민화 수집가 김세종 평창아트 대표
-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 2018-11-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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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품 상속에 쏠리는 자산가의 시선
- 현금 및 유가증권, 귀금속류, 부동산(회원권), 주식(상장 및 비상장 불문), 금융자산(금융상품) 등의 전통적인 상속 재산 이외에 미술품에 대해서도 상속 문의가 늘고 있다. 미술품은 고급 취미를 즐기면서 저금리 시대의 대체 투자 상품이 될 수 있다. 세무변호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부동산, 주식 및 금융자산은 실명 등기 또는 등록이 의무이고 그 평가기준이 비교적 체계화되어 있어 과세당국이 양도, 증여 및 상속과 같이 그 소유자(귀속자)의 변동을 쉽게 포착해 과세할 수 있다. 반면, 미술품은 양도, 증여 및 상속 여부와 같은 소유자(귀속자)의 변동을 과세당국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이를 포착하더라도 그 과세표준(즉, 세금을 얼마나 매길 것인가)을 정확하게 산정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미술품 부과 세금, 이렇게 다르다 그렇다면 미술품에 대한 세금은 어떻게 부과될까? 원칙적으로는 미술품의 생성단계(작가의 측면), 유통단계(화랑, 경매 회사의 측면), 소비단계(수집가, 미술관의 측면)로 구분해야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범위인 수집가 측면에서 미술작품을 양도, 증여 및 상속하는 경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미술품 과세를 소개한다. 먼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이 미술품을 양도할 경우다. 양도인은 미술품 양도로 인해 일정한 소득을 얻는다. 그 소득에 대해서는 ①그 양도가액이 건당 6000만 원 이상인 경우에 한해(금액 기준), ②그 작품이 외국 작가의 작품이거나 또는 양도 시점에 국내 원작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에 한해(작가 기준), ③‘양도소득’이 아니라 ‘기타소득’으로 분리과세 된다(기타소득으로 분리과세). ④기타소득으로 과세되는 경우라도, 미술품 양도가액의 80%, 미술품 보유 기간이 10년 이상인 경우 양도가액의 90%까지 필요경비가 인정되고, 실제 소요된 필요경비가 위 금액보다 크다면 실제 소요된 금액만큼 필요경비가 인정된다(고율의 필요경비 인정). ⑤분리과세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미술품 양도인에게 그 대가를 지급하는 자가 양도가액에서 위 필요경비를 차감한 금액에 22%(지방소득세 포함)의 세율을 적용한 금액을 원천징수한 뒤, 다음 달 10일까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으로 세금 납부가 종결된다(세금신고 및 납부의 간편성). 요약하면, 다른 경우에 비해 소득세 부담이 적고 소득세 신고납부의 절차도 간편하다. 또한 미술품 거래에는 부가가치세가 면세된다. 부가가치세 및 개별소비세까지 과세되는 귀금속 거래에 비해 유리하다. 주식거래와 달리 증권거래세도 없고, 부동산(회원권) 거래와 달리 취득세도 없다. 게다가 실무적으로 볼 때 미술품은 등기·등록 자산이 아니기 때문에 양도의 경우 양도인에게 그 대가를 지급하는 자가 원천징수를 하지 않더라도 이를 과세당국이 포착해 과세하기는 더더욱 어렵다(참고로 양도인이 원천징수를 하지 않을 경우 원천징수불이행가산세를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다운계약서, 불법적 요소 주의해야 양도와 달리, 미술품을 증여 또는 상속할 경우에는 다른 재산 대비 유의미한 절세제도는 도입되어 있지 않다. 미술품을 증여 또는 상속할 때는 다른 재산과 동일하게 증여 또는 상속세를 신고 및 납부해야 한다. 다만, 증여 또는 상속세를 과세하기 위해서는 증여 또는 상속 재산을 증여 또는 상속일 당일의 ‘시가’가 얼마인지를 금액으로 평가해야 한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미술품에 대해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2인 이상 전문가의 감정평균금액과 국세청위촉 3인에 의한 감정평가심의회 감정가액 중 높은 금액으로 미술품의 ‘시가’를 결정한다. 미술품의 경우 일반적인 재화와 달리 작품별 소장가치 및 투자가치가 가격 형성의 기초가 되어 참고할 만한 다른 가격을 찾기 어렵다. 전문가라 하더라도 평가에 주관적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어 그 평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평가금액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최선은 아니겠지만 차선으로 위와 같은 ‘시가’ 결정의 기준이 마련돼 있다. 그 때문인지 위와 같은 미술품의 ‘시가’ 결정에 대한 세법규정에도 불구하고, 실무상으로는 세무조사 단계에서 피상속인의 미술품 취득가액이 입증될 경우 그 취득가액을 기준으로 증여세 또는 상속세를 과세하는 사례도 여전히 존재하고, 이를 고려해 일단 미술품 취득에 대해서는 소위 ‘다운계약서’를 체결해야 한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다운계약서’ 작성은 오히려 사기나 그 밖의 부정한 행위로서 조세포탈죄로 처벌받을 여지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물론, 다운계약서가 아니라 실제 취득가액을 기재한 매매계약서나 경매기록을 보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고, 실제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기록들은 관리를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챙겨두는 것이 자녀들의 상속세 또는 세무조사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길이다. 한편, 부동산이나 유가증권과 달리 상속 재산인 미술품으로 물납(物納)할 수 없다. 즉 미술품의 경우 상속세를 현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따라서 자녀에게 다수의 미술품을 상속하려면 그에 대한 상속세 납부재원을 반드시 함께 마련해야 한다. 미술품을 자녀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공익법인에 출연해 자녀들에게 관리하게 함으로써 당장의 증여세 또는 상속세를 절감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공익법인의 경우 미술품 출연 이후 생각보다 까다로운 규제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미술시장은 거래정보에 대한 접근이 어렵고 거래비용이 과다하다. 이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는 미술품의 유통 및 감정에 관한 법률을 추진 중이고, 부동산처럼 일정 기준 이상은 등록제 또는 공시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미술계의 지적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향후 어떻게 미술품 관련 법과 세제가 정비될 것인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미술품에 대해서도 상속세 물납을 허용하도록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개정하고, 개인 소장자의 미술품 양도에 대한 과세기준을 현행 6000만 원에서 1억 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며, (이번에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법인의 미술품 구매에 대한 손금 인정 한도를 건당 취득금액기준 500만 원에서 1000만 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해, 이를 통해 전체적인 미술품 거래가 활성화 및 양성화되길 바란다.
- 2018-10-0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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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어제와 오늘
-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년 작 추정)’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초였으니 필자가 의과 대학생 시절이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거장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북유럽의 모나리자’로서 미술 애호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필자는 피부과학을 전공한 후 미술품에, 그중에서도 특히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증상을 찾아내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미(歐美)의 여러 미술관을 섭렵하며 다니던 중 다시 그 작품을 보게 됐을 때 순간 그림 속 ‘소녀’가 ‘전신무모증(全身無毛症, alopecia totalis)’ 환자라는 사실을 ‘진단’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겉눈썹은 물론 속눈썹도 없는 소녀였다. 문득 그 ‘소녀’가 너무나 안쓰럽게 다가왔다. 작가 베르메르가 그린 다른 여인에게서는 예외 없이 머리카락이 있는 것을 보면, 필자의 이런 ‘진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게 된다(참조: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이성낙, 눌와, 2018). 근래 인터넷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패러디한 캐릭터를 종종 보게 된다. 그중 국내의 한 젊은 작가(Kyung Eun Miriam Lee, 1995)가 그린 작품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화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존경하며(Homage to Johannes Vermeer)’(Color pencil on paper, 21×15cm, 2018). 작가는 원작이 갖고 있는 중요 특징인 ‘특유한 터번’, ‘진주 귀고리’, ‘의상’과 함께 ‘없는 눈썹’을 잘 표현했다. 특히 ‘눈’, ‘코’, ‘입’은 작가 나름대로 새롭게 ‘현대적 풀이’를 했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다른 메시지를 본다. “역사는 그 시대의 산물이며, 그 시대를 말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요컨대 오늘의 관점은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665년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오늘의 그 ‘소녀’는 결코 같아서도 안 되고, 같을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떠올리며, 작금의 ‘역사 풀이 현상’을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소멸하는 시간을 증명하는 목격자다.”
- 2018-09-0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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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풍라월(松風蘿月)-소나무의 풍류
- 나는 궁벽한 서해안의 한촌(閑村)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소나무가 아주 많은 곳이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도 이곳을 다녀간 후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적었다. 장터 옆 중학교까지는 시오리 길이라 왕복 3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신작로 주변의 야트막한 산에도 소나무가 지천이었다. 운동장 서편에는 노송 한 그루가 푸른 잎과 검붉은 보굿(껍질)을 자랑하며 개교 68년이 지난 지금도 모교를 지키고 있다. 뒷동산도 솔밭이라 때론 그 그늘 아래 낮잠을 자며 쉬기도 했다. 송화가 만발하는 5월 무렵 꽃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입에 넣으면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목에 오래 남았다. 새순으로 빚은 송순주(松筍酒)의 솔 향도 그만이다. 살아서 수백 년, 베어져서도 궁궐이나 한옥의 기둥과 서까래로 또 수백 년을 버텨내니 나무 ‘목(木)’에 어른 ‘공(公)’을 붙여 예찬할 만하다. 소나무 화가로 첫손을 꼽는 소산 박대성(小山 朴大成, 1945~) 화백은 이 땅의 굴곡진 역사를 헤쳐 온 예술인이다. 해방둥이로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3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한국전쟁 직전 한의사였던 아버지마저 잃는다. 빨치산에게 ‘반동 지주’로 찍혀 칼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당시 등에 업혀 있던 박 화백도 왼팔을 잘렸다. 그의 애절한 삶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 팔만으로만 살아온 신산한 일상에서도 “제사 때 둘러친 병풍의 그림과 글씨를 따라 그리는 것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예닐곱 살 때, 새들이 와서 부딪쳤다는 신라의 황룡사 벽 ‘노송도’를 그린 천재 화가 ‘솔거’ 이야기를 교사였던 형에게서 듣고 화가의 꿈을 다졌다. 신체의 불구를 야유하던 철없는 학우들 틈에서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었던 그는 더 이상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의 학력은 중학교까지가 전부였다. 20대 때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 화백과 서예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석도륜(昔度輪, 1923~)을 찾아가 잠시 지도를 받았고 독학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1970년대엔 국전 8회 입선, 1980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대상 수상은 그의 작품이 종래의 화풍을 파격적으로 벗어난 독창성과 창의성을 인정받은 쾌거였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실경(實景)의 맥을 이으면서도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 1899~1976) 같은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자 열과 성을 다해 그리고 또 그렸다. 1990년대에는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미국 뉴욕에서 1년여를 보냈다. 그때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 서양이라는 뚱딴지부터 찾았구나” 하며 깨달았다. 귀국 즉시 경주 불국사를 찾아 그곳에서 1년 동안 사찰생활을 했다. 1995년에는 경주 삼릉(三陵) 지역으로 하향한다. 어쩌면 유년기에 가졌던 아련한 ‘솔거’의 꿈을 성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박 화백은 회화 435점, 서예 182점, 벼루·먹·붓 213점 등 도합 800여 점을 경주시에 기증, 2015년 8월 경주시 엑스포공원 내 아평지 인근 연못가에 우뚝한 ‘솔거미술관’을 개관했다. 문기(文氣) 어린 그의 작품 중에서도 용(龍)의 형상을 닮은 노송도(老松圖)는 가히 압권이다. 이 그림[사진1] ‘송풍라월도(松風蘿月圖)’는 소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과 나무에 감긴 담쟁이덩굴이 달빛 아래 흔들리는 아취(雅趣)를 갈필로 단숨에 붓 놀린 작품이다. 성긴 여백에 달빛 가득한 정경이 솔잎 사이로 고즈넉하다. 우리 부부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홍소안(洪小岸, 1958~) 화가를 찾았을 때 그는 화실 바닥에 엎드려 붓질을 하고 있었다. 200호가 넘는 화폭 위로는 노송 두 그루가 용 비늘 같은 두꺼운 껍질과 부딪고 있었다. “제 고향 전남 곡성에 있는 소나무를 현장에서 일주일 스케치한 뒤 옮겨 그리고 있어요.” 화실 창 너머로 인왕산 등성이와 좁은 길 사이로 소나무가 나란히 보였다. 여기저기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도 모두 소나무뿐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해 인왕산을 매일 산책하며 소나무를 깊게 만났지요.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큰 소나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현장에서 며칠씩 머물며 그렸지요.” 그는 화폭의 질감을 돋보이게 하려고, 흰 광목에 흰 물감을 발라 말린 뒤 손으로 비벼 구긴 다음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다시 뒤집어 색을 입히는 배체법(背彩法)을 활용했다. 홍소안이 개발하다시피 한 이런 화면의 구성은 소나무의 음영과 굽은 가지, 솔잎의 입체적인 표현에 아주 적합하다는 평을 받게 되면서 소나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했다. 일찍이 한국화로 국전에서 입선과 특선의 결실을 거둔 것도 오로지 독학으로 이룬 성과였다. 화선지를 사용하며 익힌 선염(渲染)의 묘를 광목에 아크릴 물감으로 실현해보기를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뤄낸 1998년 ‘한국의 소나무 전(展)’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획을 그어주는 전기가 되었다. 그를 수차례 만나 보니 실경(實景)의 “소나무를 통하여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며 자신이 속한 시공(時空)을 기록하고, 언제나 푸른빛을 잃지 않는 우직하고 고집스런 꼿꼿함은 그의 성정과 매우 닮아 있다”는 평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인왕산 소나무’[사진2]는 그의 화실에서 떼어온 작품이다. 인왕산 기슭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 소나무 세 그루를 광목 위에 옮긴 그의 대표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고 화실을 찾아간 고마움에 다섯 달 분납하도록 편의’를 주어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에 걸고 매일 바라보며 소나무의 정령(精靈)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 중에 으뜸인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범접하기 어려운 신령함이 있다. 그런 소나무를 즐겨 그리다 보면 곧 소나무의 고상한 기(氣)가 화폭에 젖어들어,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맑게 한다.
- 2018-05-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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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 금화 작가, 김일태 화백 APBF 100대 브랜드 선정
-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 2018-05-2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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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품 경매시장 옥션에 나온 진귀 미술품
- “5300억 원 규모의 록펠러 소장품… 세기의 경매 열린다.” 며칠 전 국내 한 일간지에 실린 헤드라인이다. 기사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1905)라는 작품도 실려 있었다.[사진1] 순간 머리에 한 가지 장면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보름 전 ‘2018 아트바젤홍콩(Art Basel Hong Kong 2018)’이 개장되자마자 몇 작품이 팔렸는데, 그중 한 작품인 피카소의 동판화 ‘검소한 식사’(1904)를 홍콩에서 본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사진2] 이와 관련해 필자는 옥션(Auction)이라는 미술품 경매시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파리, 뉴욕, 런던 같은 큰 도시에서는 아트페어(Art Fair)라는 이름의 미술품 시장이 열린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가을 개최하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Korea International Art Fair)도 그중 하나다. 행사에 참여하는 화랑에서 내놓는 작가의 작품을 미술 애호가들이 구입할 수 있는 ‘큰 장터’다. 그래서 아트 페어에서는 경쟁적으로 좋은 작품을 구입하는 개인 수집가도 있지만, 각국 미술관 구매 담당자들이 작품을 경쟁적으로 구입하기도 한다. 수집가들이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수장하며 ‘숨겨온’ 작품을 팔기 위해 대중에게 ‘공개’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트페어는 구매자들에겐 좋은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한편, 일반 애호가들에겐 그동안 ‘숨겨져 있던’ 귀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전시장은 항상 수많은 애호가로 북적인다. 앞의 신문기사에서 언급한 뉴욕 크리스티 옥션에서는 미국의 부호이자 소문난 미술 애호가인 록펠러 가문의 데이비드 록펠러 3세(1915~2017)의 소장품이 나온다니 전 세계 미술계의 눈들이 경매장으로 쏠리고 있다. 여기서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가 얼마에 낙찰될지도 관심사이지만, 그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수많은 애호가가 행복해하고 있다. 미술 시장의 두 가지 다른 순기능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2018-04-2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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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로 간 프랑스 미술품, 한국 오다
-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전시인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하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25일까지 전시된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왔다고 해서 러시아 작품을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17,18세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에서 수집한 회화와 더불어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사서 모은 인상주의 회화, 조각, 소묘 작품 등 80여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이후 26년 만에 성사됐다. 당시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2010년 교환전시로 ‘솔숲에 부는 바람,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이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은 두 곳 간의 두 번째 협력전시다.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한국도자명품전’에 대한 교환전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에서 앙리 루소까지,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이 한 자리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은 300만 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박물관이며, 유럽미술 전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기초를 세운 예카테리나 2세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제들과 귀족, 러시아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프랑스 미술품을 수집한 결과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본관의 일부이자 로마노프 왕조시대의 황궁이던 겨울궁전에전시돼있는 프랑스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총 4부로 구성 됐는데 제1부인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제2부인‘로코코와 계몽의 시대’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들의 작품과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시의 3부인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의 마지막인 ‘인상주의와 그 이후’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에서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녀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수집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기간 ∼4월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관람료 성인 6천원 / 중, 고등, 대학생 5500원 전시문의 1688-0361 위치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버스 400번·502번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하차
- 2018-03-09 1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