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나 투자가 아니라 누구나 하나씩 그림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저변화되어야 그림이 팔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림이 팔리지 않습니다.” 오랜 경영학자로서의 삶이 뒷받침해 주는 것일까. 황의록(黃義錄·68)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이 지향하는 목표는 매우 뚜렷하고 분명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기질이라기보다는 경영자의 기질에 가까워 보였다. 희미하고 열악한 한국 미술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질이란 그러한 분명함과 뚜렷함이 아닐까. 이미 미술계에서 놀랍다는 반응을 얻고 있는 황 이사장의 과감한 실험, 그리고 꿈을 들어 본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을 전공하고 싶었죠.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사진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학하면서 한국에 생활비를 보내야 할 정도였기에.”
베테랑 경영학 교수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황의록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은 노년이 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을 찾다 다시 사진을 만나게 됐다. 중앙대 사진 아카데미에서 3년을 공부했다. 그러나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사진 동호회에서 어울릴 시간도 없어서 혼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혼자 출사를 가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사진을 얼마 하다 보니 사진이 발전이 없는 게 보이더군요. 그러다보니 고민을 하게 됐는데…. 사실 고민하는 게 싫었습니다. 사진은 즐기려고 시작한 거였으니까. 친한 사진작가에게 사진이 나아지지 않아서 즐겁지 않다고 털어놨어요. 그가 심미안이 달라지는 게 좋겠으니 이제부터 얼마 동안은 사진을 하지 말고 그림을 보러 다니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때까지 겉멋이 들어서 국내 작가는 보지 않았는데, 그후부터 일주일에 이틀은 그림을 보러 다녔어요.”
중견 화가가 물감 사려고 ‘야간 경비’… 충격이었다
황 이사장은 전시회를 가게 되면서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고, 친한 작가가 하나둘 늘어나고, 초대까지 받게 됐다. 그리고 화가들이 힘들게 산다는 것과 개인적인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한 중견작가가 작업하다 말고 알바를 나간다는 거예요. 물감이 떨어져서, 건설 현장에 야간 경비를 하러 나간다고. 여자 작가는 전화했더니 이젠 그림을 안 그린다고 말하더군요. 너무 수입이 없어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다고. 연말에 시험에 통과하면 내년부터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몇 푼이라도 받아서 먹고살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더군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미술계의 열악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고민하게 됐다. 명색이 경영학 교수인데 이걸 보고 넘어간다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해서 미술계 사람들을 만났는데 다 말렸다. 그들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실패한다, 그리고 돈을 벌 수 없다.
“전 돈 버는 건 관심 없었어요. 밥은 먹고사니까. 밥 먹고사는 내가 또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한다는 부분만 성공하면 되는 거겠죠. 여러 가지를 검토한 결과, 전 된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림이 안 팔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파는 쪽에서 잘못해서지 사람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구매 능력이 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조차 그림을 안 삽니다. 왜냐면 미술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감, 불신 때문이에요. 저 작가가 정말 좋은 작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이 뉴스를 타는 것은 투기나 투자 목적으로 사는 극소수 사람의 얘기들뿐이다. 미술품을 문화적 향유품이 아니라 돈벌이로만 여기니 미술품에 과도한 금액이 매겨지고 투기와 투자로만 쓰이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작가들만 빼고 대다수의 작가들은 생활 자체가 열악한 현실을 만들었다.
“국내 작가로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투잡을 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수라든지로 일해서, 그 네임밸류 덕분에 비싸게 팔리는 경우도 많고. 아니면 다른 영향력 있는 미술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서 팔리죠. 그걸 비웃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건 그거대로 존재하는 거고, 옥션 등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도 그것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을 나와 관계없는 세상으로 압니다. 그들에게 미술 소비자가 되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화가들에게는 작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어요.”
시장을 키워야 작가도 갤러리도 소비자도 행복해진다
황 이사장은 그래서 2015년에 화가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조합은 후원자 조합과 작가 조합으로 나뉜다. 그는 먼저 후원자 조합을 모았다.
“후원자 조합원이 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로 기본적으로 1000만 원 이상 출자해야 한다는 겁니다. 협동조합 중에서 이렇게 많이 내는 데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정도 출자해도 삶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리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
두 번째는 이 미술운동이 실패할 수 있다는 걸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000만원이 사라질 수 있는데, 그래도 하이파이브하고 좋은 꿈 꿨다 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과 시간으로 이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건들로 조합원을 선별해서 받았고, 현재 그분들이 도와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 이사장이 의도하고 있는 조합원 선발은 후원자에게 쉽지 않은 엄격함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작가 조합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소비자들이 그림을 가까이하고 친해지면 사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불안과 불신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도 소비자가 그림을 잘 몰라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게 첫 번째입니다. 정말 좋은 작가를 엄격하게 선발할 테니 마음놓고 사도 된다는 걸 조합에서 보증해 주는 거죠. 그래서 작가 선발에 엄청나게 공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엄격한 조합원 선발로 소비자의 신뢰 보장
까다로운 작가 조합원 선정 과정은 총 3차에 걸쳐 이뤄진다. 심사위원은 평론가, 원로 작가, 갤러리 관장 등으로 총 10명이 있다. 이 10명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1차 심사는 블라인드 리뷰다. 흡사 TV 프로그램 처럼 작품만 보여주고 작가는 감춘 채 오로지 미술시장의 대중화, 세계화에 적합한가가 심사 조건이다. 이는 그림이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소수만 좋아하는 그림은 안 된다는 관점에서 이뤄진다. 그러면서도 작품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부분에서 심사위원 10명 중 7명 이상이 지지해야 작가가 통과된다.
2차는 현장 심사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서 가진 작품 모두를 확인하여 작품 세계의 집중도와 일관성을 확인한다. 앞으로의 계획, 도움이 필요한 작가인지 등도 확인하는 과정이다.
3차는 공개 심사다. 초대 전시회를 열어 작가의 모든 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여기에서 70% 이상이 찬성해야 작가 조합의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엄격한 선발은 상반기와 후반기에 한 번씩 한다. 현재 작가 조합에 속한 작가는 11명. 100명까지 늘리려고 계속 선발 중에 있다.
건강한 미술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다
황 이사장의 도전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어떨까?
“놀라죠 다들. 지금은 지원서가 상당히 많이 들어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 부족해요. 그런데 미술계가 너무 어렵다 보니 작가를 위해 해 주는 것도 많고 팔리는 것도 제법 되고 작가를 띄우는 역할을 하니까 놀라는 거겠죠. 아직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만, 많이 기적처럼 받아들여주시는 거 같아요.”
황 이사장은 현재 미술시장의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해선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건강한 미술에 대하여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실천하여 괜찮은 성과를 내면 사람들이 ‘저것도 괜찮네’라며 평가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1년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느낌이 와요. 저는 페이스북에다 제가 겪는 일을 다 쓰고 있어요. 이렇게 했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했는데 효과가 있다 등등. 감추는 게 아니라 투명하게 하겠다, 판단은 당신들이 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그리다
황 이사장은 70세에 가까운 시간을 교육자로서 살다가 이제 사회와 문화와 공유의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감한 플랫폼 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다르지 않아요. 지금은 현실적인 고뇌고 옛날엔 이상적인 고뇌였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경영학은 현실 학문이기에 계속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실제 효과를 내서 사람의 삶을 개선하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내가 아는 지식을 접목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일을 찾아왔던 겁니다. 지금은 그러한 방법을 적용하는 영역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효과와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두 가지 조건. 그러한 방향성은 그의 심미안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그림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남달라야 한다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도 감동받을 수 있고 신선함에 감동받을 수 있고, 감동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감동이 있어야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게 제 소신이에요. 살기 힘든 사람도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림을 누구에게나 필요로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어야 세상이 따뜻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았다는 확신, 즐기면서 산다
“앞으로 30년 보고 있어요. 당장 그림이 얼마라도 팔려야 작가도 살고 조합도 살죠. 그래서 30년 정도를 초단기, 단기, 중기, 장기로 계획을 잡아보고 있어요.”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황 이사장은 작가들은 나은 여건에서 작품에 전념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돈이 있든 없든 그림을 가까이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자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인내심 싸움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남들은 칭찬해도 저는 계속 불안하거든요. 짧은 성과부터 긴 투자까지 생각해야 하니 쉽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런데 여러 가지 반응을 보니 제 예상이 맞았고 전략도 맞았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 좀 더 빠르게 나오지 않아서 불안할 때가 있죠(웃음). 하지만 즐기자는 쪽으로 가고자 해요. 지금 상황은, 아주 괜찮은 거 같아요.”
>>황의록 이사장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 및 기획처장, 한국소비자학회장, 한국유통학회장, 한국마케팅학회부회장, 한국의농학회장을 역임했다.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제일제당, 삼성전자,두산그룹, LG그룹의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및 GS그룹 자문교수를 맡고 있다.
부득이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책을 수납할 공간이 없어서, 아니면 부모님이 소장하고 계시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남게 된 책들, 이러한 책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끼던 책, 다 읽은 책, 필요가 없어진 책, 기증 받은 책들 중 한 권 한 권 정리하며 내놓았다. 쌓을 대로 쌓아 놓고 보니 어마어마하다. 가물가물 새록새록, 기억의 조각을 더듬어 열어 본 책 틈에 낀 먼지에서 청춘이 흩날린다.
좋은 책, 나쁜 책, 이상한 책에 따라 사고파는 가치가 달라진다. 괴테의 말에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람의 책장을 보면 된다. 수십 년 소중하게 보관해 왔던 책을 팔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차곡차곡 박스에 담아 고생해서 헌책방에 가져갔지만, 주인의 짠 가격 매김에 다시 들고 돌아와야 하나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넘길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지 싶다. 그 책의 가치를 아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만큼 그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제대로 값을 쳐 주고 새로운 주인에게 책을 내어 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같은 책이라도 파는 이의 정보력에 따라 다른 값에 팔린다는 점이다.
첫째, 책의 상태를 점검한다.
중고 책의 값을 결정할 때 당연히 책의 상태가 중요하다. CD와 DVD 등의 부속품이 딸린 책이라면 그게 없을 경우 거래 가격은 뚝 떨어진다. 인기 작가의 소설과 유명 인사의 저작 등의 단행본이라면 책 띠까지 갖춘 미품(美品) 상태라면 그렇지 않은 책보다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으며, 초판본의 경우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영화화한 작품이라든지 문학상 수상작품, 그리고 화제의 인물과 관련된 책 등 시대와 유행에 따라 책의 희소가치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그런 점들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그밖에도 읽으면서 밑줄을 친 곳은 없는지, 혹시 저자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는 책은 아닌지 팔기 전에 우선 꼼꼼히 책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집이라면 당연히 완질 상태, 시리즈라면 전부 갖춘 상태라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잡지의 경우라도 창간호부터 있거나 화제의 인물과 기사가 실려 있으면 수집가 혹은 연구자들에게 그 가치를 평가 받을 것이다.
둘째, 중고 책의 가격대를 알아야 한다.
인기 있는 책은 당연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울러 재고량과 희귀품인지 아닌지도 거래 가격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소장한 책의 현재 거래 가격 내지 적절한 가격을 알아 두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셋째, 해당 분야의 전문 책방을 이용한다.
책값을 매기는 것은 그 책의 상태와 가치이다. 상태야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꼼꼼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 책의 가치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사실 알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책이지만 업자에 따라서 값이 들쑥날쑥한 법이다.
음악과 미술 서적은 예술 계통의 전문 책방에, 의학서라면 의학 관계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에 가져가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기 전에 조금 수고스럽겠지만, 그 분야의 지인들 혹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뒤 사전 지식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넷째,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한다.
처분할 책이 많거나 헌책방까지 갈 시간이 없을 경우 등등 그 밖의 이유로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할 경우가 있다. 사이트에 따라 책 점검과 가격 결정, 그리고 판매 대금 입금 방법 등 차이가 있으며, 차별화된 서비스와 장·단점을 서로 비교해 봐야 한다. 또한장르별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으니 온라인 전문 사이트가 헌책방보다 더 싸게 거래된다는 생각은 편견일 수도 있다.
특히, 판매하지 않더라도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값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자신의 책이 어느 정도 값이 매겨지는지 사전 조사 차원에서도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다섯째, 인맥과 SNS를 이용한다.
헌책방이나 온라인 전문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직거래야말로 책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껴줄 사람에게 책을 처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떻게 알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인맥과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게 효율적이다. 판매자, 즉 책을 소장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기에 처분할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책 거래를 통해 새로운 인맥이 형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섯째, 중고 및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
내가 처분할 책의 값을 직접 매길 수 있는 중고나라, 벼룩시장 등의 중고 사이트를 이용하는 방법도 좋겠다. 또한, 처분할 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옥션 등 경매 사이트를 이용하면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인해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이다.
출간된 지 50년 이상 된 책이거나 유명 작가와 저명인사의 사인이 들어 있는 책 등 소장 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책이라면 고서 및 골동품이나 예술품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매 사이트를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결과를 얻을수도 있겠다.
1. 개똥이네 www.littlemom.co.kr 중고서적 전문 사이트, 중고 및 새책 판매, 가격비교, 이벤트 등 정보 제공.
2. 북코아 www.bookoa.com인터넷 헌책방, 교과서, 전공서적 구입 및 판매, 오픈마켓 제공.
3. 코베이 www.kobay.co.kr 고문서, 고서, 헌책, 근현대사, 우표, 화폐, 미술품, 골동품, 영화, 만화, LP음반.
4. 광개토골동품경매 www.curiomart.co.kr 고서, 고문서, 간찰, 헌책, 고문헌, 고미술품, 민속품, 근현대사 자료 안내
5. 제이옥션 www.jauction.co.kr 화폐, 우표, 골동품, 도자기, 그림, 영화, DVD, 음반, 만화, 수석, 근현대사, 고서, 사주, 경매.
6. 한옥션 www.hanauction.com 고서, 고문서, 간찰, 헌책, 고문헌, 고미술품, 골동품, 민속품, 근현대사 자료, 온라인 경매.
7. 코아트 www.koarts.com 서양화, 판화, 한국화, 조각, 서예, 골동품, 도자기, 서적,
[TIP]중고 책 구매를 피해야 하는 책
1. 최근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는 책
2. CD등의 부록이 있는 책
3. 시간의 제약을 받는 몇몇 실용도서
4. 시리즈나 일련번호의 도서
한 도예가를 만나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던가. 왜 꼭 그 예인(藝人)을 만나고자 했던가? 돌아보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 아릿함이 밀려온다. 청광 윤광조(晴光 尹光照· 1946~ ) 도예의 모든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싶은 열망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으로, 경북 안강의 자옥산 자락으로 몇 차례 도요지를 찾아갔으나 바람 같은 흔적을 놓치고 매번 조우조차 못했다.
‘예술인은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을 생생히 보고 싶은 습벽(習癖) 때문에 여러 예술인들을 찾아다녀야 직성이 풀렸다. 특히 흙을 수비(水飛)하고 물레나 판으로 형태를 만들어 건조하고, 초벌구이와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깎아 내고, 유약을 바르고 마지막 가마에 불을 지펴 소성(燒成)하고 식혀서, 가마 문을 열어 완성품을 꺼내는 수 주일의 도예작업은 꼭 참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5년 선배라는 학연도 있었지만 1994년 호암미술관에서 ‘한국의 미, 그 현대적 변용’이라는 명제의 오수환(吳受桓·1946~ ), 황창배(黃昌培·1947~2001)와 함께 한 윤광조의 전시회에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처음에는 전통도자(청자, 백자)를 잇는 기물을 빚기도 했으나, 태토(胎土)의 거칠고 질박한 질료에 화장토(化粧土)를 입히고 대칼, 지푸라기 혹은 손가락으로 유희하듯 글자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 매료되어 오늘날까지 분청자기만을 고집스레 만들고 있다.
심산(深山)의 사찰을 다니며 불가(佛家)의 깊은 명상에서 비롯한 선(禪)의 경지에 이르고자, 끝없는 수양(修養)과 참배여정(參拜旅情)으로 수개월에서 1,2년간 도요지를 비우기 일쑤였다. 도자기에 대한 구상이 가슴 가득 차 올라와야 몇 점씩 빚어내곤 하였다. 작가의 군 시절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본 옛 도자기에 매료돼,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선생을 찾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1976년 첫 가마를 짓자 혜곡 선생은 젊고 창의력이 도저한 윤광조에게 당신의 스승이었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1905~1944)의 아호이기도 한 급월(汲月)이란 아호를 내렸다. 그래서 윤광조의 도자 가마는 급월요(汲月窯), 급월당(汲月堂)이 되었다. 우현 선생은 원숭이의 우화(寓話)를 인용하여 급월을 설명하였다. ‘산중 원숭이가 깊은 밤 목이 말라 샘가에 오니 마침 달이 물에 비쳤다. 원숭이는 달을 건지려 계속 물을 떴으나 달은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학문을 연구하는 이치도 이와 같아서, 아무리 다해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끊임없는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감계(鑑戒)의 깊은 뜻이 서린 아호였다.
1986년부터는 쉽게 도자를 빚는 물레를 치우고, 판 작업과 흙 타래를 쌓아 올리는 자유롭고 정형이 없는 창작도예를 통해 그릇으로서 쓰임은 이어가되 무심히 손가락으로, 혹은 지푸라기나 못 끝으로 글을 써 넣거나 문양을 그렸다. 심경(心經), 율(律), 정(定), 관(觀), 월인천강(月印千江), 정토(淨土), 지월(池月) 등의 작품들은 작가의 깊은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빚은 격조 높은 예술품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 분청자기의 세계를 나타냈다. 이 작품 ‘정(定)’은 직사각 육면체 통 위에 동그란 구멍을 두어 꽃을 꽂을 수도 있으며, 넓은 한쪽에는 한 그루 나무와 새의 형상을 손가락으로 그리고, 이면에는 달이 강에 비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을 나타낸 귀한 작품으로, 인사동 화랑 주인을 꽤 오래 졸라서 구입한 것이다.
올해 7~8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遊戱三昧(유희삼매) 도반 윤광조. 오수환 전’에서 윤광조는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무위자연의 순수와 인간의 고뇌를 한 점 한 점 도자에 녹여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 거칠되 따뜻한 두 손을 잡으니 “보잘 것 없는 선배를 깊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만날 때마다 겸손한 그의 인품에서 든든한 예(藝)의 거목을 본다.
내 향리(鄕里)인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이수종(李秀鍾 1948~ ) 도예가가 가마를 짓고 도자를 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소나무 숲이 우거져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1866)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답사하면서 “그곳에 소나무가 많다”고 기록했다는 한촌(閑村)이다.
이수종은 중송리 언덕에 중송당(中松堂)이라 자호(自號)하고 특색 있는 분청자기를 빚었다. 그의 도자기는 산청의 흙이나 옹기토로 도판, 병, 사발, 불상 등을 자유롭게 만들고 화장토를 입힌 후 붓이나 손가락에 철화(鐵畵)안료를 찍어 대담하게 문양을 그리되 그 임리(淋)가 뚝뚝 흘러 그릇 바닥에 넘치기도 하였다. 그 역시 윤광조와 같은 홍익대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분청자기에 매료되어 그것만을 구웠다. 초기에는 추상의 물상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학 강의 등을 물리고는 오직 분청자기만을 만들었다.
고향 시인 두 명과 동행했던 가을날 그는 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사진도 마음껏 찍게 하고 저간에 새로 시도한 백자 달항아리를 여러 점 안아 볼 수 있게 했다. 단아한 부인의 다과 접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관을 경청하였다. “새벽이나 해 질 무렵, 솔숲을 지나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을 걸으면서 엄숙한 자연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런 마음의 리듬을 작품에 이입하려 한다.”
일찍이 그가 만든 연적, 향꽂이, 찻사발, 약사여래불상을 수집하고 아껴왔는데, 이젠 고희(古稀)를 앞둔 그의 달항아리를 수집하러 중송당을 드나들 즐거움이 더 생겼다. 이 편병(扁甁)은 신세계백화점에서 토전 김익영(土田 金益寧·1935~ ) 등 빼어난 도예가 몇 명과 함께하는 전시회에서 아내와 함께 구입한 것이다. 철화의 그림 속 이삭이 끊긴 수숫대가 빈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 편병을 바라볼 때마다 낫으로 수수 이삭을 자르던 유년의 고향 밭이 떠오른다.
2010년 용인의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3개월간 열렸던 ‘이수종 청담에 뜬 달’이라는 대형 전시회는 이수종의 분청자기에서 백자의 달항아리까지 맥을 짚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황량한 대지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장소의 풍경마저 바꿔 버리는 오늘날의 거목이 되기까지 모진 세월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평자(評者)는 이어 “어느 누구보다 그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원초적인 맛이 흘러 넘치고 살아 꿈틀거리며 또 그만큼 주위 공간과 사물들을 자연처럼 너그럽고 편안하게 감싸 안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언젠가는 이 두 도예가의 가마를 찾아가서, 물에 잠긴 달을 긷듯 노년의 열정을 불사르는 예술혼에 슬며시 젖어 볼 꿈을 꾼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이재준(아호 송유재)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7년 늦가을부터 종로구 관철동의 고서점 ‘통문관’을 드나들었다. 한문 시간에 설악산인(雪嶽山人) 김종권(한학자1917~1987)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감명 깊어 교무실로 자주 찾아뵈었더니 “학교 도서관에는 관련 책들이 별로 없으니 가까운 ‘통문관’에 가서 나 등을 찾아 읽어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주말에는 통문관 구석에 서서 역사책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서점 주인이며 서지학자인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1909~2006) 선생과 가까워졌는데, 동그란 의자를 내어 주며 “맘 놓고 앉아서 책 보게”하여 여러 귀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그곳은 고명한 교수며 석학들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담배 심부름도 간혹 해드린 일이 있었는데, “이군, 이분이 검여(劍如) 선생이시네. 인사 여쭙게”하여 유명한 서예가 유희강(柳熙綱·1911~1976) 선생을 친견하였다.
두터운 뿔테 안경에 수염이 많은 온후한 인상이었다. 검여 선생은 통문관 3층에 서예실을 하고 계신고로 출타할 때는 작품을 통문관에 맡기고, 찾으러 오면 전달해 달라고 하셨다. 산기 선생은 가끔 당신이 부탁한 작품이라며 먹 냄새 싱싱한 화선지를 펴서 한문을 풀어 읽어 주셨다. 여러 작품을 보았으나 ‘文字香 書卷氣(문자향 서권기)’만 제대로 떠오른다.
검여 선생은 인천의 유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을 일찍 여의고 백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에서 3년 과정 기초 학문을 익히고 중국으로 건너가 서화의 견문을 넓혔다. 서양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했으며 중국 위진(魏晉) 남북조(南北朝)시대(220~589)의 비학(碑學; 비석에 새긴 글씨 연구)을 비롯 서첩(書帖)을 두루두루 공부하였다.
광복과 함께 8년간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림(서양화)과 서예에 정진, 1953년 제2회 국전에는 서예와 서양화에 모두 입선하므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른다. 검여(劍如)라는 아호는 “검(劍)처럼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고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고 싶어 검여(劍如), 석여(石如), 표여(瓢如)의 삼여(三如)라 하려 했지만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검여(劍如)라 했다”고 자호(自號)의 변을 하였다. 그의 글씨는 깊은 학문과 서법의 조예 있는 연구로 중국 위(魏)나라의 웅혼(雄渾)한 서체(書體)를 검여체로 혼융(混融) 발전시켰다. 추사 이후 제일의 서예가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서예가로서 치명상이었다. 이후 가족과 제자들의 희생적인 보살핌과 정신적인 재활의지를 불태워, 왼손에 붓을 잡고 소위 좌수서(左手書)의 시대를 열었다. 왼손 글씨만으로 세 번의 개인전을 열어 그 강인한 의지와 독특한 예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
평소 그분의 작품을 소장하고자 열망하다가 1965년 작 ‘강락무극(康樂無極)’을 20여 년 전 어느 서예가로부터 입수하였다. 글의 뜻도 좋지만 그 힘차고 당당한 검여의 서체가 마음에 끌렸다. 더불어 하세(下世)하기 1년 전인 1975년에 쓴, 좌수서 현판과 행서(行書)의 대련(對聯)도 수집할 수 있었다.
옛 속담에 ‘왕대밭에서 왕대 난다’고 하였듯 검여 선생의 문하에는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1941~2013)이라는 우뚝한 수제자가 있다. 그가 제물포고등학교 2학년인 1958년부터 검여 선생과 인연을 맺어 서울대 농대를 진학한 1960년부터 검여 선생이 서거한 1976년까지 16년간 인격도야의 서예 교습을 받았을 뿐 아니라 검여 선생의 관철동 서예실에 상주, 그 서맥을 잇고자 정진하였다. 검여 선생의 뇌출혈 이후는 수족처럼 곁에서 스승을 모셔 좌수서의 그 빛나는 서예 업적을 이루는 데 수훈을 세웠다.
서울의 여러 구청 녹지과장과 서울대공원 식물과장 등의 공직에 종사하면서도 한학, 금석학, 서예의 깊은 연구로 개성 있는 글씨의 세계를 표출하였다. 검여풍의 강건한 북위(北魏)의 해서(楷書), 행서(行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등을 두루 섭렵, 1990년에는 서예에 전념코자 공직을 내놓고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으로 이주하고 1999년에 ‘원중식 서법전’으로 남전체의 서예를 발표, 서예계를 긴장시켰다. 2003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에 서원을 짓고 후학뿐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남전 선생이 서울에 주거할 때 수차례 찾아가 그 겸손하고 공손한 인품에 머리 숙인 적이 있었다, 이 작품 ‘피갈회옥(被褐懷玉’은 1979년 38세의 작품이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70장에 나오는 글귀로 ‘겉으로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있으나 마음속에는 귀한 옥을 품고 있다’는 뜻으로, 선비는 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은유의 의미도 있는 글이다. 힘차고
그러나 거친 갈필(渴筆)의 여백이 남전 선생의 젊은 날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검여 선생의 작품들과 ‘대상무형(大象無形)’, ‘만리무촌초(萬里無寸草)’, ‘일이관지(一以貫之)’, ‘수신독행(修身篤行)’, ‘도광양덕(韜光養德), ‘송암서실(松菴書室)’ 등 남전의 2000년대까지의 작품들을 펴놓고 향을 사르며 깊은 감회에 젖는다.
검여 선생이 평생 경모(敬慕)하던 소식(蘇軾, 東坡1036~1101)과 김정희(金正喜, 阮堂 1786~1856)에서 따온 소완재(蘇阮齋)라는 당호(堂號)를 말년까지 썼듯, 남전 선생도 완당(阮堂)과 검여(劍如)에서 한 글자씩 취해 완검재(阮劍齋)로 당호를 삼아 그 맥을 이었다. 이렇듯 사제(師弟)가 같은 길을 가면서도 각기 우뚝한 예술의 봉우리를 쌓고 새 길을 열어 놓으니 후학들의 홍복일 터이다.
한자 문화권의 한·중· 일 삼국에서만 모필(毛筆)로 된 붓으로 글씨를 쓰게 되면서 중국에서는 서법(書法), 일본에서는 서도(書道), 우리나라는 서예(書藝)라 부르되 교육의 필수 요건으로 삼아 수천 년을 이어왔다. 붓은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운필하기가 어려워 오랜 시간 숙련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글씨도 흉내[臨書] 낼 수 있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체도 이룰 수가 있다. 하물며 깊은 공부가 없으면 글에 마음을 실어 낼 수 없으니, 붓의 기교만 익혀 먹물로 칠한다고 다 서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은 곧, 글씨로 쓴 사람의 인품과 심상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다.
오랜 과정 꾸준히 붓을 잡고 연마해야 성과를 나타내므로, 빠른 결실만을 원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 맞지 않아서 서예 인구가 급감하는 추세라니 통탄스럽다. 미술품 시장에서도 육칠십 한평생을 서예에 바쳐온 노대가의 작품이 고작 100만 원 미만으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이 서글프다.
벼루 하나 가득 먹을 갈아 놓고 그 향에 취해도 보고, 붓을 잡고 붓장난이라도 하다 보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힐링은 먼 데만 있는 게 아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서초역에서부터 교대-강남-역삼-선릉-삼성- 봉은사역까지 테헤란로를 따라 걸으며 건축 조형물들을 유심히 보며 걸었다. 우리나라 건축법 상 대형건축물이 연 면적 1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총 건축비의 1%를 미술품이나 조형물을 설치하게 되어 있다. 실제로 작가 손에 얼마의 돈이 들어가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덕분에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제법 돈벌이가 되는 셈이다.
서초역에서 법조단지 안쪽 고등검찰청 쪽으로 들어 가 봤으나 건물도 서울역 앞 대우빌딩만하고 정원도 넓은데 조형물은 하나 안 보였다. 정부 건물도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면 그럴싸한 조형물이 있어야 한다.
교대역부터 고만고만한 조형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기하학적인 조형물이라 제목을 보고나서야 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그나마 약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제목도 대부분 ‘희망’, ‘행복’, ‘탄생’, ‘관계’, ‘환희’ 등 밝은 주제였는데 조형물마다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 많았다. 건물의 특징과 연결지을만한 것도 찾기 힘들었다. 심지어 ‘무제’도 많았다.
역삼역 근처의 국기원은 우리나라 태권도의 본산이라고 할 정도로 의미 있는 곳이다. 그러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포함되었다는 기념비 외에는 태권도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없었다.
그나마 포스코 건물은 유명한 아마벨 조형물이 그나마 철을 만드는 회사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졌다. 포스코는 그래도 건물 앞뒤로 조형물들을 많이 설치한 편이다. 돌로 만든 조형물도 있고 뭔지 뜻도 모르지만 쇠로 만든 조형물도 정원에 심어 놓았다. 성의껏 돈을 들인 느낌이다.
삼성역부터 코엑스 쪽으로는 그나마 조형물들도 많고 카메라에 담을만한 가치가 있는 조형물들도 많은 편이었다. 여기 와보면 포스코 건물 주변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외국에 가보면, 유럽 중에도 특히 독일에 가보면 작은 동네라도 조형물들이 많다.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많지만, 역사적인 인물들도 많다. 문화계 사람들 동상도 많다. 모양도 우리나라 동상처럼 우뚝 선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자세를 하고 있다. 실제 있었던 사람이 아닌 재미있는 형상의 조각품들도 많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동네의 명물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대형 건물 앞에 있는 조형물을 지칭하며 그 앞에서 보자고 할 조형물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포스코 앞의 아마벨 조형물 앞에서 보자고 했다면 말이 된다. 그런데 그 정도로 기억에 남을만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조형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나 이해할 만한 기이한 모양의 조형물들은 이제 그만 세웠으면 좋겠다. 공간만 차지하고 볼품도 없다. 제목이나 작가 명을 표시한 표지판도 떨어져 나간 데가 많다. 그만큼 준공 허가 후에는 관심을 못 끄는 것이다. 그 정도면 낭비이다.
걸으면서 봤으므로 건물 내에 어떤 미술품이 있는지 못 봤을 수도 있다. 미술품은 밖에 내 놓을 수 없는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조형물들은 대부분 건물 밖에 설치하지만 안에 설치한 경우도 더러 있다. 포스코 1층에 설치한 원통형 수족관은 미술품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아름다운 산호와 각양각색의 살아 있는 물고기가 유영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선한 느낌을 준다.
조형물 들은 대중을 의식하고 만들어야 한다. 작가만 아는 기이한 형태의 기하학적 작품은 용도에 맞지 않는다. 취향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현대백화점 무역센터 옆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조형물이 좋다. 잠실 롯데백화점 옆의 ‘너구리 상’이 사람들이 잘 아는 랜드 마크가 되어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거리는 일반 대중들이 지나다니며 보는 것이므로 미술대전에나 맞는 예술성 위주로 하면 안 된다. 바로 알아 볼 수 있는 수준의 사람 실물 형태의 조형물들이 더 친숙하게 와 닿는다. ‘무제’라는 제목은 작가도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거나 보는 사람들에 따라 알아서 해석하라는 뜻의 무성의한 조형물로 보인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초정(艸丁) 김상옥(1920~2004) 시조시인과의 인연은 198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처녀시집인 을 구하기가 어려워 혹여 선생께선 몇 부 갖고 계실 듯해서 어렵게 전화로 여쭈니, 당신께서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한 것만 갖고 있다며, 꼭 구했으면 하셨다.
1947년 ‘수향서헌’에서 10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이 책은 한지 바탕에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까지 저자 혼자 손수 한 출판 역사상 유일한 책이라 그 가치는 상당하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 ‘청자부’ ‘백자부’ 같은 빼어난 시조들은 그 가치를 더욱 높인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의 서점가를 발로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몇 달 후 진주와 대전의 고서점에서 과 동시집 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 드렸다. 선생의 시조를 읽으며 어휘와 음률에 대해 전화로 여쭈면 늘 반가워하시며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발표 과정 등을 자상히 알려 주는, 길고 긴 시조강의(?)를 듣곤 하였다.
옥수동에서 압구정동, 그리고 이태원동으로 주소를 옮기셔도 통화는 이어졌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찾아오라고 하셨으나 왠지 문인으로 등단한 후에나 뵙는다는 치기로, 그리하지 못했다. 2001년에야 이태원동 청화아파트로 찾아뵈었다.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 생활을 하고 계셨는데 한낮부터 설핏 가을 해가 기울 때까지 문학, 고서화에서 시작된 말씀은 조선백자 예찬으로 장강을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서재 곳곳에 놓인 문방사우며 책들도 일일이 꺼내어 살펴보게 하셨다. 탁자에 놓인 벼루에 먹을 갈아 드리니, 준비해 가져간 책에 붓으로 서명을 하고 관지까지 해 주셨다. 선생이 지으신 책 중에 두 권을 빼고는 다 수집해서 소장하게 되었다. 그 후로 세 번 정도 찾아뵈었는데, “바쁠 터인데 이리 자주 오지 마라.” 단호하셔서 어렵기도 하고 문하(門下)가 아니라서 그리하시나 야속하기도 하였다. 그 어름에 합죽선(合竹扇)에 ‘성덕대왕 신종 명(銘)’을 전서(篆書)체로 써주셨고 구작(舊作)인 ‘벽도도(碧桃圖)’의 합죽선도 함께 주셨다.
千年碧桃如大斗 천 년 만에 열린다는 푸른 복숭아 큰 말같이 커서
仙人摘之以釀酒 신선이 이를 갖고 술을 빚어
一食可得千萬壽 한 번 마시면 천 년 만 년 산다네
庚戌春夜 於洌上 白瓷丹硏之室主人 艸丁 塗人掃毫 경술년(1970) 봄 밤, 한강 상류 ‘백자와 단계벼루가 있는 집’ 초정 그리는 사람이 붓을 쓸다.
중국의 시를 빌려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썼다. 신선이 먹는다는 벽도 세 개와 무성한 푸른 잎사귀를 그리되 화제가 합죽선 끝을 따라 전서와 행서(行書)로 어우러져 가히 문인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부채고리에는 은으로 된 팔각의 선추(扇錘)가 끈에 매달려 있었는데, 펴서 부칠 때 바람 따라 흔들리는 그 운치가 그만이었다.
이 인연이 합죽선을 수집하는 계기가 되어 한때는 여러 문사(文士)나 서화가의 글, 그림을 합죽선에 받아 100여 점을 갖고 있었으나, 은사님이나 선·후배 동호인에게 선물하고 30여 점만 남았다. 선추는 옥이나 은, 호박, 나무로 깎은 장신구들을 사북이라 부르는 합죽선 손잡이 고리에 매다는 것인데 침통이나 나침반 향갑 등 다양하지만 희귀해서 구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기록들에 의하면 쥘부채라고도 부르는 합죽선은 고려 때부터 실용되어 중국인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일본이나 중국도 합죽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대나무의 부챗살이 40~50개나 되게 만든 180도로 펼쳐지는 합죽선은 우리나라 고유의 산물이다. 조선조에는 전주와 안동에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扇子廳)’을 설치, 부채를 진상하게 하였다. 그곳에서 좋은 대나무와 질기고 우수한 한지의 생산에 근거했을 것이다.
합죽선을 만드는 스물네 공정은 까다롭고 세심해서 수백 번 장인의 손길이 공력을 들여 보름이 걸려야 한 자루가 완성된다. 단오 때가 되면 임금이 합죽선에 경구(警句)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옥 같은 백선에 좋은 글귀나 그림을 그려, 손에 들고 다니며 수시로 펴서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마음의 뜻을 전하는 격조 높은 선물이었다.
국악의 소리꾼들은 꼭 합죽선을 들고 창을 한다. 격정적인 장면에선 접은 부채를 손에 탁탁 치기도 하고 부채를 180도 확 펴기도 한다. 이 소도구 하나만으로 아취가 있다. 한량(閑良)들의 춤사위는 이 합죽선이 더해져 완성도를 높인다. 반원의 합죽선이 허공을 가르며 추파를 일으킨다.
녹음 짙푸른 한여름, 정자에 앉아 선추 흔들며 시조 한가락 유장하게 뽑으면 가히 선인의 정취가 아니겠는가.
명실공히 현대 수채화의 제일인자라 칭하는 강연균(1940~ ) 화백의 그림들은 늘 사실적인 것에 기저를 둔다. 멀리 있는 것,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그의 그림에는 없다. 태어나서 자란 남도의 가난한 이웃들의 고단한 삶과 스산하고 보잘것없는 자연 풍광을 탁월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그가 수채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 비싼 유화 물감을 살 수 없는 아픔에 연유 되었다. ‘그가 겪어온 슬픔과 번민과 분노가 맑은 빛깔로 응결되어 있다. 그리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원초적인 아픔, 근원적인 아름다움까지 철저하게 파악하려 한다.’고 1981년 봄호에서 평하기도 하였다.
1982년 누드 수채화만의 전시 작품이 모두 판매되는 등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수채화에 스며든 진실성을 모두가 아끼고 사랑한다. 백자 제기에 놓인 석류나, 눈 내린 좁은 비탈길, 광주리를 이고 초라한 굴뚝 옆을 지나는 아낙, 소녀의 비감어린 눈빛 등의 수채화를 수집하고 있던 중 인사동 경매에서 이 합죽선에 그린 ‘우시장(牛市場)’을 낙찰 받았다.
팔러 나온 소 서너 마리가 서거나 앉거나 한 사이로 함지박을 인 아낙이 지나고 촌로들이 소 값을 흥정하고 있으나 긴장감은 없다. 참외 수레 옆에는 팔려는 촌부나 강아지 두 마리도 졸고 있는 한가로운 여름, 시골 장터 한 모퉁이가 부챗살 따라 펼쳐져 있다. 전주의 부채 장인이 만든 이 큰 합죽선에 쌍어문(雙魚紋)의 대추나무 선추를 매달아 보았다.
향리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미 그 세월도 50년이 넘었다. 몇 해 전 이러구러 소원하였던 옛 친구에게 ‘심월상조(心月相照)’라 서예가가 써 준 합죽선을 보냈다. 작은 은방울 선추를 매달아서...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엔 서로 달이 비춘다는 고승(高僧)의 고상한 경지를 빌려보고 싶어서였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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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이재준(아호 송유재)
꼭 42년 전 이맘때, 설악산 장군봉의 금강굴에서 홀로 7일을 지낸 일이 있었다. 군 제대 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등령을 오르내리며, 세찬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운해(雲海)의 그림자 밑에 누워 마음을 비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새벽마다 비선대까지 내려가 찬물에 얼굴을 담그고, 그 물빛만큼이나 맑디맑은 푸른 영혼을 꿈꾸기도 했다.
옛 선승(禪僧)들은 면벽(面壁) 십년으로 화두를 풀었다는데, 고작 이레 만에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마음 정리를 하기는 했다.
산을 바라보면 가까운 풍경에서 먼 정경까지 끊길 듯 이어지는 아스라한 능선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사계절 어느 때라도 아득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온해진다. 거친 심성이 순치(馴致)되고 아픔의 멍울이 서서히 풀린다. 산으로 들어가 한 발 두 발 걸어보면 걸음이 가뿐하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교만과 오만함을 내려놓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賢者)들은 산 속에 머물며 인격을 도야(陶冶)해 왔다.
그래서 산 그림도 늘 인기가 좋다. 좁은 실내 그 어느 곳에다 산 그림을 걸어도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마음이 열린다.
박고석(1917~2002) 화백은 산의 화가라 일컫는다. 우리나라 서양화의 1세대 작가로,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에 입학한 1935년 무렵의 일본 화단은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하는 새로운 양식이 물밀 듯 밀려와 구상파,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파, 추상파등 신사조에 빠르게 젖어들었다.
박고석은 1940년 대학 동창으로 구성된 격조전(格調展)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1943년 동경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8·15해방과 6·25 등 역사의 격랑을 그림과 함께 건너왔다. 1960년대에는 짧은 시기 추상에 머물기도 했으나 회화 작업에 회의를 느끼고 한동안 화필을 놓기도 했다. 1967년 창립된 구상전(具象展)을 통해 화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산행을 하며 산 그림을 그렸다. 1974년 공간화랑의 개인전에서 산 그림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여느 산 그림과 다른 특색이 있다. 화가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서 깊은 산행을 하며 생생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스케치나 유채의 짙은 작품 모두 산중에서 완성된다. 산행도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전문 산악인에 준하는 장비로 암벽 등반까지 했으며, 수년간 설악산에 거주하며 실경(實景)의 산 그림을 그렸다. 설악산에서 남녘 홍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산들을 화폭에 담았다.
지리산 자락 ‘쌍계사 가는 길’의 벚꽃으로 짓이겨진 유화도 가히 이 작가만의 명작이라고 누구든 손꼽고 있다. 이 화가의 산 그림은 대부분 20호(72.7cmx60.6cm) 이하의 비교적 작은 화폭이지만 그림 앞에 서면 그 밀도 높은 구도와,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려낸 산봉우리, 그리고 거대한 암반의 질감이 입체적, 구체적으로 다가선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작가는 산에 밀착하던 치열한 화풍을 벗어나 물감의 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그윽이 바라보는 시선의 폭이 넓어진다. 직접 산을 오르지 못하더라도 산자락에 화구를 펴고 관조(觀照)의 마음을 담뿍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 ‘북한산’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림 수집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경매나 화랑가에 유통되는 숫자가 아주 적어서 수집 기회도 적고 또 그림을 만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10호 산 그림 3000만~4000만원) 망설여진다. 몇 년간 돈을 모아오다 이 그림을 사고 말았다.
이상국(1947~2014) 화가의 산 그림은 구상을 벗어난 반추상의 작품들이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까지 나는 그림을 집짓기처럼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했지요. 그런데 최근 작품들, 특히 풍경화는 해체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어요. 철거된 산동네 그림도 그런 식이지요. 그런 해체 과정에서 가슴 아픈 느낌과 동시에 어떤 새로운 에너지, 기(氣)를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졸업 후 서양화로 화풍이 바뀌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무당이 칼 위에 선 것같이 긴장된 일이다.”라고 마음을 다잡던 화가였다. 2011년 3월 11일부터 4월 3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이자 대학 졸업 40년간의 회고전은 이상국의 작품세계를 남김없이 펼쳐 보였다. 북한산, 인왕산, 홍제동의 달동네 등 서울 변두리 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독특한 화풍의 그림을 남겼다. 7~8년의 암 투병 중에도 생의 마지막까지 화실을 지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일찍이 ‘미술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유망주’에 이상국을 ‘한국적인 것, 그 전통의 계승에 그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 그 본성을 파악하려 한다. 요컨대 이상국은 박수근이나 이중섭이 걸어간 그 길을 걷고 있는 드문 작가의 한 사람이다.’라고 추천한 바 있다.
이 그림 ‘인왕산’은 겨울날 눈이 소복이 내린 정경을 그린 구상에 가까운 관념 풍경화에 속한다. 서울의 서촌 일대를 산책하다가 사간동의 단골 화랑에서 눈에 띄어 외상으로 구입한 작품이다. 평소 이 화가의 전시를 봐 왔고, 목판화를 구입한 바도 있어서 쉽게 결정하였다. 아내와 함께 택시에 싣고 와 거실에 놓고 몇 주 동안 눈 맞춤을 하였다. 가족 모두의 공동 감상평으로 눈 내린 삭막한 인왕산인데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포근하게 차오른다고 하였다. 바위틈마다 하나하나 눈을 얹으며 화가는 무슨 상념에 빠졌을까.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현실로 귀환하고 싶었다. 정말 나 자신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었고, 울고 싶도록 깊숙이 파고드는 외로움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미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화가의 말이다.
두 해 전 3박 4일의 일정으로 옛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종주(縱走)를 한 적이 있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증산리로 하산하는 약 35km의 코스를 하염없이 걸었다. 눅진한 안개가 몸을 무겁게 하고,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쳐도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날이 저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둥근 달이 떠오르고, 달그림자에 휘감긴 산봉우리의 장중한 숨결이 피곤한 몸을 어루만졌다.
한 알의 풀씨도 소중히 키우고, 거친 눈보라 폭풍도 기꺼이 안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 의연한 산이 있기에 우리들은 산을 오른다. 비틀린 몸과 마음으로도 산문(山門)에 들어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옮기며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볼 일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